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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8만 원짜리 그림 5천억 원에 팔리다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미술품들 중 가장 비싼 것은 어떤 작품일까?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이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가격은 얼마일까? 이 작품은 한 번도 미술시장에서 거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 가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모나리자’가 얼마인지 대략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작품의 보험가를 살펴보면 된다. 미술관이 소장하고 전시하는 작품들은 만에 하나 발생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돼 있다. 보험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추정가격이 산정되는데 이것을 보험가라고 한다. ‘모나리자’의 보험가는 1962년 기준 1억 달러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지난 60여 년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환산하면 무려 8억6천만 달러가 넘는다.그렇다면 지금까지 미술시장에서 ‘공식적’으로 팔린 가장 비싼 작품은 무엇일까? 역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다. 2017년 크리스티의 뉴욕 경매에서 레오나르도의 작품 ‘살바도르 문디’(1500년경)가 4억5천3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그림을 구매한 사람은 사우디 왕자 바드르 빈 압둘라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이미 몇 차례 경매에서 거래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인 프란시스 쿡은 1900년 이 작품을 구입했다. 그림은 심하게 훼손돼 있었고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세월이 흘러 1958년 쿡의 손자가 이 그림을 45파운드, 약 8만원에 팔아 버렸다.같은 그림은 2005년 다시 경매를 통해 1만 달러에 판매됐다. 대대적인 복원과정을 거친 후 ‘살바도르 문디’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감정됐고, 그림은 이후로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작품의 가격이 치솟게 된다. 2013년 스위스인 아트딜러 이브 보비에가 8천만 달러에 그림을 구입했고 같은 해 러시아 사업가가 1억2천750만 달러를 지불해 새로운 주인이 됐다. 그리고 2017년 11월 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5천33억 원에 낙찰됐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같은 해 어느 투자회사가 그림을 매입했고, 한참동안 행방이 묘연해진 그림은 2019년 6월 사우디 왕세자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21년 4월 12일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사우디 왕자의 호화 요트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작품 가격이 치솟은 시점과 요인은 분명하다. 2005년 이뤄진 복원과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는 감정 결과가 작품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장 권위 있는 미술사학자와 전문가들이 감정에 참여했을 것이다. 최첨단 장비를 동원한 과학적 분석도 이뤄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조금의 오류 가능성도 없이 완벽하게 진품을 밝혀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이전의 모든 측정치와 감정은 추정일 뿐이다. 최고의 권위자들이 잘못 판정해 위작을 진품으로 거래된 경우도 다수 있다. 국내에서는 어느 작품을 두고 미술가는 위작이라 주장하고 소장 미술관은 진품이라 주장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반대로 위작범이 체포돼 범행을 자백했음에도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이라 주장한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이 모든 사건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돈, 욕망, 허영이다. ‘살바로드 문디’가 정말 레오나르도의 작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다만 돈에 대한 욕망이 미술을 통해 허영을 일깨우면 8만 원에 팔렸던 그림이 5천억 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고, 진작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욕망에 비례해 그림 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해 본다.2018년 10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가 15억원에 낙찰됐다. 판매가가 결정되는 순간 액자 안 캔버스가 아래로 밀리면서 그림이 잘게 절단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일이 벌어진 이후 작품의 가격은 오히려 급등했다. 뱅크시의 작품은 ‘사랑은 쓰레기통에’라는 새로운 제목을 달고 올 10월 소더비 경매에 출품된다고 한다. 추정가는 64억에서 96억 원 사이라고 한다./미술사학자

2021-09-06

모방의 모방, 불완전의 불완전

미술사는 미술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분야이다. 연구대상은 미술작품과 미술가이다. 미술에 대한 이론이나 미술작품 혹은 미술가에 대한 문헌적 기록들은 간헐적이나마 고대에서부터 있어 왔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특정 작품이나 미술가에 대한 단편적인 것들로 구체성과 체계성이 떨어진다. 철학자들은 세계의 근원과 보이는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원리를 탐구하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들을 펼쳤으며 그러는 가운데 미술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컨대 이데아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고대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7…347)은 미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그의 이론은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감각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현상계의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불완전한 현상계의 모든 것들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완벽한 상태로 존재한다. 이데아는 모든 대상들의 원인이자 본질이다. 이데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현상계에서 대상들이 실재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Allegory of the cave)’를 든다. 동굴에 갇힌 죄수들이 벽만 바라보도록 결박되어 있다. 동굴 입구로부터 빛이 새어들어 오고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죄수들이 볼 수 있는 세상이라고는 벽에 비친 그림자들뿐이다.동굴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이고 이곳에서 경험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림자를 가능하게 한 본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 플라톤에게 현상계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오직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하며 현상계는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 이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플라톤에게 현상계의 이미 불완전한 대상을 다시 모방하는 미술은 모방의 모방, 복제의 복제, 불완전의 불완전으로 여겨진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여겨진다.‘모방(mimesis)’은 서양미술을 이끌어 온 중심 개념이다. 그리스가 이루었고 로마가 계승한 찬란한 예술정신은 중세 초기 혼란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사라지고, 잊혀졌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이미 절정을 이루었던 미술은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고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치명적인 단절의 시기가 찾아 왔다. 800년 경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영토 확장과 함께 학문과 문화 예술을 장려하면서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킬 무렵 고대와 중세 사이의 문화 예술의 질적 격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샤를마뉴로부터 고대의 복원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하나의 유의미한 결실을 맺기 까지는 무려 600여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면서 되살아난 관념이 다름 아닌 모방이다. 모방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미술작품 속에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재현’이라고 부른다. 가장 완벽한 재현은 가장 완벽한 눈속임이다. 평면적인 화면에 공간감을 불어넣기 위해 원근법을 고안해 냈고, 과학적으로 분석해 정밀하게 묘사된 인물과 대상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움직임과 감정의 표현으로 생생함이 더해졌고, 색채와 명암대비를 통해 모방과 재현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만약 모방과 재현이 미술이 추구하려던 유일한 종착역이었다면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적중했을지 모른다. 아니 더욱 극단적으로 말해 미술은 사진이 출현하면서 일찌감치 종말을 고했을지 모른다.다행히도 플라톤의 이론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이원론적 틀 속에서 미술을 보았고, 시대와 함께 미술의 속성도 유기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모방해 내는 사진이 출현했어도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미술은 살아남았다. 미술은 사진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다른 것들을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플라톤에게 현대추상미술을 보여주고 싶다. “플라톤 선생님, 세계를 재현하지 않는 추상미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추상에 대해서도 이데아가 존재하는지요?”하고 말이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1-08-16

모네는 왜 같은 그림을 수없이 그렸을까?

