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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주를 담은 건물들, 경주 엑스코대공원

옛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는 수많은 고분이 있고, 불교와 관련된 유적이 있으며, 당시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들이 즐비하다. 신라만의 고유한 유물이 있는가 하면, 로만글라스(지중해)·황금보검(카자흐스탄)·인면 유리구슬(로마)·원성왕릉 무사상(서역인)처럼 동서 교류를 한 흔적도 발견된다. 또한 전통적인 기와집과 초가집이 마을을 형성한 곳도 있고, 한눈에 보아도 현대의 뛰어난 건축가들이 솜씨를 발휘한 독특한 모양의 건축물도 찾아볼 수 있다. 경주는 남겨진 문화재와 오래된 역사가 현재의 삶과 어우러져 독특한 도시공간을 형성하고 있다.경주의 독특한 아이덴티티(identity)를 잘 담아낸 것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 중 경주엑스포대공원 안의 건축물도 손에 꼽을만하다. 지역의 이미지와 자연환경, 유구한 역사와 관광 도시로서의 면모가 건축물에 잘 드러나 있다. 경주엑스포대공원 안의 여러 건축물 중에서 이타미 준(유동룡)의 ‘경주타워’, 쿠마 겐코(Kuma Kengo)의 ‘경주세계문화엑스포기념관’, 승효상의 ‘솔거미술관’이 유명한 편이다.엑스포대공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특이한 건축물이 있다. 일반 빌딩처럼 생긴 네모난 건축물의 안쪽을 목탑의 실루엣으로 파내었는데, 멀리서 보면 황룡사 9층 석탑을 표현하여 신라의 찬란했던 문화를 상징적으로 담은 것을 알 수 있고, 가까이서 보면 건축물의 아래쪽 골조가 노출되어 있어 해체주의적 스타일이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82미터나 되는 이 ‘경주타워’는 가장 높은 층에서는 미디어 전시를 감상하고, 65미터의 유리 커튼월 공간에서는 보문 일대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경주타워’는 이타미 준이라는 재일교포 건축가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작품이다. 그는 한국의 고건축·문화·예술을 사랑하였고, 한국에도 여러 건축 작품을 남겼다. 그는 자연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건축물이 세워질 장소의 고유성과 인간의 삶이 함께 어우러지는 방향으로 건물을 디자인했는데, 특히 땅의 물성으로 자연의 이치를 밝히며, 건축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를 표현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 또한 반영하기를 원했다고 한다.‘경주세계문화엑스포기념관’은 정문에서 왼쪽 끝에 위치하는데, 신라 고분과 경주의 주상절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빛을 가려주거나 비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하는 노란 철제 구조물이 지붕과 기둥으로 기념관의 영역을 규정하고 회랑을 형성하여 이동 동선과 방향을 알려준다. 철제 구조물이 뒤덮인 지붕 일부는 돔 형태로 봉긋 솟아올라 고분의 모양과 닮아있다. 또한 주건물의 마당 부분에는 독특한 분수대가 있는데, 마치 분수대의 바닥이 서서히 하늘로 치솟듯이 둥글게 말린 형태다. 하늘로 길이 열리는 듯한 이 수공간은 건물 안의 동선을 따라 걷다가 만나는 둥근 유리 커튼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붕의 돔 형태를 따라 전시관의 내부 천정도 돔 형태로 되어 있고, 주상절리를 닮은 방사형 판재들이 전시 공간의 동선을 만들어 조형미를 더한다.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터널, 세계 유산을 미디어로 홍보하는 살롱 헤리티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문자가 새겨진 스테인리스 미러 기둥, 경주에서 열렸던 역대 엑스포를 문의 형태로 만든 ‘세계의 문’은 전시 자체로도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세계 속의 경주’의 상징도 내포하고 있다. 이 건축물을 디자인한 쿠마 겐코는 건축물이 자연과 융화되고, 지어질 장소와 행복한 관계를 형성하는 건축을 추구한다. 제주도에서 지붕의 재료로 제주도를 대표하는 암석 현무암과 스테인리스 그물망을 접합한 재료를 활용한 바도 있다.‘솔거미술관’은 진정으로 자연 속의 건축물로 지어진 느낌인데, 언덕 위의 연못가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으며 땅의 높낮이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지어졌다. 황토로 된 벽은 경사진 언덕에 맞게 뼈대가 세워졌으며, 미술관 내부의 동선도 높고 낮은 본래의 지형에 따라 작은 공간들의 이어짐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작품은 평면이 아닌 둥근 곡률로 전시되어 있어 독특하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지며, 특히 제 3전시실의 통창은 자연조차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한 것을 알 수 있다. 2015년 3월에 완공된 후 통일신라의 대표 화가 솔거의 이름을 따 미술관의 이름을 지었으며, 경주 최초의 공립미술관으로 자리잡았다. 이 건물을 설계한 승효상 건축가는 빈자의 미학을 건축에 잘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술관의 동선을 따라 거닐며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그의 건축 철학이 미술관 곳곳에서 빛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간과 공간을 이어지는 곳곳에 보이는 자연·공간과 잘 어우러지는 전시물은 물론 자연조차도 하나의 작품으로 삼은 이 미술관은 그 생김새조차도 하나의 자연물처럼 보인다.신라의 옛 중심지 경주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지역성과 역사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도시에 속한다. 도시 곳곳에 수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경주엑스포대공원의 미학적인 건축물도 경주를 제대로 담았다고 생각된다. 경주를 담은 건축물을 돌아보며 과거의 경주와 현재의 경주 그리고 세계 안의 경주를 느껴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7-03

악성 우륵의 악기, 가야금

음악은 다양한 사람들이 어떠한 제약도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옛 가야국에서 만든 가야금(伽倻琴)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에 통합되지 못하던 가야를 아우르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가야국의 금(琴), 가야금은 옛 문헌에서는 한글 표기로 ‘가얏고’라 불리던 현악기였다. 주로 긴 오동나무로 만든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꼬아 만든 12개의 줄을 걸고 줄마다 그 줄을 받치는 작은 안족을 두었다. 가야금의 둥근 윗판은 하늘을, 평평한 아랫판은 땅을, 공명통인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을, 12줄과 12개의 안족은 12개월을 상징한다. 또한 악기의 몸체는 천지음양을, 3치 높이의 안족은 천지인을 나타내어 동양의 우주관과 자연의 운행 원리를 담아내었다.가야금은 대체로 수령이 30년 이상인 오동나무를 5~7년 통풍이 잘되고 그늘진 곳에서 자연건조하여 만든다. 대개의 악기가 그렇듯 둥근 형태로 깎아서 모양을 잡고, 앞판과 뒷판을 이어 붙여 울림통을 만든다. 습기를 제거하고 오랫동안 변질이 되지 않도록 불에 달군 인두로 울림통을 지지는 것도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안족 중앙에 줄의 굵기에 맞는 홈을 파고, 가야금에 실을 걸면 완성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야금은 공명판의 오른쪽 끝을 연주자의 무릎에 얹고 오른손으로는 줄을 뜯거나 튕기며 왼손으로는 줄을 떨거나 누르면서 연주한다. 곧 청명한 음색이 들려온다.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은 우륵(于勒)에게 가야금을 제작하고, 지역에 따라 다른 가야의 특색을 모아 작곡하도록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의 기록을 보면, “가실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른데 그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악사 성열현(省熱縣) 출신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만들게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우륵이 지은 12곡에는 당시 가야의 지명이 담겨 있다. ‘삼국사기’에는 12곡으로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달기(達已)·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상기물(上奇物)·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보기(寶伎)·사자기(師子伎)를 언급한다. 이 중 10곡의 곡명이 당시 낙동강 주변의 옛 가야 지방의 명칭이다. 하가라도는 신라 법흥왕 때의 아라가야(아시랑국) 지역으로 현재의 경남 함안이며, 상가라도는 신라 진흥왕 때 멸망하여 대가야군이 되었던 지역으로 현재의 경북 고령군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익힌 성열현은 고령에 있다. 달기는 경북 예천 다인현으로 본래는 달기현 또는 다기라 불리던 곳이고, 사물은 사수현 또는 사물현으로 지금의 경남 사천이다. 물혜는 경남 함양군 이안으로 이안현 또는 마리현이었던 곳이고, 하기물은 옛 감문소국이 있던 곳으로 금물현 또는 음달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경북 금릉 아랫개경에 해당된다. 상기물은 경북 금릉의 웃개령이고, 거열은 거열군이라 불리던 경남 거창이다. 사팔혜는 팔혜현·초팔혜현·초혜현으로 불리던 경남 합천군 초계 지방의 옛 지명이고, 이사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일대이다. 보기와 사자기는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렇게 널리 분포되어 있던 가야는 지역마다 전통과 문화가 달랐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성했다. 그러나 신라의 영역 확장은 가야의 존폐 위기를 초래했으며, 대가야의 가실왕은 가야가 통합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음악을 선택했다.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만들고, 각 지역색을 담은 곡을 작곡하게 한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고령현 고적조 금곡(琴谷)에서 가야국 가실왕의 악사 우륵이 중국의 진쟁(秦箏)을 본떠서 거문고를 만들어 가야금이라고 불렀다. 우륵이 공인(工人)을 거느리고 거문고를 익힌 곳”이라 전한다. 현재 고령 대가야읍 쾌빈리 일대로 보는데, 가야금 연주 소리가 산골에 정정하게 울렸다고 하여 예전에는 정정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동구뱅이라 지칭되기도 했다. ‘환상’이란 뜻의 고령 방언 동구와 ‘방’이란 뜻의 뱅이가 만나 ‘환상이 보이는 곳’이란 뜻이다. 가야금의 골짜기라 하여 금곡(琴谷)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우륵이 이곳에서 연주하면 그 소리를 듣고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우륵은 평생 185곡이나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 정정골에서 12곡을 작곡했다는 기록뿐이다. 가야국이 망하자 우륵은 제자 이문과 같이 신라에 투항했고, 가야금은 신라에 전수되었다. 우륵은 신라 진흥왕에게 가야금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신임받았다. 계고, 법지, 만덕이란 세 명의 제자를 두어 가야금과 노래, 춤을 전수하고자 했으나 가야의 음악을 망국지음(亡國之音)으로 치부한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진흥왕은 음악에는 죄가 없다며, 세 제자를 설득했고, 우륵은 비로소 전수할 수 있었다. 이후 가야금 음악은 신라의 대악으로 채택된다. 신라의 대악은 아정한 음악, 바른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국음악의 근본이 된다.정정골의 동산 위에 우뚝 솟은 우륵기념탑은 우륵의 업적을 기리고 지역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대가야축제 추모행사가 이뤄지는 장소이다. 우륵의 집은 아담하고 소박한 곳으로 2009년 건립되었다. 우륵박물관은 가야금과 우륵에 대한 세계를 5개의 테마로 나눠 설명한다. 시원한 산책로를 따라 가얏고 마을을 걷고, 가야금을 만들어 보고, 작은 연주도 할 수 있는 가얏고 마을을 둘러보며 옛 우륵의 자취와 우리 악기의 소중함을 느껴본다.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4-06-19

