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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바로 보는, 청도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4절까지 있는 새마을노래는 한때 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노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가사를 만들었다고 하는 이 노래는 70년대를 풍미했던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곡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침마다 마을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마을 공동의 일을 위해 모였다. 마을을 스스로 정비하고 깨끗하게 가꾸는 데 일손을 보탰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으로 시행되면서 노래도 더불어 더 많이 활용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이 단조로운 노래 그리고 새싹 무늬가 그려진 초록 모자와 기억을 공유한다.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안으로 농촌 마을 가꾸기 운동에서 시작되었다.1969년 8월 박정희는 수해복구사업을 돌아보다 청도의 신도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다른 마을에 비해 깨끗하게 정비되어있는 마을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새마을가꾸기운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듬해 10월부터 박정희의 제안하에 정부가 주체가 되어 전국의 농촌 마을을 중심으로 새마을가꾸기운동이 실시된다. 정부는 당시 쌍용시멘트의 과잉 재고를 농촌 마을에 나눠주며, 마을 재건을 독려했다. 마을 진입로를 확장하고, 하천에 작은 다리를 건설하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고, 공동 우물을 정비하며, 목욕탕이나 빨래터 등 공공장소의 건립에 활용되었다.대통령의 개인 관심에서 시작되었던 새마을운동 사업은 정부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농촌 마을의 호응도를 끌어내었다. 이에 정부는 각 마을의 성과에 따라 기초·자조·자립 마을 3단계로 나누고, 차별적 물자 지급을 하면서 마을끼리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물자가 배제되는 마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며 차등 지급하였다. 1970년대는 물자가 풍족한 편은 아니었고, 마을마다 공동체를 유지하던 전통이 남아있었던 시기라 의외로 성과는 매우 좋았다. 뜻밖의 성과에 정부는 농촌에서 도시와 공장까지 운동을 확산시켰고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시행되었다. 실제로 새마을운동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경제의 급성장에 일조한 면이 많다.그러나 도시의 산업화로 농촌과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도시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유신 정권에 대한 격한 목소리가 나오던 때에 박정희에게 필요했던 것은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시스템’이었다.1973년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새마을운동이고,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곧 10월 유신”이라 선언했으며, 초록 모자·노란 완장·새마을노래는 상징이 되어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다. 도시·공장·학교·마을 등 전부 새마을운동이란 이름 붙었으며,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사람들의 노동력과 재산과 시간 등은 반강제로 동원되었다. 도로의 포장·보수, 다리의 건설, 마을 진입로 건설 등은 국가사업임에도 보상받기가 쉽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의 노동력은 무료로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초기의 새마을운동이 마을을 위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면 1973년 이후의 새마을운동은 마을 주민으로서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한 국가의 반강제적 사업이었다. 마을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유지하던 전통적인 공동체 생활은 국가가 주도할수록 점점 더 퇴색되어갔다. 1979년 박정희의 암살로 새마을운동은 내리막길을 걷는다.새마을운동 발상지로 자주 언급되는 청도 청도읍 신도마을에는 현재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과 기념공원, 새마을테마파크가 마을 정경과 어우러져 공존하고 있다. 기념공원의 입구에 들어서면 과거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는 신거역과 박정희 대통령의 전용 열차, 대통령 동상과 차표 동상이 보인다. 세월의 흐름을 머금은 빛바랜 열차와 물건들이 오랜 기억을 자극한다. 신거역 안에는 곰돌이가 차장으로 앉아있어 재미를 더한다. 작은 전시관으로 꾸며진 신도정미소나 교복체험관을 지나 기다란 번영의 길을 따라 걸으면 멀리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마을이 변화된 모습과 당시의 책자나 사진, 현재 다른 나라로 수출되고 있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보들이 1·2층에 나눠 전시되어 있다. 신도리마을 안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산 아래 새마을테마파크가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잘살아보세관·새마을학교·시대촌·놀이터·스탬프 투어·숙박시설 등 둘러볼 거리가 많아 흥미를 더한다.새마을운동은 농촌에 불어온 근대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잘살아보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에서 시작되었으나 국가가 주도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고 전통적인 마을공동체 유지 체제마저도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왔다.새마을운동은 현재 경제발전의 일환으로 여러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근대화에 성공한 결과적인 면뿐만 아니라 과도한 실적 경쟁과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시스템이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간과하지 않으면 좋겠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와 연결된 역사를 지닌 이곳을 걸으며, 새마을노래를 흥얼거려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1-06

근대와 현재가 만나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촘촘하고 짙은 나무 창살이 건물의 겉면을 감싸고, 비대칭형 창문이 드문드문 드러난다. 2층에 덧댄 목재들이 툭 튀어나와 있고, 지붕에는 일직선의 기와가 이중으로 처마를 장식한다.건물들은 옆집과의 완충공간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일본 특유의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서 있다.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와 ‘동백꽃 필 무렵’(2019)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은 옛 포항의 황금어장이며, ‘포항의 종로’로 불렸던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다.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는 길게 늘어선 해안선을 따라 그 이면도로에 일본인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상업지구였다. 1908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인에게도 조선인과 동일한 어업권이 보장되었고, 수산자원이 풍부한 구룡포는 가가와현 일본인 어민들이 모여들어 거주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32년경에는 구룡포 거주 일본인 가구가 287가구·1천100명이 넘었고, 신사에 올라가는 계단 측면에 세워진 공헌비가 120개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그 화려한 성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본인 거주지는 조선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일본에 의해 착취당하던 조선인들은 거리의 뒤편 산등성이 후미진 별도의 장소에서 생활했다. 1945년 일본인이 떠나간 후 구룡포 사람들은 120개의 공헌비에 새겨진 일본인 이름을 시멘트로 발라 없애버린다. 이후 적의 재산이었던 가옥이라 하여 적산가옥이라 불렸던 이 거리의 건물들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1960년 옛 신사가 있던 곳은 충혼탑과 구룡포 공원으로 탈바꿈한다. 재미있는 점은 옛 일본의 공헌비에 구룡포 공원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계단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착취의 상징이었던 공헌비를 통해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이 유머러스하다. 2001년 문화재보호법 개정에 따라 근대건축물의 보존을 위한 등록문화제 제도가 만들어지고 보존과 복원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다. 2010년 포항은 국가에서 이 거리를 매입하여 일본식 가옥을 중심으로 거리를 조성하였다.일본인 가옥 거리에 남겨진 적산가옥은 한옥과는 다른 이면을 찾아볼 수 있다. 한옥은 기단 위에 1층 건물이 놓이고 온돌이 깔린다. 이 건물에서 중요한 것은 곡선미를 자랑하는 기와와 이를 받치는 기둥이며, 그 외의 벽은 대부분 개방적인 문의 형태로 되어 있다.앞마당에서 데워진 공기가 뒷마당의 화단에서 식어 넓은 대청마루를 통해 순환한다. 마당은 생활 공간이며, 마당을 나누는 담장은 까치발을 들면 안이 훤히 보이는 높이에 불과하다. 한옥은 개방적이고 밝고 마당을 비롯한 공간의 여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이에 비해 일본식 건축물은 폐쇄적이고 어두운 편이다. 일본은 어둠이 차분함을 만든다고 여겨 집을 어둡게 짓는 면이 있다고 한다. 2층 건물의 외벽은 좁은 나무 창살로 촘촘하게 엮어 내부가 보이지 않는다. 2단으로 된 기와는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고, 내부는 좁고 긴 복도가 특징이다. 정원은 나무와 꽃으로 꾸며 차를 마시며 구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 같은 정원이다.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건물의 기단부와 복도의 윗면 등에 환기를 위한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하지만 적산가옥은 완전한 일본식은 아니다. 일본식 외관·서양식 입식 구조·한국의 온돌과 벽을 접목시킨 형태를 지닌다. 포항의 일본인 가옥 거리의 건축양식도 비슷하여 크게 3가지 형태의 건물을 확인할 수 있다. 술집·약국·숙박시설 등 상업 거리를 형성하던 건물은 주로 1층 상점·2층 다용도실로 이뤄진 주상복합형 건물이 지어졌다. 1열식 마치야로 도로에서 보이는 건물의 가로면보다 보이지 않는 세로면이 긴 형태이다. 일본식 전통 양식인 좁고 긴 복도가 특징이다. 이와는 또 다른 형태로 건물의 가로면이 세로면보다 길게 드러난 2열식 정방형의 가옥도 눈에 띈다. 이 건물은 주로 어촌민가로 보이며, 중복도가 특징이다. 3열식 이상의 대규모 건물은 서민주택은 아니었다. 하시모토 젠키치와 도가와 야사부로는 당시 구룡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현재 하시모토의 집은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일본식 정원이 있으며, 다다미방과 도코노마-신이나 부처 등을 모셔두는 신성한 공간-와 장식장(도코바시라) 그리고 대문 입구의 간독(생선 소금절임용)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식 온돌도 적용되어 있다.적산가옥은 주로 일본인이 많이 살았고 수탈의 전진 기지였던 항구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인천·목포·여수·군산·논산·포항·부산·창원 등은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그러나 적산가옥은 일본의 잔재가 아니라 일본·서양·한국식이 결합된 독특한 한국 근대의 건축물로 봐도 무방하다 생각된다.적산가옥과 같은 형태는 한국의 일본인 가옥에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사로 향하던 계단을 올라 구룡포 공원에서 바다를 내려다본다. 일본인 가옥 거리의 복잡함과 달리 구룡포 바다는 고요하기만 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0-30

그때 그 시절,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대구 반월당 인근에는 한국전쟁 후 대구 시내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1988)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다. 소설 속 집터와 약령시장·종로·군방각 등 소설 안의 장소가 근대 골목 투어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콘텐츠가 되어 존재한다. 지금은 작은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주인공 길남이를 친구삼아 소설 속으로 한 발짝 들어가기에 알맞은 곳이다. 집터 골목 앞 길남이 동상 옆에서 사진 한 컷을 찍고, 캐릭터들이 그려진 벽화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곧 작은 대문이 보인다. 길남이가 처음 가족을 만났을 때를 상상하며 마당 안으로 들어선다.‘마당 깊은 집’은 1954년 대구 장관동 일대에 있는 어느 마당 깊은 한옥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당시 대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주인집이 사는 위채와 피난민 네 가구·길남이네, 상이군인 준호네, 경기네, 평양댁과 아들 정태-가 사는 아래채가 나온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가난과 허물어질 것 같은 도덕심과 신념을 아등바등 지키려는 사람들과 전쟁으로 무너진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 자본주의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런 혼란한 곳에서 길남이는 처음으로 대구에 상경하여 가족과 같이 살게 되며, 엄하기만 한 어머니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당시의 여느 아이들처럼 어린 나이에 내적 성숙을 하며 어른이 되어간다.‘마당 깊은 집’ 위채의 삶에서는 대구의 방직·군수 산업과 연결된 부의 축적과 인맥에 따른 부조리를 엿볼 수 있고, 아래채의 삶에서는 전후에 팽배하던 가난과 결여를 확인할 수 있다. 주인집은 한옥임에도 유리가 끼워진 문이 있고, 전축에서는 영어 노래가 흘러나올 정도로 유행에 민감하다. 대물림받은 가산과 더불어 점점 확장되어가는 방직 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한다. 특히 아들 성준을 미국에 유학 보내기 위해 미국식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미군을 포함하여 지역 인사들을 초대하는 등 부를 과시하기도 한다.또한 겨울에 셋방을 빼게 하거나 집수리를 위해 셋집을 쉽게 내보내는 등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갑질의 모습도 그려진다. 이와 대비되게 아래채에 사는 네 가구는 모두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 한 평의 가건물을 덧대어 부엌을 만들고, 작은 방에 많은 식구가 모여 지낸다. 다닥다닥 붙은 셋방들은 사생활 보호는 당연히 불가능할 정도다. 옆집 잠꼬대 소리가 들리는 건 물론이고, 하나뿐인 변소에 드나드는 이유와 횟수조차 서로 알고 있다. 하루 벌이가 넉넉하지 못하면 점심 굶기는 일쑤고, 겨울에도 난방은 쉬이 하지 못하다. 상이군인네 준호 엄마는 출산 후 2일 만에 시장 장사를 하러 나가고, 길남이는 신문팔이를 하며 중학교 학비를 모은다. 주인집 눈치 보기 바빠 때로는 서로의 등을 떠밀기도 한다. 아등바등 생을 살아내는 캐릭터가 애잔하면서도 현재가 얼마나 평화로운지 실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여기에 아래채가 수몰될 정도로 비가 내리지만 무심한 위채 사람들, 일주일간 이어진 살인 사건 덕분에 늘어난 신문 판매 부수로 이익을 보는 신문팔이, 정태의 월북 미수 사건으로 휘말릴까 겁내는 아래채 사람들 등 무거운 사건이 스냅북처럼 가볍게 펼쳐진다.또한 피난민이 모여든 방천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사람들과 새 인연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대구역 앞에 모여든 거지와 실업자들 그와 대비되는 귀금속 거리와 영화관 등의 화려한 풍경이 덧그려진다. 이 모든 것은 소설 주인공 길남이가 신문팔이를 하면서 돌아다니던 어릴 적 시선과 성인이 되어 1954년을 추억하는 시선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소설 속 1954년 대구는 전쟁 후유증과 자본주의 성장이 맞물려 공존하던 곳이었다.‘마당 깊은 집’의 길남이와 모친은 여느 모자 사이와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어머니가 바라보는 아들 길남이는 애잔한 아들과 원망스러운 남편의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길남이는 가족을 버리고 월북한 부친을 대신하여 집안의 장남이란 명목하에 모진 대접을 받는다. 길남이가 바라보던 어머니도 자상한 어머니와 살벌한 마녀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어머니가 시키는 일을 겉으로는 열심히 하지만 속으로는 반발심을 꽤 표현한다. 둘의 이러한 거리감은 길남이가 스스로 사생아라고 칭하며 가출하고, 그런 길남이를 어머니가 다시 집으로 데려왔을 때 비로소 연결점이 마련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잘못 인식한 부분을 인정하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마당 깊은 집’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무언가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가며, 성장과 성숙해지던 당시 대구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 경제·문화·정치·사회가 있으며,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이 있다. 아직 100년도 지나지 않았고,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일부 살아있으며, 그 직간접적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그때 그 시절은 이후의 빠른 발전에 힘입어 이미 옛 기억이 돼버렸다.지금은 남겨진 자료나 당시를 형상화한 명소만이 이를 대신한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0-23

