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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니 수도원교회와 로마네스크 건축의 발달

등록일 2023-05-01 19:45 게재일 2023-05-0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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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지어진 클뤼니 수도원 교회, 1754년 제작된 동판화

10세기에서 11세기로 넘어갈 무렵 중세 유럽 사회에는 봉건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봉건제도는 토지를 매개로 주군과 봉신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토대로 형성된 사회제도이다. 봉건제는 넓은 땅을 소유했던 대지주들의 권력을 강화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교회와 수도원의 세속적 영향력 또한 강화시켰다. 중세의 성직자들에게는 많은 사회적 특혜가 주어졌다. 이들은 지식을 독점했고 세금이나 노역을 면제 받았다. 교회에 대한 이 같은 특권은 종교적 기강 약화를 비롯해 여러 부작용들을 야기했다. 결정적으로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겼다. 수도원 건립을 위해 토지를 제공해 준 영주들이 수도원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행사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다. 모든 권력은 권력의 속성상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이때도 그랬다. 부패한 종교권력과 부패한 세속권력이 온갖 특혜를 누릴 수 있는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충돌했다.

종교의 본질이 오염되어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 불씨를 당긴 사람은 아키텐느의 공작 기욤이다. 그는 세속권력의 개입 없는 수도원 설립을 위해 자기가 소유했던 땅을 수도사들에게 내주었고 이렇게 지어진 것이 클뤼니 수도원이다. 910년 문을 연 클뤼니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켜 진실된 예배와 경건한 삶과 구제의 실천을 강조했다. 클뤼니의 신앙회복 움직임은 불길처럼 번졌다. 가장 번창했을 때에는 이곳에 속한 수도원이 무려 천 이백여개, 수도사들의 수가 이 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많은 수의 수도사들이 클뤼니로 몰리면서 수도원 교회의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어 981년 첫 번째 확장 공사가 시작된다. 엄밀히 말해 확장공사라기 보다는 보다 큰 규모로 신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렇게 두 번째 지어진 클뤼니 수도원 교회를 미술사에서는 편의상 클뤼니 II라고 부른다. 클뤼니 II는 장방형의 라틴십자가 구조를 가진 3랑식 바실리카로 지어졌고 회중석과 내진(內陣) 사이에는 익랑(翼廊)이 마련되었다.

신축을 통해 넓은 공간이 확보되었지만 그 역시 충분하지 않아 다시 한 번 확장공사가 진행되어 1089년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지어진 세 번째 교회를 클뤼니 III라고 부른다. 클뤼니 III에서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크기가 커짐에 따라 건축의 세부 구조에도 큰 변화를 보이는데, 우선 3랑식 이었던 클뤼니 II에 두 개의 측랑이 추가되어 5랑식이 바실리카가 되었다. 천장의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 원래는 신랑과 측랑 모두 평평한 나무 패널이 천장을 덮고 있었는데 세 번째 클뤼니 교회의 측랑에는 교차형 궁륭(Cross Vault)이 나타난다.

또한 클뤼니 II는 하나의 익랑을 가졌으나 클뤼니 III에서는 익랑 하나가 더 설치되었다. 두 개의 교차랑 상단부 그리고 아래쪽 익랑의 바깥부분 상단에 각각 팔각형의 첨탑이 올라갔다. 건축 구조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후진의 외벽에 다섯 개의 소예배당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진과 후진사이에 지나다닐 수 있는 주보랑(周步廊)이 생겼다.

클뤼니의 수도원 개혁운동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유럽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클뤼니 III에서 보여주는 건축적 구조는 프랑스 지역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건축 그리고 더 나아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일 드 프랑스(le-de-France)지역에서 고딕 건축이 발달하는데 중요한 근간을 마련해 주었다. 클뤼니 교회는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는 가운데 완전히 파괴되었다. 한때 가톨릭 세계에서 가장 웅장함을 뽐냈던 클뤼니 수도원 교회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폐허로 변한 옛 흔적들이 을씨년스럽게 과거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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