삼삼오오 모여, 대구 오오극장

오오극장은 올해로 아홉 살 된 독립예술영화관이다. 이 극장은 위치를 정확히 모르면 어느새 지나쳐 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간판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55라는 숫자가 적힌 간판이 제법 크게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영화를 사랑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을 놓칠 수 없다. 어느 순간 은은한 그 분위기가 삼삼하여 오오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오오극장의 ‘오오’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가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작품 하나가 완성되어 가듯이 ‘오오’는 삼삼오오의 ‘오오’이기도 하고, 55석의 ‘오오’이기도 하다.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다 좋다는 감탄사 ‘오오’라 해도 괜찮다. 또는 어서오라는 뜻으로 ‘오오’라 쓰인 듯도 하다.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층고가 높은 공간에 맞게 좌석을 배치하려다 보니 55석이 나왔고, 이를 극장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매우 정감 있는 이름이 붙여진 셈이다.이름만큼이나 오오극장은 따스한 분위기가 맴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여느 극장처럼 상영 영화의 포스터가 벽면에 나란히 붙여져 있다. 무심하게도 툭 걸려있는 영화포스터가 낯선 방문객을 반기는 듯하다. 통유리로 된 1층의 외관은 탁 트여 있지만 사실 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에 빼곡하게 적힌 하얀 방명록이 은은하게 안과 밖의 공간을 구분해주기 때문이다. 하얀 글씨로 적힌 수많은 방명록 중에는 오래도록 제자리에서 이어가기를 바라는 문구가 제법 많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은 잘 꾸며진 서재처럼 영화와 이에 관한 책자들로 즐비하다. 서재의 중앙에는 작은 스크린이 놓여 여러 독립예술영화와 오오극장에 대한 광고 영상이 흘러나온다. 특별작품 설명이나 독립영화에 대한 정보 등 다양한 영화 소식이 은은한 불빛과 함께 따스하게 전해진다. 멀티플렉스의 공격적인 마케팅 화면과는 꽤 대조적인 분위기다.왼쪽에는 예매소와 다방을 함께 운영하는 삼삼다방이 자리하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소통하는 공간으로 친근한 북카페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술과 관련된 여러 발행물도 놓여있어 영화 대기 시간에 홀로 즐기기에도 제법 괜찮다. 더불어 마스코트 길고양이 ‘오우삼’의 애옹애옹 울음소리도 오오극장의 정감 있는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린다. 실질 상영관은 입구의 정면에서 보면 제일 안쪽에 있다. 상영관은 스크린과 좌석들이 매우 가깝게 배치된 아담한 곳으로 55석 중 앞의 4좌석은 휠체어를 위한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다. 상영관의 안까지 턱없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동선에도 신경 쓴 흔적이 엿보인다.19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 영화관은 지금 멀티플렉스처럼 크지 않았다. 대부분 오오극장보다는 규모가 있었으나 단관극장이 많았다. 영화 상영도 서울의 영화관부터 시작하여 지방으로 배급되는 형태였다. 더구나 당시 한국영화는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어서 외국영화가 상영되지 않는 기간에 상영되었다고 한다. 1998년 4월 ‘CGV강변 11’이 개관되면서 여러 편이 동시에 상영되는 다관극장(멀티플렉스)이 등장한다. 또한 상업적 논리와 더불어 한국영화시장이 전면 개방되면서 국내영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졌다. 1999년 2월 영화진흥법이 개정되고, 외국영화에 비해 상업성이 부족했던 한국영화를 지원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당시만 해도 많은 한국영화들이 이에 속했었다. 이후 한국영화는 점점 좋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2001년에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라이방’·‘나미’·‘고양이를 부탁해’의 앞글자를 딴 ‘와라나고’운동이 일어난다. 이는 상영시장에서 위기에 놓인 한국예술영화를 지키기 위한 관객들의 자발적 관람 운동이었다. 이에 발맞춰 최소한의 상영 기회를 보장한다는 목표로 지원 정책이 이뤄지며, 2007년 서울의 ‘인디스페이스’가 설립된다.이후 지역에서는 최초로 대구의 ‘오오극장’이 들어섰다. 그러나 2014년 이후 지원 정책의 변화와 축소, 코로나19 팬대믹의 영향, OTT 시장의 확장 등으로 인해 독립예술영화관들은 경영 위기로 휘청거리게 된다. 실질적으로 OTT 재택관람이 대세를 이루고,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예전에 비해 급격하게 감소했다. 멀티플렉스도 관람객이 줄어드는 상황에 독립예술영화관을 찾는 발걸음은 더욱 뜸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때로는 작은 영화관이기에, 독립예술영화가 주를 이루기에 찾아드는 사람들도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작은 것에 부여된 의미가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독특한 색을 전달하기도 한다. 오오극장은 대구 지역에 기반한 독립영화인과 시민들이 뜻을 모아 만들어진 만큼 처음의 색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홈피와 SNS 운영, 문화적 다양성과 확대라는 극장의 역할, ‘수성못’·‘맥북이면 다 되지요’ 등 대구의 독립영화 상영, 대구영화학교나 다양한 모임 장소 등. 은은한 온기를 품은 오오극장은 방명록으로 남겨진 유리창의 하얀 문장들처럼 오늘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4-05-29

도심 속 물길, 포항운하

하늘이 맑고 바람이 잔잔하던 어느 봄날, 작은 유람선이 부두를 출발하여 인공적인 물길에 몸체를 들이밀었다. 물길을 가르며 천천히 나아가는 유람선에서 내다본 양옆의 전경은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게만 느껴진다. 운하의 좁은 폭 때문일까, 일상을 영위해가는 송도 사람들의 생생한 표정 때문일까, 오랜만에 타보는 유람선의 흔들림에 마음도 흔들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녹아내릴 듯 쏟아지는 바닷가의 햇살이 따스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녹진하게 풀어져 버린 마음에 포항 송도의 전경은 색다른 생생함으로 다가왔다.포항 송도는 포스코가 포항에 자리 잡고 융성하기 이전에는 이름 그대로 ‘섬’이었던 곳이었다. 울진에서 발원한 형산강과 동해가 만나는 하구,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곳 안쪽에 형성된 커다란 섬 송도는 소나무가 무성히 자라 방풍림을 이뤄 송도로 불렸다.또한 송도의 끝자락이자 형산강 하구의 동빈내항은 신라 시대부터 물이 얼지 않아 어선을 정박시키기에 좋은 장소로 활용되던 천혜의 부두였다. 이곳은 1732년 포항창이 개설되면서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함경도에 발생한 큰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창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항구로 자리를 잡아가던 포항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의 발전된 어업 기술을 들여오면서 더욱 성장한다. 많은 일본인이 포항에 자리 잡았고 풍부한 수산물을 수탈했으며, 일본인 거리까지 형성하여 불야성을 이뤘었다. 일본의 패망 이후에도 포항은 중요한 군사 항구로 이용되었다.하지만 지금과 같은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포항은 포항제철소가 건설되고 도시가 빠르게 확장되면서 근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끄는 대표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포항 원도심 일대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도심은 상업 및 주거 용지가 매우 부족해져 갔다. 포항은 형산강의 범람 피해를 방지하고 주택부족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송도와 포항내륙을 가르던 형산강 및 주변의 습지대를 매립하는 하천직선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후 송도는 섬이 아닌 내륙으로 편입된다.1970년대 형산강 하구에서 동빈내항으로 이어지는 작은 물길 여럿이 매립으로 인해 막히면서 매립되지 않은 동빈내항의 인근은 점점 오염물이 쌓여갔고 심각한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원도심을 떠나갔고, 원도심 일대는 뒷골목과 같은 슬럼화가 진행되었다.도시 오염의 심각성과 슬럼화, 철강산업의 쇠퇴로 인한 지역경제의 둔화 등 도시문제를 인지한 포항은 2006년 도심 재생 프로젝트를 하나의 돌파구로 시행한다. 이미 사라진 형산강의 옛 물결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지만 포항운하를 건설하여 주변의 생태환경을 복원하고, 심각한 도시 오염의 문제를 해결하고, 슬럼화되어가는 원도심을 재정비하고 나아가 관광산업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다.스페인 빌바오나 독일의 라인강이 근대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공간을 재구축한 것처럼 포항도 비슷한 도시 공간의 재구성을 시도한 것이다.2012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대략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길이 1.3킬로미터, 폭 13~25미터 크기의 운하가 남북으로 연결되면서 송도는 이름에 내포된 ‘섬’이란 의미를 되찾았다. 서울의 청계천이 복원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듯이 포항의 사라졌던 형산강 줄기도 그러한 복원과정을 거친 것이다.또한 포스코 전경이 훤히 보이고, 송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운하의 끝자락에 포항운하관이 세워졌다. 독특한 모양의 포항운하관에서는 포항운하가 어떻게 복원되었는지 운하전시관에서 확인해 볼 수 있고, 드넓은 바다의 향취를 카페에 앉아 느낄 볼 수도 있다.하지만 무엇보다 꼭대기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제일이다. 작은 유람선이 운하를 타고 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날씨가 좋으면 포항 앞바다까지 나가는 유람선도 확인할 수 있다. 멀리 송도의 유명한 소나무숲도 보이고, 16년만에 제 모습을 찾은 새하얀 송도해수욕장도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재생된 포항 형산강 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포항운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와 자전거길을 달리고, 온갖 해산물의 풍성한 냄새가 가득한 죽도시장에서 상인들과 흥정하고,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는 포항여객선터미널에서 손을 흔들고, 소나무숲으로 이어지는 송도 송림 테마거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하얀 모래가 매력적인 송도해수욕장을 거닐고, 야경이 멋진 포스코의 전경을 바라본다.운하를 따라 흘러가는 유람선에서 바라본 포항의 송도는 평화롭고 잔잔한 바닷가의 일상과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도심의 일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5-15

정견모주와 가야산

촛대처럼 하늘을 향해 솟은 바위들 사이로 넓적한 바위가 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곧 떨어져 내릴 듯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이 바위는 가야산에서 꼭 둘러봐야 할 장소로 알려진 ‘상아덤(서장대)’이다. 이곳은 성주 백운동에서 칠불봉으로 향할 때, 끝없는 계단과 사투를 벌이다 잠시 쉴 수 있는 서성재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만나볼 수 있다.상아덤은 성주 방면의 가야산 전경을 한 폭에 담을 수 있는 장소다. 동북쪽으로는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즐비한 만물상이 눈길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등산의 목적지인 칠불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남서쪽으로는 출발할 때 확인했던 심원사가 있는 심원골과 길게 이어진 능선이 늘어져 있다. 해인사가 있는 합천 방향의 전경을 눈에 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상아덤은 가야의 ‘정견모주’의 신화가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상아덤의 ‘상아’는 여신을 뜻하는 말이고, ‘덤’은 바위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여신 바위’라는 말이 된다.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가 백성을 위해 하늘에 치성을 드렸고, 그에 감복한 천신 이비가지가 오색 꽃구름 가마를 타고 내려와 감응을 맺은 신성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높이 솟은 바위 위로 비스듬히 누운 상아덤은 혼례를 상징하는 가마를 따 ‘가마바위’라고도 부른다.이후 산신 정견모주는 알을 두 개 낳는다. 하나는 고령 양전동에서 알을 깨고 태어나고, 나머지 하나는 회천을 타고 낙동강으로 흘러 김해에 이르러 깨어난다. 첫째 아들 ‘뇌질주일’은 머리가 해와 같이 빛난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대가야의 이진아시왕이 된다. 그의 이름은 또한 세상을 다스리는 귀한 사람이란 뜻이다. 둘째 아들 ‘뇌질청예’는 어머니를 닮아 얼굴이 하늘색과 같이 푸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김해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된다. 이러한 정견모주 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대가야와 금관가야는 형제지간이며 대가야가 형의 위치에 있다고 여겨진다.그러나 지금껏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금관가야가 대가야보다 한 세기 앞선다는 걸 알 수 있다. 4세기 이전에 발굴된 가야 유적은 김해 쪽이 크고 부장품도 화려한 반면에 고령 쪽은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5세기 이후의 가야 유적은 고령 쪽이 크고 김해 쪽은 작은 규모만 발굴된다. 금관가야가 4세기 말까지 김해를 중심으로 번성하다가 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했으며,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 금관가야를 토벌하면서 쇠퇴하였다. 그 후 대가야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까지 고령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다 가야를 통일하지 못하고 562년 신라에 병합된다. 대가야를 형의 위치에 놓았던 정견모주 신화는 적어도 5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산신 설화에 불교식 명칭과 개념이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견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8가지 자세 중 하나인 ‘바로 본다’는 뜻이고, ‘주일’이나 ‘청예’도 중국의 옛 전설에서 윤색된 흔적이기 때문이다. 대가야와 금관가야를 형제로 묶은 내용도 대가야의 세력이 구축되던 5세기 중엽 이후로 추측한다. 이는 대가야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또한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태자가 자신을 ‘정견의 10세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산신을 믿던 토착세력의 위상도 높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체계적인 신화의 정립은 요원해진다. 이후 9세기쯤 신라의 중앙 정치에서 가야계 인물들이 몰락하는데, 그들에 의해 신화가 윤색된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를 창건한 승려 석순응과 석이정은 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치원이 기록한 두 사람의 전기에는 정견모주 신화가 담겨 있다.가야산에 내려오는 산신 신화는 아마도 청동기시대의 샤머니즘적 성격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대가야가 성장하면서 불교를 받아들여도 가야산은 건국의 성소로서 신성시되었고, 정견모주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도 국가 제의나 기우제의 주체가 되었으며, 불교 성소 안에서도 따로 모셔졌다. 본래 해인사 경내에는 정견모주를 모시던 정견천왕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국사단(산신각)에 그 흔적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견모주에게 평안을 비는 산신제는 제법 현대까지 지냈다고 한다.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뒷산에 잣나무 두 그루와 커다란 바위가 있는 장소가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이었다. 지금은 가야산 입구에 마련된 가야산역사신화테마관 안에 소원을 비는 종이를 달 수 있는 장소가 체험 형태로 마련되어 있다.오랫동안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던 가야산, 그중에서도 빼어난 상아덤은 가야산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다. 또한 대가야의 고분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만들어지며 하늘에 닿기를 기원했던 것처럼 하늘에 가깝기도 하다. 촛대처럼 높게 솟은 바위 위로 아슬하게 걸쳐진 상아덤을 보며, 꽃구름 가마를 타고 혼례를 치르던 산신 정견모주를 떠올려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5-01

