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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화 지체’와 ‘성장의 한계’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최근 ‘문화 지체’와 ‘성장의 한계’라는 개념 탐구에 빠져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용어가 완전히 신개념의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문화 지체’는 미국의 사회학자 W.F.오그번의 1922년 저서 ‘사회변동론’에서 처음 언급한 이론이다. 설명을 살펴보면, 비물질문화가 물질문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물질문화는 주로 과학 기술의 발달을 말하고, 비물질문화는 인간의 생활방식에서부터 각종 제도적인 면, 그리고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까지 아우른다. 쉽게 말하자면, 예를 들어 자동차의 개발과 보급은 자동차공업의 발달과 함께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가는 반면, 자동차와 관련된 우리의 교통 질서의식이나 그에 따른 제도 확립 등이 갖추어지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이러한 문화 지체로 인해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파트라는 주거형태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층간 소음 분쟁도 문화 지체 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이태원참사 역시 문화 지체 현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문화 지체 현상은 인간의 존엄성을 경시하기에 이른 것이다.‘성장의 한계’는 1990년대 일본 유학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당시에는 빗나간 예측에 우울한 예언서 정도로 일축해 버려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최근 원폭문학이나 재난문학 등의 생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성장의 한계’책을 구입해서 다시 읽어보았다. ‘성장의 한계’는 1972년 로마클럽이라는 민간단체가 당시 전 세계를 감싸고 있는 여러 우려되는 상황들을 문제 제기해서 연구한 것으로,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인구 폭발, 식량 생산, 공업화, 환경 문제, 천연자원의 고갈 등의 주제로 인류 위기에 관한 프로젝트 보고서이다.다시 읽어본 ‘성장의 한계’는 놀라울 정도로 이 시대를 예견하고 있어서 나는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더군다나 책이 나온 지 50여 년이 된 이 시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사회와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던 팬데믹을 생각해보면 책의 내용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성장의 한계’의 기준에는 인간의 생태발자국을 측정해서 그것을 지구의 수용능력과 비교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태발자국은 인간에게 자원(곡물, 사료, 목재, 물고기, 도시로 수용된 토지)을 제공하고 지구촌이 배출하는 배기가스(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 면적을 이른다. 그리고 현재 지구의 사용 가능한 면적을 비교했을 때, 인간의 자원 사용량은 지구의 수용 능력보다 20퍼센트를 초과한 상태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너무 많이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즉, 앞으로 인류가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려면 인간 전체의 생태발자국을 줄여야만 하는 것이다. 문화 지체에서 오는 불평등과 갈등을 서서히 해소하고, 지구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뿐인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생각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2022-12-18

뇌 말고 몸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한 달 전, 벼르고 벼르던 스탠딩 책상을 샀다. 최근 들어 30분만 앉아있어도 집중력이 떨어져서 까만 것은 글자고 하얀 것은 종이구나 하는 상태가 되고,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다리도 저리고 허리도 아팠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구매했는데, 서너 시간 지나도 멀쩡하다. 앉아있을 때는 허리가 불편하여 주의가 분산되는데, 서 있을 때는 덜 불편하니 작업 집중력이 더 높아지는 것 같다. 물론 깔창 있는 운동화를 신는다.애니 머피 폴의 책 ‘익스텐드 마인드’를 보니,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미국의 초등학교 교사도 학생들 책상을 스탠딩 책상으로 교체하고 수업 듣는 자세도 편하게 하고 움직일 수 있게 했더니 학생들이 더 집중하고 자신감 있고 생산적으로 변했다고 한다.앉아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것만 작업에 효과적인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일하는 것도 집중력이 증가한다고 한다. 방사선 전문의 제프 피들러 박사는 매일 1만5천 개 사진을 앉은 자세로 검토하다가 사진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 놓고 그 앞에 트레드밀을 설치해서 걸으면서 사진을 보았더니 이상 징후를 더 잘 찾아내게 되었다고 한다. 서 있거나 걸을 때 작업 능률이 오르는 이유는 신체 활동을 할 때 우리의 시각이 더 예민해지기 때문이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루에 한두 시간을 꼭 달린다고 하니, 운동을 한 후에도 창의성이 높아지는 것 같다.제스처는 소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설명하거나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제스처를 사용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말을 더 잘 이해하고, 제스처가 있을 때 한 말을 더 기억하기도 한다. 밀턴 에릭슨이라는 심리 상담사는 내담자의 동작을 은연중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내담자와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어 상담이 잘되었다고 한다.자연의 다양한 색과 형태 역시 창의성에 자극을 준다. 저자는 예술가 잭슨 폴록이 롱아일랜드에 갔다가 위안과 자극을 동시에 받고 바로 그 지역으로 이사 가서 걸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사례를 소개해준다. 자연은 우리의 인지 부담을 줄여주어 창의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공간 역시 창의성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연극 수업을 받으러 갈 때 매시간 책상과 의자 배치가 달라서 수업에 관심이 더 생기고 다음 수업도 기대하게 되었던 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셈이다. 국립도서관에서 한두 시간만 있어도 두통을 느꼈는데, 도서관 리모델링 후에는 서너 시간 있어도 컨디션이 좋았던 것 역시 이런 맥락일 것이다.생각은 뇌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라면서, 움직여야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하는 저자의 말을 듣다 보니,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온종일 교실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우리나라 수험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교육 방식도 말로만 하거나 기껏해야 영상 자료를 활용할 뿐이다. 교실 모양도 천편일률적이다. 손과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많이 하고, 공간에도 다양하게 변화를 주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한창 성장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학생을 움직이게 하라.

2022-12-18

당심과 민심 사이, 양당제의 그늘

김진국 고문 국민의힘이 전당대회 규칙을 놓고, 논란이다. 당 대표를 선출하는데 일반 시민 여론을 얼마나 반영하느냐가 문제다. 현행 당헌 26조는 ‘선거인단의 유효투표 결과를 70%, 여론조사 결과를 30% 반영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여론조사 비중을 10%로 줄이거나 없애자는 것이다. 일반 시민의 생각과 상관없이 당원이 원하는 대표를 뽑자는 주장이다.정당은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이다. 일반 사회단체도 회원들의 의견으로 대표를 뽑는다. 그렇게 보면 정당도 당원의 뜻을 모아 대표를 선출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여론조사를 포함한 건 선거 때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선거에서 이기는 게 정당의 목표다.물론 당원이 선택한 사람은 중도층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거나, 국민 여론을 반영하면 중도층의 지지를 더 끌어온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당원 투표만 하면 아무래도 후보들이 당원들이 좋아할 주장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당의 노선이 강성으로 흐를 수 있다.국민의힘이나 민주당 모두 당원 투표로만 대표를 선출해왔다. 여기에 여론조사를 처음 도입한 건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이다. 2004년 탄핵과 차떼기 후폭풍으로 총선에서 참패한 뒤 당원 외에 국민여론조사 50%를 반영하도록 바꾸고, 2년 뒤 30%로 줄인 뒤 지금까지 유지했다. 민주당은 2013년에야 국민여론조사를 도입했다. 이재명 대표를 선출한 지난 전당대회를 앞두고도 여론조사 비중이 논란이었다.“경기 도중 골대를 옮기느냐”는 지적이 옳다. 경기 규칙은 여유 있게 미리 고쳐야 공정하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는 물론 정당 내부 선거도 초읽기로 규정을 고치는 나쁜 습관이 우리 정치권에 있다. 후보들 윤곽이 드러난 뒤 규칙을 바꾸는 건 위인설법(爲人設法)이 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도 선거 막판에 후보자에 맞춰 게리맨더링 하는 게 버릇처럼 됐다.굳이 내년 3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표 선출 규칙을 바꾸려는 국민의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답답한 심정은 이해는 간다. 미디어토마토가 지난주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 적합도를 물은 결과 유승민 전 의원이 37.5%로 압도적 1등이고, 안철수 의원 10.2%, 나경원 전 의원 9.3% 순으로 나왔다. 그런데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나 전 의원이 18.0%, 한동훈 법무부 장관 16.0%,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14.2%, 안철수 의원 13.6%, 김기현 의원 11.0%였고, 유 전 의원은 8.7%로 6등이다. 반대로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유 전 의원이 60.0%로 압도적 1위다. 다른 조사도 대체로 비슷하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중도층 확장도 좋고, 민심 반영도 필요하다. 특히 선거에 나갈 후보는 중도층 확장성이 당락을 가른다. 그렇지만 당원에게는 비호감 대상이면서 경쟁 정당 지지층이 열광해 당 대표가 된다면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극심한 진영정치, 팬덤 정치, 증오 정치가 낳은 부산물이다.국민의힘 안에도 문제가 많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제껏 여야 협치는커녕 당내 갈등도 계속되고 있다. 잊을만하면 ‘윤핵관’ 논란이 반복된다. 이러다가는 거수기가 되기에 십상이다. 차기 정권 재창출을 위한 기반은 어림도 없다. 당심-민심 논란도 국민의 마음을 얻을 카리스마 있는 후보가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여론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은 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당원들이 모인 그런 정당에서 대표가 되려 할까. 왜 정치적 견해가 같은 동지들과 따로 정당을 만들지 않을까. 문제는 한국에서 양대 정당 이외에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점이다. 제3정당을 만들어 성공한 예가 없다. 유 전 의원도 경험이 있다. 제3정당은 고생길이다. 선거제도를 포함해 모든 규정이 양대 정당에 지나치게 유리하다.정상적인 정치에서 당심과 민심이 다르면 다른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당도 갈등과 분열 요인을 안고 있다. 억지로 양당으로 묶는 건 부당한 특혜다. 정치적 견해에 따라 정당을 만들고, 연대할 수 있도록 선거법부터 고쳐야 한다. 정치적 자유의 기본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고문

2022-12-18

나에게도 감동 준 포르투갈 대통령의 칭찬

김하수청도 군수 2022 카타르 월드컵의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한국팀의 8강 진출이 아쉽게도 좌절되었다.그러나 조별 리그에서 보여준 한국팀의 기량과 전술, 투혼은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ESPN을 비롯한 유수의 세계적인 스포츠 매체도 매우 관심 있게 다루었다.지난달 28일 열린 한국-가나 경기는 비록 우리가 2대3으로 아깝게 지긴 했지만, 내용에는 카타르 월드컵 조별 리그 최고의 게임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특히 한국의 극적인 16강 진출을 확정 지은 지난 3일의 포르투갈전은 믿기 어려운 기적의 드라마로 평가되고 있다.비록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훌륭한 경기력과 투혼을 보여 준 한국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한국이 포르투갈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16강 진출을 확정하자 지켜보던 축구팬들은 물론 전 국민이 기뻐하고 환호했으며 윤석열 대통령도 직접 축전을 전하며 대통령 휘장이 선명한 축하와 응원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기까지 했다.한 마디로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축하하고 기뻐한 참으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이러한 가운데 외신은 짤막하게 새로운 소식 하나를 전했다.포르투갈 언론 코레이오 다 마냐와 마이스푸테볼 등에 따르면 한국-포르투갈전이 끝난 직후 드소자 대통령은 한국팀의 벤투 감독에게 “포르투갈이 이겼으면 더 좋았겠지만 유능한 벤투 감독이 한국팀을 잘 이끈 결과다”며 “우리는 한국보다 좋은 전력을 갖췄지만, 오늘 경기는 한국이 더 잘했고 나는 벤투를 좋아한다”고 자국 출신의 한국 대표팀 감독이 16강 진출한 것을 기꺼이 축하하고 나섰다.벤투 감독은 알려진 것처럼 현역 시절에는 포르투갈의 국가대표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하기도 했던 포르투갈 출신 감독이다.이러한 외신의 짤막한 보도를 접하며 나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일국의 대통령이 자국팀에 패배를 안기며 한국의 16강 진출을 이끈 벤투 감독을 향해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다니.이처럼 공정한 경기 규칙에 의해 치러진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며 비록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해도 승자를 축하해 주는 스포츠 정신은 참으로 위대하다.여기에서 정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국 출신 지도자가 경쟁국의 감독이 되어 자국 대표팀에 패배를 안겼음에도 축하의 메시지를 보낸 드소자 포르투갈 대통령의 마음가짐이다.어찌 보면 이렇게 거창하게 찬사를 보낼 일이 아닌지도 몰라도 그의 솔직한 축하 메시지에 나는 감동 받을 수밖에 없다.우리는 살면서 자연환경이나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를 통해 배움과 깨달음을 얻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지혜를 구하고 영감을 얻기도 하는데 포르투갈의 드소자 대통령은 그의 짧은 메시지 하나로 한국의 지방 소도시 군수의 마음을 설레게 한 것처럼 진실함은 모든 것을 넘어선다.속담에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가 있다.천냥은 현재 가치로 5천만원에서 7천만원 상당이라 한다. 이처럼 큰 금액이라도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지만, 보통은 말을 잘못하거나 같은 말을 해도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어서 손해를 본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상한 현실에 살고 있다.내가 전하는 말 한 마디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우리의 삶도 다양하고 치열한 경쟁의 상황에 놓일 때가 잦은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오는 결과에 대하여 겸허히 받아들이고 승자를 축하해 주는 문화가 확산하기를 바라본다.승자는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는 승자를 축하하며 각각의 요인을 분석하고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 삶의 질도 더 높아지고 따뜻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긴장과 흥미를 더해가는 2022 카타르 월드컵 경기의 와중에 들려온 먼 나라 대통령의 메시지를 통해 작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2022-12-18

