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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청도읍성, 공간을 넘나드는 어울림

청도군 화양읍에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색하기 좋은 읍성이 하나 있다. 조선시대에 개축된 이 읍성은 나지막한 성곽을 기준으로 성안으로는 현재의 삶을 영위하는 마을 주민들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군데군데 옛 공간들이 함께 현존해 있다. 성밖으로는 태극 문양의 연못과 정자, 형옥·향교나 석빙고 등과 같은 옛 역사적 장소들이 포진해 있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복원된 청도읍성은 역사적 시공간과 현재의 생활 공간이 서로 잘 어우러져 독특한 마을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성이라 하면 들어가는 관문이 정해져 있어 함부로 침범할 수 없고, 높은 성벽으로 인해 공간과 공간이 명확하게 구분되며, 전시를 대비해서 행정과 군사 시설이 밀집해 있는 집약적인 전통 도시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성은 산성이든 읍성이든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대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놓인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성종은 삼포왜란(1510년) 이후에 왜인의 침투에 격강심을 가졌고,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놓인 13개의 읍에 축성을 계획한다. 그러나 실제 축조된 것은 80년이 지난 임진왜란 직전이 대부분이었다. 호남과 영남지역은 왜와의 전쟁을 대비해야 했으며 그 중 청도읍성도 이때 기존의 성곽을 바탕으로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청도읍성은 아마도 고려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의 성곽은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든 토담과 석담의 중간 형태였는데, 선조 23~25년(1590~1592년) 군수 김은휘가 이 성곽을 석축형으로 축조한다. 청도읍성은 완만한 구릉(대략 100~120m) 위에 세워졌으며, 남북보다 동서 간의 길이가 긴 사각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남쪽이 주산이며, 정문은 서문이다. 성곽의 둘레가 약 1.6km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타 읍성에 비해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반면 성곽의 높이는 타 읍성의 절반도 되지 않는 약 1.65m로 아담하다. 높지 않은 성곽은 전란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백성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 써서 노동력을 낭비한” 성으로 평가되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왜인들은 청도읍성에 무혈입성하여 자신들의 작은 성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당시에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일부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화재로 소실된 부분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17세기 중반에 부서진 문과 관아시설, 성벽, 문루 등을 여러 차례 재건하였다. 고종 7년(1870년)에는 남문을 건립하여 4대문을 처음으로 갖추기도 했다.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읍성 철거정책으로 폐성이 된 후 1916년 군청을 이전하고 민가가 건립되며, 1920년 신작로가 개설되고 1954년 화강지가 축조되면서 읍성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토지의 사유화로 민가가 생기고, 마을길이 확장되고 경작지가 조성되면서 성벽 및 성내 시설의 파괴는 가속화되었다. 장관청, 아전청, 회계소, 군기고 및 3개의 누각 등이 성 내부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객사, 동헌, 척화비, 석빙고, 성내지, 향교 등은 현재까지 남아있다.조선시대에는 시기별로 많이 활용되던 축성법이 있었다. 청도읍성은 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탐색할 수 있는 장소로서, 조선 전기의 끝자락에 유행하던 축성법(내외협축식)과 명종 16년 이후에 사용된 축성법(외축내탁식) 그리고 조선 후기에 개축한 부분에 적용한 축성법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적이 성문을 공격할 때 방어와 공격력을 높이기 위해 툭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옹성이라 하는데, 서문과 북문의 옹성은 반시계방향 반원형으로 생겨서 서문과 북문을 겉에서 드러나지 않게 보호한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축조된 서문의 옹성은 지대석이 없고 작은 돌을 위주로 만들어져서 시기적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행정과 군사 시설은 물론 민가까지 읍성 안에 어우러졌던 흔적이 남아있어 조선시대 성안 풍경을 상상해 볼 수 있다.현재 청도읍성은 역사적 공간과 현재의 마을 공간이 어우러져 하나의 생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주차장이 있는 동문지에는 과거 선행을 한 선비들의 비석이 한 줄로 놓여있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연못이, 왼쪽으로 길을 건너가면 석빙고를 볼 수 있다. 성안에 들어서면 골목길과 마을 주민들의 집, 성내지와 같은 복원된 공간과 벽화가 그려진 집들도 눈에 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 위로 버스와 경운기 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과거에 백성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던 낮은 성곽은 사색하며 걷기에 딱 좋다. 성곽 위를 따라 세워진 삼각 깃발들의 펄럭임과 어쩐지 가깝게 느껴지는 하늘의 구름마저도 길게 늘어선 성곽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5-08