근대 건축물, 계산성당

계산성당 경상감영과 서남쪽으로 약 600미터 떨어진 약령시장 일대는 대구의 구 중심가이자 근대 종교가 일찍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서상돈 고택·이상화 고택과 같은 근대 건축물이 제법 남아있으며, 지금은 대구 근대골목투어로 더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2개의 종탑이 하늘에 닿을 듯 솟은 아주 오래된 성당-계산성당도 만나볼 수 있다.우리나라에 성당이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된 다음이다. 주로 천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되었으며,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종교적 활동을 위한 기반과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쉽게 말해 자생이 가능한 성소의 마련, 즉 성당 건축에 힘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를 이용하여 한옥 양식으로 지었는데, 이는 소자본으로 기존의 건물을 개조하기 좋으며, 좌식 생활에 익숙한 신도들에게 친근함을 줄 수 있는 편리함이 있었다.지금의 계산성당도 본래는 한국식 십자형 성당(성모성당)이었다. 그러나 1901년 2월 대구에 닥친 강진에 의해 축성 1년 만에 화재로 소실된다. 당시 추위에 얼어버린 성체등(기름등) 대신 촛대를 세워놓았던 것이 화재의 원인이었다. 만약 성모성당이 소실되지 않았다면 국내 유일의 그리스 십자형 평면에 팔작 기와지붕을 올린 45칸짜리(약 100평) 독특한 근대성당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듬해(1902) 르베르 신부는 신축 성당 건축에 돌입한다.계산성당은 르네상스적 성향이 남아있는 고딕양식의 벽돌조 건물로 불린다. 건축양식을 명확히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고딕양식은 ‘뾰족하고 수직적인’ 것이 특징이다. 뾰족한 아치창문, 뾰족한 첨탑, 수직적인 지지대가 하늘에 닿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또한 신이 하늘에서 지상을 바라볼 때 성소가 잘 보이기를 열망하기도 했다.그래서 고딕양식의 교회 평면도는 십자가 모양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 스테인드글라스로 경이로움과 성스러움을 더해 종교적 존엄을 표현하였다. 계산성당도 2개의 높고 뾰족한 첨탑과 라틴십자가 모양의 평면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영되어 있다. 반면에 르네상스 양식은 일명 ‘황금비율(1:1:2)’이 특징이다.황금비율은 서양에서는 고대 이래로 가장 이상적인 비례로 여겨지며, 절대적인 미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황금비율이 반영된 르네상스 건축물은 좌우가 대칭적이며 조화롭고, 아기자기한 지붕이나 동글동글한 장식이 건물에 붙어 있다. 계산성당은 전면의 종탑과 측면의 출입구가 모두 1:1의 비율로 정사각형의 안정적인 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익랑(십자가 모양에서 짧은 부분) 내부는 황금비율(1:1:2)이다.계산성당은 동서로 긴 건물로 주 출입구인 종탑은 서쪽의 서성로에 인접해 있다. 2개의 종탑 베이에는 각각 반원형의 아치창이, 그 중앙의 박공에는 화려한 장미창이 설치되어 있다.그 아래 출입문을 통해 성당에 들어서면 삼랑식 높은 천정을 따라 2열의 기둥들이 줄지어 늘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열주로 인해 중앙의 신랑 부분과 좌우의 측랑(복도)부분이 뚜렷하게 구분되며, 상부의 아치들이 모여 아케이드를 만든다. 건물의 측면에 돌출된 좌우 익랑에는 성가대석과 연주석이 있으며, 건물의 동쪽 끝에는 제단을 두었다. 기둥이 아치 모양으로 세워져 있어 반원형의 주보랑이 생성되었다.이러한 건축양식은 주로 프랑스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로, 당시 르베르 신부와 설계자 프와넬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1918년 계산성당은 정삼각뿔에 가까웠던 첨탑의 지붕을 기존보다 더 뾰족하게 높이고, 동쪽 끝 주보랑 뒤로 오각형 모양의 공간을 더 달아내어 건물을 증축한다. 익랑도 설치하여 일자 모양의 건물이 십자가 모양처럼 보이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성당에서 중요한 스테인드글라스는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설치되어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다. 프랑스 툴루즈의 앙리 제스타의 서명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상 아래에 남아있으며,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하여 1902년 10월에 들어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작품이 설치된 2년 뒤, 프랑스로 보낸 로베르 신부의 편지에 ‘남한을 휩쓴 태풍으로 스테인드글라스 하나가 떨어져 나가 산산조각이 났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계산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당시 유럽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계산성당은 대구근대골목으로 유명한 약령시장에서 서성로에 인접해 있는데, 건물의 동쪽으로는 수녀원과 사제관이, 남쪽으로는 계산문화관과 사무동이, 북쪽으로는 매일신문사가 둘러싸고 있다. 옛 사제관의 모형과 미술가 이인성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인성 나무와 성모동산의 사진들과 로베르 신부의 흉상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역사관에서 오래된 성당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김해 볼 수 있다. 근대의 정취가 남아있는 약령시장, 그곳에 한때는 대구의 랜드마크였던 계산성당이 오랜 세월에도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4-17

경산의 고대국가, 압량소국(押梁小國)

삼국이 미처 형성되기 전 경북 경산에는 압량소국이 있었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7세기까지 천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존재했던 아주 오래된 소국이다. 압독으로도 불렸는데, 압은 ‘누르다’이고 독과 량은 ‘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압량과 압독은 ‘눌린 들’, 즉 산이나 대지로 둘러싸인 평평한 땅, 분지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원삼국 시기에 넓고 평평한 땅 그리고 금호강처럼 풍부한 물과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이 살기 좋은 장소이자 작은 국가가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압독국은 이런 천혜의 장소에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압독국이란 존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실질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1980년대 도굴된 유물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임당동과 조영동·압량면 등에 고분들이 많이 분포되어 산재해 있는데, 다행히도 도굴되지 않은 고분도 발견되어 매장된 당시의 모습이나 문화 등을 고스란히 유추해 볼 수 있다. 목관묘와 목곽묘·옹관묘 등 다양한 묘제와 은제 허리띠·순금 귀걸이·금동관 장식·고리자루칼 등 3천여점의 유물과 지배자로 보이는 성인 유골과 순장된 어린이 유골의 일부도 출토되었다. 신상리 고분은 경부고속도로를 확장하면서 조사되었는데, 6세기 전반의 묘들로 돌무지 덧널 무덤이다. 뚜껑굽다리 접시·굽다리 목긴항아리·바리 등 20여 점의 토기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왕릉급 목관묘도 발견되어 왕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지배자의 무덤이 아닐지 조사되었다. 특이하게도 참나무 속을 통으로 파내고 사방은 나무판을 세워 만든 목관과 부장물이 출토되었다. 이 목관묘는 창원 다호리와 경주 조양동의 중간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목관 안에서는 인골의 일부가 출토되었는데, 유골의 얼굴은 깃이 달린 커다란 부채로 덮여있었고, 두 손에도 부채가 쥐어져 있었다. 부장품으로 청동거울·청동검·쇠도끼·철검·청동모양 말 등이 발견되었다.고분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서 새의 형상을 본뜬 물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새의 깃털로 된 부채나 새날개모양의 금동관 장식은 하늘과 연관되어 지배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또한 중앙정부에서 인정받은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임당동 유적에서는 금동관 장식이 부서져 조각난 채로 발굴되었다. 이 유물은 신라에서 하사받은 위세품으로 신라 중앙정부와 지방 세력 간의 친밀도를 확인시켜 준다. 금동관과 관장식은 주로 금이나 은을 재료로 사용하여 만들지만 도금한 유물도 꽤 존재한다. 임당동의 금동관장식은 얇은 금동판을 오려서 좌우 새날개 모양과 금동관에 연결하는 부위를 따로 만들고 테두리에 문양을 새긴 후 각각 도금하여 최종적으로 결합한 유물이다. 새날개 모양의 장식표면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원형 달개를 세 번 꼬은 금동선으로 고정하여 장식하였다. 금동선은 구리를 얇게 만든 후 큰 구멍에서 작은 구멍으로 통과하여 더 얇게 만든 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장식은 만드는 기술도 현대 기술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나지만, 유물들의 디테일이 오늘날 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에도 이러한 섬세한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금동관장식의 작은 원형 달개들이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소리를 내고, 태양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마치 빛나는 날개가 달린 관을 쓴 것처럼 보일 것이다. 곧 하늘로 날아올라 신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을 전해줄 것 같지 않았을까.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에서는 이러한 조익형관식이 5점이나 출토되었다.사실 천년에 가깝게 이어오던 압독국은 사로국이 정벌 활동을 벌이는 초기에 종속국이 되었다. 음즙벌국, 지금의 경주 안강 유역에 있던 소국과 실직국, 지금의 강원도 삼척에 있던 소국이 포항 인근의 지역을 차지하려 영유권 분쟁을 벌였다. 사로국의 파사 이사금과 금관가야의 수로왕도 이 분쟁에 큰 관심을 가졌다. 수로왕은 해상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실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음즙벌국의 편에 섰다. 경주에서 수로왕·파사 이사금·음즙벌국·실직국이 참석하여 합의 연회를 벌이던 중, 수로왕의 부하가 사로국의 관리를 죽이고 음즙벌국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파사 이사금은 그 길로 음즙벌국을 공격하여 포항의 영유권까지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한다. 이때 음즙벌국과 수로왕의 편에 섰던 압독국이 지레 겁을 먹고 미리 사로국에 항복하여 복속국이 된다. 40년이 흐른 후 일성 이사금 시기에 종속국이던 압독국은 사로국의 월권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쉽게 제압당한 압독국은 종속국으로도 남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 백성들은 남쪽으로 강제이주된다. 이후 경산 지역은 신라의 산하에서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병영으로 활용되었다. 김유신이 선덕여왕 13년에 압량주의 군주가 되어 백제와 전쟁을 하여 승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사람이 살기 좋은 땅에 자리 잡고,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유지했던 경산의 고대국가 압량소국은 삼국이 형성되는 이른 시기에 신라의 종속국이 되었다. 비록 역사의 흐름 속에서 힘 있는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현재까지도 남아 지역의 특색있는 역사가 되었다. 압량이라는 지명에서, 고서에서, 고분과 유물에서도 그 오래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이 깃든 흔적을 찾아 경산의 고분군을 거닐어본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4-04-10