19세기 중반 사진의 보급은 보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인물화나 풍경화를 그리던 미술가들은 기계적으로 완벽에 가깝게 대상을 모방하는 사진기술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위기로 다가왔겠지만 다른 미술가들에게 사진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사진기술의 발달과 예술의 변화를 이론적으로 통찰한 철학자로 발터 벤야민(1892∼1940)이 있다. 그는 1936년에 출판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원본이 발산하던 아우라가 사라지고 예술의 기능이 달라졌으며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과 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사진이 렌즈를 통해 복제해 놓은 현실 앞에서 미술가들과 이론가들은 회화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 했다. 하지만 회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진은 미술가들에게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빛과 빛의 시각적 효과를 그리려고 했던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빠르고 거칠게 하지만 자유분방한 붓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매순간 변하는 색을 그리기 위해 대상이 지닌 고유한 색을 버렸고, 계산된 밑그림이나 드로잉 없이 색과 빛에 용해된 윤곽선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대상과 형태는 대기 속으로 용해되어 갔다.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관습과 지식 그리고 편견에서 벗어나 오로지 보는 것에 집중해 그림을 그렸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남긴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심오한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보는 것 자체로 시각적 즐거움과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인상주의 미술이다.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끌로드 모네(1840∼1926)는 본 것을 그리기 위해서 연작이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제작방법을 선택한다. 연작 혹은 시리즈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동일한 소재를 유사한 구도로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모네가 처음으로 연작으로 그린 것은 1877년 무렵으로 파리의 기차역 생-라자르의 광경을 열두 점에 이르는 작품에 옮겼다. 파리 생-라자르 역은 1837년에 설립된 기차역으로 철도의 발달은 변모하는 근대적 삶을 상징한다.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역사상 최초로 제작한 영화에서 소재로 다루었을 만큼 철도와 열차는 단순한 운송수단 이상을 의미했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철도는 이동 시간을 단축해 주었고, 그와 함께 삶의 속도 또한 빨라지게 된다. 열차 시간이 일상의 시간적 기준이 되어 막연했던 시간개념이 시계를 통해 분과 초로 나누어졌고, 삶의 움직임 역시 시계 바늘의 움직임을 따랐다. 시간의 분할은 건축적 변화에서도 읽혀진다. 예컨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에펠탑은 면으로 이루어진 닫힌 공간의 전통 건축과는 전혀 다른 철이라는 첨단재료를 통해 선적인 요소들의 결합이 만들어낸 열린 공간을 창조했다. 생-라자르 기차역에서 화가 모네는 열차가 뿜어내는 힘찬 증기가 만들어낸 광경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스펙터클을 경험했는지 모른다. 생-라자르를 시작으로 모네는 본격적으로 그의 대표 연작들을 제작한다. 1881년에서 91년까지 스물네 점의 건초더미를 그렸고, 1892년에서 94년까지 루앙 대성당을 그린 서른세 점의 그림을 남겼고, 1891년에서 1900년까지 일곱 점의 포플러 나무 연작을, 1900년에서 1905년까지 런던 국회의사당이 있는 풍경을 열다섯 점, 1908년에는 베네치아를 방문해 무려 서른일곱 점의 작품을 남겼다.모네의 연작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수련’이다. 화가는 1896년부터 생을 마감한 1926년까지 30여년의 세월 동안 자그마치 250여점의 수련을 그렸다. 그렇다면 화가는 어떤 이유로 동일한 대상을 그린 이처럼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긴 것일까? 화가의 관심은 대상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상에 반사되는 빛과 그 빛이 만들어 내는 색과 분위기를 그림에 담으려고 했다. 화면에서 이야기를 제거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려고 했고, 대상을 관찰하는 시간과 그리는 시간, 그리는 과정과 시간의 흐름, 연작으로 제작된 각각의 그림과 그림 사이의 시간적 관계를 실험했던 것이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1-07-26

같은 주제 다른 해석: 미술사 속 ‘최후의 만찬’

미술사를 즐기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 거장들의 생애를 쫓아가며 대표작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고 미술사에 여행을 곁들여 보는 것도 좋다. 세계 주요 미술관들을 방문해 오리지널 작품의 아우라를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다. 고대신화를 읽어가며 미술가들의 상상력에 푹 빠져보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미술사를 즐기는 또 다른 흥미로운 방법을 추천하자면 하나의 주제를 선택해 각 시대 대표작들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다. 동일한 주제를 달리 해석하는 미술가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미술사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양미술사에 자주 등장하는 기독교 도상으로 ‘최후의 만찬’이 있다.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바로 전날 열두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저녁식사를 가리킨다. 예수는 제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빵은 예수의 몸을,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를 상징한다. 예수는 타락한 인류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을 당했고,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해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처럼 최후의 만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신학적 핵심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예수의 생애라는 큰 주제 속에서 자주 나타난다. 최후의 만찬이 특히나 자주 그려진 곳은 수도사들의 식당 레펙토리움(refectorium) 벽면이다. 그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이 된다. 최후의 만찬이 지닌 신학적 의미를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수도사들의 매 끼니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마지막 만찬이라는 현재성을 불어 넣기 위함이다. 이탈리아의 고도 라벤나의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벽면은 6세기경 제작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예수의 행적을 묘사한 모자이크에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다. 말발굽처럼 생긴 식탁 주위로 예수와 제자들이 촘촘하게 앉았다. 등장인물들의 의상에서도 그렇지만 비스듬히 기댄 모습이 고대로마의 풍습을 따르고 있다. 식탁 위에는 빵과 포도주 대신 물고기가 나타난다. 물고기에는 여러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지만 무엇보다 항구 도시 라벤나 사람들의 식탁에 주로 올랐을 친근한 현지 음식이기 때문에 그려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1320년경 화가 피에트로 로렌체티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아시시의 산 프란체스코 교회 천장에 그려져 있는데 화가는 둥근 식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인물배치는 물론이고 공간암시에 특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흥미롭게도 시중드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심지어 화면 좌측 별도의 공간에는 설거지하는 인물들도 나타난다. 미술가의 상상력이 슬쩍 묻어나는 것을 보면 중세적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 르네상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벤나와 아시시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을 감상했다면 이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앞 선 두 그림과 르네상스 거장의 걸작을 비교해 보면 이것이 화면구성, 공간묘사, 인물표현, 행위묘사, 심리암시 등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미술작품의 미술사적 가치와 평가는 항상 상대적이다. 우열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서 작품의 고유한 특징이 분명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에도 또 그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최후의 만찬이 그려졌는지 모른다. 이들을 채취해 종적, 횡적으로 위치시켜 보면 성서에 기록된 하나의 사건이 시대와 미술가에 따라 얼마나 달리 해석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표현과 해석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법으로 미술작품을 감상해 보면 미술사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다./미술사학자

2021-07-05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미술

전시 공간에 놓여 있는 동일한 모양의 큐브들. 누구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이 손 쉬운 물건들이 미술작품이라니. 대부분의 감상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하고 상상하던 미술과 지금 눈앞에서 경험하고 있는 상자들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심지어 미술가들이 직접 제작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것이 어떻게 미술일 수 있으며, 도대체 무엇을 봐야할지 혼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미니멀리즘은 1960년대에 나타난 미술형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시기에 곡선이 배제된 주로 각이진 모서리의 기하학적인 형태의 추상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미술 평론가들은 기하학적 형식의 미술작품들이 처음 소개됐을 때 ABC 아트, 오젝트 아트, 프라이머리 스트럭처 쿨 아트 혹은 리터럴 아트라는 명칭으로 불렸지만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이 미니멀리즘이다.미니멀리즘은 1950년대 후반까지 미국 현대미술을 지배하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미학적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유럽에서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일어난 미국 최초의 현대미술 사조로 액션페인팅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 색면추상의 마크 로스코 등과 같은 미술가들이 여기에 속한다.1940년대와 50년대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미술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 표현이라는 요소를 작품에서 완전히 제거한 새로운 미술을 선보인 미술가들이 있었다. 미니멀리즘의 선구적 역할을 한 프랭크 스텔라가 남긴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라는 말은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미술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추상표현주의와는 달리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은 미술작품에서 모든 감정을 제거하고 작품의 고유한 특징들을 비워내고 창작자의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해 각진 모서리의 기본적인 모양과 형태를 선택했다. 이로써 유럽의 전통미술은 물론 추상표현주의 미술에서 명백히 읽혀지는 착시나 상징, 은유 등과 같은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된다.미니멀리즘 작품에서는 몇몇 형식적인 공통점들이 관찰된다. 첫째 동일한 형태가 반복적이면서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둘째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기계적으로 생산된 것이거나 공장에서 제작된 재료들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창작의 주체인 미술가 개인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비인격적이다. 칼 안드레가 자주 사용한 벽돌이나 철판 댄 플래빈의 형광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은 감상자들이 작품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거나 재료를 다루는 실력에 경외심을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감각적이나 정신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기념비적으로 웅장하거나, 비장미, 역사적인 이야기, 고귀한 재료, 이지적인 구조 혹은 시각적으로 흥미진진한 경험을 철저하게 거부했다.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이 추구했던 것은 완전히 새롭고 명백한 실제(realness)였다. 미술작품과 감상자 사이를 심리적으로 분리시키는 장벽을 허물어 버리기 위해 조각 작품을 설치할 때 사용하는 좌대를 없애 버렸다. 심지어 칼 안드레의 경우 납작한 철판을 전시장 바닥에 깔아 놓고 감상자들이 그 위를 걸으면서 작품과의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을 하도록 유도한 전혀 새로운 개념의 조각을 선보였다.미니멀리즘의 이론적 체계 확립에 큰 역할을 했던 도널드 저드는 자신의 작품을 회화나 조각이 아닌 3차원의 실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특정한 대상(Specific Object)이라고 규정했다. 저드는 미술의 조형적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모든 환영(illusion)을 제거해야한다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입장에 동의했고, 미니멀리즘 작품들은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하거나, 지시하거나, 가리키거나, 상징하지 않는다./미술사학자

