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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李山海), 유배지 평해에서의 3년

등록일 2023-08-21 19:53 게재일 2023-08-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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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초상.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기성은 울진 평해의 옛 이름으로 과거에는 강원도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지금은 청정지역으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만끽하기에 좋은 장소이지만 조선 중기만 해도 유배를 보낼 정도로 척박한 곳이었다. 높은 산맥을 넘지 않으면 갈 수 없고,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비나 눈이 아니면 바람이 불고, 안개도 자욱하여 날씨의 변덕이 심했다고 이산해(1539~1609)의 유배문학 ‘아계유고(鵝溪遺稿)’에 전해진다.

이산해는 고려 말 유학자 이색의 7대손으로, 1588년 우의정, 1590년 영의정에 올랐던 동인의 중심인물이다. 서인 세력이 몰락하고 그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온건파 류성룡(남인)과는 달리 강경한 태도(북인)를 보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의 몽진을 추진하였다가 이듬해 류성룡·이양원과 함께 파직되어 평해로 유배를 떠났다.

유배형은 조선의 5대 형벌 사형·유형·도형·장형·태형 중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다. 중죄를 지은 자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보내 임금이 사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살게 하는 형별로, 양반은 물론 평민과 천민에게도 내려진 벌이었다. 잘 알려진 유배지들은 대개 바닷가·변경·오지· 섬이었다. 흑산도·추자도·제주도, 삼수·갑산, 강원도 오지, 포항 장기 등이 있었다. 유배 생활은 유배지로 가는 것부터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포함한다. 유배지로의 여정은 자비로 해결해야 했고, 압송관의 경비도 일부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루 평균 8~90리는 가야 했기에 말을 타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 돈이 드는 일이었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고을 수령이 지정해 준 보수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생활의 질이 판가름 났다. 보수주인이 풍족한 이라면 좋은 방 한 칸에서라도 지낼 수 있었지만, 대개는 유배객이라는 천덕꾸러기를 떠맡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전·군교·관노 등이 강제로 맡았다. 다산 정약용은 곡산부사로 있을 적에 고을 기금을 별도로 마련하여 유배객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고 하니 그만큼 돈이 드는 일이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는 왕후의 어머니였음에도 막걸리를 팔며 생활했고, 선조때 홍성민은 유학자임에도 상업으로 식량을 보충해야 하는 유배지의 삶을 한탄했다. 정조때 안조환은 1년을 옷 한 벌로 버티며 추운 겨울을 보냈고, 동냥을 해서 배를 채웠다고 전해진다.

이산해는 곧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은 관리였기에 유배지로의 여정이나 삶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전란 중이라 초호화판 유람인지 유배인지 구분 안 될 정도로 경우가 없지도 않았다. 철종때 김진형은 삼천석꾼을 보수주인으로 삼아 선비들과 음주가무를 즐겼고, 이를 <북천가>에 고스란히 남겼다. 선조때 조헌은 유배가는 중에 활쏘기와 만찬을 즐기다 숙취로 쉬어가는 여유를 부렸으며, 광해군때 이항복은 유명한 기생 조생의 집에 일부러 하루 묵어가기도 했다.

1593년 3월, 이산해는 강릉·속초·삼척을 거쳐 유배지 강원도 울진(현재는 경북) 평해 서경포에 도착했다.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에서는 비린내가 나서 코를 휘감아 구역질이 나려 하였다. 밥을 차려 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악취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해빈단호기’의 일부) 한양 양반의 눈에 바닷가 오지의 집단 거주지 모습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이산해는 평해의 서경포·서촌·달촌·화오촌·황보촌 5곳에서 3년간 우거했다. 그의 유배문학 ‘아계유고’에서는 울진 평해의 16세기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연풍광, 백성의 삶, 풍속, 민간신앙 등 그리고 유배지에서의 삶을 알 수 있다. “백암산 아래에 온천이 있어/ 한 표주박 물로도 온갖 병이 낫는다네/ 이제부터 자주 가서 몸을 씻어서/ 이 늙은이/ 묵은 시벽을 치료해 봐야지/(‘온탕정’)” 백암온천은 당시에도 병을 낫게 해주는 효염으로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또한 “불을 때면 매캐한 연기가 늘 방 안에 가득하고 비가 오면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앉아 있어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달촌에서의 생활이 녹록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오촌에서는 소나무를 이용하여 피서지를 마련하고 촌로와 보리술을 마시며 어울리는 소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황보촌에서의 2년 6개월 생활은 앞의 4곳에 비하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보수주인 곽간은 이산해 부친이었던 이지번이 중종때 유배와서 머물던 인연인 곽생의 손자였다. 곽생은 이지번이 기거지 벽에 써둔 시를 떼어내어 보관하고 있기까지 했다. 이산해의 유배 생활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위리안치가 아니었던 만큼 평해 안에서는 생활은 팍팍하지만 견딜 수 있을 정도였던 듯하다.

이산해는 평생 시 840수를 남겼는데 그중에서 483편을 평해 유배 기간에 적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18년간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고, 윤선도는 25년간 4번의 유배 끝에 ‘어부사시사’·‘오우가’를, 정철은 ‘사미인곡’·‘속미인곡’을 남겼다. 척박한 유배지의 어려움과 고독 등을 문학 활동으로 풀어낸 유배객들의 마음이 지금도 유배문학에 남아 현대인들에게 말을 붙이는 듯하다. 현재가 어렵다고 주저앉지 말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이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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