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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미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미술이 시대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은 시대도 반영한다. 그래서 때로는 미술을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미술이 시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시대성과 역사성을 읽어 낼 수 있다. 미술이 변화해온 역사적인 자취를 되짚어 보면, 특히나 시대상과 아주 밀착된 미술이 발견된다.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 대략 1750년 무렵에서 1800년까지의 시기를 미술사에서는 ‘신고전주의’라고 부른다.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한다. 이미 15세기 이탈리아에서 고대를 모범으로 한 ‘르네상스’가 일어난 적이 있다. 르네상스를 고전주의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 18세기 중반 다시 한 번 일어난 고전주의를 ‘신고전주의’라고 부른다. 유럽인들은 학문이나 문학 혹은 예술 등 많은 정신문화 영역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고대에서 찾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유럽 문화의 근간이었고, 이런 이유로 유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18세기 유럽인들을 흥분에 빠트린 사건이 일어났는데, 서기 79년 8월 24일 이탈리아 남부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삼켜버린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와 헤라쿨라네움이 발굴된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은 이제껏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경험했던 고대의 유적을 직접 볼 수 있는 굉장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유럽 각국의 귀족들은 발굴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열광적으로 이탈리아로의 먼 여행길에 올랐다. 이 때 유행한 고대 유적지로의 여행을 ‘그랜드 투어’라고 부른다. 그랜드 투어에 올랐던 여행객들은 방문 현장에서 그곳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기념품으로 구매해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풍경화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대에 대한 증폭된 관심은 과도할 정도로 화려했던 바로크를 시들게 했다. 대신,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킴 빙켈만의 표현처럼,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을 지닌 고대 미술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재발견했다. 이상화된 균형과 조화로운 아름다움, 불필요한 장식과 과도한 감정표현을 절제하면서 단순하지만 고결한, 내적 평온함과 존엄성을 추구한 신고전주의 양식이 나타났다. 신고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미술가는 프랑스의 자끄 루이 다비드(1748∼1825)이다. 다비드는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로부터 의뢰를 받아 1784년 로마에서 자신의 대표작이 될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를 완성했다. 화가는 고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저서 ‘로마사’에 기록된 이야기에서 작품의 주제를 찾았다. 기원전 7세기 로마는 이웃해 있는 도시 국가 알바 롱가와 무력 충돌에 직면했다. 두 국가는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한 전쟁 대신, 대표를 뽑아 결투를 시킨 후 승자를 결정하자는데 합의를 했다. 로마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삼형제를, 알바 롱가는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삼형제를 대표로 선발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 카밀라가 쿠리아티우스 형제 중 한 사람과 약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승리에 관계 없이 이 결투는 두 가문 모두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결국 결투에서 승리한 것은 로마였다. 호라티우스 형제들 중 유일한 생존자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여동생 카밀라는 약혼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로마의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이것을 국가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 그는 자신의 칼로 여동생을 처단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애국심 그리고 개인이 겪게 되는 사적인 감정 사이의 충돌과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호라티우스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선택하는 대신 가족의 희생을 선택했다. 카밀라의 죽음은 전쟁의 잔혹함과 그로 인한 인간적 고통을 강조하는 한편, 국가의 승리 이면에 숨겨진 개인의 희생과 비극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분명해 보인다. 국가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감정은 희생될 수 있다. 이것이 고대 로마의 미덕이었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4-12-22

추상은 현대미술의 위대한 발견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의 가장 혁신적인 미학적 발견은 추상(Abstract)이다. 고전미술은 이야기나 사건을 묘사하며 인물이나 대상의 외형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모방했다. 반면 추상미술에서는 구체적인 형체를 알아차릴 수 없고 무슨 내용을 전달하는지 정확히 읽어내기 어렵다. 이처럼 대상의 구체적인 형상을 모방하지 않는 미술을 추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술가들은 어떻게 대상을 그리지 않으면서도 미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을까? 추상미술을 이해하려면 추상 이전의 미술이 정립한 미술의 규범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전 미술이 수백년 동안 추구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모방’과 ‘재현’이었다. 눈으로 경험하는 세계, 우리가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대상의 외형을 그럴 듯하게 모방하는 것이 중요했다. 가령 사과를 그린다고 했을 때 누가 봐도 사과를 알아볼 수 있는 형태 그리고 그 형태에 사과의 색을 입혔다. 우리의 시각적 습관은 대상의 형태를 특정한 색과 연결 짓는다. 하늘은 하늘색, 나무는 나무색, 바다는 바다색 하듯이 하나의 대상은 그 대상의 고유한 색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전미술에서는 작품의 형식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규정되어 있었다. 고전미술을 규범화한 이른바 아카데미 미술은 회화를 주제에 따라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로 분류하고 등급을 나누었다. 성서나 신화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은 역사화가 가장 높은 등급을 차지했고 반면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풍속화는 가장 낮은 등급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현대미술은 고전미술의 이러한 틀을 하나하나 부정하며 미술 본연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예를들어 인상주의는 시각적 경험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화면에 담으려는 시도를 했고 야수파는 대상과 고유색의 경직된 관계를 끊으면서 색채가 지닌 미적 가치를 발견했다. 야수파는 원근법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화적 공간을 창조했고, 표현주의는 그릴 대상을 외부에서 찾는 대신 창작자의 내면과 감정을 작품에 표현했다. 현대미술이 전개되면서 추상을 향한 움직임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추상미술의 탄생은 현대미술의 문을 연 모더니즘의 여러 발견들이 종합적으로 집결된 결과이다.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러시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한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이다. 칸딘스키는 1913년 출판한 ‘회상록 (R00FCblicke)’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기록했다. 어느 날 야외 스케치를 마치고 어둑해 질 무렵 작업실로 돌아왔는데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을 본 것이다. 그림에는 어떤 대상도 그려지지 않았고 오로지 색과 면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 그림을 본 칸딘스키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 작업실을 찾은 그는 전날 본 그림이 거꾸로 세워진 자기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알아볼 수 있는 형체나 형태가 없더라도 선과 색의 조합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경험으로 칸딘스키는 추상 미술의 가능성을 직감하게 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칸딘스키는 음악이 지닌 추상성을 잘 알고 있었고 신지학(Theosophy)의 이론을 자신의 미술에 접목시켜 색과 색, 형태와 형태, 색과 형태가 만나 불러 일으키는 조화 부조화 긴장 균형 등과 같은 정신현상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추상회화의 형식으로 표현했다. 추상미술이 출현하기까지 미술가들의 실험 못지 않게 이론가들의 저술 활동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심리학적 접근 방법으로 ‘감정이입’을 미학적으로 해석한 테오도르 립스, 예술의 내적 동인을 ‘예술욕구’로 설명한 알로이스 리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의 내적 불안이 ‘추상충동’을 일으켰다는 빌헬름 보링어의 예술이론이 추상미술 태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4-10-29

무표정한 전시공간 ‘화이트 큐브’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보고 즐기는 것은 중요한 문화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난 20년 사이 한국에도 많은 미술관들이 지어졌고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미술관 설립을 추진하거나 개관을 앞두고 있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작은 마을 곳곳에 미술관이 있는 서유럽 국가들이나 일본처럼 우리도 생활공간 가까운 곳에서 어렵지 않게 미술을 접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미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에 반비례해 높게만 느껴졌던 심리적 장벽은 한 층 낮아지고 있다.미술관은 소장한 다양한 미술작품을 소개하거나 작품들을 하나의 주제나 특정한 맥락으로 묶어 전시의 형태로 보여준다. 이렇게 우리에게 미술은 미술관이라고 하는 장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은 비교적 현대에와서 생겨난 것인데 그 뿌리는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16세기 이후 독일어권 귀족사회에서 유행한 이른바 ‘분더캄머(Wunderkammer)’에서 찾을 수 있다. 분더캄머는 개인이 수집한 진귀한 물건들을 모아 놓은 방으로 영미지역에서는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이라고 불렀다. 모으고 수집한 물건들을 진열하고 보여주는 분더캄머가 박물관으로 진화했고 소장품을 미술작품으로 한정지어 보여주는 곳이 미술관인 셈이다.우리가 미술작품 감상을 위해 미술관을 찾듯이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미술가들 역시 전시를 목적으로 작품을 창작한다. 19세기 무렵 공공 미술관이 활성화된 것과 맞물려 미술가들은 전시를 위해 미술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현대미술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종종 전통미술에 맞선 진취적인 미술가들의 과감한 실험이 관찰되기는 하지만 현대미술의 태동을 가속화한 주요 사회적 변화는 무엇보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다. 현대미술은 전통미술이 고수해온 거의 모든 부분에 변화를 가져왔다. 작품의 주제와 표현방식, 미술의 목적과 감상 그리고 소비되는 방에 이르기 까지 미술 전 영역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현대미술과 함께 나타나는 여러 변화들 중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전시를 통해 소개된 미술작품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등 사회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현대미술 이전 시대의 미술작품은 전시를 위해 제작되지 않았다. 미술작품은 성격에 따라 크게 종교미술과 세속미술로 분류되는데 어느 경우에 속하든 개별작품에는 분명한 기능과 목적이 있었다. 종교적 목적으로 제작된 작품은 교회를 비롯해 종교적 장소에 설치되어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세속적인 목적의 작품은 권력과 관계된 장소 혹은 누군가의 사적공간 어딘가를 장식했을 것이다. 이렇듯 미술작품은 장소와 공간, 기능과 목적으로 부터 분리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작품은 장소와, 장소는 작품과 연결되어 밀접하게 있었고, 작품과 장소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했다. 미술관이 나타나고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미술관의 전시공간은 중성적이고 중립적이다. 가급적 드러나지 않도록 흰색으로 칠해진 벽면은 무표정한 큐브형태의 공간을 만든다. 그래서 정형화된 전시공간을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 부르기도 한다. 배경이 되는 흰색벽에 작품이 걸리게 되면 어떤 작품이라도 그것이 지녔던 원래의 맥락은 공간에 희석되고 만다. 모든 작품은 창작의 과정 속에서, 그리고 완성되고 소장자의 손에 넘어간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맥락과 관계하며 그 의미를 확장시켜나간다. 그런데 미술작품이 미술관의 벽에 걸리는 순간 그러한 개별적 맥락성이 희미해 진다. 또한 작품이 지나온 개별적 시간성 역시 흐려진다. 대신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시라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이웃하는 다른 작품들과 복잡다단한 미학적 관계를 맺으며 생명을 이어간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4-07-09