2021-06-14

비운의 걸작

“나는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이른 아침 작업대에 올라가 작업하는 것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온종일 작업에만 몰두 했다. 그리고는 사나흘은 붓이라고는 손에 잡지 않고 그려 놓은 것을 그저 서너 시간씩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고의 걸작 ‘최후의 만찬’ 제작 과정을 목격했던 도미니크회 수도사 마테오 반델로가 남긴 기록이다. 밀라노의 실권자 로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의 의뢰로 1495년경 시작된 ‘최후의 만찬’은 1497년 거의 마무리 되었다. 레오나르도의 걸작이 그려진 곳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이다. 이곳은 도미니크회 수도원 교회로 ‘최후의 만찬’은 수도사들의 식사공간인 체나콜로의 한 쪽 벽면에 그려졌다. 청빈한 구도자의 삶을 살던 수도사들이 식사하는 장소에 ‘최후의 만찬’ 장면이 그려진 것은 종교적으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최후의 만찬’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이 가진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 수도사들이 매 끼니마다 동참하고 있음을 뜻한다. 반델로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레오나르도는 코르테 베키아의 기마상 작업을 하다가 뭔가 못 마땅한 일이 있으면 작업을 멈추고 ‘최후의 만찬’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작업대에 올라가 몇 번의 붓질을 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레오나르도의 이러한 변덕을 예술가에게 내재된 천재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반델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조금 다른 곳에 있다. 원하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다 또 순식간에 손을 땐 작업 방식을 통해서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프레스코는 물로 섞은 석회 반죽을 벽면에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해 그림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프레스코는 하루에 작업 할 수 있는 면적이 아주 제한적이다. 그리고 프레스코의 결정적인 단점은 한 번 그리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프레스코의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기름과 유약을 사용했다. 그런데 물과 기름이 섞일 리가 없다. 결국 레오나르도의 잘못된 재료 선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엎친 데 겹친 격으로 그림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00년 밀라노에 대홍수가 일어났다. 작품이 그려진 공간이 완전히 침수되면서 그림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프란체스코 스카넬리가 남긴 1642년 기록은 작품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후대에 손상된 그림을 구하기 위해 몇 차례 보수 작업이 감행되었다. 그런데 잘못된 복원이 오히려 작품 손상을 악화 시키는 결과를 불러 왔다. 게다가 1800년대 독일의 대문호 볼프강 괴테가 남긴 글에 따르면 엄청난 폭우가 몰아닥쳐 최후의 만찬이 또 다시 침수되었다고 한다. 연속된 불운에도 불구하고 30여 년 간 복원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최후의 만찬’이 조금씩 옛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됐는데, 그만 독재자 무솔리니가 나타나 벽화복원 총책임자를 해임해 버리는 바람에 복원 작업은 지연되고 말았다.1908년부터 루이지 가베나기라는 뛰어난 복원가가 투입되었고 그리스도의 왼손 원형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걸작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8월 14일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가 폭격을 당하고 말았다. 공습 직전 쌓아 놓은 모래주머니 덕분에 간신히 ‘최후의 만찬’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걸작을 살리겠다는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복원 전문가 마우로 페치올리의 노력으로 벽화는 옛 색감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작품의 원형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손상되었던 ‘최후의 만찬’은 1978년에서 1999년까지 첨단장비와 최신 복원 기술을 동원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미술사학자

2021-05-24

디지털 시대의 미술작품과 사라진 원본

대체불가능한 토큰 이른바 NFT라고 하는 것 때문에 미술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NFT는 블록체인의 암호화 기술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자산을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작품들은 그림이나 조각처럼 물질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NFT에서 거래되는 작품들은 디지털로 존재한다. 디지털 미술작품 혹은 디지털화된 미술작품 거래가 논의의 대상이 되면 진본성과 복제 가능성의 문제가 대두된다.미술품의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본성(originality)과 희소성(scarcity)인데 디지털로 존재하는 작품에서는 진본과 복제본의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본과 복제본이 완벽하게 동일하기 때문에 자연히 희소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블록체인을 활용한 NFT에서는 이런 문제가 극복된 듯 보인다. 디지털 작품에 고유 인식값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NFT가 어떤 작품의 원본성을 담보해 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고유성과 유일성은 보장이 된다.1917년 마르셀 뒤샹이 남성 소변기를 작품으로 제시한 이후 미술은 줄곧 새롭게 규정돼 왔다. 공업적으로 생산된 기성품을 미술품으로 제시한 뒤샹의 레디메이드로 인해 진본의 가치는 희석됐다. 팝 아트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앤디 워홀의 작품들 역시 판화기법 실크스크린을 통해 제작됐다. 판화의 특성상 작품을 찍어내는 원판은 존재하지만 유일한 원본은 있을 수 없다. 인화를 통해 동일한 작품을 기술적으로 재생산 가능한 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복수의 진본이 만들어지면서 물리적으로 동일한 작품들에는 진본성과 희소성의 시장적 가치를 보존해 주기 위해 에디션(edition)이라는 장치가 마련됐다. 일종의 한정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워홀의 팝아트는 대중적 이미지를 재생산해 작품의 형식으로 보여준 것으로 미술 창작의 개념과 방식을 바꿔 놓았고 노동을 통한 직접 제작이라는 고전적 창작 방식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미술작품에는 작가의 손길 혹은 흔적이라는 일종의 신비감과 신화적 요소가 제거됐다.1960년대 이후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미술은 더욱 더 개념화되고 관념화되고 비(非)물질화 된다.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나 행위가 미술이 되고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자연현상이 미술이 되기도 한다. 고정된 형식을 취하지 않고, 보존할 수 없으며, 물질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해 진본성을 묻는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런 성격의 작품들은 기록과 재현의 방식을 빌려 전시되고 보존되고 소유된다.일찍이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년)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미술작품의 미래를 예견한 바 있다. 벤야민의 견해에 따르자면 진본에서는 복제본과 달리 아우라(aura)가 발산된다. 그리고 그 아우라는 감상자들에게 시각적 경험을 초월한 전혀 다른 차원의 미학적 경험을 제공해 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작품에서는 진본과 복제본은 질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미술에서 진본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가치는 무엇일까?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진본이 무엇인지 물어봐야 한다. 작품창작의 과정을 아이디어가 만들어진 순간에서부터 제작과 완성까지의 단계로 본다면 진본성이 발생하는 시점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미술가가 직접 창작한 작품을 진본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미술품들은 직접 창작이라는 고전적 잣대로 판단될 수 없다. 그리고 미학적 관점에서는 보았을 때 진본성 자체가 그렇게 의미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진본성의 문제는 오로지 미술품 소유와 소유권의 증명이라는 범주에서만 주요한 담론으로 여겨질 뿐이며 이러한 담론을 응축해 보여주는 것이 NFT를 기반으로 한 미술품의 디지털 자산화 현상이다./미술사학자 김석모