영천 임고서원, 정몽주의 숨결

영천에 가면 고려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년)를 모시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있다. 1600년경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은 이 서원은 해가 좋은 날, 맑은 공기를 폐부에 녹여가며 한나절 산책하기에 딱 좋은 풍광과 정취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원의 입구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은 웅장하고 풍성한 은행나무가 반갑게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 근처에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가 새겨진 독특한 모양의 기념비가 보인다. 그 옆에는 서원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있다. 임고서원은 현재 신서원과 구서원으로 나뉜다. 왼쪽에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몇몇의 건물이 구서원이며, 오른쪽에 큰 마당을 중심으로 시원하게 서 있는 건물들이 신서원이다. 근처의 ‘포은이 물고기가 아니라 용을 낚는다’고 이름 붙인 조룡대(조옹대)와 용연, 상징적인 선죽교와 포은박물관, 지역문화와 연계가 높은 충효문화수련원, 산책로가 모두 서원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임고서원은 1553년 경상도 관찰사 정언각(鄭彦慤·1498∼1556년)이 건의하고, 노수·김응생·정윤량·정거 등이 함께 창설을 계획하여 그 1년 뒤인 명종 9년에 창건되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소수서원(紹修書院·1543년)의 건립 때처럼 퇴계 이황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고서원은 ‘조선왕조실록’에 사액서원이 되는 과정을 5번이나 기록할 정도로 조정의 관심을 받았으며, 소수서원(안향)·문헌서원(최충)·남계서원(정여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남의 대표적인 서원이 되었다.사액서원이 된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면서 나라가 인정한 위상이다. 왕이 하사한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을 보유하여 지방문화의 최전방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직지사·인각사·환성사·운부사 등의 토지에서 세금을 수조할 수 있었으며, 생선과 소금과 노비를 통해 경제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입의 안정은 서원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여 그 영향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임고서원의 영남을 아우르는 영향력은 목판이 아닌 목활자를 소유하고 있어 지방의 관공서에 빌려주었다는 기록이나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사액서원이 되었다는 기록이나 ‘심원록(尋院錄)’에 적힌 방대한 방문자 이름만 살펴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심원록’에 의하면, 주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많이 방문했으며, 종종 기호학파에서도 방문했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모두 방문 기록이 많은 이유는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로 인해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임진왜란 전에는 퇴계학파만의 서원이 아니라 영남 전체를 아우르는 서원이었다. 하지만 임고서원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화재에 소실되어 8년간 향사도 못 지내고 불타버린 옛터에 겨우 한 칸의 초가집을 마련하고서야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는 수모를 겪는다. 1600년 이원익에 의해 새로 짓게 되면서, 선조 36년(1603년)에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사액을 받는다. 이후 서원철폐령(고종 8년, 1871년)으로 문을 닫았다가 1965년에 이르러서야 정몽주 위패만 모시고 다시 서원을 복원하였다.정몽주와 충은 뗄 수 없는 단어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위한 충신은 아니었고, 쓰러져 가던 고려의 중흥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가 조선에서도 ‘만고의 충신’이 되었던 이유는 태종의 추앙과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년)의 극찬이 있어서이다. 정몽주와 죽음의 대척점에 서 있던 태종의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을 빠르게 정착시키기는 방편도 되었지만 ‘다른 길을 걷는 자에 대한 존경’이라는 옛 선비들의 기상을 드러낸 부분이기도 하다.포은은 효로서도 유명하다. 19세에 부친상으로 3년 움막 생활을 하고, 24세에 장원급제를 하나 29세에 모친상으로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1389년 그의 효행을 기리며 유허비가 세워졌다. 조선 성종때 경상감사 손순효(孫舜孝·1427~1497년)는 꿈속에서 백발노인의 “내가 이곳에 묻혀있는데 꺼내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인근을 수색한다. 그는 유실되었던 포은의 유허비를 찾아 다시 세웠다. 유허비는 복원된 정몽주 생가 인근에서 찾아볼 수 있다.현재의 임고서원은 교육기관이자 의례의 장소이자 지역 문화의 중심이었던 옛 역할을 일부 수행하며, 문화재 보존과 관광으로 인한 지역의 활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소극적인 활동이 주를 이루며 지역 문화의 최전방에 있던 활발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영천만의 콘텐츠로 삼기에는 경기 지역에 포은과 관련된 행사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각 지역만의 콘텐츠여야만 할까. 포은은 유명인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장소는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 지역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관광 상품과 체험형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전국이 연계된 문화상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좋은 봄날, 푸른 새싹이 돋아 싱그러운 임고서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포은 정몽주의 숨결을 되짚어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4-24

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를 품은 평온함

고령의 지산동에는 오래된 봉분들이 즐비하다. 주산의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나무들 사이로 빼곡하게 드러나는 봉분들을 만날 수 있다. 주로 산의 정상부 능선, 하늘과 맞닿은 곳을 따라 볼록하게 솟은 이 고분들은 옛 고령에 터를 잡고 4~6세기를 풍미했던 대가야 왕족들의 흔적이다. 그 아래 산각과 사면에도 능선만큼은 아니지만 직경 10m 내외의 중형고분들과 그 보다 작은 소형고분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스스로 천신과 산신의 후예로 여겼던 대가야인들은 죽은 후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 터를 잡고 그들의 품으로 돌아가 평온을 즐긴다.‘산신인 어머니 정견모주(正見母主)와 아버지 천신이 결합하여 두 알을 낳았는데, 두 아들 중 하나는 대가야를 세웠고 다른 하나는 금관가야를 세웠다.’ 대부분의 건국 신화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대변하는 남신이 주가 된다. 그에 비해 고령의 건국 신화에는 신화 이전 모계 사회의 흔적과 여럿으로 나눠 다스리던 옛 사회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는 대가야가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후 ‘대가야국 왕후는 죽어서 산신이 되었’고, 사람들은 해인사의 정견모주 신당(지금은 없다)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약 100년 전까지도 산신제가 이어졌으니 정견모주에 대한 이 지역의 믿음이 굳건함을 알 수 있다.대가야의 역사는 옛 기록에서도 남아있는 유물이나 유적에서도 잘 찾아보기 힘들다. 주로 평가하기로는 삼국에 비해 고대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쓰러진 소국들의 연합체로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 밝혀지고 있는 바에 의하면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다.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펼쳐 백제와 신라가 가야를 덜 견제하던 시기인 5~6세기 초, 대가야는 서쪽의 백두대간을 넘어 백제와 마주했으며 동쪽으로는 신라를 경계에 두었다. 신라의 영역인 낙동강을 교류의 창구로 활용할 수 없었던 대가야는 섬진강을 따라 길게 세력을 넓혀 독자적인 활로를 개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령-거창-함양-운봉-구례-하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루트는 대가야에게 꼭 지켜야 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진안 태평봉수대(太平烽燧臺)와 같은 군사시설이 40여 개나 밀집해 있으며, 여수 고락산성(麗水 鼓樂山城)이나 하동 고소성(河東 姑蘇城)과 같은 산성들도 찾아볼 수 있다. 모두 섬진강 루트를 중심으로 찾아볼 수 있는 옛 군사시설이다. 또한 진안 장수·장계분지 고분, 장수 삼봉리 고분군(三峰里 古墳群) 등 진안·임실·장수·남원 등에는 대가야식 고분군이 종종 발견된다. 촘촘한 물결 무늬가 특색인 고령식 토기와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竪穴式 石槨墓)가 대가야의 영역이었음을 밝힌다.대가야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내륙 고령이 중심이며, 서쪽으로는 기문·대사 지역에서 백제와 날을 세우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마주하고 있었다. 홀로 다른 나라와 교역하기에 어려운 지역으로 보이는데, 대가야는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 그 국가적 지위를 인정받은 적이 있다. 또한 오키나와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국자나 일본에서 발견된 금동관과 금세공품으로 보건대 일본과도 활발히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섬진강이 교류의 창구였을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대가야가 섬진강 루트를 통해 중국·일본과 교류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많은 봉수대와 산성, 섬진강 상류의 가야계 고분이나 토기만으로는 가설을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대가야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는 과정에서 결국 쇠퇴의 길을 걷는다. 어쩌면 당시의 험난했던 전선에서 섬진강 루트를 지키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확장하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를 돕다가 전쟁에서 패해서일지도 모른다. 대가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기에 주어진 정황을 살펴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게다가 562년 이사부(異斯夫)의 공격으로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산등성이 위로 하늘에 맞닿은 촘촘한 고분군이 옛 영광을 노래할 뿐이다.한때는 야로(冶爐, 지금의 합천)에서 생산되던 풍부한 철광석과 섬세한 금동 제련술로 한반도의 한 지역을 호령하던 옛 대가야인들이 고령 주산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봄이 날개를 편 4월, 지산동 고분군 등산로를 천천히 거닐며 옛 대가야인들을 그려본다. 잘 정비된 등산길도, 산새들의 지저귐과 봉분을 호위하는 나무들도, 이곳을 찾은 등산객도 모두 어머니 산신과 아버지 천신의 품에 안긴 옛 대가야인들처럼 평온을 즐긴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4-10