강릉에 개관하는 솔올미술관

미술관 건축은 건축 이상을 의미한다. 미술관은 미술을 담는 공간이지만 미술관 건축은 그 자체로도 예술이다. 어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어떤 전시를 기획하는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미술관의 첫 인상은 미술관 건축에서 비롯된다. 마찬가지로 미술관에 대한 기억에 있어서도 다름 아닌 건축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파리의 루브르하면 유리 피라미드,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 하면 나선형 계단, 파리 퐁피두센터하면 외부로 노출된 설비시설이 떠오를 정도로 미술관의 기억은 곧 미술관 건축에 대한 기억이다.예술성, 기능성, 상징성, 공공성 등 다양한 측면이 섬세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미술관 건축이다. 그런 만큼 건축가들에게 미술관 건축은 큰 도전이지만 또한 건축가 개인이 일생동안 맡을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프로젝트일 것이다. 미술관 건축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권위,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는 건축가에게 미술관 건축이 맡겨지지만 미술관 건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건축가는 손에 꼽힐 정도다. 지난 세기 미술관 건축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건축가는 ‘백색 건축’의 거장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이다.마이어 건축의 트레이드 마크는 ‘백색’이다. “백색은 모든 색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색이라고 생각한다. 무지개의 모든 색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리처드 마이어). 백색에 대한 그의 고집은 그것이 지닌 ‘절대성’ 때문이다. 백색은 건축의 순수한 시각적 형태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마이어가 추구하는 건축 철학을 명확히 보여준다. 백색은 모든 기하학적 형태의 미학적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무엇 하나 더함이나 덜함 없는 정갈함과 명료함. 백색과 간결한 선 그리고 형태의 완벽한 조응은 마이어 건축의 고유한 ‘백색 미학’이다.마이어를 상징 짓는 또 다른 건축 요소는 유리파사드이다. 마이어 건축의 보임새를 지배하는 것은 백색의 정렬된 패널과 그로부터 생성된 격자형 그리드이다. 반복된 사각 패턴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자칫 과도할 수 있는 엄격함은 유리라는 투명한 재료와의 접목을 통해 변주되어 한층 경쾌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넓은 유리창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마이어의 공간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지속성과 연결성을 강조한다. 공간과 공간의 연결성, 공간과 사람의 연결성, 주변 환경과 건축의 연결성. 연결성에 대한 마이어의 건축적 해석은 항상 흥미로운 부분이다. 특히나 연결성은 미술관 건축의 본질과 밀착된 문제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미술과 미술, 미술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이어야 한다.재료적 특징, 형태적 특징과 함께 마이어 건축에서 빠트릴 수 없는 조형 요소는 빛이다. 공학적 기술이 건축을 완성한다면, 빛은 건축을 미학적으로 완결 짓는다. 빛은 마이어의 백색 건축에 변화와 움직임을 부여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은 건축 공간 곳곳으로 스며들어 예상하지 않은 움직임을 유발함과 동시에 절제된 조형미를 극대화 한다.한국의 아름다운 도시 강릉에는 현재 마이어의 건축디자인을 계승한 마이어 파트너스의 솔올미술관이 지난 2월 14일 개관했다. 솔올미술관의 건축 역시 마이어의 순수한 백색 미학과 간결한 형태가 자연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 되었다. 솔올미술관은 국내 미술관으로는 처음으로 국내외 추상미술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계획이며 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이 만나는 미학적 담론의 장이 될 것을 기대한다. 이 같은 미술관의 방향성을 충분히 건축에 녹여내기 위해 계획 단계에서부터 긴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미술을 매개로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솔올미술관의 비전이 장소와의 관계성,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마이어의 건축 철학으로 조화롭게 시각화되어 국내미술관 생태계에 의미 있는 좌표를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4-04-23

르네상스 회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마사초의 프레스코화 ‘성 삼위일체’.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북쪽 벽면에는 ‘성 삼위일체(The Holy Trinity)’를 주제로 하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를 그린 화가는 15세기 초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마사초(Masaccio)라는 사람인데 스물 여섯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지만 실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마사초가 ‘성 삼위일체’를 그린 것은 대략 1426년에서 1428년 사이로 피렌체의 노련하고 쟁쟁한 미술가들과의 경쟁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던 것 같다.‘성 삼위일체’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본교리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거룩한 영 성령은 삼위(三位), 세 개의 다른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이다. 마사초의 벽화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성자 그리스도가 중앙에 그려져 있고, 그 뒤에서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부 하나님 그리고 이들 사이에 성령을 상징하는 흰색 비둘기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 요한이 나타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시선을 그림 밖 감상자에게 던지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맞은 편 붉은 망토를 두른 사도 요한은 잠잠히 두 손을 모은 채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마사초의 벽화 가장 아래 부분에는 성 삼위일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인물이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두 사람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당시의 회화적 관례상 마사초가 이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을 했던 기증자 부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림에 묘사된 이런 내용들을 종합하면 마사초의 벽화에는 세 가지 다른 층위의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의 시간과 공간, 성 삼위일체의 시공간적 초월성 그리고 마사초가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벽화에 공존하고 있다.서양미술사에서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는 최초로 수학적으로 계산된 ‘선 원근법(linear pespective)이 적용된 작품이라는 기념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근법은 2차원의 평면에 공간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미술기법이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그림들은 거의 대부분 평면적이었다. 중세미술의 주류는 기독교미술이었고 종교적 기능과 목적을 위해 제작되었다. 중세미술은 종교적 가르침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거나 기도와 묵상으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인물이나 대상 혹은 자연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자연의 시공간을 넘어선 신적인 세계를 상징하기 위해서 찬란한 금빛을 배경으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혹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강조하기 위해 화면 가운데 위치시키고 주변 인물들 보다 크게 그려 넣었다.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표현법도 공간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원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이 지닌 종교적 중요도에 따라 위치와 크기가 달리 표현되면서 발생되는 이런 공간감을 ‘의미적 원근법(Hierarchical proportion)’이라고 부른다.르네상스의 여명이 밝아오면서 미술가들은 눈에 보이는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으려는 시도를 했고 이 때 처음으로 부딪혔던 문제가 공간표현이었다. 화면 위에 가상의 소실점을 찍고 이 점으로 수렴되는 선들을 긋는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려는 대상의 크기를 일정한 비율로 축소시키면 2차원의 평면에 공간감이 만들어진다. 르네상스가 발명한 선 원근법은 19세기 중반 현대미술이 태동하기 이전까지 수 백년 동안 서양미술의 화면구성을 지배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4-01-09

양립할 수 없는 이미지의 공존 라벤나 ‘아리안 세례당 모자이크’