느리게 걷는, 문경 돌리네

문경에는 옛 지명이 돌실 또는 도리실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동그랗게 돈다는 뜻으로 마치 접시 모양처럼 지반이 옴폭 내려앉은 지형이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희귀한 ‘카르스트 습지’ 지형이다. 현재는 굴봉산 둘레길과 생태탐방로가 형성되어 있고 전망대와 홍보관과 데크 탐방로가 놓여 있어 특이지형과 생태 환경을 가까이서 오감으로 느끼고자 방문하는 사람들이 찾아든다. 딱 느리게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기에 좋은 장소다.카르스트라는 명칭은 아드리아 연안의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경계에 있는 카르스트 지역의 전형적인 암석 지대를 연구하면서 사용된 용어로, 석회암지대가 빗물이나 산화탄소가 함유된 지하수로 인해 녹아내리면서 형성된 독특한 지형을 뜻한다.석회암은 다른 암석에 비해 탄산칼슘이 많이 내포되어 있어 물에 더 빨리 용식되는 현상을 보이는데, 주로 깊은 고랑이 패여 울퉁불퉁한 지형을 형성하는 카렌(라피에) 지형과 접시 모양의 돌리네 지형과 그 아래의 종유석 동굴 등이 발달한다.돌리네·우발라·폴리에·카렌(라피에)·석회암 단구·석회동굴 등 다양한 지형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돌리네는 동그란 싱크홀과 같은 지형을 말하며 사발형·접시형·깔대기형 등이 있다. 우발라는 여러 개의 돌리네가 연결되어 분지 지형을 만든 것으로 형태가 다양하다. 폴리에는 우발라가 확장되어 거대 평지 형태로 드러나는데, 대체로 돌리네가 경작지로 활용되면서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라피에는 석회암지대에서 녹지 않고 남겨져 있는 암석 돌출부를 이르는 말이며 석회동굴은 돌리네에 형성된 싱크홀에서 유입된 물이 동굴 형태를 이루며 녹아내린 석회암지대이다. 고수동굴·성유굴·환선굴 등 오래전부터 관광지로서 사랑받아 온 지형이기도 하다.카르스트 지형은 석회암의 특성상 물에 잘 녹고 물 빠짐이 좋아 자연적으로 습지가 형성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투수층이 물이 빠지는 속도를 늦춰 습지가 형성되기도 한다.한국에서는 강원도 평창·정선·삼척·영월 등 일대, 충북 제천과 단양, 경북 문경 그리고 북한의 황해도 서흥군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한은 강원도에서 남서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고생대 오르도비스계 옥천지향사를 중심으로 나타나며, 북한은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의 캄브리아계 평남지향사에 집중적으로 발달되어 있다.람사르 습지 후보지로 알려진 문경 산북면 굴봉산 돌리네 지형은 대략 해발 200미터 지점에 있는 카르스트 습지 지형이다. 지리적으로 고립된 접시 모양의 단독 분지 지형을 띄는데, 지표면의 하천보다는 지하수가 잘 형성되어 있다. 장마가 지면 굴봉산 돌리네 지형에 내렸던 빗물이나 모여있던 지하수가 세 지점에서 지표면으로 삼출되어 습지의 저수지로 유입된다. 이곳의 토양은 모래의 함량이 높고 암회색 내지는 흑색의 토양이 발달하여 물 빠짐이 좋으나 지하 30~60미터 아래에는 테라로사(붉은 흙)가 불투수층을 형성하고 있어 연중 2개월 정도는 저수지로 물을 유입할 수 있다.카르스트 지형임에도 물웅덩이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케이스에 속한다.봄이면 양서류가 울고 야생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여름에는 낙지다리·으아리 등과 같은 희귀 식물과 층층나무·물푸레나무가 어울린다. 가을에는 억새와 버드나무의 조화를 눈에 담을 수 있다. 또한 수달·담비·붉은배새매 등과 같은 희귀 동물을 포함해 약 700종이 넘는 생물의 생명수를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현재는 해설사에게 산중의 생태 습지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게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문경 호계면 일대에도 석회동굴과 카렌·돌리네·우발라 등 다양한 카르스트 지형이 드러난다. 선암리 일대에서만 11기의 돌리네가 발견될 정도로 돌리네 지형이 집중되어 있으며, 사발형·접시형·깔대기형 등 여러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부곡리 일대에서는 돌리네·우발라와 숫굴·암굴 등과 같은 석회동굴도 발견되었다. 숫굴은 부곡리 굴넘재의 돌리네에서 유입된 지표수가 원인으로 추정되며, 암굴은 식수로도 활용되던 곳으로 굴 안에는 호수도 형성되어 있다. 지천리와 우로리 일대에서는 길쭉한 우발라와 우로굴이 발견되었다.또한 문경대학교에서는 카렌(라피에) 지형의 일부를 남겨두어 빗물에 용식된 울퉁불퉁하고 복잡한 모양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작년에는 가은고 지리동아리에서 가은읍 야산의 카르스트 지형인 우발라와 라피에 군락을 발견하기도 했다.문경은 카르스트 지형 중에서도 국내 유일의 독특한 돌리네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며, 다양한 카르스트 지형도 집중적으로 분포된 곳이다. 다양한 동·식물이 많아 계절마다 다른 생태 환경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무엇보다도 걷기 좋은 탐방로가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자연을 마음에 담을 기회를 제공한다. 오늘도 자연을 둘러보며 느리게 걷기에 여념이 없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0-16

지질 속 생명의 흔적, 의성 공룡발자국

의성 제오리의 한적한 도로변에는 비스듬히 세워진 절벽 모양의 바위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금성산의 화산활동으로 지질의 위치가 변화된 그 바위 위에는 움푹 파인 동그란 자국들이 무수히 남겨져 있다. 이를 전문가들은 공룡발자국이라 했다. 특히 바위 면적 대비 국내 최대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발자국 화석산지와는 다른 특별한 면이 있다고 한다. 사실 일반인 막눈으로는 동그란 알 모양의 자국을 제외하고 발자국처럼 생긴 형태를 구분해 낼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그 많다는 공룡의 보행렬도 글로 된 지식만 확인하고 실물과 연관하지 못했다.제오리 공룡 발자국은 의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질 명소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래도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첫 케이스이기도 하고, 1천600㎡라는 작은 면적에 총 384개의 발자국이 고밀도로 남겨져 있으며, 조각류 발자국이 우세한 다른 지역의 화석산지에 비해 용각류가 더 많이 남겨진 희귀한 화석산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로변에 위치하여 지나가다가 잠깐 둘러보기에 접근성도 나쁘지 않다.공룡은 크게 도마뱀의 골반(용반류)과 새의 골반(조반류)으로 형태를 구분한다. 용각류와 수각류는 도마뱀 골반이고, 조각류는 새의 골반에 속한다.용각류는 주로 4개의 다리로 걸으며, 긴 목과 긴 꼬리·커다랗고 뚱뚱한 몸에 비해 엄청나게 작은 머리를 가진 초식 동물이다.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잎을 먹을 수 있게 신체가 발달하였다. 쥐라기와 백악기에 광범위하게 퍼졌다가 멸종되었다. 수각류는 주로 이족 보행을 하는 육식형 공룡으로 트라이아스기 말에서 백악기 말까지 생존하였다. 어류나 벌레를 잡아먹는 종·타조처럼 빠른 달리기가 가능한 종·티라노사우루스와 같은 포식자·벌새처럼 작은 종·악어와 같은 종 등 매우 다양한 종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생김새만 보면 조반류가 용반류에 비해 더 창의적인 형태를 지니는 듯하다. 조반류는 예전에는 조각류·검룡류·곡룡류·각룡류·후두류로 나누었다. 좀 직관적인 분류명들이라 쉽게 그 특징을 추측할 수 있다. 조각류는 쉽게 얘기하면 새의 튼튼한 다리와 오리주둥이를 닮은 공룡류를 칭한다. 두 발과 네 발을 모두 사용했으며, 이빨이 발달하였다. 검룡류는 꼬리가 검 같거나 검처럼 생긴 침이 있는 종류로 뒷다리가 길고 머리가 작고 목이 매우 짧다. 곡룡류는 등과 옆구리에 가시가 있고 갑옷이나 곤봉 모양의 꼬리를 가진 공룡이다. 각룡류는 삼각형 모양의 큰 머리뼈와 굵은 목 그리고 입이 앵무새 부리를 닮았거나 뿔이 있다. 공룡 중 가장 늦게 등장하였고 백악기 후기에 생존했었다. 후두류는 일명 박치기에 특화된 공룡으로 머리뼈가 엄청 단단하다.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에서는 총 35개의 보행렬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19개 보행렬은 용각류의 것이고, 14개의 보행렬은 조각류의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수각류의 발자국도 조금 남겨져 있다. 이렇게 적은 면적에 많은 발자국이 남겨져 있는 것은 서식하던 공룡들이 무리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제오리 인근에서는 만천리 아기공룡발자국 화석산지도 발견되었다. 2008년 제오리 인근을 조사하다가 가로 5미터·세로 7.5미터의 바위에 찍힌 발자국을 확인하였다. 총 20마리의 공룡들이 8개의 보행렬을 그렸는데, 총 126개의 발자국이 찍혀있다. 이 화석은 아기공룡의 보행렬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그 보행렬의 길이가 4.35미터로 세계 최장의 길이라는 점도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용각류 아기공룡의 발자국으로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심층 조사에 의해 두 발로 빠르게 걷다가 잠시 멈춘 후 다시 네 발로 천천히 걷는 조각류 아기공룡의 발자국으로 밝혀졌다. 같은 노면에 수각류와 용각류의 발자국도 함께 있어 당시 공룡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또 제오리 인근 탑리에서는 울트라사우루스 골격 화석이 국내 최초로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남대천 일대에 발가락 마디까지 잘 보존된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발견되었다. 남대천의 발자국은 20여개의 초식공룡과 8개의 육식공룡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렇게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많은 의성은 공룡들의 세계를 상상해보기에 좋다. 또한 조문국박물관과 고분군, 금성산 칼데라와 빙계계곡과 같은 다양한 지질 환경 등 생각보다 풍부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관리나 제반 시설이나 일반인을 위한 설명 등이 매우 미흡하다. 막상 일반인이 찾아가도 이해가 가지 않고 그 가치를 파악할 수 없다면 보존이나 보호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반인 막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하고 체계적인 보조시스템이 구축되길 기대해 본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0-09