빼어나고 고운, 성주 회연서원과 무흘구곡

‘무이산이 기이하고 빼어나며 맑고 고와 진실로 천하에 제일이다. 또 우리 주 선생이 도학을 공부하던 장소가 되어 만대의 아래가 수사와 태산처럼 우러르게 하니 진실로 우주 사이에 다시 있을 수 없는 땅이 된다. 내가 외진 곳과 늦게 태어나서 이미 선생의 문하에서 배울 수 없고 또 구곡의 하류에서 갓끈을 씻을 수 없으니 어찌 심히 불행이 아니겠는가’(‘무이지발’, 정구)성주 가야로를 타고 가다 수륜면에 도달하면 새하얀 백매화가 팝콘처럼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한 서원을 찾아볼 수 있다.이곳은 조선의 대학자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의 회연초당이 있었던 장소이자 그를 기리고자 후예들이 세운 회연서원이 자리 잡은 곳이다. 회연초당은 한강 정구가 41세가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와 대가천의 귀퉁이에 초당을 재건하고 학문을 강학하던 장소이다. 그는 회연초당의 동쪽 부모님 묘소가 보이는 곳에 망운암을 짓고, 앞뜰에 다수의 매화나무를 심어 백매원을 만들었다.겸재 정선(鄭6B5A·1676~1759)이 그린 ‘회연서원도’에도 대가천 인근의 봉비암, 경회당, 사당, 나무들과 백매원 등이 그려져 있다. 겸재 정선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상상을 가미하여 그림을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인데, 아마도 청하현감으로 있던 시절 이곳을 다녀갔을 것으로 짐작된다.주자의 삶을 흠모하던 정구는 직접 무흘구곡을 경영하지는 않았지만, 인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후학들과 거닐며, 그 아홉 굽이마다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가’는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차운해서 지은 것으로, 제1곡 봉비암·제2곡 한강대·제3곡 무학정·제4곡 입암·제5곡 사인암·제6곡 옥류동·제7곡 만월담·제8곡 와룡암·제9곡 용추를 노래한 한시이다. 서시까지 포함하여 모두 10수이며, ‘한강집’ 권1에 실려 있다. 이 중에서 제4곡까지는 성주, 나머지는 김천에 속해 있다. ‘무흘구곡가’는 마냥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기보다는 그를 통해 학문의 근원을 찾고자 노력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지금은 회연서원의 입구에서 ‘영남제일승지 무흘계곡’이라는 표석과 두루마리 형태의 돌에 잘 설명되어 있다. 또한 향현사 뒤로 조성된 데크 산책로를 따라가면 제1곡 봉비암까지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데, 중간쯤 완연대를 지날 때 세월에 바랜 돌에 새겨진 한시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회연서원은 문루인 현도루를 통해 들어간다. 곧 마당이 드러나며, 왼편에 400년이 넘은 노거수 느티나무가 방문객을 반가이 맞이한다. 서원의 작은 출입구를 들어서면 ㄷ자모양의 세 건물을 볼 수 있는데, 본당인 경회당과 고학년의 기숙사인 동재 명의재와 저학년의 기숙사인 서재 지경재가 그것이다. 명의재와 지경재는 한강 정구의 학문적 스승인 남명선생의 사상에서 ‘의’를, 퇴계선생의 사상에서 ‘경’을 가져와 그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경회당은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맞배지붕에 기품있는 모양새를 지녔다. 한석봉이 썼다는 해서체 현판과 경회당이라 적힌 편액 양쪽으로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글씨 옥설헌·망운암이라 적힌 전서체 편액이 보인다. 왼쪽 측실 퇴보 위에는 자칫 놓치기 쉽게 숨어있는, 허목의 다른 편액 불괴침도 걸려 있다. 경회당은 대양처럼 큰 주자의 학문을 본받는다, 망운암은 기상을 높게 가져라, 옥설헌은 깨끗한 마음을 가져라, 불괴침은 부끄러움이 없는 잠자리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글쓴이만 알아본다는 그림 같은 전서체 아래에 작은 글씨로 적힌 한자가 한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당시 주자의 유유자적한 삶과 선비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추구하던 한강 정구와 그를 따르는 미수 허목의 학문에 대한 진심이 편액들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회연서원의 오른쪽이 강학을 위한 공간이라면 왼편은 사당을 위한 공간이다. 대개의 서원에서 사당은 강학 공간의 뒤쪽에 마련되어 있는데 회연서원의 사당은 특이하게도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 안에는 새 사당을 지어 한강 정구와 석담 이윤우를 모셨고, 향현사에는 한강과 더불어 존경받던 지역의 인물이 모셔져 있다. 향현사 뒤쪽 산책로를 따라 봉비암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작은 구사당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인 승모각에는 한강 정구의 학문들과 초상화, 문집이나 교지 등이 보관되어 있다.3월에 찾은 회연서원은 이른 봄날 거닐기에 제법 운치가 있는 장소다. 대가천에서는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고, 봉비암과 완연대를 오르며 볼 수 있는 절경도 가슴을 트이게 한다. 서원 주위로 가지마다 팝콘처럼 열린 백매화가 봄소식을 완연히 전하고, 서원 앞마당을 지키고 있는 노거수 느티나무 가지들도 새싹들로 봄맞이에 한창이다. 담장 너머 회연서원의 기와가 매화 향기와 더불어 아지랑이를 따라 아른거린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3-27

석굴사원의 효시,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

군위 부계면에 가면 기암절벽 아래 세워진 사찰과 서원 그리고 잘 조성된 소나무길에서 풍기는 솔향을 물씬 느낄 수 있다.솔향이 이끄는 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경주 토함산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신라 시대의 석굴사원이 보인다.제2의 석굴암이라 불리는 이곳은 험준한 팔공산자락의 하나를 칼로 동강을 낸 듯한 학소대 절벽의 아랫부분에 아파트 한 동 크기의 자연동굴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석굴사원이다. 멀리서 보면 절벽 아래쪽 중앙에 자연 동굴의 동그란 모양과 그 안에 평평한 장소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삼존불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설계된 계단이 통제되어 있어서 강 건너 멀리서만 볼 수 있다.군위 아미타여래삼존불상은 본래 지역민에게서는 불암-부처바위-으로 불렸다. 대략 7세기 중엽에서 말경 신라의 원효대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인공적으로 조성된 경주 토함산 제1의 석굴암보다 규모는 작지만 시기는 100년을 앞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굴의 높이는 4.25m이며, 본존상인 아미타불은 2.18m, 우협시 관세음보살상 1.92m, 좌협시 대세지보살상 1.8m나 된다.협시보살은 대체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형상을 지녔으며, 본존불은 인자함보다는 진중한 인상으로 석굴 안에 봉안되어 있다. 원효대사는 이 동굴에 아미타여래삼존불상을 조성해서 봉안하고, 미타정토신앙을 우리나라 최초로 포교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본존불인 아미타불은 무량수불·무량광불과 같은 말로, 줄여서 ‘미타’라고도 불린다.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를 의미하는데, 아미타불은 성불하기 전 법장보살이었을 때 48개의 서원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중 ‘선하고 바르게 살면서 내 불국토에 오고자 하는 이는 모두 극락에 왕생한다.’, ‘어떤 중생이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내 불국토를 믿고 좋아하여 와서 태어나려는 이는 내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반드시 왕생한다.’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서, 중생에 대한 넓은 포용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정토사상을 가장 먼저 신라에 도입한 원효대사의 자취와 그 뜻을 군위의 아미타여래삼존석굴에서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특히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며, 손가락으로 땅을 짚은 항마촉지인을 취하는 최초의 불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아미타불 왼쪽의 관세음보살은 관음보살·관자재보살과 같은 말이다. 대개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지만, 워낙 우리나라에서는 하층민과 상인 등에게 인기가 있는 보살이라 관음전·원통전·보타전 등으로 독립되어 모시기도 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잘 외워도 극락에 가까워질 수 있고, 현세의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을 자비로 구제한다고 하니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보살이다. 또 관세음보살은 손과 눈이 각각 천 개씩 있다하여 천수천안으로도 불린다. 재미있는 것은 불상이나 탱화에 천 개를 전부 표현할 수 없기에 대개는 약식으로 42개만 표현한다고 한다. 광배에 수많은 손이 있고, 그 손마다 눈도 하나씩 달려 있다면 관세음보살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아 자애로운 어머니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은 성별이 모호하여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할 수 없다.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독립적으로 봉안된 경우는 드물고 삼존불상에서만 주로 찾아볼 수 있는 보살이다. 머리에 쓴 보관의 꼭대기 위에는 한 개의 보배병을 이고 있는데, 이 보배병 안에는 세상을 비출 지혜의 광명이 담겨 있다. 대세지보살은 세상의 모든 중생을 자신의 독특한 지혜광으로 비추기도 하고, 삼천대천세계와 마귀의 궁전도 뒤흔들릴 정도의 힘으로 발을 구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까지 만들어지다가 조선 초에는 유행에 밀려 만들어지지 못했다. 다시 16세기에 이르러 제작되는데, 이때는 꼭 보배병을 이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주로 삼존불의 오른쪽 협시보살이면서 연꽃을 들고 있다면 대체로 대세지보살로 여긴다.솔향이 풍기는 길의 끝, 기암절벽의 아래쪽 가운데 사람의 손이 닿기 힘든 동굴 안에 아미타여래삼존이 모셔져 있다.7세기 초반에 창건되었다는 삼존석굴사와 9세기의 양식을 보이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본래는 3층이었으나 지역민의 손으로 재건되었던 독특한 모전석탑도 볼 수 있다. 근처에 조성된 소나무길과 복원된 양산서원까지 군위의 부계면에는 옛 불교의 자취가 남아있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4-03-20

천년의 시간을 머금은, 청도 적천사

청도와 밀양의 경계 짓는 화악산 둘레를 타고 가다가, 한 대의 차량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면, 어느 순간 산자락 중앙에 옴폭하게 자리 잡은 작은 사찰을 마주한다. 산 좋고 물 좋고 인심도 좋다는 청도의 깊은 골짜기에 터를 잡은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4년(664)에 원효대사가 수도하기 위해 토굴로 먼저 세웠다는 천년고찰 적천사(磧川寺)이다.적천사는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래,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심지왕사에 의해 중창되고, 고려 명종 5년(1175)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건되어 500여 명의 수행승이 참선하는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당시 적천사는 도적떼가 점거하고 있었는데, 보조국사 지눌이 남산에 올라 가랑잎에 호랑이 호(虎)를 적어 바람에 날려 보내니, 가랑잎이 호랑이로 변해 도적떼를 몰아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크게 번창했던 적천사는 임진왜란 때 화를 입어 소실되었고, 500여 명의 수행승은 운문사로 옮겨갔다. 현종 5년(1664)에 적천사를 다시 중건하면서 사천왕상을 조성하고, 숙종 20년(1694)에 태허선사에 의해 크게 중수되고, 다음해에 괴불탱 및 지주를 마련한다. 다시 대사찰로 자리매김하던 적천사는 구한말에 의병들의 모임 장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집합소로 활용되면서 축소되었다. 현재는 동화사의 말사 제9교구이다.적천사의 앞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운문사의 처진소나무·천황사의 전나무·송광사 천자암의 곱향나무·내소사의 느티나무처럼 적천사의 암수 은행나무도 절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대단히 강렬한 인상이다. 높이(약 30m)는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도 풍성한 가지에 가려 그 끝이 보이지 않고, 둘레(약 10m)는 성인 여섯 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도 온전한 원을 만들기에 부족하다. 특히 암나무는 대략 3m 높이까지는 한 줄기로 성장하다가 세 갈래로 가지가 나눠지며, 가지 사이사이에 혹이나 방망이처럼 생긴 유주가 발달했다. 한 컷의 사진은 물론 한눈에 담아내기에도 버거운 이 은행나무는 봄이면 세월이 무색하게 새로운 싹을 대거 피워내고, 여름이면 넓고 짙은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풍성한 은행잎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겨울이면 설원 위에 그 유려한 몸매를 드러낸다. 수령도 대략 천년에 가까운 800여 년을 적천사와 함께 견뎌왔으니 살아있는 화석이자 적천사의 역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적천사의 은행나무는 특이하게도 불교의 삼문, 일주문·천왕문·불이문 중 일주문으로 여겨진다. 즉, 적천사에는 흔히 절마다 일자로 세워져 있는 일주문이 없다. 조선 숙종 20년(1694) 절을 중수할 때 세운 비석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선종의 뜻에 따라서 적천사를 중건할 때, 사적기 대신 은행나무를 심어서 창건을 대신하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적천사의 입구에 있는 웅장한 은행나무가 바로 보조국사 지눌이 평소에 짚고 다니던 지팡이였다는 것이다.은행나무를 뒤로 하고 계단을 오르면 두 번째 관문인 천왕문에 들어선다. 적천사의 천왕문에는 목조 사천왕상이 있는데, 부리부리한 눈썹·주먹코·울퉁불퉁한 목주름이 무섭다기보다는 해학적이다. 이는 조선 후기 예술 작품의 특징으로 적천사의 사천왕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소조로 제작되던 사천왕상은 적천사의 사천왕상을 계기로 다시 목조로 바뀌게 된다. 적천사의 사천왕상은 나무 여러 조각을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4구의 어깨 각도나 옷의 주름·몸체의 모양이 거의 일치하여 일정한 제작틀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천왕문을 넘어가면 배롱나무 정원이, 그 뒤로 무차루라는 누각이 보인다. 무차는 ‘막힘이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사상을 드러내는 명칭이다. 이 누각에는 석조아미타불좌상(1653) 3구를 모셨고, 내부의 통창을 통해 대웅전을 바라볼 수 있다. 대웅전 좌우로 적묵당과 명부전이 있고, 대웅전 뒤로는 조사전과 영산전이 있다. 현재 대웅전에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36)이, 명부전에는 석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일괄(1676) 등이 모셔져 있다. 또한 1981년 천왕문 보수를 하다가 사천왕상 안에서 사리, 다수의 경전, 의류, 다라니경 등 대량의 복장기가 발견되었다.천년고찰은 천년에 해당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과 전통과 역사와 문화가 아우러져 이어져 오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승들이 수도하는 공간이면서 찾아오는 이들의 힐링하는 공간이고, 투사들의 모임 장소이며, 여러 번의 소실을 맛본 곳이기도 하다. 오래된 노거수가 지키는 장소이며 또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적천사 경내를 거닐며, 천년을 머금는다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3-06