이탈리아 라벤나에는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재위 488∼526) 통치시절인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에 지어진 ‘아리안 세례당(Arian Baptistery)’이 있다. 세례당 천장은 의례 이 시기 교회들이 그런 것처럼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색 입힌 작은 돌이나 유리조각을 배열해 이미지를 만드는 모자이크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빛을 반사시켜 실내공간에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천장 전체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반원형의 둥근 천장 가운데 부분에 크기가 작은 또 다른 원형 하나가 더 들어간 구조를 보인다. 가장 중심의 원에는 세례당에 잘 어울리도록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바깥 원에는 고대 로마 남성들이 입었던 토가를 두른 열 두 명의 사도들이 왕관을 손에 들고 등장한다.그런데 모자이크를 제작한 미술가가 표현한 세례 장면은 상당히 흥미롭다. 특히 옷을 벗고 물 속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에서 그렇다. 미술가는 물 속에 들어 간 사람을 실감나게 그리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미숙하지만 순수함이 느껴진다. 유기적인 선들의 흐름이 강조된 훈데르트바서의 평면적이지만 화려한 색채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한다. 예수는 수염 없는 매끈한 얼굴의 젊은 청년으로 그려져 있다. 동물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은 덮수룩한 수염의 세례자 요한이 예수의 머리에 손을 올려 세례를 준다. 성령을 상징하는 흰색 비둘기가 예수의 머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 이곳에 그려진 예수, 세례자요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는 예수가 세례를 받는 장면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곳 천장 모자이크에는 흰 머리와 흰 수염을 한 나이든 남성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오히려 이교적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피해야할 강의 신이다. 교회미술에서 흔치 않은 일이지만, 기독교 도상이 확립되지 않았던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는 종종 관찰되는 현상이다.모자이크를 제작한 미술가는 어떤 이유에서 예수의 세례 장면을 묘사하면서 성서가 전하고 있는 장면과 전혀 무관한 강의 신을 구태여 그려넣었던 것일까? 오히려 정통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난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이 인물에 대해 어떤 설득력 있는 설명이 가능할까?기독교적 내용과 이교적 이미지가 혼영되어 나타나는 이런 미술현상은 기독교 교리나 기독교 도상이 아직 정립되고 확립되지 않았던 이 시기, 로마미술이 별다른 거리낌 없이 결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술자나 노동자에 가까웠던 당시 미술가들이 익숙하게 보아왔던 미술은 고대 로마가 남긴 유산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보아온 것들은 인물이나 건물 혹은 자연을 묘사할 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고대 로마미술에서 기독교 미술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자주 관찰된다.라벤나의 아리안 세례당 모자이크 보다 100년 앞서 제작된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을 장식하는 부조(359년경)나 비슷한 시기 제작된 라벤나의 갈라플라치디아 영묘당(425∼450년경) 벽면을 장식하는 모자이크나 로마 산타푸덴치아나 교회 앱스 모자이크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작품이 묘사하는 기본적인 내용은 성서로부터 온 것이거나 기독교적 상징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로마미술을 따랐다. 그래서 로마 미술에서 익히 등장하는 태양신 아폴론의 모습이 예수의 모습에 입혀졌고, 기적을 행하거나 제자를 가르치는 예수의 모습은 토가를 입은 로마 철학자와 매우 유사하다./미술사학자 김석모

2023-12-18

회화에서의 공간과 시간문제

그림은 보는 것에서 시작해 그리는 것으로 종결된다. 화가는 끊임없이 보는 사람이다. 보는 것은 시각과 시선의 문제이며, 생각과 관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일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화가의 시선에 따라 그림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림의 매력이다.화가의 시선에 따라 동일한 대상도 달리 보여진다. 어떤 화가들은 바깥 세계를 내다본다. 또 어떤 화가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내면을 들여다본 화가라면 데이비드 호크니는 밖을 내다보는 화가이다. 막셀 뒤샹처럼 훔쳐보거나 르네 마그리트처럼 뒤집어 보길 즐긴 이도 있다.호크니는 보는 것을 즐기는 화가이다. 달리 보는 것을 즐기고 달리 본 것을 즐거이 그린다. 화가라면 누구나 공간, 시간, 시점의 문제와 대결한다. 본 것이나 보는 것을 그리려면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서구회화는 오랫동안 르네상스의 발명품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에 의존해 공간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화가들은 우리 눈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대상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도 시야에 들어온 모든 대상을 동시에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시야에 들어온 대상들 중 오로지 눈이 향한 것만 선명할 뿐 나머지는 상(像)으로 인지될 뿐이다.직접적으로 경험한 대상을 즉각적으로 그림에 옮긴 인상주의의 등장으로 선원근법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호크니는 실제 시각경험을 그림에 담기 위해 원근법의 문제를 다시 소환했다. 러시아 종교철학자 파벨 플로렌스키가 쓴 ‘시각을 넘어서(beyond Vision)’라는 제목의 책에서 호크니는 역원근법(reverse perspective)이란 개념을 접한다. 선원근법의 소실점이 화면 안에서 발견된다면 역원근법의 소실점은 그림 밖 감상자의 뒤쪽에 위치한다. 화면 속 소실점이 그림 속 환영의 공간(가상공간)을 불러일으킨다면 화면 밖 감상자의 뒤 공간으로 소실점이 옮겨지면 그림 속 공간이 그림 밖 현실 공간으로 확장된다.보는 것의 문제가 공간의 문제라면 본 것을 그리는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보는 행위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학은 시간의 순차적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개한다. 정지된 한 장면만 보여주는 회화는 그렇지 못하다. 실감나는 공간, 설득력 있는 묘사나 표현보다 내용 전달이 중요했던 중세미술은 공간성과 시간성에 있어서 보다 유연했다. 논리성에 구애받지 않았던 중세 그림에서는 빈번하게 하나의 화면에 여러 장면이 함께 그려졌다.르네상스 이래로 재현과 모방이 추구되면서 중세적 유연성 대신 논리적 화면구성이 중요해진다. 그 결과 하나의 화면에는 하나의 장면만 그려졌다. 2018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를 찾은 호크니는 11세기 초 제작된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를 감상했다. 길이 70m의 태피스트리에는 노르만의 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역사가 자수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호크니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소실점이 없고 그림자가 그려지지 않았다. 시간에 따른 사건의 전개는 존재하나 공간이 부재하는 그림이다.‘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시간성 문제의 실마리를 찾은 호크니는 90m가 넘는 길이의 작품 ‘A Year in Normandie(노르망디에서의 일 년)’을 완성했다. 아이패드로 그린 노르망디 풍경 220장을 출력해 이어붙인 그림이다. 이 그림은 멈춰 서서 보도록 그려지지 않았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선을 던지며 보는 그림이다. 호크니는 90m 길이의 초대형 파노라마 풍경화를 굴곡진 벽면에 이어붙이면서 감상자를 움직이게 했다. 감상자의 움직임으로 회화가 지녔던 시간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호크니의 이러한 발견을 ‘moving perspective(움직이는 원근법)’ 혹은 ‘움직이는 초점(moving focus)’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11-20

고딕건축의 통일성을 완성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서양 중세미술의 결정체라 부르더라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중세가 추구했던 정신적 가치가 대성당 건축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완성된 것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형태와 기술이 한 지점에서 만나 이루어낸 것이 고딕의 대성당 건축이다.중세 고딕의 대성당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12세기 중엽 처음 등장한 고딕양식이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파리의 노트르담이 지어질 즈음 고딕만의 안정된 건축 언어를 찾을 수 있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건축의 초석을 놓은 이는 교황 알렉산더 3세(재위 1159∼1181)인 것으로 알려진다. 1163년 교황이 파리에 체류한 일이 있는데 이 때 성당이 지어졌다. 당시 파리의 주교는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라는 사람이었다. 주교는 건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했고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후원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교회건축은 주제단이 있는 동쪽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182년 동쪽 부분의 건축이 마무리 되면서 주제단 아래 지하 크립트에 성유물이 안치되었다. 교회건물의 몸통에 해당하는 주랑과 측랑 공사는 1180년과 1200년 사이 완성되었고 1230년경 내부 주랑의 채광을 확보하기 위해 4층이었던 벽면 구조를 3층으로 수정하면서 넓은 창문들을 설치했다. 주랑과 익랑이 교차하는 교차랑 위로 첨탑이 올라갔고 측랑 외벽 버팀부벽 사이사이 공간에 소예배당이 마련되었다. 소예배당은 측랑에서부터 주제단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어 평면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의 모습이 거대한 배처럼 공간의 통일성을 이루어낸다. 신랑의 천정에는 6분할된 교차형 늑재궁륭이 설치되어 건축의 견고성을 한 층 높여주었다.주제단이 위치한 동쪽 바깥 벽면에 거대한 공중부벽이 설치된 것은 1296년과 1320년 사이이다. 고딕 대성당에 인상적인 외형을 입혀준 공중부벽은 장식적인 요소라기보다 붕괴위험을 낮추기 위한 중요한 건축공법이다. 1258년부터 기존에 협소했던 남쪽과 북쪽 익랑 확장공사가 시작되었다. 익랑의 확장공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남북 익랑 파사드 상부에 크고 경쾌한 장미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두 곳의 장미창은 서로 짝을 이루며 북쪽은 구약성서의 장면으로 남쪽은 신약성서의 장면으로 장식되었다.1200년경 시작된 서쪽 정면 파사드 공사가 1245년 무렵 마무리되면서 대성당의 장엄한 모습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십자형 구도의 전형적인 5랑식 바실리카 형식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길이가 122.5미터 폭이 12.5m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 각각의 출입문 위에 설치된 팀파늄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중앙 출입문 상당 팀파늄에는 ‘최후의 심판’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성 안나, 좌측에는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출입문 바로 위층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 스물여덟 명이 전신 입상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왕들의 회랑’으로 불린다.이 조각들은 프랑스 혁명기 때 모두 파손되었다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왕들의 회랑 위층 중앙에는 지름이 9.6미터에 이르는 대형 장미창이 들어가 있다. 장미창 위로 일련의 기둥과 아치가 고딕의 전형적인 창틀 트레이서리 모양으로 줄지어 있어 파사드의 무게감을 한층 덜어주면서 경쾌한 느낌을 불어 넣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파사드 가장 높은 곳에 20미터 높이의 뾰족한 종탑 두 개가 짝을 이루며 위용을 뽐내야 했지만 아쉽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안정적이고 네모진 모양의 종탑이 올라갔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10-09

