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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過而不改’, 국민만 죽는다

홍석봉 정치에디터 한해의 끝이다. 매년 이맘때면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한다. 한해의 의미를 한 단어로 정리해 많은 이들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대학교수들이 2022년엔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았다.과이불개는 논어 ‘위령공편’,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에 나오는 말이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는 뜻이다.“여당이나 야당 할 것 없이 잘못이 드러나면 ‘이전 정부는 더 잘못했다’ 혹은 ‘야당 탄압’이라고 말하고 도무지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이불개를 꼽은 이유다.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네 탓 정치’를 비판한 말이다. 교수들은 “잘못하고 뉘우침과 개선이 없는 현실에 비통함마저 느낀다”고 했다. 진영 간 이념 갈등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패배자가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일단 우기고 보는 풍조가 만연하다는 지적도 나왔다.1992년 창간한 교수신문은 2001년부터 매년 연말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아 발표했다. 2001년 ‘오리무중(五里霧中)’을 시작으로 2021년 ‘묘서동처(猫鼠同處)’까지 나왔다. 과이불개는 22번째 선정된 사자성어다. 오늘의 사자성어로 선정된 단어들은 그해를 상징하고, 그해를 대표하는 축약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풍자하고 교훈적 의미도 강하다.연말 정국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야당이 행안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강행 처리한 때문이다. 야당은 탄핵소추까지 밀어붙일 태세다. 여당도 양보는 없다. 여야가 민생은 뒷전인채 정파싸움으로 날을 새운다. 서로 네 탓만 한다. ‘과이불개’하면 국민만 죽어난다./홍석봉(정치에디터)

2022-12-12

변화하는 생산방식과 품질관리

김종찬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모래톱 켜켜이 하얀 포말을 그리며 파도가 부서지던 해변엔 하얀 증기가 하늘에 닿을듯 피어오르는 제철소가 들어서고, 운치 있고 고즈넉한 오솔길이 신작로로 변하고, 무엇보다 술만 마시면 골목길 들어서며 유행가를 부르던 꿈이 없던 청년들이 공장으로 들어간 사건은 엄청난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 시절에는 기계가 쇠를 가공할 때 일어나는 불꽃이 애국가 장면에 클로즈업 돼 가슴 벅찬 감동을 주었고, 숙련된 작업자의 손끝에서 품질이 만들어지고, 부지런함은 생산성 보증의 바로미터였다. 그 시절로부터 반세기를 지나온 이제는 생산방식과 품질관리가 변해야 하는 변곡점에 다다랐다.사람이 도구를 사용한다든지 손으로 기계를 조작하면서 가공, 조립을 하던 시대에는 IE적 접근인 동작 연구나 표준작업시간의 설정 등으로 생산성을 개선하는 기법이 크게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사람에 의한 수작업은 시간의 흐름을 변수로 놓고 분석하면 통제되지 않는 결과를 알 수 있어 통계 이론에 근거한 품질관리(SQC)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그런데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을 넘어 가공, 조립산업에서도 자동화에 의한 효율이 진행되어 설비에 대한 의존이 높아짐에 따라 수작업을 전제로 한 전통적인 생산 품질관리의 사고방식만으로는 현상에 대응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기계의 수동 조작, 재료의 해체 등 단순 반복작업에서부터 최근 오퍼레이터의 업무는 설비의 운전, 유지, 감시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그러한 결과로 제조 현장에서는 전통적인 숙련공에 요구되는 정확한 동작이나 빠른 손놀림, 숙련에 대한 기대가 변해가고 있다 하겠다.어쨌든 조립이나 준비 교체 등의 수작업 자동화를 더욱 발전시키고, 제조업에서의 설비 의존은 더욱 진행될 것이며 설비 관리는 한층 더 심화된 결과를 요구할 것이다. 자동화가 진행되어 설비가 바르게 운전, 조작, 유지, 관리되어 항상 올바르게 기능을 발휘한다고 가정하면 기계는 잘못이나 오차를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고장, 불량은 ‘0’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실은 많은 공장에서 매일 고장이나 불량이 발생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들 현상은 뭔가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확률 분포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요인의 관계를 면밀히 해석해 보면 현상을 일으키는 요인, 즉, 설비의 올바른 유지, 관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설비의 기능과 성능의 변화로 생산에 영향과 불량을 일으키고 있는데 자동화된 설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사람이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고장, 불량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동화가 진전된 공장에서는 어떤 공정의 아웃풋으로서 만들어 낸 제품의 품질을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통계적으로 고찰해 본다고 해도 거의 의미가 없다. 불량이라는 현상에 대한 의논보다도 오히려 불량을 발생시키는 설비의 요인은 무엇인가를 논리적이고 공학적으로 의논하고 불량을 발생시킨 요인까지 추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동화가 주는 이익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손끝으로 관리하는 설비의 유지에 쏟는 땀이 결정을 한다는 사실이다.

2022-12-12

손잡고 더불어 다문화와 함께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겨울의 초입을 알리는듯 반짝추위가 시작됐지만,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은 분주하기만 하다. 불과 20여일밖에 남지 않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기에, 새로운 계획과 목표를 정하고 예산을 짜며 운영방안을 모색하느라 너나없이 바빠지기도 한다. 또한 미뤘거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일들을 최소한 연내에 실행하고 매듭지어야 하기에 더더욱 다급해지는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일들은 자신이 하기에 달렸지만, 사소한 일 하나라도 소홀히 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마음자세일 것이다. 더욱이 환경과 문화가 다른 상황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한껏 중시되고 민감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다문화가족에 대한 이질감과 문화적인 견해차 등은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긴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이른바 다문화사회란 한 사회 안에서 다른 인종, 민족, 종교, 계급, 성 등에 따른 다양한 문화와 가치를 존중하는 다인종·다양성의 사회를 뜻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자본과 노동의 세계화, 교통 및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른 글로벌화의 추세로 국가 간 인구 이동과 교류가 증가하면서 다문화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외국인 근로자, 국제결혼 여성, 외국인 가정의 자녀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 체류 외국인의 구성이 다양해지고 있으며, 그 수도 1990년에 5만명 수준에서 현재 약 215만명으로 국내 총인구의 4.2%를 차지할 정도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포항지역도 예외가 아니라서 다문화가정 세대수가 최근 2천100세대를 넘어서는 등 다양한 인종과 문화 공존의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이러한 차제에 최근 열린 제12회 포항시다문화축제는 코로나19로 인해 3년만에 재개됐지만 다문화가족의 화합을 다지고 시민과 함께하는 어울림 마당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각 나라별 전통놀이를 체험하고 페이스 페인팅, 요술풍선 만들기, 마술체험, 다문화 포토존 등의 체험코너와 난타 공연, 무용과 합창, 독특한 의상과 댄싱, 웃음과 재미를 더하는 명랑운동회 등의 프로그램은, 참여한 가족들에게 코로나의 갑갑함을 일순간에 떨쳐내고 흥겨움과 유쾌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였다. 다양성의 조화가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소통의 공감 속에 배려와 만남의 소중함이 어우러지는 것 같았다. 그 같은 자리에 자원봉사자들의 정성스런 손길이 더해져 한결 다채롭고 넉넉했었는데, 특히 포항제철소 사진봉사단원들이 행사장에서 신청가족의 다양한 프로필사진과 스냅사진을 촬영하고 즉석에서 인화, 미니앨범에 넣어 추억을 선물해주는 재능봉사활동으로 주위의 큰 호응을 받았다.다문화현상은 이제 더 이상 편견이나 갈등, 차별이 아니라고 본다. 글로벌시대의 사회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동시에 개방성, 창의성이 증진되는 상생의 공동체로서 따뜻한 시선과 연대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손잡고 더불어 호흡하는 동행과 포용의 걸음을 함께 내디딜 때, 진정한 어울림의 다문화 꽃이 피어날 것이다.

2022-12-12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통해 문화로 빛날 달성군

최재훈 대구 달성군수 프랑스의 오르세미술관, 일본의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및 교토국립근대미술관, 영국의 테이트브리튼.이들의 특징은 모두 고대와 현대의 사이인 근대미술의 역사를 담은 콘텐츠가 가득한 곳이라는 점이다.그러나 한국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은 있지만 근대미술관은 부재해 있다.고대-근대-현대에 이어지는 시대별 문화를 정립하고 각 미술관마다 전문적인 역할을 맡기 위해서는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이 필수적이다. 특히 한국의 근대란 관습적인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라는 격변적인 시대를 지나 일본문화권의 강력한 지배하에 맞서 싸운 작가들이 살았던 시대이다. 이에 어떤 시기보다 정신적인 억압의 아픔을 극복하고 예술인으로서 작품으로 승화해 뛰어난 기량을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소중한 근대미술품은 전쟁과 대립의 시절을 겪었고 이후에도 제대로 발굴되지 못한 채 많은 문화가 소실돼 있는 상태라 하루빨리 보존이 필요한 상태이다. 지금까지는 소수의 학자들이 근대 미술에 대해 연구해왔지만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더 이상 소실되지 않도록 보전해야 한다.그렇다면, 한국미술계에 중요한 국립근대미술관은 어디에 지어야 할까.당연히 국내에서 근대 미술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높은 곳이어야 할 것이다. 대구는 오랜 근대미술에 대한 역사를 지니고 서동진, 이인성, 이쾌대 등 수많은 근대 작가들을 포용한 곳이다. 또한, 지방 문화 분권에 대한 국정과제와 외국의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지역의 다양한 장소에 중요한 미술사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전 국민 모두가 함께 문화를 즐길 수 있기에 더 의의가 있다.한국전쟁의 피난지로서 대구는 여러 예술인들이 모여 개인전을 열고 1952년 대구화우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대구 근대 미술전, 대구미술전람회 등을 열어 지속적으로 근대 미술에 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곳이다. 한국 근대 미술에 큰 획을 그은 화가인 이인성의 예술 정신을 기리고 미술 발전의 기여를 위해 매년 대구미술관에서 ‘이인성 미술상’의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기도 하다.근대 미술의 역사가 가득 향유된 대구에 국립근대미술관이 지어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만약 대구에 당장의 유수한 미술품들을 보전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어디일까. 감히 대구교도소 후적지가 최적의 장소라 단언해 본다.윤석열 정부의 구(舊) 경북도청 후적지 문화예술허브 조성의 방향성을 조금 바꿔 그보다 시민들이 교통에 편리하게 접근하고 무엇보다 열렬히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발굴시키는데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달성군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대구의 근대시대 문화 아이템은 중구의 김광석거리, 근대골목 등의 다양한 관광 상품을 통해 문화 시설이 다양해졌다. 이에 달성군의 근대미술관 건립을 통해 수성구의 간송미술관, 대구미술관과 함께 대구 관광 트라이앵글 특구가 되어 시각예술 클러스터를 조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대구교도소후적지는 근대미술관뿐만 아니라 문화체험시설이나 공원 등 복합문화시설로 꾸며져 많은 시민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 할 공간이다. 근대미술관의 건립을 통해 비단 달성군민뿐만 아니라 대구 시민들의 문화의식 향상과 지방분권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물로 보이게 될 것이다.국립근대미술관과 같은 거대한 공간의 조성을 위해서라면 지자체의 후원이 꼭 필요하다. 달성군은 여러 근대 작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애정을 가지며 아낌없이 내어줄 준비가 돼 있다.국립근대미술관 건립에 대한 기본구상과 타당성 조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선진 사례를 검토하고 군민들과 의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반영할 생각이다.이와 함께 고(故)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에서 쏟아진 근대미술관에 대한 관심을 살려 적극적으로 특화된 사업여건을 분석하고 전략을 마련해 건립 가능성을 보일까한다.아울러 우리 달성군은 대구교도소 후적지를 시작으로 구(舊) 화원운전면허시험장-사문진나루터-달성습지-디아크로 이어지는 S자형 관광벨트를 구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근대미술관을 시작으로 대구 관광에 대한 새로운 지평선을 열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콘텐츠로 꾸며진 대구와 달성군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올 것이며, 지역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2022-12-11