미디어파사드, 강문화관 디아크

대구와 고령의 경계 지역에는 한눈에도 독특한 건축물이 공원의 낮은 언덕 위에 홀로 놓여있다. 이 건축물은 길고 유려한 곡선미를 자랑하는데, 마치 은빛 고래가 몸체를 위로 치켜들며 배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래의 배부분은 어느 유명 브랜드 가방의 표피마냥 누빈 것도 같다. 실제로 건축가 하니 라시드는 강·물수제비·물고기와 같은 자연의 모습과 한국도자기의 곡선미를 디아크(The ARC·Architecture/Aristry of River Culture)에 담았다고 한다.그러고 보니 물고기가 물 밖으로 튀어오를 때 생긴 물의 수려한 곡선이나 물수제비로 인한 물의 파장과도 닮아있다. 대부분 상자 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축물에 익숙한 막눈에는 그저 신기하고 멋있는 예술작품으로 보인다.디아크는 강의 과거와 현재를 전시하는 강문화관이다. 대구를 관통하는 낙동강과 금호강 같은 강의 중요성을 홍보하고 그에 맞는 작품과 미디어 영상을 전시한다.특히 실내 바닥과 벽면의 디자인 모두 물의 색깔인 화이트와 블루를 활용하여 장식하고 물의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건물 전체가 비정형인 물을 3차원의 공간에 2차원의 영상으로 형상화했다.지하 1층은 상설 전시실과 세미나실이 있고, 1층과 2층은 써클 영상존으로 예술품과 ‘생명의 순환’ 미디어를 감상할 수 있다. 3층은 카페테리아가 위치하며, 루프탑이 있어 낙동강과 금호강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특히 루프탑의 작은 연못은 디아크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또한 건축물의 실내 가운데가 위아래로 뻥 뚫려있어 층간에 답답함이 없다. 마치 고래 속을 탐험하는 피노키오처럼 독특한 실내 공간을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공원과 전시 공간, 전망대와 탁 트인 경관까지 디아크는 물의 이미지를 담아 힐링을 선물하는 정다운 친구가 된다.밤이 되면 디아크는 대구의 랜드마크로써 또 다른 배역을 맡는다. 낮의 친근한 은빛 고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미디어파사드의 화려한 옷을 입으며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한다. 건축물의 은빛 외피가 보라색과 파란색 등 여러 색깔로 변하고 레이저빔이 함께 어두운 밤의 전경에 수를 놓는다. 멀리서도 화려한 색깔로 변신하는 건축물은 무대 위에 홀로 올라선 주인공처럼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현대의 도시는 비슷비슷한 도시들의 경쟁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디어파사드는 이러한 도시의 아이덴티티 구축을 빠르고 쉽게 만들어준다. 미디어파사드는 미디어와 파사드의 합성어로서, 건물 외벽에 미디어 기능이 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물이 디지털 미디어를 융합하여 시각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건축의 형태로 현재는 건축 예술의 종합적인 표현 방법으로 많은 도시에서 활용되고 있다.초기의 미디어파사드는 도시의 건축물에 스크린을 설치하거나 건축물의 벽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광고나 정보, 이미지를 단순하게 표현하고 전달하였다. 현재는 나날이 발전하는 디지털 영상 기술과 대형 발광 스크린 설비의 가격 하락으로 인해 미디어파사드의 적용과 표현 방법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점점 미디어스크린과 건축물이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융합되고 있다.이에 도시의 다양한 정보를 선전하고 홍보하거나,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매개가 되거나, 문화전시 등 예술적 역할을 하거나, 도시의 야경을 풍부하게 하거나,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는데 미디어파사드가 활용된다.베이징올림픽 때 ‘워터 큐브’는 낮에는 수영경기장으로, 밤에는 물거품을 표현한 미디어파사드로 국가이미지를 랜드마크하였다.홍콩은 낮과 다른 매력의 야경 미디어파사드가 유명하여, 이를 구경하려는 관광객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독일월드컵 때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는 고무보트 모양의 건축물을 뒤덮은 미디어파사드로 어떤 팀과 어떤 팀이 경기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하였다.인천항 7부두의 폐곡물창고는 부두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도시 재생의 일환으로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경주의 대릉원에 펼쳐졌던 한밤의 미디어파사드는 도시축제의 또 다른 형태를 제공하여 시선을 끌었다. 대구의 강문화관 디아크는 낮에는 친근한 힐링 공간이자 전시관으로, 밤에는 멀리서도 단번에 보이는 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였다.특히 3차원의 공간과 2차원의 영상을 건축물의 외피뿐만 아니라 전시관이 있는 실내까지 확장하여 미디어파사드를 적용하였다.미디어파사드는 문화·역사·생태 등 다양한 관점에서 도시를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시키고, 산업 발전으로 연결시키며,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며, 이를 폭넓게 공유하기에 적합한 건축과 미디어의 융합 표현 기술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도시의 야경이 미디어파사드로 인해 매력을 더하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2-21

공간스토리텔링, 삼국유사테마파크

인각사의 지붕과 삼국유사 서적의 모양을 형상화한 테마파크의 입구(가온문)를 통과하여 조금 걸으면, 거대한 신화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신화목은 환웅이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땅으로 내려왔던 태백산의 신단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주제로 하는 테마파크의 첫 장소이자 기이하고 환상적인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매우 상징적이다. 일단 방문객들은 17미터나 되는 그 크기에서 한 번,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한 공간스토리텔링에서 한 번 테마파크의 이미지를 마음에 새기게 된다.공간스토리텔링은 ‘스토리나 담화를 반영하여 공간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는 활동으로 서사에서 공간의 특징을 강조하는 이야기 방식’이다. 현재 우리나라 곳곳에 지역문화와 연계되어 조성되는 대부분의 복합적 역사문화공간은 공간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장소들이다. 공간스트리텔링의 이용자들은 어떤 특정한 세계관이나 역사관, 또는 그 공간만의 특별함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재미와 감동은 물론이고, 정서적 만족과 호기심 충족도 이뤄지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공간에 표현된 이야기나 오브제가 관객과 상호소통이 잘 이뤄져야 하고, 타 장소와의 차별성도 필요하며, 디자인이 공간의 주제를 명확하게 표현해 관객의 몰입을 높여야 한다. 또한 체험되는 스토리텔링이 공감이나 감정 이입 등 체험자 자신의 이야기로 승화하여 좋은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 삼국유사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어 다양한 공간스토리텔링의 표현이 가능하다.삼국유사는 고려 승려 일연의 저서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는 역사서이자 신앙·풍속·전설 등 야사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부터 삼국의 역사, 후삼국의 멸망, 고려의 건국 직전까지 들어 있으며, 민간과 사찰에 전해지는 설화도 다수 기술되어 있다.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 왕력에서는 삼국 및 가락·후삼국의 왕대와 연표를, 기이편에서는 고조선부터 삼국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다. 권2 기이편은 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신라와 후백제 등을 기록하였다. 권3 홍법에서는 신라의 불법 전래와 불교 전래·역사와 번성 및 쇠락을, 탑상에서는 탑과 불상의 기록을 기술하였다. 권4 의해는 신라 학승 및 율사의 전기이며, 권5는 신주에서 밀교 신승의 사적을, 감통에서 근행감응을, 피온에서 행적을 감춘 고승을, 효선에서 사람들의 효행과 선행을 기록하였다. 삼국유사테마파크는 삼국유사에 담긴 이야기와 그 역사성·우수성을 재조명하여 핵심 스토리를 중심으로 넓은 부지에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크게는 자연휴양과 놀이·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 문화콘텐츠나 교류·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 역사와 교육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분한다. 역사돔을 중심으로 해룡놀이터와 얼쑤먹거리촌에서는 휴양과 즐거움이 목적이다. 중국 남부에서 구한 대장경을 들고 귀국하던 승려들이 신룡까지 설득해 돌아와서 해룡왕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혜통미로에서는 혜통스님을 따라 곳곳에 숨은 도둑을 잡아 볼 수 있다. 죽엽군 수련마당과 승마장 등에서 단체 교류나 수련활동도 체험할 수 있다. 죽엽군이란 이름은 신라 미추왕때 전쟁을 도운 의문의 군대가 미추왕이 보낸 대나무군이었다는 전설에서 따온 것이어서, 신라의 화랑들처럼 화랑정신을 갈고 닦길 바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역사와 교육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신단수를 지나 운사의 구름쉘터 양옆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왼쪽으로는 박혁거세의 신화를 표현한 알 건축물과 보살을 모티브로 한 영웅신화길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웅녀동굴과 벽면을 따라 고조선부터 삼국과 발해까지의 건국이야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지인 폭포에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의미하는 세 줄기 물이 합쳐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감은못은 문무대왕릉을 축소하여 그 중앙에 형상을 놓은 연못으로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만파식적과 마주 보고 있다. 바다를 건너 일본의 왕과 귀비가 된 연오랑세오녀 분수나 지증왕때 울릉도를 정복하기 위해 만든 지철로사자상 전망대 등 대중적인 설화는 현실 공간에서 재미를 더한다. 또한 향가 14수를 주제로 헌화가·서동요·우적가의 공간과 소원을 비는 단을 마련한 향가원도 좋은 공간스토리텔링이다. 특히 헌화언덕은 성덕왕 때 한 노인이 아름다운 수로부인에게 절벽에 핀 철쭉을 바치며 부른 헌화가를 상징하는 곳으로 철마다 꽃들이 장식되어 아름다움을 더하며, 꼭대기에 올라가면 바람개비와 탁 트인 정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가온누리관은 삼국유사관·설화체험관·일연대선사관·신화서클 영상관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많은 부분을 만화의 형태로 전달하고 있다.삼국유사테마파크에는 방대한 삼국유사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굵직한 이야기들이 그 몸체를 드러내고 있다. 환상 세계로 들어섰던 신단수를 지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며 삼국유사가 어렵지 않았던 까닭을 곰곰이 되돌아본다. 들은 적은 많지만 다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일연의 삼국유사를 공간스토리텔링으로 쉽게 풀어 놓았고, 체험과 놀이가 접목되어 있어 재미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2-07

아낌없이 주는, 모감주나무

나무 끝에 매달린 꽈리 모양 씨방이 바람에 흩날린다. 짙은 갈색의 씨방은 곧 세 개로 분리되어 멀리 떠나간다. 각각의 씨방에는 검은 알맹이가 하나둘 붙어 있다. 물에 떨어지면 항해하는 돛단배가 되고, 바람이 불면 하늘을 나는 패러글라이딩 선수가 된다. 뿌리를 내리기 위한 생존 여행을 시작한 모감주나무 열매는 자연을 항해하며 자신이 안착할 장소를 찾는다.모감주나무는 한국에서는 서해의 안면도와 남해의 완도 그리고 포항 등에서 군락을 이룬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로 바람이 많이 부는 해안선을 따라 번식하고 있는 나무로 중국이나 일본 혼슈 해변에서도 발견된다. 과거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되고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고유 자생종으로 인정되고 있다. 또한 모감주나무는 세계적인 희귀종으로 여러 나라에서 관상수로 많이 심어지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평양의 백화원에 방문했을 때 기념식수로 모감주나무를 심기도 했다.모감주나무는 장마철이 다가오면 노란꽃이 황금처럼 떨어진다하여 황금비나무 또는 금우수(金雨树), 검고 딱딱한 열매(금강자)로 염주를 만든다하여 염주나무, 나무에서 노란 돈이 떨어진다는 요전수 (摇钱树), 불교와 관련 있는 보제수 또는 보리수, 환자가 없다는 뜻으로 무환자(無患子)나무, 열매를 비누대용으로 사용하여 비누나무라고도 불린다. 모감주라는 이름은 무환자의 옛말 ‘모관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중국의 고승 ‘묘감’이 염주를 만들었다하여 묘감주나무라 불리다 모감주나무가 변화되었다고도 하며, 보살의 가장 높은 경지인 묘각(妙覺)에서 유래한 말이라고도 한다. 무엇이든 예부터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혜택을 준 쓰임이 많은 나무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포항은 1992년 12월 23일 발산리의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군락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8~49미터까지 자라고 해안가의 평지나 산의 사면에도 잘 자란다. 포항 군락지는 교목층이 62%, 아교목층이 66.3%, 관목층이 37.3%, 초본층이 80.3%로 타 군락에 비해 생존율이 높고 고사비율이 낮은 편이다. 기름새·까마귀밥나무·쥐똥나무·복사나무·주름조개풀·으름덩굴 등도 함께 잘 자란다. 번식은 주로 종자가 날아가 뿌리를 내리는데, 햇빛을 좋아하고 바닷가의 염분과 공해에도 강하며, 척박지에서도 잘 자란다. 6~7월에 걸쳐 노란색의 꽃을 피우고, 9~10월에 길이 4~5센티미터 정도의 씨방이 열리고, 그 안에서 씨앗이 검게 익어간다. 다 익은 열매는 매우 딱딱하여 닦으면 윤기가 흐르고, 말리면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덜 말랐을 때 줄로 꿰어 놓으면 염주를 만들 수 있다. 모감주 씨방은 가지 끝에 꽈리 모양으로 조롱조롱 달려있다. 열매가 익으면서 꽈리가 벌어지고 세 조각으로 분리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씨앗들은 각각의 꽈리 조각의 오른쪽 혹은 왼쪽에 조금 치우쳐 붙어 있다. 씨방 조각이 바람에 흩날려 나무에서 멀어지면 씨앗은 씨방의 아래쪽에 위치하여 무게 중심을 잡는데, 가벼운 쪽 씨방이 바람에 살짝 들리면 그 아래로 공기가 빠져나간다. 패러글라이딩 선수가 허공에 체류하는 시간을 길게 할 때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땅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것처럼 열매도 빙글빙글 돌면서 나무에서 멀리 더 멀리 떠나간다. 실제로 초속 3미터의 바람을 타고 150미터는 가뿐하게 날아간다. 또한 모감주나무 씨방은 물에 뜬 채로 가라앉지 않는다. 살짝 굽은 씨방의 형태를 따라 공기 방울이 생기고 부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씨방은 꼭 뾰족한 부분이 앞을 향하도록 자세를 스스로 잡는다. 씨방 가운데의 딱딱한 부분이 배의 키처럼 방향을 일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모감주나무는 예부터 울타리 안에 심으면 귀신을 물리치고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다하여 신통한 약재로 여겨졌다. 진균 억제 작용으로 각종 염증 완화에 좋고, 안토시아닌이 풍부하여 안질환에 탁월하다. 항산화물질로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고 혈관건강, 노화억제, 면역력 강화에도 좋다. 탄닌성분이 많아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해독 작용도 뛰어나다. 열매는 염주로 만들고, 비누대용으로 쓰인다. 꽃과 잎은 황색 물감의 염료로 사용되기도 하고, 약재로도 활용된다.고규홍 나무칼럼리스트는 “자연을 보면서 시간을 가늠할 때 모감주나무는 장마를 예상하게 해주는 나무”라고 하였다. 성석제는 그의 소설 ‘단 한번의 연애’에서 “꽈리 모양의 모감주나무 열매는 곧 세 개로 갈라지고 둥글고 까맣고 윤기가 나는 씨앗이 튀어나와”라 표현하였다. ‘동의보감’에는 “씨 속에 있는 알맹이를 태워서 냄새를 피우면 악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신농본초경’에서는 독이 없다고 하였으며, ‘명의별록’에서는 적목 치료에 쓰인다고 나온다. 자연이 주는 혜택은 손으로 꼽을 수 없지만 모감주나무는 예부터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이제는 우리가 보호해야 할 희귀한 자연이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4-01-16