상스 대성당과 초기 고딕건축의 발달

12세기 중반 출현한 고딕건축은 유기적 연결성이라 새로운 접근법으로 중세 건축을 혁신했다.천장에 설치된 교차형 늑재궁륭은 하중을 안정적으로 분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촘촘하게 맞물려 있는 늑재들은 다발을 이루며 벽을 타고 내려와 기둥으로 연결된다. 건물 외벽에 튼튼한 부벽을 설치해 팽창하는 힘을 지탱했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플라잉 버트레스’ 공중부벽을 설치했다.그물처럼 견고하게 엮인 늑재와 외부에서 든든하게 힘을 상쇄시키는 공중부벽 덕분에 두꺼운 벽이나 육중한 기둥이 불필요해 졌다. 고딕 건축가들은 오히려 벽의 넓은 면을 유리창으로 대체했다. 더 많은 빛이 실내로 유입되면서 실내공간은 한 층 밝아졌다. 넓은 유리창들은 형형색색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은 신비로운 색을 발하며 교회를 채웠다.1144년 6월 11일 고딕으로 새롭게 단장한 생 드니 교회의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왕후와 함께 축성식에 참여했고 외국에서 온 축하 사절은 물론 프랑스 각 지역 주교들도 자리했다. 고딕양식으로 개축된 생 드니 교회의 축성식은 파리를 비롯해 일 드 프랑스 지역에 초기 고딕이 확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120km 떨어진 곳에 상스(Sens)라는 도시가 있다. 상스에 지어진 생 떼띠엔느(Saint-Etienne) 대성당은 생 드니와 함께 초기 고딕 건축구조가 정착하는데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상스 대성당 건축이 시작된 것은 1135년이다. 공사가 시작된지 30여 년이 지난 1164년 경 주제단이 있는 내진 부분이 완성되었다. 1175년과 1180년 사이 회중석이 있는 주랑과 좌우 통로인 측랑이 만들어졌다. 완성된 교회의 전체 길이는 122m에 달했고 13.5m의 폭에 높이가 무려 24.5m나 되었다.상스 대성당의 벽면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구조가 조금 독특하다. 첨두형 아치로 연결된 아케이드가 아래층을 구성하고 그 위로 트리포리움(Triforium)이 나타난다. 트리포리움은 주로 아케이드 층 위에 마련된 열린 공간으로 작은 아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측랑의 지붕 위에 마련된 좁은 공간으로 외부로 창이 나있지 않아 항상 어둡다.2층에 나타나는 트리포리움 위로 넓은 고측창이 설치되어 있어 밝은 빛이 실내로 들어온다. 12세기 초기 고딕성당들은 대개 아케이드, 트리뷴(Tribune), 트리포리움, 고측창으로 구성된 4층 구조를 보인다. 상스 대성당은 넓은 공간의 트리뷴을 생략하는 대신 트리포리움을 설치하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외부에 공중부벽을 설치했다. 트리뷴을 없앤 것은 더 넓은 고측창을 확보하기 위한 건축적 실험으로 보인다.상스 대성당의 견고한 늑재궁륭은 십자형의 4분할 대신 세 개의 늑재가 교차한 6분할 형식을 채택했다. 급한 경사를 보이는 궁륭을 교차해 가로지르는 늑재들은 벽면으로 연결되어 벽면을 타고 내려온다. 새로운 공법이 적용된 초기 과정이라 교회 내부에서 수려한 장식적 요소를 찾을 수는 없다. 발견되는 장식이라고 해야 건물을 단단히 잡아주기 위한 크고 작은 둥근 기둥들이 배관처럼 천장에서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는 정도가 전부이다. 한 세기나 지나야 등장하는 발달된 고딕의 화려함과 비교한다면 투박하고 소박한 로마네크스에 가깝다 하겠다.이런 무뚝뚝함이 신경 쓰였는지 아래층 기둥 위 아케이드의 연속된 형태가 트리포리움에 그대로 축소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동일한 형태의 첨두형 아치가 다시 고측창에서 확대된 크기로 등장한다. 연속된 아치가 만들어낸 수평적 움직임 그리고 약간의 변주가 가해진 형태의 수직적 반복이 살짝 리듬감을 불어 넣어 기계적으로 복잡한 실내공간에 옅은 표정을 불어 넣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09-18

고딕건축 발상지-파리 북부의 생 드니 성당

서양미술사에서 통용되는 몇몇 용어들은 특정 미술을 낮추어 부르기 위해 악의적으로 고안되었다. 르네상스 끝 무렵 잠깐 등장한 매너리즘,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바로크,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준 인상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에 나타난 고딕의 경우도 그렇다. 고딕(Gothic)이라는 단어 안에는 벌써 고트족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 야만족의 미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물론 이것은 미술사적으로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이다. 고대를 모범으로 한 자신들의 업적에 가치를 더할 의도로 앞선 시대를 ‘암흑’으로 규정하고 그 때 유행한 건축 양식을 고딕이라 불렀다. 하지만 르네상스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야만스럽다고 평가했던, 그래서 고딕이라고 불렀던 건축은 실제로는 고트족의 유산도 아닐뿐더러 야만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신비로운 빛을 직접 경험했거나 끝없이 솟아 오른 쾰른 대성당의 장엄함 앞에서 압도당한 경험이 있다면 중세를 감히 암흑이라거나 야만적이라 섣불리 폄하하거나 폄훼하지 못할 것이다.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대략 1150년 무렵으로 한 세기 이상의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로마네스크가 안정기에 접어들어 전 유럽에 확산되고 있을 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건축은 높고 웅장한 몸집을 완성하기 위해 두꺼운 벽체와 육중한 기둥을 필요로 했다. 고딕역시 높이를 지향했다. 신을 향한 충성심일까? 종교권력의 욕망일까? 구원에 대한 끓어 넘치는 간절함일까? 무엇이 중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높은 교회를 짓게 했는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고딕으로 넘어오면서 교회는 더 높아졌고 더 화려해졌다. 더 높아졌지만 무게를 덜어낸 듯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장식성 풍부한 창틀 트레이서리(tracery)가 파사드 벽면 빈 공간을 수놓듯 채우면서 시각적 무게가 더욱 줄어 들었다. 고딕이 지닌 수직 상승적 외형은 건물 외부를 장식한 첨탑을 통해 보다 강조된다. 고딕은 어떻게 무게를 극복하고 높이를 추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화려함을 통해 고딕은 무엇을 추구했던 것일까?고딕이 처음으로 발달한 곳은 프랑스 수도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 드 프랑스지역이다. 특히 파리 북부에 위치한 생 드니(Saint Denis) 성당 주보랑 부분에서 처음으로 고딕의 건축형식이 등장했다. 생 드니 성당은 프랑스 왕가의 무덤으로 기능하던 곳으로 파리의 수호성인 디오니시우스(Dionysius)에게 봉헌된 교회이다.성인 디오니시우스, 프랑스식 발음으로 생 드니는 3세기 중엽 갈리아 지역 복음화를 위해 교황 성 파비아누스가 파견한 일곱 명의 성직자 중 한 사람이었다. 파리의 초대 주교로 임명된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를 전파하다 체포되어 로마의 신 메르쿠리우스를 경배하던 언덕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 언덕을 지금은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몽마르트르(Montmartre)라고 부른다.전설에 따르자면 참수당한 디오니시우스는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몇 킬로 미터 걸어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자신의 무덤 자리에 이르러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4세기 후반 그곳에 처음으로 지어진 교회가 생 드니이다. 생 드니 성당에 고딕의 건축원리를 적용한 사람은 1122년 생 드니 수도원장으로 임명된 쉬제르(Suger)이다. 이미 일 드 프랑스 다른 지역에서 로마네스크를 대체하는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대성당들이 건축되는 것을 목격한 수도원장은 생 드니 수도원 교회를 개축하면서 보다 치밀한 방식으로 고딕의 건축 언어를 적용했다. 교회 건축에서 주제단이 위치하고 성직자들의 자리가 마련된 곳을 내진(Choir)이라고 한다. 내진을 밖에서 돌아가며 감싸는 통로를 주보랑(Ambulatory)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에서 미술사 처음으로 고딕의 건축 구조를 만날 수 있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3-08-28