사그랑주머니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시로 쓰는 자서전’ 수업할 때였다. 어르신들의 삶을 이야기로 나누고 그것을 받아 적으니 모두 시가 되었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몇 부분으로 나누어 질문하고 어르신들의 생각을 끌어냈다. 결혼할 때는 어떠했는지, 그땐 그랬지요, 라고 맞장구를 쳐 드렸다. 아이들 키울 때는 어떠했는지? 그래도 그때가 제일 좋았다며 어르신들은 이미 추억 속에 가 있었다. 금방 웃으시다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도 있다며 시무룩해하셨다. 끝없이 달려 나오는 이야기를 녹음하고 기뻤을 때는 기쁜 표정으로 추임새를 넣었다.그날은 사진을 보고 시를 쓰는 수업이었다. 어르신들이 갖고 온 사진은 다들 꽃 속에 찍은 것들이다. 예쁘게 차려입은 옷은 봄 산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같은데, 표정은 어둑해 보였다. 가물가물한 추억이 된 사진을 보고 오늘에서야 어르신들이 환하게 웃는다. 언제, 어디를 누구와 갔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마다 사진에 관한 추억을 반죽하고 부풀리느라 교실이 시끌벅적했다.“옜다, 선물이다.”“니, 엄마 보고 싶제?, “니, 엄마도 있고, 나도 있다.”엄마 친구가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설악산 어느 바위 뒤에서 세 명이 찍은 사진이었다. 꽤 오래된 사진 속에 젊은 엄마가 보였다. 한 장의 사진은 추억으로 가는 빗장을 열어주었다.생각해 보니 젊은 엄마는 싸움을 잘했다. 산비탈 돌짝밭에서는 크고 작은 돌멩이와 숨바꼭질하듯 싸우고 동구 밖에서는 논에 물 대는 일로 이웃과 자주 싸웠다. 옆집 논에서 물길을 돌려야 할 때는 아버지를 앞세우고 뒤에서 요목조목 큰 소리로 따졌다. 그 무엇보다 엄마가 제일 잘하는 것은 자식들을 위한 모든 싸움이었다.엄마 주머니에는 항상 먹을 것이 있었다. 산골 마을에 어스름이 내리면 엄마는 대문을 들어서고 수돗가에 하루치 노동을 부려놓았다. 우리는 엄마 곁에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의 양쪽 주머니에는 이것저것 먹을 것이 나왔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아무것도 없는 날은 부엌에서 눈 깜박할 사이 주전부리를 만들어 냈다. 이순혜 수필가 사진 속의 엄마를 뚫어지게 보았다. 사진 너머 있는 엄마의 무심한 표정에 자꾸 눈길이 갔다. 힘든 농사일에서 잠시 벗어나 친구들과 어울려 나들이해서 좋을 텐데, 여행이 즐겁지 않았는지. 엄마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만약 단 몇 초라도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이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갑자기 교실이 시끌벅적거린다. 모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한 사람씩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정했다. 흑백에서 컬러사진까지 다양했다. 이제는 그때를 생각해보자고 했다. 엄마 친구도 설악산의 어느 바위 사진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엄마와 같이 죽도시장에서 옷도 사고 신발도 샀다고 했다. 설악산의 커다란 바위를 보았던 그날은 힘들게 산에 올랐지만 힘들었던 만큼 많은 것을 보았단다. 마치 햇살이 따스한 고향 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듯했다. 손에는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에서 구입한 ‘효도 관광’이라고 쓴 등 긁개를 들고서.아마도 그날은 강원도 어떤 간식을 먹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고이 싸 온 간식을 우리에게 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의 부른 배를 두드렸을지도 모를 일이다.그날의 기억은 이제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나는 사진 속 엄마 옷 주머니를 훑어보았다. 아직은 밋밋하지만,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엄마의 사랑이 불룩했을 것이다.엄마는 그랬다.

2022-12-18

겨울철 우울증 주의보

사공정규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고운 단풍이 낙엽이 되고, 상쾌한 가을 바람 스산한 바람 되는 늦가을을 넘어 일조량이 급격히 줄어 어둡고 추운 겨울로 계절이 바뀔 때 우리는 마음과 몸의 변화를 겪곤 한다.떨어진 낙엽에서 감성적인 분위기를 넘어 생명의 쇠진함을 느끼며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다 못해 울적해진다.만사가 귀찮아지고 무기력해지며 자도자도 피곤하며 단 것이 자꾸 당기고 식욕은 부쩍 늘고 뱃살도 는다.이런 증상들은 겨울의 문턱에 자리한 늦가을에 시작하여 겨울에 많이 나타난다.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인의 약 15%가 겨울철이 되면 기분이 울적해짐을 경험하는 일시적인 우울감을 보이고, 2~3%는 소위 ‘겨울철 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나타났다.특정 계절에 반복되는 우울증, 소위 계절을 앓는 사람들, 이를 ‘계절성 우울증’이라고 한다. 계절성 우울증 중 가장 흔하고 심한 소위 ‘겨울철 우울증’은 남위도 지역보다 북위도 지역에 더 많으며 11월과 12월에 가장 악화한다. 또한, 여성이 전체의 60∼90%를 차지할 정도로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특히, 20∼40대 여성에서 계절성 감정 변화가 더 크게 나타난다고 한다.겨울철 우울증의 원인은 복합적일 수 있으나, 현재까지 밝혀진 주요 생물학적 원인은 다음과 같다.첫 번째는 겨울철에 일조량이 줄어 비타민D 합성과 세로토닌 생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햇빛을 통해 비타민 D를 합성하며 비타민 D는 행복한 감정과 긍정적 사고를 하게 해주는 세로토닌이라는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촉진한다. 그런데 일조량이 줄어 비타민 D가 부족해지면 세로토닌 결핍이 일어나 우울감을 경험하게 된다. 두 번째는 겨울철에 낮이 짧고 밤이 길어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이 과다 분비돼 수면 욕구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겨울철 우울증은 전형적인 우울증과 다른 증상 양상을 보인다. 전형적인 우울증의 증상은 우울한 기분, 흥미나 즐거움의 상실, 정신운동성 초조, 식욕저하, 체중감소, 불면을 나타낸다. 그러나 겨울철 우울증의 증상은 우울한 기분보다 무기력감과 피로감이 더 특징적이다. 정신운동성 초조보다는 정신운동성 지체가 심하여 팔다리가 마치 납처럼 무거워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고 식욕이 늘어나는 기현상(奇現象)을 경험한다. 특히 달거나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잠들기 전에 식욕 증가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에 밤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체중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겨울철 우울증의 경우, 수면에 관여하는 멜라토닌이 증가하기 때문에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고 온종일 자고 싶다. 아무리 잠을 많이 자도 피로는 풀리지 않는다.겨울철 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햇볕 쬐기와 운동이다. 첫째, 겨울철 우울증의 원인이 일조량 부족에서 오기 때문에 답은 햇빛이다. 온몸으로 햇빛을 맞이하자. 햇볕을 많이 쬐면 망막 속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뇌를 자극해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한다.매일 낮 시간에 30분 이상 햇볕을 쬐고 비타민 D를 복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비타민D는 세로토닌을 많이 만들게 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분비를 억제한다.다만, 비타민D의 복용은 과잉 섭취에 유의해야 한다.둘째, 우울할 때는 몸을 움직이자. 우울할 때 우울한 기분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우울할 때 몸을 움직이는 운동은 스트레스를 경감시켜주고 세로토닌 등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을 활성화해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연구에 의하면, 걷기 시작 5분 후부터 세로토닌이 분비되기 시작해 15분 후에는 최고도에 다다른다고 한다.걷기 운동을 할 때는 평소보다 보폭을 넓히고 조금 빠르게 걷는 것이 좋다. 이왕이면 햇볕을 쬐며 걸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춥다고 실내에서 웅크리지 말고 밖으로 나가 움직이는 시간을 늘릴수록 우울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고 운동을 통해 칼로리를 소모하면 겨울철 우울증의 폭식으로 인한 체중 증가도 예방할 수 있다.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누구나 쉽게 겪을 수 있지만, 때로는 감기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이어지기도 하듯 감기라고 마냥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겨울철이 되면 감기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다. 마찬가지로 겨울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도 많아진다. 감기에 걸린 사람이 스스로 병원을 찾듯, 만약 겨울철 우울증 증상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줄 정도로 심하거나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정신의학적 치료를 고려해야 한다.우울증을 방치하면 뇌의 신경전달물질 등에 생물학적 변화를 초래해 후에 심한 우울증에 걸릴 위험을 높이고, 우울증을 앓는 동안에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심지어 자살 등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정신의학적 치료가 필요하다.겨울철 우울증의 치료방법으로는 일반적인 실내조명보다 약 20배 정도 강한 밝기인 1만룩스(lux) 정도의 광선을 쪼여주는 광선치료와 선택적 세로토닌재 흡수억제제와 같은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하는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약물치료, 부정적인 인지왜곡을 긍정적인 인지체계로 바꾸고 활동을 많이 하도록 해주는 인지행동치료 등이 있다.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은 일조량이 적어 어둡고 추운 날씨지만 마음만은 밝고 따뜻한 계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2022-12-18

