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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서의 공간과 시간문제

등록일 2023-11-20 18:17 게재일 2023-11-2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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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지난 7월 15일부터 11월 5일까지 일본 도쿄도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데이비드 호크니 특별전 전경.

그림은 보는 것에서 시작해 그리는 것으로 종결된다. 화가는 끊임없이 보는 사람이다. 보는 것은 시각과 시선의 문제이며, 생각과 관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일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화가의 시선에 따라 그림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림의 매력이다.

화가의 시선에 따라 동일한 대상도 달리 보여진다. 어떤 화가들은 바깥 세계를 내다본다. 또 어떤 화가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 빈센트 반 고흐가 내면을 들여다본 화가라면 데이비드 호크니는 밖을 내다보는 화가이다. 막셀 뒤샹처럼 훔쳐보거나 르네 마그리트처럼 뒤집어 보길 즐긴 이도 있다.

호크니는 보는 것을 즐기는 화가이다. 달리 보는 것을 즐기고 달리 본 것을 즐거이 그린다. 화가라면 누구나 공간, 시간, 시점의 문제와 대결한다. 본 것이나 보는 것을 그리려면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서구회화는 오랫동안 르네상스의 발명품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에 의존해 공간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화가들은 우리 눈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대상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도 시야에 들어온 모든 대상을 동시에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시야에 들어온 대상들 중 오로지 눈이 향한 것만 선명할 뿐 나머지는 상(像)으로 인지될 뿐이다.

직접적으로 경험한 대상을 즉각적으로 그림에 옮긴 인상주의의 등장으로 선원근법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호크니는 실제 시각경험을 그림에 담기 위해 원근법의 문제를 다시 소환했다. 러시아 종교철학자 파벨 플로렌스키가 쓴 ‘시각을 넘어서(beyond Vision)’라는 제목의 책에서 호크니는 역원근법(reverse perspective)이란 개념을 접한다. 선원근법의 소실점이 화면 안에서 발견된다면 역원근법의 소실점은 그림 밖 감상자의 뒤쪽에 위치한다. 화면 속 소실점이 그림 속 환영의 공간(가상공간)을 불러일으킨다면 화면 밖 감상자의 뒤 공간으로 소실점이 옮겨지면 그림 속 공간이 그림 밖 현실 공간으로 확장된다.

보는 것의 문제가 공간의 문제라면 본 것을 그리는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보는 행위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학은 시간의 순차적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개한다. 정지된 한 장면만 보여주는 회화는 그렇지 못하다. 실감나는 공간, 설득력 있는 묘사나 표현보다 내용 전달이 중요했던 중세미술은 공간성과 시간성에 있어서 보다 유연했다. 논리성에 구애받지 않았던 중세 그림에서는 빈번하게 하나의 화면에 여러 장면이 함께 그려졌다.

르네상스 이래로 재현과 모방이 추구되면서 중세적 유연성 대신 논리적 화면구성이 중요해진다. 그 결과 하나의 화면에는 하나의 장면만 그려졌다. 2018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를 찾은 호크니는 11세기 초 제작된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를 감상했다. 길이 70m의 태피스트리에는 노르만의 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역사가 자수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호크니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소실점이 없고 그림자가 그려지지 않았다. 시간에 따른 사건의 전개는 존재하나 공간이 부재하는 그림이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시간성 문제의 실마리를 찾은 호크니는 90m가 넘는 길이의 작품 ‘A Year in Normandie(노르망디에서의 일 년)’을 완성했다. 아이패드로 그린 노르망디 풍경 220장을 출력해 이어붙인 그림이다. 이 그림은 멈춰 서서 보도록 그려지지 않았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선을 던지며 보는 그림이다. 호크니는 90m 길이의 초대형 파노라마 풍경화를 굴곡진 벽면에 이어붙이면서 감상자를 움직이게 했다. 감상자의 움직임으로 회화가 지녔던 시간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호크니의 이러한 발견을 ‘moving perspective(움직이는 원근법)’ 혹은 ‘움직이는 초점(moving focus)’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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