조선 시대 선비가 봄꽃을 즐기는 법

전국이 봄꽃 축제로 들썩이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4년 만이다.3월 초순 매화 축제로 시작하더니 진달래 축제, 벚꽃 축제로 이어지면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까지 오픈했다.지난 주말에는 활짝 핀 꽃에 날씨까지 가세해 상춘객의 마음을 자극했다. 전국 각지 이곳저곳에서 열린 봄꽃 축제에는 꽃 구경하겠다고 몰려든 사람으로 가득했다.4월 한 달은 산에 들에 핀 꽃들이 일상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김광계(金光繼·1580~1646)는 경상도 예안현(현재 안동)의 외내(烏川) 마을에서 태어났다.오랜 기간 과거 시험을 준비했지만, 인조반정 이후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꿈을 버리고 오직 성리학 공부에 골몰했던 인물이다.뒷날 경상감사로 부임했던 인물들이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해 관직에 천거했지만 모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처사형 선비로 살았다.김광계는 23세인 1603년(선조36) 1월 1일부터 65세인 1645년(인조23) 9월 30일까지 약 43년 동안 일기를 기록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대략 28년의 기록이다.20대의 일기에는 과거시험에 대한 관심과 준비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김광계는 과거를 단념하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일상을 영위했다.일기에는 지속적인 독서 기록과 꾸준한 학문 활동이 잘 나타나 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전쟁 체험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김광계는 꽃을 좋아했다. 해마다 음력 3월만 되면 산에 들에 핀 꽃들에 눈길을 주었다.그의 일기에서 봄꽃에 대한 첫 기록은 24세이던 1605년(선조38) 3월 4일의 일기에 나타난다.“할머니가 제천 할머니 등 여러 명의 부녀자들과 함께 근시재(近始齋)에서 꽃구경을 했다. 제천 할아버지도 우리와 함께 봄 산에 놀러 가고 싶어했으나 찾아온 손님 때문에 놀러 갈 수 없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일휴당(日休堂)에서 술을 마셨다.”봄이 오고 꽃이 피니 남녀노소 막론하고 꽃구경에 마음이 들떴나보다. 할머니를 비롯한 부녀자들은 집 주위에 핀 꽃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김광계를 비롯한 남성들은 봄꽃을 보기 위해 산으로 나가려했으나 손님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이루지 못한 봄꽃 구경 때문에 아쉬웠던 그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이후에도 김광계는 음력 3월 꽃이 만발할 때면 어김없이 그 광경을 기록했다.어느 해는 이른 봄에 매화 꽃술을 발견하고 은근한 설렘을 담아내기도 했고, 어느 해는 비를 맞아 떨어지는 산꽃을 보며 애석해하기도 했다. 또 아온 날도 있었다. 이 계절에 김광계의 시선은 온갖 꽃에 머물렀다. 매화, 진달래, 살구꽃, 모란꽃, 장미꽃 등 피었다 지는 꽃에 기뻐하고 또 애석해하며 봄꽃들과 어울렸다.꽃에 대한 김광계의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유난했다. 65세이던 1645년 음력 3월 6일의 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또 몸을 조리하였다. 젊은 종에게 산에 올라가서 산꽃이 피었는지 보고 오라고 시켰더니, 한참이 지난 뒤에 무수히 많은 꽃떨기를 꺾어 가지고 왔기에 산꽃이 크게 피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꽃을 병에 꽂아두고 감상하였다. 밤사이에 몸을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다.”아픈 와중에도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종을 시켜 산꽃이 피었는지 보고 오라 시켰을까.마침 그 종은 산에 핀 꽃을 한가득 따서 가져왔고 김광계는 그 꽃들을 병에 꽂아두고 감상했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밤에 잠도 쉽게 이루지 못할 만큼 아팠던 것 같은데, 그는 꽃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일기의 마지막이었던 이 해의 봄꽃은 김광계에게 즐거움보다 슬픔을 배가시켰다. 보름이 지난 음력 3월 20일에는 며느리도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에 근심이 더욱 깊어진 즈음이었다.“들으니 며느리가 땀을 흘리고 나서 열이 내렸다고 한다. 필시 전염병일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반석(盤石) 위로 나아가니 호숫가 산에는 온갖 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때가 바로 일 년 중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근심과 걱정이 겹친 상황인 데다 전혀 함께 할 형편이 안되니 더욱 한탄스럽다.”며느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김광계는 호숫가로 나갔다. 지팡이에 아픈 몸을 의지한 채 둘러본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계절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사방팔방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의 경치 속에서 김광계는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근심거리가 덮치고 걱정이 겹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봄꽃들을 느긋하게 감상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김광계는 생애 끝자락 시간 속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마주하고 있었다.