2021-05-03

현대미술이 태동한 역사적 배경

미술은 하나의 언어이다. 언어의 일차적 기능은 의사소통이며,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공통된 의미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1850년대를 기준으로 미술은 현대미술과 그 이전의 시대로 구분된다. 여기서 1850년대라는 숫자를 절대 불변의 고정적인 숫자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미술의 변화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거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 정확하고 분명한 시점과는 달리 이해돼야 한다.현대미술의 시작점을 1850년대 혹은 범위를 조금 넓혀 19세기 중반으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술의 언어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1850년대 이전에 나타난 미술만 하더라도 1천5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수많은 양식들이 나타났고, 각각의 양식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나타난 미술들은 형식이나 내용이 너무나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미술들이 지니고 있었던 차이점들을 모두 희석시켜 버렸다.현대미술의 특징은 고전미술과의 비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는 천년의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낭만주의로 나눠진다. 또한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매너리즘이 그리고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사이에 로코코가 과도기적 성격을 띠며 잠시 나타나기도 했다. 각각의 시대는 그 시대의 미술을 특징짓는 형식을 보여줬다. 그것을 양식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서양미술사는 중세에서 낭만주의 미술까지 양식에 의해 시대가 구분됐다고 생각하면 된다.1850년대 이후 미술사의 전개 양상은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인다. 하나의 양식이 짧게는 반세기 길게는 수백 년을 지배했던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형식의 미술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세력화되고 권력화 된 미술과 대립하게 된다. 현대미술에 접어들면서 더이상 시대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양식은 사라지게 됐고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개인화되고, 개별화된 실험적 미술이 사조, 주의, 운동의 형태를 띠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행된다. 양식의 시대에서 이즘(ism)의 시대로의 전환, 다양한 미술 형식의 공존, 이것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미술은 시대의 상호작용 속에서 숨을 쉰다. 시대가 변하면 미술이 달라지고, 시대의 변화를 미술이 예견하기도 하며, 미술이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래서 미술을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 세계로 열려 있는 창문에 비유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시대와의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에 미술을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 탐구하는 미술사라는 학문이 가능할 수 있다.19세기 중반 현대미술 태동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이다. 물론 프랑스 파리를 현대미술의 유일한 발상지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프랑스 파리가 현대미술이 시작된 가장 중요한 장소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을까? 19세기 중반 유럽은 정치·사회적으로 대변혁을 경험하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앙시앙 레짐으로 불리는 절대왕정의 구체제가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형성되는데 그 중심이 된 곳이 프랑스 파리였다. 산업과 경제구조에도 크나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점차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었고, 산업혁명의 기술혁신은 경제의 중심축을 농업에서 공업으로 옮겨 놓았다. 토지를 기반으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굴뚝에서 연기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 도시와 도시가 철도로 연결되면서 이동 속도가 빨라졌고, 이동 속도가 빨라진 만큼 세상이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졌고, 생각의 속도, 변화의 속도도 빨라졌다. 무언가가 빨리 움직이게 되면, 누군가는 그 변화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그와 함께 양산되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대미술이 피어났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1-04-12

미술품 위작 : 권력, 돈 그리고 욕망

미술이 있는 곳에 인간의 욕망이 있고, 욕망이 있는 곳에 돈이 있으며, 돈이 있는 곳에는 그 돈을 부정적으로 탐하려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미술을 이용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의 욕망을 미술에 투영하고 있다. 미술과 권력, 돈과 욕망의 불편한 동침은 미술사 속에서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 관계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고가의 작품이 반드시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가격이 반드시 작품에 내재된 미술사적, 미학적 가치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미술시장은 미술사와는 전혀 다른 자기 논리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미술시장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명품을 소비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미술시장이 움직인다. 물론 미술시장의 움직임이 훨씬 더 복합적이다.미술 작품이 상품이 되어 고가로 거래되는 이상 위작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무언가를 욕망하고, 누군가는 그 욕망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위작 사건이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경찰이 위작범을 체포해 범죄에 대한 자백까지 확보한 상태였지만 한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거주하며 이름 꽤나 알려진 이 미술가는 어찌된 일인지 위작으로 의심되는 작품 모두가 자신의 창작물이라 주장했다. 누구의 주장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 거짓말은 돈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그런데 위작과 관련해 진품 감정의 방법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뤄질 필요가 있다. 근래에 들어서는 첨단 장비를 동원한 과학적 분석이 이뤄지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술품 감정은 주로 전문가의 경험이나 직관 혹은 미술 권위자의 명성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다. 숙련된 전문가의 감식안을 낮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직관적 감식에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나 객관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진술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미술가의 기백이 느껴진다든지, 필치가 살아 있다든지 하는 진술들은 감성적이고, 시적이며, 은유적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꽤나 운치 있게 들리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진품 감정에 있어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는 것은 작품과 관련된 문서 혹은 기록이다. 작품을 사고 팔며 주고받았던 계약서 혹은 영수증은 작품 소유자의 이력을 추적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다. 소유자를 확인하는 것이 작품 진위여부 판단에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누가 누구로부터 구입해 소유한 것인지를 아는 것은 작품의 출처와 유통 과정을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며 그것이 작품의 외적 환경의 신뢰성을 검증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직접적 감정과 소유자 이력 확인은 병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헌이나 기록으로부터 취득한 정보는 조작 가능성의 위험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 또한 하나의 의미 있는 참고 자료로 활용될 뿐 진품 확증에 대한 증거로 사용되기에 그 결점이 너무나 중대하다.최근 들어 미술품 감정을 위해 첨단 과학 장비들이 동원된다. 초정밀 광학 현미경으로 캔버스의 조직을 분석하고 작품에 사용된 재료를 채취해 화학성분 등을 밝혀낸다. 그러한 과정에서 육안으로 들어나지 않는 밑그림이 발견되기도 하고 미술가가 처음 계획을 어떻게 수정해 최종 결과물을 얻었는지를 알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접근법은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또 다른 문제는 국내 위작 사건에서도 경험했던 것처럼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위작임을 밝혀내어도 복잡한 얽혀 있는 관계들 때문에 작가 개인이 모두 진품이라고 주장하면 위작을 위작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이러한 경우가 발생한다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창작윤리를 심각하게 의심할 필요가 있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1-03-15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빈센트 반 고흐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그림들이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감성을 자극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어떤 요소들이 우리를 매료 시키는 것일까?첫째 시각적 촉각을 자극하는 강렬하고 두터운 색채를 들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강렬한 색을 즐겨 사용한다. 색을 캔버스 위에 얇고 매끄럽게 칠하는 것이 아니라 두께감과 질감이 느껴지도록 두텁게 발랐다. 이 같은 화법은 시각적 촉각을 자극할 정도로 거친 질감을 만들어 내고 색채의 강렬함을 한층 더해준다.빈센트의 그림이 감상자를 매료 시키는 두 번째 이유는 작품의 소재이다. 화가는 그리는 방법에서도 그렇지만 작품에 담길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미술의 전통과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다. 신화나 성서 등 수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읽을 수 있는 회화작품들과는 달리 빈센트의 그림들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듯 그저 바라만 보아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우리를 매료 시키는 세 번째 이유는 정서적 교감이다. 빈센트와 동생 테오의 애틋한 관계는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빈센트 보다 4살 어린 동생 테오는 형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다. 형에 대한 동생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미술사는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를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빈센트 반 고흐는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명세가 화가의 그림을 보는데 반드시 긍정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빈센트의 그림에서 큰 감동을 느끼지만, 정작 화가로서의 미술사적 가치는 그냥 지나치기 때문이다.빈센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당시 파리에서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이 고전미술의 규범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쿠르베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을 그렸고, 마네가 그린 몇몇 작품들은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빛을 그리려고 했던 모네의 그림은 평론가들의 조롱거리였다. 이들 미술가들은 전통미술의 규범과 결별을 선언하고 본다는 행위 그 자체,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에서 미술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을 찾았다.서양미술사에서 가장 혼란했던 하지만 가장 흥미진진했던 시대에 미술의 세계에 뛰어든 빈센트. 그의 초기 작품에서도 저항정신이 발견된다. 1885년경에 그려진 ‘감자먹는 사람들’에서는 사실주의 화가 빈센트를 만날 수 있다. 가난에 찌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좁고 어두운 방, 고된 일과를 마치고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저녁 식탁에 앉아 있다.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된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중에는 폴 시냑과 조르주 쇠라처럼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있다. 이들은 물감을 섞어 원하는 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색점들을 서로 병치시켜 시각적으로 색이 혼합되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점묘법이 시도되었다.19세기 유럽에서는 자포니즘이라고 해서 일본풍의 그림들이 유행했다. 빈센트 또한 일본의 목판화가 보여주는 풍부한 표현력과 직접적인 전달력을 시도를 한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는 일본과 직접 관련된 소재가 나타나고, 인물이나 대상의 윤곽선이 유난히 또렷하게 그려진 것들이 있는데 자포니즘의 영향 때문이다.빈센트가 남긴 대표작들은 정제되고 응축된 예술적 고뇌의 결정체이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색채가 감상자들의 심상을 자극하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이다. 그가 그어 놓은 선들이 숨을 쉬고 있는 듯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고통스러운 고민의 결과이다. 이러한 것들을 함께 볼 수 있다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얼마나 더 감동적이겠는가?/미술사학자

2021-02-22

미술에 던지는 ‘질문 위의 질문’