황금 양모의 전설 양자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화홍련전’이나 ‘신데렐라’처럼 계모에게 구박과 홀대를 받는 아이들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많다. 이번 이야기도 그렇다.아테네 북쪽 아타마스 왕이 다스리는 보이오티아라는 나라가 있었다. 왕비 네펠레(구름의 정령) 사이에 왕자 프릭소스와 공주 헬레가 생겼지만, 아타마스 왕이 네펠레를 쫒아버리고 이노라는 여인을 새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노는 네펠레가 낳은 아이들을 맡아 키웠으나, 친아들이 생기자 남매를 구박하기 시작한다. 결국엔 도를 넘어 왕자와 공주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이노는 이듬해 논밭에 뿌릴 곡물을 몰래 불로 익혀 놓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봄이 되자 씨앗을 뿌렸으나 익은 종자에서 싹이 돋아날 리 없었다. 당황한 아마타스 왕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청했더니, 왕자와 공주 두 아이를 신전 제물로 바치면 싹이 돋을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이 역시 계모 이노가 신전 사제에게 돈을 주고 꾸민 거짓이었다.아무리 신탁이라고 해도 자신의 아들딸을 희생시킬 부모는 없다. 왕이 움직이지 않자 계모 이노는 신탁 내용을 나라에 퍼트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왕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힘든 결정을 내린다. 결국 제단에 바쳐진 프릭소스와 헬레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신전을 에워싸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 구름이 걷히고 보니 신전 제단에 묶여 있던 왕자와 공주가 사라졌다. 어머니 사랑이 일으킨 기적이었다.두 남매를 지켜보던 어머니 네펠레는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자 제우스신에게 남매를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제우스는 전령신 헤르메스에게 부탁해 하늘을 달리는 황금양을 얻어 네펠레에게 주었다. 구름의 요정이었던 네펠레는 그 덕에 신전으로 달려가 운무를 일으켜 두 아이를 숨긴 채 하늘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헤르메스에게 받은 황금양 등에 아이들을 태워, 당시 세상의 끝이라 여겼던 동쪽 끝 아득히 먼 콜키스로 날아가게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바다를 건너야 했다. 이때 넓게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던 여동생 헬레가 현기증을 일으켜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오빠 프릭소스도 어쩌지 못했다. 동생은 까마득한 점이 되어 포말을 일으켰고, 결국 파도의 먹이가 되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동생 헬레가 떨어진 바다를 헬레스폰토스 해협이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혼자가 된 프릭소스는 흑해를 건너 콜키스에 도착하자 그곳 왕 아이에테스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프릭소스는 신의 계시를 받아 황금 숫양을 제우스 제단에 바쳤고, 아이에테스에게는 황금 가죽을 주었다. 왕은 기뻐하여 황금 가죽을 떡갈나무에 걸어놓고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 독룡에게 지키도록 했다. 제우스는 황금 숫양을 가상히 여겨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게끔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다.프릭소스는 콜키스의 공주 카리오페와 결혼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향수병이 생긴 것이다. 고향 그리스를 그리워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이래저래 불운한 프릭소스 삶이었다. ‘친아버지 도끼질하는데 가지 말고, 의붓아버지 떡치는데 가라’라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게 들리는 신화다.양자리와 관련된 신화는 여기까지다. 그렇지만 이 신화는 유명한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대모험’에서 바로 이 황금 가죽을 얻기 위해 떠나는 새로운 영웅들이 탄생하는 시점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러

2022-12-11

대북 관계로 재미 볼 때는 지났다

김진국 고문 쌍방울이 북한에 수백만 달러를 몰래 전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경기도 지사 시절 쌍방울이 북한과의 통로 역할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지난달에는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이것을 ‘문재인 정부 차원의 대북 송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문재인 정부는 북한에 1원 한 장 준 적이 없다”라면서 “백번 천번 양보해 쌍방울이 검찰 주장대로 북한에 정말 돈을 줬다 하더라도, 그게 대체 왜 문재인 정부 차원의 ‘공작’이란 말이냐”라고 반박했다. 이재명 대표의 문제에 문재인 전 대통령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항변으로 들린다.진실은 재판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쌍방울이 아니라도 북한으로 달러가 흘러 들어가는 문제는 심각하다. 핵과 미사일이 되는 자금이기 때문이다. 한때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권이 북한과의 우호 관계를 경쟁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 북한을 다녀오는 걸 통과의례로 여겼다. 대통령의 업적으로 가장 욕심을 낸 것도 남북관계다. 그럴수록 북한은 대가를 요구했다. 정치인뿐 아니다. 민간 접촉에도 돈을 요구했다. 북한 입국 비자가 달러였다.남북 화해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도 북한의 달러박스였다. 김대중 정부 때 ‘햇볕정책’ 세례를 받았다. 조건 없이 포용하면 상대도 우리 손을 잡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북한은 화해 정책을 이용해 핵 개발에 몰두했다. 입으로는 ‘비핵화’를 외치면서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미사일은 미국 전역을 위협할 정도로 발전했다.북한의 핵무기는 누구를 위협하나. 정말 자위용으로 갖고만 있겠다는 건가. 지난 4월 김정은은 “우리의 핵이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돼 있을 수 없다”라고 천명했다. 체제 방어용이 아니라 한국을 향한 공격용이고, 적화통일의 수단이라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북한 핵무기는 우리를 겨냥한 게 아니라거나, 통일되면 우리 것이라는 주장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몽상에 불과했다.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따지기는 어렵다. 그때는 그 당시의 정세가 있었다. 북방정책은 우리의 외교 관계를 튼튼하게 했고, 화해 정책으로 대북 관계의 주도권을 쥐었다. 선의를 악용한 건 북한 정권이다. 화해 제의를 핵 개발 자금과 시간을 버는 데 이용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생존을 위해서도 북한의 전쟁 준비 자금은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정파를 뛰어넘어 생존의 문제다.올 한해 북한이 쏜 미사일과 핵 실험 비용을 1조 원 정도로 추정한다. 한국은행 기준 지난해 북한의 예산이 91.2억 달러다. 전체 예산의 10분의 1을 미사일로 쏜 셈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전용할 수 있는 전략물자 수입 의존도가 2018년 96%에 이르렀다는 한국국방연구원 보고가 있다.유엔 제재의 가장 큰 구멍은 중국이다. 니키 헤일리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중국과 러시아는 대북 제재 해제를, 한국은 예외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유엔 제재의 구멍이 중국·러시아 다음으로 우리라는 의미다. 물론 남북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계산과 개인적 탐욕을 위해 우리를 겨냥한 총알을 제공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유엔이 금지한 일이 계속됐다. 한국 유조선이 북한에 매각됐다. 해상에서 북한 배에 석유를 옮겨 실어준 한국 배, 북한 석탄과 선철을 바다에서 몰래 옮겨 실은 한국 배가 적발됐다.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거액의 통행세를 지급하고, 컴퓨터 등 수출금지 품목을 휴대 물품으로 들고 가 ‘분실’하고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 코인의 해킹과 자금 세탁의 통로로 한국이 이용된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최근에는 10조 원에 이르는 수상한 해외 송금이 수사받고 있다. 북한이 연루된 건 아닌지 조사해야 한다.대북 관계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무분별한 돈벌이 수단이 되어선 곤란하다. 남북관계로 재미 볼 때는 지났다. 생존의 문제다. 우리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돕는 것은 이적행위다. 달러는 전용될 게 뻔하다. 물품도 확실한 검증이 필요하다. 정치적 이해를 뛰어넘어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할 때다. /본사 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12-11

부모의 자격

김규종 경북대 교수 35년 전 분단 서도이칠란트로 유학을 떠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난생처음 타본 비행기가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經由)해 북극항로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당시 한국 여권의 결혼 관련 질문은 두 가지였다. 미혼이냐 기혼이냐, 그것이 전부였다. 나 역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데 도이칠란트에 가보니 당연한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었다. 문화적 충격이 쿵, 하고 다가왔다.유럽의 유일 분단국가 서도이칠란트의 여권에 기록된 결혼 관련 질문은 다채로웠다. 미혼, 기혼, 이혼, 별거, 동거, 미혼모, 미혼부 같은 여러 항목이 기재돼 있었다. 당시 나로서는 경천동지할 일이었고, 전연 이해할 수 없는 요지경의 세상이었다. 이혼조차 낯선 것인데, 거기에 별거와 동거, 남편과 아내가 없는 미혼모와 미혼부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가 같은 하늘 같은 시간에 버젓하게 자리하고 있었다.서론이 길어진 까닭은 미국의 CNN 방송이 지적한 한국의 저출생 국가 면모에 대한 보도 때문이다. 주지하듯 대한민국의 출생률은 지난 3분기 기준 0.79명이다. 안정적인 인구 유지에 필요한 2.1명의 거의 3분의 1 수준이다. 미국의 1.6명이나 일본의 1.3명보다도 현저하게 낮은 출생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짚은 CNN의 분석이 폐부를 찔러왔다. 지난 15년 동안 225조 원, 해마다 15조 원의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도 실패한 저출생의 원인을 지적한 게다.CNN 방송 보도에 내가 크게 공감한 까닭은 ‘부모의 자격’에 관한 지적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기를 갖는 것은 젊은 이성 신혼부부에게는 기대하는 일이지만, 그 외의 가정은 자녀를 기를 자격이 없다. 미혼여성에겐 체외수정이 제공되지 않고, 동성결혼은 인정하지 않으며, 사실혼 관계의 부부는 입양할 자격조차 없다. 이것이야말로 출생에 관한 청교도적인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명쾌하고 통렬한 정답이다. 근데 언제부터 한국이 청교도의 나라가 되었는가?!결혼과 가족 그리고 부부의 형식에 관한 성찰이 배제된 채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정치권과 보수언론이 문제의 발원지다. 조선 시대의 권위적이고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결혼관이 지배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문제의 근원이다. 1820년대 팡틴이 코제트를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겨야 했던 프랑스의 미혼모 문제가 200년 뒤에 자칭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고 있다.혼자 살거나 동성애 부부로 살면서 아이를 입양하여 가족을 구성할 수 있고, 결혼과 무관하게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미혼모와 미혼부가 가능하다는 가족문화가 인정되어야 한다. 이른바 ‘정상’이란 틀 안으로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끌어들이려는 시대착오적이고 경직된 시선으로는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일본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단일민족신화’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21세기를 살면서 결혼과 가족에 관한 국민의 의식은 아직 19세기에 정체돼 있음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참에 우리의 후진성을 깊이 성찰해봄은 어떨까, 생각한다.