2023-04-03

청송(靑松) 주왕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자연은 인공적이지 않을 때, 그 어떤 꾸밈도 필요치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다.산세가 험준하여 사람의 손때가 덜 묻어나는 청송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 있다. 이 일대는 선캄브리아시대 변성암·응회암 산악지형, 중생대 퇴적암과 공룡발자국 지형, 신생대 관입암맥 지형 등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여러 전설이 전해지는 주왕산,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주산지, 신비한 하얀 돌이 즐비한 신성계곡, 돌 속에 꽃을 품은 구과상 유문암(꽃돌) 등 가장 순수한 자연의 모습 그대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주왕산은 우리나라 3대 암산이자 조선 8경으로도 유명하다.암석이 병풍 같다고 하여 석병산, 김주원이 은거했다고 하여 주방산 또는 대둔산, 중국 주왕이 피신했다고 하여 주왕산, 조선 8경으로서 작은 금강산을 닮았다 하여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린다.주왕산을 유람한 기록만 36편이 남아 있는데, 특히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0~1756)은 “돌로만 골짜기를 이뤄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는 산”이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눈은 똑같았던 모양이다.주왕산 초입 주왕계곡 탐방로에 들어서면 7개의 커다랗고 하얀 기암단애(旗巖斷崖)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깃발 바위’라는 뜻인 기암은 주왕의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중국 당나라 덕종 15년에 진나라의 복원을 꿈꾸던 주왕이 전쟁에서 패하여 주왕산에 숨어든다. 신라 마일성 장군은 세수하러 나온 주왕을 화살로 맞혔고, 신라 병사들은 승리를 알리는 대장기를 이곳에 세웠다. 죽은 주왕의 피가 골짜기를 흘러 수달래라는 붉은 산철쭉을 피워냈다.’ 이와 더불어 주왕이 숨었다는 주왕굴, 주왕의 딸 백련 공주가 성불했다는 연화굴,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굴은 모두 주왕과 관련된 이름이다.대전사(大典寺)에서 왼쪽 갈림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상단부의 바위에 비해 하단부의 주상절리(柱狀節理 : 다각형 기둥의 암석이 모여있는 모양새)가 잘 드러나는 급수대라 불리는 바위가 보인다.급수대에는 신라 무열왕의 6대손 김주원에 관한 전설이 내려온다. ‘37대 선덕왕은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홍수로 인해 신라에 오지 못했고, 이를 하늘의 뜻으로 여겨 상대등 김경신(38대 원성왕)을 대신 왕으로 옹립했다. 김주원은 주왕산에 머물며 물이 귀해지자 계곡에서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사용했다.’ 전설에서는 하늘의 뜻이라 했으나 김경신은 무력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김주원은 지금의 강릉으로 물러나 지냈으며, 30년 뒤 그의 아들 김헌창이 ‘억울하게 왕이 되지 못한 아비의 한’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다. 신라말 김헌창의 난은 9개주 중 5개주가 가담한 대규모 난이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는 ‘주왕산에서 진압되어 목숨을 잃는 것’으로 전해진다.급수대 옆의 봉우리인 학소대는 ‘청학과 백학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사냥꾼이 학 한 마리를 쏘아 죽이자 다른 한 마리는 구름 사이로 날아가 버렸다. 사냥꾼이 집에 돌아와 보니 가족들이 모두 죽어있었다.’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은 신선 세계로 가는 길목이라 여겨져 예로부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청학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학소대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은 용추·용연폭포로 이어지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이 있는 곳이라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주왕산은 산세가 험준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푸근한 이웃집 할아버지가 품어주는 느낌을 받는다.이는 산봉우리가 다른 산들에 비해 뭉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은 경상분지(평지)에서 화산활동으로 인해 지면이 솟아올랐음을 짐작하게 한다. 시루봉, 학소대, 급수대, 연화봉과 맞은편의 병풍바위도 평지였다가 산지가 된 뭉뚝한 산봉우리 모양이다. 백악기 말 경상도 일대는 경상분지라는 저지대가 지각변동으로 인해 형성된다. 경상분지는 퇴적암과 화성암 위주로 이뤄진 유라시아판의 끝부분으로, 원시 태평양판과 수시로 마찰을 일으켰고 이로 인한 화산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화산재가 쌓인 두꺼운 경상분지 일대의 지층은 빠르게 식으면서 틈이 생기고 틈을 중심으로 침식되어 주상절리가 형성됐다. 청송의 주왕산은 9번 이상의 화산 분출과 지반의 융기로 만들어진 지형이다. 어렵사리 만들어진 지형만큼이나 주왕산 일대의 풍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지상 최고의 절경이다.주왕산에는 찾아오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지형의 형성과정도 알면 알수록 신기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역사와 사람을 함께 품어 온 이야기도 몹시 풍부하다. 찾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이야기, 어떤 꾸밈도 없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품은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머금은 채 여전히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3-27