로마네스크 건축조각의 특징

중세미술에서 조각의 발달 과정을 살필 때 우선 눈여겨 보아야하는 부분은 건축과 조각의 관계이다. 중세시대에는 아직 ‘순수미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순수미술이라는 말에는 유용한 쓰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작품에 내재된 아름다움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중세미술은 ‘순수’하지 않다. 중세미술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었고 물질로 된 미술품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았다. 미술품이 가리키는 성스러운 대상, 미술품이 상징하는 종교적 가치가 아름다웠던 것이다. 중세미술 중심에는 건축이 있고 그것을 목적과 기능에 맞게 장식하는 것이 그림과 조각이었다. 그림과 조각이 건축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은 르네상스 때부터이다. 특히 건축으로부터 조각의 해방은 그림보다 조금 더뎠다. 매체의 특성상 조각과 건축이 가지는 밀착도가 높기 때문이다. 하나는 입체라는 특징 때문에 다른 하나는 재료의 유사성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는 밀접할 수 밖에 없다. 이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남부 프랑스의 오래된 도시 아를(Arles)에 세워진 교회 생 트로핌(St. Trophime)이다.생 트로핌 교회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것은 1100년과 1150년 사이이다. 정면 파사드를 장식하는 조각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출입구 상단 부분에 마련된 반원형의 팀파늄에는 ‘심판자 그리스도’가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전신 후광에 둘러싸인 그리스도는 옥좌에 앉아 오른손을 들어 세상을 축복한다. 왼손에는 생명의 책이 들려 있다. 그리스도 주변으로 4복음서자의 상징이 나타난다. 팀파늄 아래의 가로로 긴 띠처럼 생긴 상인방이 출입문과 경계를 이룬다. 그곳에도 역시 인물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열 두 사도들이다. 흥미롭게 상인방이 좌우 벽면으로 길게 연결되어 파사드 전체를 가로지르는 프리즈(Frieze)를 만들어 낸다.프리즈는 파사드를 아래와 위로 나누는 명료한 경계가 되지만 전체적으로 통일된 느낌을 만들어 준다. 프리즈에도 어김없이 수많은 인물상들이 부조로 나타난다. 팀파늄의 심판자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왼쪽 프리즈에는 구원받아 천국으로 초대된 사람들의 행렬이 반대편 오른쪽 프리즈에는 사슬에 묶여 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려져 있다. 프리즈의 좁은 공간에 일렬로 서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슷한 생김새에 비슷한 머리모양, 입고 있는 옷과 옷의 주름도 비슷하다.프리즈 아래에는 고전적 형태의 기둥들이 설치되어 있다. 프리즈를 지탱하는 기둥들 사이로 깊이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그곳에 사도들과 성인들의 모습이 전신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조각상들은 프리즈의 인물들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세부 묘사가 섬세하지만 독립된 입체조각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건축에 종속되어 있어 평면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부조라고 부르기에는 꽤나 입체적이다. 부조보다는 입체적이고 독립 조각상보다는 평면적인 이 조각들은 앞으로 조각이 어떤 방식으로 건축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될 것인지 예견해 준다. 물론 건축에서 완전히 해방된 독립 입상이 등장하기 까지는 적어도 200년 이상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육체를 정신의 감옥으로 보았다. 전성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어받아 이미 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형상을 발견하고자 했다. 조각이 교회건축을 장식하기 시작한 12세기 무렵 조각에 대한 그런 정도의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평범해 보이는 생 트로핌 교회의 파사드 조각들은 서양미술사의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은 초기 로마네스크 조각의 특징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조각이 건축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3-07-24

중세의 교회건축과 조각장식의 출현

유럽의 도시에서는 어렵잖게 중세에 지어진 교회건축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건축 곳곳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파사드 벽면 위에도 고개를 살짝 들어 보기에 적당한 높이에도 성인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기둥처럼 서 있다. 가장 의미심장한 조각은 팀파늄(Tympagnum)에 들어가 있다. 팀파늄은 출입문 바로 상단 반원형의 너른 면을 가리키는데 주로 이곳의 조각은 부조 형식으로 나타난다. 빈도수로 보자면 영광의 그리스도나 심판자 그리스도 혹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옥좌에 앉으신 성모 마리아가 가장 자주 등장하는 도상이다.조각상은 교회 내부에서도 발견된다. 벽의 무게를 견디는 기둥에 돌출된 선반을 마련하고 그 위로 성인들의 전신 조각이 올라가 있다. 중세교회 건축과 조각장식, 당연한 조합 같지만 교회를 조각으로 장식할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기독교 교리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우상숭배의 문제 때문이다. 시간은 한참 거슬러 올라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수용하고 국교로 지정한 4세기 5세기 때 일이다. 처음으로 교회가 지어지고 교회에서의 그림이나 조각 등 미술품 사용에 대한 문제가 대두 됐다. 치열한 논쟁 끝에 그림 사용은 허용이 되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글을 알지 못했고 그림을 통해서라면 누구라도 쉽게 성서나 교회의 가르침을 읽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그림은 허용되었지만 조각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이교(異敎)의 신상이 만연해 있었던 상황에서 기독교가 조각사용을 허락한다면 종교적으로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교회를 장식하는 건축조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11세기 초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규모 교회들이 지어지면서 부터였다. 6세기에서 10세기 이르는 중세 혼란기, 혹자는 암흑기라 부르기도 하는 이 시기가 지나가고 낡은 교회들이 새롭게 단장되었고 곳곳에 웅장한 교회들이 지어졌다. 이시기를 거처 12세기 무렵 건축조각이 확산된 걸 보면 수 백 년의 시간이 지나는 사이 이미 서유럽지역이 깊이 기독교화 되었고 조각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남부 프랑스의 도시 아를(Arles)의 생 트로핌(Saint-Trophime) 교회 파사드 벽면에는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 조각을 대표할 법한 중요한 작품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12세기에 건축된 비교적 아담한 크기의 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특유의 투박한 모습을 드러낸다. 인상적인 것은 전에 없던 방식으로 파사드 전체가 조각으로 장식되었다는 점이다.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 벽면에 부조에 가까운 전신 조각상들이 정렬되어 나타난다. 정문 위에 마련된 반원형의 팀파늄에는 옥좌에 앉으신 영광의 그리스도가 역시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정문과 팀파늄 사이 띠 형태의 좁은 면인 상인방(Lintel)에도 작은 크기의 인물 열 두 사람이 등장한다. 이들은 예수를 따르던 열 두 명의 제자들처럼 보인다.사람들이 들고나는 출입문 상단의 팀파늄은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간이다. 출입문은 타락한 세속과 성스러운 교회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팀파늄에는 죄를 자복하라는 경고의 이미지가 자주 나타난다. 근엄한 모습의 ‘심판자 그리스도’ 혹은 생 트로핌의 경우에서처럼 ‘옥좌에 앉으신 영광의 그리스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커다란 아몬드 모양의 전신 후광에 둘러싸인 그리스도 좌우로 둘씩 짝을 이룬 생명체가 나타난다. 이들은 신약성서 4복음서자를 상징한다. 그리스도 우편 아래에는 구원받아 천국으로 반대쪽 좌편에는 쇠사슬에 묶여 지옥을 끌려가는 영혼들이 나타난다. 감상자의 눈높이 좌우 벽면으로 서 있는 성인들은 독립된 조각이라기보다는 건축에 종속된 듯 보인다. 이들에게는 표정도 감정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미동도 없이 굳은 자세와 표정으로 건축의 한 부분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이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조각의 특징이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3-06-26

