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루이 다비드의 <br/>‘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미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미술이 시대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은 시대도 반영한다. 그래서 때로는 미술을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미술이 시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시대성과 역사성을 읽어 낼 수 있다. 미술이 변화해온 역사적인 자취를 되짚어 보면, 특히나 시대상과 아주 밀착된 미술이 발견된다.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 대략 1750년 무렵에서 1800년까지의 시기를 미술사에서는 ‘신고전주의’라고 부른다.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한다. 이미 15세기 이탈리아에서 고대를 모범으로 한 ‘르네상스’가 일어난 적이 있다. 르네상스를 고전주의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 18세기 중반 다시 한 번 일어난 고전주의를 ‘신고전주의’라고 부른다. 유럽인들은 학문이나 문학 혹은 예술 등 많은 정신문화 영역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고대에서 찾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유럽 문화의 근간이었고, 이런 이유로 유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18세기 유럽인들을 흥분에 빠트린 사건이 일어났는데, 서기 79년 8월 24일 이탈리아 남부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삼켜버린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와 헤라쿨라네움이 발굴된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은 이제껏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경험했던 고대의 유적을 직접 볼 수 있는 굉장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유럽 각국의 귀족들은 발굴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열광적으로 이탈리아로의 먼 여행길에 올랐다. 이 때 유행한 고대 유적지로의 여행을 ‘그랜드 투어’라고 부른다. 그랜드 투어에 올랐던 여행객들은 방문 현장에서 그곳의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기념품으로 구매해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풍경화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대에 대한 증폭된 관심은 과도할 정도로 화려했던 바로크를 시들게 했다. 대신,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킴 빙켈만의 표현처럼,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을 지닌 고대 미술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재발견했다. 이상화된 균형과 조화로운 아름다움, 불필요한 장식과 과도한 감정표현을 절제하면서 단순하지만 고결한, 내적 평온함과 존엄성을 추구한 신고전주의 양식이 나타났다.
신고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미술가는 프랑스의 자끄 루이 다비드(1748∼1825)이다. 다비드는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로부터 의뢰를 받아 1784년 로마에서 자신의 대표작이 될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를 완성했다. 화가는 고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저서 ‘로마사’에 기록된 이야기에서 작품의 주제를 찾았다. 기원전 7세기 로마는 이웃해 있는 도시 국가 알바 롱가와 무력 충돌에 직면했다. 두 국가는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한 전쟁 대신, 대표를 뽑아 결투를 시킨 후 승자를 결정하자는데 합의를 했다. 로마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삼형제를, 알바 롱가는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삼형제를 대표로 선발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 카밀라가 쿠리아티우스 형제 중 한 사람과 약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승리에 관계 없이 이 결투는 두 가문 모두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결국 결투에서 승리한 것은 로마였다. 호라티우스 형제들 중 유일한 생존자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여동생 카밀라는 약혼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로마의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이것을 국가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 그는 자신의 칼로 여동생을 처단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애국심 그리고 개인이 겪게 되는 사적인 감정 사이의 충돌과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호라티우스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선택하는 대신 가족의 희생을 선택했다. 카밀라의 죽음은 전쟁의 잔혹함과 그로 인한 인간적 고통을 강조하는 한편, 국가의 승리 이면에 숨겨진 개인의 희생과 비극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분명해 보인다. 국가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감정은 희생될 수 있다. 이것이 고대 로마의 미덕이었다. /미술사학자 김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