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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건축조각의 특징

등록일 2023-07-24 17:59 게재일 2023-07-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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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의 생 트로핌 교회와 건축조각. 12세기 중반.

중세미술에서 조각의 발달 과정을 살필 때 우선 눈여겨 보아야하는 부분은 건축과 조각의 관계이다. 중세시대에는 아직 ‘순수미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순수미술이라는 말에는 유용한 쓰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작품에 내재된 아름다움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중세미술은 ‘순수’하지 않다. 중세미술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었고 물질로 된 미술품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았다. 미술품이 가리키는 성스러운 대상, 미술품이 상징하는 종교적 가치가 아름다웠던 것이다. 중세미술 중심에는 건축이 있고 그것을 목적과 기능에 맞게 장식하는 것이 그림과 조각이었다. 그림과 조각이 건축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은 르네상스 때부터이다. 특히 건축으로부터 조각의 해방은 그림보다 조금 더뎠다. 매체의 특성상 조각과 건축이 가지는 밀착도가 높기 때문이다. 하나는 입체라는 특징 때문에 다른 하나는 재료의 유사성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는 밀접할 수 밖에 없다. 이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남부 프랑스의 오래된 도시 아를(Arles)에 세워진 교회 생 트로핌(St. Trophime)이다.

생 트로핌 교회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것은 1100년과 1150년 사이이다. 정면 파사드를 장식하는 조각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출입구 상단 부분에 마련된 반원형의 팀파늄에는 ‘심판자 그리스도’가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전신 후광에 둘러싸인 그리스도는 옥좌에 앉아 오른손을 들어 세상을 축복한다. 왼손에는 생명의 책이 들려 있다. 그리스도 주변으로 4복음서자의 상징이 나타난다. 팀파늄 아래의 가로로 긴 띠처럼 생긴 상인방이 출입문과 경계를 이룬다. 그곳에도 역시 인물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열 두 사도들이다. 흥미롭게 상인방이 좌우 벽면으로 길게 연결되어 파사드 전체를 가로지르는 프리즈(Frieze)를 만들어 낸다.

프리즈는 파사드를 아래와 위로 나누는 명료한 경계가 되지만 전체적으로 통일된 느낌을 만들어 준다. 프리즈에도 어김없이 수많은 인물상들이 부조로 나타난다. 팀파늄의 심판자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왼쪽 프리즈에는 구원받아 천국으로 초대된 사람들의 행렬이 반대편 오른쪽 프리즈에는 사슬에 묶여 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려져 있다. 프리즈의 좁은 공간에 일렬로 서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슷한 생김새에 비슷한 머리모양, 입고 있는 옷과 옷의 주름도 비슷하다.

프리즈 아래에는 고전적 형태의 기둥들이 설치되어 있다. 프리즈를 지탱하는 기둥들 사이로 깊이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그곳에 사도들과 성인들의 모습이 전신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조각상들은 프리즈의 인물들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세부 묘사가 섬세하지만 독립된 입체조각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건축에 종속되어 있어 평면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부조라고 부르기에는 꽤나 입체적이다. 부조보다는 입체적이고 독립 조각상보다는 평면적인 이 조각들은 앞으로 조각이 어떤 방식으로 건축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될 것인지 예견해 준다. 물론 건축에서 완전히 해방된 독립 입상이 등장하기 까지는 적어도 200년 이상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육체를 정신의 감옥으로 보았다. 전성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어받아 이미 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형상을 발견하고자 했다. 조각이 교회건축을 장식하기 시작한 12세기 무렵 조각에 대한 그런 정도의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평범해 보이는 생 트로핌 교회의 파사드 조각들은 서양미술사의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은 초기 로마네스크 조각의 특징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조각이 건축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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