우리 땅, 독도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 떨어져 있는 곳에는 ‘외로운 섬 하나’가 있다. 동해상 날씨가 좋아 배를 띄워도 가는 동안에 하늘이 변덕을 부려 운이 따라야지만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섬. 평소에는 해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어떨 때는 울릉도 해안에서 육안으로도 보인다는 섬. 사진으로, 방송으로 많이 보아 잘 아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정말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섬. 삼봉도·우산도·가지도·석도 등으로 불리다가 울릉도 방언 돌섬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어 지금은 독도라고 불리는 섬이 동해안에 있다.‘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와는 달리 독도는 ‘외로운 섬 하나’가 아닌 동도와 서도 그리고 그 주변으로 89개나 되는 바위섬이 한 무리를 이루는 해저화산이다. 신생대 네오기 플라이오세에 해저에서 화산이 폭발하고 커다란 해산이 생겼다. 그 해산 위에 아주 작게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독도다. 높이가 2천m 이상, 지름이 30㎞나 되는 거대한 해저화산이지만 바다 위에 드러난 독도는 동도가 99.4m, 서도가 174m로 매우 작다. 이마저도 오랫동안 파도와 바람에 침식되면서 지금도 아주 조금씩 깎여 나간다.바람과 파도에 의한 풍화와 침식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지형을 만들어낸다. 독도에는 4곳의 아름다운 지질명소가 등록되어 있는데, 독립문 바위·삼형제 굴바위·천장굴·숫돌 바위가 그곳이다.독립문 바위는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세운 독립문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식동굴이 계속 깎여서 기다란 아치형 다리를 바다 위에 만들었다. 응회암과 주상절리가 잘 발달되어 있다.삼형제 굴바위는 세 방향에서 시작된 해식동굴이 한 점에서 만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파도 침식으로 인해 육지에서 분리된 시스택 지형으로 높은 파랑이 자주 덮쳐 바위 전체의 염분 비율이 높다. 당연히 식생은 자라지 못한다. 동도와 서도와 함께 삼봉도로 불리기도 하며, 높이는 44m이다.천장굴은 동도의 중앙에 우물처럼 움푹 파인 지형으로 노래 가사 ‘우물 하나 분화구’에 해당되는 곳이다. 처음에는 화산분화구로 인식되었으나 풍화와 침식으로 함몰된 지형으로 밝혀졌다. 독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철나무가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숫돌바위는 침식에 약한 응회암질이 사라지고 단단한 조면암질 암맥부만 남아있는 지형으로 바위의 암질이 숫돌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동도에서 생활하던 독도 의용수비대원들이 이 바위에 칼을 갈았다고 전해진다. 수평주상절리가 잘 발달되어 계단과 같은 모양이 촘촘하게 드러나며 높이는 12.6m다.아쉽게도 국제해양법상 독도는 섬이 아니라 암초로 분류된다고 한다.섬이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을을 형성할 정도로 경제 활동이 가능하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 지형을 뜻한다. 독도는 섬 자체 면적은 좁지 않으나 지형이 매우 가파르며, 평지가 거의 없고, 식수가 부족하여 사람이 살기에 원만한 환경은 아니다. 비와 눈이 자주 내려 연중 강수량은 고른 편이지만 습도가 높고, 안개도 자주 발생한다. 1982년 노래 가사에 적혀있듯이 ‘평균기온 십이도 강수량은 천삼백’으로 알려졌으나 기후 변화로 인해 2012년에는 ‘평균기온 십삼도 강수량은 천팔백’으로 가사가 바뀌었다. 아무튼 내륙에 비해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해양성 기후에 속한다. 대략 거주민은 3천명 정도 등록되어 있지만 실 거주자는 약 60명이고, 그중 주민은 14명(2019년 기준)이며, 실질적인 인원은 독도를 관리하고 수비하는 인력이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독자적인 경제 순환이 어려운 곳으로 볼 수 있기에 섬이라고 알고 있는 우리의 인식과 달리 암초라고도 볼 수 있겠다.독도는 어로 활동이 금지된 지역인만큼 독자적인 식생이 풍부하다.대체로 비바람에 강하고 얕은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들이 자생하는데, 해국·개밀·큰이삭풀·갯제비쑥·보리밥나무·사철나무·섬괴불나무·왕호장근·가는갯는쟁이·참소리쟁이 등이 있다.독도는 새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괭이갈매기·바다제비·슴새·알락할미새·섬참새 등 139종에 달하는 새들이 관측된다.예전에는 강치의 주 서식지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강치를 잡아 가죽(가방이나 모자)과 기름(항공유), 내장(의약품)을 활용했다고 한다. 일본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절멸했는데, 현재 일본에서 동화책과 인형으로 제작되어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쓰이고 있다. 일본의 강치 활용은 황당하긴 하지만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기도 하다.독도에는 아름다운 지형과 독자적인 동식물이 있으며, 이를 지켜왔던 역사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에 외롭지 않은 이 섬은 영유권 분쟁이 있는 만큼 지속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독도는 우리 땅’이나 ‘제시카송(영화 ‘기생충’)’, 라이카코리아의 운동화, 독도마켓의 상품들처럼 마음에 와닿는 문화는 우리 땅 독도를 알리고 지킬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9-25

따스한 ‘권정생 동화 나라’

짧은 검은 머리를 한 몽실이가 아이를 업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전쟁에 나간 아버지, 재가하여 다른 지역에 사는 엄마네 가족, 식모살이하며 함께 지내는 새로운 가족, 입양 보낸 동생 등. ‘몽실언니’의 표지 속 몽실이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사실 누구든 정몽실은 따지지 않고 따스함을 나눠줬을 것이다. 그저 바보같이 주어진 삶을 업고 묵묵히 돌봤을 것이다. 사랑만을 전할 뿐 그 무엇도 바라지 않던 권정생(1937~2007) 작가처럼 말이다.권정생 작가는 일본 도쿄 변두리 지역인 시부야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아버지가 가끔 주워 오던 동화책을 보며 자랐다.해방 후 한국에 돌아오지만, 전쟁과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만 하다가 주변인을 하나·둘 떠나보내고 안동에 정착한다. 1967년 일직교회의 종지기로 살면서 집필활동을 한다. 1969년 ‘강아지똥’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여 이후 무수히 많은 작품을 남긴다.초기에는 주로 ‘강아지똥’과 같은 동화를, 중기에는 ‘몽실언니’와 같은 성장소설을, 후기에는 ‘랑랑별 때때롱’처럼 생태 의식이 깃들여진 판타지 소설과 여러 산문을 집필했다.30세부터 눈을 감던 순간까지 교회의 종지기로서 작은 흙집에서 검소하게 살다가 2007년 어린이들을 위해 모든 유산을 남기고 평소 자주 오르던 빌뱅이 언덕에 조용히 잠든다. 2009년 작가의 유고에 따라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고, 2014년에는 ‘권정생 동화 나라’가 만들어졌다. 이후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는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권정생 동화 나라’에 가면 작가의 작품들이 책 밖으로 나와 실질적인 사물이 되고, 공간이 되고, 사진의 배경이 되어 손님들을 맞이한다.1층은 작가의 유품과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귀한 초판본이나 원고지에 써 내려간 작가의 필체도 확인해 볼 수 있다.도서관은 판매를 겸하고 있으며, 체험관은 어린이들을 환상의 세계로 데려갈 징검다리로 충분하다. 구연연구소나 여러 포토존 등도 즐길 수 있다.2층은 회의실과 작가에게 대여하는 창작실, 숙소가 있어 현지의 작가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권정생 동화 나라’의 당초 설립 계획이 모두 지켜지지 않았고 축소되었으며, 실내 공간이 예상보다 작은 편이었다. 운동장의 여러 포토존을 둘러보고, 벽화를 따라 인근의 권정생 생가와 교회를 돌아보고, 빌뱅이 언덕을 올려다보면서 아쉬움을 달랜다.‘권정생 동화 나라’에는 작가의 작품을 동상으로 만들어 둔 곳이 여럿 있다. ‘몽실언니’도 그중 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입체적으로 표현된 ‘몽실언니’표지 동상을 보면서 예전에 ‘몽실언니’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가난에 떠밀린 어린 소녀가 어쩔 수 없이 짊어질 수밖에 없던 삶의 무게가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식모살이와 구걸, 어린 동생 돌봄과 입양, 이혼과 재혼 가정에서의 학대, 주변인의 죽음 등 말문이 막히는 장면이 너무도 덤덤하게 이어졌다. 작가는 ‘몽실언니는 제가 너무도 어렵게 쓴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쓴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읽어주세요.(1984년 4월)’라고 했지만 읽는 내내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우선은 왜 하필 어른도 아닌 어린 존재가 삶의 짐을 떠안고 구원자가 되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해방과 전쟁이 휩쓴 그때는 사회적 약자가 배려받지 못하는 세상이었겠지만 어른들은 무엇을 한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둘째, 주인공은 불행에도 굴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마치 부처의 가운데 토막이나 예수의 재림처럼 담담하기만 하다.슬픔을 이겨내고 마음이 성장하면,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나 아픔을 견뎌야지만 만들어지는 진주가 되는 것일까.셋째, 작품의 배경에 깔린 소외된 이웃의 삶이 너무도 진솔하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쉽게 전이된다. 진솔한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 세월과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의 공감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권정생 작가와 그의 작품은 지금도 사랑받고 사랑받는다.넷째, 도시보다는 자연이 살아있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다. 판타지 작품 ‘랑랑별 때때롱’에서는 자연과 멀어지고 있는 현 인류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놓았다. 돌고 돌아 결국 자연의 품에 안기는 나약한 존재가 인간인데 자연을 외면하는 오만한 모습에 일침을 가한다.안동의 ‘권정생 동화 나라’는 여러 문학관과는 달리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체험적 공간으로 조성하고 녹여내었다.이것은 독서를 통해 책 속을 여행하던 ‘정적인 활동’을 방문하여 즐기는 ‘동적인 활동’으로 바꾸는 행위이며, 독자를 일상에서 벗어난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행위이다.힘겨운 삶을 담담하게 업은 정몽실의 동상을 살포시 안고 눈을 감아본다. 사랑과 희망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몽실이가 내게도 따스함을 나눠주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9-18