로마네스크 교회건축의 혁신 : 천장 구조의 변화

11세기 초 출현한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은 고대 로마 건축을 닮았다. 비록 지금은 폐허가 되어 옛적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클뤼니에 세워진 수도원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위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우선 로마네스크 교회는 크고 높고 우람하다. 로마네스크를 뒤따르는 고딕은 더 높고 더 웅장하지만 육중하거나 우람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돌의 무게를 극복하고 시각적으로 상승하는 듯 보인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은 건축을 올린 방식과 꾸미는 장식이 달랐다.고딕이 공학적 기술력으로 높이를 추구할 수 있었다면 로마네스크 건축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제한적이었다. 고딕교회의 겉은 마치 피부에 문신을 새긴 듯 갖갖이 문양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로마네스크는 그렇지 않다. 아주 단순하다. 자전거 바퀴 창살모양의 큰 창이나 외벽에 움푹 들어간 벽감을 마련하여 조각 작품을 올려놓은 정도다. 고딕교회는 섬세하고 복잡하고 현란한 문양으로 빈틈없이 꾸며졌다. 로마네스크는 기껏해야 완만한 아치 장식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로마네스크는 화려하지 않다. 그 대신 명료하다. 단순한 만큼 정갈하다. 나름의 규칙을 지킨 꾸미는 요소들에서 잔잔한 리듬감도 전달된다.중세건축은 암호화된 상징코드이다. 지상에 세워진 하늘의 집. 죄악 된 세상을 이긴 승리의 상징이자 죽음의 해방과 구원의 약속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런 의미가 녹아 있는 교회건축은 위엄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로마네스크 교회가 우람하고 견고한 요새의 모습을 지닌 이유다. 강한 요새, 안전한 피난처, 악과 맞서 마침내 거머쥘 승리와 구원의 약속. 중세 교회건축에는 이러한 상징과 메타포가 담겨 있다. 기독교의 종교성을 집약적이고 종합적이고 직관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높고 웅장한 건축이 필요했다.제한된 기술로 높이 있는 건축을 완성해야 한다면 벽을 두껍게 쌓고 굵고 튼튼한 기둥으로 하중을 바치는 것 이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로마네스크 건축가들도 이 방법을 취했다. 높이 올릴수록 벽은 두터워졌고 벽이 두터워진 만큼 지탱하는 기둥의 크기 역시 비례해 늘어나야 했다. 그 결과 로마네스크 교회는 육중한 무게감과 우람한 몸집을 가지게 되었다.앞선 시대와 비교했을 때 로마네스크 교회건축에서 관찰되는 큰 변화 중 하나는 천장이다. 로마네스크 이전에는 주로 평평한 목조천장이 사용되었다.어떤 경우 천장 없이 지붕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경우도 자주 있다. 이런 천장은 로마네스크가 완성한 장엄한 석조 건축에 어울리지 않았다. 석조 건축의 보임새에 걸맞는 천장이 필요했다. 그렇게 고안된 것이 석조로 된 교차 궁륭(groin vault)이다. 궁륭은 둥그스름하게 만든 석조 천장을 말하는데 이미 고대 로마시대의 건축에서 반원통형 궁륭이 사용되었다. 교차 궁륭은 좀 더 발달된 것으로 반원통형 궁륭 두 개를 서로 교차 시켜 만들어 졌다. 건축의 여러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다른 요소들의 구조적 변화를 야기한다. 건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안정성이다. 형태나 구조의 변화는 역학적 변화를 수반하고 새로운 힘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관계된 요소들에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천장의 형태 변화는 벽면 구조의 변화 그리고 건물 층의 분화에 영향을 주었다. 건축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건축가들이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 기본적인 힘은 하중이다.석조 궁륭으로 천장이 바뀌면서 또 다른 힘이 중요해 졌다. 좌우로 팽창하는 힘은 물론이고 기온 변화에 따른 재료 성질의 변화로 발생할 수 있는 변수까지 예측해야 했다. 십자형 교차 궁륭의 하중은 네 모서리로 집중된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분산하기 위해 건물 내벽과 외벽에 벽기둥이나 부벽이 마련되었고 그 결과 로마네스크 교회의 보임새 또한 달라졌다./미술사학자 김석모

2023-05-22

클뤼니 수도원교회와 로마네스크 건축의 발달

10세기에서 11세기로 넘어갈 무렵 중세 유럽 사회에는 봉건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봉건제도는 토지를 매개로 주군과 봉신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토대로 형성된 사회제도이다. 봉건제는 넓은 땅을 소유했던 대지주들의 권력을 강화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교회와 수도원의 세속적 영향력 또한 강화시켰다. 중세의 성직자들에게는 많은 사회적 특혜가 주어졌다. 이들은 지식을 독점했고 세금이나 노역을 면제 받았다. 교회에 대한 이 같은 특권은 종교적 기강 약화를 비롯해 여러 부작용들을 야기했다. 결정적으로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겼다. 수도원 건립을 위해 토지를 제공해 준 영주들이 수도원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행사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다. 모든 권력은 권력의 속성상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이때도 그랬다. 부패한 종교권력과 부패한 세속권력이 온갖 특혜를 누릴 수 있는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충돌했다.종교의 본질이 오염되어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 불씨를 당긴 사람은 아키텐느의 공작 기욤이다. 그는 세속권력의 개입 없는 수도원 설립을 위해 자기가 소유했던 땅을 수도사들에게 내주었고 이렇게 지어진 것이 클뤼니 수도원이다. 910년 문을 연 클뤼니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켜 진실된 예배와 경건한 삶과 구제의 실천을 강조했다. 클뤼니의 신앙회복 움직임은 불길처럼 번졌다. 가장 번창했을 때에는 이곳에 속한 수도원이 무려 천 이백여개, 수도사들의 수가 이 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많은 수의 수도사들이 클뤼니로 몰리면서 수도원 교회의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어 981년 첫 번째 확장 공사가 시작된다. 엄밀히 말해 확장공사라기 보다는 보다 큰 규모로 신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렇게 두 번째 지어진 클뤼니 수도원 교회를 미술사에서는 편의상 클뤼니 II라고 부른다. 클뤼니 II는 장방형의 라틴십자가 구조를 가진 3랑식 바실리카로 지어졌고 회중석과 내진(內陣) 사이에는 익랑(翼廊)이 마련되었다.신축을 통해 넓은 공간이 확보되었지만 그 역시 충분하지 않아 다시 한 번 확장공사가 진행되어 1089년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지어진 세 번째 교회를 클뤼니 III라고 부른다. 클뤼니 III에서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크기가 커짐에 따라 건축의 세부 구조에도 큰 변화를 보이는데, 우선 3랑식 이었던 클뤼니 II에 두 개의 측랑이 추가되어 5랑식이 바실리카가 되었다. 천장의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 원래는 신랑과 측랑 모두 평평한 나무 패널이 천장을 덮고 있었는데 세 번째 클뤼니 교회의 측랑에는 교차형 궁륭(Cross Vault)이 나타난다.또한 클뤼니 II는 하나의 익랑을 가졌으나 클뤼니 III에서는 익랑 하나가 더 설치되었다. 두 개의 교차랑 상단부 그리고 아래쪽 익랑의 바깥부분 상단에 각각 팔각형의 첨탑이 올라갔다. 건축 구조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후진의 외벽에 다섯 개의 소예배당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진과 후진사이에 지나다닐 수 있는 주보랑(周步廊)이 생겼다.클뤼니의 수도원 개혁운동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유럽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클뤼니 III에서 보여주는 건축적 구조는 프랑스 지역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건축 그리고 더 나아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일 드 프랑스(le-de-France)지역에서 고딕 건축이 발달하는데 중요한 근간을 마련해 주었다. 클뤼니 교회는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는 가운데 완전히 파괴되었다. 한때 가톨릭 세계에서 가장 웅장함을 뽐냈던 클뤼니 수도원 교회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폐허로 변한 옛 흔적들이 을씨년스럽게 과거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미술사학자

2023-05-01

서양미술사 양식의 탄생 : 로마를 닮은 ‘로마네스크’

476년 게르만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이 패망한 후 유럽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사회는 급격히 변했고 사람들은 비참한 마음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로운 천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종말과 심판이라는 세기말적 공포에 휩싸였다. 새천년이 밝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마지막도 심판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말의 공포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안도했다. 신의 분노가 진정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마을들은 서로 경쟁하듯 낡은 교회를 단장하거나 크고 웅장한 교회를 새로 짓기 시작한다. 이 시기 미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양식’이라는 것이 출현한 것은 괄목할 만한 점이다.미술에서 양식은 스타일을 말한다. 개개인의 미술가들은 누구라도 각자 고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술에서의 양식은 개별 미술가들의 독특한 특징만을 뜻하지 않는다. 같은 시대 특히 같은 지역에 속한 미술가들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어 있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받은 교육이나 지역에서 흔히 접한 미술이 자연스럽게 의식으로 스며들어 영향을 준다. 미술가들은 각자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형식을 지니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양식이라고 부른다. 서양미술사의 시대구분은 대부분 양식에 따라 나누어진 것이다.10세기에서 11세기로 넘어가는 동안 미술에 양식이 관찰되는데 후대 미술사 연구자들은 그것에 ‘로마네스크(Romanesqu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단어는 고대 로마를 가리키는 ‘로만’과 ‘~과 닮은’을 뜻하는 접미사 ‘-esque’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로마를 닮은’이라는 의미다.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에 ‘로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서유럽 중세 기독교 미술에 라틴 다시 말해 로마문화가 녹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로마네스크라는 개념에는 라틴어 문명권의 정신적 연대의식이 담겨 있으며 고대 로마의 미술이 중세 미술에 흘러 들어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건축은 많은 요소들을 고대 건축에서 가져왔다. 교회건축이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바실리카’ 구도가 로마에서 온 것이고, 세례당이나 소규모 예배당을 지을 때 나타나는 중앙집중식 원형 구도는 고대 신전이나 영묘에서 가져 온 것이다. 돔이라 부르는 반구형 천장이나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아치 그밖에도 육중하고 두꺼운 벽면구조 또한 고대로마의 건축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이 모든 것을 고대 로마로부터 가져온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중세인들이 새롭게 발명한 것도 있다. 예컨대 목재 버팀구조의 천장을 석조 반원통형 궁륭(Vault)으로 바꾸었는데 이 새로운 천장구조는 중세 교회건축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으로 꼽힌다.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발전을 견인한 것은 수도원과 수도사들이다. 특히나 910년 무렵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클뤼니(Cluny)에 세워진 수도원은 미술사 발달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교회 개혁을 주창했던 몇몇 수도사들은 부르고뉴의 공작 기욤 드 아키텐느로부터 땅을 기증받아 클뤼니에 수도회를 창설했다. 교회 개혁의 선봉에 섰던 클뤼니 수도회는 남으로부터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를 지켰고 스페인 사람들이 이슬람에 빼앗겼던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성인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것으로 알려진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을 계획하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기독교도 사이의 유대감을 돈독하게 다진 것도 클뤼니 수도회였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04-10