의대 열풍, 문제는 없는가?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금년도 대학입학 수학능력 시험(수능) 채점 결과 만점자 3명이 나왔고 이 지역 포항의 고교에서도 만점자가 나왔다고 한다.그런데 이 만점자 전원이 의대를 지원하고 합격했다는 뉴스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의학이 중요하지 않다는건 아니지만 의대는 물론 치대, 수의대의 약진은 대학 전공의 선택이 점점 더 현실적으로만 되어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는 이과는 물리, 문과는 경제 등이 인기가 있었다. 물리는 순수학문이고 경제도 취업보다는 정책적으로 인기를 끄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과는 의학, 문과는 경영이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졸업 후 취업과 금전적 수입과 관련된 현실적 전공 선택이며 이러한 현상이 점점 더 심화하고 있다. 대학에 상관없이 의대 들어가기가 최우수 대학들의 이공계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하니 참으로 의대 열풍의 시대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의대생의 실력은 대학을 막론하고 최상위권 학생들이 선택하는 전공이다. 의과대학을 향한 학생들의 열기는 무척이나 뜨겁다.이러한 와중에 포스텍, 카이스트 등 연구중심 과학기술대학의 ‘의과학자 양성 연구형 의과 대학’설립에 의사협회가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서고 있다. 결국 밥그릇 싸움이라고 비추어진다.의대 열풍이나 연구형 의대 설립 반대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물리나 화학 같은 순수학문보다 의대를 선호하는 것도 그리고 의사협회가 연구형 의대 설립을 반대하는 것 모두 인류를 위한 학문의 발전보다는 금전적 이득의 현실적 이유일 것이다.그런데 한편 의대 광풍의 사회문제도 한번 짚어볼 만하다. 요즘 이공계 대학의 저학년에서 휴학하고 의대 진학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대학들은 소위 “반수”를 하는 친구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이공계 학생들은 친구들의 의대 입시 공부로 친구 만나기도 꺼린다는 소문이다. 의대에 최상위권 학생이 쏠리는 현상은 그러한 배경에 안정된 수입이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의대 내의 전공 선택도 수입이 절대적 기준이 되면서 의과학을 선택하는 의대생은 소수이다. 많은 수입이 보장되는 의대 내의 세부 전공에 지망생이 압도적으로 몰리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가운데 의학계가 의과학자 육성 의대 설립을 반대하고 있다. 환자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는 수입이 보장되는 전공으로 몰리는 것은 장기적 의학발전 관점에서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현재 병을 치료하는 ‘수만 가지 의약품 중 한국이 개발한 건 하나도 없다’라고 한다. 한국의 의사들은 다른 나라가 개발한 약을 처방해 주고 수입을 올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그 약을 개발하는 일은 방치되고 있다.의대와 약대가 함께 관련된 문제이겠지만 한국의 의사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신약개발 같은 분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좀 더 많아져야 한다.미국에는 의대 출신으로 신약개발에 종사하는 ‘의사과학자’가 많다고 한다. 의사과학자는 의사이면서 과학연구를 하는 과학자이다.포스텍, 카이스트 중심으로 의과학자 양성 방안으로 공과대가 주도하는 연구중심 의대 신설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우리는 지지해야 한다. 미국은 연구중심 의대를 별도로 운영한다. 이런 의대들은 공과대와 협업하거나 아예 공과대가 의대를 설치해서 신약개발이나 바이오산업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의료계가 의과학자 육성 의과대학 설립을 줄기차게 반대하자 의사과학자들이 임상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법적 조항을 마련하겠다는 의견이 국회에서 나오기까지 했다.“의사과학자를 육성하지 않으면 세계적인 바이오 헬스 산업의 주도권을 잃게 되고 새로운 국가 동력을 잃게 된다. 연구중심 의과대학이 설립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달라”라는 지역 국회의원의 호소와 함께, “진료하는 임상의와 연구하는 의사과학자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개원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다.최근 카이스트 총장 역시 “의사과학자는 바이오 신약 부분의 핵심이다. 체계적인 양성이 필요하다”면서 “카이스트와 포스텍은 (연구중심의대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전문의가 될 수 없으며 임상으로 가기도 굉장히 어렵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해서도 법적 장치를 마련해 예방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최근 만나본 한 의사는 “믿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연구형 의대 설립에 반대를 표시했다. 의대 열풍은 그 열풍이 단순히 개인의 수입과 영달이 모티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을 구한다는 사명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신약은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의대 열풍’은 그 자체가 이공계의 다른 학문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의과학 발전으로 보완될 수 있다. 의학계의 대승적인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2022-12-18

MZ세대와 정치

우정구 논설위원 MZ세대를 제대로 알려면 플렉스 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미닝아웃 소비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영어의 플레스(Flex)는 몸의 근육 등을 푼다는 의미다.MZ세대에게 플렉스는 몸이 아닌 돈이다. 돈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행동 등을 플렉스 문화라 일컫는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젊은세대의 플렉스 문화가 필요 이상의 돈을 쓰며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뜻하는 사치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한 트렌드 분석가는 그의 저서에서 밀레니엄 세대에 대해 “있어 보이기 위해 비싼 물건을 사는 것보단 자기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더 주목한다”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른바 미닝아웃(Meaning Out) 소비 형태다. 의미를 뜻하는 meaning과 드러낸다는 coming out의 합성어인 미닝아웃 소비는 제품이나 서비스 가격이 기능과 품질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한다면 제품을 구매하는 행위다. 소비 행위를 신념 표출의 수단으로 삼는 거와 같다.언제부턴가 MZ 세대는 고가명품 브랜드업계에서도 큰손으로 등장했다. 가격을 올려도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가 되니 가격을 덧붙여 명품을 되파는 리셀러까지 나타났다.MZ세대에게 소비는 가치에 대한 투자 개념이다. 미래보다는 현재에, 가격보다는 취향을 먼저 따지는 세대다. 휴대폰, 인터넷 등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그들에게 민주화와 산업화로 대표되는 정치 구호는 무의미하다.이미 잘사는 나라에 태어난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청년들이 어떻게 먹고 잘사느냐 하는 문제다.정치가 MZ세대에게 인기가 있으려면 MZ세대와 마음이 통할 수 있는 공감 능력부터 갖추는 것이 순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2-12-18

수사(修辭) 과잉의 나라

김규종 경북대 교수 늦게 시작한 겨울이 조금씩 겨울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겨울이 겨울답지 아니하여 온화하면 이듬해 농사와 어로(漁撈)에 애로가 생기기 마련이다. 차고 넘치는 벌레들의 향연과 은성(殷盛)한 축제도 그렇고 해양 생태계 역시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35세 청년 공자의 명언 ‘군군 신신 부부 자자’가 떠오른다. 제(齊) 경공(景公)이 정사(政事)에 관해 물었을 때 당대 최고 천재 중니(仲尼)의 답변이 그것이었다.일기 예보에 관한 일간지들의 협박성 보도를 보자. “일요일 ‘최강한파’ 닥친다…아침 체감기온 영하 21도.” 12월 18일 서울 아침 최저기온과 체감온도는 각각 영하 14도와 영하 21도로 예보된다. 여기서 기자의 주안점은 ‘최강한파’다. 최강(最强)이란 말은 더는 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기자의 머릿속에 자리한 최강의 한파가 영하 14도에 체감온도 21도라는 얘기다. 정말 그것이 지구와 대한민국의 최강한파인가?!1805년 출간된 현동 정동유의 ‘주영편’에 따르면, 그때까지 조선에는 쇠바늘이 없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글이 유씨(兪氏) 부인의 ‘조침문’이다. 청나라 사신으로 간 시삼촌에게 바늘을 얻어 27년을 쓰다가 바늘이 부러지는 바람에 애통한 심사를 수필로 풀어낸 것이 ‘조침문’이다. 사대부 집안 처자(妻子)야 청국의 쇠바늘을 얻어쓸 수 있었으나, 민초(民草) 아낙들은 대바늘로 옷과 이불을 꿰맸을 터 겨울의 우심(尤甚)한 추위를 어찌 견뎠을까?!4∼50년 전 서울 최저기온 14∼5도는 연례행사였다. 그 정도 추위는 당연했고, 석유-가스보일러 따위는 언감생심이었다. 문풍지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이닥쳤고, 윗목에서는 아버지의 자리끼가 쩍쩍 얼어붙었다. 연탄 한두 장으로 하룻밤 나는 게 예사였고, 식전 댓바람에 세수할라치면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었다. 그때 기자들은 ‘최강한파’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첨단의 창호와 난방으로 한겨울 실내온도 25∼6도에 딸기와 열대과일이 넘쳐나는 시절에 ‘최강한파’ 운운하니 기가 막힌다. 기후 온난화로 밋밋하고 맹숭맹숭한 겨울을 보내는 판국에 조금 내려간 기온을 두고 ‘최강한파’라고 호들갑 떤다. 여기에 맞장구치듯 날씨를 보도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감기 조심해라, 건강 유의해라, 하면서 어린애 다루듯 시청자를 희롱한다.3주 연속 베를린의 최저기온이 영하 30도, 최고기온이 영하 18도였을 때 최강이라 과장한 도이칠란트 언론사를 본 적 없고, 최저기온 영하 20도인 흑룡강(黑龍江) 추위를 중국 기자들이 ‘최강한파’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없다. 평상시 영하 40도 최저기온이 영하 28도로 올라가자 ‘따뜻한 겨울’이라 서운해하는 러시아인들의 표정은 환하고 밝았다. 고작 영하 14도 가지고 숱한 언론사 기자들이 합창하는 ‘최강한파’ 놀음에서 벗어났으면 한다.수사의 과잉은 언어의 과잉을 낳고, 언어의 과잉은 행동의 과잉을 낳는다. 필요 이상의 꾸밈과 언어와 행동은 사회 구성원들의 불화와 충돌을 초래한다. 적절한 기준선을 지키는 언어와 행동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규준(規準)으로 자리했으면 한다.

2022-12-18

닭똥집의 고장

우정구 논설위원 대구는 치킨산업으로 전국적 명성이 있다. 멕시카나, 교촌, 호식이두마리, 땅땅치킨 같은 전국 브랜드가 대구가 고향이다. 외지에서 대구를 ‘치킨 성지’로 부르는 까닭도 수많은 치킨 프랜차이즈가 대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한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에 대구서는 치맥페스티벌이 열린다. 폭염도시 대구와 치킨이 잘 어울려 만들어진 축제다. 행사 기간 100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도 좋다.닭의 모래주머니로 요리한 속칭 닭똥집 전문점이 대구에서만 유독 발달한 것도 대구 치킨산업과는 무관한 일이 아닐 것이다.대구 동구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은 그 역사가 50년 된다. 다른 곳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닭똥집 요리를 대구서는 수십업소가 모여 시장을 이룬다.닭똥집은 막창과 납작만두, 따로국밥 등과 같이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1970년대 평화시장 앞에 형성된 인력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술로 아쉬움을 달랠 때, 어느 부부가 닭을 손질하고 난 뒤 남은 닭똥집을 바삭 튀겨 안주로 내놓은 게 시발이 됐다고 한다.노동자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 저렴하고 푸짐하게 내놓았으니 점차 인기가 높아졌다. 닭똥집은 닭의 모래주머니를 이르는 말. 닭은 이가 없어 섭취한 먹이 중 단단한 것은 모래주머니에서 소화시킨다. 모래주머니는 근육이 잘 발달돼 지방이 거의 없다. 좋은 단백질 공급원도 된다. 맛도 담백하고 쫄깃해 한번 맛을 본 사람은 다시 찾게 된다.대구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이 농림부 주최의 외식업선도지구 경진대회에서 최고상인 최우수 외식거리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치킨 성지’ 대구의 명성을 또한번 알린 쾌거다./우정구(논설위원)

2022-12-15

‘윗돌 빼 아랫돌 괴기’ 인구 대책

홍석봉 정치에디터 비관적인 인구 전망이 쏟아졌다. 골드만삭스는 2050년엔 한국이 인니와 나이지리아에 추월당하고 세계 15위권 밖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전망했다.CNN은 한국이 지난 16년 간 260조 원을 인구정책에 쏟아붓고도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저출산·고령화에 극심한 인구 유출로 지방은 인구소멸 위기다. 더 좋은 교육과 직장을 찾는 젊은 층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젊은 인구 유출은 지방 붕괴를 가속화시킨다. 아이는 놓지 않는데 빠져나가는 인구가 많다보니 지방은 노인 왕국이 됐다. 그냥 둘 수는 없고 마땅한 방법도 없다. 지자체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경북의 시군 인구가 50만 명, 10만 명의 벽이 붕괴되고 5만 선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저출산·고령화의 수렁에 빠진 한국의 현주소다. 지자체의 인구늘리기 운동이 거세다. 현 인구를 지키기 위한 인구 사수 운동이다.인구감소는 예산과 행정기구 축소로 이어진다. 지역경제와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인구늘리기는 지자체의 숙명이다. 지자체는 눈물겨운 노력을 한다.봉화군이 인구 3만 명 사수를 위해 ‘봉화사랑 주소갖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10만 명이 넘던 인구가 저출산·고령화로 3만200명까지 줄었다. 인구 3만 명 선도 간당간당한다. 봉화군은 공무원과 유관기관, 기업체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인구늘리기 운동을 시작했다.지난해 50만 명 선이 무너진 포항시도 인구 늘리기에 나섰지만 별 효과가 없다. 주소 이전 지원금, 근로자 이주정착금 등을 내세웠지만, 터진 둑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인구 50만 명 이상 대도시의 행정 특례도 제외될 처지다.행정권한이 축소되고 남·북구청은 폐지위기다. 경찰서와 소방서, 보건소도 1개로 준다. 기업 유치를 통한 일자리 창출 등 인구 늘리기 방안을 찾고 있지만 효과는 신통찮다.인구늘리기 운동이 경북 대부분 시군의 연례행사가 됐다. 없던 사람이 갑자기 불쑥 생길 리가 없다. 결국 옆집 인구를 빼온다. 그러다가 인근 지자체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인근 도시로 출퇴근 인구가 많은 대구는 주 타깃이다. 하지만 그 때뿐이다. 지자체의 인구늘리기가 ‘윗돌 빼 아랫돌 괴기’ 식의 임시방편에 그치고 있다.온갖 묘안을 짜내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다. 청송군은 기피시설인 교정시설 유치까지 내놓았다.지자체가 ‘생활인구’에 주목하고 있다. 생활인구란 특정 지역을 방문해 체류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도시와 농어촌 양쪽에 거점을 두고 생활하는 ‘5도2촌’같은 생활 방식을 인정하고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을 같은 주민으로 보자는 것이다. 관련 특별법도 내년부터 시행된다.충북 옥천군은 타 지역 거주자에게 디지털 주민증을 발행하고 숙박과 관광지 이용 시 할인 혜택을 준다. 두 달 만에 온라인 주민 1만3천400여 명이 등록했다. 가능성이 엿보인다.내년 시행하는 ‘고향사랑기부제’도 기대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격인 인구 대책, 해결책을 찾는 지자체의 도전은 끝이 없다.