경산 갓바위, 그 후덕하고 영험함

팔공산 관봉에는 머리에 보개(寶蓋)를 쓴 불상이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산새를 내려다보고 있다. 커다란 화강암 바위들 사이로 크고 웅장한 몸체가 앉아있는데, 얼굴은 무뚝뚝하지만 손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그린다. 머리 위에 넓적한 바위로 만든 보개를 이고 있어 마치 갓을 쓴 것만 같다. 과거의 모양을 잃어버리고 부서져 내린 보개에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 석가여래좌상은 흔히 ‘팔공산 갓바위’라 불린다.팔공산 갓바위 불상은 투박한 생김새에 비해 여느 불상보다 마음만은 후덕하다. 절실하게 빌면 한 가지의 소원은 반드시 이뤄준다고 전해져 옛날부터 사람들이 곧 잘 찾아오곤 했다.농사가 중심이었던 농경사회에서는 비가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 왔고,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1960년대 이후에는 수능시험을 잘 보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지금도 부처님 오시는 날이나 입시철이 되면 산 아래까지 사람들로 북적여 장사진을 이룬다. 그만큼 영험함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너무 쉽게 소원을 이뤄주시면 신도들이 버릇 없어진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하니 얼마나 영험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겠다.팔공산 갓바위 불상은 약사여래불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9세기쯤 몸체가 만들어지고 고려쯤에 팔각형의 보개를 따로 올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실 미륵불인지 약사여래불인지 아미타불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9세기는 약사여래불이 유행하고 많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는 하다. 그러나 팔공산 갓바위 불상은 약합을 지니지 않았으니 약사여래불로 보기는 힘들다.또 1821년 ‘선본사사적기(禪本寺事蹟記)’에서는 선덕여왕 7년(638년)에 의현대사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조성했다고 하며, 1960년까지만 해도 ‘갓바위 미륵님’·‘영험한 미륵님’으로 불렸다고 한다.하지만 항마촉지인과 불리던 이름만으로는 미륵불이라고 확정하기도 힘들다. 학자들은 통일신라 때 아미타불로 만들어졌다가 고려 때 미륵불로 불리다가 현재는 약사여래불로 개칭된 것이라 설명한다. 어떤 불상이 되었든 과거에도 현재에도 후덕한 불상이란 이미지는 확실한 것 같다.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팔공산 갓바위는 불에 구워져도 소원을 들어주는 불상으로도 알려져 있다.지금은 뽀얀 화강암이지만 1970년대만 해도 인근 주민들에게 새까맣게 타버린 불상의 기억이 남아있다. 이것은 경산의 진취적·역사적 성격이 가미된 독특한 기우제에서 비롯된다.팔공산 갓바위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고 일주일이 지나도 효험이 없으면 불단에다 생돼지 피를 바르고, 인근의 솔가지·장작 등을 불상 주변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5m나 되는 석가여래좌상을 검게 태우는 큰불은 머리 위의 보개, 팔각의 판석을 부스러트렸다. 사람들은 용신이 부처의 몸을 깨끗하게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비를 내린다고 굳게 믿어왔었다. 비를 내리게 하려고 불상에 불을 놓는 이러한 호전적인 성격은 경산의 역사와 설화에서도 그 면면을 찾아볼 수 있다.경산에는 특히 용 설화가 많이 남아있다. ‘동해 용왕의 셋째 딸이 계모의 구박을 받아 집을 떠나게 되고 금강산이 아닌 경산의 용성면 배남산에 터를 잡는다. 이곳에서 10명의 자식을 낳아 키우는데 9명을 승천시키고 1명은 죽는다. 딸은 동해 용궁으로 돌아가고, 아홉용은 봄에 승천하고 가을에 하강하여 지역의 물을 다스린다.’ 김종국 박사는 당시 경산지역의 역사와 설화를 비교 연구하면서, 동해 용왕의 셋째 딸은 경산에 파견나온 김유신 군수로, 계모의 구박은 백성의 요구로, 경산의 용성면은 신라의 최전방으로, 10명 중 9명은 살고 1명은 죽은 것은 전쟁 중에 전부 살 수는 없던 현실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본래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에서도 용은 부처를 수호하는 존재였으며, 중국에 전파되면서는 중국 전통 용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수용되었다.물이 많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믿어왔던 전통적인 용 신앙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더욱 영험함을 획득하게 되고 농사와 관련된 비를 다스리는 신으로서 추앙받게 된다. 팔공산 갓바위 기우제는 하늘과 부처와 용신 모두에게 기원하는 경산의 독특한 제라 볼 수 있다.현재 큰불을 놓던 지역만의 기우제는 사라져 팔공산 갓바위 불상이 검게 물들 일은 없다. 그러나 전국에서 찾아온 이들로 북적이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지금도 여념이 없는 불상은 산 정상에서 무뚝뚝함을 가장한 채 앉아있다.이만하면 여느 불상 중에서도 으뜸가는 영험함과 후덕함을 지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팔공산 갓바위는 지금도 사람들의 소원으로 넘쳐난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3-13

봉화 만산고택, 그 공간 속 자취

한옥에는 켜켜이 쌓여온 삶이 있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역사적 자취가 현재 삶을 이어가는 생활 공간과 어우러져 은은하게 피어난다. 여느 고택이든 그러하겠지만 봉화의 만산고택은 특히나 목련꽃처럼 숭고한 정신과 자연 공간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고택의 은은한 아름다움은 한옥 구조를 이루는 나무 자재의 유려한 곡선과 다양한 지붕 모양에서도, 퍼즐처럼 맞물린 이음새에서도, 담장을 기준으로 나눠진 독립 공간에서도, 건물마다 걸린 오래된 현판에서도, 마당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만산 선생과 그 후손들의 삶에서도 고택 특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진 면을 발견할 수 있다.만산고택은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산세가 깊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동길에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자태를 만날 수 있다. 집은 주인의 성품이 녹아난다고 했던가. 만산고택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은은한 목련꽃 향기처럼 선비정신이 음전하게 배어난다. 이 고택은 만산 강용(晩山 姜鎔·1846~1934) 선생이 1878년에 지었다. 그는 을사늑약(1905) 당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면서 이 고택에서 여생을 마무리했는데, ‘언제 다시 태양을 볼꼬?/죽음에 당하여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른다./하찮은 신하라서 갚을 길이 없으니/이 사무친 한을 뉘라서 알리요?’에서 알 수 있듯이 운명을 앞둔 순간에도 나라에 대한 걱정과 망국의 원통함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 또한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고 투쟁하면서 이 고택에서 삶을 온전히 이어왔다.고택의 공간은 크게 사랑채, 안채, 별당으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공간들은 까치발 높이의 토담으로 분리되어 독립성을 유지한다. 사랑채 공간은 예로부터 외부에서 찾아온 빈객을 위한 화합의 공간이다. 11칸 대문채를 포함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마당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서실이, 정면 기단 위에 5칸 규모의 사랑채가 보인다. 고풍스러운 자태로 빈객을 맞이하는 만산고택의 사랑채는 역사를 되돌아보기에도 꽤 괜찮은 장소다. 네 면에 모두 기와가 얹어진 우진각 지붕의 서실에는 영친왕 이은이 8세에 쓴 ‘한묵청연’(翰墨淸緣, 종이나 책은 먹과 깨끗한 연분이 있다) 현판이 걸려 있고, 팔작지붕의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만산(晩山)’ 현판 사본이 걸려 있다. 두 현판을 통해 당시 만산 선생과 왕실의 돈독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만산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합쳐져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대청, 그 뒤로 작은 마루방과 중방·골방이 ‘―’자형으로 대문에서 바로 보이는 위치에 있으며, 그 뒤편으로 ‘ ’자형 안채와 연결되어 정면 5칸 측면 8칸의 실질적인 생활 공간을 완성한다. 안채 공간은 사랑채 좌우로 완연한 담장을 두어 독립된 공간임을 명확하게 규정한다. 한옥 특유의 반개방형 구조상 안채로 통하는 문은 여러 곳이 있지만 정해진 대문은 측면에 있어 대문에서 바로 노출되지 않는다. 안채 대문은 곧장 4칸 규모의 안채 마당으로 이어져 있으며,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큰 방과 작은 방들·대청으로 구성된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만 안채 마당은 사랑채 지붕이 높아 햇볕이 제한적으로 들어 좀 더 폐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뒷마당이 안채의 양쪽과 후면에 넓게 형성되어 있어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별당은 사랑채의 오른편 담장 너머에 넓고 독립된 공간을 독차지하고 있다. 담장의 작은 문을 통과하여 별당 공간에 발을 디디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이 홀로 고고하게 서 있다. 별당은 대청과 온돌방·골방이 있고 무엇보다 넓은 마당이 건물을 휘둘러 감싸고 있어 자연 공간에 융화된 것처럼 보인다. 세월을 머금은 아름드리 춘양목 기둥과 손때 묻은 대청마루 그리고 듬직한 대들보가 조용하고 온화하게 ‘칠류헌(七柳軒)’이라 적힌 현판을 품고 있다. 빛바랜 세월을 머금은 이 현판은 구한말 위창 오세창(韋滄 吳世昌·1864~1953) 선생의 친필 편액으로 당시 국운을 걱정하던 만산 선생과 접빈객으로 드나들던 문사들의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다만 별당 칠류헌의 지붕은 완벽함이 주는 어색함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본래 한옥의 지붕은 착시현상을 배려하여 안허리곡과 앙곡이라는 곡선 기법을 적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붕은 유려한 곡선과 두드러진 꼭지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칠류헌의 지붕은 앙곡 기법만 적용되어 처마선이 시각적으로 잘못되어 보인다. 마치 고고한 선비의 기질과 인간다운 성품이 함께 피어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숭고한 역사적 자취와 삶을 이어온 생활이 함께 공존하는 것처럼 지붕 하나에서도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든다.만산고택은 겨우내 침묵하다 봄에 피어나는 은은한 목련꽃과 같다. 알면 보이는 한옥의 구조가 그러하고, 망국의 서러움을 품은 채 운명한 만산 선생의 남겨진 마음이 그러하다. 지금은 마당 곳곳에 아담하게 가꾸어진 야생화들과 나무들, 햇볕에 따끈하게 달아오르는 장독대에서 현재 고택을 살아가는 4대손 부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전통문화 체험’이란 주제로 맞이하는 여러 빈객 또한 고택의 은은하게 이어지는 삶에 자취를 남긴다. 145년의 만산고택에는 역사도 생활도 함께 어우러져 있다./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2-27

