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의성 조문국(召文國), 옛 영광은 잠들어

등록일 2023-02-13 16:54 게재일 2023-02-14 17면
스크랩버튼
의성 조문국 박물관.

삶을 이어가는 지역의 공간은 그 지역을 살아가는 지역민에게 주요한 관심사다. 사람들은 시간의 축적에 따른 잠재력, 공간적 위치, 주변과의 관계성, 역사적 사실, 민담이나 전설 등이 명징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의성 금성면에도 그 기대감을 드높인 전설이 전해진다. 삼한시대에 조문국이라는 커다란 왕국이 의성에서 번성했으며, 조문국 경덕왕릉(景德王陵)에 제를 지내면 가뭄을 해결해준다고 한다. 경덕왕릉에 얽힌 전설에서는 주로 꿈에 노인이 등장한다. 노인은 기이한 복식을 입고 나타나 옛 영광을 노래하거나 봉분의 관리에 대해 언질하거나 자신의 집 위에 있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를 조선 조정은 범상치 않게 여겨 의성 현령 이우신( 1670~ 1744)에게 고분을 정비하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게 하며 기우제나 향사를 국가가 주관토록 했다.

의성 금성면에서의 전설은 조문국의 존재에 대한 신빙성과 관련되어 있다. 명덕리 비봉산에는 봉황이 날아올랐다는 이야기가, 백장령에는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게 100장의 그물을 쳤다는 이야기가, 오동산에는 봉황이 먹는 오동나무가 많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1960년 대리리·학미리·탑리리에서 5~6세기경 고분군 374여 기가 발굴되면서 이와 같은 조문국 전설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발견된 고분 중 100여 기는 경주 고분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컸으며, 특히나 새(봉황)의 깃털 모양 장식이 있는 금동관도 발굴되어 의성에 오랫동안 구전된 전설의 신빙성을 더욱 뒷받침하였다.

의성은 동부의 산악지대를 제외하고 완만한 구릉과 곡저평야로 이뤄져 있어서 예로부터 영남의 곡창지대이자 경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삼한시대 사로국은 외부 세력의 유입을 통제하기 위해 의성의 조문국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려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벌휴이사금 2년(서기 185년)에 조문국은 사로국에 복속된다. 이후 언제까지 조문국 왕실이 유지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화랑세기’에서 조문국의 왕녀 운모와 사로국의 김씨 왕실이 혈연으로 맺어져 신라의 진골 정통을 형성하였다고도 전해지지만 ‘화랑세기’는 정통 역사서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조문국의 기록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소략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금성면의 대규모 고분군은 옛 조문국의 장엄했던 영광을 짐작하게 한다.

조문국 경덕왕릉에 지내던 기우제나 지역 향사는 조선때 국가향사가 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된다.

이를 박규환이 1910년 개인적으로 제를 지내면서 그 명맥을 이어간다. 그러나 1919년 고종 승하에 곡을 하고 3·1 조문교회 만세운동을 주관하면서 고문으로 인한 병을 얻는다. 그는 당시 천석꾼인 신명환에게 향사를 이양한다. 신명환은 문화통치 시기의 정책에 맞춰 조문국 향사의 규모를 키우고 체계화하였다. 다만 경덕왕릉비를 세웠으나 비문에 일본의 연호가 기록되고, 조문국의 역사를 기록한 ‘미광’을 발간하였으나 조선식민지화를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는 등 당시의 일제 정책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960년 국립중앙박물관 주관으로 고분이 발굴되고, 1985년 경덕왕릉보존위원회로 이전되기까지 조문국 향사는 개인 중심의 향사에서 지역 중심의 향사로 천천히 변화하였다. 1988년 이후 적극적인 기록보존을 위한 노력-사료수집, 연구용역의탁, 간이전시실 운영 등의 의견 제시-으로 조문국에 대한 현대적 자료가 만들어진다. 현재는 의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향사가 이어지고 있다.

의성 금성면 고분군에는 조문국사적지와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경덕왕릉을 중심으로 펼쳐진 조문국사적지에는 작약꽃단지·팔각정자·고분거님길·전시관 등이 있어 고분군 사이를 거닐 수 있으며, 길 건너 박물관에는 유물과 발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둥근 돌이 아닌 깨진 돌을 사용한 유사 돌무지덧널무덤, 네모난 구멍이 많은 굽다리 토기, 새 깃털 모양 장식이 특징인 금동관모 등을 통해 조문국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했음을, 경주의 위세품 유물을 통해 사로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물관 옆에는 물놀이터와 지석묘·미로정원, 공룡놀이터가 마련되어 가족 단위의 여행객을 위한 여건도 마련되었다. 잘 갖춰진 숙박시설이나 캠핑장, 카페와 같은 인프라가 좀 더 구축되고, 문화공연과 연계된다면 더 많은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여지도서’(1760)의 기록 “문소고을 과거사를 누구와 의론하랴/천년이 지난 오늘 경덕분만 남았도다/비봉곡조 없어지고 사람도 볼 수 없고/조문의 거문고 가버린 지금 그 소리도 묘연하다”처럼 의성은 현재 인구절벽에 가로막혀있다. 애써 지켜왔고 지금도 잘 지키고 있지만 조문국 향사와 같은 지역 문화를 이어받으려는 젊은층은 부족하기만 하다. 이는 비단 의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관광자원을 유치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여전히 의성의 옛 영광은 잠들어 조문국 꿈길 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대구·경북 문화 메모리즈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