노래와 놀이 그리고 춤, 월월이청청

예부터 달이 유독 청청한 밤에는 달빛 아래에서 전통 가무를 즐겼다. 본래 전통 가무는 노래와 놀이 그리고 춤이 따로 떨어지지 않고 모두 어우러져 행해졌다.주로 가장 생산성이 왕성하다고 평해지는 젊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원형·선형·나선형 등의 형태를 그리면서 집단으로 놀았는데, 보름날에 달을 닮은 춤을 춘다는 점에서 풍요와 다산을 축원하는 축제로서 행해졌다. 특정 지역이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전라도의 강강술래·안동의 놋다리밟기·포항과 영덕의 월월이청청이 가장 유명하다.월월이청청은 경상북도 대부분, 경상남도와 강원도 접경에서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중 포항과 영덕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포항은 ‘월월이청청’, 영덕은 ‘월워리청청’, 안동은 ‘얼얼이청청’, 구미는 ‘널널리청청’ 등으로 불렸다. 놀이 이름을 한자로 칭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사투리가 섞이면서 여러 형태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월월이청청은 하나의 춤이 아니라 마당놀이처럼 여러 춤이 이어져 행해진다. 포항에서는 월월이청청·달넘기·외따기·재밟기·대문열기·실꾸리 감기와 풀기·생금생금 생가락지 등이 전해지며, 영덕에서는 월월이청청·달넘세·절구세·대문열기·산지띠기·동애따기·재밟기·생금생금 생가락지·재바재바·실꾸리 감기와 풀기 등이 확인되었다.원형, 나선형, 단선형, 대선형, 교차형 등 춤의 형식은 다양하다. 원형무에 속하는 월월이청청은 도는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개 오른쪽으로 먼저 돌기 시작한다. 춤을 추다가 방향을 바꾸거나 더러는 원을 좁혔다가 다시 넓게 펼치기도 한다. 느린 장단에서 점점 속도를 빨리하며 나중에는 옆 사람의 손을 놓치거나 댕기가 하늘로 솟구칠 정도로 활동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달넘세, 실꾸리 감기와 풀기는 나선무에 속한다. 원의 안쪽에서 바깥 방향으로 타 넘거나 팔과 팔 사이를 통과하는 형태로 춤을 춘다.처음 나선형을 이루던 행렬은 점차 커지다가 마침내 다시 원형이 되거나 뭉쳐져 있던 형태가 풀리는 형태를 취한다. 달넘세의 “달 넘세 달 넘세 달이나 쿵쿵 달 넘세”라는 후렴구에서 알 수 있듯이 원형은 모두 이지러졌다가 다시 완전해지는 달의 형태 변화를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수적인 놀이에 속하는 단선무형은 산지띠기, 동애따기, 재밟기, 대문열기 등이 있다. 산지띠기는 어미 소에게서 송아지를 떼는 것이고, 동애따기는 동아(식물)를 따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일상생활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꼬리잡기와 닮은 놀이인데, 모두 떨어질 때까지 한 사람씩 떼어낸다. 재밟기의 ‘재’는 ‘지애’의 축약형으로, 지애는 기와의 사투리이다. 등을 구부린 채 앞사람을 잡은 형상이 마치 연달아 놓인 기와처럼 보인다. 가장 뒷사람부터 차례로 굽혀진 등을 밟고 지나가면서 느린 장단으로 노래를 부른다. 대문열기는 대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손을 내리거나 올리는 것으로 대문의 모양을 만들며, 한 사람씩 대문 안에 가두는 형태도 드러난다.연행에서의 노래는 선후창의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즉흥성이 강한 편이다. 대개는 미혼 여성의 사랑을 노래한 경상도의 보편적인 서사민요의 내용을 담고 있다.월월이청청의 “토연토연 김토연아”는 토연이라는 처녀와 서울 선비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고, “생금생금 생가락지”는 정조를 의심받은 미혼의 여동생이 죽기 전에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하는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재바재바”는 생금생금 생가락지의 일부분을 따로 떼어 노래한 것이고, 대문열기는 “서울이라 남도령아 대문 조금 열어주소”에서 알 수 있듯이 남도령이라는 미혼 남성이 살고 있는 집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미혼 여성들의 사랑이 노래의 서사로 쓰였다.강강술래는 미혼의 청춘남녀가 설·대보름·단오·백중·추석·중구 등 다양한 날에 개방적인 장소에서 행해진 놀이이고, 놋다리밟기는 혼인 여부를 가리지 않은 젊은 여성이 대보름에만 연행한 행사였다. 월월이청청은 담장이 있는 넓은 마당에서 설·대보름·이월 초하루·추석 등에 미혼 여성을 중심으로 연행되었다. 노래와 놀이와 춤이 함께 전승된 전통 가무는 다른 도구 없이 손만 마주 잡고 연행된 여성 중심의 집단유희이다. 이러한 전통 가무는 마을마다 전승되다가 일제강점기에 다른 대동놀이와 마찬가지로 축소 진행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 전승이 끊기다시피 사라졌다가 일부 마을에서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을 지금의 형태로 복원하였다.월월이청청과 같은 전통 가무는 예전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황에 맞게 변형되어 즐기는 축제였다. 노래 또한 주고받는 형식으로 재미를 더했으며, 고난도의 동작이 없어서 배우기도 쉬웠다.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축제 문화의 매개체로 활용될 수 있으며, 학교에서는 또래 집단의 교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복원을 넘어서 현재의 젊은 층까지 즐길 수 있는 문화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2-25

다양한 박제와 표본, 경북대학교자연사박물관

경북대학교자연사박물관은 국내 최초로 국립대학에서 개관한 곳으로 보유한 자료에 비해 전시 공간이 넓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2021년 기준으로 국내 자연사박물관이 15개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알차게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자연사박물관은 주로 지구에 존재하는 자료 및 표본을 수집하고, 수집된 자원을 보존·복제·복원·대여 등을 통해 지구의 다양한 자원자료센터로 기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 관련 연구를 지원함을 물론 전시와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과 인문처럼 ‘우리 곁의 지구’를 이해할 수 있게 호기심을 유도한다. 이는 지구라는 주제를 큰 틀에서 이해하고, 자연 속의 인간을 인식하게 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표본들은 생태환경 연구에 필수적인 연수자료다. 종의 식생활이나 번식 방법·성장 속도·수명·진화의 형태 등 연구할 분야는 무궁무진하며, 생물 산업과 연구가 중요해지는 미래산업 발전의 측면에도 국가의 중요한 경쟁력으로서 든든한 발판이 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분야는 인문과 예술에 비해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지, 현재 국내 자연사박물관의 방문객 수는 일반 박물관에 비해 높지 않게 조사되었다.경북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은 작은 공간에 많고 다양한 표본을 전시하고 있다. 상설 전시로 물속생물관, 공룡화석관, 지질암석관, 곤충관, 식물자원관, 체험영상실, 조류생태관, 야생동물관을 운영한다. 물속생물관에서는 연체동물과 어류·파충류·포유류의 액침표본과 고래 뼈 등과 같은 골격표본과 일부 박제표본을 볼 수 있다. 특히 은은한 불빛 아래의 액침표본은 하교가 끝난 학교 과학실을 떠올리게 해 상상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공룡화석관은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 발자국 화석과 공룡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재현된 발자국을 보고 나서 ‘의성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 등과 같은 실제 화석을 본다면 좀 더 명확하게 무엇이 발자국인지 알화석은 어떤 형태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지질암석관은 화강암·퇴적암·변성암 등 주요 암석과 지질 변화의 형태를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신기한 암석은 지구상 가장 오래된 화석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샤크만에서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시아노박테리아(청녹조류)가 성장하고 죽는 과정에서 퇴적물이 줄무늬 층으로 드러난다. 이 암석은 지구 초기 생명이 탄생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며, 박테리아나 미세조류의 진화 과정까지도 연구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월·인천·경산에서 이 암석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곤충관은 국내산 나비와 다양한 곤충들 그리고 외국의 화려한 곤충들의 모식표본이 전시되어 있고, 채집 관련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식물자원관은 양치식물·겉씨식물·속씨식물 등 식물에 대한 분류 설명과 식물표본 그리고 종자를 관찰하는 현미경이 마련되어 있다. 체험영상실은 자연사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거나 체험학습 및 교육프로그램을 위한 강의를 한다. 조류생태관과 야생동물관은 다양하고 많은 박제가 있다. 철새·텃새·물새·맹금류·황새·느시·수리부엉이·큰고니 등 새와 호랑이·반달가슴곰·고라니·족제비 등 동물이나 멸종위기종의 박제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이 두 전시관은 온라인 전시 ‘더브-살다’와 ‘한반도 최고 포식자’와 연계되어 있는데, 쓰레기로 죽어가는 지구와 환경보존 그리고 박제된 동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인간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코트나 가방이 된 동물들을 보면서 환경보호에 관해 이해하고, 먹이 사슬의 강자인 호랑이와 그 먹이 사슬 아래에 놓인 동물들을 통해 생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호랑이는 앞발 펀치가 장점이라서 들소의 목을 한 방에 꺾을 수 있으며, 38킬로미터로 달리는 우사인볼트도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는 속력을 낼 수 있다. 호랑이와 땅의 소유권을 경쟁하던 조선시대에는 호랑이발톱으로 액운을 방지하는 노리개를 제작하여 차고 다녔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호랑이의 사자후와 같은 초저주파를 활용해서 적의 구토와 어지러움증을 유발하고, 기지를 방어하기도 했다.인간의 문명과 과학기술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코끼리·여우·고래·벌·거북이·나무 등을 사라지게도 살아가게도 할 수 있다. 500년 동안 없어지지 않는 플라스틱·동물의 올무가 되는 빨대나 비닐·동물을 죽이고 뺏은 옷과 가방 등은 지구 온난화·해수면 상승·긴 장마·가뭄·물부족·미세 플라스틱 축적 등 현재 닥친 환경문제와도 직결된다. 과학 전시는 이러한 것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다만 국내 자연사박물관이 많은 편이 아니고, 규모 또한 크지 않으며, 체험이나 메타버스를 활용한 현재 박물관과 전시관의 전시 형태나 쌍방형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프로그램이 부족한 편이라는 점이 아쉽다. 전시물에 대한 적극적인 해설과 다양한 실험과 같은 프로그램도 부족해 보였다. 미래는 융합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고, 자연사박물관은 과학융합적 사고에 도움이 될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적극적이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의 운영으로 과학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2-18