의성 조문국(召文國), 옛 영광은 잠들어

삶을 이어가는 지역의 공간은 그 지역을 살아가는 지역민에게 주요한 관심사다. 사람들은 시간의 축적에 따른 잠재력, 공간적 위치, 주변과의 관계성, 역사적 사실, 민담이나 전설 등이 명징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의성 금성면에도 그 기대감을 드높인 전설이 전해진다. 삼한시대에 조문국이라는 커다란 왕국이 의성에서 번성했으며, 조문국 경덕왕릉(景德王陵)에 제를 지내면 가뭄을 해결해준다고 한다. 경덕왕릉에 얽힌 전설에서는 주로 꿈에 노인이 등장한다. 노인은 기이한 복식을 입고 나타나 옛 영광을 노래하거나 봉분의 관리에 대해 언질하거나 자신의 집 위에 있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를 조선 조정은 범상치 않게 여겨 의성 현령 이우신( 1670~ 1744)에게 고분을 정비하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게 하며 기우제나 향사를 국가가 주관토록 했다.의성 금성면에서의 전설은 조문국의 존재에 대한 신빙성과 관련되어 있다. 명덕리 비봉산에는 봉황이 날아올랐다는 이야기가, 백장령에는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게 100장의 그물을 쳤다는 이야기가, 오동산에는 봉황이 먹는 오동나무가 많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1960년 대리리·학미리·탑리리에서 5~6세기경 고분군 374여 기가 발굴되면서 이와 같은 조문국 전설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발견된 고분 중 100여 기는 경주 고분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컸으며, 특히나 새(봉황)의 깃털 모양 장식이 있는 금동관도 발굴되어 의성에 오랫동안 구전된 전설의 신빙성을 더욱 뒷받침하였다.의성은 동부의 산악지대를 제외하고 완만한 구릉과 곡저평야로 이뤄져 있어서 예로부터 영남의 곡창지대이자 경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삼한시대 사로국은 외부 세력의 유입을 통제하기 위해 의성의 조문국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려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벌휴이사금 2년(서기 185년)에 조문국은 사로국에 복속된다. 이후 언제까지 조문국 왕실이 유지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화랑세기’에서 조문국의 왕녀 운모와 사로국의 김씨 왕실이 혈연으로 맺어져 신라의 진골 정통을 형성하였다고도 전해지지만 ‘화랑세기’는 정통 역사서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조문국의 기록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소략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금성면의 대규모 고분군은 옛 조문국의 장엄했던 영광을 짐작하게 한다.조문국 경덕왕릉에 지내던 기우제나 지역 향사는 조선때 국가향사가 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된다.이를 박규환이 1910년 개인적으로 제를 지내면서 그 명맥을 이어간다. 그러나 1919년 고종 승하에 곡을 하고 3·1 조문교회 만세운동을 주관하면서 고문으로 인한 병을 얻는다. 그는 당시 천석꾼인 신명환에게 향사를 이양한다. 신명환은 문화통치 시기의 정책에 맞춰 조문국 향사의 규모를 키우고 체계화하였다. 다만 경덕왕릉비를 세웠으나 비문에 일본의 연호가 기록되고, 조문국의 역사를 기록한 ‘미광’을 발간하였으나 조선식민지화를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는 등 당시의 일제 정책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960년 국립중앙박물관 주관으로 고분이 발굴되고, 1985년 경덕왕릉보존위원회로 이전되기까지 조문국 향사는 개인 중심의 향사에서 지역 중심의 향사로 천천히 변화하였다. 1988년 이후 적극적인 기록보존을 위한 노력-사료수집, 연구용역의탁, 간이전시실 운영 등의 의견 제시-으로 조문국에 대한 현대적 자료가 만들어진다. 현재는 의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향사가 이어지고 있다.의성 금성면 고분군에는 조문국사적지와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경덕왕릉을 중심으로 펼쳐진 조문국사적지에는 작약꽃단지·팔각정자·고분거님길·전시관 등이 있어 고분군 사이를 거닐 수 있으며, 길 건너 박물관에는 유물과 발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둥근 돌이 아닌 깨진 돌을 사용한 유사 돌무지덧널무덤, 네모난 구멍이 많은 굽다리 토기, 새 깃털 모양 장식이 특징인 금동관모 등을 통해 조문국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했음을, 경주의 위세품 유물을 통해 사로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물관 옆에는 물놀이터와 지석묘·미로정원, 공룡놀이터가 마련되어 가족 단위의 여행객을 위한 여건도 마련되었다. 잘 갖춰진 숙박시설이나 캠핑장, 카페와 같은 인프라가 좀 더 구축되고, 문화공연과 연계된다면 더 많은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 같다.그러나 ‘여지도서’(1760)의 기록 “문소고을 과거사를 누구와 의론하랴/천년이 지난 오늘 경덕분만 남았도다/비봉곡조 없어지고 사람도 볼 수 없고/조문의 거문고 가버린 지금 그 소리도 묘연하다”처럼 의성은 현재 인구절벽에 가로막혀있다. 애써 지켜왔고 지금도 잘 지키고 있지만 조문국 향사와 같은 지역 문화를 이어받으려는 젊은층은 부족하기만 하다. 이는 비단 의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관광자원을 유치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여전히 의성의 옛 영광은 잠들어 조문국 꿈길 위를 벗어나지 못한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2-13