2022-12-15

민노총의 정체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한다. 자본가는 생산원가의 절감을 통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려 하고, 노동자는 여유롭고 품위 있는 생활을 위하여 보다 나은 근로 조건을 원한다. 그래서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는 임금수준, 노동시간, 노동강도, 노동조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마찰과 대립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갑의 위치에 있는 고용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성된 것이 노동조합이고, 국가에서도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같은 권리를 법제화 하고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1945년 좌파계열 운동가들과 조선공산당 박헌영 등의 후원으로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우파계열로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명예총재로 하고 유진산, 전진한, 김두한 등을 중심으로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노총)가 출범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좌파 불법화에 따라 1950년 강제해산 당했으나 대한노총은 1960년까지 존속했다. 5·16 이후 군사정권은 노동조합 모두를 불법으로 간주하여 대한노총 역시 강제해산 되었다가 산별노조 정책에 따라 한국노총이란 이름으로 재결성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1995년 11월 11일에 창립했다. 창립 당시에는 비합법 조직이었으나 1997년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합법적인 조직이 됐다. 그러나 민노총의 그간 행적은 순수한 노조활동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우리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하고 제민주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며….’라고 강령에도 밝혔듯이 노동운동보다는 한미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국보법 폐지, 국정원 해산,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등 정치세력으로서의 활동에 치중해왔다.민노총을 이끌고 있는 주체가 경기동부연합 출신이라는 점도 그들의 지향점이 어디인가를 말해준다. 경기동부연합은 1980년대 중반 형성된 NL(민족해방파)계열 중에서도 북한 주체사상을 가장 신봉하는 친북단체이다. 이 조직의 핵심 세력은 직접 북한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다가 해체된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회 출신이고, 2013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징역 8년 형을 받고 복역한 전 통합진보당국회의원 이석기가 그 위원장이었다. 민노총 홈페이지에는 북한의 조선직업총동맹중앙위원회에서 보낸 문서가 버젓이 올라와 있다. 내용인즉, “미국과 남조선의 윤석열보수집권세력은 이 시각에도 하늘과 땅, 바다에서 각종 명목의 침략전쟁연습을 광란적으로 벌려놓고 있으며 이제 얼마 후에는 북침을 겨냥한 대규모합동군사연습을 강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온 겨레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내는 내외 반통일세력의 이러한 대결망동을 단호히 짓뭉개버려야 합니다.” 이 모든 정황들이 민노총의 정체를 드러내는 게 아니고 뭔가.바람직한 노동운동이란 기업의 발전과 융성을 기반으로 노동자들의 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일 터이다. 기업과 나라를 궁지로 몰아넣는 불법파업을 근절하는 것이 결국 노동자들을 위하는 일이다.

2022-12-15

한파가 밀려오면

윤영대수필가 이번 주,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우리의 일상이 조심스러워진다. 기상청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에 한파 특보를 발령하여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이번 주말 서울이 영하10도 가까이 되는 등 올겨울 ‘최강 추위’가 찾아올 것이라는 예보다. 다음 주 초에는 더 기온이 낮아지고 서해안과 제주에서는 대설특보가 내려지고 있다. 대설주의보는 24시간 내에 눈이 5cm 이상 쌓일 것으로 예측될 때 내려지고, 대설경보는 20cm 이상일 때이다. 이보다 앞서 최악의 ‘겨울 황사’가 찾아왔었다. 이 ‘봄의 불청객’이 한겨울에 찾아온 것은 내몽골 고원의 건조한 날씨 탓이라고 하니 눈이 내려 말끔히 씻어주면 좋겠다.한파가 닥치면 심뇌혈관, 심근경색 등 고혈압, 고지열증에 근거한 환자들이 많이 발생할 수 있으니 체온 유지를 위한 운동을 꾸준히 하여야 한다.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3년, 아직도 그 위험이 사라지지 않고 또다시 전염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만큼 이번 한파를 잘 견디어나가 사회의 안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파가 몰려오면 흔히 동상이나 저체온증이 우려되며 추위에 얼어서 피부 손상이 생기는 동창(凍瘡) 등의 한랭 질환도 염려해야 한다. 산업현장에서도 고위험 상태의 사고가 발생하기 쉬우므로 야외작업 시에는 더욱 주의가 필요하게 된다. 겨울이면 걱정되는 것은 수도관 동파이다. 시골집 수도계량기도 잘 덮어주어야겠다.한파가 밀려오면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게 이런저런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므로 이들에 대한 한파 대응책이 필요하다. 먼저 난방비의 부족으로 인한 연탄수급이 문제가 되는 등 안타까움이 있는 만큼 각 지방자치단체와 봉사단체는 취약가구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한 한파 대응 물품 지원사업을 마련하고 있다.또 요즈음 경제적 한파도 문제다. 코로나의 장기화 등에 따른 고용 한파로 인해 일자리 부족과 얼어붙은 노동시장으로 청년들이 느끼는 경제적 고통이 최고치를 기록하며 취업률 감소로 악화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는 등 경제적 한파를 맞고 있다고 하니 이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MZ 세대는 삶이 고되더라도 비관하지 말고 생명이 움트는 봄을 기다려 보자.우리나라 겨울 날씨의 특징 중 하나가 삼한사온이다. 사흘 춥고 나흘 따뜻해지며 반복되는 시베리아 기단의 계절 특성도 이번 한파에는 ‘삼한’이 조금 길어질 것이라는 예보다. 북극에서 발생한 이동성 고기압의 차가운 기운이 남하하면 ‘삼한’이 되었다가 동쪽으로 이동해서 우리나라를 덮게 되면 바람도 약해지고 따뜻해지는 ‘사온’이 되는데 최근 경향으로는 이러한 현상이 불규칙해진다는 관측도 있다.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추위가 심한 계절에 한파가 몰려오는 것은 당연한 계절의 섭리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딛고 일어서서 조용한 일상을 즐기고 국민 모두가 하나 된 긍정적 생각으로 경제적 한파도 이겨내리라 믿는다.

2022-12-15

문재인케어의 종말

홍석봉정치에디터 윤석열 대통령이 ‘문재인케어’ 폐지를 공식화했다. 지난 5년간 20조원 넘게 쏟아부었지만 국민 부담만 늘었다. 문재인케어가 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을 해치고 국민 희생을 강요했다고 평가했다. 건강보험의 대수술을 예고했다.문재인 정부는 2018년부터 문재인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60% 초반의 건강보험 보장률을 임기 내에 70%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병원비 걱정 없는 나라’가 목표였다.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가 비용 전액을 부담해야 했던 비급여 진료 3천800여개를 급여화했다. 노인·아동·여성·저소득층 등의 의료비를 대폭 낮췄다. 2022년까지 30조6천억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2018년 10월 뇌·뇌혈관 MRI를 시작으로 2019년 두경부·복부·흉부·전신·특수 질환 MRI와 복부·생식기 초음파 등이 순차적으로 건보 급여화됐다.하지만 바로 부작용이 나타났다. 초음파와 MRI검사가 10배 늘었다. 의료현장에서는 새로운 비급여 항목이 생겨났다. 급여 확대로 건보 재정이 과도하게 지출됐다.일부 과잉 이용 항목은 보장 축소나 시행 시기를 연기했지만 늦었다. 과도한 의료쇼핑도 문제였다. 2021년 한해 150회 이상 외래진료를 받은 환자만 19만명에 달했다. 한 40대 여성은 2천50회나 병원을 찾았다. 재정지출이 폭증했다. 오는 2028년이면 건강보험 재정이 고갈된다는 경고등이 켜졌다. 의도는 좋았으나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이었다. 국민 혈세를 낭비하고 재정 파탄을 앞당겼다. 문재인 정권의 ‘퍼주기’ 정책의 말로다.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됐다. 공짜 좋아하다 곳간이 거덜났다. /홍석봉(정치에디터)

2022-12-14

문화강국을 겨눈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김구 선생은 그의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인류가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진정한 세계평화가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실현되기를 원한다.”세상이 하도 어지럽다 보니 문화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인류문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문화’가 강한 민족이 끝내 융성하였다. 인의와 사랑이 문화에서 비롯한다는 백범의 통찰도 놀랍다. 정서와 느낌을 문화로 녹여내어 표현하고 발산할 때, 문화의 힘은 무력과 금력을 너끈히 능가할 터이다. 여유롭고 풍성한 문화적 공동체를 만들게 하여, 민족적 자신감과 사회적 연대감이 든든해질 것이다.하버드대 조셉나이(Joseph Nye) 교수는 군사력·경제력 같은 하드파워(hard power)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소프트파워(soft power)가 치명적으로 중요해졌으며, 문화적 매력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힘이야말로 현대 국가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하였다.문화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다양한 문화의 가능성을 배워야 하며, 문화의 힘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일깨워야 하고, 누구든 문화 에너지를 적용하여 상상과 창의를 발휘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문화적 소양은 개인적인 능력이면서 집단활동으로서 공동체적 산물이기도 하다. 지역마다 고유한 문화적 전통이 피어나며 나라마다 독특한 문화기반이 생겨난다.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 많아질 때, 지역 공동체는 협력과 상생의 정신이 살아나고 함께 살아가는 묘미에 빠져들게 된다. 문화적 토양이 척박하고 메마르면, 사람들을 모으기 어렵고 지역의 공동체성도 고갈되기 마련이다. 음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 춤과 뮤지컬, 전시와 공연이 마을과 지역에 넘실대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함께 사는 재미로 출렁거린다.학교에서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 잃어버린 음악시간과 미술시간이 여느 교과만큼 다시 주목받아야 한다. 문화적 감수성을 심어야 하고 교차문화적 식견도 길러야 한다. 나의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남의 문화를 아끼고 존중하도록 배워야 한다. 문화소양과 함께 상대적으로 소외된 영역이 운동역량이다. 문화와 스포츠가 나라와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 학교는 음악, 미술과 함께 체육시간도 늘여야 한다. 말로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면서 대학입시를 위해 달리느라 찌든 몸은 도외시하지 않았던가.우리가 겨냥하는 문화강국은 어떤 모습일까. K-POP과 한국영화, 드라마, 웹툰과 게임 등에서 이미 앞자리에서 겨룬다. 멋진 콘텐츠를 만들어 문화상품으로 겨루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모두의 문화감수성이 뛰어나서 대한민국의 문화역량이 세계문화 속에서 넉넉히 견주어져야 한다. 문화적 영향력이 세계시민들의 호기심과 관심에 불을 당겨 대한민국을 찾고 배우게 하여, 평화와 안녕에 기여하기까지 밀어 보았으면 싶다. 문화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2-12-14