경주 남산과 열암곡사지

천년의 신라가 자리 잡았던 경주, 그곳에서도 남산은 영산(靈山)이라 불리며 예나 지금이나 신성하게 여겨진다. 이곳은 신라에 불교가 전파된 이래로 불사가 약 400개에 달하는 불국토이며, 현재에는 불자들이 꼭 둘러봐야 하는 성지이며, 역사학자에게는 신라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자 다양한 설화와 전설이 함께 숨 쉬는 이야기의 보고이다. 또한 산새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시원한 바람에 땀 식히며 걷기에도 매우 좋은 곳이다.남산은 삼국부터 조선시대까지 시대별 불교 유적을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장소이기도 하다. 7세기에는 경주 중심가와 소통이 편하며, 지형이 완만하여 절이나 석탑 등의 건축을 조성하기 쉬운 북쪽 기슭부터 만들어지다가 점점 남쪽과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서남산 선방곡 초입이나 북남산과 인접한 구릉 하단에서는 주로 이때의 불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에 불교가 융성하기 시작하여 통일 신라의 세련되고 사실적인 불교로 넘어간 8세기 불적은 도심 가까이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잘 알려진 불국사·감은사·사천왕사·망덕사·감산사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지어졌다. 애장왕 2년(806년) 새로운 사찰을 수도 내에 건립하는 것이 금지된 이후에는 지방이나 영산인 남산을 중심으로 불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9세기쯤부터는 급경사로 이루어진 백운계를 비롯한 남쪽과 서쪽에서도 불사가 이뤄졌다. 신라가 저물어가던 이 시기에는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왕권이 불안정하였다.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권이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5E211 이상의 거대한 불상이 유행한 이유이기도 하다.9세기 이후가 되면 불상보다는 석탑이 선호된다. 하늘과 가깝고 높고 딱 트인 지형에 석탑을 세워 불국토를 건설하려 하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새로 짓기보다 개축하고 보수하여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상황은 고려를 지나 조선 후기까지 계속된다.남산은 불사가 쌓여 온 세월만큼 많은 유적과 유물이 지금도 발견되고 있다. 그중에서 열암곡은 2007년 이후 ‘기적’이라는 이야기가 덧붙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는 곳이다. 고위산 남서쪽 백운계 본류의 오른쪽 열암곡에는 열암곡사지라는 절터가 있다. 이곳은 깨어지고 넘어진 불상이 많이 흩어져 있고 경사가 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은 기적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자 열암곡사지를 찾는다. 이곳은 2007년 정비하면서 발굴과 일대 조사가 함께 이뤄졌다. 더불어 흩어져 있어서 외면받고 방치되었던 석조여래좌상의 머리도 발견되었다. 열암곡사지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8세기 후반 불상들에 비해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신체 비례가 짧은 편이며, 어깨와 가슴은 좀 더 남성스럽고, 광배(불상 뒤를 받치는 꽃잎 모양의 석재)의 화염문이 8세기 후반보다는 세밀한 것으로 밝혀졌다.그리고 30E211 거리쯤 떨어진 곳에서 높이 5미터가 넘는 대형 마애여래입상을 찾아내었다. 마애여래입상은 발견 당시 앞으로 고꾸라진 채 바닥과 겨우 5㎝의 간격을 두고 버티고 있었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폭 4E211, 높이 6.8E211, 두께 2.9E211 그리고 무게만 80t에 이른다. 그런 바위가 약 40도에 가까운 급경사면에 거꾸로 엎어져 있으며, 불상의 코가 겨우 지면에서 5㎝를 두고 뭉개지지 않은 것이다. 그 5㎝의 간격이 불상의 얼굴을 원형 그대로 살렸다.1천300년의 세월을 품은 기적의 이야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르 몽드’지(2007년 9월 13일) 1면에도 소개되었다. 지금도 남산 열암곡에는 2007년 발견된 그대로의 이야기가 유지되고 있다.사람들은 기적의 이야기를 보고, 기적을 빌기 위해 지금도 남산 열암곡의 험한 산길을 걷는다.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인 아유타하 왓 프라 마하탓(Wat Phra Mahathat)의 큰 보리수나무 뿌리에 박힌 불상 머리를 보기 위해 몸을 숙이는 것처럼 ‘5㎝ 기적’을 확인하기 위해 마애여래입상 앞에서 엎드리거나 고개를 깊게 숙인다. 그 오똑한 콧망울을 확인하려면 몸을 숙이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마치 부처에게 기도하며 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세워진 마애여래입상보다 거꾸로 있는 현재의 이야기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와닿는 듯하다.남산은 오래된 만큼 많은 불교 유적이 있고, 그 속에 품은 이야기가 있다. 성지 순례하듯이 남산의 불사만 찾아다녀도 꽤 오랫동안 숲길을 걸어야만 한다. 누군가는 성지를 순례한다는 마음으로, 누군가는 역사적 탐구를 위해서, 누군가는 이야기를 따라 남산 숲속을 오르다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힌다. 바람이 전해주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서 걷는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9-11

지오투어리즘, 울릉도

광활한 동해 가운데 아직도 활동하는 화산섬 일대가 있다. 하늘이 허락해야 볼 수 있다는 말처럼 이곳은 그날 날씨 상황에 따라 눈에 담을 수 있는 곳도 가변적이다. 최근에 대두되는 백두산 폭발만큼이나 초대형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곳, 울릉도 일대는 오늘도 천혜의 자연을 만끽하려 사람들이 모여든다. 만약 운이 따른다면 독도에 발을 디디게 될 행운을 누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한다.대개는 1만년 이내에 화산활동이 있었으면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활화산으로 분류한다. 울릉도는 약 250만년 전에서 5천년 사이에 형성되었는데, 바닷속 해저화산에서 용암이 여러 차례 분출되어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해저화산이 섬이란 이름의 땅이 되던 모습은 2021년 8월 일본의 해저화산 폭발이나 2019년 통가의 해저화산 폭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섬은 대부분 바닷물에 의한 침식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영토 확장에 기여하기도 한다. 울릉도는 마지막 화산 폭발이 약 5천년 전쯤 안으로 조사되었고, 활동 주기가 3천년에서 7천년 사이로 확인되었다. 또한 최근에 지하 100㎞에 거대한 마그마방이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온천이 없는 울릉도의 지하수 온도가 63~99℃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측정되었고, 지열 발전을 위한 연구에서도 1㎞ 땅속으로 내려갈 때마다 온도는 급속하게 올라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버블스프링’이라하여 마그마가 오래 머금기 어려운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현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만하면 아직도 살아있음이 확인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울릉도는 화산의 총길이가 3천m나 되지만 현재 물 위로 보이는 부분은 겨우 600m에서 1천m에 불과하다. 해저화산의 일부가 물 위에 보이는 형태인만큼 섬의 경사도가 심한 편이고 해식절벽이나 침식동굴, 부석 등 화산활동과 이후의 결과물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저동·도동해안은 초기 화산활동의 지질구조를 잘 간직한 곳으로 주로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마치 치약을 길게 짜놓은 듯 길고 둥근 모양(베개모양)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베개용암이라 부른다. 울릉도 개척항으로 유명한 학포해안은 해안을 따라 집괴암·응회암·조면암층이 분포되어 있는데, 집괴암과 응회암이 많은 지형은 침식되어 만(들어간 곳)이 되고, 단단한 조면암층이 많은 곳은 곶(튀어나온 곳)이 되었다. 해안절벽은 침식으로 붕괴되면서 가파른 절벽이 만들어졌으며 그 위로 국수처럼 길고 각진 기둥이 생성되어 주상절리를 이루었다. 향나무가 자생하는 대풍감이나 노인봉·송곳봉 그리고 국수바위에서도 잘 발달된 주상절리가 발견된다. 또 본래는 울릉도와 한 몸이었으나 이제는 동떨어진 섬이 된 코끼리바위는 높이 약 10m 아치형의 해식동굴이 코끼리의 코를 이룬다. 이러한 코부분이 침식되어 부서진다면 아마도 세 명의 선녀처럼 서 있는 삼선암이나 거북바위처럼 독립된 촛대 모양의 바위가 될 것이다. 이런 침식이 지속되면 언젠가는 관음도의 관음쌍굴도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구멍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전에 높아진 해수면에 잠겨 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지만 말이다.강물에 의해 침식된 지형은 울릉도 남부의 주요 상수원이 되는 봉래폭포와 용출소가 있다. 용출소는 지하수가 단단한 조면암을 만나 지표로 솟아올라 형성된 물웅덩이로 약 2만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봉래폭포는 오르는 길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풍혈(바람구멍)이 있어 산책하기 좋으며, 울릉도 특유의 식생이 발달하여 여러 식물을 관찰하기에도 편한 장소이다. 사실 대다수 희귀식물은 성인봉 인근의 원시림에 주로 자생한다. 너도밤나무 숲·섬조릿대·솔송나무·섬단풍나무·섬피나무 등과 섬말나리·섬노루귀·섬바디 등 총 200분류군이 발견되었고 보존을 위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원시림은 화산폭발때 발생한 부석이 비옥한 토양층을 형성하여 조성되었다. 대나무가 많이 자라 죽도라 불리는 울릉도의 한 부속섬도 얇은 부석층으로 덮여있다. 울릉도 화산의 분화구에 해당되는 나리분지는 폭발 후 그 일대가 가라앉아 형성된 칼데라이자 그 안에 또 다른 작은 화산 알봉을 품은 이중화산 분화구이다. 두 개의 칼데라가 겹쳐 만들어진 이곳은 울릉도에서도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하여 해마다 눈꽃축제가 열린다. 알봉은 점성이 강하고 끈적한 용암이 봉긋한 돔형태로 굳어진 것으로 마치 새의 알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분화구가 뚜렷하지 않아 살짝 패인 꼭대기를 분화구로 추정하고 있다.우산국·우릉도·무릉도·우릉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한 울릉도는 현재 지오투어리즘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화산으로 형성된 지질과 그 이후 침식된 세월의 흔적을 머금었으며, 독자적으로 자생한 원시림이 남아있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울릉도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 온 역사가 흥미를 더한다. 오늘도 하늘이 허락한 사람들은 잔잔한 바람과 고요한 파도를 만끽하며 울릉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는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9-04

용이 된 신라 문무왕, 경주 문무대왕암

청명한 하늘과 드넓은 바다, 넘실거리는 파도 사이로 거대한 암초가 눈에 들어온다. 감포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자연 암초다. 동해의 거센 파도가 바닷가로 들이치는 것을 막는 이 거대한 암초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을 몰아내어 통일 신라를 이뤘던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문무왕은 신라의 일반적인 장례가 아니라 화장하여 바다에 산골(散骨)하는 장례 의식을 유언으로 남겼다. 문무왕의 유언은 비교적 세세하게 남아있다. 경주의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문무왕릉비를 발견했는데, 비의 뒷면에 유언이 새겨져 있었다. 문무왕의 업적을 세세히 나열하고, 태자의 왕위 계승을 왕의 관 앞에서 하길 바란다. 이는 왕권을 높이고 태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간소한 장례와 화장을 당부하였고, 통합된 삼국 사회에 대한 의견도 제시한다. 문무왕이 죽자 평소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대왕암에서 뼈를 뿌렸다고 한다.신라는 동해안에 인접하여 바다를 통한 교류가 많고, 3~5월에 왜의 침입을 많이 받는 지역이다. 특히 신라 인근의 바다는 대기가 불안정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용오름 현상이 잘 관측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물이 있는 곳 대부분이 그렇듯이 신라에도 당연히 오래된 용신앙이 있었다.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으며, 석탈해의 설화에서도 세상을 통치하는 용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신라의 용신 숭배는 문무왕 시기에 불교와 융합하면서 호국신앙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당전쟁이 일어나자 문무왕은 불교 법사 명랑(明朗)에게 승리할 수 있는 비법을 물었고, 명랑은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비법을 전수한다. 문무왕은 사천왕사라는 절을 세워 당나라 배를 두 차례 침몰시켰다. 문무왕은 사후 자신의 유언대로 불교를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는 동해의 용이 되었다. 그 후 아들 신문왕에게 김유신과 함께 나타나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만파식적과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건넨다. 당시 사람들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영험하게 여겼고 아직도 용신앙은 이 지역에 남아있다. 기우제는 지낸 것은 물론이고 임진왜란 때는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지금도 1년 내내 무속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문무대왕암의 중앙에는 수면에서 깊이 1.2m의 십자형의 수로가 있고 그 중앙에는 거북이 모양처럼 보이는 커다란 돌이 놓여 있다. 수로는 입수구와 출수구의 높이를 달리하여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조정하고 수로의 벽을 정비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중심부의 큰 암석을 석실의 덮개돌로 여겨 그 아래 부장품이나 봉인된 항아리 등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암초 위의 물을 빼고 조사한 결과 석실도 부장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곳을 문무대왕이 잠든 곳으로 여기는 것은 감은사와 이견대, 문무왕릉비, 사천왕사 등과 같은 문무왕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 여러 기록에서 문무대왕암의 위치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감은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이 불교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하고자 짓기 시작하여 신문왕 2년에 완공된 절이다. 현재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절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큰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통일신라 초만해도 해수면이 지금보다 1m 이상 높아 감은사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왔으며, 실제로 감은사지 터 인근에 나루터도 발견되었다. 감은사 주춧돌 아래는 다른 사찰들과 다르게 틈이 있다. 사찰이 땅에서 살짝 떠 있을 수 있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금당의 오른쪽 아래쪽에는 기록과 일치하는 용혈도 발견되었다. 이 용혈은 강으로 이어졌다가 문무대왕암이 있는 바다로 연결된다. 신문왕이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대왕암에서 지내다 강을 타고 용혈을 통해 감은사에 드나들 수 있도록 마련된 통로로 알려져 있다. 감은사는 고려 몽고침입 때의 화재로 주춧돌과 탑 두 개만 남아있다.이견대는 문무대왕암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에 지어졌다. 이곳은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한 곳이기도 하고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오랜만의 부자상봉을 기뻐하며 대를 만들었다고도 하며, 만파식적을 얻고 기뻐하여 만들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문무왕에 대한 제례를 지내던 장소이자 왕권을 강화하기에 좋은 곳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왜의 침공을 경계하기에도 좋은 지리적 거점이었다.문무왕을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했고, 사람들은 그가 동해의 용이 되었다고 믿었다. 현재 문무대왕릉은 인공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고, 대대로 영험한 장소로 여겨져 왔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의 염원처럼 굳건히 버티며 동해의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거대한 자연 암초, 문무대왕릉의 전경이 저 멀리 바다 위에 펼쳐진다. 청명한 하늘이 몹시도 선명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8-28