치열했던 공방전, 영천전투

영천은 한국전쟁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자 치열한 전쟁터였다. 1950년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온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영천전투는 보현산을 넘어 영천을 점령하려 한 북한군 제15사단을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이 9월 5일에서 13일까지 전력을 다해 공방전을 펼치고 끝내 영천을 확보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한 대승리로 평가받고 있다.1950년 7월 14일 북한군이 금강 방어선을 넘자 워커 장군은 낙동강방어선을 말하며, ‘만약 이 선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면 연합군과 한국군의 반격 작전은 실패할 것’이라 강조했다. 북한군은 8월에 다부동과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영천을 점령 후 다시 대구나 경주로 진격하고자 했다. 만약 영천이 점령되면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방어선을 지키기 어려울 수 있으며, 만약 경주로 진격한다면 부산교두보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영천은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하는데 핵심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비가 쏟아지던 9월 5일 새벽 1시, 북한군 제15사단은 전차 5대를 앞세워 총공격을 해왔다. 국군은 북한군에게 밀리다 분산 철수를 단행한다. 육군은 속절없이 뚫린 제8사단의 배속을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변경하여 병력을 보충한다. 9월 6일, 영천은 완전히 북한군의 차지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군은 북한군에 밀렸음에도 다시 공격하여 영천을 탈환해 낸다. 또한 신녕의 317고지에서도 북한군을 방어해 낸다. 영천과 신녕을 차지하지 못한 북한군 제8사단은 전멸 상태로 패퇴하였다. 9월 7일, 국군은 일대를 수색하여 북한군 보급 차량 30여대를 파괴하고, 제73연대를 격멸하며, 139고지-130고지를 차지한다. 9월 8일, 북한군 제15사단이 다시 총공격을 감행하나 국군의 방어로 실패한다. 9월 9일, 국군 제8연대는 대구로 향하던 북한군을 저지하고 영천 시내로 진격한다. 이 과정에서 제5연대가 임포터널에 숨은 북한군 제15사단 포병연대를 섬멸한다. 9월 10일, 영천에서 경주 사이의 도로를 확보한 국군 제2군단은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시작한다. 제7사단과 제8사단을 중심으로 자포동·도림동·완산동으로 진출했다. 또한 제19연대와 제21연대에서 적의 연락군관 2명을 생포하여 북한군 사령부의 위치를 파악한다. 9월 11일, 대의동에 위치한 북한군 제15사단의 사령부를 성공적으로 공격한다. 9월 12일, 북한군 제15사단은 전차·자주포 그리고 병력의 반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국군은 이를 계기로 자천을 탈환하였다. 9월 13일, 영천에서 북한군의 위협이 사라지자 국군 제8사단은 전술지휘소를 영천으로 북상시켰다. 9월 15일, 기다리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영천전투는 미군이 북한군의 8월 공세 후 인천상륙작전에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는 과정에서 허를 찔려 발생한 공방전이다. 북한군이 전력을 특정하여 집중하던 8월과 달리 9월에는 여러 방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해 혼란을 유발했었다. 전달과 다른 전략으로 인해 처음에는 한국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영천을 비롯해 낙동강방어선이 밀려 위험해졌었다. 그러나 한국군이 북한군의 전략을 파악하고, 가용 전력을 끌어모아 반격을 시작하자 북한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게 된다. 이러한 영천전투의 승리는 낙동강 등 병참선의 안정적 공급을 보장했고, 이는 앞으로 수행될 국군과 유엔군의 작전 성공 가능성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불리는 국군과 유엔군의 북한군에 대한 총반격도 낙동강방어선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영천전투는 한국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영천에는 전투와 관련된 장소가 여럿 마련되어 있으며, 언제든 방문하여 그들을 기릴 수 있다. 한국전쟁의 참전용사들을 비롯한 영웅들이 영천호국원에 잠들어있고, 전투호국기념관에서는 그 치열했던 역사를 둘러볼 수 있다. 또한 창구동 산자락에는 영천전투를 체험할 수 있는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가 있다. 전투전망타워 1층에서는 간략하게 영천전투의 역사를 살피고, 2층 전망타워에서 영천시가지를 한눈에 담아본다. 야외에 마련된 시가전체험장·연병장·고지전체험장·국군훈련장에서 군사훈련과 서바이벌게임을 체험하며, 공원에 마련된 길을 따라 민족통일염원비·영천지구전적비·영천지구전승비·충혼탑을 둘러보며 참전용사들을 기린다. 다만 아쉬운 점은 체험프로그램이 단체 위주로 편성되어 있어 개인이 참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영천전투와 관련 있는 장소를 방문하고 체험한 이들은 오랫동안 전쟁영웅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체험의 문이 개인에게도 활짝 개방되는 날을 기다려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2-11

최적의 은거지, 묘골 마을과 육신사

대구에서 북서쪽 끝자락에는 순천박씨의 종택과 육신사·도곡재·태고정 등 유교문화재를 품은 묘골이라 불리는 전통 마을이 있다. 이곳은 길게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마을 입구가 겨우 보이는 곳으로, 밖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을 막기에 적당히 높은 산자락이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그 옴폭하게 들어간 땅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묘골 마을은 남동쪽의 입구만이 열려있어 은거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묘골 마을은 사육신 중 유일하게 혈육을 남긴 박팽년(1417~1456)의 후손들이 은거하여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꾀해 세조에 의해 멸문당한 집현전 출신 학자다.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경회루에 뛰어들어 항거했으며,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공문서에 ‘신(臣)’이란 글자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단종에 대한 신념을 지켰다. 세조는 지조를 잃지 않은 박팽년의 정신을 높이 보고, 그를 형조참판으로 곁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은 1456년 6월, 세조를 주살하려 성삼문·하위지·유응부·이개·김질·유성원 등과 같이 역모를 모의한다. 역모가 김질의 배신으로 새어 나가면서 사육신들은 긴급 체포되었다.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능지처사되고, 삼대가 극형을 받았으며, 그들의 부인들은 공신들의 노비나 관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가문도 멸문지화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는 친정아버지 이철근이 현감으로 있는 인근의 관비로 올 수 있었다. 당시 성주이씨는 박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이에 세조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해 늦가을 아들을 낳았으나 다행히 여종도 딸을 낳았고, 둘은 비밀리에 자식을 바꿔 키웠다. 그가 천행으로 태어난 유복자, 박비(朴婢)였다. 성종 3년, 이모부 이극균(1437~1504)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묘골 마을에 왔다가 박비의 사연을 알게 된다. 이극균의 권유로 박비는 자수하게 되고, 성종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옥구슬’이란 뜻을 담은 이름 ‘일산(壹珊)’을 지어주며, 정3품 당하관 벼슬을 내려준다. 이렇게 박팽년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혈통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일산은 후손이 없었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99칸의 종택을 짓고 현재의 묘골 마을에 정착하여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입향조가 된다. 이때가 성종 10년경(1479년)이다. 이후 성종 때 정계에 형성된 사림들이 사육신의 신원을 회복시키려 노력했고, 숙종 17년(1691년)에는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의 관직이 모두 회복된다. 박팽년은 영조 때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고, 정조 17년(1791년)에 어정배식록에 오르면서 충신의 명문가로 알려진다. 달성의 낙빈서원에서 배향되다가 1982년 육신사가 건립되면서 숭정사에서 사육신과 함께 배향된다.묘골 마을에는 순천박씨의 종택은 물론 사육신을 모시는 육신사와 여러 전통 가옥이 남아 전통 마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육신사는 단종복위운동으로 멸문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박팽년만 배향했는데, 그의 제삿날 후손 박계창이 사당 앞에서 서성이는 6명 어른들의 꿈을 꾼 후 사육신 모두를 제사 지냈다고 한다. 이후 낙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모셔 오다 고종 3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낙빈서원과 함께 철폐되었다.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봉안하고, 충효 위인들의 유적 정화사업(1974~5)으로 육신사를 건축하게 되었다. 1981년 육신사는 관리사·외삼문·삼충각·숭절당 등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도곡재는 정조 2년(1778)에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웠으나 정조 24년(1800)경에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도곡재라 불렸다. 삼가헌은 박광석이 1783년 이주해 와서 초가를 지은 곳이다. 삼가(三可)란 중용의 9장에 나오는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을 말하는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문칸채·사랑채·안채·연못·별당이 소속되어 있다. 태고정은 순천박씨 종택이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재건되면서 세워진 정자이다. 대청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방이 있는 부분은 확장된 박공지붕이다. 방 앞에는 태고정(太古亭), 대청 앞에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을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후대가 이어진 박팽년의 후손 박일산이 터를 잡은 곳이다. 노비의 신분으로 숨어 살다 순천박씨의 입향조가 되기까지 최적의 은거지가 되었던 이곳은 지금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찾아가야 볼 수 있는 숨겨진 마을이다. 박팽년과 그의 후손을 찾아가는 길이 그들의 지난했던 이야기만큼 구불구불 산세를 따라 길게도 이어져 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2-04

길 위의 작품, 청송 객주문학관

소설 창작을 위해 5년 동안 전국의 장터와 옛길을 다니며 자료를 조사한 소설가가 있다. 김주영 소설가는 1979년 6월부터 1984년 2월까지 ‘객주’를 신문에서 연재하면서, 한 달의 절반 이상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길 위의 삶을 살았던 조선 말 보부상들을 주인공으로 삼기 위해 작가 스스로 옛 보부상의 길을 따라 쫓으며 길 위에서 작품을 써 내려갔다. 그에 대한 자료는 청송의 객주문학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소설 ‘객주’는 총 3부 9권과 2013년 10권을 발간하면서 완간되었다. 1부에서 3부로 갈수록 폐쇄적 배경이 열린 배경으로 변화하고, 개인적 사건이 국내·국제적 사건으로 확장되고, 인물의 인식이 개인에서 민족주의까지 변화하게 된다. 1부는 보부상들의 걸음에 맞춰 그려낸 그들의 옛길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다. 작은 언덕부터 소소한 갈림길 그리고 ‘밥때’에 머물던 장소까지, 실제로 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가 소설 속에 들어 있어 작가의 노고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문경·상주·안동·예천·연산·강경·전주·군산포·하동·구례·전주 등 삼남을 종횡무진 다님에도 결코 ‘삼남’을 벗어나지 않는다. 신분도 사농공상 중 가장 낮은 ‘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며, 다루어지는 사건들도 상행보다는 개인적인 복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소설 속 최돌이의 살인사건이 지역의 권력층에 의해 위조되고 덮이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건 또한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폐쇄적인 배경에서는 시간적 배경도 큰 의미가 없다. 소설에서도 3권의 “무인 섣달(1878년 12월)”을 보고서야 거꾸로 유추하여 1권이 1878년 가을이고, 2권에서 “6월 수해”가 언급되므로 그해 겨울임을 확인할 수 있다.2부는 서울과 송파를 오가는 길이 배경이 된다. 서울은 과거에도 우리나라의 모든 것의 중심이자 전국을 연결하는 심장이었다. ‘객주’에서는 서울과 송파를 오가는 길을 다양하게 드러내면서 길이 한정적이지 않고 서울로 이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서울은 민씨 일가가 세력을 떨치는 곳이자 거상 신석주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신석주는 세곡선을 운항하면서 민씨 세력의 곳간을 책임지고, 민씨 세력은 신석주의 뒷배가 되어준다. 1부에서 일개 보부상에 불과했던 길소개는 신석주의 아래에서 성장하여 민씨 세력에 기생하는 상인으로 성장한다. 그 대척점에는 마찬가지로 일개 보부상이었던 천봉삼이 있다. 천봉삼은 길소개의 악행을 보고, 나라에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은 모두 권력층의 탐욕으로 인한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또한 2부의 시간적 배경은 1부에 비해 비교적 쉽게 유추할 수 있다. 4권은 “기묘년 3월 중순(1879년 3월)”에서 약 보름의 일을 기록한 것이고, 5권은 “세곡선이 군산포를 떠난 것이 4월 스무사흘날”이라 명시하였다. 7권에서 “경진년(1880년)”으로 바뀐 부분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6권은 1879년 겨울까지 그려져 있다. 2부는 소설의 3부에 발생하는 임오군란 전에 상인 세력이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므로 비교적 1부보다는 시간적 배경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3부는 다른 권에 비해 역사적 사건이 드러나 시간적 배경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영남 만인소 사건(1881년 2월)·이재선의 역모(1881년 8월)·임오군란(1882년) 등 실제 사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대비되게, “민영익이 부보상을 이용하여 군란을 제압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온다는 소문과 대원군이 서울 백성을 무장시켰다”는 실록의 간단한 기록을 토대로 상상력이 가미한 사건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에서 민씨 세력은 보부상을 이용하여 서울군란을 진압하고자 하지만 천봉삼은 그와 반대되는 선택을 하여 보부상과 민의 부딪힘을 무마시킨다. 보부상의 조직이 임오군란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조직으로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길소개는 몰락하고 천봉삼의 세력은 원산진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9권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지로 선정된 원산진이 배경이다. 원산진은 근대의 상징이자 조선 침탈의 기지가 되는 곳으로, 왜상이 곡물을 해외로 반출하여 국내 쌀값을 폭등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천봉삼 일행은 왜상에게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다 도리어 타격을 입고 투옥된다. 사형은 면하나 9권은 1883년 추분 이전에 끝을 맺어 아쉬운 결말을 남긴다.청송 객주문학관은 ‘객주’를 중심 테마로 삼아 공간을 꾸민 곳이다. 소설가가 소장했던 자료나 간행되었던 책 등이 있고,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작가의 필체로 쓰인 옛 원고 일부와 전국의 시장을 누비던 카메라 등과 같은 개인 소장품을 통해 집필하던 당시의 환경을 상상할 수 있다. ‘객주’체험 영상과 민속관도 흥미를 더한다. 길 위에서 생생하게 그려낸 ‘객주’의 발자취를 따라 전시실을 돌며 소설의 장면들을 되돌아본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1-27