현상(現狀)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메타적 물음’이라고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등의 질문이 메타적 물음에 속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개별 현상이다. 주운 물건의 주인을 찾아주면 뿌듯함을 느끼고, 타인을 도와주면 정의를 실천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는 정의에 대한 일상적 경험이다. 메타적 물음은 관점을 전혀 달리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남을 도와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하는가?’ 더 나아가, ‘정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미술에도 적용된다.미술가들은 개별적인 미술작품을 창작하며, 감상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개별 미술작품이다. 어떤 작품은 아름답게 보이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분명히 있다. 미술의 일상적 경험은 시각적 자극이지만, 메타 차원에서의 질문은 ‘무엇이 미술을 미술이게끔 하는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미술은 무엇인가?’ 등과 같이 근원과 본질에 닿아 있다. 그래서 메타적 물음을 ‘질문 위의 질문’이라고 한다.미술가는 물론 감상자들 역시 미술을 메타적 층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메타 질문을 던질 때는 성급히 답을 얻겠다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명확한 답이 없으면 말장난에 불과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을 당한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다. 메타 성격의 질문은 하나의 답에 이르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메타 질문이다.사전은 미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간 및 시각의 미를 표현하는 예술로 그림, 조각, 건축, 공예, 서예 등을 가리키며, 공간 예술 혹은 조형 예술 등으로 불린다.” 이런 식의 사전적 개념정리는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미술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예컨대 미술은 자기를 표현하고 무언가를 창작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관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들은 대부분 생존을 위해 발달되었다. 그런데 미술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지 않은 미적 유희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미술 행위는 본능적 욕구이기는 하지만 생존과는 무관한 순수한 유희인가?’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혹은 다른 입장을 취해 미술 행위 역시 생존을 위한 본능일 수 있다는 반론도 가능할 것 같다. 다산을 기원하며 제작했던 조각상이나, 풍요로운 사냥을 기원하며 동굴 벽에 그린 동물 그림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집을 짓는 행위도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집을 짓는 행위와 새들이 둥지를 짓는 행위 사이에 차이는 무엇인지 물음이 생긴다. 사람과 동물 모두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집을 짓는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집 짓는 행위는 인간 고유의 창작 활동이 아닐 수 있다는 또 다른 의문에 도달한다.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미술을 인간 고유의 창작 행위로 본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닐까? 한때 그림 그리는 침팬지가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었고, 지금은 AI가 거장들의 화풍을 학습해 그림을 그린다? 인간만이 미술을 할 수 있고 인간의 창작 행위만이 미술로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미술가가 그린 그림과 침팬지가 그린 그림 혹은 AI가 그린 그림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이렇게 메타 질문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관점과 관점을 넘나드는 사고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질문들을 계속 이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지식 덩어리가 형성된다. 이것이 메타 질문을 통한 인식의 확장이다. 메타 질문을 던지다 보면 미술의 문제가 미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메타적 차원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관찰되는 현상은 다를지 몰라도 본질은 매우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이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1-02-01

처음으로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학문으로서의 미술사는 그 역사가 길지 않지만,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오래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미술은 사람에 대해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사가 먼저 살펴보는 대상은 미술작품이지만, 미술작품을 통해 진짜 관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과 ‘시대’이다.미술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시각적 창작물이다. 음악이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창작한다면, 미술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창작한다. 물론 이러한 구분도 지금에 와서는 모호해져 버렸다. 장르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미술은 늘 모습을 바꾸며 어디론가 흘러가기 때문에 하나로 잡아 놓을 수 없다. 사람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듯, 미술도 변한다.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책이나 설명을 참고하곤 한다. 도움은 되겠지만 설명을 통해 작품을 보려는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글은 정보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전달해 주는 장점이 있지만 의미를 제한해 버리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미술을 보는 목적은 지식이나 정보습득에 있지 않다.미술을 본다는 것은 미술가들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본다는 뜻이다. 미술가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몇몇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벗어나야할 편견은 시각적 익숙함이다. 예컨대, 시각적 익숙함은 사과가 빨갛거나 초록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림 속 사과가 꼭 그런 색일 필요는 없다. 미술가는 원하기만 하면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사과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림 속 사과가 실제 사과를 모방하기만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오히려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과가 더욱 흥미롭다.또 하나의 편견은 지식이다. 모든 지식이 편견은 아니지만 고정되고 확고한 신념은 편견일 가능성이 높다.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이 하늘 전체일 수 없다. 보고 싶은 대로 짜 맞춰 보려하거나, 알고 있는 지식을 미술에서 확인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미술의 참맛을 즐길 수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태도를 버려야 보는 것이 즐거워진다.아주 자주 미술가의 유명세가 미술작품 보는 것을 방해한다. 유명한 미술가의 이름 보다 더 설득력 있는 무기는 없다.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몇 개의 선이 유명한 미술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순식간에 그것은 걸작처럼 취급된다. 여기에 전문가들이 합류해 그럴싸한 양념을 뿌린다. 검증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미사여구로 극찬이 이어진다. 이 같은 논평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하는 것은 불필하다. 이것은 유명한 미술가가 그은 선이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그 이름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위선이거나 거짓이다.작가의 유명세와 함께 작품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작품의 유명세이다. 미술과 상관없는 수많은 스토리가 루브르의 ‘모나리자’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만들었다. 장사진을 이룬 인파 속에서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모나리자의 실물을 확인하고 싶은 이유는 단지 이 그림이 유명하기 때문이다.특정 작품에 유명세를 입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신기록을 달성한 천문학적인 작품가격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라든지, ‘한국 미술품 최고가’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일순간 유명세를 탄다. 작품과 작품의 가격이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작품성을 정확히 계산해 작품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비싼 작품이 꼭 훌륭한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미술을 둘러싼, 하지만 미술 그 자체와는 무관할 수 있는 편견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들을 하나씩 걷어내 버리면 미술이 조금씩 더 선명하게 보인다. 미술 자체가 선명하게 보일수록 보는 즐거움은 더욱 커지게 된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1-01-11

비아 칼차이우올리서 만난 오르산미켈레

르네상스의 도시답게 피렌체에서는 거리 곳곳 어디로든 눈을 돌리면 거장들의 걸작을 마주할 수 있다. 여행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역사의 흔적들이 이곳에서는 그저 평범한 일상에 불과하다. 피렌체만큼 훌륭한 역사책이 또 있을까? 꽃의 도시라는 별명의 이곳 중심을 가로지르는 거리 비아 칼차이우올리(Via Calzaiuoli). 그 유명한 두오모를 지나 시뇨리아 광장을 향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접어들게 되는 길이다. 칼차이우올리를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색조 대리석의 장식 없는 건물이 하나 보인다. 투박한 건물은 마치 외부와는 단절된 도시 속 요새 같이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이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라는 이름의 교회라고 한다. 일반적인 교회건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오르산미켈레는 원래 곡물창고였다. 중세가 가을을 맞이해 저물어갈 무렵 도시들이 발달하고 농업에서 상업으로 경제구조가 서서히 변하게 된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로 몰려 들었다. 풍부한 노동력으로 도시 경제는 활기를 띠었지만 뜻하지 않게 식량난이 발생했다. 대토지를 소유한 주교들이 폭리를 취하기 위해 곡물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길드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대량의 곡물을 들여왔고 이를 보관하고 거래하던 창고로 사용되던 곳이 오르산미켈레이다.오르산미켈레에서 곡물을 사고 팔던 상인들은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 기둥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 그림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이 성상이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심지어 교황이 공식적으로 이곳을 성지로 선포를 한다. 그 때가 1292년 7월이다. 신비로운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봉헌을 했고, 이 돈으로 곡물을 사들여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나눠 줬다.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8천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1304년 불행하게도 화재가 발생하면서 성모 마리아 그림이 완전히 불타 버렸고 훗날 화가 베르나르도 다디에 의해 복원됐다.14세기 초, 피렌체의 인구는 대략 10만 여명으로 당시 유럽의 도시로는 꽤 규모가 큰 편이었다. 그런데 1346년 검은 죽음이라고 불리는 흑사병이 창궐해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7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7천500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유럽 인구가 절반으로 준 것이다. 피렌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고 흑사병이 물러갔을 때 이곳의 인구는 겨우 3만 명 남짓에 불과했다.흑사병의 창궐과 세상을 뒤덮은 죽음.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을 당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검은 죽음을 진노한 신이 내린 대재앙으로 여겼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게 해 주는 영험한 효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오르산미켈레의 ‘은총의 성모 마리아’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던지 봉헌한 돈이 35만 플로린, 지금 돈으로 환산해 보면 자그마치 2천800억 원이나 된다.1380년경 피렌체 주요 길드 연합은 오르산미켈레를 교회로 개조했다. 르네상스가 이제 막 꽃을 피울 무렵 피렌체 대표 14개의 길드들은 자신들의 수호성인을 조각으로 만들어 오르산미켈레 외벽을 장식했다. 건물 외벽은 시각적 공공을 지닌 장소이니 만큼 요즘 식으로 일종의 공공미술인 셈이다. 길드들은 경쟁적으로 가장 명성이 높은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미술가 섭외에 열을 올린 것은 길드 간에 부와 명예 그리고 자존심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천재들이 피고 지던 르네상스의 중심지에서 최고의 미술가를 모셔 올 수 있다는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덕분에 미술가들의 몸값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자존감이 높아졌다.브루넬레스키의 그 유명한 돔이 머리를 장식하는 대성당을 지나 구 시청사 팔라초 베키오가 자리한 시뇨리아 광장으로 향하면 비아 칼차이우올리를 걷게 된다. 그리고 조금 걷다 보면 조각 작품으로 장식된 투박한 건물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미술사학자 김석모