2022-12-11

장수 축하금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 전 구미시는 경북 자치단체로서는 최초로 만100세 이상 어르신에게 장수 축하금 100만원을 지급하는 조례안을 마련했다. 장수 축하금 지급대상은 구미시에 1년 이상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는 만100세 이상 어른이다. 현재 34명 정도 된다고 한다.인천시 계양구가 지난 10일 100번째 생일을 맞는 관내 노인들에게 장수 축하금 100만원을 전달했다. 계양구는 이를 위해 올해 3천만원의 예산을 편성했고 내년에도 계속사업으로 이어갈 계획이다. 구청 관계자는 “한 세기를 살아온 것 자체가 축하받을 일”이며 “사회적으로 장수 가치를 되새기며 경로효친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대구 달성군과 대전 중구, 울산 북구 등 전국적으로 10여 군데 지자체가 장수 축하금이란 명목으로 어르신에게 현금이나 상품 등을 전하고 있다.100세 시대를 맞아 자치단체의 복지사업으로 장수 축하금의 전달은 바람직한 측면이 많다. 장수 노인이 늘어나고 장수 노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 촉구 등 건강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일본서는 매년 경로의 날을 맞아 100세를 맞는 노인에게 총리 명의의 축하장과 은잔을 증정했다. 그러나 2016년부터는 순은이 아닌 은도금으로 사양을 바꿔 전달했는데, 100세를 맞는 장수자가 맹렬히 늘어난 때문이라 한다. 현재 일본의 100세 이상 고령자는 8만5천여명이다. 우리도 100세 이상 고령자가 매년 급격히 늘어 지금은 2만2천여명에 달한다고 한다.100세 시대 개막은 인류학적으로 큰 진전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유병장수가 아닌 무병장수로 이어져야 장수의 가치는 더 빛날 수 있다. 인류의 장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우정구(논설위원)

2022-12-11

외롭던 이야기방

강길수 수필가 허전하다. 출퇴근 때마다 모서리를 돌며 안을 쳐다보던 작은 방이 사라졌다. 사라진 바닥엔 정사각형 새 보도블록이 어설프게 깔렸다.작은 방은 이따금 풋풋함이 넘쳤다. 중학생들이 한두 명 혹은, 두세 명 붙어서서 손에 든 것에 귀를 들이대며 얘기꽃 피우던 방이다. 때론 깔깔대고, 때로는 희죽거리거나 히죽대고, 어떤 날은 어두운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옆엔 아파트 모델하우스와 은행도 있지만, 내가 본 이야기방은 중학생들을 빼면 거의 비어있었다. 하여, 운동장 밖 모퉁이에 홀로 섰던 이야기방은 외로워 보였다. 외로움 못 이겨 떠났을까.시대 변화가 잘 드러나는 곳의 하나가 된 이야기방, 이름하여 ‘공중전화 부스’다. 공중전화는 통신수단의 발전 단계에서, 아날로그 시대의 한 획을 그은 존재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공중전화는 사람들의 소유하지 않은 생활필수품이었다. 즉시성, 신속성, 편리성에다 익명성까지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 하나, 사람들의 애환 담긴 이야기방도, 혹독한 경쟁력 시장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있다.휴대폰이 없었던 젊은 날, 타지나 외국에 출장을 가면 공중전화를 많이 사용했다. 한 번은 LA공항에서 공장장이 공중전화를 하는 사이, 007가방 하나를 들치기 당하는 일도 있었다. 나도 그 곁에 서 있었는데, 어느새 훔쳐 갔는지 내가 어안이 더 벙벙했었다. 다행히 출장서류는 내 가방에 있어서 무사했다. 이처럼 공중전화 부스 이야기방은 사람 삶이 그대로 서린 현장이다.내 기억엔 휴대폰이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 생활의 온갖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폰을 통해, 5세대 이동통신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즉,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기술’ 등을 구현한다니 말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삶의 모든 부문에 바라는 것을 실시간 이룰 수 있다 한다. 가히, 우리 삶의 근본적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그러나, 사라진 공중전화부스 자리에 깔린 보도블록을 밟고 선 내 마음은 허전하고, 불안하며, 무엇에 홀린 듯하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편리성에 중독되며, 자기도 모르게 ‘과학기술’이란 ‘냄비 안의 개구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운전하여 여행 갈 수 있는데 시내버스, 시외버스, 완행열차를 갈아타고 고생고생하며 여행 다니던 때가 왜 더 행복하게 느껴질까. 내가 구세대 꼰대이기 때문일까.이제, 이야기방에서 풋풋한 중학생들을 더 만날 수 없다. 그들에게 스마트폰으로 예전 같은 얘기꽃들을 피울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지난여름, 직장의 법정 교육 참가차 오랜만에 서울 지하철을 탔었다. 대부분 젊은이와 일부 나이 든 이들도, 객차 안에서 모두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과연, 공중전화 부스의 전화처럼 고맙고 요긴한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쓰고 있었을까. 내 마음의 대답은 ‘아니다’이다.오늘 퇴근길에도, 이야기방이 외롭게 서 있던 자리에 내 마음은 머뭇거린다.

2022-12-11

릴리푸트읍이 그렇게 나쁩니까?

유영희 작가 지금도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죽었다는 뉴스가 들리고 있다. 조사하면 언제나 노동자가 무리한 작업 상황에서 일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렇게 죽음이 이어져도 달라지는 건 없다.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가 2007년에 한 인터뷰를 보면, 1978년에 나온 이 책이 30년이 지나도록 읽힐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고도 15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이 책은 유효한 것 같다.대강의 내용은, 아버지, 엄마, 영수, 영호, 영희 가족이 재개발로 살던 곳에서 쫓겨나 은강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저임금 노동자로 고단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다. 결국 난장이 아버지는 삶을 스스로 마친다. 이 소설집에는 모두 열두 작품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에서 영희는 ‘릴리푸트읍’을 말하며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짓는다. ‘릴리푸트읍’은 가상의 국제 난장이 마을이다.“난장이들에게 릴리푸트읍처럼 안전한 곳은 없다. 집과 가구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용품의 크기가 난장이들에게 맞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는 난장이의 생활을 위협하는 어떤 종류의 억압·공포·불공평·폭력도 없다. …. 릴리푸트읍에는 전제자가 없다. 큰 기업도 없고, 공장도 없고, 경영자도 없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난장이들은 세계를 자기들에게 맞도록 축소시켰다. …. 독자적인 마을을 열망한 작은 힘들이 난장이 마을을 세웠다.”이 문단은 10여 년 전 어느 대학의 논술 모의고사에 나온 부분이기도 하다. 출제자는 릴리푸트읍을 비판하라고 했고, 예시 답안은 마을이 난장이들에게만 맞추어져 있는 획일적인 곳이어서 난장이가 아닌 사람들은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약자가 자기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이렇게 뒤틀다니, 아무리 사고력을 시험하는 논술 문제라고 하지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최근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최병천의 ‘좋은 불평등’이라는 책을 보니 조세희의 이 작품이 다시 떠오른다. 1장 ‘좋은 불평등과 나쁜 평등’은, 평등은 좋고 불평등은 나쁘다는 기존 관념을 깨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저자는, 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1994년부터인데, 이때부터 국내 총생산이 높아지고 대기업도 생겨서 덩달아 노동자의 임금도 올랐다고 하면서, 이것을 ‘좋은 불평등’이라고 한다. 아마도 저자는 불평등해도 모든 국민이 가지게 될 파이가 커지면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릴리푸트읍에는 경제성장을 추동할 수 있는 강력한 전제자도 없고, 성장의 동력이 되는 대기업도 없다. 모의 논술 출제자에 의하면 릴리푸트읍은 획일적이어서 문제였는데, 최병천에 의하면 가난해서도 문제가 된다. 이렇게 릴리푸트읍을 나쁘다고 해도 괜찮은 것일까?중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 모두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천부인권을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는 내용이 없다. 장애인과 임금 노동자에게도 천부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꾸기가 점점 더 힘겨워지는 것 같다.

2022-12-11

한국의 태양광, 충분히 경제성 있다

위현복 (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한국은 땅이 좁아서 태양광을 비롯한 신·재생에너지 시설을 하기에 어려운 나라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일조량이 부족해서 태양광의 경제성이 떨어진다고도 한다.모두 잘못된 편견이다. 지난해 말 한국의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7.2%였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70%는 돼야 한다. 통계적으로 2050년 총 에너지의 70%를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토 면적의 3.5~4.0%의 토지가 필요하다. 현재 대부분 지방자치단체 태양광 설치 조례는 △절대농지의 경우 태양광 설치가 아예 안 되고 △인가(마을)에서 300~500m 이상 떨어져야 하며 △군도(郡道) 이상 도로에서 300~500m 이상 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도로에서 1천m 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조례도 있다. 이는 독일처럼 신·재생에너지 설치에 관한 별도의 법령 없이 국토부 건축법 시행령에 근거해서 일반 건축물 건축 시행령에 따라 시·군 단위 지방자치단체에서 조례를 제정하여 인·허가를 함으로써 생긴 문제이다. 현 조례대로 할 경우 구미시를 예로들면 태양광을 설치할 수 있는 토지가 0.09%에 불과하다.건축법 시행령에 근거하다 보니, 농지에 건축물을 짓지 못하듯이 태양광 발전소도 농지에 설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광 시설이 환경문제가 제기되는 산이나 저수지로 가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우리나라 농지는 국토 면적의 18% 정도이다. 농지 20~25%에 신·재생에너지 시설을 설치하면 2050년에는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70~75%까지 올라갈 수 있다. 다른 나라사례를 보면, 이웃 일본은 일찍부터 논에 태양광을 설치해서 경작과 함께 하는 ‘영농복합형 태양광’이라는 방안을 찾았다. 경작지에 태양광을 설치하면 땅이 평평하기 때문에 공사하기도 용이하다. 논에는 햇빛도 많이 들기 때문에 광 효율도 높아 유럽과 미국도 경작지에 태양광을 설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농지법에 따라 농지에 건축행위를 하면 10년 만에 철거해야 한다. 수명 25년인 태양광을 10년 만에 철거하면 경제성이 없어 태양광 시설을 논·밭에 설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지는 ‘식량안보’라는 틀에 갇혀서 쉽게 용도변경이 안되며, 용도 변경을 하더라도 추가로 부담금이 많이 든다.경제성을 보면, 농사를 지을 경우 쌀은 200평당 연간 5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것도 경지 정리되고, 기계 영농이 가능한 곳의 이야기다. 일반 논은 200평 농사를 지으면 쌀 2포대(40kg) 정도 임대료로 받는다. 8만~10만 원 정도다. 그러니 버려진 논과 밭이 부지기수이다. 농사를 짓는 논·밭도 ‘직불금’ 때문에 농사짓는 시늉만 하는 곳이 많다. 직불금은 100평당 10만 원 내외 정도 받는다. 대신 논·밭에 태양광을 설치하면 300평에 100kWh 규모의 시설을 할 수 있다. 태양광 시설비를 제외하면 매월 300평당 150만 원 이상의 전기판매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쌀농사보다 매년 20배 이상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 시설비는 5~6년 치 태양광 수익정도로 계산하면 된다. 버려지고 방치된 농지가 신·재생에너지 시설로 바뀌면 산업계는 ‘RE100’도 달성할 수 있어 일거양득의 기회가 된다.우리나라의 엄격한 농지법 근거는 식량안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락논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논·밭은 기계화 영농을 하기에 충분하지도 적당하지도 않다. 산업화되기 전 농사만 지어서 살던 시절,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기에 맞을 정도의 토지 면적밖에 되지 않는다.한국은 국토의 67% 정도가 산지이고 18%가 농지다. 자동화 시설을 도입해 규모의 농사를 짓더라도 충분한 식량 자급을 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시작한 산업화를 통해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독일, 일본 등과 함께 선진 제조업 강국이 됐다.우리나라는 현재 1인당 전기 사용량이 세계 7위다. 10위권 경제대국에 걸맞게 에너지 사용량도 세계 8위다. 나라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제조업을 지탱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전에 제정한 농지법의 각종 제한으로 인해 농지는 버려지고 산업현장에서는 재생에너지 빈국으로 헤매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각 시·군의 공업단지 주변 농지에 태양광 설비를 해서 공단입주 기업이 RE100을 달성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천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기업도 살고 산업 생태계도 새롭게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우리나라는 쌀이 자급되는 것 외에는 모든 작물이 95% 이상 수입되고 있다. 따라서 기계화 영농이 가능한 일부 논은 영농복합형 태양광을 설치하고, 이를 포함해서 농지 20~25% 정도에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생산시설을 설치한다면 쌀 자급도 훼손하지 않고 에너지 안보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에너지 가격이 급상승해 현재 우리나라는 초유의 무역적자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국토의 3.5~4%, 농지의 20~25%만 잘 활용하면 에너지 수입국에서 에너지 자립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그리고 기업들도 RE100을 달성해 최적의 산업생태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2022-12-11

