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어떤 동행

등록일 2023-09-03 18:32 게재일 2023-09-04 17면
스크랩버튼
25년만에 만난 친구들.

오랜 시간 등장해도 기억나지 않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단역으로 등장해도 오래도록 장면이 떠나지 않는 배우가 있다. 단역은 극적으로 등장해 선명한 사건을 남기거나, 가슴을 후벼 파는 강한 대사를 던지고 사라질 때 주연 못지않게 기억에 남는다.

작년 여름, 마른장마로 지쳐 있을 때 카톡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과자 몇 조각 욕심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더 열심히 교회를 나갔던 코흘리개 친구들이 25년 만에 갑자기 연락이 닿았다. SNS 속에서 사십대 중반이 된 자신과 아이들의 사진을 올리면서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어린 시절을 떠 올렸다.

어릴 적, 살던 동네가 전부인 양 알았던 우리는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었다. 서로 다른 직업으로 각자 자기의 영역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8명의 어른들이 자신의 일과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정 무렵에 모였다. 마음과 몸은 자라지 않고 세월의 주름만 깊이 파인 듯 지금의 우리는 예전이나 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몇 십 년 전으로 돌아 간 것 같다.

나이 들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하나하나 삶의 숙제를 풀어 놓고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제 나 하나만 행복해지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느끼는 홀가분함이 좋다고 우리는 이야기 했다. 추억의 서랍을 활짝 열고 미어터지도록 눌러 담긴 어린 시절을 끄집어내며 마주앉았다. 목 놓아 건배를 나눴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사진관을 하는 친구 한 명이 자신의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열 명이 일자로 서서 한 곳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 해마다 찍자. 한 명 남을 때까지”

경애가 말하곤 ‘제일 먼저 사라지는 친구와 제일 마지막까지 남는 친구는 누가 될까’라고 보탰다. 아직도 우리에겐 올라 설 무대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 했기에 까르르 대며 웃었다. 흩어졌던 친구들이 하루 만에 모여 25년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다음을 약속하며 눈물 나는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오늘이 고비입니다. 기도해 주세요”

한 달 후 문자가 날아들었다. 경애의 남편이었다. 경애는 희귀병을 앓았는데 최근 병이 악화되어 염증이 혈관까지 퍼졌다고 한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경애의 얼굴은 벌겋게 열이 올라 있었다. 우리를 보며 와락 눈물을 쏟아냈다. 힘겹게 한 마디 건넬 때마다 산소 호흡기에 뜨거운 김이 서렸다.

얼마 후 경애는 떠났다. 장례식장 앞에서 만난 친구들은 말없이 발지도만 끼적거렸다. 친구들의 얼굴만 봐도 뜨거움이 울컥 올라 왔다. 빈소로 내려가는 계단이 25년이라는 시간 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그동안 못 다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데 반갑고 설레던 마음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친구 한 명을 보내야 했다.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경애의 영정사진 옆에는 얼마 전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경애는 친구들 옆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올려 달라고 했단다. 아무리 인생이 짧아도 스무 번은 더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친구 7명은 차마 ‘친구야 잘 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경애는 우리의 얼굴과 함께 초행길을 떠났다. 우리는 사진으로나마 경애와 함께 저 세상으로 동행했다. 늘 앞장서서 말하기 좋아했고 우리를 대신해 남자 친구들과 과감히 싸워 주었던 경애는 먼 길에도 앞장을 섰다. 짧은 추억과 사진을 함께 안고 떠난 경애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한 명 남을 때까지 사진을 찍자던 경애는 제일 먼저 사라진 한 명이 되었다. 내년이면, 경애의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한 명씩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손 맞잡고 찍은 사진이 점점 여백으로 채워질 때 다른 세상에서 우리는 또 다시 만나 여백을 채워가고 있으리라.

우리는 모두 엔딩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렇듯 섬뜩한 변주를 예측하지는 못한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내게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며 영화의 막을 내릴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경아의 섬섬옥수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