영일의 태양을 기대어

바다를 물들이며 붉은 동심원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드넓은 영일만에 오직 태양만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두 손을 모아 복을 비는 사람들. 구복을 통해 무엇을 바라며 또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구복은 비단 현재만의 일은 아니다. 옛사람들도 인지만으로 알 수 없는 자연 현상에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고 기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포항 영일 ‘연오랑세오녀(延烏郞 細烏女)’ 설화에는 태양숭배의 흔적이 남아있다. 신라 아달라왕 즉위 4년(157년)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일월이 빛을 잃었는데, 세오의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다시 빛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때 제사를 지낸 곳은 영일현이었다.옛이야기 속에는 역사적 진실을 짐작할만한 모티프가 숨겨져 있다. ‘연오랑세오녀’ 설화에서도 영일에 살며 태양을 숭배하고 철기와 방직 기술을 가진 세력이 아달라왕 시기에 일본으로 거주지를 옮겼음이 드러난다. ‘연오랑세오녀’의 오(烏)는 삼족오(三足烏)와 같이 태양신을 뜻하고, 연오는 철기 기술을 가진 집단의 제사장, 세오는 방직 기술을 가진 여성 사제자를 뜻한다. 또 영일의 지명에서도 태양숭배의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영일현은 신라의 근오지(斤烏支)현으로 해를 맞이하는 곳이란 뜻을 가진다. 신라 때 제사로 되살린 햇빛이 제일 먼저 비췄다는 광명리, 고현성터가 남아있는 옥명리, 세오녀의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광명 가운데 위치했다는 중명리, 햇빛의 힘이 등불처럼 약해지는 곳에 위치한 등명리, 일월지가 있는 일광리,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용이 승천했다는 용덕리, 천제당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세계동(世界洞), 달이 뜨는 벌판이란 의미의 이두식 표현인 도기야(都祈野, 지금의 도구동). 이곳에서는 고분군과 지석묘, 성혈 등이 발견되었고 청동기 시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군락을 이뤘음이 밝혀졌다.기원전 2~3세기는 한반도와 일본 모두 소국들이 난립해 확장되던 시기로 세력들의 이주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한반도에서는 북에서 철기를 가진 세력이 남부로 이주하여 정착하거나 다시 해류를 타고 일본으로도 이주한다. 당시 포항은 사로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영일을 중심으로 다스리던 북방 예족의 후예인 근기국과 불화가 발생하였다. 근기국은 영일을 떠나 일본 이즈모나 쓰루가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월초에 일월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의례가 점점 동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변화하는 기록에서 국가와 지역의 불화를 짐작할 수 있으며, 천일창이라는 신라계 왕자가 일본에 귀화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아달라왕 4년이란 명확한 시기가 설화에 적힌 것으로 당시의 불안정한 정세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달라왕은 석씨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마지막 박씨로서 천변현상을 불길한 미래에 대한 예고로 해석했다. 왜의 침략을 방어하는 사도성을 순행하고 영일에서 제천행사를 열어 국가의 우환을 해결하고자 노력한다.영일은 태양을 맞이하는 장소이자 과거에서 현재까지 안정적인 항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일본과의 인적·물적 교류는 해류나 지류를 이용하고 계절풍의 도움을 받았다. 북방 한류가 홋카이도에서 갈라져 리만한류가 되고, 남방 난류가 올라오다 영일만과 울진에서 마주쳐 일본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남동풍이 부는 4~6월에 규슈나 대마도에서 배를 띄우면 해류를 타고 울산·포항 등 동해 남부에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왜의 침략은 4~6월이 절정이었다. 반대로 겨울철 북서풍을 타면 영일에서 일본으로 갈 수 있다. 동해에서 리만해류를 타고 남하하다가 대한해류를 가로지르면 일본의 서안에 도착한다. 한반도 동해와 일본 서해 이즈모 지역은 음력 12~1월을 제외하고는 바람의 도움을 받아 쉽게 이어지는 것이다. 쉽게 도항이 가능한 동해안 항해는 영일을 떠나 일본에 이주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포항은 ‘연오랑세오녀’의 자취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자연물을 주술적 해석을 통해 경의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했다면 현재는 주술적 해석을 문화로 승화시켜 지역발전과 경제적 이익을 바란다. 과거의 재림으로 현재의 영광을 바라는 마음은 고스란히 포항 곳곳에 녹아들었다. 연오랑세오녀 테마파크에서는 귀비고·일월대·쌍거북바위에서 설화를, 신라와 일본의 과거 뜰·오늘날 제철기술을 표현한 철예술뜰에서 포항을 소개한다. 일월문화공원에서도 일월문화기념관·일월지·암각화·선돌·고분 등을 조성해 일월신앙을 드러낸다. 해양레포츠·해안둘레길·일월문화제 등과 함께 대륙의 산업 및 경제가 영일로 흘러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영일만을 국제항으로 개척하여 환동해문화권에서의 성장동력과 경쟁력 강화의 발판을 마련한다. 해양공간을 입체적으로 개발하고 미래형 해양산업을 육성하여 대륙과 해양을 잇는 중심을 꿈꾸며 태양이 떠오르는 포항의 바다로 나아간다. 지금 이 순간도 포스코의 전경과 어우러진 영일정이 태양을 배경으로 환히 빛나고 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1-30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소통

