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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으로

등록일 2014-01-17 02:01 게재일 2014-01-1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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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

우리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수많은 모순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가운데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여유도 없이 바쁘게 가족을 부양하고 매일 남과의 갈등으로 세파 속을 헤매게 된다. 인생의 밝은 면이라든가 진리라는 단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허우적 거리듯이 살아간다. 앞날에 대한 전망도 지금의 삶과 마찬가지로 어두울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한 대낮인데도 빛을 느끼지 못하고 희망을 찾으려고 더듬거리면서 헤매고 있다. 이런 것은 지난날의 잘못된 경험으로 인한 선입견에 휩싸여서 전후좌우를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에 밝은 빛인 진리의 등대를 놓쳐버리고, 마치 거센 파도가 넘실거리는 컴컴한 바다 위를 통나무에 매달려서 비명을 지르면서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리라는 환한 빛보다 어두움에 더 친근하거나 숙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있거나, 뭔가가 우리 눈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아집이나 모순된 주장, 살면서 피부로 느껴온 경험 등은 우리의 관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뜨고도 앞을 보지 못한다.

때로 우리는 지구보다 수백 배 더 큰 태양도 작은 손바닥 하나로 눈을 가려 버리거나 외면해 버릴 수 있다. 고개를 돌려 버리면 아무리 좋은 경치나 절세미녀가 있어도 볼 수가 없다. 생활 중에 진리나 정의에 벗어나서 혼란과 어리석음 등 미망에 빠지면 우리는 빛이 비취어도 깨닫지 못하고 그만 어둠에 익숙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는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빛을 등지고 살기 때문이다. 옛날 시골에서 밤에 논둑길을 걸어 갈 때 솔가지 불을 든 사람은 앞에서 걸어간다. 불을 든 자보다 앞에서 걸어가면, 자기의 그림자로 길이 컴컴해져서 발을 헛디딜 가능성이 많아진다.

빛의 속성은 앞장서는 것이다. 빛은 세상 모든 것의 제일 앞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빛을 등지지 않아서 실족하지 않고 빛을 따라갈 수 있다. 어두움은 내 뒤에 있게 된다. 또한 빛은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진해진다.

빛과 어두움이 정면으로 마주보면 어두움은 존재할 수 없다.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어두움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빛은 모든 것을 보여 주면서 알게 해 준다. 자기의 위치와 외형, 주위의 사정과 넓게는 우주와 생명의 경이까지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은 `어둠`이라는 의미가 된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 중에서 최고의 형태는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다. 신비는 만물의 조물주를 느끼게 해 준다. 눈앞에 있는 것을 잘 아는 자나 꾀뚫어 보는 자가 되면 그는 그 끝에 숨어 있는 신비까지를 볼 수 있어서 감격하게 된다. 아무리 많이 알고 재주가 있다고 해도 신비를 모르면 속속들이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깨어 있으면서 빛을 보는 자에게는 현실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경이와 신비가 합해지면 황홀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의 심장은 놀라움으로 쿵쾅 힘차게 뛴다. 그는 살아있다. 정지는 죽은 것이다. 황홀과 경이로 가슴이 뛰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산 삶이 아니다.

빛은 생명과 지혜의 근원이다. 태양이 없다면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 식물들도 태양을 향해 잎을 벌려 기뻐한다. 모두는 같은 빛의 원천아래서 살아간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빛으로 향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연구를 하거나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크게 보면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무지는 빛 속에서도 어둠만 찾게 되지만 진리 쪽으로 바라본다면 흑암 속에서도 빛으로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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