수도원의 출현과 중세미술의 발달

중세미술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수도원이라는 공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수도원은 오로지 종교적 삶에 헌신하기 위해 속세와 거리를 두고 세워진 신앙 공동체이다. 중세시대의 수도원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목적을 위해 지어졌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했다.중세시대에는 보편 교육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이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고위 계층에 제한된 일종의 특권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지식이라는 것은 일상이 이루어지는 좁은 영역 안에서 경험적으로 얻어진 것에 불과했다.이러한 중세시대의 상황 속에서 수도원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지식이 생산되고 그리고 그것이 보존되고 전수된 곳이었다.수도사들은 신의 뜻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성서를 읽을 수 있어야 했고 수도원에서는 성서의 내용을 보존하고 보전하기 위해 필사작업이 이루어졌다.수도원은 고행수덕을 삶으로 실천한 종교적 은둔자들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성인 안토니우스(251∼346)는 일찍이 이집트 광야에서 홀로 은둔 수도자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여겨진다.홀로 은둔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이 서서히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수도원의 기원이 된다. 최초의 수도원은 터키의 카파토키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서방의 교회들이 이를 받아들여 수도원이라는 종교적 시스템이 만들어졌다.서유럽지역에서 가장 먼저 수도원이 세워진 곳은 프랑스의 시골마을 리귀제(Ligug00E9)이며 316년 뚜르(Tour)의 주교 마르티노가 설립했다. 372년에는 리귀제 인근 마을인 마르무티에르(Marmoutier)에도 수도원이 세워졌다.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당시 갈리아 지역에 특히나 많은 수도원들이 지어졌으며 5세기 무렵에는 무려 230여 개의 수도원이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개별 수도원들은 각자 나름의 규율에 따라 독립적으로 운영이 되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수도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종교적으로 거룩한 삶을 실천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여러 부작용들이 나타났다.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자 수도원들은 일정한 규칙과 규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이런 배경에서 세워진 곳이 엄격한 규율로 잘 알려져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이다. 529년 누르시아의 성인 베네딕토(480∼547)는 몬테 카시노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종교적 이상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면서 실질적으로 지켜야할 수도원 규칙서(Regula Sancti Benedicti)를 만들었다.베네딕트 수도회의 규칙서의 핵심 내용은 경건한 기도생활과 지혜로운 실천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라틴어 문구가 ‘Ora et Labora’이며 우리말로는 ‘기도하고 일하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강한 어조의 이 규율은 수도사들에게 성서를 읽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함과 동시에 육체적인 나태함을 철저히 금하면서 동시에 육체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베네딕트회의 규칙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쓰여 있다. “나태함은 영적인 것이다.따라서 수도사들은 정해진 시간에 일 해야 하고 성서를 읽어야 한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육체적인 노동을 그 이후 저녁 6시까지는 성서를 읽어야하고 저녁 기도시간 까지는 계속 일을 해야만 한다” 수도회의 이 같은 규율은 육체노동이 종교적 영성활동과 밀접하게 닿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수도사들이 잠시라도 나태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도와 거룩한 독서 그리고 육체노동이 조화되도록 공동체의 일과를 구성했다.베네딕트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삽시간에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03-20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800년 성탄절 날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초청해 왕관을 씌워주었다. 서양의 역사에서 이 사건에는 여러 상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이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교황은 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의 왕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고 강력한 힘을 지녔던 세속 군주 카롤루스는 교황을 지켜주었다. 카롤루스가 치세하는 동안 프랑크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문화와 학문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그의 정책에 힘입어 혼란의 중세 유럽은 첫 번째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이 때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814년 1월 28일 갑작스런 카롤루스의 죽음으로 왕국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왕좌를 이어받은 것은 여섯 번째 아들 루도비쿠스 1세였다. 형들이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카롤루스의 유일한 적자로서 그가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한동안 아버지와 함께 왕국을 다스렸지만 카롤루스 사후 영지 분봉 문제로 재위하는 동안 내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심지어 상속 문제로 아들들이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가까스로 복귀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두터운 가톨릭 신앙을 가졌던 왕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도원을 후원했다. 성직자를 국가 주요 관직에 등용했고 교회와 수도원에 면세 특권을 주었다. 강한 종교적 신념으로 일생동안 가톨릭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는 ‘독실한’이라는 의미의 별칭 ‘경건한(Pius)’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왕으로서 그의 정치력은 무능에 가까웠다.숱한 역경을 겪으며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던 루도비쿠스가 840년 세상을 떠났다. 프랑크의 전통에 따라 장자 로타리우스 1세에게 왕국이 상속되었지만 이에 불복한 이복동생 카를루스 2세와 셋째 동생 루도비쿠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전쟁의 혼란은 843년 왕국을 동, 중, 서로 나누는데 합의한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된다. 로타리우스 1세가 중프랑크를, 카롤루스 2세가 서프랑크를 그리고 루도비쿠스 2세가 동프랑크를 차지했다. 프랑크 왕국이 세 개로 나누어지면서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들의 경계가 어렴풋 만들어졌다.분열된 왕국은 예전처럼 강하지 못했다. 허술한 틈을 놓치지 않고 남쪽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동쪽에서는 마자르족이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이 침입과 약탈을 시작했다. 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침략은 10세기에 이르는 동안 이어졌다. 특히 북쪽 노르만은 프랑크 왕국은 물론이고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해안지역에 수시로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다. 오랜 시간 거듭된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쇠락했고 봉건제도라고 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출현한다.봉건제도는 토지를 매개로 형성된 사회적 주종관계를 가리킨다. 봉건제도 아래 사람과 토지는 계급화되어 큰 권력에 종속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었고 영주들이 토지를 권력화함으로써 왕권이 약화됐다. 영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봉신을 거느려야 했고 영주로부터 봉토를 부여받은 봉신들은 충성을 맹세했다. 약한 영주는 강한 영주를 강한 영주는 더 강한 영주를 섬겼고 이렇게 맺어진 주종관계의 봉건사회는 피라미드 구조의 계층을 만들었고 그 정점에는 왕이 있었다.이 같은 정세 속에서 936년 지금의 독일에 해당하는 동프랑크 지역에서 작센의 오토공작이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카롤루스처럼 대제로 불리게 될 오토는 헝가리의 마자르족과 보헤미아의 슬라브족을 제압했고 서쪽으로는 벨기에 남쪽으로는 이탈리아까지 정복했다. 교황 요한 2세는 962년 2월 2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오토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고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정복한 대왕 오토는 이교도를 굴복시키며 그리스도교의 수호자가 되었고 이를 토대로 서양의 중세미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02-20