이산해(李山海), 유배지 평해에서의 3년

기성은 울진 평해의 옛 이름으로 과거에는 강원도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지금은 청정지역으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만끽하기에 좋은 장소이지만 조선 중기만 해도 유배를 보낼 정도로 척박한 곳이었다. 높은 산맥을 넘지 않으면 갈 수 없고,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비나 눈이 아니면 바람이 불고, 안개도 자욱하여 날씨의 변덕이 심했다고 이산해(1539~1609)의 유배문학 ‘아계유고(鵝溪遺稿)’에 전해진다.이산해는 고려 말 유학자 이색의 7대손으로, 1588년 우의정, 1590년 영의정에 올랐던 동인의 중심인물이다. 서인 세력이 몰락하고 그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온건파 류성룡(남인)과는 달리 강경한 태도(북인)를 보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의 몽진을 추진하였다가 이듬해 류성룡·이양원과 함께 파직되어 평해로 유배를 떠났다.유배형은 조선의 5대 형벌 사형·유형·도형·장형·태형 중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다. 중죄를 지은 자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보내 임금이 사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살게 하는 형별로, 양반은 물론 평민과 천민에게도 내려진 벌이었다. 잘 알려진 유배지들은 대개 바닷가·변경·오지· 섬이었다. 흑산도·추자도·제주도, 삼수·갑산, 강원도 오지, 포항 장기 등이 있었다. 유배 생활은 유배지로 가는 것부터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포함한다. 유배지로의 여정은 자비로 해결해야 했고, 압송관의 경비도 일부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루 평균 8~90리는 가야 했기에 말을 타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 돈이 드는 일이었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고을 수령이 지정해 준 보수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생활의 질이 판가름 났다. 보수주인이 풍족한 이라면 좋은 방 한 칸에서라도 지낼 수 있었지만, 대개는 유배객이라는 천덕꾸러기를 떠맡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전·군교·관노 등이 강제로 맡았다. 다산 정약용은 곡산부사로 있을 적에 고을 기금을 별도로 마련하여 유배객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고 하니 그만큼 돈이 드는 일이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는 왕후의 어머니였음에도 막걸리를 팔며 생활했고, 선조때 홍성민은 유학자임에도 상업으로 식량을 보충해야 하는 유배지의 삶을 한탄했다. 정조때 안조환은 1년을 옷 한 벌로 버티며 추운 겨울을 보냈고, 동냥을 해서 배를 채웠다고 전해진다.이산해는 곧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은 관리였기에 유배지로의 여정이나 삶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전란 중이라 초호화판 유람인지 유배인지 구분 안 될 정도로 경우가 없지도 않았다. 철종때 김진형은 삼천석꾼을 보수주인으로 삼아 선비들과 음주가무를 즐겼고, 이를 북천가에 고스란히 남겼다. 선조때 조헌은 유배가는 중에 활쏘기와 만찬을 즐기다 숙취로 쉬어가는 여유를 부렸으며, 광해군때 이항복은 유명한 기생 조생의 집에 일부러 하루 묵어가기도 했다.1593년 3월, 이산해는 강릉·속초·삼척을 거쳐 유배지 강원도 울진(현재는 경북) 평해 서경포에 도착했다.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에서는 비린내가 나서 코를 휘감아 구역질이 나려 하였다. 밥을 차려 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악취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해빈단호기’의 일부) 한양 양반의 눈에 바닷가 오지의 집단 거주지 모습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이산해는 평해의 서경포·서촌·달촌·화오촌·황보촌 5곳에서 3년간 우거했다. 그의 유배문학 ‘아계유고’에서는 울진 평해의 16세기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연풍광, 백성의 삶, 풍속, 민간신앙 등 그리고 유배지에서의 삶을 알 수 있다. “백암산 아래에 온천이 있어/ 한 표주박 물로도 온갖 병이 낫는다네/ 이제부터 자주 가서 몸을 씻어서/ 이 늙은이/ 묵은 시벽을 치료해 봐야지/(‘온탕정’)” 백암온천은 당시에도 병을 낫게 해주는 효염으로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또한 “불을 때면 매캐한 연기가 늘 방 안에 가득하고 비가 오면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앉아 있어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달촌에서의 생활이 녹록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오촌에서는 소나무를 이용하여 피서지를 마련하고 촌로와 보리술을 마시며 어울리는 소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황보촌에서의 2년 6개월 생활은 앞의 4곳에 비하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보수주인 곽간은 이산해 부친이었던 이지번이 중종때 유배와서 머물던 인연인 곽생의 손자였다. 곽생은 이지번이 기거지 벽에 써둔 시를 떼어내어 보관하고 있기까지 했다. 이산해의 유배 생활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위리안치가 아니었던 만큼 평해 안에서는 생활은 팍팍하지만 견딜 수 있을 정도였던 듯하다.이산해는 평생 시 840수를 남겼는데 그중에서 483편을 평해 유배 기간에 적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18년간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고, 윤선도는 25년간 4번의 유배 끝에 ‘어부사시사’·‘오우가’를, 정철은 ‘사미인곡’·‘속미인곡’을 남겼다. 척박한 유배지의 어려움과 고독 등을 문학 활동으로 풀어낸 유배객들의 마음이 지금도 유배문학에 남아 현대인들에게 말을 붙이는 듯하다. 현재가 어렵다고 주저앉지 말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이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8-21

사랑할 줄 아는 드물고도 큰, 영양의 장계향

“인생이 70을 사는 것은 옛부터 드문 일이라 했는데/70에 3살을 더했으니 드문 가운데 더욱 드문 일/드문 가운데 아들 많으니 더욱 드문 일/드문 가운데 드문 일이 겹쳐 드문 경사가 나에게 있구나”( ‘희우시(稀又時)’, 장계향 73세)장계향(張桂香·1598~1680)은 조선 후기 남성 중심의 성리학적 위계질서 안에서 여성으로서는 드문 삶의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애민과 선행으로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불리며 칭송받았으며, 효녀이자 위대한 어머니로 알려졌다.본인의 시서화가 뛰어남을 물론이고, 최초의 한글 요리서를 적을 정도로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현대인 만큼이나 장수(83세)했고, 소설 ‘선택’(1997, 이문열)의 주인공으로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장계향이 시대를 초월하여 이렇게 드문 발자취를 남긴 것은 그녀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실천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 아닐까.장계향의 어질고도 큰 성품은 남겨진 12편의 한시에 잘 드러난다.‘학발시’에는 병들고 늙은 모가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가난 그리고 시적 화자의 안타까움이 3연에 걸쳐 길게 적혀있고, ‘성인음’에서는 군자에 대한 인식이, ‘경신음’에서는 몸을 함부로 하지 않는 효에 대한 마음이 적혀있다. 말년에 손자 신급과 성급에게 각각 성인의 마음과 학문을 익히는 자세가 기특하다는 투의 시를 보내기도 했다. 그녀의 적벽부체(赤壁賦體)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에게 호방하고 강하여 중국인의 필체로 착각할 정도라는 칭찬도 들었고, 그림 솜씨도 뛰어나 ‘맹호도’를 남겼다. 인두로 그린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그림을 박차고 뛰어나올 듯 포효한다.장계향은 알아주는 효녀이자 위대한 어머니이기도 하다.19세 결혼 후 시부모 봉양은 물론 해마다 친정아버지를 찾아뵈었을 정도로 지극한 효심을 지녔다. 당시 영덕에서 안동까지는 꽤 먼 거리였음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5리나 떨어져 있는 의병장 남경훈의 서당까지 전부인 아들을 매일 업어다 주었을 정도로 차별을 두지 않고 아이들 교육에 힘썼다. “너희들이 비록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은 있지마는 나는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문득 기뻐하면서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녀의 교육철학만 봐도 ‘여중군자’라 불릴만하다.장계향은 남편과 함께 애민과 선행을 실천하며 ‘군자’로서 평생을 살았다. 물려받은 어마한 재산을 형제들에게 양보하며 미련을 두지 않았고, 마을에 기근이 들면 집 앞에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나눠주었다. 지금도 그녀의 유허비 옆에는 당시의 선행을 기억하는 300년 수령의 도토리 나무가 있다. 노비가 아플 때는 손수 병간호도 했다고 하니 본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을 타고나지 않았을까.그녀의 큰 성품과 행적은 현재 영양의 두들마을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다.태어난 안동·시부모를 모신 영덕·분가한 영양 가운데, 영양 석보면 한 언덕의 두들마을은 장계향·이시명 부부의 신념이 후손들에 의해 오랫동안 이어진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다.작가 이문열의 고향으로도 알려진 이곳에는 그의 문학이 숨 쉬는 광산문학연구소(2022년 화재)가 있고, 애국 열정만으로 항일과 독립운동을 했던 의인들의 자취가 있다.장계향·이시명 부부가 살았던 석계고택이 있고, 그의 넷째 아들 이숭일이 대를 이어 강학하던 석천서당이 있다. 그리고 부모의 유학적 가르침을 새긴 낙기대(樂饑臺)와 세심대(洗心臺)도 있다. 세심은 치심수행(治心修行)을 뜻하며, 낙기는 안빈수도(安貧守道)를 뜻한다.또한 ‘음식디미방’체험관이 있어 옛 요리를 만들어볼 수 있다. 책에는 일반양반가의 접빈용 요리 146개가 구체적인 조리법에 따라 분류되어 적혀있다.당시 요리들은 각종 조미료에 단련된 현대인의 입맛에는 매우 담백한 편이나 현대에 활용되지 않는 재료가 있어 유용한 자료로도 가치가 있다. 면류와 만두류가 특히 많은데, 꿩·생선의 껍데기·곰도 요리의 재료가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녀의 유적비와 예절관, 한옥체험관 등 장계향의 발자취를 살필 수 있는 장소가 있다.장계향은 조선 후기 여성으로서는 꽤 드물게도 이름을 남긴 여인이다. 남성조차 유학을 배웠다하여 군자의 길을 걷는 이가 드물고, 지속적인 애민과 선행을 실천하는 자도 드물고, 재물에 욕심을 내지 않는 사람도 드물던 시대였다. 장계향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삶을 기억하고 회자한다.과거에도 현대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커다란 마음인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8-07

