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이 봄꽃 축제로 들썩이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4년 만이다.
3월 초순 매화 축제로 시작하더니 진달래 축제, 벚꽃 축제로 이어지면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까지 오픈했다.
지난 주말에는 활짝 핀 꽃에 날씨까지 가세해 상춘객의 마음을 자극했다. 전국 각지 이곳저곳에서 열린 봄꽃 축제에는 꽃 구경하겠다고 몰려든 사람으로 가득했다.
4월 한 달은 산에 들에 핀 꽃들이 일상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김광계(金光繼·1580~1646)는 경상도 예안현(현재 안동)의 외내(烏川)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랜 기간 과거 시험을 준비했지만, 인조반정 이후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꿈을 버리고 오직 성리학 공부에 골몰했던 인물이다.
뒷날 경상감사로 부임했던 인물들이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해 관직에 천거했지만 모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처사형 선비로 살았다.
김광계는 23세인 1603년(선조36) 1월 1일부터 65세인 1645년(인조23) 9월 30일까지 약 43년 동안 일기를 기록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대략 28년의 기록이다.
20대의 일기에는 과거시험에 대한 관심과 준비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김광계는 과거를 단념하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일상을 영위했다.
일기에는 지속적인 독서 기록과 꾸준한 학문 활동이 잘 나타나 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전쟁 체험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광계는 꽃을 좋아했다. 해마다 음력 3월만 되면 산에 들에 핀 꽃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의 일기에서 봄꽃에 대한 첫 기록은 24세이던 1605년(선조38) 3월 4일의 일기에 나타난다.
“할머니가 제천 할머니 등 여러 명의 부녀자들과 함께 근시재(近始齋)에서 꽃구경을 했다. 제천 할아버지도 우리와 함께 봄 산에 놀러 가고 싶어했으나 찾아온 손님 때문에 놀러 갈 수 없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일휴당(日休堂)에서 술을 마셨다.”
봄이 오고 꽃이 피니 남녀노소 막론하고 꽃구경에 마음이 들떴나보다. 할머니를 비롯한 부녀자들은 집 주위에 핀 꽃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김광계를 비롯한 남성들은 봄꽃을 보기 위해 산으로 나가려했으나 손님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이루지 못한 봄꽃 구경 때문에 아쉬웠던 그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이후에도 김광계는 음력 3월 꽃이 만발할 때면 어김없이 그 광경을 기록했다.
어느 해는 이른 봄에 매화 꽃술을 발견하고 은근한 설렘을 담아내기도 했고, 어느 해는 비를 맞아 떨어지는 산꽃을 보며 애석해하기도 했다. 또 아온 날도 있었다. 이 계절에 김광계의 시선은 온갖 꽃에 머물렀다. 매화, 진달래, 살구꽃, 모란꽃, 장미꽃 등 피었다 지는 꽃에 기뻐하고 또 애석해하며 봄꽃들과 어울렸다.
꽃에 대한 김광계의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유난했다. 65세이던 1645년 음력 3월 6일의 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또 몸을 조리하였다. 젊은 종에게 산에 올라가서 산꽃이 피었는지 보고 오라고 시켰더니, 한참이 지난 뒤에 무수히 많은 꽃떨기를 꺾어 가지고 왔기에 산꽃이 크게 피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꽃을 병에 꽂아두고 감상하였다. 밤사이에 몸을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다.”
아픈 와중에도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종을 시켜 산꽃이 피었는지 보고 오라 시켰을까.
마침 그 종은 산에 핀 꽃을 한가득 따서 가져왔고 김광계는 그 꽃들을 병에 꽂아두고 감상했다.
밤에 잠도 쉽게 이루지 못할 만큼 아팠던 것 같은데, 그는 꽃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일기의 마지막이었던 이 해의 봄꽃은 김광계에게 즐거움보다 슬픔을 배가시켰다. 보름이 지난 음력 3월 20일에는 며느리도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에 근심이 더욱 깊어진 즈음이었다.
“들으니 며느리가 땀을 흘리고 나서 열이 내렸다고 한다. 필시 전염병일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반석(盤石) 위로 나아가니 호숫가 산에는 온갖 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때가 바로 일 년 중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근심과 걱정이 겹친 상황인 데다 전혀 함께 할 형편이 안되니 더욱 한탄스럽다.”
며느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김광계는 호숫가로 나갔다. 지팡이에 아픈 몸을 의지한 채 둘러본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계절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사방팔방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의 경치 속에서 김광계는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근심거리가 덮치고 걱정이 겹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봄꽃들을 느긋하게 감상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광계는 생애 끝자락 시간 속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