미사일 발사장, 김정은 딸 김주애의 깜짝 등장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북한 언론에서 김정은 가족의 노출은 전통적으로 금기시 되었다. 최고 지도자의 신비성과 정통성을 보존키 위함이다.김정은은 2018년 미 국무장관 폼페이오에게 “내 자녀들이 평생 핵무기를 이고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비핵화의 의지를 보인바 있다.그러나 지난달 김정은은 화성 17호 대륙 간 장거리 미사일(ICBM) 발사장에 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의 딸 김주애(2013년 생 추정)의 발사 현장 동행은 북한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다.김정은은 왜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하는 미사일 발사 현장에 그의 딸을 동행했을까. 김정은이 딸을 동행한 이유는 여러 가지 해석이 따를 수 있다. 그가 어린 딸을 현장에 대동한 이유는 그의 인민 친화적 이미지 정치에 상당한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먼저 김정은의 딸의 현장 동행은 미사일 발사의 안전성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하고 과시하기 위함이다. 북한 노동신문은 ‘우리 어린 딸이 전쟁을 모르고 푸른 하늘을 보면서 후대들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으며 우리는 전쟁 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후대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선전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북한당국은 그들의 핵실험에 대한 세계적인 비판 여론에 신경을 쓰며 이를 잠재우려고 노력해 왔다.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안전하면서 방어적이고 평화적인 입장임을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북한 당국의 핵과 미사일 시험 발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아 미국과의 핵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견지하기 위함이다.그들은 화성 17호 시험발사를 통해 미사일 성능을 고도화하고, 곧 재개될 7차 핵실험을 통해 다탄두 핵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김정은은 미사일 시험발사의 긴장된 현장에 어린 딸을 대동한 것이다. 그것은 미사일의 안전성과 자신감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음이 분명하다.한편 북한 당국은 김정은의 자애로운 이미지를 부각하여 주민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북한당국은 수령은 인체의 뇌수에 해당되며 전체 인민은 그의 손발과 같은 존재로 보고 ‘사회 정치 생명체론’을 수령론의 기본 골격으로 삼고 있다.이 이론의 연장선에서 그들은 수령승계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딸의 공개석상의 대동을 수령 권력 승계와 연계시킬 필요는 없다. 김정은은 38세이며 10세의 김주애는 아직 어리고 2남 1녀 중 중간일 뿐이다. 딸의 공개노출은 승계문제보다는 그의 인자함을 선전하려는 의도가 더욱 짙게 깔려 있다.북한은 과거에도 수령의 어질고 인자함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왔다. 북한 헌법 서문은 김일성의 ‘인덕(仁德)정치’를 명문화하고 있으며 김정일 시대에는 그의 ‘애민(愛民) 정치’를 칭송했다. 결국 이번 그의 딸의 공개는 경제적 위기 하에서 북한 주민에 대한 대민 설득용이라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즉 내부적으로 인민을 사랑하는 자상한 통치자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함이다.또한 딸의 대동은 백두 혈통의 정당성을 노출하려는 의도도 다소 포함되어 있다. 사실 김정은 주변의 백두 혈통은 아직 여러 명 있지만 공개할 입장은 되지 못한다.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성혜림 소생)은 이미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되었고, 그의 장남 김한솔은 서방으로 탈출 잠적해 있다.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마저 공개 처형되었고 그의 딸마저 파리에서 자살하였으며 고모 김경희는 겨우 연명하고 있다. 김정은의 친형 정철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고 친 동생 김여정만이 김정은을 근접 보필하고 있을 뿐이다.이런 정황에서 어린 딸의 노출은 백두혈통의 안정적인 가족관계를 공개하려는 의도라고도 볼 수도 있다. 김정은의 두 아들은 외국 유학을 염두에 두어 노출을 기피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역시 그의 수령의 카리스마적 이미지를 보강하려는 의도로 보지 않을 수 없다.여하튼 북한 중앙방송 등 언론 매체는 김정은이 어린 딸을 미사일 발사장뿐 아니라 핵과 미사일 개발 공로자를 포상하는 자리에까지 동행했다고 보도하였다. 북한 언론은 그의 딸을 ‘존귀하신 수령님의 자제분’으로 소개하였다. 노령의 북한의 국방 분야 원로 과학기술자들이 그의 어린 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북한은 이제 수령 가족을 베일에 가두고 신비성과 비밀성을 유지하던 시대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김정은은 정권 초기부터 부인 리설주를 대동하여 행사에 참여하고 팝콘을 먹으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그러나 이러한 가족의 공개는 북한 김정은의 리더십의 본질적인 변화로 판단할 수는 없다.김정은의 딸의 공개 행사 동행은 딸을 앞세운 미사일의 안전성과 수령의 애민 정신을 선전하기 위함이다. 결국 김정은의 이러한 처신은 경제 위기와 북핵 위기를 극복하려는 주민 설득 수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2022-12-11

경주 남산 마애불, 꼭 바로 세워야 하나

홍석봉 정치에디터 2007년 경주 남산에서 엎어진 채 발견된 ‘열암곡 마애불’을 세우는 논의가 불 붙었다. 열암곡 마애불입상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마애불(磨崖佛) 가운데 가장 완벽한 얼굴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얼굴은 풍화 흔적 하나 없다. 학계는 마애불이 1430년 발생한 지진 때 쓰러졌다고 분석한다.불상이 암벽에서 떨어졌는데도 부처의 얼굴이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엎어진 불상의 얼굴과 바닥 사이는 5㎝에 불과하다. ‘5㎝의 기적’으로 불린다.무게 80t의 불상을 세우는 작업은 쉽지 않다. 문화재청도 여러 차례 검토했지만 불상 훼손을 우려, 쉽사리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다. 건축계도 난색이다. 마애불이 있는 곳이 급경사로 둘러싸여 중장비 반입이 어렵다. 화강암 재질의 불상은 작은 충격에도 부서질 수 있다.신임 조계종 총무원장이 마애불을 세우겠다고 나섰다. 마애불 세우기가 탄력받았다. 현 상태 유지는 불상의 안전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학계 의견이 힘이 됐다. 찬성 목소리가 커졌다.2017년 발생한 진도 5.8의 경주 지진은 마애불 보존 문제를 소환했다. 기술적인 문제는 헬기를 동원, 중장비를 현장 조립해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조계종은 부처님을 바로 세우는 일을 종교를 떠나 민족 얼을 되살리는 일이라며 국민적 관심과 의미를 부여했다.하지만 엎드려 있는 마애불을 꼭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까. 학자들 중에는 이론을 거꾸로 뒤집어 보는 이들이 있다. 대한민국 지도를 거꾸로 걸어놓고 세계를 향한 꿈을 키운 이들도 있었다.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기 때문이다. 마애불을 현 상태로 그냥 두고 주변 환경을 가꿔 새로운 형태의 불교 성지를 조성해 오히려 가치를 더 높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열암곡 마애불상은 엎드려 있는 자체로도 그 고결함이 빛을 잃지는 않는다. 오히려 희소성 때문에 그 가치를 더 높이 평가받을 수도 있다.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이 세계적인 명물이 된 것도 기울어진 채 그 건축미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두오모 대성당의 부속 종탑이지만 기울어진 모습 때문에 대성당 보다 훨씬 유명하다. 1820년 에게해의 밀로스섬에서 발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밀로의 비너스’는 세기의 보물이다. 양팔이 부서지고 없지만 아프로디테 여신의 우아함을 뽐내며 아름다움의 극치로 평가받는다.우리는 혹여 똑바로 선 것 만이 정상이고 바른 것으로 여기는 경직된 사고로 인해 석불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많은 과학적 성취가 다름과 이유를 찾다가 발견됐다. 그 깨달음이 과학적 성취가 되고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엎어진 채 600년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현 상태가 더 안전할 지도 모른다. 현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 될 수가 있다.엎드려 있는 불상은 그것 대로의 가치가 있다. 바로 세우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진으로 인해 엎드렸으면 이 또한 부처의 가르침이다. 범인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2022-12-08

‘중꺾마’ 열풍

우정구 논설위원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처음 등장한 “대-한-민-국”은 지금도 감동의 메시지로 남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국제 스포츠대회에서 한국을 응원할 때면 으레 “대-한-민-국”이 소환된다.월드컵이란 스포츠를 통해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응집할 수 있다는 것은 스포츠만이 가지는 위대함이요 매력이다. 한국 대표팀의 4강 진출 신화를 남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남긴 최고의 메시지는 “꿈은 이루어진다”였다.기대와 예상을 뛰어넘은 한국팀의 선전은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국민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는 말에 믿음을 갖게 한 위대한 구호였다.2002년 월드컵의 메시지가 “꿈은 이루어진다”였다면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의 메시지는 “중꺾마”다. 중꺾마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줄임말이다. 주로 MZ세대가 많이 사용하는 단어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상황을 응원하는 말이다.카타르 월드컵 때 한국축구 대표팀이 강호 포르투갈을 꺾고 16강 진출을 확정짓는 것을 계기로 이 단어가 급부상했다. 당시 태극전사들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적힌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비록 8강 진출은 실패했으나 우리 선수들이 남긴 중꺾마 정신은 많은 국민에게 또 하나의 감동 깊은 메시지로 남았다. 취업준비생이나 입시생, 다이어트에 열중인 사람까지 중꺾마를 적어놓고 의지를 다지는 열풍이 일고 있다.스포츠를 통해 등장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젊은층에게 희망의 기운을 불어넣었듯이 중꺾마 역시 역경에 처한 우리사회에 안겨준 희망의 효과는 엄청나다./우정구(논설위원)

2022-12-08

억새의 겨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겨울 들녘에는 억새가 주인이다. 생기를 다 소진한 마른 억새들이 겨울 들판을 지킨다. 수시로 바람이 불고, 고니나 청둥오리 같은 철새들이 찾아오고, 눈이 내릴 때도 있지만 이 들녘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붙박이인 억새다. 날마다 들길을 걷는 나도 이 겨울공화국의 일원이고 억새와도 친하다. 억새가 나를 친구로 여기는지는 몰라도, 겨울들판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이웃이고 동무다. 나의 겨울에는 억새가 있다.억새는 참 억센 풀이다. 초본식물 중에 억새보다 억센 풀을 본 적이 없다. 솜털이 붙은 조그만 씨앗이 바람이 날아와 정착을 하면 그 땅은 억새의 영토가 된다. 서슬 퍼런 잎은 맨손으로 잡으면 베이기 일쑤고, 해묵은 뿌리는 삽이나 괭이로도 캐내기가 쉽지 않다. 번식력도 강하고 결속력도 강해서 무리를 지어 산야의 일대를 장악하고 이삭이 피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흔하디흔한 들풀이지만, 그 기백과 결기를 헤아리자면 내가 너무 왜소해진다.“그윽한 향기나 고아한 자태를, 탐스러운 열매를 꿈꾸지 않는다/ 누구의 식욕이나 호사취미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도 않다/ 이 땅 들녘이나 산자락에 뿌리박고 지천으로 자라는 풀이지만/ 누구의 발길에 함부로 밟히거나 어느 손아귀에 쉽사리 뽑히지도 않는다/ 혹한의 계절에도 뿌리째 얼어 죽지는 않아/ 여름 한 철 다시 시퍼런 서슬로 뻗쳐올라/ 탱탱한 욕망의 이삭을 밀어 올린다” -졸시 ‘억새’일부우리는 백의민족이었다. 사대부나 관리들 말고는 모두가 물들이지 않은 흰 옷을 입었다. 조선말에 다녀간 선교사들이 찍은 흑백사진을 보면 실감을 하게 된다. 늦가을에 하얗게 무리지어 핀 억새는 우리민족을 떠올리게 한다. 그 희고 푸근한 빛이 감싸고 있는 억센 기질이 닮았다. 뿌리 뽑히지 않고 이어온 오천년 역사와, 식민지배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서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것이 바로 억새의 기질이었다.늦가을에 하얗게 부푼 억새의 이삭은 꽃이 아니다. 억새꽃은 출수할 때 잠시 피었다가 수정을 하고는 이내 진다. 그 다음부터는 그냥 이삭이다. 다들 꽃이라 해서 꽃으로 굳어가는 분위기지만, 실상을 아는 나로서는 그렇게 묻어가고 싶지가 않다. 뭐라고 부를까, 생각을 해봐도 우리말 중에는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민들레 홀씨’니 ‘억새꽃’이니 하는 말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나만큼 그들을 잘 알고 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적당한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미안함을 이런 시로나 대신한다.“억새에는 새가 있다/ 억새, 하고 부르면/ 바람 찬 들녘에 새들이 모여 섰다/ 바람의 유전자를 가져도/ 날지는 못하는 새// 뿌리가 없어 바람은 억새를 키우고/ 날개가 없어 억새는 바람을 품는다/ 새처럼 깃털이 있다/ 억새의 씨앗에는// 바람이 방목하는 겨울 들녘의 억새들/ 마른기침 서걱대며 모가지 길게 빼고/ 바람이 데려간 자식들 안부를 묻고 있다” -졸시 ‘바람과 억새’이 겨울이 너무 시리고 쓸쓸한 사람은 저 들녘의 억새를 만나러 가자. 다 비우고 삭풍을 맞는 억새의 전언을 듣자.

