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은 됐는데 지정은 안 된 ‘함정’⋯아이들 안심할 때 운전자는 ‘방심’ 지자체 “준공 전이라 관리권 없다”⋯전문가 “도로 개통 즉시 관리권 승계해야”
붉은 아스팔트와 노란 표지판. 겉보기에 현장은 완벽한 ‘어린이 보호구역’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소년을 지켜줄 법은 없었다.
지난 13일 포항 이인지구에서 발생한 오시후 군(13)의 죽음<본지 2월 20·24·25일자 5면 보도>은 행정이 칠해놓은 ‘무늬만 보호구역’이라는 가짜 안전망이 아이를 사지로 유인한 전형적인 행정 참사였다.
시설은 갖췄으되 법적 효력은 비워둔 채, 지자체가 ‘준공 전’이라는 서류상의 핑계 뒤에 숨어있는 사이 아이는 어른들이 만든 기만적인 도로 위에서 생명을 잃었다.
시후 군은 3차선 도로에서 성벽처럼 늘어선 불법 주차 차량을 피하려다 1차선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포항시가 단속 카메라 예산 3000만 원과 행정 절차를 따지는 사이, 아이들을 지켜야 할 보호구역은 도리어 아이들을 낚아채는 덫으로 변해 있었다.
본지는 교통공학 전문가 3인과 함께 이 비극적 ‘무늬’를 찢고 실질적인 생명의 안전망을 구축할 대책을 진단했다.
◇ ‘조성’은 됐지만 ‘지정’은 안 된 함정⋯“안전의 착시가 아이들 유인”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김의진 교수는 이번 사고의 핵심 원인으로 시설 조성과 지정 고시 사이의 시차를 방치한 ‘안전의 착시’를 꼽았다. 현장에는 이미 어린이 보호구역 시설물이 설치돼 있었지만, 법적으로 지정되지 않아 과속 카메라 등 핵심 장치가 빠진 ‘기형적 상태’였다.
김 교수는 “아이들은 시설물을 보고 보호받고 있다 믿고 안심하지만, 운전자는 법적 강제력이 없음을 알고 방심한다”며 “보행자에게만 잘못된 신호를 주는 과도기적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행정이 판을 깐 치명적 과오”라고 비판했다.
이어 기술적 대안으로 ‘스마트 교차로’ 시스템을 언급하며 “공학적 해결 이전에 행정 절차상 딜레이를 유발하는 요인을 제거해 과도기를 최소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 민간 개발의 한계와 행정의 책임 회피⋯“프로세스 강제화 필요”
계명대 교통공학과 권오훈 교수는 “프로세스의 강제화가 시급하다”고 일갈했다. 권 교수는 “신도시 개발 지구에서 도로가 공용 개시(실제 이용)된다면 전체 사업의 법적 준공 여부와 상관없이 안전 관리권은 즉각 지자체로 승계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설계 단계나 교통영향평가 시점부터 학교 신설에 맞춰 보호구역 지정이 자동 연동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행정의 핑계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물리적 대안으로 ‘교통 정원화’를 제시하며 ‘시케인’(S자형 도로)이나 ‘노면 그루빙’ 등을 통해 운전자가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이게 만드는 환경 조성이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 민식이법 취지 되새겨야⋯“AI 활용한 스마트 안전망 구축”
명지대 스마트모빌리티공학전공 박병정 교수는 이번 사고가 과거 어린이 보호구역 내 비극으로 제정된 ‘민식이법’의 본래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고 질타했다.
박 교수는 “불법 주정차 차량 사이로 아이들이 튀어나올 때 운전자 시야가 가려지는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며 “이번 사고 역시 불법 주정차라는 근본적 원인이 민식이법 도입 당시와 유사한 비극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단순한 단속을 넘어선 기술적 대안으로 ‘스마트 횡단보도’ 도입을 제안했다.
그는 “AI CCTV가 보행자 영역을 감지해 전광판이나 차량 통신 시스템으로 운전자에게 보행자의 존재를 실시간으로 알려줘야 한다”며 “보행자가 들어왔을 때 횡단보도를 더 밝게 비추는 등 첨단 기술로 운전자의 주의력을 강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회전교차로 설치를 통해 차량 속도를 물리적으로 떨어뜨리거나 신호등 없는 보호구역 내 일시 정지 의무를 운전자들이 확실히 인지하도록 홍보와 시설 보강이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 3월 3일 ‘법 없는 등굣길’ 개교⋯“생명 보호에 우선순위 둬야”
포항시의 행정 실수로 이 지역 어린이 보호구역 지정은 개교 후 한 달이 지난 4월에나 이뤄진다. 내달 3일 등굣길에 나설 달전초 학생들은 어른들이 만든 ‘행정 공백’ 속에 여전히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은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우선순위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포항시 교통지원과 관계자는 “이인지구는 민간 주도 도시개발사업지구로 아직 준공 전이라 도로 관리권이 조합에 있어 직접적인 시설 설치에 한계가 있었다”며 “개교 시점에 맞춰 임시 보호 조치를 강화하고 예산을 확보해 단속 장비를 최대한 빨리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