2020-12-21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서명한 불공정 계약서

다방면에 탁월한 학식을 겸비한 인물을 ‘만능인’이라 일컫는다.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기술에 편중되지 않고,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한 지성인, 요즘 말로 ‘통섭형 인간’을 가리킨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특히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때 이런 유형의 천재들이 대거 출현했기 때문에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많은 천재들이 피렌체에서 출몰했지만 르네상스의 만능인하면 곧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가 대표적이다.레오나르도는 1452년 공증인 세르 피에로의 사생아로 태어나 열 네 살 되던 해 피렌체에서 명망 높던 미술가 베로키오의 공방으로 보내져 십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보티첼리, 훗날 미켈란젤로의 스승이 된 기를란다이요 그리고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가르친 페루지노 등 르네상스를 이끌어갈 가장 재능 있는 미술가 후보생들과 함께 도제 생활을 했다.스무 살 되던 1472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미술가 조합에 이름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출중한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명민함으로 인간과 자연을 통찰한 레오나르도였지만 직업의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화가로서의 명성을 만방에 알릴 걸작은 고사하고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한 궁핍함에 쪼들린 나날을 보냈다.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1481년 산 도나토 수도원에서 제단화 한 점을 의뢰해 왔다. 그런데 작품 제작을 위해 수도원과 레오나르도가 맺은 계약 내용이 결코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계약서에는 미술가와 의뢰자의 책임과 의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예컨대 작품 제작비용과 지불 방법 그리고 기한, 계약 파기 시 책임소재 등과 같은 내용이 계약서에 언급이 된다. 더불어 작품의 품질 보증에 대한 언급도 중요한 부분인데, 제작 공정에 대한 철저한 관리는 물론, 단가 절감을 위한 속임수를 막기 위해 엄선된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도 빠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나토 수도원과 레오나르도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에는 이 같은 일반적인 사항들이 언급되는 대신 미술가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들만 나열돼 있다.작품 대금을 현찰로 지급하는 대신 수도원이 소유한 땅의 일부분을 주겠다는 내용이나 30개월 내에 작품을 완성해야하며 이를 어길 경우 작품을 몰수하겠다는 등 화가의 책임과 의무만 기록돼 있다. 불공정 거래가 이뤄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것은 레오나르도의 형편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과 제대로 된 작품을 그려보겠다는 의지가 절실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수도원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계약 내용과는 별개로 나뭇단과 큰 장작 한 짐 그리고 밀가루 13ℓ와 적포도주 한 통이 화가에게 지급됐다. 레오나르도의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주의는 이미 정평이 나 있던 터라, 또한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제단화 완성에 차질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던지 수도원은 독려 차원에서 특별히 28피오리노를 입금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오나르도의 제단화는 미완으로 남겨졌다. 이 작품이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한 미완의 걸작 ‘동방박사의 경배’이다.비록 미완으로 남긴 채 화가는 붓을 놓았지만 화가의 어느 작품 못지않은 탁월한 걸작 중에 걸작이다. 미술에 과학적 탐구 정신을 불어 넣은 레오나르도의 위대한 예술 정신이 전혀 부족함 없이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완성작 보다 미완의 작업에 다른 다원의 고양된 예술 혼이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완벽한 상(像)은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완성된 어떤 작품도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품에 남겨진 미완의 흔적들은 감상자의 인식작용을 통해 보다 완벽에 가깝게 그려질 수 있다. 의도되었건 그렇지 않건 미술의 본질이 물질적 완성이 아니라, 완전한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예술정신에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0-11-09

고대 최고의 조각 작품 ‘라오콘’군상

1506년 1월 14일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포도밭 주인 펠리체 데 프레디스는 땅을 파던 중 화려하게 장식된 궤짝 하나를 발견해 문화재 관리 당국에 알렸다. 이 소식을 보고 받은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술가 미켈란젤로를 현장에 급파했다. 궤짝을 열자 그곳에는 대리석 조각의 파편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미켈란젤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예술의 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바로 전설처럼 얘기로만 전해지던 고대의 ‘라오콘’ 군상이었기 때문이다.박학다식했던 고대 로마의 지식인 대(大) 플리니우스(23∼79)는 이 조각 작품을 티투스 황제의 궁전에서 직접 본 적이 있으며 최고의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천년 넘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바로 그 조각 작품의 파편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미켈란젤로의 흥분이 충분히 이해된다.그런데 사실 로마 포도밭에서 발견된 조각상은 ‘라오콘’군상의 원본이 아니다. 원본은 기원전 200년 경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발굴된 대리석 작품은 이를 복제한 것으로 기원전 27년과 기원후 68년 사이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조각 작품에서는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두 아들과 함께 거대한 뱀에 의해 잡아먹히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남성은 고대 그리스의 신관 라오콘으로 조각은 그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라오콘에 관한 이야기는 플리니우스가 쓴 문헌과 베르길리우스의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기록돼 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자신의 비극에서 라오콘의 운명을 다뤘지만 망실되고 말았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라오콘은 신들의 명을 거역하고 결혼을 했고 불경스럽게 제단에서 아이까지 낳으면서 벌을 받았다고 한다.비록 청동 조각 원본은 아니지만 ‘라오콘’군상의 발굴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고,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미술작품에 대한 미학적 평가와 관련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미술사 연구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라오콘’군상은 계몽주의 시대에 활동했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783)에게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미술과 문학을 비롯한 예술 여러 분야의 고유한 특성과 한계를 밝혀냈다. ‘라오콘’ 군상에서 고대 그리스미술의 양식적 특징을 찾아낸 인물은 요한 요이킴 빙켈만(1717∼1768)이다. 1755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그의 저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한 고찰’에서 ‘라오콘’ 군상을 “미술의 완전한 규범”이라고 묘사하며, 그 안에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을 양식적 특징으로 발견했다. 빙켈만은 고대 조각 작품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저항하는 라오콘을 보았다. 마주한 고통의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남자의 모든 근육은 긴장돼 있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다. 극도의 고통을 절제를 통해 미학적으로 승화한 고대 조각상에 대한 빙켈만의 찬양은 당시 유행했던 장식적이고 현학적인 로코코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포도밭에 묻혀 있던 궤짝 속 조각 파편들은 바티칸으로 옮겨져 복원됐다. 망실된 오른팔은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졌다. 1515년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르네상스 군주 프랑수아 1세는 전리품으로 ‘라오콘’군상을 요구했고 교황 레오10세는 미술가 반디넬리에게 모작을 만들도록 해 이를 프랑스로 보냈다. 몇 세기가 지난 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배상금으로 다시 한 번 ‘라오콘’군상을 요구했다. 1797년 ‘라오콘’ 군상 원작을 전리품으로 챙겨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이를 박물관에 전시했다. 조각은 1815년 나폴레옹 패망 이후에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1906년 고고학자이자 고미술품 거래상이었던 루드비히 폴락(1868∼1943)이 나무 궤짝이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대리석 조각 잔해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1957년 망실되어 미켈란젤로가 대체한 라오콘의 오른팔로 밝혀져 다시 한 번 복원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김석모 미술사학자

