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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건축 발상지-파리 북부의 생 드니 성당

등록일 2023-08-28 17:53 게재일 2023-08-2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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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드니 성당

서양미술사에서 통용되는 몇몇 용어들은 특정 미술을 낮추어 부르기 위해 악의적으로 고안되었다. 르네상스 끝 무렵 잠깐 등장한 매너리즘,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바로크,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준 인상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에 나타난 고딕의 경우도 그렇다. 고딕(Gothic)이라는 단어 안에는 벌써 고트족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 야만족의 미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물론 이것은 미술사적으로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이다. 고대를 모범으로 한 자신들의 업적에 가치를 더할 의도로 앞선 시대를 ‘암흑’으로 규정하고 그 때 유행한 건축 양식을 고딕이라 불렀다. 하지만 르네상스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야만스럽다고 평가했던, 그래서 고딕이라고 불렀던 건축은 실제로는 고트족의 유산도 아닐뿐더러 야만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신비로운 빛을 직접 경험했거나 끝없이 솟아 오른 쾰른 대성당의 장엄함 앞에서 압도당한 경험이 있다면 중세를 감히 암흑이라거나 야만적이라 섣불리 폄하하거나 폄훼하지 못할 것이다.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대략 1150년 무렵으로 한 세기 이상의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로마네스크가 안정기에 접어들어 전 유럽에 확산되고 있을 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건축은 높고 웅장한 몸집을 완성하기 위해 두꺼운 벽체와 육중한 기둥을 필요로 했다. 고딕역시 높이를 지향했다. 신을 향한 충성심일까? 종교권력의 욕망일까? 구원에 대한 끓어 넘치는 간절함일까? 무엇이 중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높은 교회를 짓게 했는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고딕으로 넘어오면서 교회는 더 높아졌고 더 화려해졌다. 더 높아졌지만 무게를 덜어낸 듯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장식성 풍부한 창틀 트레이서리(tracery)가 파사드 벽면 빈 공간을 수놓듯 채우면서 시각적 무게가 더욱 줄어 들었다. 고딕이 지닌 수직 상승적 외형은 건물 외부를 장식한 첨탑을 통해 보다 강조된다. 고딕은 어떻게 무게를 극복하고 높이를 추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화려함을 통해 고딕은 무엇을 추구했던 것일까?

고딕이 처음으로 발달한 곳은 프랑스 수도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 드 프랑스지역이다. 특히 파리 북부에 위치한 생 드니(Saint Denis) 성당 주보랑 부분에서 처음으로 고딕의 건축형식이 등장했다. 생 드니 성당은 프랑스 왕가의 무덤으로 기능하던 곳으로 파리의 수호성인 디오니시우스(Dionysius)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성인 디오니시우스, 프랑스식 발음으로 생 드니는 3세기 중엽 갈리아 지역 복음화를 위해 교황 성 파비아누스가 파견한 일곱 명의 성직자 중 한 사람이었다. 파리의 초대 주교로 임명된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를 전파하다 체포되어 로마의 신 메르쿠리우스를 경배하던 언덕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 언덕을 지금은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몽마르트르(Montmartre)라고 부른다.

전설에 따르자면 참수당한 디오니시우스는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몇 킬로 미터 걸어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자신의 무덤 자리에 이르러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4세기 후반 그곳에 처음으로 지어진 교회가 생 드니이다. 생 드니 성당에 고딕의 건축원리를 적용한 사람은 1122년 생 드니 수도원장으로 임명된 쉬제르(Suger)이다. 이미 일 드 프랑스 다른 지역에서 로마네스크를 대체하는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대성당들이 건축되는 것을 목격한 수도원장은 생 드니 수도원 교회를 개축하면서 보다 치밀한 방식으로 고딕의 건축 언어를 적용했다. 교회 건축에서 주제단이 위치하고 성직자들의 자리가 마련된 곳을 내진(Choir)이라고 한다. 내진을 밖에서 돌아가며 감싸는 통로를 주보랑(Ambulatory)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에서 미술사 처음으로 고딕의 건축 구조를 만날 수 있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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