이야기가 살아있는,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벽은 이야기를 품는다. 바위에 그림을 새긴 구석기의 벽도 있고, 사후세계관이 그려진 고분벽화도 있다. 분필로 ‘00바보’라고 낙서한 옆집 벽도 있고, 공공미술로서 특별한 주제를 표현한 벽화마을이나 거리도 있다. 벽에 담긴 이야기는 책에 담긴 것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이야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고 사랑받는데 다른 이야기는 외면받고 지워지기도 한다.대구에는 사랑받는 이야기를 품은 벽화거리가 하나 있다. 그곳은 오래된 골목에 한 싱어송라이터의 삶을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덧입힌 곳이다. 다리를 꼬고 기타를 치는 그, 마이크와 하모니카를 앞에 둔 그, 오토바이를 탄 그, 포장마차 사장이 된 그. 아름다운 노래 가사와 슬픈 목소리와 환한 웃음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김광석이 벽마다 그려져 있다. 익살스러운 옆집 아저씨처럼 활짝 웃고 모습이 어둡고 낡았던 좁은 골목길을 환하게 밝힌다.‘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2010년 슬럼화되던 방천시장과 그 일대를 살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그의 음반 ‘다시 부르기’와 ‘그리다’를 혼합해 거리의 이름을 정하고, 대구의 미술작가 20명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노래만큼이나 다양한 김광석을 만들어냈다. 이 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단순한 볼거리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반드시 누군가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1995년 샘터 9월호 인터뷰 중에서)’ 이 거리에는 그의 말처럼 공감과 위로가 되는 이야기가 벽마다 새겨져 있다. 김광석을 형상화한 벽화나 동상, 지금도 애잔한 그의 목소리, 유품이나 콘서트 영상을 볼 수 있는 스토리하우스, 그의 노래를 재해석한 버스킹(busking),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노래 가사에 사람들은 마음을 연다. ‘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먼지가 되어’ 등 그의 노래는 태어난 이래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친구가 되어 줬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대구의 도시재생사업 중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던 것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나와 이웃의 이야기가 거리에 수놓아졌기 때문이다.소규모 자원봉사에서 시작된 벽화거리 조성은 2006년 ‘아트인시티’때부터 도시재생사업으로 활용되었다. 나눔·희망·주거환경 개선·관광 활성화 등 공공의 목적을 내세워 주로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의 미관을 정비하기 위해 채택되었는데, 특히 우범지역의 범죄 발생률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지금은 벽화마을이나 거리가 조성되지 않은 지자체를 찾아보기가 더 힘들 정도로 범람한 상태다.대구도 예외는 아니어서 해마다 벽화마을이나 거리가 늘어나고 있다. 마비정 벽화마을, 구룡산 해맞이마을, 옹기종기 행복마을, 두류 벽화미로마을, 이천동 99계단 벽화거리, 이인성 화가 벽화거리, BTS 뷔 벽화거리, BTS 슈가 벽화거리,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들안길 시화거리, 영남대로 과거길 벽화골목, 칠성시장 역사벽화길 등 곳곳에 그려졌다. 작은 공원이나 학교 담벼락 또는 계단, 가로등이나 전봇대 등에서도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술가, 벽화시공업체, 봉사자 등 벽에 그림을 그리는 주체도 다양하다.사실 모든 벽화마을이나 거리가 다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벽이 품은 이야기가 마음의 현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특색 없는 꽃이나 나무 등과 같은 자연을 그리고, 원색을 심하게 사용하고, 일관된 주제가 없으며, 예술가의 창의적 표현이 없는 경우도 많이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실거주자의 사생활을 침범하여 불화가 발생하고, 그 여파로 벽화가 지워지기도 한다. 부동산 가격이 요동쳐 외부 자본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가난이 상품화되고, 낭만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건 비일비재다. 페인트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가 부족이나 사후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경우도 있다.‘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본래 도시순환도로 옆에 있는 어두침침하고 푹 꺼진 좁은 골목길이 었다. 오래된 회색빛 시멘트벽이 무심하게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 그 거리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되살아나고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벽화를 그려 공간을 재정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광석의 삶과 노래’라는 치트키가 마음에 닿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주민들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여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과 잘 유지되는 사후관리, 시대에 맞춰 변하려는 노력도 몫을 한다. 물론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겠지만 말이다.수많은 벽화가 전국 방방곡곡 마을과 거리에 무분별하게 그려졌다. 대구에 그려진 벽화마을과 거리도 꽤 많다. 벽은 자신의 품은 이야기를 그저 드러낼 뿐이다. 단순히 도시의 미관 정비와 관광상품화가 아닌 진정한 도시재생으로서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벽이 품은 이야기가 마음의 현을 움직이는 그런 이야기이길 바라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7-31

신라의 독특한, 영주 순흥 벽화고분과 어숙묘

영주 순흥은 예부터 소백산을 넘기 위한 주요 거점으로서 고구려와 신라가 패권을 다투던 지역이었다. 한때는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신라의 세력이 확장하고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힘을 쏟을 때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영향을 모두 받았던 만큼 이 지역의 고분은 수용과 융합적인 고분과 벽화가 발견된다. 무덤의 고분벽화는 당시의 생활 풍속·신앙·종교·사상 등을 짐작하게 하며, 회화 기술과 재료·표현 기법 등에 대해 알 수 있게 한다. 신라는 무덤 양식으로 인해 공예품 위주로 발굴이 되어 회화는 매우 희귀한 편에 속하는데, 특이하게도 영주에서 신라의 고분벽화가 발견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신라의 고분벽화는 순흥 벽화고분과 순흥 어숙묘 딱 두 곳만이 있다.봉황이 알을 품는다는 비봉산 서남쪽 구릉에 순흥 벽화고분을 중심으로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고분은 한반도 중부의 고구려계 벽화고분으로 법흥왕 26년(539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약 4m, 지름은 약 14m이며, 널길과 널방으로 나눠지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신라의 주류를 이루는 중대형 돌무지덧널무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내부에는 석회를 덧바른 벽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주로 먹선으로 윤곽을 잡은 후 채색한 것으로 보인다. 순흥 지역에 전파된 불교와 불교문화에 융화된 타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는 실성마립간(402~417)이나 눌지마립간(417~458) 시기이며, 공인은 한참 후인 법흥왕 528년에 이르러서야 이뤄진다. 한 지역의 내세관이 변화하여 다른 종교의 내세관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림에도 순흥 벽화고분은 신라의 불교가 공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성되었다. 이는 이미 오랜 시기 동안 순흥에 불교 신앙이 확산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로국(신라)은 국경의 소국에게 기존의 지배 구조를 인정해주면서 변경 방어를 맡긴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순흥은 국경이므로 거의 자치 행정이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이러한 도시의 유연한 분위기 속에서 순흥은 불교 수용과 융합의 통로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삼국유사’의 불교 전파 흔적-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와 아도의 노력-을 살펴보아도 경주의 영향력이 다소 적었던 순흥과 그 인근이 선진문물 수용에 용이했음을 알 수 있다.순흥 벽화 고분의 널길 벽에는 널방을 지키는 천왕형 역사(力士)가 그려져 있다. 역사는 근육질 몸과 부리부리한 눈, 붉은색 상체가 거의 드러나는 인도식 승려복을 걸치고 있으며, 입은 크게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듯하다.전체적으로 이국적인 생김새를 지녔다. 널방의 동벽은 훼손이 심한 편으로 상서로운 새를 그린 서조도(瑞鳥圖)와 원근감 없이 둥글고 원만한 산악도(山岳圖)만이 일부 남아 있다. 서조도의 새는 ‘해 안의 새’에서 고구려의 ‘삼족오’를, 세련된 선에서 백제의 ‘봉황’과 유사한 면을 연상하게 한다. 북벽에는 산·구름·새·연꽃·연못 등의 그림을 통해 불교적 이상향을 내세의 공간으로 표현하였다.이를 지키는 이는 서벽의 뱀을 쥔 역사와 버드나무이다. 뱀과 함께 그려진 역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흔하지만 귀가 달린 뱀은 신라만의 변형으로 보인다. 재생과 순환을 상징하는 신수로서의 뱀에 대한 신앙이 일부 불교에 수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버드나무는 벽사와 재생을 뜻하는 신목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신성시했으며, ‘귀신 쫓는 나무’로도 유명하다. 버드나무에 대한 관념도 타신앙의 불교 수용으로 볼 수 있다.남벽에서는 무덤의 축조 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묵서 명문과 삼지창에 고리를 걸어 어형기를 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순흥 벽화고분에서 300m 떨어진 어숙묘는 자연적 습기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고분벽화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파손되었다. 다만 널길의 돌문 안쪽에 있는 명문을 통해 진평왕 17년(595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널길 천장에는 활짝 핀 7엽3중판 형식의 연꽃이 남겨져 있다. 3~4중판 연꽃은 5세기 평양과 가야 고분에서도 볼 수 있으나 잎맥을 그린 것은 어숙묘가 유일하다.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고분의 통로에 연꽃을 그려 내세의 이상향으로 향하는 불교적 의미를 더했다. 돌문 바깥면의 두 여인은 긴저고리와 치마·허리띠를 하고 있어 삼국시대의 회화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순흥의 두 고분은 신라의 고분 중 특이한 경우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6세기 삼국의 회화 양식을 알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발굴 전 이미 도굴되어 대부분의 부장품이 사라진 점이 아쉽기만 하다.현재 벽화고분의 가치를 보존하고 관광자원으로서 정비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고 하니 신라의 독특한 고분과 벽화가 어떻게 거듭날지 기대된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7-24

미소 짓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경주’하면 원안에 사람 얼굴이 새겨진 수막새를 쉽게 떠올린다. 둥글고 커다란 코에 비대칭인 양쪽 눈과 광대뼈, 끌어올려진 입꼬리가 왠지 어색하지 않다. 기와 장인이 일일이 손으로 눌러 형태를 잡았기에 자연스러운 얼굴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왠지 옆집에 사는 사람도 수막새의 미소처럼 웃을 것만 같다.대개 사람들은 수막새의 미소를 ‘신라의 미소’라 부르며, 백제 불상의 미소와 비견하여 얘기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미소처럼 후덕하기만 한 미소로 보기에는 기와 속 오른쪽과 왼쪽 표정이 너무 다르다. 오른쪽은 완전히 웃는 형상으로 광대뼈도 올라가고 눈도 부드러우며 입꼬리도 올라가 있다. 코 옆 팔자주름도 음영이 명확하게 보인다. 반면에 왼쪽은 말 그대로 밋밋하다. 두툼한 눈두덩이를 반쯤 뜬 채 쳐다보는 듯도 하다. 두드러지지 않은 광대뼈와 흔적도 없는 팔자 주름만 봐도 웃는 형상으로 보기에 애매하다. 입꼬리는 깨어져서 알 수 없지만 과연 속없이 웃기만 했을까. 안동의 하회탈도 얼굴 형상이 비대칭이라 탈을 보는 방향에 따라 웃는 얼굴로도 비웃는 얼굴로도 보인다. 얼굴무늬 수막새도 ‘요사스런 귀신을 쫓아낸다’는 수막새인데 액운에게 미소만 건네지는 않을 법하다.수막새는 기왓골을 메워 보호하는 실질적인 역할과 건축물을 돋보이게 하는 조형적 역할과 재앙은 피하고 복을 바라는 주술적 역할을 담아 장식하던 기와의 일종이다.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연꽃·도깨비 문양 등이 두루 사용되었다. 시기나 지역별로 연꽃잎이 뾰족하거나 넓고, 문양이 깊거나 얕고, 기와와 직각 또는 둔각으로 만들어졌기에 문화재의 시기를 알아보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신라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2~3세기께 궁에서 기와가 사용되었고, 528년 불교가 공인된 후에는 사찰에서도 연꽃무늬가 장식된 수막새를 장식하였다. 6세기 후반에는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연꽃 모양을 만들거나 얼굴 무늬, 도깨비 무늬 등도 제작되었으나 전체적으로 투박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통일신라에 이르면 다양하고 복잡하고 화려한 무늬가 나타난다. ‘삼국유사’에서는 ‘헌강왕 때에는 초가집이 없고…. 풍류소리가 밤낮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안압지나 여러 절터의 출토된 막새를 보면 지붕조차 사치스럽게 장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꽃·봉황·기린·사자·도깨비·용·구름 등 다양한 무늬가 사용되었다.얼굴무늬 수막새는 1934년 조선총독부 신문 ‘조선’ 229호에 기사와 사진이 실리면서 알려졌다. “이 와당의 출현은 신라예술 연구상 귀중한 자료의 하나”라 소개되었다. 경주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다나카 도시노부가 골동품상에서 100엔에 구입했다고 하는데, 1930년 당시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에 거래되었다고 하니 깨진 기와 하나에 집 한 채 가격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수막새는 경주 영묘사터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묘사는 선덕여왕이 창건한 절로서‘삼국유사’에 따르면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한 양지(스님)는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벽돌탑의 기와 그리고 사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 등을 제작했다”고 나온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제작자가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그가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1940년 다나카가 일본에 돌아가면서 반출되었다가 1972년 극적으로 국내에 반환된다. 다나카는 “보는 이의 마음 깊이 감명을 주는 기와를 작업한 와공의 절절한 정성을 생각할 때 느끼는 바가 있어 신라의 국토에 안주의 땅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기증 이유를 밝힌다. 우리 땅에서 문화재를 모으고 반출했으며, 태평양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근무했고, 우리 문화재를 일본 박물관에 다수 기증한 인물의 국내 기증이 고맙지만 애매한 것은 역사에 남은 일본의 잔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한편 이 수막새는 대기업의 로고로도 재탄생되었다. LG는 ‘Lucky’와 ‘Goldstar’를 합친 단어로 구인회 회장이 락히(樂喜) 화학공업사와 금성사의 이름을 합쳐 ‘럭키금성’으로 명명했다가 변경한 명칭이다. 1995년 LG로고는 얼굴무늬 수막새에서 영감을 얻어 글로벌 기업의 이미지를 담아 제작되었다. 신라 얼굴무늬 수막새라는 ‘과거의 얼굴’이 1천400년이 지나 LG의 ‘미래의 얼굴’로 다시 미소 짓는다.신라를 대표한다고 알려진 미소, 얼굴무늬 수막새는 옛 신라의 영묘사에서 액운을 경계하는 주술적 의미로 만들어졌다. 무섭지도 않은 웃음으로 무엇인들 막을 수 있을까 싶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고, ‘따뜻함이 겉옷을 벗기는’ 법이다. 내 이웃 같은 미소를 수막새로 만들며 그 안에 담았을 염원을 상상해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7-17