2020-10-19

공간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그의 독보적인 회화적 능력은 독특한 공간해석에서 발휘된다. 그림은 실제 대상을 보고 그렸든, 어떠한 장면을 상상해 그렸든, 2차원의 평면에 가상의 공간을 창조한다. 미술사 서적이나 미학이론을 공부하다 보면 ‘미메시스’(μιμησι03C2)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는데, 그리스어로 ‘모방’이라는 뜻이다. 모방은 어떠한 대상을 진짜인 것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럴 듯하게 그리는 것으로 르네상스가 발명한 원근법도 공간에 대한 모방이라 할 수 있다.동시대 대부분의 화가들이 현실을 모방하는데 몰두하고 있을 때, 벨라스케스는 그림 속 공간을 현실의 실제공간과 연결시킬 방법을 구상한다. 벨라스케스의 독특한 공간해석은 그의 대표작 ‘시녀들’에서 잘 관찰된다. 그림에 묘사된 공간은 스페인 왕궁 화가의 작업실이다. 벨라스케스가 커다란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화가의 작업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공주와 그 일행들이 조금 놀란 듯 보인다. 화가가 국왕 부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후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이들의 모습이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벨라스케스 보다 200여 년 앞서 거울을 이용해 그림 속 공간과 실제의 공간을 연결시킨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얀 판 에이크(1390∼1441)가 있다. 1434년경에 제작된 그의 대표작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도 거울이 사용되어 그림 밖 현실 공간을 비춰주고 있다. 그런데 두 그림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얀 판 에이크는 아르놀피니 부부를 앞에 세워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직접 모습을 그림에 드러내는 대신 벽에 걸린 작은 거울에 반사되어 보이도록 한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전혀 다른 구성을 보인다. 세워둔 캔버스 앞에 팔레트와 붓을 손에든 화가는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화면 밖에는 국왕 부부가 그림의 모델을 서고 있고, 이들의 모습이 벽에 걸린 거울에 비춰져 있다. 다시 말해 그림 속 화가는 그림 밖 현실의 공간에 있는 펠리페 4세와 왕비를 그리고 있고, 현실 공간에 자리한 인물들의 모습은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금 그림 속 공간으로 들어오는 한층 복잡해진 구성이다.그림 속 가상의 공간과 국왕 부부가 위치한 현실의 공간 그리고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현실의 공간. 공간의 확장과 확장된 공간의 재확장. 이렇듯 다양한 층위의 공간을 하나의 작품에 표현하는 것이 벨라스케스의 회화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다. 거울을 이용한 회화적 공간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또 다른 대표작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비너스의 단장’이다.옷을 입지 않은 비너스가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등을 보이며 침대에 누워 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심지어 관능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비너스의 모습이다. 큐피드는 거울을 세워 비너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매끄러운 살결의 비너스는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화면을 두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이를 통해 화면에는 감상자의 시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비너스는 거울로 시선을 던진다. 그런데 거울에 반사된 얼굴이 흐리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비너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의 각도로 미루어 짐작건대 화면 밖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감상자를 향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거울에 희미하게 반사된 비너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살짝 지으며 감상자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 미술을 이끌었던 거장답게 비너스의 시선을 통해 그림 속 회화적 공간을 심리적으로 그림 밖 현실의 공간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미술사학자

2020-09-28

쇠퇴하는 바로크, 떠오르는 신고전주의

1750년을 전후로 서양미술사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나타나 프랑스 혁명기 동안 전유럽에서 유행했다. 신고전주의는 앞선 바로크와 로코코의 현학적인 기교에 대한 미학적 반발로 등장하면서 고대, 특히 고대 로마 미술에서와 같이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과 명료성을 강조했다.신고전주의가 유럽 전역에 급속히 확산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수백 년 동안 화산재 속에 덮여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이다. 고대의 정신을 이상적 가치로 여기던 유럽인들에게 고고학적 발굴로 옛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으니 그 흥분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예측된다. 많은 유럽인들이 상상으로만 그리던 고대 도시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고, 부유한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유서 깊은 도시를 방문해 그곳의 문화와 역사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익히는 이른바 그랜드 투어가 유행했다. 지적 호기심에 가득찬 여행객들 중에는 당연히 미술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술가들은 눈앞에 펼쳐진 고대의 생생한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 판매했고, 타국에서 몰려온 여행자들은 현장의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할 목적으로 그림을 구매해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고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고조가 신고전주의 양식이 급속히 전파되는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를 모범으로 삼았지만 신고전주의가 발달한 것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였다. 유럽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주도의 체계적인 미술교육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바로크적 미술 취향을 밀어내고 신고전주의가 싹을 틔운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이 양식이 번창했던 것은 초기 혁명기에서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다다르는데, 1800년경 낭만주의 미술과 일정 기간 공존하다 서서히 사라졌다.신고전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는 자끄-루이 다비드(1748∼1825)라는 인물이다. 위풍당당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1801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히 거행된 ‘나폴레옹의 대관식’(1806년) 장면을 담은 그림이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다비드는 프랑스 왕립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는데, 당시에는 귀족들의 유희와 쾌락이 강조된 장식성 짙은 로코코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시대적 유행과는 달리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발달시킨 선구자 조셉-마리 비엥(1716∼1809)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648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문을 연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는 해마다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해 로마로 국비유학을 보내주는 ‘로마 대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자끄-루이 다비드는 1774년 명예로운 로마 대상을 수상해 1775년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물며 이탈리아 거장들의 미술은 물론 고대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로마로 유학을 떠난 다비드는 이제 막 발굴되기 시작해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폼페이를 방문해 고대 유물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폼페이에서의 경험은 훗날 다비드가 신고전주의 양식 최고의 대가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로마 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다비드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한 점의 그림을 주문 받았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는 다비드의 대표작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1784년)이다. 고전미술을 모범으로 내용과 형식에서 명료함과 통일성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한 다비드의 그림은 1785년 파리의 살롱전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한 점의 그림으로 자끄-루이 다비드는 단숨에 프랑스 미술계 일약 스타로 급부상했다. 고대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그리고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묘사된 한 장면을 그리고 있는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는 화가 다비드의 출세작임과 동시에 바로크가 막을 내리고 신고전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걸작이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0-09-14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카라바조의 바로크 회화

서양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르네상스에 이어서 나타난 양식으로 1600년경에서 대략 150여 년간 지속되었다. 바로크의 양식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화가는 카라바조(1573∼1610)이다. 카라바조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인데, 북부 이탈리아 카라바조라는 시골마을 출신이기 때문에 카라바조로 불리게 된다. 어린 시절 롬바르디아에서 그림을 배운 그는 1598년경 로마로 건너와 역사화, 풍속화, 정물화 등 회화의 여러 장르를 기웃거리다 1599년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교회의 콘타렐리 예배당을 위한 대형 작품을 의뢰받으면서 종교적인 주제에 집중한다. 콘타렐리 예배당을 위해 그린 세 점의 유화작품 중 ‘그리스도가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은 카라바조의 대표작이자 바로크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공간. 다섯 명의 사내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돈을 세고 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손을 들어 마태를 가리킨다. 위엄 있는 그 모습에 완전히 압도당한 마태는 “저 말이십니까?”하고 반문하듯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마태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던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악랄하게 세금을 뜯어냈기 때문에 모두가 경멸하던 직업이다. 물질적 탐욕의 대명사이자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초라한 세리 마태를 그리스도가 자신의 제자로 불렀던 것이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9장 9절은 이 장면을 고작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지만, 카라바조는 바로크적 상상력으로 성서의 이야기를 극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광경으로 재구성하였다.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바로크적 스펙터클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빛이다. 어둠이 지배적인 공간을 강렬하게 침투하는 직선적인 빛은 극적인 명암대비를 만들어내 묘사된 장면에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카라바조의 빛은 공간 전체를 밝히지 않는다. 알 수 없는 광원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빛은 그림에 묘사된 인물들을 읽을 수 있도록 시선의 통로를 마련해 준다. 그리스도는 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지만 얼굴과 손을 밝혀주는 강한 빛으로 인물의 심리는 물론 그의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지나친 빛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인물들의 얼굴을 강하게 비춰주고 있어 이들의 표정을 빠짐없이 읽을 수 있게 해 준다.빛을 통한 명암대비가 그림 전체의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그 효과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독특한 화면 구성방식이다. 카라바조는 그림 속 장면을 마치 연극무대처럼 구성한다. 협소한 공간에 인물들을 밀집시킴으로써 집중력 있는 장면을 연출한다. 감상자들의 시선을 산만하게 만들 수 있는 부차적인 요소들은 과감하게 생략되었다.카라바조의 회화적 연출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등장인물들이 입고 있는 의상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AD 30년경 중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림 속 인물들은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시대에 유행하던 의상을 입고 있다. 이것은 그림에 현재성과 현장성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인데, 성서의 이야기가 마치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서이다.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가장 바로크적인 요소는 현실의 건축적 공간과 빛을 회화 속 가상의 공간으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 ‘마태를 부르시는 그리스도’는 콘타렐리 예배당 좌측 벽면을 위해서 그려졌다. 예배당 중앙 상단 부분에는 반원형의 작은 창이 나있고,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어와 실제로 예배당을 밝힌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화면 우측 상단에서 빛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림만 보아서는 그 빛이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화가는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실제의 빛을 알고 있었고, 그 빛을 그림 속으로 가지고 들어와 현실과 그림,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처럼 정형화되지 않고, 예측이 불가능하며, 상식을 뛰어넘는 극적인 방법을 통하여 르네상스적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크의 거장 카라바조의 작품세계이다. /미술사학자 r김석모