목수

윤명희 수필가 조카뻘 나이의 그는 가끔 우리 사무실에 와서 얘기를 나누는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말이 별로 없고 덩치도 크지 않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대화 분위기에 맞춰 가끔 옅은 미소를 짓는 그가 내 눈을 끈 이유는 닉네임이 목수기 때문이다.목수라면 어릴 적 동네 아저씨를 떠올리게 되어 젊은 그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취미가 목공예일 거라 여기며 요즘 만들고 있을 소품들이 어떤 게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얼마 전, 친구가 오래된 작은 아파트를 샀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살다 간 그 집은 누렇게 뜬 꽃무늬 벽지에 창문이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거렸고, 보일러는 녹물에 얼룩져 있었다. 친구는 타일이 깨진 욕실을 보자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했다.계단을 내려가다 1층에 리모델링하는 집이 눈에 띄었다. 저 집은 어떻게 수리하고 있는지 구경이나 하자며 가는데 아는 얼굴이 보였다. 목수? 내가 아는 그 목수? 그가 손을 흔들었다. 복도를 따라 공사 현장으로 갔다.그의 먼지 묻은 작업복이 먼저 눈에 들었다. 자초지종 내 얘기를 들은 그는 들어와 보라고 했다. 싱크대는 물론 문짝에 문틀까지 떼어낸 집 안은 살점이 뜯어져 나간 생선 가시처럼 앙상했다. 머릿속으로 그려보아도 이 집이 어떤 집으로 되살아날지 감이 오지 않았다.3층 친구의 집으로 다시 올라갔다. 우리를 따라온 그는 바깥으로 된 욕실 문을 여닫으며, 욕실 문은 안으로 달아야 물방울이 바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단순한 이치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는 우리 집 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보며 신경 써서 챙겨야 할 부분들을 체크해 주었다. 눈에 띄지 않은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는 사실에 친구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그가 해 준다면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헌집을 주고 새집을 받고 싶은 두꺼비처럼 나는 맡아서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약속해 놓은 일만도 줄을 서, 도저히 날짜 맞춰서 해낼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이 시기에 일을 마다할 수 있다는 게 의아했다. 맵짠 그의 손재주가 젊음과 어우러져 공사 현장을 잡고 있었다. 그는 취미로 하는 목수가 아니라 젊은 나이에 이미 선수가 되어 있었다.몇 번의 들락거림과 우여곡절 끝에 공사가 끝났다. 새로 칠해진 현관문을 열고 스위치를 올리자, 은은한 조명 아래 신혼집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집 안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스치고 지나간 손길의 위대함을 느꼈다. 목수가 수리한 1층 집이 그려졌다. 그 집은 새로 도배한 벽의 풀냄새와 새로 칠한 하얀 페인트 냄새에 분명 목수의 나무 향이 날 것 같았다.요즘 들어 가끔 그가 사는 집 창을 올려다볼 때가 있다. 창에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의 웃음이 담긴 불빛이 비친다.그 불빛을 만들어 낸 작업복과 눌러쓴 모자의 힘을 바라본다. 새집을 그려 낼 몽당연필을 오늘도 귀에 꽂고 다니는 그에게 지긋한 마음의 눈길이 가는 것은, 어젯밤에 받은 전화로 더 한 것인지 모른다.친구는 몇 해 동안 취직 시험을 준비하던 아들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며 책을 집어 던져 속상하다고 했다.두어 해 전에, 공부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겠다는 아들에게 지금까지 한 게 아까우니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사정했던 그녀다.아들이 번듯한 곳에 취직만 되면 장가부터 보낼 생각에 아파트까지 장만해 뒀는데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의지로 책상 앞에 앉아있을 친구의 아들이 떠올랐다. 그녀가 움켜잡은 손만 놓아준다면 아들은 목수처럼 자기만의 집을 스스로 짓지 않을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2022-12-14

정해(丁亥)

육십갑자 중 스물네 번째에 해당하는 정해(丁亥)다. 천간(天干)은 정화(丁火)이고, 지지(地支)는 해수(亥水)다. 정화와 해수는 모두 음의 기운으로 정적(靜的)이다.정해일주(丁亥日柱)는 정관(正官)의 바른 기운을 받아 기본적으로 착실하고 침착하다. 일처리도 정도로 잘하며, 주변에서 칭찬을 받는 타입이다. 단점으로는 추진력과 저돌성이 부족한 편이다. 간혹 변덕을 부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도 한다. 정관이 있어 남녀 모두 이성과 배우자 덕이 있다. 결혼운수가 적당하고 좋으며, 배우자를 잘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정화(丁火)는 물상으로 달, 촛불, 별이다. 해수(亥水)는 시간적으로 밤 9시30분에서 11시30분이다. 계절적으로 초겨울에 해당한다. 마치 달이 강가에 떠있고, 찬바람이 불어 쓸쓸한 풍경을 연상한다.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소동파(蘇軾·1036년~1101년)가 신종5년(1082년) 귀양을 가서 10월에 쓴 ‘후적벽부(後赤壁賦)’는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지은 것이다. “객이 있는데 술이 없구나, 술이 있어도 안주 없네, 달은 밝고 바람 시원하니 이처럼 좋은 밤이 있겠소” 라고 했다. 그가 당한 파직에도 불구하고 운명과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유배지에서 펼쳐진 자연을 만끽하는 마음가짐을 볼 수 있다.우리나라 시인 박영희(1901~?)는 일제 치하에서 아무런 희망이나 기쁨의 일면도 찾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한 시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을 발표했다. 그 시의 한 구절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 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우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만, 병실(病室)을 만들려 하야/ 달빛으로, 쉬지 않고, 짜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비인 나의 마음은/ 이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암울했던 당시 시인은 어둠을 밝혀 주고, 우리가 아름답게 보았던 ‘달’조차도 출구가 없는 방에 스며드는 달빛으로 병든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동일한 사물과 대상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식은 시대 상황과 인물의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표현된다.정화(丁火)는 따뜻한 불에 해당하며, 은근하고 기분 좋은 명랑함을 전하며, 해수(亥水)는 물상으로 돼지를 의미하며, 온순하고 무엇이든 잘 모아둔다. 물의 총명함과 에로스 성향도 있으나, 평소에 잠잠하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경향이 있다. 정해일주 여자는 자태가 아름답고 명예를 중시한다. 남자는 신사의 풍모에 매력 있는 얼굴을 지닌다.정해일주(丁亥日柱)는 천을귀인(天乙貴人·하늘의 은덕을 받는 길신)이 있다. 그 영향으로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살아가는데 큰 고초를 겪지 않고 무난하고 평탄한 삶을 이룬다. 또한 매우 곧은 성품으로 선비와 같이 사유의 깊이가 있고, 사특함이 없어 관직에 어울리는 기운이다. 성품이 맑고 고결하게 태어난다고 해서 ‘일귀(日貴)’라고도 부른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천을귀인의 은덕을 받으면서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있다.20세기 모더니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어릴 때 의붓오빠의 성추행으로 만성적인 정신질환을 겪으면서 영국 빅토리아 관습과 인습을 타파하는 글을 썼다. 여성으로서 ‘의식의 흐름’이라는 소설기법을 개척하고 완성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대표작으로 ‘델러웨이 부인’ ‘등대로’ ‘자기만의 방’ 등이 있다.버지니아 울프는 ‘우리가 모두 일 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이라는 말로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를 표현했다. 이 같은 표현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꿈이 되고 있다. 1960년대 말부터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재발견되면서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버지니아 울프의 성공 뒤에는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천을귀인 같은 레너드 울프가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니던 오빠 토비의 친구들 가운데 레너드 울프를 22살에 처음 만났다. 30살 때 그녀는 결혼조건으로 레너드 울프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부부생활에서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과 나를 위해 공직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이었다.레너드 울프는 버지니아의 아름다움에 반했지만, 그녀의 지성에 반한 바가 더 컸다. 마침내 그녀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녀도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하게 된다. 실제로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면서부터 창작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가 전적으로 정신질환이 있는 아내의 간호를 맡은 후 25년간 이전과 같은 극심한 신경증의 발작은 없었다.그 시절, 그들의 결혼은 남자가 여자와의 결혼을 위해 직업적 기반을 포기한 흔치 않은 경우다. 레너드 울프가 아내의 신경쇠약에 기분전환을 위하여 인쇄기를 사서 호가스 출판사를 만들었다. 그녀는 누구의 간섭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쓸 수 있었다. 1925년 5월에 ‘델러웨이 부인’ 초판본이 나왔으며, 책의 표지는 언니 바네사 벨이 디자인했다.결국 정신질환이 악화되자 1941년 3월 28일 버지니아 울프는 우즈강으로 갔다.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집어넣고 강물로 들어간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남편에게 밝히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를 유서로 남기고 자살을 선택했다. 그녀는 결혼 후 30년 동안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말했지만, 홀로 남겨진 레너드 울프의 심정을 이해했을까 궁금하다.남편 레너드 울프는 버지니아 울프의 명성에 가려져 잊혀간 인물이 되었다. 나머지 생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자식도 없이 홀아비가 된 그 후의 삶과 죽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사람은 한 번 죽지만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고, 터럭만큼이나 가벼운 죽음이 있다. 그것은 사용하는 방법이 다른 까닭이다’ 라고 사마천은 말한다.

2022-12-14

석곡 이규준이 말한 세 가지 다행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지난달 18일에 포항시립동해석곡도서관에서는 ‘석곡 이규준 역사인물 해설사 양성과정 기초반’ 수료식이 열렸다. 기초반과 심화반으로 구성된 이 과정은 총 2년 동안 운영된다. 포항 출신 대학자인 석곡 선생에 대한 전문 해설사 양성 과정이 개설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북쪽에 이제마가 있다면, 남쪽에는 이규준이 있다.” 이제마와 함께 근대 한의학계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규준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함흥 출신 이제마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포항 출신 이규준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석곡 이규준 역사인물 해설사 양성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석곡은 유학, 한의학, 천문학 등 폭넓게 학문을 연구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융합형 학자였다. 시대를 앞서간 석곡은 포항시 동해면 임곡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출생지와 인접한 마을인 석리에서 살았다. ‘석리(石里)’란 지명을 본떠서 만든 호인 ‘석곡(石谷)’은 고향에 대한 이규준의 애정을 느끼게 해 준다.유학의 이치를 연구하고 환자를 진료한 의사를 ‘유의(儒醫)’라고 부른다. 석곡은 조선 시대의 마지막 유의였다고 할 수 있다. 김일광 작가가 쓴 역사소설 ‘석곡 이규준’에서는 그가 어떠한 유의였는지 잘 묘사되고 있다. 포항 장기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산막을 치고 진료를 했던 석곡의 모습에서는 숭고함마저 느껴진다.석곡의 한의학 이론을 대표하는 것은 ‘부양론(扶陽論)’이다. 그는 생명의 근원은 양기이지만 늘 부족하고, 반대로 음기는 항상 넘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기 부족을 병의 원인으로 보고 이를 보완하는 연구에 주력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온열 약제인 부자를 많이 처방했다. 그에게 ‘이부자(李附子)’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다.필자는 부양론과 함께 다행론을 새롭게 강조하고 싶다. ‘다행론(多幸論)’은 석곡이 이야기했던 ‘세 가지 다행한 것’에서 착안하여 필자가 이름을 붙여 본 것이다. 석곡은 자신이 가난했던 것, 집안이 변변치 못해 스승을 얻을 수 없었던 것, 혼란스러운 조선의 끝자락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석곡이 들려주고 있는 세 가지 다행한 이야기는 역설적이지만 공감을 자아낸다. 가난을 겪었기에 가난한 백성을 사랑할 수 있었고, 스승을 구할 형편이 못 되었기에 어떤 학파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을 펼칠 수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 태어났기에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그의 다행론은 개인적·시대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혜안을 전해 준다.내년 3월에는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에 ‘석곡기념관’이 건립된다고 한다. 석곡기념관에 ‘삼다행실(三多幸室)’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석곡기념관부터 석곡도서관에 이르는 길을 ‘석곡 이규준의 길’로 명명해서 그의 학문 세계와 인문 정신을 선양하는 것도 추천하는 바이다.

