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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양식의 탄생 : 로마를 닮은 ‘로마네스크’

등록일 2023-04-10 18:42 게재일 2023-04-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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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고뉴 지역 클뤼니에 남아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

476년 게르만의 침략으로 서로마제국이 패망한 후 유럽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사회는 급격히 변했고 사람들은 비참한 마음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로운 천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종말과 심판이라는 세기말적 공포에 휩싸였다. 새천년이 밝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마지막도 심판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말의 공포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안도했다. 신의 분노가 진정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마을들은 서로 경쟁하듯 낡은 교회를 단장하거나 크고 웅장한 교회를 새로 짓기 시작한다. 이 시기 미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양식’이라는 것이 출현한 것은 괄목할 만한 점이다.

미술에서 양식은 스타일을 말한다. 개개인의 미술가들은 누구라도 각자 고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술에서의 양식은 개별 미술가들의 독특한 특징만을 뜻하지 않는다. 같은 시대 특히 같은 지역에 속한 미술가들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어 있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받은 교육이나 지역에서 흔히 접한 미술이 자연스럽게 의식으로 스며들어 영향을 준다. 미술가들은 각자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형식을 지니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양식이라고 부른다. 서양미술사의 시대구분은 대부분 양식에 따라 나누어진 것이다.

10세기에서 11세기로 넘어가는 동안 미술에 양식이 관찰되는데 후대 미술사 연구자들은 그것에 ‘로마네스크(Romanesqu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단어는 고대 로마를 가리키는 ‘로만’과 ‘~과 닮은’을 뜻하는 접미사 ‘-esque’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로마를 닮은’이라는 의미다.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에 ‘로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서유럽 중세 기독교 미술에 라틴 다시 말해 로마문화가 녹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로마네스크라는 개념에는 라틴어 문명권의 정신적 연대의식이 담겨 있으며 고대 로마의 미술이 중세 미술에 흘러 들어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건축은 많은 요소들을 고대 건축에서 가져왔다. 교회건축이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바실리카’ 구도가 로마에서 온 것이고, 세례당이나 소규모 예배당을 지을 때 나타나는 중앙집중식 원형 구도는 고대 신전이나 영묘에서 가져 온 것이다.

돔이라 부르는 반구형 천장이나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아치 그밖에도 육중하고 두꺼운 벽면구조 또한 고대로마의 건축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이 모든 것을 고대 로마로부터 가져온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중세인들이 새롭게 발명한 것도 있다. 예컨대 목재 버팀구조의 천장을 석조 반원통형 궁륭(Vault)으로 바꾸었는데 이 새로운 천장구조는 중세 교회건축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으로 꼽힌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발전을 견인한 것은 수도원과 수도사들이다. 특히나 910년 무렵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클뤼니(Cluny)에 세워진 수도원은 미술사 발달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교회 개혁을 주창했던 몇몇 수도사들은 부르고뉴의 공작 기욤 드 아키텐느로부터 땅을 기증받아 클뤼니에 수도회를 창설했다. 교회 개혁의 선봉에 섰던 클뤼니 수도회는 남으로부터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를 지켰고 스페인 사람들이 이슬람에 빼앗겼던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성인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것으로 알려진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을 계획하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기독교도 사이의 유대감을 돈독하게 다진 것도 클뤼니 수도회였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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