‘선녀와 나무꾼’은 전 세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티프 중 하나이다. 하늘의 존재가 어떤 이유이건 땅으로 내려오고, 땅의 존재와 이어지면서 하나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하늘과 땅을 잇는 이야기는 자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농경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선녀와 나무꾼’ 또한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를 맺기 위한 과정 위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사슴을 구해준 나무꾼이 선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금기를 지키지 못해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하늘로 따라 올라간 나무꾼은 지상의 노모를 방문하다 또 금기를 어겨 천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닭이 되어 하늘만 쳐다본다.‘선녀와 나무꾼’은 지역마다 조금씩 변형되고 때로는 일부 빠지거나 추가되어 전승되어왔다. 선녀 또는 나무꾼 한쪽만 이야기에 등장하기도 하고, 옥황상제의 벌을 받아 연인과 강제로 헤어지거나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선녀와 나무꾼은 평행선을 달리는 불통의 관계다. 나무꾼은 훌륭한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희망하는 자로서 계획적으로 약탈혼을 추진하며, 선녀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구속에 대한 해방을 꿈꾸다 나무꾼과 결혼한다. 특히 우리나라 ‘선녀와 나무꾼’은 우리가 상상하던 절절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효를 강조하다 연인이나 부부를 이별시키는 비극에 가깝다. 결혼으로 끝이 나거나 홀로 하늘로 떠나버리는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선녀는 아이들을 꼭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하늘에 올라 함께 살던 나무꾼이 노모를 걱정하다가 지상에 내려가고, 금기로 인해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아이와 선녀, 노모와 나무꾼은 ‘엄마와 아이’라는 관점에서 떨어뜨릴 수 없는 관계였던 모양이다. 돌봄과 돌봄을 당하는 생의 역전 관계에서 사랑은 뒷전이 되고 ‘선녀와 나무꾼’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대구에도 ‘선녀와 나무꾼’에 관련된 설화나 민담이 전승되고 있다. 신분 상승, 장가가기, 약탈혼, 이성에 대한 호기심, 구속에 대한 해방, 가정 지키기 등 욕망과 갈등 그리고 그 결과가 부분적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대구의 ‘선녀와 나무꾼’의 옛이야기에서도 역시 소통 부재로 인한 문제들을 엿볼 수 있다. 달성군과 동구를 살펴보면, 달성군 하빈면에는 선녀와 정을 나누고 도망가는 죄를 지어 지상으로 귀양 온 용이 좋은 일 10가지를 하고 승천하는 이야기(‘용재산 용의 승천’)가 있다. 달성군 옥포읍에는 선녀곡, 선녀지, 선녀마을, 선녀약천, 장부타령에서 선녀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이 너무 맑아 일곱 선녀가 여름이면 목욕하러 하늘에서 내려오고(삼탕 이천의 유래), 선녀에게 반한 머슴이 선녀곡 옹달샘에 들었다가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장대비를 맞는다(‘장부타령’). 달성군 가창면에서는 하늘에서 베를 짜러 내려온 옥랑각시에게 노총각이 반하여 욕심을 내었으나 놀란 선녀가 벽에 구멍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옥랑각시굴’)가 전해진다. 동구 불로동에서는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고 운명이 얽힌 양씨와 그의 아내가 된 다섯 선녀의 이야기(‘하늘 선관과 다섯 선녀’)를 찾아볼 수 있다. 동구 팔공산 자락의 환상산의 한 봉우리 초례봉에는 약 1천500년 전 어씨라는 나무꾼이 하늘의 선녀를 만나 초례를 올렸다는 이야기(초례봉의 유래)가 전해진다.또 달성군과 동구, 두 지역 모두 전승되는 노동요에서도 ‘선녀와 나무꾼’의 모티프를 찾아볼 수 있다. 동구 공산동의 민요 ‘베틀소리’에서는 선녀가 내려와 베를 짠다는 내용과 베틀의 부위별 비유적 표현이 들어있다. 동구 평광동의 민요 ‘어사용’과 달성군 현풍읍의 민요 ‘땔나무 노래’에서는 나무꾼의 신세 한탄이 주를 이룬다. 베를 짜서 옷감을 짓고 나무로 땔감을 삼았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금기를 어기고 이어진 인연이나 정서상 떨어뜨릴 수 없는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선녀와 나무꾼이 인연을 이어가는 데 분명한 한계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마냥 순수하게 인연을 맺지 못하는 현대인처럼 그 옛날 선녀와 나무꾼의 시선은 애석하게도 매번 엇나가기만 한다. 이러한 ‘선녀와 나무꾼’의 옛이야기는 대구에서 정기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나무꾼의 옷을 훔친 선녀’라는 지역 연극 작품에서도 그 모티프를 찾아볼 수 있다. 사랑은 현실일까 아니면 마술일까. 결혼과 돈 그리고 사랑. 현대연극 속 선녀와 나무꾼이 어떤 선택을 할지 함께 고민해보고, 옛이야기의 그들과 달리 소통과 배려로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지 상상해봐도 좋을 것이다.지역에 전해져오는 옛이야기는 직접 발을 디딘 땅의 기억에도, 이야기로 재구성된 문화 예술에도 녹아있다. 지역마다 문화콘텐츠 사업에서 테마파크, 출판, 공연, 영상, 음반, 전시 등 다양한 장르로 발굴되고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대구의 ‘선녀와 나무꾼’의 옛이야기는 서서히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풍부히 향유되지 못하는 문화가 세월에 먹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안타깝기만 하다. 문화 발전을 위한 정기적인 스토리 콘텐츠 개발이 무엇보다 필요해 보인다. 옛이야기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대구의 지역민에게도 살아 숨쉬는 문화로서 소통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