2022-12-14

2022 카타르 월드컵을 보며

김규인 수필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의 도전은 암울한 경제 불안과 민노총의 파업, 이태원 참사와 지루한 정치권의 정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삶의 쾌감을 안겨 주었다. 대표팀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와 국민들의 한결같은 응원은 마음의 앙금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강한 인상을 심었다.빌드업. 지난 4년간 쌓아 올린 우리의 축구. 쌓아 올리기까지 여러 번의 고비는 넘는다. 그렇게 한 단씩 차곡차곡 쌓은 것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보여준 한국 축구다, 세계의 어떤 강팀을 만나도 우리의 축구를 한다. 지나친 수비 위주의 축구가 아니라 자존심 가득한 축구를 한다.이번 월드컵을 통하여 가장 큰 성과가 우리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닐까. 볼을 지키면서 점유율을 높이는 가운데 기회를 찾는다. 모든 일이 다 그런 것 같다. 기초를 다진 후에 건물을 짓는 것이 순서인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 빨리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우리 축구의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실점한 경우에도 우리의 경기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득점이 필요한 경우에는 공격력을 배가한다. 포르투갈전에서도 먼저 실점하고도 역전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실력을 쌓아 우리의 축구를 한 덕분이 아닐까. 점수를 준 것은 준 것이고 득점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뛰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골문을 향해 달린 덕이다.어려움 속에서 빛난 것은 한국 축구의 정신력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골을 먹어 점수 차가 많이 나도 만회 골을 터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강팀을 만나도 주눅 들지 않고 우리의 경기를 하는지도 모른다. 뭔가 노력한 흔적이 나타나고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응원하는 우리는 행복하다. 그래서 월드컵 기간 내내 입이 귀밑에 걸린다.이번 월드컵의 압권은 포르투갈전의 역전 골이다. 왜 많은 돈을 받는 손흥민인지를 보여주고 황희찬과의 유기적인 플레이는 예술이다. 두 사람 모두 다쳤음에도 열심히 뛴 경기일 뿐만 아니라 손흥민의 빠른 발에 맞추어 오프사이드를 피해 황희찬이 달리고, 그에게 맞추어 손흥민이 완벽한 패스를 한 것이다. 일곱 명이 에워싼 수비를 뚫은 패스로 우리는 16강에 오를 수 있었다. 상대 선수도 인정한 플레이에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고 나의 엄지도 함께 올라간다.선수들 입장에서 월드컵은 축구 클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자신을 증명해 보일 기회이다. 국가대표로 뽑히는 것이 기본이지만 월드컵을 대비해 몸을 만들고 기술을 닦아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번 대회를 통하여 조규성, 이강인 같은 우수한 젊은 선수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차세대 대한민국의 주전들이다. 2022년 카타르에서 쌓은 소중한 경험으로 2026년에는 보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2026년이 기다려진다. 우리 축구라는 새로운 유전자를 가진 대한민국이 우리를 에워싼 어려움을 뚫고 헤쳐나가 새로운 역사를 쓰기를 기도한다. 역사는 의지를 가진 누군가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을 이번 월드컵을 통해 깨닫는다.

2022-12-14

결코 쉽게 씌어질 수 없는 다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왠지 이 글귀를 들으면 대다수 우리 국민의 머릿속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뒤이어질 내용이 구구단처럼 자동으로 떠오를 것만 같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이 ‘서시’는 민족 저항시인 윤동주의 대표작이다.누구나 삶의 고달픈 순간은 뜬금없이 혹은 간헐적으로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 고통은 여태껏 쌓아 올린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 고통을 극복할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며 고비를 넘기며 한 단계 성숙한 삶으로 발돋움한다.바로 그거다.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내린다고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인간 스스로 극복해내는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 길이 누군가에게는 등산처럼 활동적인 일이 될 수도 있고 혹자에게는 산책이나 독서처럼 사색의 영역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이따금 서재에 들어가면 손이 잘 닿지 않는 책장의 맨 아래쪽을 향해 손을 뻗을 때가 있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켰던, 색 바랜 시집 한 권이 꽂혀 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윤동주는 일제시대, 시로써 온몸으로 저항했던 시인이다. 1917년에 태어나 29세의 나이로 옥사한 그의 짧은 생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서시의 한 구절처럼 그에 대한 존경과 애도를 무의식적으로 각인시켜 두지 않았을까.시집 속의 주옥같은 시들 중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쉽게 씌어진 시’다. 돌이켜 보면 학창시절 국어 시험에 종종 등장하던 작품이었는데, 그때는 운율과 은유법 같은 문제 풀이 답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터라 시의 감흥 따위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그런데 필자가 지천명, 이순의 나이를 거치며 한 기업의 대표와 기초자치단체장에 이르기까지, 삶이 순탄치 않다고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마다 이 시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사실 이 시는 힘없고 무능력한 조국에 비통해하며 창씨개명한 시인이 일본 유학에 가서 쓴 시이다.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소멸되어 가는 민족의식에 애끓는 심정으로 죽기 전 쓴 다섯 편의 시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것이다.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육첩방은 남의 나라/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중 발췌 시인은 남의 나라에서, 조국의 무너짐 앞에서 이렇게 쉽게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반성한다. 하지만 그저 암담하다고 좌절하지만은 않겠다고 한다. 등불을 밝히고 시대처럼 반드시 올 광복의 아침을 기다리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 절망의 시대에 슬픔과 부끄러움을 노래했지만 그 저변에는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을 밝힌다.시 속의 화자가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가 광복이었다면 필자가 바라마지 않았던 희망은 가시적으로 포장된 업적이 아니었다. 필자가 한 지역을 이끄는 단체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용기를 잃지 않았다. 어떤 난관에서라도 도덕적 순결과 양심을 지키고 싶었다. 허울 좋은 평판보다 우리 지역, 소중한 우리 군민들에게 단돈 10원이라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은 의지가 다였다.이렇게 겉으로는 쉽게 읊조리는 말일지언정 윤동주처럼 속으로는 기필코 쉽게 씌어질 수 없는 다짐이었다고 외치고 싶다. 다가올 내일에도 결코 쉽게 내딛지 않는 발걸음으로 “하나 되는 우리 청송에, 그 이상의 도약으로” 주민들 곁에 머물 거라고 약속한다.그 약속은 광복된 조국처럼 바로 이 자리에서 역사로 실현될 것이다.

2022-12-13

공 차는 소년들이 돌아온다

중학교 때 매년마다 ‘교내 구기대회’라는 학급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한 2주간 치러지는데 각 학년 결승전은 전교생이 다 나와서 관람하는 대형 이벤트였다. 구기대회 시즌이 되면 축구공의 PVC 냄새가 대기 중에 떠다녔다.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져 텅 빈 운동장에 가 혼자 연습하고 등교했다. 아직도 코끝에 희미하게 남은 축구공 냄새를 감각하면 가슴이 뛴다.1997년, 1학년11반 대표로 첫 출전한 구기대회 1라운드 경기에서 나는 승부차기 실축이라는 대굴욕을 맛봐야 했다. 나 때문에 우리 반 탈락했다. 이를 갈고 칼을 갈고 발을 갈며 와신상담, 겨울방학 내내 볼만 찼다.이듬해 우리 2학년3반은 플레이메이커 정찬범, 포워드 오조원, 라이트윙어 박찬영, 풀백 윤상호, 그리고 중원과 사이드를 오가며 중앙 침투도 하는 윙어 겸 새도우 스트라이커 이병철까지, 전력이 꽤 탄탄했다.12강 1라운드, 5반과 붙었다. 수비 후 속공 상황에서 오조원이 중앙선 위로 치고 나가는데, 정찬범이 “병철아 같이 올라가줘” 외쳤다. 질풍처럼 달려 어느새 나란히 침투하는 중에 오조원이 내게 패스했고, 그걸 받아서는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드리블해 골키퍼 키를 살짝 넘기는 아웃사이드 칩킥으로 골을 넣었다. 구기대회 첫 골이었고, 2002년 안정환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한 것보다 4년 앞선 감각적 플레이였다.다음 6강 라운드에서는 1반의 내 친구 박진형과 공격수와 골키퍼로 마주하는 운명의 장난에 괴로웠으나 승부 앞에 우정 따위는 없었다. 문전 혼전 중 수비 맞고 굴러 나온 세컨드 볼을 박진형 가랑이 사이로 넣으며 친구에게는 굴욕을, 우리 반에는 승리를 안기는 결승골을 기록했다.4강전, 아침부터 설사를 심하게 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연장전 끝에 0대 0으로 비겼고, ‘신이 만든 단두대’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1년 전 실축의 대굴욕이 PTSD가 될 법도 한데, 자신 있었다. 겨울방학 동안 수없이 연습한 그 슛을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라. 1번 키커로 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발 인사이드킥으로 오른쪽 골망을 갈랐다.대망의 결승전. 8반의 이홍규는 별명이 ‘야신’이었다. 인류가 축구를 시작한 이래 최고의 골키퍼라는 러시아의 전설 레프 야신을 방불케 했다. 오직 골키퍼 덕분에 결승까지 올라온 8반이었다.전반전에 우리 반이 선제골을 넣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 리드를 지키던 후반전 중반, 상대진영 오른쪽 코너에서 박찬영이 땅볼 패스를 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외곽 20미터 지점, 굴러온 공을 힘차게 찬 내 오른발이 불을 뿜었다.로켓처럼 날아간 공은 몸을 날린 야신의 장갑 위로 솟아 크로스바 밑동을 때리고는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구기대회에 푸스카스상이 있다면 무조건 수상했을 골이었다.그해 가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대표로 내가 상장을 받았는데 상장에 내 이름이 적힌 걸로 보아 아마도 내가 대회 MVP인 게 분명했다. 이듬해 3학년 대회에서도 두 골을 넣었는데, 한 골은 중앙선 부근에서 상대 골키퍼가 나온 걸 보고 롱슛을 한 게 들어갔고, 또 한 골은 후방에서부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폭풍 드리블을 해 강력한 땅볼슛으로 왼쪽 골망을 갈랐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손흥민이 그걸 좀 비슷하게 찬다. 그때 인근의 봉천여중 애들이 내가 축구하는 걸 보러 왔다. 남녀공학을 다녔라면 90년대 농구대잔치 연세대 우지원 인기는 그냥 능가했을 것이다.그 시절 축구는 우리들의 ‘세계’였고, 구기대회는 월드컵이었다. 나는 봉천중학교 구기대회에 통산 3회 출전해 7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였다. 그 모든 골 장면들이 24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우리나라가 1998 월드컵 네덜란드에게 5대0으로 진 새벽, 운동장에 가 울면서 공을 찼다. IMF의 설움과 겹쳐 더 서러웠다. 2002 월드컵에서 그 눈물은 환희로 바뀌었다.지난 한 10년은 동네 학교 운동장이 썰렁했다. 그 많던 공 차는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했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우리에게 짜릿한 감동과 환희를 줬다. 이제 공 차는 소년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손흥민과 황희찬, 이강인을 흉내 내느라 밥도 거르고 운동장을 뛰어다닐 것이다. 모두들 먼 훗날 추억할 골 하나씩 넣었으면 한다.

2022-12-13

후회를 포기하지 않는 방법

요즘 아주 작은 문제에도 많은 고민을 하는 편이다. 후회하기 싫어 평소 심사숙고 선택을 하는 편이지만 늘 옳은 선택을 할 순 없는 법이다. 가끔 잘못된 선택을 하는 바람에 후회가 크게 남을 때가 있다. 결국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고민만 하며 살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최근 아주 사소한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어려움을 마주했다.오늘 점심은 가볍게 샐러드를 먹을 것인지, 냉장고에 남은 채소들을 꺼내어 된장찌개를 요리해 먹을 건지 냉장고 앞에 서서 점심시간이 지날 정도로 메뉴 고민을 한다. 또는 깔끔한 흰색 운동화를 살 건지 아님 겨울에 어울리는 블랙 색상 신발을 고를 것인지 쇼핑몰 상세페이지 화면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오래 고민한다. 붕어빵 트럭 앞에서 슈크림을 먹을 것인지 팥을 먹을 것인지 필요 이상의 시간을 쏟으며 서성이는 등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선택에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다.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는 것도 어렵지만, 무언가를 택하기도 전에 혹시 후회가 남으면 어쩌지 하는 초조함은 결국 나의 마음을 좁고 초라하게 만든다.어느 때엔 인생에서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중대한 선택지가 다가온다. 동시에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가 남을 것이라는, 지레 겁먹은 아이가 내 안에서 스멀스멀 일어나는 걸 직감으로 느낄 수 있다. 또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또 다른 한쪽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과 욕심 때문에 더욱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만다. 그렇게 끝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가장 쉬운 포기라는 방법으로 도망을 친 적도 무수히 많다.햄릿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햄릿 증후군이란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며 선택을 결정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대사에서 나온 신조어다. 쉽게 말하면 선택 장애 또는 결정 장애라 보면 된다. 햄릿 증후군의 원인으로 많은 심리학자들은 부모의 선택과 결정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유년기를 보낸 경우나 과도한 정보 속에서 결정을 미루는 습관이 버릇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우연히 유튜브 속에서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인 정재승 박사님의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재승 박사님은 후회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선택을 하는 과정을 통해 만족이나 실패감을 많이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이어 후회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후회는 고등한 생물이 가지는 능력으로 뇌의 전전두엽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때문에 인간이 후회하는 이유에는 다음에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뇌가 설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왠지 영상을 보며 안심이 됐다. 그러니 후회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뇌의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해 보려 한다. 뇌의 신호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다 보면 결국 후회를 수용하고 받아들여 더 나은 삶과 목표를 영유하는 성숙한 자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게임 슈퍼마리오에는 콧수염에 멜빵바지를 입은 배관공 마리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악당인 쿠파에게서 납치된 피치공주를 구하기 위해 낯선 땅으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높은 스테이지로 갈수록 더욱 어려운 난이도의 맵이 존재하고, 마리오가 가진 목숨 또한 한정되어 있어 늘 스테이지 초반엔 자주 배드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마리오 앞에는 어떠한 장애물이 있는지 캐릭터가 나아가기 전까진 알 수 없지만 단순히 몇 번의 시도와 실패의 과정을 겪는다면 캐릭터가 어느 곳으로 건너가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실패의 과정에서 후회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후회로부터 파생된 경험의 노하우를 통해 결국 최종 목표인 공주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시도와 실패로 거듭된 경험으로 얻어낸 해피 엔딩은 무척 값지고 벅차다. 게임을 하는 것처럼 가볍고 흥미롭게, 가끔은 대범하게 나아갈 줄 아는 지혜와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러니 또다시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다른 하나의 선택지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겐 시행착오로 인한 경험이 있고 후회를 딛고 나아가려는 발돋움이 있음을 안다. 후회로 인해 계속 과거를 향해 마음이 기운다면 유쾌하면서도 씩씩한 슈퍼마리오를 떠올려 본다.