카롤루스 대제와 카롤링거 르네상스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c.690-741)은 약해진 왕권을 틈타 나라의 실권을 손에 넣으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카를 마르텔의 권력을 물려받은 것은 둘째 아들 피핀이다. 키가 작아 ‘단신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용맹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를 마르텔이 카롤링거 왕조의 문을 열었다면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자리한 가운데 그를 위해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768년 피핀이 쉰 넷으로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이 왕좌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카를로스이다.유럽의 역사는 특별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에게 ‘위대한(magnus)’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카를로스의 이름에도 명예로운 수식어가 따라붙어 우리는 그를 ‘샤를마뉴’라고 부른다. 샤를마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강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체계적인 행정제도를 도입해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안으로는 문화와 예술이 융성하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샤를마뉴는 재위하던 45년 여 동안 무려 60여 차례나 전쟁을 치뤘다고 한다. 그 결과 이슬람이 지배하던 스페인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여 국경을 곤고히 지켰고, 강력한 적군 색슨 족을 엘베 강 유역에서 완전히 제압했다. 영토 확장과 국내 정세 안정에 총력을 기울였던 샤를마뉴가 놓치지 않았던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문화와 예술, 학문의 부흥이었다.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서유럽은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 때문에 문화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국운을 좌우하는 것이 강한 군사력과 넓은 영토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샤를마뉴는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펼치며 중세문화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샤를마뉴는 각 수도원들이 교육에 앞장설 것을 명했다. 왕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수도원에는 학교가 세워졌고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샤를마뉴는 잠자리에 들기 전 라틴어 쓰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안정적인 통치를 위하여 정치적 중심지가 필요하다고 인식한 샤를마뉴는 게르마니아 지역과 가까운 아헨(Aachen)을 수도로 정했다. 아헨에는 왕궁이 지어졌고 부속교회와 왕립학교가 함께 세워졌다. 왕은 고대 그리스 학문을 장려하였는데 이를 위해 당시 최고의 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알쿠인(Alcuin)을 영국 요크로부터 초청하는 등 각지에서 인재들을 불러들였다.중세시대에는 당시 교육의 근간으로 볼 수 있는 ‘일곱 가지 자유학’(septem artes liberales)이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는 수사학과 문법, 논리학과 음악, 기하학과 수학 그리고 천문학이 포함된다. 이것 역시 샤를마뉴가 동력을 불어 넣은 고대의 재발견의 결과이다. 일곱 가지 자유학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교양으로 습득했던 지식들로 중세 혼란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잊혔고 샤를마뉴의 문예부흥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샤를마뉴는 건물을 짓고 도시를 정비하는 등 자신의 제국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했던 건축사업으로는 수도 아헨의 왕궁과 대성당을 꼽을 수 있다. 마인츠에는 라인 강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교량이 설치되었고, 낡은 교회들은 보수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연결하는 운하가 건설되었고, 바닷가에는 등대가 세워졌다.프랑크 왕국을 이끌었던 두 번째 왕가 카롤링거 가문이 배출한 샤를마뉴는 그 이름에 걸맞게 밖으로는 외세로부터 나라를 굳건히 지키며 국토를 넓혔고, 문화, 예술,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중세의 정신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01-16

건축의 인용과 정치적 정당성

독일의 아헨 대성당. 독일의 고도 아헨(Aachen)은 프랑크 왕국의 위대한 왕 샤를마뉴(747∼814)가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다. 도시의 중심에는 왕의 거처와 통치를 위한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지만 지금까지 옛 궁터에 남아 있는 것은 왕실교회 밖에 없다. 아헨 대성당이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796년 경 지어지기 시작해 798년 무렵 완성되었고 805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축성되었다.아헨 대성당은 중세 교회건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직육면체의 바실리카가 아닌 비잔틴의 중앙집중식 구조로 지어졌다. 건축물의 중심에는 8각형 돔이 올라가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은 16각형이다. 내부 역시 비잔틴 교회건축에서 관찰되는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아헨 대성당은 건축 구조나 장식 등에서 비잔틴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더욱이 이 교회와 거의 똑같이 생긴 교회가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나에서 발견된다.아헨 대성당과 닮아 있는 라벤나의 교회는 산 비탈레(San Vitale)로 547년 완공되었다. 250년 이상의 시차가 있는 두 교회의 유사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역사는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지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의 기운이 쇠하던 394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상속했다. 이듬해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서 제국은 분열하게 된다. 로마가 동서로 나누어진 후 채 100년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 때 서로마제국의 수도가 라벤나였다. 493년 라벤나는 다시금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에게 넘어 갔지만, 540년 비잔틴 제국의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서로마제국의 옛 수도를 탈환했다. 산 비탈레 교회는 이때 지어졌다.중심에 돔이 올라가 있고 팔각형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형태를 지닌 산 비탈레 교회의 내부는 비잔틴 특유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이 위치한 후진의 상단 좌우 벽면에는 비잔틴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황녀 테오도라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교회건축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성스러운 공간에 세속 군주가 그림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라벤나의 역사성과 비잔틴 황제의 권위가 성스러운 공간과 연결되면서 상징적 의미가 피어난다.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라벤나의 산 비탈레 교회를 모방해 아헨에 교회를 세운 것은 비잔틴 황제가 지니고 있는 정통성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건축적 인용이다.키가 190cm에 가까운 건장한 체구의 샤를마뉴는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고 항상 날카로운 보검을 지니고 다녔다. 47년의 통치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랑고바르드를 굴복시켜 북부 이탈리아를 통치했고, 대군을 이끌고 떠난 원정에서 작센을 정복했다. 서쪽으로 진격해 스페인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동쪽으로는 도나우 강 중부 아바르 족을 무찔렀다.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은 옛 서로마제국의 땅을 거의 회복했을 정도로 서유럽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샤를마뉴의 권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795년 로마에서는 레오 3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혈통적 콤플렉스가 있었던 샤를마뉴는 교황과의 돈독한 친분을 쌓기 위해 막대한 축하 선물과 함께 ‘교회와 교황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내며 교황에 대한 충성을 드러냈다. 교황 역시 강력한 세속군주의 지원이 절실하던 차였다. 로마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3세는 늘 위협에 불안한 처지였다. 799년 4월 25일 교황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 했고 마침 샤를마뉴의 사절단 호위 군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구출해 준다. 교황은 이에 대한 답례로 800년 성탄절 날 샤를마뉴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불렀고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준다. 샤를마뉴의 정치적 정당성을 교황이 인정한 것이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01-02

비잔틴 미술이 비잔틴에 없는 이유

서양미술사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지역에서 나타난 미술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지금의 서유럽 각 나라들은 국경을 통해 서로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술사 전개에 있어서도 나라 간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중세미술을 살필 때는 역사를 바라보는 다른 틀이 필요하다.중세미술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긴 시기를 차지한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 중세가 시작되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1400년까지 이어졌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중간에 나타난 시대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 ‘중세(中世)’이고, 르네상스인들은 이 시대에 ‘암흑’이라는 ‘부당한 수식어’를 붙였다. 미술사적으로 이 수식어가 부당한 이유는 중세 전체가 암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혼란이 극심해 학문과 문화 예술이 쇠락한 시기도 분명히 있었다. 예컨대 500년에서 800년 사이가 특히 그렇다. 이 시기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의 군소 부족들이 여러 지역에 터를 잡으면서 시시각각 전쟁과 약탈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혼란기에도 비잔틴 제국에서는 예술이 융성했고 비잔틴 최고의 기술자들이 옛 서로마제국의 땅으로 건너와 걸작들을 남겼다.이탈리아 북동부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고도(古都) 라벤나에는 비잔틴 미술의 걸작들이 지금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특히 초기 기독교 미술에 있어서 라벤나는 성지나 다름없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당시 제국의 수도가 라벤나였고 이민족에게 빼앗긴 땅을 비잔틴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수복하면서 기념비적인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런데 정작 비잔틴 제국이 자리하던 지금의 터키나 북아프리카 혹은 중동지역에서는 그 화려했던 미술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이것은 기독교가 종교적 체계를 잡아가던 과정에서 미술품 사용에 대한 동서 교회의 입장이 달랐던 것과 관계가 있다.교회에서의 미술품 사용은 우상숭배라는 민감한 신학적 문제에 닿아 있다. 대교황 그레고리우스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림 사용을 적극 옹호한 가운데 동방교회는 성상사용을 반대했고 급기야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게 된다.성상에 반대한 동방교회의 핵심 논리는 이렇다. 예수나 마리아 혹은 성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들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난 신이다. 이것을 성육화(Incarnation)라고 한다. 예수는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사람으로 그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 그림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담을 수 있지만 그의 신성은 물질로 표현지 못한다. 따라서 예수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 자체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는 행위로 교리에 반할 뿐 아니라 물질적 대상을 경배하는 우상숭배라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의 성상옹호론자들은 동일한 문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온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육체 안에 신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뜻함으로 그림으로 그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결국 성상을 둘러싼 논쟁은 비잔틴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반대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726년 황제는 ‘성상 금지령’을 내렸고 교회를 장식하던 비잔틴의 미술품들이 대거 파괴되었다. 이 때부터 100여 년 동안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상파괴운동이 진행되었고 그 여파로 대부분의 미술품이 희생되었다.성상 금지령이 발효되자 가톨릭의 서방교회는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가 어려워졌고 이를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에 바치던 세금을 중단한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동서 교회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사실 로마 가톨릭에게 성상 금지령은 분쟁의 명목에 불과했다. 서방 교회의 속내는 비잔틴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고 결국 두 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미술사학자

202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