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이야기를 품는다. 바위에 그림을 새긴 구석기의 벽도 있고, 사후세계관이 그려진 고분벽화도 있다. 분필로 ‘00바보’라고 낙서한 옆집 벽도 있고, 공공미술로서 특별한 주제를 표현한 벽화마을이나 거리도 있다. 벽에 담긴 이야기는 책에 담긴 것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이야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고 사랑받는데 다른 이야기는 외면받고 지워지기도 한다.대구에는 사랑받는 이야기를 품은 벽화거리가 하나 있다. 그곳은 오래된 골목에 한 싱어송라이터의 삶을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덧입힌 곳이다. 다리를 꼬고 기타를 치는 그, 마이크와 하모니카를 앞에 둔 그, 오토바이를 탄 그, 포장마차 사장이 된 그. 아름다운 노래 가사와 슬픈 목소리와 환한 웃음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김광석이 벽마다 그려져 있다. 익살스러운 옆집 아저씨처럼 활짝 웃고 모습이 어둡고 낡았던 좁은 골목길을 환하게 밝힌다.‘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2010년 슬럼화되던 방천시장과 그 일대를 살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그의 음반 ‘다시 부르기’와 ‘그리다’를 혼합해 거리의 이름을 정하고, 대구의 미술작가 20명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노래만큼이나 다양한 김광석을 만들어냈다. 이 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단순한 볼거리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반드시 누군가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1995년 샘터 9월호 인터뷰 중에서)’ 이 거리에는 그의 말처럼 공감과 위로가 되는 이야기가 벽마다 새겨져 있다. 김광석을 형상화한 벽화나 동상, 지금도 애잔한 그의 목소리, 유품이나 콘서트 영상을 볼 수 있는 스토리하우스, 그의 노래를 재해석한 버스킹(busking),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노래 가사에 사람들은 마음을 연다. ‘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먼지가 되어’ 등 그의 노래는 태어난 이래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친구가 되어 줬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대구의 도시재생사업 중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던 것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나와 이웃의 이야기가 거리에 수놓아졌기 때문이다.소규모 자원봉사에서 시작된 벽화거리 조성은 2006년 ‘아트인시티’때부터 도시재생사업으로 활용되었다. 나눔·희망·주거환경 개선·관광 활성화 등 공공의 목적을 내세워 주로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의 미관을 정비하기 위해 채택되었는데, 특히 우범지역의 범죄 발생률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지금은 벽화마을이나 거리가 조성되지 않은 지자체를 찾아보기가 더 힘들 정도로 범람한 상태다.대구도 예외는 아니어서 해마다 벽화마을이나 거리가 늘어나고 있다. 마비정 벽화마을, 구룡산 해맞이마을, 옹기종기 행복마을, 두류 벽화미로마을, 이천동 99계단 벽화거리, 이인성 화가 벽화거리, BTS 뷔 벽화거리, BTS 슈가 벽화거리,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들안길 시화거리, 영남대로 과거길 벽화골목, 칠성시장 역사벽화길 등 곳곳에 그려졌다. 작은 공원이나 학교 담벼락 또는 계단, 가로등이나 전봇대 등에서도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술가, 벽화시공업체, 봉사자 등 벽에 그림을 그리는 주체도 다양하다.사실 모든 벽화마을이나 거리가 다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벽이 품은 이야기가 마음의 현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특색 없는 꽃이나 나무 등과 같은 자연을 그리고, 원색을 심하게 사용하고, 일관된 주제가 없으며, 예술가의 창의적 표현이 없는 경우도 많이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실거주자의 사생활을 침범하여 불화가 발생하고, 그 여파로 벽화가 지워지기도 한다. 부동산 가격이 요동쳐 외부 자본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가난이 상품화되고, 낭만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건 비일비재다. 페인트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가 부족이나 사후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경우도 있다.‘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본래 도시순환도로 옆에 있는 어두침침하고 푹 꺼진 좁은 골목길이 었다. 오래된 회색빛 시멘트벽이 무심하게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 그 거리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되살아나고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벽화를 그려 공간을 재정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광석의 삶과 노래’라는 치트키가 마음에 닿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주민들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여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과 잘 유지되는 사후관리, 시대에 맞춰 변하려는 노력도 몫을 한다. 물론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겠지만 말이다.수많은 벽화가 전국 방방곡곡 마을과 거리에 무분별하게 그려졌다. 대구에 그려진 벽화마을과 거리도 꽤 많다. 벽은 자신의 품은 이야기를 그저 드러낼 뿐이다. 단순히 도시의 미관 정비와 관광상품화가 아닌 진정한 도시재생으로서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벽이 품은 이야기가 마음의 현을 움직이는 그런 이야기이길 바라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