2022-12-13

다중밀집 공간에서 압사사고 예방하려면

양성빈포항남부소방서 119구조구급센터 구조대원 소방장 코로나 거리두기 예방수칙이 완화됨에 따라서 다수 군중이 몰리는 행사와 모임이 늘어나고 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는 핼러윈 데이를 즐기기 위해 다수의 인파가 몰리면서 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참혹한 사건이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군중밀집 ‘압사 사고’가 일어나는 원인과 예방대책에 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먼저 군중밀집 ‘압사 사고’는 건물 붕괴 압사 사고와는 다르게 대개 공연이나 축제 행사 등에서 수많은 군중이 밀집해 있을 때, 여러 원인에 의해 넘어지고 깔리면서 압력에 눌려 사망하게 되는 사고이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압사 사고가 있었으며 대표적으로는 1960년 서울역에서 발생한 귀성객 압사 사고(사망자 31명, 부상자 40여명)와 2005년에 경북 상주시민운동장에서 발생한 콘서트 공연장 관중 압사 사고(사망자 11명, 부상자 162명)를 들 수 있다. 이 사고들도 특정한 장소에 인파가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했다.이러한 군중밀집 ‘압사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사람의 밀집도와 가장 관계가 깊다. 1㎡ 넓이 이내의 공간에서 3명 이하 있을 때는 걷는 데 지장이 없는 상태이고, 군중밀집이란 1㎡ 넓이 이내의 공간에 5명 이상이 들어있는 위험 임계밀도를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인파가 밀집될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는 방문을 자제하는 것이 좋고, 압사 사고에 대한 위험을 사전에 생각하고, 항상 안전거리 확보에 유념해야 한다. 만약 예상치 못한 상황에 군중밀집 속에 있는 상태라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예방법을 숙지해야 한다.우선, 주변 인파가 몰리는 느낌이 들면, 즉시 그 현장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경우에는 자신의 양팔을 끼며 ‘ㄷ’자 형태를 만들어 가슴 앞 공간을 포함하여 15㎝ 이상 공간을 확보하여 최소한의 숨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좋다.그리고 등을 벽 또는 타인으로부터 압박받지 않는 고정된 공간에 기대어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는 행동으로 질식사 및 장기 손상의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불가피하게 넘어졌을 경우는 복부 쪽에 있는 장기를 보호하기 위해 태아가 배 속에 있을 때의 자세를 최대한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인파 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절대 밀어선 안 된다. 많은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넘어지면 도미노처럼 걷잡을 수 없이 쓰러지게 된다. 한번 넘어지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들도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절대밀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그 누구도 이러한 참사를 예상하거나 발생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10.29 참사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며 두 번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참사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2-12-13

쟁취와 탈취

조현태 수필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지만 나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필자도 속한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 대 브라질 월드컵 축구 중계방송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 묘했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16강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감동인데 브라질 팀과의 경기에서 승리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으니 말이다.FIFA 랭킹 28위가 1위를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했을 터이다. 그런데, 막상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을 향해 응원하는 마음은 ‘이길 수 있다’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붉은악마 응원단이 카타르까지 출장응원을 왜 했겠는가. 아마도 월드컵 축구경기 중계방송을 보는 한국 사람이면 거의가 붉은악마와 같은 생각으로 응원했지 않을까 싶다. 필자는 손흥민 선수가 얼굴을 다쳐서 마스크로 가리고 출전한 모습을 보고 그 투지력을 매우 듬직하게 여겼다. 또한 벤투 감독이 레드카드를 받아 선수들을 지휘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극복하고 포르투갈 팀을 이겼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때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대한민국은 극한상황을 참아내며 잘 극복하는 특질이 있는 나라라고 말이다. 경기 시작 5분경에 한 골을 내주면서 대단히 어려운 경기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 높은 벽을 무너뜨렸을 때 저절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게 된다. 따라서 브라질과의 경기도 이러한 성적을 기대하면서 힘겨운 도전을 응원하게 된다. 무려 4골을 허용하고도 기어이 한 골을 만회하는 한국 축구선수들이 장하게만 보였다. 여러 측면에서 브라질 팀에 밀리는 것이 사실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 노력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추진력이 아닐까 한다. ‘쟁취’라는 어휘가 딱 어울리는 경기였다.어찌 한국 축구가 하루아침에 16강에 진출했으랴. 눈물겨운 노력과 훈련이, 그리고 할 수 있다는 긍정과 투지력이 있어야 가능했으리라. 거기다가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응원하는 그 저력도 무시할 수 없다.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서 키워온 경제력, 문화력, 첨단기술력은 참으로 대단한 자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치력도 엄청난 성장을 했다. 갑자기 브라질을 이길 수 없듯이 영국이나 미국의 정치력을 능가하지는 못해도 좋다. 축구가 브라질에 도전하는 그 정신으로 정치선진국을 따라잡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서두에서 언급한 ‘인간의 욕심’이란 돈이나 권력을 끝없이 탐하는 욕심을 뜻한다. 이 욕심은 상대를 긁어내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형식이다. 탈취에 불과하다. 그러나 월드컵은 상대보다 더 잘 해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쟁취가 아니겠는가.이제는 명예나 자존심에 욕심을 부려야 할 때다. 특별히 이쪽은 탈취에 빠지기 쉽다. 적어도 한국 역사에는 약탈도 당해봤고 서러움도, 업신여김도 당해봤다. 빈약한 자원에 허덕이며 역수출까지 했다.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서게 된 과정이 쟁취이고 승리다. 바라건대 정치 분야도 노동 분야도 탈취보다는 온 국민이 응원하는 가운데 쟁취하기를 바란다.

2022-12-13

모두에게 안전한 겨울이 되기를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2022년은 유난히도 대형 사건사고가 많았던 해로 기억된다. 1월에는 광주 화정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 사고로 여섯 명이 희생됐고, 평택 냉동창고 신축공사현장 화재로 세 명이 사망했다. 5월에는 울산 온산공단에 위치한 에쓰오일 공장 화재로 열 명이 희생됐으며, 7~8월에는 중부권 폭우로 열두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은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9월에는 남부지방을 직격한 태풍 힌남노로 인해 포항에서만 여덟 명이 사망했고, 대전 아울렛 화재사고에서는 일곱 명이 희생되었다. 10월에는 SPL 제빵공장에서 기계끼임 사망사고가 발생하였고, 10월 29일에 발생한 이태원 참사에서는 무려 158명이 사망하고 197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동해안 지역에서는 3월부터 산불이 자주 발생해 막대한 삼림피해와 재산피해를 냈으며, 11월에는 산불 취약지 예방 활동을 벌이던 소방헬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다섯 명이 모두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0월 말에 발생한 봉화 광산 붕괴사건의 매몰자 두 명이 극적으로 구조된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미국의 재난사회학자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2012)라는 책에서 ‘재난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본 홉스 이후의 대중관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홉스 이후, 지배자들은 통제에서 벗어난 대중이 폭도로 변모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솔닛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재난 상황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할 기회를 제공한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했을 때, 뉴올리언스는 일시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피해가 너무 커서 해당 지역의 모든 공공시스템이 마비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서로를 돕기 시작했다. 아무도 지시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나서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조하고, 남는 물자를 나눠주고, 집을 잃은 사람들을 돌봤다. 솔닛은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재난 유토피아’라고 명명하였다.우리에게도 재난 유토피아를 만들어낼 힘이 있다. 포항 시민들은 태풍 힌남노로 인해 발생한 고통을 함께 나누고 피해 복구에 힘을 모았다. 제빵공장에서 일어난 사망사고에 분노한 사람들은 특정 브랜드를 불매함으로써 피해자에게 공감을 표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태원 참사의 아픔을 공유하고,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 것을 촉구하였다. 봉화 광산 붕괴사고의 생존자가 구조되기까지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 생환을 염원하였다. 재난 유토피아는 결국 개개인의 공감과 연대의 능력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안이 아니라 밖을 향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선의,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에 대한 존중,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넘치는 연말이 되기를 바란다. 내년에는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지기를, 더 따뜻해지기를 소망한다.

2022-12-13

테슬라 유치 장애물은 ‘강성노조와 법인세’

심충택 논설위원 최근 항만을 낀 국내 주요도시들이 아시아권 제2부지를 물색중인 테슬라 전기차 공장 유치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이 중 영일만에 테슬라 전용공단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제안한 포항시가 최강의 경쟁력을 갖춘 도시로 평가받고 있다. 포항은 영일만항 물류 인프라와 원활한 교통망에다 안정적인 철판 공급망을 갖춘 포스코, 전기차의 핵심부품인 2차전지(배터리) 클러스터, 포스텍의 연구기반까지 구축되어 있어 누가봐도 테슬라 공장입지로는 최적지다.포항시가 북구 흥해읍 용한리(영일만3·4일반산단지 우측)에 추진하는 테슬라 전용공단은 자동차를 선적할 항만과 바로 접해 있어 물류비 절감 측면에서 타도시를 압도하고 있다. 포항에는 이미 세계 기업가치 1위인 애플도 소프트웨어산업 인재와 스타트업 양성을 위해 국내 처음으로 들어와 있어 테슬라 CEO인 일론 머스크도 눈여겨볼 것이다.문제는 테슬라 유치를 위한 국가경쟁력이다. 국내기업들은 지난 5년간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기회만 되면 서둘러 한국탈출에 나섰다. 최악의 노사분규와 높은 조세부담 때문이다. 지금 고용시장이 얼어붙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것도 기업의 해외이탈 탓이 크다. 민노총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노조는 지금 세계 최악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최근 16일간 민노총과 화물연대가 벌인 끔찍한 파업·폭력사태가 이를 여실히 대변하고 있다. 특히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자동차노조는 연례행사처럼 파업을 벌이고 있어 테슬라도 이를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언급했듯이, 테슬라가 화물연대 파업을 보고도 한국에 올 엄두를 낼 수 있을지 우려된다. 테슬라는 노조와의 단체협약에 민감하기로 유명한 회사다.우리나라의 높은 법인세율도 기업의 조세경쟁률을 추락시킨다. 한국 법인세 최고세율(25%, 지방세를 합치면 27.5%)은 OECD 37개국의 평균(21.5%)을 훨씬 웃돈다. 최근 10년간 미국, 영국, 일본 등 20개국이 법인세를 내린 반면 문재인 정부만 거꾸로 세 부담을 늘린 결과다. 현재 여야가 법인세율 인하를 두고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민주당이 ‘초부자감세’라며 반대하고 있어 타결되기가 어렵다.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한국 법인세율이 대만과 무려 7.5%포인트나 차이가 나는데, 누가 대만에 가지 않고 우리나라로 오겠나”라고 한 말이 가슴에 박힌다.테슬라 공장의 한국유치는 국민이 모두 염원하는 일이다. 민주당과 민노총도 일반국민과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높은 법인세율과 산업현장에서의 불법행위는 국가나 지자체의 기업유치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킨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노사현장에서 갈등과 분쟁을 피할 순 없지만, 노조활동도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 해야 한다.그리고 법인세율 인하를 ‘재벌특혜’라는 시각으로 봐선 안 된다. 법인세는 법인을 구성하는 근로자와 주주, 자본가가 내는 세금이다. 한 개의 일자리라도 더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지자체에 정치권과 강성노조가 찬물을 끼얹어서야 되겠나.