보부상이 거닐던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 가는 고개/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가는 고개/ 반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 꼬불꼬불 열두 고개 주물주도 야속하다/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전해져 내려오는 민요에서 언급된 이 고개는 경북 북부 울진과 봉화를 넘나들며 전국의 장시를 다니던 보부상들이 남겨놓은 옛길이다. 현재 산림청에서 조성한 첫 숲길이자 과거 동해안과 내륙의 물류가 오고 가던 창구이기도 했다. 12령이라 불렸으며, 울진·죽변·흥부에서 시작하여 북천 두천리(말재)를 지나 바릿재와 샛재를 거쳐 봉화로 이어진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 단위를 형성하여 성장하던 보부상들이,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등짐장수·지게꾼·선질꾼이라 불리는 지역 단위의 행상인들이 주로 이 고개를 애용하였다. 이들은 많게는 100명까지도 모여 함께 고개를 넘었으며, 샛재 성황사에 상업의 번성과 안녕을 비는 제를 올렸고, 성황사 내 중수 현판에 그 기록을 남겼다. 과거에는 여러 주막도 있고, 서낭당도 있어서 밥을 먹거나 하루 쉬어가기도 했던 12령 길은 현재 교통로로서의 가치는 거의 상실했다. 불영계곡 옆 36번 국도가 개설되어 물류의 통행로가 변화하기도 했고, 무장공비 사건으로 소수 남아있던 마을을 이전하기도 했다. 지금은 2007년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이 조성되고 일반에 개방되면서 우리 문화재 유지·보수를 위한 보호 임업 자원이자 관광명소로서 그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예부터 소나무는 우리 민족과 함께 성장해 온 나무로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솔’은 우두머리라는 뜻을 가지는데, 늘 푸른 모습이 절개와 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인기가 있었다. 또한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어 활용도가 높아 생활 전반에 쓰임이 많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에 솔잎을 매달아 경계 삼았고, 죽으면 관의 재료로 활용하였다. 때로는 나무 속살로 구황을 위한 죽을 끓이고, 때로는 송화 다식·송편·송기떡·송엽주 등 먹거리로 만들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소나무의 여러 쓰임에 익숙해져 있다.이러한 소나무 중에서 소위 명품으로 인식되는 것은 황장목·춘양목이라고도 불리는 금강소나무다. 금강소나무는 단단한 심재가 유난히 많아 황색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에 황장목으로도 불린다. 다른 미송에 비해 천천히 자라는 반면 강도가 2배 이상 강하고, 줄기가 30미터 이상 가늘고 곧게 자라고, 나이테의 폭이 좁아 무늬가 아름답고, 조직이 치밀하여 뒤틀림이 적고, 천연방부제 성분이 배어 나와 잘 썩지 않는다. 특히 해충의 피해에 강하며, 내구성의 변화도 거의 없어서 기와가 올라간 무거운 한옥의 지붕도 잘 견디므로 궁궐과 같은 목조 건축물의 자재로써 인기가 매우 높았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에서 금강소나무로 만든 관곽묘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60처의 황장봉산이라는 보호구역을 설정하여 입산을 금지하기도 했다. 숙종때 처음 실시되었던 조선의 봉산제도는 용도에 맞게 생산임지·공익임지·준보전임지로 나누는 현재의 제도처럼 선재와 건축재를 위한 봉산,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봉산, 관곽재를 위한 봉산, 수도(한양) 인근의 봉산으로 나눠 관리하였다. 봉계석은 대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음각으로 새기고 산지기 이름과 경계를 표시하였다. 현재 대부분의 금강소나무 숲이자 과거 황장봉산은 강원도와 경상 북부를 잇는 태백산맥에 집중되어 있다.한편으로 금강소나무는 춘양목으로도 불린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80년대 초까지 건축과 땔감용으로 많이 벌목되었는데 주요 공급처인 서울에 공급되기 전 춘양역에 모아서 보냈기에 춘양목이라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강릉에서 베어진 금강소나무가 호산항에 집결되어 일본으로 반출되기도 했다. 금강소나무는 일제강점기·한국전쟁·산업 발전 시기를 거치는 동안 보호보다는 활용에 더 치중되었고 손쉽게 벌목되었다. 일본이 ‘신궁산림 200년 계획’을 세워 매년 봄 200~300년 후에 쓸 나무를 심고 보호하는 것에 비해 뒤늦게 금강소나무 숲을 보호하기 시작했다.현재 울진에 가면 국유림 금강소나무 숲길-보부상길·오백년소나무길·화전민옛길·대왕소나무길·보부천길-이 있다. 옛 보부상들이 무거운 등짐을 지고 넘어 다녔던 그 길을 지금은 500년 이상 자리를 지킨 금강소나무를 보기 위해 거닌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7-10

열린 마당,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특별한 가면극이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라 칭하는 이 공연은 본래 마을 수호신을 위한 제의이자 마을 사람끼리의 화합을 기원하던 행사로 대략 10년에 1회쯤 열리는 가면극이었다고 한다. 주로 원시종교 가면극은 대략적인 극의 형태만 정해져 있을 뿐 세세한 각본은 정해져 있지 않고, 광대들이 신의 계시를 통해 당시 사회의 이슈를 다루며 즉흥연기로 하던 공연이다. 그래서 관객과의 소통과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회별신굿탈놀이도 음력 12월 29일부터 정월 보름까지만 치러졌으며, 탈광대들이 장기간 합숙하며, 몸을 정갈히 하였고, 신내림에 의해서만 연행되었다. 대략적인 마당 순서와 내용만 정해져 있을 뿐 세세한 각본은 없었다. 이후 보존회를 통해 복원되면서 무형문화재로서 극본이 마련되었지만 본래 가면극의 기능인 관객과의 소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연희자가 공연에 무엇을 담고 무엇을 표현하는가에 따라, 관객이 어떤 장면에 호응하는가에 따라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시대에 발맞추어 열린 공연을 지금도 이어간다.하회별신굿탈놀이는 고려 중엽(12세기)부터 800년을 이어 현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928년에 열린 별신굿을 끝으로 전승이 단절되었다가 남아있는 채록본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1964년 하회탈 국보 121호로 지정, 1973년 하회가면극연구회 창립, 1978년 연행 유경험자 이창희 발굴 등 복원에 힘써오다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7년 상설 공연 시작, 2010년 하회마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보존해야 할 무형 문화유산이자 하회마을의 대표 관광상품이며 동시대성으로 소통과 화합을 유도하는 공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풍물놀이를 시작으로 무동을 탄 각시탈이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시선을 끈다. 마을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이 각시는 마을의 수호신이다. “하회마을의 허도령이 신의 계시를 받아 금줄을 치고 탈막 안에서 탈을 깎았다. 백일 기한으로 깎는데 마지막 날에도 허도령이 나오지 않자 그를 사모하던 김씨 처녀(17세)가 탈막을 몰래 엿보았다. 마지막 탈인 이매탈을 깎고 있던 허도령이 탈의 턱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에 김씨 처녀도 번민하다 죽음에 이른다. 처녀가 죽은 뒤 당방울이 날아와 떨어졌는데 그 자리에 서낭당을 세워 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당제를 올렸다. 몇 해에 한 번씩 초례와 신방 행사를 치러 서낭신을 위로하고, 탈춤을 추었다.” 하회마을은 고려 중엽 허씨가 자리를 잡고 안씨가 들어왔으며 조선시대에는 류씨가 기득권을 획득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탈 제작자 허도령이 마을에 처음 안착한 허씨와 성이 같다는 것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한다.다음 주지마당에서는 주지 한 쌍이 마당을 정화하고 풍요와 다산을 비는 춤을 춘다. 주지는 들짐승·날짐승·어류의 습성을 모두 가진 상상의 동물이다. 백정마당은 백정이 소를 죽여 소 생식기를 관객에서 파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는 남자배역은 몽두리춤이라 하여 동작이 크고 땅을 내리찍는 듯이 추고, 여자배역은 오금춤이라 하여 무릎이 서로 맞닿듯이 춘다. 백정은 몽두리춤을 추어 캐릭터의 성격을 잘 드러내었다. 중마당에서는 부네를 유혹하는 파계승과 이를 비판하는 초랭이와 이매가 등장한다. 이 마당은 본래 무언극이었으나 현재는 유언극으로 변화하였다. 부네는 작은 첩의 역할로서 분칠한 얼굴, 붉은 입술, 요염한 표정이 특징이다. 각시탈과 함께 턱이 분리되지 않아 가부장 사회에서 말을 쉽게 하지 못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와 반대로 기득권층인 파계승·양반·선비는 턱이 분리되어 있다. 하인 초랭이탈 역시 턱이 붙어있는데,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는 말처럼 삐뚤어진 입을 가지고 있다. 초랭이와 이매를 통해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적 정서와 바보의 역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이매의 넋두리는 별도의 마당은 아니지만 관객을 마당에 초대하는 장면의 호응이 높아 하나의 마당으로 분리해도 좋을 정도로 시간이 늘어났다. 양반선비마당은 양반이 일방적으로 선비에게 지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백정의 소 생식기를 서로 갖겠다고 싸우다 할미에게 일침을 당하면서 마무리된다. 공연자끼리 말다툼이 많아 지루하여 축소된 부분이 있으며, 과거 공연 때보다 갈등의 전개가 빠르게 진행된다. 공연은 다시 풍물 소리가 들리며 모든 공연자가 어우러져 춤을 춘다. 마지막으로 혼례와 신방마당은 서낭신을 위로하는 마당으로 아무도 보지 못하게 비밀스럽게 진행된다고 한다.하회별신굿탈놀이는 지금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과거에는 액운을 막고,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을 공연에 담았다면 지금은 관객과의 호응과 공감으로 화합을 이루는 것이 주가 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변화하는 동시대성을 지닌 예술이자 800년을 이어온 전통가면극인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지금도 열린 공연으로써 우리 곁을 함께하는 문화유산이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7-03

오랫동안 아름다운, 칠곡 가실성당(佳室聖堂)