영원히 빛나는, 한 장군과 여원무

“행객이 길 멈추고 노도 소리 듣고선/ 왜구들 죽이는 장군을 대하는 듯/칼자욱은 어제일 같이 반석에 남아있고/장한 업적은 천추에 빛나리//당시의 공열은 세상을 진동했고/그 충정 천년토록 늠름도 하네/지금까지 장군의 이 전하고 있어/단오 때의 여원무는 영원히 빛나리”경북 경산 자인면에서는 지역을 수호하는 신으로 ‘한 장군’을 모시고 제의를 지내고 있다. 자인면 서부리의 진충묘에서는 ‘한장군대제’, 마곡리·현내리·광석리 3개 마을에서는 ‘한묘제사’, 자인면 원당리·용성면 대종리와 가척리 등에서는 ‘한당제사’로 불리는데, 모두 한 장군과 그의 누이를 기리는 유서 깊은 행사이다.9세기 전후 신라 때 자인의 도천산에는 왜구들이 성을 쌓고 기거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다. 한 장군은 그의 누이와 함께 버들못가에서 꽃관을 쓰고 여원무와 배우잡희의 놀이판을 벌이고, 못에 배를 띄워 호사스러운 광경을 연출했다. 성의 왜구들은 신비한 놀이판에 유인되어 칡으로 만든 그물과 한 장군의 칼에 섬멸되었다. 지금도 버들못가에는 왜구의 목을 자를 때 남은 칼자국이 돌에 남겨져 있는데, 이를 검흔석 혹은 참왜석이라 부른다. 한 장군이 죽은 후 자인면에서는 여러 사당을 세워 수호신으로 모셨으며, 여원무를 통해 한 장군 남매를 기리고, 죽은 왜구를 위무하는 제의를 이어갔다. 진충묘는 주민들이 도천산의 서쪽 기슭에 한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신당이다. 그러나 일제 당시 철거당하고 그 자리에 일본 신사가 세워졌다. 광복 이후 북서리에 있던 한당을 이건하여 진충묘로 삼았다. 현재 자인계정숲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북서리에서 이건된 진충묘와 자인중고등학교에서 발굴 후 만들어진 한 장군 묘소를 자연스럽게 둘러볼 수 있다. 1968년 8월 자인면에서는 제법 큰 규모의 석실묘가 발견되었다. 두개골이 포함된 유해와 은으로 장식한 갑옷·투구·녹슨 철제창·많은 토기류가 발굴되었는데, 한 장군의 묘소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듬해 자인계정숲 내에 유해를 모시고, 유물은 박물관에 보관하였다.매해 음력 5월 5일이 되면 자인계정숲을 중심으로 한 장군과 관련된 제의-한묘대제·여원무·호장굿·자인팔광대·큰굿-가 치러진다. 한묘대제는 한 장군의 묘소와 그의 사당에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여원무는 한 장군 남매를 기리고, 죽은 왜구를 위무하는 춤으로 커다란 화관으로 유명하다. 호장굿은 호장을 앞세워 한 장군과 관련된 장소를 돌아다니는 가장행렬이다. 자인팔광대는 8명의 광대가 3막을 구성하는 자인만의 전통 탈춤이다. 양반의 이중적인 모습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다른 지역의 탈춤과 달리 양반의 권위와 조강지처에 대한 가부장적 사상이 드러난다. 큰굿은 무속인들이 시중당 앞에 모여 부정굿·산신맞이굿·천왕맞이굿·칠성맞이굿·조상축원굿·장군맞이굿·사자풀이굿을 지내는 것이다.여원무는 한 장군이 여장을 하고 누이와 함께 춤을 추어 왜구를 섬멸했던 춤이다. 제의적 의미에서 자인면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온 기록이 남아있으며, 현재는 1969년 무보를 마련하면서 복원된 것이다. 여원무은 악사들의 풍악에 맞춰 10척(3m)이나 되는 화관을 한 장군과 누이가 들고 중앙으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남매는 중앙에서 덧배기가락에 맞춰 춤을 추다 화관 속에 숨는다. 뒤를 이어 여장한 무동 두 명과 무부들이 화관 주위를 돌며 굿거리장단에 맞춰 원을 그린다. 무동은 한 손에 꽃가지를, 다른 손에는 박을 들었다. 무동춤이 이어지다가 다시 화관에 숨어 있던 한 장군 남매가 나와 도드리장단에 맞춰 화관무를 춘다. 한 장군은 오른쪽에서 누이는 왼쪽에서 양손으로 화관을 잡고 회전하면서, 화관의 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동작을 크게 하며 춤을 춘다. 회전을 반복하는 춤을 춘 후 다시 화관에 숨는다. 이어 다른 무부들이 등장하여 굿거리장단에 맞춰 다른 원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전체 등장인물이 춤을 추며 원무를 그린다. 대개 여원무는 3개의 동심원을 그리는데 그 크기가 18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쓰이는 2개의 화관 무게는 30~40kg 정도이며, 5종의 꽃으로 8개의 가지를 부채꼴로 만들어 500여 개의 종이꽃을 달아 크고 화려하게 만든다. 덕분에 한 장군과 누이는 여원무에서 화관에 가려지고, 사람보다는 꽃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의 전 화관은 신성하게 여겨 접근이 금지되어 있지만 제의가 끝이 나면 남녀노소가 풍년·제액·치병을 위해 꽃을 따다 집안에 두었다고 한다.자인면의 수호신 한 장군은 신라와 고려 사이의 인물로 보인다. 그가 왜구를 물리친 이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온 제의는 경산 자인의 특색을 알리는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화려하고 커다란 꽃관이 커다란 원무를 그리는 무부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꽃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여원무가 지역을 대표하는 춤이 되어 영원히 빛나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1-20

까슬까슬한 벽면 위 만화, 울진 매화벽화거리

바닷물의 짠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울진 매화벽화거리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이현세(1954~)의 만화가 마을 골목을 수놓은 곳이다. 까슬까슬한 종이 위에 그려진 만화가 거친 담벼락을 따라 피어나 옛 추억을 불러들인다. 학교에서 선생님 몰래 읽었던 아슬아슬한 순간들, 만화방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만화책장만 넘기던 시간들, 다음 편이 나오지 않아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린 날짜만 기다리던 그 시절은 세월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당시 만화책은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마음껏 상상의 세계를 탐험하게 해주는 여행티켓이었다. 신화·사랑·영웅·성공 등 그 속에는 무엇이든 다 있었다.울진 매화벽화거리는 ‘공포의 외인구단’(1983~84)과 ‘누구라도 길을 잃는다’(2017), 다수의 단컷 만화벽화, ‘남벌’(1993)을 소재로 한 카페를 찾아볼 수 있다. 매화이현세만화공원·매화역사관·매화박물관·만화도서관·영동이네 옛집 등 마을 곳곳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매화벽화거리는 만화책 속 작은 네모 상자를 골목의 담벼락에서 찾고, 그 안에서 캐릭터 까치·마동탁·엄지가 튀어나올 듯 그려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꺾이며 이어지는 골목의 만화 속 장면들이 발걸음을 따라 조롱조롱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공포의 외인구단’이 그려진 골목은 마을 외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러브로드’다. 사실 원작 만화의 줄거리는 사랑보다는 스릴 막장에 가깝다. 주인공 오혜성은 짝사랑하는 엄지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다. 라이벌이자 엄친아이자 권력자인 마동탁으로 인해 엄지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오혜성은 부상으로 야구마저 포기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그는 외인구단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야구 타자로써 부활하여 마동탁과 엄지 앞에 나타난다. 위기를 느낀 마동탁은 아내 엄지를 이용하여 혜성을 흔들고, 혜성은 두 눈을 상실하면서까지 마동탁의 승리를 원하던 엄지의 소원을 이뤄준다. 엄지는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고 이혼당한다. 혜성이 엄지를 찾아와 서로 포옹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지금도 상상치도 못했던 결말에 얼떨떨했던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하다. 원래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이 작품은 충격적인 결말만으로도 결코 잊힐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공포의 외인구단’은 공포정치를 하던 군부가 대중들의 눈을 정치가 아닌 곳으로 돌리기 위해 스포츠를 키우던 사회 분위기에 맞춰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1980년대는 국가가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무력 진압하고, 사회 안정·정의 구현·국민 순화라는 명분으로 감시와 통제를 일삼았다. 국가권력은 대중들의 요구를 컬러티비 보급·야간통행금지 폐지·교복 자율화·스포츠 활성화 등의 정책을 통해 억눌렀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탄탄한 줄거리·엄청난 반전·속도감 있는 전개와 승리에 대한 집착·신체 훼손·과장된 정서적 표현이 특징적이다. 특히 사회 약자들이 영웅이 되는 스토리는 억압받던 80년대의 독자층을 매료시켰다. 나중에는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이나 드라마 ‘2009 외인구단’(2009)으로도 제작되었다.‘남벌’은 열차 카페의 테마로 즐길 수 있다.‘남벌’의 주인공 오혜성은 일본 내 재일교포다. 인도네시아 석유로 인해 한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미교포들은 수용소로 강제 이송된다. 아우슈비츠에 버금가는 그곳에서 가족을 잃은 그는 탈출하여 한국으로 건너가 한일전쟁에 선봉을 서서 한국군의 승리에 공헌한다. 붙잡혔던 엄지도 구출하여 남은 가족과 한국에 정착해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이 작품은 가족과 주변인의 비극적인 죽음·운명적인 사랑·애국심과 민족주의·강한 남성상과 약한 여성상 등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1990년 김영삼 정부의 정책 ‘일제 잔재 청산’에 힘입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냉전이 완화되고, 해외여행이 증가하며, 국제 문화 교류가 증가하던 세계 흐름에서 대중이 느꼈던 일본과의 격차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식민 통치로 인한 과거 청산, 독도 영유권 주장, 경제적 격차로 인한 무역 불균형, 재미교포의 차별 등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반일감정을 과열시켰다. 대중은 작품 속 가상의 한일전쟁에서의 승리에서 현실의 억압된 반일감정을 해소했다. 2023년 기준으로 한국은 일본과 상당한 부분을 극복했고 위기나 경계심도 낮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부분은 남아있다.이현세의 작품은 만화가 어린이나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이 향유하는 대중문화라는 인식을 마련했다.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 비극적인 사랑과 주변인의 죽음, 극단적인 갈등과 과격한 장면, 과도한 감정표현은 소설처럼 스토리에 빠져들게 했으며, 스포츠·판소리·전쟁·SF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소재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었다. 울진의 매화벽화거리에 가면 ‘천국의 신화’·‘국경의 갈가마귀’·‘활’·‘지옥의 링’·‘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블루엔젤’·‘카론의 새벽’·‘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아마겟돈’ 등 이현세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만화가 가득 그려진 골목을 거닐며 까슬까슬한 만화책의 질감을 떠올려 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