2022-12-13

동장군

우정구 논설위원 음력을 쓰는 동양에서는 입동(立冬)에서 대한(大寒)까지를 겨울로 본다. 소설(小雪)과 동지(冬至) 사이에 있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24절기 중 스물한번째 해당하는 대설 때부터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다. 올해는 지난주에 대설이 지났다.원래 역법(曆法)의 발상지며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의 계절적 특징을 따서 만든 것이 절기여서 우리나라 경우와 맞지 않은 때가 많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가 겨울의 한가운데로 접어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11월까지만 해도 따뜻한 날씨가 이어져 오던 것이 이번 주 중반부터는 동장군(冬將軍)이 찾아 올 것이란 소식이다. 동장군은 겨울 장군이란 뜻으로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의인화한 표현이다.이 말은 본래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면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져 있다. 영국의 언론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이기고 추위 때문에 후퇴한 것을 두고 “제너럴 프로스트(General Frost)”라 표현했다. 이를 일본이 동장군으로 번역을 했고, 우리가 그를 그대로 따온 것이 유래라 한다.러시아는 많은 나라로부터 군사적 공격을 받았으나 나폴레옹 전쟁처럼 러시아 지방의 혹독한 겨울 추위 때문에 외국군대를 물리친 역사가 여러번 있다. 동장군의 후덕을 단단히 본 것이다.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한국의 연평균 기온이 30년 전보다 1.6도가 상승했다고 한다. 인류가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하면 80년 후에는 한반도에서 겨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경고까지 나와 우리를 걱정케 한다. 겨울을 겨울답게 하는 동장군의 출현은 아직은 지구촌이 건강함을 보여주는 징후라 생각하면 밉상스럽지만은 않다. /우정구(논설위원)

2022-12-13

동물원수족관법 개정의 의미

한 때 돌고래 태교 체험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돌고래가 내는 고주파 소리가 태아의 정서적 안정과 두뇌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붐이 일었다.제주도와 거제도 등 전국에 위치한 수족관(아쿠아리움)에서는 대대적인 돌고래 태교체험을 홍보했고, 영유아 등을 포함한 가족단위 이벤트도 연일 성황이었다. 산모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재롱을 부리는 돌고래의 모습뿐만 아니라 태동의 신기한 반응을 확인한 산모들의 증언까지 겹치면서 돌고래는 그 후 태교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2010년 중반부터 생겨난 야생동물체험카페도 비슷한 흥행을 일으켰다. 미어캣과 너구리 등 귀여운 외모를 가진, 더욱이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야생동물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체험카페는 이용자들의 인기에 힘입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당시 야생동물카페는 식품위생법상 ‘식품 접객 업소’로 분류돼 있어 일반음식점으로 신고하면 누구나 영업이 가능했다.야생동물에 대한 검역과정 뿐만 아니라 카페 위생규정 조차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에 대한 인식은 희박했다.우리와 달리, OECD 소속 국가들은 돌고래와 야생동물을 보고 만지는 등 체험활동을 하지 못한다. 유럽연합과 영국, 미국, 독일 등은 동물을 전시·사육하는 공간에서의 동물보호와 복지에 관해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동물원과 수족관을 단순히 즐기는 오락거리가 아닌,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고 연구·교육의 기능을 갖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영국의 경우, 1981년 동물원허가법(Zoo Licensing Act)을 제정해 정부 허가와 면허를 기반으로 동물원을 관리하고 있다.면허 역시 4년간만 유효하며 갱신을 위해서는 허가를 위한 일정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동시에 동물원 검사관 제도를 통해서 동물보호와 복지에 나서고 있다.장관이 지명, 또는 임명하는 검사관은 수의사나 교수 출신으로 환경식품농무부의 ‘현대 동물원 실무표준’ 등 동물복지 관련 기준의 엄격한 적용 여부를 확인한다.이들 대부분 국가들은 동물원과 수족관의 시설 및 최소사양기준은 법적으로 엄격하게 정하는 대신 동물 종별 관리기준은 협회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을 따르고 있다. 대신 법과 가이드라인은 동물복지 5원칙을 기준으로 삼는다.배고픔과 목마름, 고통·질병·상해, 정상적 습성 표현, 두려움·스트레스, 환경·신체적 불편함. 즉, 전시·사육되는 동물들은 이 5가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선언적인 의미라고 보이지만 동물복지 개념이 희박한 우리나라에서는 실제 사육 현장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다행히 최근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달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동물원수족관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것. 개정안은 2017년 이 법이 제정된 이후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먼저 누구나 등록만 하면 운영할 수 있는 동물원 또는 야생동물카페가 허가제로 바뀐다. 또 영국과 같이 전문검사관 제도가 도입된다. 논란이 됐던 수족관 내 고래의 보유도 금지된다.현재 운영되고 있는 수족관 외에 다른 곳에서는 새롭게 고래를 들여올 수 없다. 만지기와 먹이주기 등의 체험도 금지된다. 상세한 시행규칙은 조만간 제정돼 가이드라인으로 현실에 적용될 예정이라고 한다.그동안 숱한 동물들은 좁은 철창에서 정형행동(한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거나 머리를 흔드는 이상행동)을 반복하거나 야생과 달리 이른 죽음을 맞았다. 동물원이란 공간이 태생부터 전시를 목적으로 설립됐기에, 동물복지가 법적 테두리로 들어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아닐까. 정현미 작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원수족관법이 이렇게 환영받는 데에는 야생동물의 참혹한 실태가 연일 보도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각인된 인식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생명체를 다루는 데에 최소한의 기준 은 마련되어야 한다는 공감대 말이다.인권의식이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동물보호와 복지에 관한 의식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동시에 지속가능한 운영과 관리에 관한 요구도 높아질 것이다. 어린 시절 동물원의 추억이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 보장은 이제 누구도 할 수 없게 됐다.기후변화 속에서 멸종 위기 동물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고, 자연의 위기를 인간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인식도 높아졌다. 이제부터 현실 적용의 단계가 남아있다. 법 적용과정에서 좀 더 면밀하고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동물원과 수족관의 동물들이 최소한의 복지를 보장받기를 희망해본다.

2022-12-12

책에 대한 순수하고도 지독한 열망

지금, 우리는 책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한때 인류 지식 문명의 거의 전부였던 책은 이제는 더 이상 가장 유력한 지식 미디어가 아니다.석판에서 파피루스를 거쳐, 양피지, 종이로 옮겨온 무언가의 빈공간에 문자를 기록해온 인간의 활동들, 그리고 그것들을 겹쳐 한쪽을 묶은 책이라는 미디어가 인간에게 남겨준 문명적 수혜는 이제 전자문명이라는 다른 종류의 문명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물론, 책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고 해서, 책이 아예 소멸될 것이라는 진단은 맞지 않다. 책은 물성을 가지고 공간을 점유하며, 인간의 손에 뿌듯하게 들어오는 감각적 대상이면서, 또 그것이 담보하는 개념을 가리키는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이로 된 책을 아무도 보지 않는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정보들이 무한히 연결되어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시대에도, 어떤 정보의 입구와 출구, 시작에서부터 한 없이 길게 늘어진 중간을 지나 끝에까지 이르는 개념으로서의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대상일 것이다.물론 이 생각이 인쇄 출판 기술 시대의 책과 함께 성장한 책-네이티브 인간의 전형적인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이나 감각 지체일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인간이 인간이고, 태어나서 자라고 다 커서 소멸하는 선형적인 시간성 속에 놓여 있는 한, 인간은 시작과 끝이라는 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책의 감각이 주는 뿌듯함이란 바로 그 완결성의 감각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아직 손가락 끝에 확실하게 걸리는 종이 뭉치의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그렇게 본다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책’이란 언제나 실제 대상으로서의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존재해왔다. 특히 지금의 현대 사회에 바로 연결된 시민계급의 성장에 있어서 책, 그리고 책이 담보하는 지식과 문화는 귀족들의 ‘고귀한 몰취향’과 구분해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필사된 귀중본들을 모으고 서재를 꾸미고 이를 전시해서 보여주는 책 수집가들이 등장해온 것이다.책은 분명 문자를 통해 표현된 지식을 담아내는 수단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기의 고상한 취향을 증명해주는 것이자, 세상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한 골동의 대상이기도 했다.‘보바리 부인’과 ‘감정 교육’ 등을 창작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문학 세계를 연 작가들 중 한 명인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문자와 책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였다. 그는 10세 때부터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15세 때는 책에 대한 수집가의 지독한 열망을 다룬 소설‘장서벽(Bibliomanie)’을 썼다.이 소설은 부르주아 계급의 책에 대한 사랑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대를 풍자하는 정교한 풍자화다.소설 속에서 주인공인 쟈코모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서점 주인인데, 그는 책을 파는 직업이면서, 책을 너무 사랑해서 팔지 못한다.박사학위를 받고 대주교가 되기 위해 그가 가장 아끼는 책을 사려는 수도사는 그에게 거액의 돈을 제시하며 그 책을 결국 사 간다. 쟈코모는 그로부터 그에 못지않게 귀한 책의 정보를 얻지만, 사러 가보니 그 책은 이미 팔려버렸고 경매에서 사고자 했던 라틴어 성경은 경쟁자에게 빼앗겼다.그 뒤, 그의 책을 뺏은 사람들은 하나씩 죽게 되고, 쟈코모는 경찰에 잡혀간다. 변호사는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쟈코모가 구하려고 했던 필사본 라틴어 성경을 한 권 더 구해오지만, 쟈코모는 자신이 그들을 죽이고 훔쳤다고 고백하고, 또 하나의 성경을 찢어버려 유일본으로 만든다. 쟈코모에게 책은 자신의 목숨이나 영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책의 시대였던 것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12-12

적대적 공생의 정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한국정치는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이라는 점에서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다.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될수록 양당 내부에서는 강경파가 득세함으로써 대결은 더욱 치열해진다. 겉으로는 서로의 증오가 폭발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이익을 지켜주는 ‘은폐된 공생관계’에 있다.‘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적대적 공생은 특수한 한국정치문화의 산물이다. 정치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정당체제는 보수와 진보의 전통을 잇는 양대 정당의 독과점 정치구조이다. 한 때 유력한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제3당이 부상한 경우도 있었지만, 양당 중심의 정치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키지는 못했다. 양당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안이 없다는 현실이 유권자들의 정치혐오를 증대시키고 있다.양당의 적대적 공생은 이분법적 정치문화로 인해 더욱 공고해졌다. 한국정치는 냉전과 6·25, 남·북한 간의 끝없는 대치 속에서 선악을 나누는 ‘정치적 흑백론’이 지배하게 되었다.‘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의식이 우리의 정치를 갈등과 대결로 내몰았다. 그 결과 각 진영에서는 극단적 성향의 정치팬덤(fandom)들이 득세하게 되었는데, 이는 동시에 두 진영 간 적대적 대결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적대적 공생관계는 여야 정당에게 정치적 이익을 제공해 준다. 야당은 국정을 책임진 여당의 무능과 실정을 공격할 수 있고, 여당은 그 책임을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야당 탓으로 돌릴 수 있다.야당은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사법 리스크로 흔들리고 있는 이재명 대표를 지키려하고, 여당은 야당 대표를 대장동사건의 몸통으로 각인시킴으로써 윤석열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과 부인 및 처가 리스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두 정당은 ‘전쟁’을 통해서 서로의 ‘생존’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적대적 공생의 최대 수혜자는 거대 양당의 정치인들이고, 최대 피해자는 국민이다. 적대적 공생의 정치는 증오를 먹고 살기 때문에 양당은 모든 역량과 자원을 소모적 정쟁에 투입한다. 이 때 수세에 몰린 야당은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권력투쟁의 전선을 확대해나가는 반면, 권력을 장악한 정부여당은 야당과의 협치를 거부하고 야당 인사들에 대한 비리 수사에 박차를 가한다. 결국 정치가 실종됨으로써 국민의 고통만 커지게 된다.이제 우리 정치도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적대적 공생’의 악순환을 끊고,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우호적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는 독과점 정치구조의 혁신을 모색해야하며, 단기적으로는 정치인과 국민의 정치의식개혁이 시급하다.양당의 주도세력이 교조주의자에서 합리주의자로 대체될 때 비로소 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 특히 정치팬덤들은 자신들의 과격한 행동 때문에 상대 진영 팬덤들의 입지가 더욱 강고해진다는 역설을 깨달아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의 이성 결핍은 민주정치의 반동화를 초래한다.

2022-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