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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걸작

등록일 2021-05-24 19:48 게재일 2021-05-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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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作 ‘최후의 만찬’.

“나는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이른 아침 작업대에 올라가 작업하는 것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온종일 작업에만 몰두 했다. 그리고는 사나흘은 붓이라고는 손에 잡지 않고 그려 놓은 것을 그저 서너 시간씩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고의 걸작 ‘최후의 만찬’ 제작 과정을 목격했던 도미니크회 수도사 마테오 반델로가 남긴 기록이다. 밀라노의 실권자 로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의 의뢰로 1495년경 시작된 ‘최후의 만찬’은 1497년 거의 마무리 되었다. 레오나르도의 걸작이 그려진 곳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이다. 이곳은 도미니크회 수도원 교회로 ‘최후의 만찬’은 수도사들의 식사공간인 체나콜로의 한 쪽 벽면에 그려졌다. 청빈한 구도자의 삶을 살던 수도사들이 식사하는 장소에 ‘최후의 만찬’ 장면이 그려진 것은 종교적으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최후의 만찬’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이 가진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 수도사들이 매 끼니마다 동참하고 있음을 뜻한다. 반델로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레오나르도는 코르테 베키아의 기마상 작업을 하다가 뭔가 못 마땅한 일이 있으면 작업을 멈추고 ‘최후의 만찬’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작업대에 올라가 몇 번의 붓질을 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레오나르도의 이러한 변덕을 예술가에게 내재된 천재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반델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조금 다른 곳에 있다. 원하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다 또 순식간에 손을 땐 작업 방식을 통해서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프레스코는 물로 섞은 석회 반죽을 벽면에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해 그림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프레스코는 하루에 작업 할 수 있는 면적이 아주 제한적이다. 그리고 프레스코의 결정적인 단점은 한 번 그리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프레스코의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기름과 유약을 사용했다. 그런데 물과 기름이 섞일 리가 없다. 결국 레오나르도의 잘못된 재료 선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그림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00년 밀라노에 대홍수가 일어났다. 작품이 그려진 공간이 완전히 침수되면서 그림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프란체스코 스카넬리가 남긴 1642년 기록은 작품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후대에 손상된 그림을 구하기 위해 몇 차례 보수 작업이 감행되었다. 그런데 잘못된 복원이 오히려 작품 손상을 악화 시키는 결과를 불러 왔다. 게다가 1800년대 독일의 대문호 볼프강 괴테가 남긴 글에 따르면 엄청난 폭우가 몰아닥쳐 최후의 만찬이 또 다시 침수되었다고 한다. 연속된 불운에도 불구하고 30여 년 간 복원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최후의 만찬’이 조금씩 옛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됐는데, 그만 독재자 무솔리니가 나타나 벽화복원 총책임자를 해임해 버리는 바람에 복원 작업은 지연되고 말았다.

1908년부터 루이지 가베나기라는 뛰어난 복원가가 투입되었고 그리스도의 왼손 원형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걸작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8월 14일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가 폭격을 당하고 말았다. 공습 직전 쌓아 놓은 모래주머니 덕분에 간신히 ‘최후의 만찬’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걸작을 살리겠다는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복원 전문가 마우로 페치올리의 노력으로 벽화는 옛 색감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작품의 원형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손상되었던 ‘최후의 만찬’은 1978년에서 1999년까지 첨단장비와 최신 복원 기술을 동원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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