2022-12-08

대설(大雪)의 계절에

윤영대 수필가 큰 눈이 내린다는 대설(大雪), 이곳 동해안 포항은 아직 눈 소식이 없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 산불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만 들린다.이제 추수한 곡식이 쌓여있는 곳간을 보며 일 년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농한기이다. 김장을 담그고 메주도 쑤고 보리밟기도 하는 계절, 흰 눈이 소복이 내리면 아이들과 눈사람도 만들어 보고 싶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라 하니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들판에 눈이 쌓이면 그 밑에서 푸른 보리는 봄의 꿈을 키우겠지….이 한겨울에 ‘열사의 나라’ 카타르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은 지칠 줄 모르는 투혼과 모두의 마음을 모은 붉은 악마의 응원으로 뜨겁게 하나 되어 월드컵 16강의 기적을 일구어냈으나 태극전사들은 최강팀 브라질을 맞아 초반의 긴장감을 가진 탓인지 아쉽게도 8강에 오르지는 못했다. 시원하게 터진 중거리 슛 한 골, 그것만으로도 마음을 달래며 4년 후 승리의 영광을 꿈꾸어 보자.10일은 세계인권 선언일이다,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제3회 유엔총회에서 2차 세계대전 때 인권침해가 극심했던 쓰린 역사를 뒤돌아보며, 인간으로서 자유와 기본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노동자 단결권, 교육의 권리,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 등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를 선언했었다.지금 우리나라는 화물연대 운송자들을 중심으로 최저시급, 안전운임제 등을 내세워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킨다’는 외침으로 집단운송거부를 하며 총파업 보름째를 맞고 있다. 여기에 건설 노조와 서비스 연맹 등은 참가했지만 철강과 시멘트, 레미콘 등의 부족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자 포스코와 현대제철 노조 등이 탈퇴와 불참을 하는 등 불협화를 보이고 있다.대설의 계절에 하얀 눈이 쌓이면 우리 국민의 마음도 맑아지려나. 사회와 경제가 안전한 국가,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 그리고 관용과 신뢰로 이어진 조직을 모두가 바라고 있지만 이루기에는 참으로 먼 세상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마지막, 정부와 노동계가 강력 일변도의 대립 관계를 끌고 가기보다는 서로 배려하는 정책과 행동으로, 먹이를 다투는 호랑이의 포효를 멈추고 사이좋게 떡방아를 찍고 있는 두 마리 토끼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9일부터 사흘간 제20회 경북과학 축전이 포항운동장 만인당에서 ‘경북을 보다 과학을 읽다 미래를 쓰다’라는 주제로 AI, 로봇, 메타버스 등 체험 부스 운영으로 100개가 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고 하니 차가워지는 겨울 속의 축제마당을 찾아 축하공연도 보며 따뜻하게 즐겨보자.올해 ‘호미곶 해맞이 축제’행사는 취소됐다. 3년 만에 열리는가 기대했었는데 아직 꺼지지 않은 코로나 열기와 수많은 방문객의 안전을 위해 취소되어 상생의 손은 손님을 맞지 못하게 됐고,‘토끼의 해’새해 첫날, 붉은 일출 위로 계수나무 밑에서 놀던 토끼가 내려와 춤추는 환상을 그려보려는데 또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겨울 가뭄이 계속되는 12월, 아직 큰 눈 소식은 들려오지 않지만 잘 익은 고구마 구워 먹으며 멋진 설국(雪國)을 기다려 본다.

2022-12-08

병술(丙戌)

육십갑자 중 스물세 번째에 해당하는 병술(丙戌)이다. 천간(天干)은 병화(丙火), 지지(地支)는 술토(戌土)다. 병화와 술토는 모두 양의 기운이다. 병화는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정열적이다. 화생토(火生土)로 흙을 생해준다. 술토는 화기를 내장한 폭발성과 살기 성분을 지니고 있다. 동물로는 개다.병술일주(丙戌日柱)의 물상은 ‘화로(火爐)의 상(象)’ 또는 ‘태양 아래에서 집을 지키는 개의 상’이다. 책임감이 매우 강하며, 온화하고 부지런하며,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성격이다. 집념이 강하고 무슨 일이든 빨리 처리하는 타입이다.활달한 언변을 가지고 있으며, 의협심이 강해서 희생도 불사하는 성질도 있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백호살을 가지고 있어 고집이 남다르다.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단점이 있다. 욱하는 성질과 살기를 가졌기 때문에 화를 잘 내는 습성이 있어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감정 표출이 선명하여 작은 일에도 화를 냈다가 돌아서면 풀어지는 등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로마의 철학자 세네카(BC4년∼AD65년)는 폭군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저서 ‘화에 대하여’는 화를 잘 내는 그의 동생 노바투스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서간집이다. 세네카는 ‘화’를 다른 그 어떤 격정보다 특별히 비천하고 광포한 악덕이자 일시적인 광기라고 정의한다. ‘화’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최대의 악덕이다. 화는 그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다. 바람처럼 공허하다. 화는 너무나 무모하고 성급해서 목표를 향해 돌진하다가 스스로 방해물이 된다. 그 결과 화는 자기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화는 종종 우리를 찾아오지만 사실은 우리가 제 발로 그것을 찾아가는 때가 더 많다. 우리가 스스로 화를 불러들이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에서 화를 없애고 그것을 최대한 제어하고 그 맹습을 늦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에 대한 방법으로 세네카는 화가 났을 때 우리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보는 것만으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화를 폭발시키는 순간 나의 모습을 거울로 본다면 추악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화가 당신을 버리는 것보다 당신이 화를 버려라. 그동안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나 자신도 괴롭히는 고통을 안겨준 화. 우리는 좋지도 않은 그 일에 귀한 인생을 얼마나 낭비하고 있으며 화를 내며 시간을 보내기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짧다.병술일주(丙戌日柱)는 재고귀인(財庫貴人)을 가진 사주다. 지지에 재성(財星)의 창고를 두어 재물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는 길신이다. 돈을 모으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다. 부모 덕이 없고 자수성가해야 하는 기질이 강하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자신의 결점을 고쳐나가면 나이가 들수록 유복해지는 삶을 누릴 수 있다.여성의 경우는 재고귀인으로 돈은 많을 수 있지만, 남편의 덕이 없고 고독하고 속으로 우울한 사람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다. 마치 서산에 해가 기운 형태다. 겉은 화려하고 명랑하지만 속은 외롭고 우울증에 빠질 수 있으니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19세기 프랑스 대혁명 이후 새로운 자본 형성과 더불어 혈통에 따른 기존의 가치는 무너지고 돈과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사회계급이 형성됐다.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1799∼1850)의 작품 ‘외제니 그랑데’는 막대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의 전형인 그랑데 영감과 그의 딸 외제니에 관한 이야기다.그랑데 영감은 자신이 가진 현금과 아내의 지참금을 가지고 루아르 강변 포도주 생산지 중 하나인 소뮈르에 있는 부동산을 매입한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자기의 상속녀가 될 딸 외제니를 이용해 금전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작의 영지를 매입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시대를 잘 알고 투자도 잘하는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외제니는 파리에서 온 사촌오빠 샤를을 보고 첫눈에 마음속으로 영원한 사랑을 바친다. 샤를은 아버지의 파산과 자살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떠난다. 그때 외제니는 아버지가 준 금화를 모두 그에게 줬다. 7년 후 이재에 밝은 냉혈한으로 변모해 백작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외제니에게 이해를 얻으려는 기만적 편지를 보낸다. 왕정복고시대 사회지배층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그 시대 청년의 고백이기도 하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그즈음 그랑데 영감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앞에서 그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금화를 보며 ‘황금은 나를 따뜻하게 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외제니는 자신이 엄청난 재산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렇다면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외제니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그녀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 많은 연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랑데 영감이 살던 방식 그대로 살았다. 그렇지만 외제니는 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사랑하는 사람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면서 살아간다.발자크 소설에서 주된 주제는 돈이다. ‘돈은 사람처럼 살아 움직인다. 그것은 오고 가고 땀 흘리면서 스스로 생산한다’라고 말한다. 그 당시 러시아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발자크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다. 발자크의 인기가 그에게 큰돈을 벌게 해주리라고 기대했지만 수입은 좋지 않았다.도스토예프스키는 23세가 되는 1844년 10월에 군에서 소위로 제대한다. 큰돈을 벌기 위해 전업작가로 나섰다. 다음 해에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자 혜성처럼 문단의 총아가 된다. 그는 “돈은 주조된 자유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진정한 자유는 사랑과 용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2022-12-07

구부러진 길을 보다

양태순 수필가 댓잎이 사그락거린다. 대나무가 여린 바람에 구불구불 몸을 흔들며 고요를 털어낸다. 적막에 들었던 시간을 깨워 일제히 허리를 구부려 나를 끌어당긴다. 발보다 귀가 먼저 닿는다. 대와 대 사이를 지나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서 있으면 맑은 기운이 마음을 차지한 무거운 기운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이 느껴진다. 내쉬는 숨이 텁텁하지 않다.대숲을 뒤로하고 걸음을 뗀다. 사박사박 소리를 달고 흙길을 걸으며 옛 생각에 젖는다. 몇백 년 전 유배지에서 우암과 다산이 걸었을 길, 그 길에서 복잡했을 마음을 짐작해보는 ‘사색의 길’에서 잠시 그들의 생각을 엿보려 한다. 걸음마다 발뒤축에서 분가루 같은 먼지가 날린다. 마치 뿌옇게 산란하는 안개처럼 자신들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을 보는 듯하다. 길을 걸으며 갑갑하고 답답한 날에 한숨을 얹기도 하고 새로 깨달은 학문을 정리하기도 했으리라. 길이란 때로 어디로 향하는 목적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과 자유롭게 드나드는 생각을 펼치고 나름의 이론으로 정립하기 좋은 장소기도 하다.‘사색의 길’을 내려와 다리를 건너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에 들렀다. 먼저 105인 기록 이야기 벽으로 갔다. 다산과 우암이야 워낙 유명인이고 알려진 것들이 많으니 뒤로 미루고 어떤 인물들이 왔는지 기록을 읽어 나갔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사이로 몇몇 아는 이름이 보인다. 박팽년과 관련 인물, 이시애의 난 관련 가족, 남이 역모 사건 관련, 이인좌의 난 관련 인물들이다. 조선시대는 역모가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았음을 다시 확인한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여인들도 왔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연좌제가 있어 부인과 며느리도 당연히 있었을 터인데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방송에서 유배 생활을 보여줄 때 주로 남자만 나왔기 때문이지 싶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인 사고를 확립하는지 경계해야 할 일임을 새긴다.이름 석 자도 없는 그녀들이 눈에 밟혔다. 누구의 처, 누구의 첩, 누구의 며느리로 기록된 그들의 삶이 어땠을지 나는 짐작조차 어렵다. 주로 여자는 관노로 일한다고 들었는데 곱게 자라 양반가에 시집을 가서 궂은일 하지 않고 아랫것들 단속하고 부리는 일에 익숙했던 이들이 어떻게 견뎠을까. 관청의 관리나 포졸들, 마을 양반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희롱하거나 인간의 선을 넘었으면 그들은 자신을 포기했을 것이다. 참담한 심정이 오롯이 전해진다.되돌아보는 지난날은 누구나 아쉬움의 연속이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부질없는 후회와 되새기는 시간은 비애와 고뇌를 번갈아 버무려선 매콤하게 심장을 찔렀다. 다시 되돌린들 상황과 사람과 이념이 서로 아귀를 맞추어 돌아가는데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인생은 직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요 분기점마다 찍힌 점들이 오르락내리락 곡선을 그리다 바닥을 찍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바닥이 있어 배우는 것들이 있다. 진정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고 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삶과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서 딱딱한 잣대가 아니라 알파라는 미지수를 더할 줄 아는 품이 커진다. 걸어오면서 겪은 온갖 감정을 꿰매 우툴두툴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무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가치를 드러내기 마련이다.유배지의 밤은 파랗다. 밤은 사색의 문을 열어두어 사념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가고 달려온다.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듯 작은 꼬투리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입히고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고, 과거의 어느 날을 당겨오고 밀어내느라 생각의 방에는 밤새 불이 켜져 있다. 나무들이 모조리 깨어나 방을 둘러싸고 뭇별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서 각자의 서사는 덧대어졌다. 그들의 삶에서 유배 생활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마냥 억울하고 화나는 시간만은 아니었지 싶다. 조용히 사색하면서 학문을 탐구하고 인간사 근본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을 터다. 이 땅의 선비이자 학자의 신분으로 해야 할 일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햇살이 바다를 건너고 들을 건너와 발밑에 눕는다. 세상이 갖가지 사건들로 떠들썩하더라도 내 중심은 언제나 사람이 먼저이기를. 따스함에 물든다.