잘 정돈된 성당길에 들어서면 연한 꽃망울을 머금은 배롱나무가 먼저 눈에 띈다. 7월 중순이 되면 꽃을 피우는 배롱꽃은 나무 백일홍으로도 불리는데 번갈아 피고 지면서 붉은 자태를 잃지 않는다. 마치 128년을 쌓아온 가실성당의 시간과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많은 이들처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 같다.가실성당(가실본당)은 1895년 조선에서는 11번째로, 대구·경북에서는 2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성당이 자리한 왜관 가실은 예로부터 낙동강을 이용할 수 있는 나루터가 여럿 가까이 있어 물류의 흐름이 빨랐다. 천주교도 일찍이 전파되어 조선말에는 한티와 신나무골에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여러 박해로 인해 순교자가 나기도 했다. 현재 한티는 이름 모를 순교자의 무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신나무골은 영남 천주교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순례길은 1967년 ‘한티가는 길’ 순례가 시작된 이래 피정의 집(1991), 영성관(2000), 순례자성당(2004)이 순차적으로 마련되어 지금은 5구간으로 나눠 운영되고 있다. 첩첩산중에 박해를 피해 숨어다니던 길(45.6㎞)이 오늘날 ‘돌아보는 길, 비우는 길, 뉘우치는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이란 부제로 순례자를 이끄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지금의 가실성당 자리는 천주교도 성순교의 기와집이 있던 곳이다. 1894년에 파이야스(Pailhasse) 신부는 성순교의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성당으로 삼았다. 당시만 해도 영남에는 성당과 신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에 경상도 북서부 일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 등지의 지역에 공소를 마련하여 말·도보·나루터를 이용하여 순회하였다고 한다. 1911년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되면서 이듬해 투르뇌(Tourneux)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 대부분을 가실에서 보내며, 사제관과 지금의 성당(1923)을 건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구워진 벽돌을 하나하나 망치로 두드려보고 잘 구워진 것만 외벽에 사용하였다고 하니 가실성당은 그의 정성으로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가실성당은 동저서고의 언덕을 그대로 활용하여 단층 장방형(직사각형) 구조로 만들어진 로마네스크식 벽돌조 건물이다. 외벽은 가로줄과 세로줄을 번갈아 쌓는 영(국)식 벽돌쌓기 기법을 활용했으며, 창문·출입문·축기둥·띠 등에만 회색 벽돌로 장식하고 나머지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의장적 의미에서 높게 지었으며 현관 위에 종탑을, 그 위에 8각의 높은 첨탑을 두어 타워 형태를 갖추었다. 신자들이 모이는 공간의 천장은 목재원형틀로 3개의 반원을 만들어 회반죽으로 마무리했다. 3개의 반원형 천장은 기둥을 두 줄로 늘어놓아 중앙의 신도석과 양옆의 통로로 구분하였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총 10개의 반원형 아치창을 만들었으며, 특이하게도 바닥은 온돌마루로 되어 있다.성당 내부는 유난히 아름다운 볼거리가 많다. 교단의 대형 나무십자가는 1964년 성안나상을 대신하여 중앙에 세워졌다. 이전에는 1924년 프랑스에서 석고로 제작되었고, 본당의 역사와 함께한 국내 유일의 성안나상이 귀히 모셔졌다. 안나는 다윗왕의 후손이자 마리아의 어머니로서 한때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석진 자리에 서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맞은 자국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어린 마리아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내실에는 성체등과 감실도 있는데, 성체등은 감실에 성체가 있음을 상징하는 불로써 한국전쟁때에도 꺼뜨린 적이 없다고 한다. 감실 정면에 있는 작품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를 주제로 삼았다. 내부 벽에는 동양화가 손숙희가 그린 ‘십자가의 길’ 14처 액자들이 걸려 있고, 창문은 색유리창(stained glass)으로 삼왕의 경배, 호숫가의 예수 등 총 40가지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출입구 위의 반원형창에는 착한 목자, 잃었던 아들, 씨뿌리는 사람 등의 비유를 통한 예수의 가르침이 형상화되어 있다. 색유리창은 독일 작가 에기노 바이에르트(Egino Weinert)가 2002년에 가실성당 100주년을 기념하여 설치한 것이다. 또한 종탑에는 안나의 종이 있는데 라틴어로 “나의 이름은 안나…. 많은 분들이 내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사막에 피는 아름다운 꽃처럼 싹이 틀 것이다” 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구사제관은 현재 두 개의 방이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으며 역대 본당 신부들의 사진, 창설 당시의 교인들 교적, 1960년대 교육용 환등기, 잉크로 그린 성서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영남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박해가 있던 시기 그리고 성당이 건축되던 초기, 일제강점기까지 성장하던 교세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농촌 인구의 도시 이주 등으로 80년대 이후 작은 교적을 유지하고 있다. 교세는 작아졌어도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치며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사람을 감응시킨다. 7월 붉은 배롱꽃이 활짝 피면 오랫동안 아름다운 가실성당 언덕길을 걸어보고 싶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6-26

문경 도자기, 흙으로 빚어온 시간

오래전부터 도자기는 사랑받아왔다. 도자기에는 역사·예술·삶이 어우러져 녹아있다.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과 맑고 투명한 빛깔과 그 위를 수놓은 그림과 이를 완성 시키려는 전문가의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나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한국의 도자기는 예술품으로서 그 가치가 일품으로 인정받는다.그러나 현재 도자 제작 기술은 옛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부족하기만 하다.일제강점기에 왜사기가 대량 생산되고 개인 공방이 금지되면서 백자 전승의 맥이 많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1960년 중반 일본과 교류하면서 문경에 남아있던 도자 제작 기술이 현재까지 잊히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태토와 소성용 목재를 구하기 쉬운 문경은 예로부터 관요가 아님에도 도자기로 생업을 잇는 경우가 많았다. 16~19세기 문경읍의 옛 가마터에서는 주로 서민들이 애용하던 백자나 청화백자 식기류가 발굴되었다.한때는 ‘막사발’로 불리던 그 도자기를 사려고 밤새 줄을 서는 등짐장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백색도가 낮고 두꺼워서 관요에서 생산된 도자기에 비할 수는 없지만 서민들의 식탁에서는 유용하게 애용되었다.그러나 시대가 달라지고 소비자의 취향이 변하면서 도자기의 인기는 급속도로 하락하게 된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로는 도자기를 대체할 편리한 그릇이 인기를 끌면서 문경의 가마터에서도 식기류보다 요강과 화분·칠기를 주로 생산한다. 수요가 없는 만큼 도자 제작을 생업으로 삼기에 힘들었다.가마터를 떠나 탄광으로 간 사람들도 많았는데, 1960년대 이후 문경에서 성황을 이루던 석탄산업의 역사는 ‘문경석탄박물관’에 가면 그 흔적을 확인해 볼 수 있다.거의 명맥만을 이어가던 문경 도자 제작 기술은 1960년대 중반 일본의 애호가들과 미술상들이 찾아오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다기의 수요가 높았던 일본에서는 고려다완(찻사발)을 최고라 여겼고, 최대한 똑같은 찻사발을 갖고 싶어 했다. 찻사발은 식기용 대접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대접보다 굽이 높고 좁아 말차가루를 녹진하게 풀어낼 때 사용하기에 적당하다.일본 다도에서는 자주 활용되는 편이나 찻잎을 우려 마시는 한국 다도에서는 생소한 물품이기도 하다. ‘막사발’이라 불렸던 문경 도자기는 찻사발을 만들면서 예술품으로 인정받는다.찻사발의 다채로운 색조는 예술적 가치로 여겨졌고, 백색만을 추구하던 시선도 점점 사라져 갔다.현재 문경은 전통적인 백자가 아니라 일본에 수출한 ‘찻사발’을 문경 도자기의 대표 아이콘으로 삼고 있다. 그만큼 문경 도자기 역사에 있어서 일본과의 교류는 중요했고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1990년대에 들어 전통 기술을 보존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진다. 이를 바탕으로 1996년 김정옥이 최초로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그의 가문은 7대째 도자 제작 기술을 이어왔고, 간결하고 절제된 포도 넝쿨 문양을 고유의 문양으로 삼고 있었다. 그를 기점으로 4명의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를 발굴하고, 1999년 ‘문경찻사발축제’를 열어 널리 문경 도자기 문화를 알린다.매년 문경새재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명장들의 뛰어난 작품뿐만 아니라 신예들의 창조적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모든 작품은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망댕이 가마’에서 제작된 것만 출품할 수 있다고 한다.망댕이 가마는 문경 도자 제작 문화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가마로, 약 20~25cm 정도 높이의 원통 모양 흙덩어리(망댕이)를 돔 형태로 쌓아 올려 만든다. 관음리에 남아있는 옛 가마터에서 최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망댕이 가마는 만드는 시간이 짧고 저렴하며, 내구성이 높고, 단열효과가 좋아서 적은 장작으로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다.문경도자기협동조합에서는 망댕이 가마로 도자 제작하려는 노력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잊혀져 가는 전통 기술의 보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노력이기도 하다.그러나 망댕이 가마는 현대의 전기 가마나 가스 가마처럼 아주 정확한 온도의 불꽃을 유지하기 어려워 일정한 품질의 도자 제작이 힘든 것도 사실이다.전통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도자 제작의 다양한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흙으로 빚어온 시간’을 슬기롭게 이어가는 방법일 것이다.문경의 도자기는 서민과 함께 성장하고, 쇠퇴하며, 변화하였고, 현재는 예술품이 되었다. 시대적 취향이나 기호와 같은 문화가 녹아있으며, 오랫동안 이어온 시간이 깃들어 있으며, 대대로 이어온 도공의 삶도 숨겨져 있다.도자기를 빚어온 시간 안에는 역사와 예술과 삶이 녹아있다. 다도와 차에 관심이 있다면 문경에 들러, 푸르른 말차가루를 녹진하게 풀어낸 찻사발에 담긴 시간의 온기를 음미하는 것도 좋겠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6-12

군위 화본마을, 낡은 것의 온기

사람 사는 온기로 낯선 방랑객을 맞이하는 마을이 있다. 낡은 것·오래된 것·별것도 아닌 것을 보고 만지고 체험하면서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작고 아담한 마을이 품은 온기 한 자락으로 도시 생활에 지친 마음을 쉬어가게 만든다. 군위의 산성면 화본마을은 도시와는 다른 독특한 경관과 문화와 생태 속에서 옛 정감을 방랑객에게 제공한다. 근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화본역 일대와 6~70년대 풍경을 재현해 놓은 ‘엄마 아빠 어릴 적에’ 전시관, 우보면의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를 돌아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다. 낡은 것이 품은 온기가 방랑객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다. 도시민이 바라는 ‘농촌 판타지’, 농촌의 자연 치유력과 재생을 통한 힐링을 군위 화본마을에 가면 찾아볼 수 있다.화본마을로의 여행은 무궁화호를 타고 화본역에 내리는 것에서 시작하면 좋다. 작고 아담한 플랫폼에 발을 디디면 증기기관차의 냉각수확보를 위해 꼭 필요했던 급수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법 커다란 급수탑은 화본역이 근대에 지역의 거점으로서 활발히 운영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영천이나 대구, 안동 등으로 나가 농산물을 판매하고 생계를 유지하던 당시, 화본역은 이 지역의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고 전해진다.화본역은 1936년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938년에 기차 운행을 시작하였다. 운행 시기에 맞춰 설치된 급수탑 안에는 내부 물탱크와 파이프 관, 환기구와 ‘석탄정돈, 석탄절약’이라는 문구가 당시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어 근대 소도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오래된 기차를 활용한 레일카페에서 차 한잔하고, 플리마켓을 구경하고, 일본식 관사(지금은 숙소로 활용)를 돌아보면서 옛 정취에 취해보는 것도 좋겠다. 아쉬운 점은 이 역이 2024년 12월까지만 기차가 운행되고 마감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의 플랫폼에 발 디딜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느림의 대명사인 무궁화호를 타고 여행하는 낭만은 ‘역’으로서의 기능을 멈추면 박물관 유리 속에 장식된 유물과 다름이 없어질 것이다. 화본역 부근에는 재밌게도 실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체험형 전시관이 하나 있다. 1953년에 지어져 2009년까지 학생들이 다녔던 산성중학교 건물을 ‘엄마 아빠 어릴 적에’라는 기억 재현 공간으로 활용한 것이다. 유리 속 장식품이 아닌 실제로 만져볼 수 있는 물품과 체험할 수 있는 옛 놀이로 채워진 이 장소는 주로 가족과 단체 방랑객이 가보기에 좋다. 메인 전시관에서는 방앗간·시골 찻집·전파상 등 향수를 부르는 60~70년대 화본마을의 거리를 볼 수 있으며, 당시의 학교 교실 속 풍경이나 가정집 등의 생활공간이 재현되어 있으며, 지역민의 손때묻은 생활 소품과 포니 차량도 전시되어 있다. 넓은 운동장에서는 꼬마 기차를 타보고, 양은 도시락을 먹고, 달고나를 만들며, 제기나 팽이 놀이도 즐기고,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보고 만지고 즐기다 보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10월 초에 가을 축제와 12월 초 김장 축제로 지역민과 한시적으로 융화되어 농촌 생활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다. 화본마을은 빡빡한 도시 생활에 상처 입은 영혼이 쉬어가기에 좋은 장소다. 이렇게 도시민이 바라는 추억과 향수는 전시관의 유리 밖에서 소소한 힐링이 되었다.지친 도시민의 소소한 힐링 이야기라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를 빼놓을 수 없다. 우보면에 있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로 찾아든 방랑객은 영화에서 받은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어 한다. 푸근하고 정겨운 고향마을, 추억과 낭만이 있는 동네 친구들, 자연의 따뜻한 감성이 녹아든 음식,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등 영화에서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고향마을에서 친구들과 보내며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방랑객들은 실제 촬영지에서 주인공이 앉았던 소파에 앉아보고, 요리하던 주방을 살펴보고, 2인용 자전거를 타보면서 영화 속 장면을 되새김질한다. 빡빡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농촌만의 느린 감성이 힐링을 바라는 도시민에게 ‘농촌 판타지’가 되어 치유와 재생을 전달하는 것이다.낡은 것·오래된 것·별것도 아닌 것은 재해석되기 전에는 쓸모없는 것·외면받는 것·버릴 것에 불과했다. 어느 날 주민들 스스로 이러한 장소와 물품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겨운 것·추억이 담긴 것·치유와 재생이 깃든 것이 되었다. 화본역과 ‘엄마 아빠 어릴 적에’ 전시관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와 마을 곳곳의 벽화들을 통해 주민들이 만들어 낸 ‘낡은 것의 온기’가 방랑객을 부른다. 온기가 그리운 도시민이라면 응당 그 부름에 취해 방랑객이 되어 보는 것도 좋겠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