2020-08-24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교회’

최고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은 현대건축 최고의 거장 르 꼬르뷔지에(1887∼1965). 1955년 5년간의 공사 끝에 건축사의 이정표가 될 또 하나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프랑스 동부, 인구가 채 3천명이 되지 않은 시골마을 롱샹(Ronchamp)의 높은 언덕에 세워진 기념비적인 교회건축. 편히 롱샹성당으로 불리는 이 교회의 정식명칭은 ‘롱샹의 높으신 성모성당’이라는 뜻의 노트르 담 뒤 오 드 롱샹(Chapelle Notre-Dame-du-Haut de Rochamp)이다.시카고 건축학파를 이끌며 근대 건축의 첫 장을 펼쳤던 루이스 헨리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로 건축을 규정했다. 1908년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루스는 ‘장식은 범죄다’라고 선언했다. 르 꼬르뷔지에는 이 모든 금기를 깨고 충분히 기능하지만 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건축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시선의 방향이 달라지면 건축물의 형태도 달라진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 그런 것처럼, 베르니니의 조각상이 그런 것처럼 르 꼬르뷔지에의 롱샹 교회 또한 하나의 시점에 형태를 잡아두지 않는다.백색의 몸은 묵직한 콘크리트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콘크리트의 재료적 속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시각적 무게감이 한 층 더 할 것 같지만 롱샹의 건축 언어는 다른 속삭임으로 다가온다.어느 한 곳도 이러겠지 하는 서투른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非)규범성을 넘어 불확정적 형태들이 시선에 따라 빛에 따라 시시각각 새로운 조형미를 발산한다. 건축에서 기능은 모든 것에 앞서는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자주 기능과 대립하게 된다. 롱샹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유발하는 비규범적이고 비정형적인 형태가 공학적 측정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 서 있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건축이다.예측 불가능성이 가지는 조형적 다양성. 건축의 바깥 벽면을 따라가던 시선은 자연스레 내부의 구조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정형화된 건축에서는 이미 외부에서 충분히 내부 구조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꼬르뷔지에의 롱샹교회는 한 면이 다른 면을 감추듯 바깥 역시 내부구조를 보여주지 않는다. 교회에 발을 딛고 들어서야만 비로소 그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롱샹교회 내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공 빛을 철저히 제한하고 오로지 자연광으로만 교회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툼한 외벽의 두께와 불규칙적이고 비정형적으로 자리한 채광창. 창의 깊이는 빛의 밀도와 관계가 있다. 넓고 얕은 창이 받아들이는 빛은 건축물 내부 전체를 가득 채운다. 이럴 경우 빛이 건축구조를 지배할 가능성이 크다.반면 롱샹에서처럼 깊고 두터운 창이 집중력 있는 강한 빛을 내부로 끌어들이면 아주 극적인 공간이 연출된다. 건축가는 지나친 연출을 통한 시선의 산만함을 피하기 위해 유리에 색을 입혀 자연광이 색을 투과해 공간에 녹아들도록 했다.특이한 것은 천장이 벽면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천장과 벽면은 완전히 닿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 사이가 띠처럼 비어 있고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이러한 건축적 접근을 통해 재료의 원래적 성질은 증발해 버리고 심리적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전혀 다른 언어가 탄생한다.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곳곳에 마련된 작은 예배의 처소들이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빛이 새어들어 제단을 은은히 밝힌다. 제단들은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예배자들과의 경계가 최소화 되어 있다. 종교적 권위 보다는 소통과 평등이 강조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르 꼬르뷔지에의 롱샹교회는 기능하면서 아름다울 수 있는 건축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해 내면서 건축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훗날 얼마나 많은 건축가들이 꼬르뷔지에에게 빚을 지고 있는가? 위대한 건축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미술사학자

2020-08-03

렘브란트의 자화상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화가 렘브란트(1606∼1669)는 ‘빛의 마법사’라고 불린다. 빛과 어둠의 대비가 극명한 신비한 분위기의 걸작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00여 점의 자화상을 그린 렘브란트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자화상을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20대 초반 화가로 성장해 가던 풋풋한 청년의 모습에서부터 대성공을 거두며 자신에 차 있는 당당한 모습 그리고 한 순간 몰락을 경험하며 깊어가는 고뇌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자화상까지 렘브란트가 남긴 몇몇 점의 자화상만 살펴보더라도 한 명의 거장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자취를 찬찬히 쫒아갈 수 있다.렘브란트가 활동하던 17세기, 해상무역의 강자로 떠오른 네덜란드는 큰 부를 축적한다. 길드들은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최고의 미술가에게 작품을 의뢰하곤 했는데 1632년 암스테르담 외과의사협회는 아직 젊은 화가 렘브란트에게 단체 초상화를 의뢰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렘브란트의 걸작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이다.렘브란트 이전의 화가들은 그림 속 인물들을 마치 개개인의 증명사진을 오려붙여 놓은 듯 경직된 모습으로 그렸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초상화에 연출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생동감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낸다. 배경은 연극 무대처럼 배치했고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이 그림으로 스물여섯의 렘브란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부호들과 협동조합들은 앞다투어 청년 화가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큰 부와 명예를 쌓았다. 1634년 성공가도를 달리던 렘브란트는 베레모를 쓰고 고급 모피 외투를 두른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밝은 빛이 화가의 얼굴을 밝히고, 자신에 찬 매서운 눈빛으로 감상자들과 시선을 교환한다.1640년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대가의 여유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열정의 시기가 지나고 본질을 꽤 뚫고 있는 그런 분위기의 자화상이다. 그림 속 화가가 오른 팔을 난간에 걸치며 여유로이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는데, 이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티치아노(1490∼1576)가 그린 ‘누빈 소매 옷을 입은 남성’(1515년경)의 초상에서 가져온 것이다.정점에 올랐다는 것은 서서히 또한 기운이 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는 회화적 실험 정신이 렘브란트의 화가 인생을 내리막길로 안내하고 만다. 시민 민병대에서 의뢰한 단체 초상화가 문제였다. 1642년 폭이 4미터가 넘는 대작을 완성하고 의뢰인에게 건넸을 때 그 반응은 예상 밖으로 아주 부정적이었다. 민병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출동하는 절도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기대했을 텐데,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제각기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무질서함을 보이고 있다. 렘브란트는 연극적인 요소를 극대화해 자유분방한 화면을 구성하였지만, 의뢰인들의 기대에서 아주 벗어났던 것이다.한 점의 그림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렘브란트는 한 점의 그림으로 가파른 내리막을 경험한다.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을 불렀는지 세 명의 자녀들이 세상을 떠났고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세가 기울었고 화가는 일순간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에는 의욕과 자신감이 넘쳐났고, 전성기 시절에는 고귀한 모습으로 자신을 그림에 담았다면 몰락을 경험한 노년기 렘브란트는 새로운 차원의 정신세계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자화상은 인물화의 한 종류로 미술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은 것을 이야기한다. 초상화가 그렇듯 화가의 자화상 또한 단순히 그려진 인물의 외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품과 내면 그리고 생의 단면들이 색과 선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며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킨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0-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