2022-12-07

월급 도둑

홍석봉 정치에디터 대구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된 대구시의원의 사퇴를 촉구했다. 옥중에서도 월정수당을 지급받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일을 하지 않으면서 세비만 챙기는 것은 양심불량이라고 비판했다.우리복지시민연합은 최근 성명서를 내고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사실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꼬박꼬박 월정수당을 받는 것은 선출직 지방의원으로서 파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이 시의원은 구속 상태임에도 월정수당으로 339만원 가량을 받고 있다고 했다. 지방의원은 월정수당과 의정활동비를 받는다. 월급 개념의 월정수당은 직무 활동에 대해 지급하는 비용이며, 의정활동비는 의정 자료수집·연구 등 보조활동에 사용되는 비용이다.이 단체는 “선거법 위반으로 출석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금을 꼬박꼬박 수령하는 것은 ‘세금 루팡’이 따로 없다”고 했다.‘월급 루팡’은 회사에서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직원을 일컫는 말이다. 월급 도둑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10여년 전부터 젊은층을 중심으로 유행되기 시작한 용어다. 특히 줄임말인 ‘월루’라는 용어로 직장인들 사이에서 자주 쓰였다. 한 조사에서 직장인의 80%는 회사에 일한 것보다 월급을 더 받는 월급 도둑, 즉 월급 루팡인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월급 루팡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바쁜 척 하거나 업무 중에 딴 짓 하기, 자신의 업무를 동료나 부하 직원에게 미루기 등의 사례가 거론된다.옥중 시의원을 월급 도둑이라고 했지만 기초 및 광역의원 중에도 1년 내 집행부를 상대로 질의조차 않거나 조례 한 건 발의하지 않은 의원들이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 이들도 밥값을 못하는 ‘월루’와 다름없다. /홍석봉(정치에디터)

2022-12-07

월드컵 한 수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월드컵이 뜨겁다. 대한민국 축구가 16강에 올랐던 감격이 참으로 고맙다.월드컵 전장의 대세인 유럽과 남미가 끝내 8강을 장악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와 북미도 열심히 겨루었다. 모로코가 마지막 기대를 불태우면서 월드컵은 막바지 결전으로 치닫는다. 둥근 축구공이 세계인의 모든 시선을 강탈하면서 온 세상을 하나로 묶는다. 월드컵 덕분에 몰랐던 세상을 배운다. 이란이 무엇으로 몸살을 앓는지 알게 되었고 웨일즈와 영국 이야기도 배우게 되었다. 튀니지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카메룬…. 생소했던 나라들을 찾아보면서 너른 글로벌 지평을 새롭게 깨우치기도 하였다. 나라 안 궂은 소식에 애만 태웠던 좁다락한 시선이 한층 확장된 느낌이 신선하였다. 아직도 진행 중인 월드컵이 세계를 향한 관심과 기대를 높이고 있다.평소엔 어떤가. 정치권의 이념대립과 언론의 편향보도는 국민의 관심을 국내뉴스로만 몰아가지 않는가. 사회적인 이슈와 문화적인 지평이 나라 안에만 묶여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데, 우리는 이러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월드컵이 열어준 세상의 모습은 4년 전과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는 지나간 역사에 안주하고 있지나 않은지. 디지털과 온라인이 열어준 초연결사회와 우리는 어느 만큼 교감하고 있는지. 영화와 음악이 그나마 체면을 세우고 있는 사이에 정치와 사회의 시선은 글로벌을 대상으로 얼마나 열려있을까. 이제라도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글로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본격적으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좁은 국토에 시선을 묶기에는 세계가 너무나 크다.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도 글로벌 안목을 키워야 한다. 교차문화적 감수성을 길러야 하고 다원사회적 이해도를 늘려야 한다. 나만 옳다는 생각을 이겨내야 하고 남을 존중하는 마음을 깨우쳐야 한다. 미묘하게 남을 비하하는 버릇을 극복해야 하고 누구와도 어렵지 않게 어울리는 습관을 배워야 한다. 소통과 교류에 보다 적극적이어야 하고 차단과 배제의 구습은 버려야 한다. 글로벌은 자신감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우뚝 성장하였다. 국민이 상대적으로 덜 자란 느낌이다. 세상이 기대하는 만큼 우리가 반응해야 한다. 영어가 불편했던 소극성을 극복해야 하며, 우리 문화의 빼어난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나라 밖 소식에 마음의 문을 열어두어야 하며, 우리 소식을 밖으로 전하는 데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습관에 익숙해야 하고 다른 문화와 교감을 넓혀야 한다.월드컵에는 32개국이 출전했지만, 세상에는 훨씬 많은 나라들이 있다. 풍성한 문화적 배경과 사회적 환경을 가지고 색다른 기회와 도전의 가닥을 품고 있을 터이다. 나라 안에 묶였을 흥미와 관심의 테두리를 확장해야 한다. 경쟁과 다툼의 연속에서 찌들었을 자신감과 상상력의 가능성을 키워야 한다. 세상은 저렇게 기다리는데 우리가 쪼그라들 까닭이 없다. 넓은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2022-12-07

사교육과 학벌사회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빠르고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 세계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비록 IMF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이후 대한민국은 위기를 넘어서고 첨단기술을 소유한 강국으로 탈바꿈했다. 삶의 질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모든 것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것도 존재한다. 바로 사교육이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1970년대부터 고교평준화정책, 과외 금지정책, 교육방송 강화, 선행학습 금지 등 다양한 정책과 규제로 사교육 시장의 팽창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학벌주의’로 요약되는 지배 이념을 조금도 개선하지 못한 까닭이다.첫째 아이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아내와 돌봄 공백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유치원은 오후 6시까지 아이 돌봄을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은 오후 1시에 아이들을 귀가시킨다. 방과 후 학습이 있다지만 맞벌이에 아이가 2명이 있어야 간신히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우리 집 같은 외벌이 가정은 조금 나은 형편이지만, 누구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맞벌이 부부는 아이가 하교하는 1시부터 6시까지, 학원 시간을 빈틈없이 맞추어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여성의 경력단절이 일어나는 이유다.돌봄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사교육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일단은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좀 복잡하다. 돌봄 공백을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라지만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서 좀 더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부모의 욕망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아이를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나쁘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경쟁력의 실체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한 달에 100만원에 육박하는 사교육비를 통해 얻게 되는 경쟁력이란 무엇일까?2020년 기준 중소기업 월평균소득이 259만원이다. 지역대학 취업자의 대다수가 중소기업인 점을 감안하면 지역대학 출신에게 경쟁력 있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맞벌이가 필수인 시대가 된 이유이다. 새삼스러울 것 없다고? 대한민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벌사회가 새롭지는 않지만, 우리는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부의 양극화가 심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는 곧 아이의 운명이 태어나면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016년 학벌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해 온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는 자진해산하며, 학벌은 여전히 교육 문제의 핵심이지만, 학벌이 곧 권력을 보장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사교육 시장은 뜨겁고 학벌주의는 공고하다. 사교육에 대한 거부감으로 아이를 대안학교 보냈다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인문계로 전학시킨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교육 시장의 바깥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학벌 중심=서울 중심의 카르텔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2022-12-07

이맘때의 추억 한 꼭지

오낙률 시인·국악인 과일은 다 익은 후에 오히려 그 모습이 변형되지 않고 오래도록 유지 보관된다. 사람 또한 그러한 것 같다. 우리 동네 경로당을 오고 가시는 필자의 유년 시절 이웃집 아주머니 모습에서나, 동네 친구 어머니의 얼굴에서나,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을 느낄 수 있으니 사람 또한 과일처럼 나이가 들어서야 오래도록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생각해보면 필자의 유년 시절 풍경은 오십여 년이 지난 기억 속에서도 꽤 또렷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가끔 동네에서 구십 줄에 든 이웃집 할머니들의 모습을 뵐 때면 유년 시절에 뵙던 동네 남자 어르신의 생전의 모습 하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동네 골목, 그리고 크고 작은 동네일을 앞장서서 하시던 동네 어른들의 생전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나 흑백 영화처럼 필자의 뇌리에 영상이 되어 떠오른다. 아마도 그것은, 어머니께서 나의 탯줄을 묻어주신 곳이자 내 유년의 추억이 석류알처럼 촘촘히 뇌리에 박혀있는, 이곳 출생지에서 사는 행복이 아닌가도 싶다.내 유년 기억의 시작은 초등학교 다닐 무렵인 60년대 중·후반쯤부터이다. 계절적으로 이맘때의 그 시절은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고 초가집 마당마다 여름내 보이지 않던 ‘볏짚 가리’하며 ‘뒤주’가 마치 새로운 건축물처럼 생겨나던 시기이다. 그리고 동네 아저씨들이 대여섯 명씩 모여서 이 집 저 집 다니며 이엉을 엮어주던 시기이다. 이엉이란, 일년내내 비와 햇볕에 의해 썩어 가는 묵은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새 지붕으로 단장하기 위해 새 볏짚을 촘촘히 엮어서 만든 일종의 볏짚 거적 같은 것인데, 둘둘 말아서 마당 한쪽에 수십 개씩 쌓아두었던 이엉 하나의 길이는 짐작으로 삼십 미터는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일꾼 중에서 가장 솜씨가 좋은 아저씨 한 분쯤은 이엉과는 확연하게 모양이 다른 용마름을 도맡아 엮으셨다. 용마름이란 밑에서부터 이엉으로 지붕을 이어 올라갈 때 맨 마지막 지붕 꼭대기에 올리는 일종의 마감재라 할 수 있는데, 요즘의 기와지붕 꼭대기에서나 볼 수 있는 용마루에 해당한다. 그렇게 이엉 엮기가 끝나면 묶은 초가지붕을 털어내고 새 이엉으로 갈아주는 작업을 차례로 하였는데, 동네가 온통 노랗게 새 초가지붕으로 단장된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마치 동화에서나 봄 직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저고리 소매에 코가 묻어 번질번질 한 옷을 입고도 마냥 즐겁던, 동네 아이들이 설빔을 갈아입고 세배를 드리려 늘어선 모습 같았다.생각해보면 차라리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풍요를 누리던 시기는 아니었을까. 툭하면 광장에 모여드는 작금의 사람들처럼 여럿이 모여서 시위와 파업을 하는 게 아니라 여럿이 모여서 행복을 도모하던 시절, 여럿이 모여 한 사람을 쓰러뜨리려 않고 여럿이 힘을 합쳐 한 사람을 돕던 시절, 여럿이 모여 하나를 나무라지 않고 여럿이 모여 한 사람을 사랑하던 시절,어쩌면 그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의 지수가 높고 정서적 풍요를 누리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2022-12-07

