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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된 신라 문무왕, 경주 문무대왕암

등록일 2023-08-28 17:53 게재일 2023-08-2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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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암, 2015, 소장 및 촬영 : 한국관광공사, 공공누리(https://www.kogl.or.k)
문무대왕암, 2015, 소장 및 촬영 : 한국관광공사, 공공누리(https://www.kogl.or.k)

청명한 하늘과 드넓은 바다, 넘실거리는 파도 사이로 거대한 암초가 눈에 들어온다. 감포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자연 암초다. 동해의 거센 파도가 바닷가로 들이치는 것을 막는 이 거대한 암초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을 몰아내어 통일 신라를 이뤘던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문무왕은 신라의 일반적인 장례가 아니라 화장하여 바다에 산골(散骨)하는 장례 의식을 유언으로 남겼다. 문무왕의 유언은 비교적 세세하게 남아있다. 경주의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문무왕릉비를 발견했는데, 비의 뒷면에 유언이 새겨져 있었다. 문무왕의 업적을 세세히 나열하고, 태자의 왕위 계승을 왕의 관 앞에서 하길 바란다. 이는 왕권을 높이고 태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간소한 장례와 화장을 당부하였고, 통합된 삼국 사회에 대한 의견도 제시한다. 문무왕이 죽자 평소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대왕암에서 뼈를 뿌렸다고 한다.

신라는 동해안에 인접하여 바다를 통한 교류가 많고, 3~5월에 왜의 침입을 많이 받는 지역이다. 특히 신라 인근의 바다는 대기가 불안정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용오름 현상이 잘 관측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물이 있는 곳 대부분이 그렇듯이 신라에도 당연히 오래된 용신앙이 있었다.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으며, 석탈해의 설화에서도 세상을 통치하는 용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신라의 용신 숭배는 문무왕 시기에 불교와 융합하면서 호국신앙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당전쟁이 일어나자 문무왕은 불교 법사 명랑(明朗)에게 승리할 수 있는 비법을 물었고, 명랑은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비법을 전수한다. 문무왕은 사천왕사라는 절을 세워 당나라 배를 두 차례 침몰시켰다. 문무왕은 사후 자신의 유언대로 불교를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는 동해의 용이 되었다. 그 후 아들 신문왕에게 김유신과 함께 나타나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만파식적과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건넨다. 당시 사람들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영험하게 여겼고 아직도 용신앙은 이 지역에 남아있다. 기우제는 지낸 것은 물론이고 임진왜란 때는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지금도 1년 내내 무속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문무대왕암의 중앙에는 수면에서 깊이 1.2m의 십자형의 수로가 있고 그 중앙에는 거북이 모양처럼 보이는 커다란 돌이 놓여 있다. 수로는 입수구와 출수구의 높이를 달리하여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조정하고 수로의 벽을 정비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중심부의 큰 암석을 석실의 덮개돌로 여겨 그 아래 부장품이나 봉인된 항아리 등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암초 위의 물을 빼고 조사한 결과 석실도 부장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곳을 문무대왕이 잠든 곳으로 여기는 것은 감은사와 이견대, 문무왕릉비, 사천왕사 등과 같은 문무왕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 여러 기록에서 문무대왕암의 위치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은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이 불교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하고자 짓기 시작하여 신문왕 2년에 완공된 절이다. 현재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절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큰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통일신라 초만해도 해수면이 지금보다 1m 이상 높아 감은사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왔으며, 실제로 감은사지 터 인근에 나루터도 발견되었다. 감은사 주춧돌 아래는 다른 사찰들과 다르게 틈이 있다. 사찰이 땅에서 살짝 떠 있을 수 있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금당의 오른쪽 아래쪽에는 기록과 일치하는 용혈도 발견되었다. 이 용혈은 강으로 이어졌다가 문무대왕암이 있는 바다로 연결된다. 신문왕이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대왕암에서 지내다 강을 타고 용혈을 통해 감은사에 드나들 수 있도록 마련된 통로로 알려져 있다. 감은사는 고려 몽고침입 때의 화재로 주춧돌과 탑 두 개만 남아있다.

이견대는 문무대왕암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에 지어졌다. 이곳은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한 곳이기도 하고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오랜만의 부자상봉을 기뻐하며 대를 만들었다고도 하며, 만파식적을 얻고 기뻐하여 만들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문무왕에 대한 제례를 지내던 장소이자 왕권을 강화하기에 좋은 곳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왜의 침공을 경계하기에도 좋은 지리적 거점이었다.

문무왕을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했고, 사람들은 그가 동해의 용이 되었다고 믿었다. 현재 문무대왕릉은 인공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고, 대대로 영험한 장소로 여겨져 왔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의 염원처럼 굳건히 버티며 동해의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거대한 자연 암초, 문무대왕릉의 전경이 저 멀리 바다 위에 펼쳐진다. 청명한 하늘이 몹시도 선명하다.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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