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다양한 사람들이 어떠한 제약도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옛 가야국에서 만든 가야금(伽倻琴)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에 통합되지 못하던 가야를 아우르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가야국의 금(琴), 가야금은 옛 문헌에서는 한글 표기로 ‘가얏고’라 불리던 현악기였다. 주로 긴 오동나무로 만든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꼬아 만든 12개의 줄을 걸고 줄마다 그 줄을 받치는 작은 안족을 두었다. 가야금의 둥근 윗판은 하늘을, 평평한 아랫판은 땅을, 공명통인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을, 12줄과 12개의 안족은 12개월을 상징한다. 또한 악기의 몸체는 천지음양을, 3치 높이의 안족은 천지인을 나타내어 동양의 우주관과 자연의 운행 원리를 담아내었다.
가야금은 대체로 수령이 30년 이상인 오동나무를 5~7년 통풍이 잘되고 그늘진 곳에서 자연건조하여 만든다. 대개의 악기가 그렇듯 둥근 형태로 깎아서 모양을 잡고, 앞판과 뒷판을 이어 붙여 울림통을 만든다. 습기를 제거하고 오랫동안 변질이 되지 않도록 불에 달군 인두로 울림통을 지지는 것도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안족 중앙에 줄의 굵기에 맞는 홈을 파고, 가야금에 실을 걸면 완성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야금은 공명판의 오른쪽 끝을 연주자의 무릎에 얹고 오른손으로는 줄을 뜯거나 튕기며 왼손으로는 줄을 떨거나 누르면서 연주한다. 곧 청명한 음색이 들려온다.
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은 우륵(于勒)에게 가야금을 제작하고, 지역에 따라 다른 가야의 특색을 모아 작곡하도록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의 기록을 보면, “가실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른데 그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악사 성열현(省熱縣) 출신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만들게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우륵이 지은 12곡에는 당시 가야의 지명이 담겨 있다. ‘삼국사기’에는 12곡으로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달기(達已)·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상기물(上奇物)·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보기(寶伎)·사자기(師子伎)를 언급한다. 이 중 10곡의 곡명이 당시 낙동강 주변의 옛 가야 지방의 명칭이다. 하가라도는 신라 법흥왕 때의 아라가야(아시랑국) 지역으로 현재의 경남 함안이며, 상가라도는 신라 진흥왕 때 멸망하여 대가야군이 되었던 지역으로 현재의 경북 고령군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익힌 성열현은 고령에 있다. 달기는 경북 예천 다인현으로 본래는 달기현 또는 다기라 불리던 곳이고, 사물은 사수현 또는 사물현으로 지금의 경남 사천이다. 물혜는 경남 함양군 이안으로 이안현 또는 마리현이었던 곳이고, 하기물은 옛 감문소국이 있던 곳으로 금물현 또는 음달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경북 금릉 아랫개경에 해당된다. 상기물은 경북 금릉의 웃개령이고, 거열은 거열군이라 불리던 경남 거창이다. 사팔혜는 팔혜현·초팔혜현·초혜현으로 불리던 경남 합천군 초계 지방의 옛 지명이고, 이사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일대이다. 보기와 사자기는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렇게 널리 분포되어 있던 가야는 지역마다 전통과 문화가 달랐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성했다. 그러나 신라의 영역 확장은 가야의 존폐 위기를 초래했으며, 대가야의 가실왕은 가야가 통합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음악을 선택했다.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만들고, 각 지역색을 담은 곡을 작곡하게 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고령현 고적조 금곡(琴谷)에서 가야국 가실왕의 악사 우륵이 중국의 진쟁(秦箏)을 본떠서 거문고를 만들어 가야금이라고 불렀다. 우륵이 공인(工人)을 거느리고 거문고를 익힌 곳”이라 전한다. 현재 고령 대가야읍 쾌빈리 일대로 보는데, 가야금 연주 소리가 산골에 정정하게 울렸다고 하여 예전에는 정정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동구뱅이라 지칭되기도 했다. ‘환상’이란 뜻의 고령 방언 동구와 ‘방’이란 뜻의 뱅이가 만나 ‘환상이 보이는 곳’이란 뜻이다. 가야금의 골짜기라 하여 금곡(琴谷)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우륵이 이곳에서 연주하면 그 소리를 듣고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우륵은 평생 185곡이나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 정정골에서 12곡을 작곡했다는 기록뿐이다.
가야국이 망하자 우륵은 제자 이문과 같이 신라에 투항했고, 가야금은 신라에 전수되었다. 우륵은 신라 진흥왕에게 가야금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신임받았다. 계고, 법지, 만덕이란 세 명의 제자를 두어 가야금과 노래, 춤을 전수하고자 했으나 가야의 음악을 망국지음(亡國之音)으로 치부한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진흥왕은 음악에는 죄가 없다며, 세 제자를 설득했고, 우륵은 비로소 전수할 수 있었다. 이후 가야금 음악은 신라의 대악으로 채택된다. 신라의 대악은 아정한 음악, 바른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국음악의 근본이 된다.
정정골의 동산 위에 우뚝 솟은 우륵기념탑은 우륵의 업적을 기리고 지역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대가야축제 추모행사가 이뤄지는 장소이다. 우륵의 집은 아담하고 소박한 곳으로 2009년 건립되었다. 우륵박물관은 가야금과 우륵에 대한 세계를 5개의 테마로 나눠 설명한다. 시원한 산책로를 따라 가얏고 마을을 걷고, 가야금을 만들어 보고, 작은 연주도 할 수 있는 가얏고 마을을 둘러보며 옛 우륵의 자취와 우리 악기의 소중함을 느껴본다.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