즐거웠으면 좋겠어

누구든 그렇다. 즐겁던 일들이 하나도 즐겁지 않은 일이 되고, 너무나 기다려온 순간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즐기듯 하면 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부담감에 치를 떨게 된다.일을 처음 시작하게 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어떻게든 취직을 하려고 했던 순간이 무색하게도, 실수에 대한 부담이 스스로를 짓누른다.등단을 준비하던 20대 때에는 등단만 하게 된다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며 작가라는 직업을 즐기며 살 줄 알았다.하지만 정작 등단을 하고 나서 느낀 가장 큰 감정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과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긴장감이 매순간 나를 압박했다.글의 내용이 구설수에 휘말릴까봐 두려웠고, 이번 청탁을 끝으로 더 이상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고민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쓰고 싶은 글보다 남들이 좋아할 글이 뭘까에 대한 고민을 훨씬 많이 했던 것 같다.타인이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 그게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에 빠져있다 보면 나 자신이 사라져버린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매순간 보이지 않는 타인에게 자신을 평가받는 기분.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그 평가에 자신을 점점 더 규격화해나가는 것 같은 기분. 그땐 이 기분이 작가의 중압감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대중에게 글을 보여주고 평가 받는 직업이 가진 고충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반 정도만 맞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사실 우리가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라는 건, 혹은 일을 처음 시작하면서 저지르는 실수라는 건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리 큰일들이 아니다. 단지 일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가 자신의 일생을 좌지우지할 것만 같은 중압감에 그 크기를 더욱 크게 느끼는 것뿐이다.물론 가끔은 그런 거대한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일이든 신입에게는 그렇게 크고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는다. 실수를 마음껏 저지르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벌벌 떨 필요까지는 없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우리는 일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늘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사소한 실수가 나에 대한 누군가의 평가로 이어질 것만 같고, 그 실수가 나를 평생 따라다니며 짓누를 것만 같다고 느낀다. 순간의 판단과 사소한 말실수가 나의 평생을 망가뜨릴 것만 같은 기분. 늘 긴장하게 되고, 그래서 더 위축되고, 그 탓에 다시금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를 들키지 않으려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이 일에 적성이 맞지 않는 걸까 고민하게 된다.생각해보면 허송세월 같은 건 없다. 조금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일이 조금만 손에 익고 나면,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던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차오른다. 그 즈음에 다시금 옛 일들을 떠올리자면 괜한 불안과 걱정을 한껏 부풀려 상상하며 살아온 것만 같아 실소가 나오곤 한다. 어쩌면 내가 사회 초년생으로써 느낀 불안과 걱정이라는 건 단지 내가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얼마 전 ‘베개’라는 독립문예지의 낭송회에 다녀왔다. 그날도 원고 작업에 한껏 지쳐있었다. 그날 내가 쓴 글이 자기 복제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그러던 찰나에 내가 본 낭송회의 풍경이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런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 시를 쓰고, 그걸 최선을 다해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하는 장면은 분명 감동적인 것이었다. 타인을 위해 쓴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을 읽는 것. 어쩌면 그게 문학이라는 문화의 본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탁과 원고료에 목을 매는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던 하루였다.사실 생각해보면 작가라는 건 꽤 즐겁고 재밌는 직업인데.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고 사색하고 무언가를 목격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건 생각보다 낭만적인 직업인데, 나는 이 직업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즐거워지고 싶다. 즐거워지기 위해 다른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하면서 즐거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22-12-06

건조함을 경계하기

날이 부쩍 차가워졌다. 집 밖의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뻗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두껍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겨울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서늘한 공기에 입술도 손끝도 바싹바싹 마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맘때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건조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감정의 폭이 유난히 큰 사람이 있다. 사소한 일에 크게 웃고 우는 이들과는 반대로 냉철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흔히 감정적, 이성적으로 나누는 이러한 특질은 사람의 본질을 결정짓는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다를 것이며 옳고 그름을 떠나 삶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상반된 관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나는 스스로가 굉장히 감정적인 편이라 생각했지만 최근엔 어떤 부분이 완전히 메말라버렸다고 느낀다. 그건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특이성과는 또 다른 것이다. 출퇴근하고 여러 사람과 부대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자꾸만 생겨난다. 단조롭고 고요한 시간을 살았을 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인물과 사건이 현실을 사는 내 앞에 나타난 순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고민으로 나타난다.그러니 자유와 사랑, 낭만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날이 점점 줄어든다. 이상을 꿈꾸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믿는 일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좋게 보자면 현실적으로 되었다고 할까? 낙관적인 내일을 상상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늦지 않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처리해야 하는 업무의 양. 문득 눈이 떠진 이른 새벽 소복이 쌓인 첫눈을 마주하고서는 탄성보다 탄식을 뱉어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언제나 퐁퐁 솟아오르던 감정이 말라서 어떤 면에서는 마음이 완전히 늙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감수성이야말로 우리가 획득해야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감수성이 높다는 것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노력으로도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동시에 경계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금방 휘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면면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에게도 여러 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같지 않음을 인정하고 모든 일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고 여기는 순간부터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감수성은 시작된다. 삶은 수학 공식처럼 정확한 숫자를 대입하면 맞아떨어지는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투명한 답을 획득하기 위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여전히 나는 누군가의 문장을 읽고 눈물을 흘린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찬찬히 헤아리면 어김없이 슬퍼지고 만다. 그것은 내 안에 아직 살아있는 감정의 불씨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증거다. 현실을 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건조함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감정 또한 세계를 돌파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월드컵으로 모두의 마음이 들썩일 때 한 연예인이 대한민국의 16강 진출과 관련하여 ‘어차피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왜 희망을 품느냐’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어 빈축을 샀다. 누군가는 그것을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리와 패배를 계산하며 가능성이 적은 쪽을 믿는 이들을 조롱하는 것은 패배주의에 빠지기 쉬운 일이다. 그럴 때 우리는 허무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전락한다. 감정을 누르고 오직 머리로만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모든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희망을 믿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아니다. 낙관적인 가능성만을 열어놓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영역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알다시피 그가 불신했던 미래는 현실이 됐다. 포르투갈과의 경기 끝에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됐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손에 땀을 쥐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른다. 꺾이지 않는 마음. 분투의 마음. 다음을 꿈꾸고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일. 행여 그 믿음이 실패로 돌아올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무조건적인 승리를 바라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뭔가를 함께 바라고 간절히 호흡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손을 잡을 수 있는 곁의 누군가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 건조하게 느껴졌던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온다. 어떤 일이 찾아와도 절대 메마른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 겨울을 시작한다.

2022-12-06

여당에서 ‘제2의 이준석 대표’ 나올까

심충택 논설위원 오늘(7일) 친윤(윤석열)계가 주축인 ‘국민공감’이 출범하면서 국민의힘 당권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국민공감은 원래 친윤계의 핵심인 장제원 의원이 만든 ‘이너서클’ 성격을 가지고 있다.전당대회를 석 달여 남긴 시점에 장 의원이 당내 최대 모임의 구심점으로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다. 국민공감에는 국민의힘 의원 115명 가운데 70여명이 참여하기 때문에, 리더인 장 의원이 직접 차기 당 대표에 욕심을 낸다면 당선될 확률이 높다.만약 장 의원이 당권을 잡는다면 국민의힘은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특정인 지지층에만 의존하는 폐쇄적인 정당이 될 수밖에 없다. 여야 진영간의 강대강 대치는 결국 지지층 결집을 더욱 공고히 하고, 2024년 총선판세를 일찌감치 굳힐 가능성이 있다.주호영 원내대표가 지난 3일 대구에서 열린 ‘아시아포럼21 토론회’에서 차기 전당대회 당 대표 출마 후보군을 일일이 언급하며 “다들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정치흐름을 우려한 것으로 읽혀진다.주 대표가 이날 토론회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당 대표 조건론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제시한 3가지 조건은 “국회 지역구 의석의 절반이 수도권인 만큼 수도권에서 대처가 되는 대표가 나와야 한다. 특히 청년층인 MZ세대에도 인기 있는 대표여야 하고 오는 총선 공천에서 휘둘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주 대표가 토론회에 참석하기 직전 윤석열 대통령과 독대한 점을 들며, 이 기준이 대통령의 의중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지만, 아마 국민의힘 지지자들이면 누구든 수긍을 할 것이다.국민의힘 스케줄대로 내년 3월중 전당대회가 치러진다면 지금으로선 갑자기 혜성처럼 의외의 인물이 당권주자로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주 대표의 말대로 현재 거론되고 있는 인물 중에서 당 대표가 나온다면 국민의힘은 윤핵관이 주도하는 모양새로 차기 총선을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국민의힘이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이길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이준석 전 당대표였다. 이 전 대표는 지난해 6·11 전당대회에서 젊은 당원들과 2030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로 36세에 제1야당 당수로 선출됐다. 당시 국민이 이준석을 국민의힘 사령탑으로 선택한 본질은 권위주의와 부패에 찌든 낡은 정치를 바꾸라는 것이다. 이 대표는 취임 후 국민의힘을 디지털정당으로 변신시켜 기업처럼 효율성과 효과성을 추구했다. 각 시·도당에서는 온라인 입당신청자가 쇄도했고, 호남지역에서도 신규당권이 급증했다. 국민의힘 전성기는 그때였다.민주당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6·11전당대회 당시와 같은 국민의힘의 역동적인 변화일 것이다. 김어준, 더탐사 같은 장외정치세력에 끌려다니는 민주당이 차기 총선에서도 과반이상 의석을 차지하면 한국에서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다. 지금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민주당에 항상 뒤지고 있다. 집권여당이 차기총선에서 민주당에 이기려면 ‘제2의 이준석’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2022-12-06

퍼머크라이시스

우정구 논설위원 영국의 영어사전 출판사인 콜린스는 올해의 단어로 ‘퍼머크라이시스’를 선정했다. 영구를 뜻하는 Permanent와 위기의 Crisis가 합쳐진 말이다. 콜린스 측은 “장기간에 걸친 불안정과 불안”을 이 단어의 정의로 규정하고 “2022년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끔찍했는지를 요약하는 단어”라고 설명했다.이 단어는 1970년대 학문적 용어로 처음 사용됐으나 최근 몇 달 동안 사용이 급증하면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는 배경이 됐다. 계속된 코로나 팬데믹 상황과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인플레이션, 경기침체, 고물가, 미. 중 패권 경쟁 등 하루도 쉴 새 없이 이어져 온 지구촌의 위기 상황이 퍼머크라이시스 시대를 열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올해 우리나라 사정도 퍼머크라이시스로 요약되는 세계적 흐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위기의 연속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상황이 이어진 가운데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경제는 최악이다. 생산, 소비, 투자가 모두 감소하고 각 연구기관은 내년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1%대로 전망했다. 정치는 위기상황을 외면하고 있다.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내년도 세계 경제를 아우르는 키워드로 퍼머크라이시스를 제시한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내년도 예측 불가능한 위기상황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 때문이다.해마다 한해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이면 각기관들이 내놓는 세평이 있다. 교수신문은 지난해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묘서동처(苗鼠同處)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았다. “도둑 잡을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됐다”는 뜻이다.콜린스는 ‘퍼머크라이시스’로 올 한해를 세평했다. 우리나라 각 기관들은 올 한해를 어떤 내용으로 요약해 세평할 지 자못 궁금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2-12-06

‘영유’ 뜻을 몰랐었다

이명균 창원대 명예교수 ‘영유’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나중에야 ‘영어유치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요즘 자녀교육에 열성적인 가정에서는 아이를 유치원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보낸다하며 어떤 영어유치원은 입학 때부터 영재테스트를 거쳐 영어수준테스트도 한단다. 영어뿐 아니라 어떤 학습내용이든 유치원 때부터 아이를 시험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필자 생각으론, 정교한 기계에 모래를 뿌리는 것과 같으며 자유롭고 다양한 사고력 형성을 크게 저해하게 된다.언어의 주된 기능이 의사교환 수단의 역할이지만 인간은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사물이나 현상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추상적이며 개념화된 사고를 시작한다. 언어를 정확하고 아름답게 구사할 줄 알아야 논리적 사고력과 풍부한 창의력을 발달시킬 수 있다. 언어를 잘 구사한다는 것은 말과 글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좋은 내용의 자기 생각을 영어로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뜻이지 그저 발음 좋고 일상생활대화를 매끄럽게 하는 것으로 여겨선 안 된다.영어조기교육에 열성적인 엄마들은 미국의 대표적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촘스키 주장은 13세 이전엔 문법을 별도로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할 수 있지만, 이후로는 문법규칙을 인위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2018년에 발표된 MIT 인지과학 연구원의 조슈아 하트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외국어 문법실력이 원어민 수준이 되려면 10세 이전에 학습을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18세까지는 언어문법 습득능력이 크게 쇠퇴하지는 않는다고 한다.어느 쪽 주장을 따르든 원어민 수준의 문법습득은 영어권 사회에서 생활하려는 아이들이나 나중에 우리 풍습이나 정서를 담은 문학예술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직업을 가지려는 아이들에게는 필요할 것이나 영어를 외국어로 삼으며 생활할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필요한 학습이 아니다. 외국어로서의 영어는 고등학교나 대학 때 공부하더라도 필요한 영어능력은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다. 어릴 때 영어 학습에 쏟을 에너지를, 악기나 운동 등 다른 재능이나 기능들의 개발·연마에 쓰는 것이 아이의 미래행복을 위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말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잘할 수 있어야 사고도 정확하고 고상하게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외국어도 수준 높게 잘 구사할 수 있다. 영미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교수라는 사람이 우리말 설명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대개 영어실력도 별로였다.집에선 우리말을 하는데 유치원·학원에선 영어를 써야한다면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뿐 아니라 인성교육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5∼7세 사이에 모국어 습득이 체계화되면서 아이들의 사고력이 형성되는데, 외국어 학습을 인지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진 후에 수행하면 더 효과적이란 연구결과도 있다. 영어 장사하는 사람들의 광고와 마케팅에 좌우되지 않은 채 중심을 잡고 아이를 키우겠다는 엄마들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22-12-06

너도 콩이다

조현태수필가 필자에게는 유휴지를 이용한 칠십 평가량의 밭이 있다. 옛날에는 논이었다는데 경작하지 않고 너무 오래 방치해 둔 땅이라 잡목과 풀만 가득했다. 어느 날 트랙터를 빌려서 나무는 뽑아내고 밭으로 일구었다. 비록 내 소유의 땅은 아니지만 누군지도 모를 주인이 나타나면 그냥 돌려주면 될 일이었다. 하여, 유실수나 약초처럼 재배기간이 긴 작물은 심지 않고 당년에 수확하는 콩이나 들깨, 고추 정도만 재배했다. 그 땅을 경작한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올해는 검정콩(서리태)을 심었다. 11월 중순에야 콩대를 잘라놨다가 그저께 마당으로 옮겨 털었다. 전문 농사꾼이 아닌지라 땅 면적 대비 수확량은 많이 떨어지지만 몇몇 지인들과 나눠먹는 결실은 충분히 된다. 흐뭇한 기분으로 항아리에 쏟아 부으면서 잠시 생각이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마른콩대를 차에 싣고 나니 땅에 떨어진 콩이 눈에 들어온다. 검정색이라 유난히 눈에 띄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꼬투리에서 터져 나온 콩알이라 더욱 굵게 보인다. 그거 다 주워 모아도 일 리터가 될까 말까하지만 그냥 돌아설 수가 없다. 거의 한 시간을 소비하고 ‘끙’하며 일어서야 할 판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마당에서 막대기로 두드려 털고 바람에 날려서 알곡을 가릴 때였다. 빈껍데기야 당연히 선풍기 바람에 날려 나가지만 아직 덜 영근 콩알이나 그것이 들어있는 꼬투리는 반쯤 날아가다 어정쩡하게 떨어진다. 그러니 곡식도 아니요 죽정이도 아니다. 버리기는 미안하고 거두기는 찜찜하다. 그러다 결국은 어중간한 놈들을 따로 쓸어 담는다. 저녁에 심심풀이로 손질해 볼 요량으로.이틀 저녁 동안 그 콩을 마무리하고 보니 제법 한 되는 되어 보인다. 품질이 떨어지는 곡식이라 남에게 주지는 못해도 내가 먹을 수는 있다. 밥 지을 때 섞어보니 그다지 나쁜 콩이라 여겨지지도 않는다. 평소에도 땅콩이랑 밤이랑 은행 따위를 섞어 밥을 짓는데 검정콩이 보태지니 훨씬 더 잡곡밥으로 보인다. 그래서 했던 말이 ‘그래 너도 콩이다’했다. 충실하게 영글어 저절로 터지는 콩만 콩인가 생각하니 관자놀이가 뜨듯해진다. 사람으로 치면 꼴찌도 사람이니까 말이다.재건중학교와 고등기술학교는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으니 초등학교졸업 학력으로 사회생활을 했던 청년 시절. ○○대학교 정문 앞에서 장사하며 대학생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대학생들이 가게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종일 바둑 두며 떠들어대도 좋게만 보였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대학생이 될 수 없다고 여겼으니까. 육순을 훌쩍 넘은 나이에 방송통신대학이라도 공부하려고 등록했다가 한 달 만에 등록취소 당했다. 그때야 검정고시에 도전했고 만 사 년 만에 나도 대학교 졸업생이 될 수 있었다.반세기 동안 묵었던 땅도 갈아엎으면 밭이 될 수 있었다. 그냥 두었다면 묵지일 뿐이요 거들떠보지도 않는 땅인데 일구어 밭을 만들면 농지다. 깨를 심으면 깨밭이요 콩을 심으면 콩밭으로 일컬어진다. 비록 잡초에 부대껴 자라면서 반쯤 영글다가 뽑히고 마는 어설픈 콩이더라도 콩은 콩이 아니던가.

2022-12-06

사람경영과 기업문화

정상철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세계 일류기업은 독특한 기업문화가 있다. 기업문화는 창업주의 철학과 사상에서 시작되거나 업의 특성과 창업시기의 사회적 여건에 따라 형성되기도 한다. 기업을 움직이는 힘이 문화에 달렸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조직에 인사문화실을 두어 움직이는 기업들이 많지만 기업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부족으로 문화를 거꾸로 가는 기업도 있고 이것은 쇠퇴하는 기업의 지름길이다.삼성의 창업주는 후계자가 부회장으로 승진했을 때 목계(木鷄)를 선물하고 ‘목계지덕(木鷄之德·최고의 싸움닭은 자랑하지 않는다)’과 ‘경청(敬聽)’의 휘호를 써서 선물한다. 목계(木鷄) 사상은 기원전 8세기 무렵의 일인 장자 외편 달생에 나오는 싸움 닭 투계의 자세와 태도에 관한 일화다.‘목계’란 나무로 만든 닭이란 뜻이다. 마치 나무로 깎아놓은 닭(木鷄)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상대에게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잃지않은 경영자로서의 덕목을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덕의 완전성과 경청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고,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경영의 시작이며, 경청은 사람을 이해하는 비기(秘技)인 것이다.삼성의 기업경영 비밀은 인재중심의 창조경영에 있다. 사업 특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냉장고, 세탁기 등 끊임없이 신상품을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전자산업은 소비자가 원하는 디자인과 기능을 갖춘 제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시장에 출시하고 선점을 놓치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다. 또한, 미래의 산업으로 반도체를 선택했을 때 직접 실리콘밸리를 찾아가 적합한 인재를 발굴하는 선택과 집중전략을 통해 성공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답인 것이다.좋은 인재들이 선택하는 직장의 조건은 연봉과 기업복지, 성장 비전이라고 한다. 젊은이의 선택에서 멀어지는 기업이 일류기업으로 성장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 글로벌 선진기업은 ‘Working Life Challenge Vision’으로 인사문화를 형성하고 좋은 기업문화에 역량있는 인재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입사를 하면 개인별 퇴직할 때까지 성장비전이 설정되고 도전하는 기업문화가 형성되어 있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명문가 선진기업이 되는 것이다.사람경영에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능력을 갖춘 인재 등용이다. 결국 사람이 답인데 좋은 인재가 시장 경쟁력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둘째, 덕을 갖춘 사람이다. 능력이 있어도 덕이 없으면 긍정적인 조직문화 형성이 어렵고 조직의 융화와 힘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셋째, 개인의 성장 비전을 제시하는 운영제도이다. 성장 비전이 제시되는 기업문화의 틀 속에 개인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성장경로를 선택하고 도전하면 회사의 발전과 개인의 성장이 함께 가는 기업문화인 것이다. 기업문화는 기업의 특성을 바탕으로 창업주의 철학과 사상, 후대의 경영전략에 따라 시간의 흐름 속에 형성되며, 가장 큰 요소는 결국 사람경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기업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경영과 기업문화는 선진기업의 성장과 발전의 핵심요소이다.

2022-12-05

감나무와 까치밥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어느새 12월, 매듭달이다. 무던히 앞만 보고 달려온 듯한 올해도 이제 달력 한 장만 달랑 남겨두고 세모(歲暮)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저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이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뤘고, 이루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성취를 누린 안도감이나 미진함에서 오는 아쉬움 등으로 이래저래 희비가 교차하고 뒤숭숭하지만, 어쨌든 한 해를 매듭지어야 하기에 연말은 늘 착잡해지는지도 모른다. 이런 때일수록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과 주변을 성찰하며, 막연한 회한에 빠져들기 보다는 아직 남은 날들에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듯싶다.우거의 뒤뜰 감나무에도 까치밥으로 남겼었던 십여 개의 감 중 마지막 한 개가 ‘마지막 잎새’ 마냥 가지 끝에서 대롱거리고 있다. 감꽃 피는 5월을 지나 무성한 잎새의 여름날 속에서 파릇한 감들을 숨기듯 꿰어 차다가, 가을 초입에 들이닥친 태풍의 생채기로 절반가량을 떨궈내고, 정갈한 햇살 받아 용케도 정(情)처럼 익어 얽힌 주홍빛 감들이 스무 여개. 태풍과 천둥을 견디면서 떫고 힘겨운 시절을 이겨내듯 가을날의 환하고 반가운 결실로 보답하는 감나무의 수고(?)이다. 해마다 늘 그 자리에서 한결 같은 모습으로 몇 개의 감을 선사하기에 고맙고 넉넉하기만 하다.감꽃과 홍시를 간식처럼 먹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필자의 고향집에서 50여미터 위쪽 언덕에 사셨던 조부모님 집 뒤로는 제법 큰 감나무가 10여 그루 있었는데, 봄이나 가을날이면 뒤란에 떨어진 감꽃과 홍시를 주워 먹으며 허기를 달래곤 했었다. 감꽃이 많이 떨어지면 빗자루로 일일이 쓸기까지 하면서, 할머니께선 밤새 소변을 받아낸 요강을 감나무 근처에 쏟으시며 나무뿌리를 튼튼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서리가 내리면서 감들이 익어갈 즈음이면 감 따기는 으레 내 몫이었다. 긴 대나무 끝에 V자 홈을 파고 잠자리채 같은 망(網)을 매단 ‘감조리개’로 땅에서 따거나 다람쥐처럼 감나무에 올라가 가지 사이사이를 날렵하게 옮겨가면서 그 많던 감들을 거의 다 따내곤 했었다. 손이 닿지 않으면 당연히 까치밥으로 남겼었는데, 감나무가 많아선지 대부분의 까치밥은 눈이 내릴 때까지 남아있기도 했었다.효자동 집 주위에 심겨진 몇 그루의 감나무에 예전을 반추하는 감들이 꽃등처럼 열려서 회억에 잠기곤 한다. 올해는 해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감들이 열려‘새들을 위한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찾아온 새들을 쫓지 않고 혹여 방해가 될까봐 창밖으로만 넌지시 감 쪼는 모습 보기를 은근히 즐기면서, 한 달가량 까치밥으로 10여개를 내주고 이제 마지막 1개만 남겨두고 있다. 도심의 새들은 갈수록 먹이 구하기가 힘든 걸까? 크고 작은 새들이 수시로 날아와 재잘거리며 감을 쪼아대는 풍경이 그림처럼 푸근하기만 하다.

202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