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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임고서원, 정몽주의 숨결

등록일 2023-04-24 20:01 게재일 2023-04-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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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임고서원.
영천 임고서원.

영천에 가면 고려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년)를 모시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있다. 1600년경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은 이 서원은 해가 좋은 날, 맑은 공기를 폐부에 녹여가며 한나절 산책하기에 딱 좋은 풍광과 정취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원의 입구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은 웅장하고 풍성한 은행나무가 반갑게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 근처에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가 새겨진 독특한 모양의 기념비가 보인다. 그 옆에는 서원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있다. 임고서원은 현재 신서원과 구서원으로 나뉜다. 왼쪽에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몇몇의 건물이 구서원이며, 오른쪽에 큰 마당을 중심으로 시원하게 서 있는 건물들이 신서원이다. 근처의 ‘포은이 물고기가 아니라 용을 낚는다’고 이름 붙인 조룡대(조옹대)와 용연, 상징적인 선죽교와 포은박물관, 지역문화와 연계가 높은 충효문화수련원, 산책로가 모두 서원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임고서원은 1553년 경상도 관찰사 정언각(鄭彦慤·1498∼1556년)이 건의하고, 노수·김응생·정윤량·정거 등이 함께 창설을 계획하여 그 1년 뒤인 명종 9년에 창건되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소수서원(紹修書院·1543년)의 건립 때처럼 퇴계 이황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고서원은 ‘조선왕조실록’에 사액서원이 되는 과정을 5번이나 기록할 정도로 조정의 관심을 받았으며, 소수서원(안향)·문헌서원(최충)·남계서원(정여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남의 대표적인 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이 된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면서 나라가 인정한 위상이다. 왕이 하사한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을 보유하여 지방문화의 최전방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직지사·인각사·환성사·운부사 등의 토지에서 세금을 수조할 수 있었으며, 생선과 소금과 노비를 통해 경제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입의 안정은 서원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여 그 영향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임고서원의 영남을 아우르는 영향력은 목판이 아닌 목활자를 소유하고 있어 지방의 관공서에 빌려주었다는 기록이나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사액서원이 되었다는 기록이나 ‘심원록(尋院錄)’에 적힌 방대한 방문자 이름만 살펴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심원록’에 의하면, 주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많이 방문했으며, 종종 기호학파에서도 방문했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모두 방문 기록이 많은 이유는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로 인해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임진왜란 전에는 퇴계학파만의 서원이 아니라 영남 전체를 아우르는 서원이었다. 하지만 임고서원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화재에 소실되어 8년간 향사도 못 지내고 불타버린 옛터에 겨우 한 칸의 초가집을 마련하고서야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는 수모를 겪는다. 1600년 이원익에 의해 새로 짓게 되면서, 선조 36년(1603년)에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사액을 받는다. 이후 서원철폐령(고종 8년, 1871년)으로 문을 닫았다가 1965년에 이르러서야 정몽주 위패만 모시고 다시 서원을 복원하였다.

정몽주와 충은 뗄 수 없는 단어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위한 충신은 아니었고, 쓰러져 가던 고려의 중흥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가 조선에서도 ‘만고의 충신’이 되었던 이유는 태종의 추앙과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년)의 극찬이 있어서이다. 정몽주와 죽음의 대척점에 서 있던 태종의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을 빠르게 정착시키기는 방편도 되었지만 ‘다른 길을 걷는 자에 대한 존경’이라는 옛 선비들의 기상을 드러낸 부분이기도 하다.

포은은 효로서도 유명하다. 19세에 부친상으로 3년 움막 생활을 하고, 24세에 장원급제를 하나 29세에 모친상으로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1389년 그의 효행을 기리며 유허비가 세워졌다. 조선 성종때 경상감사 손순효(孫舜孝·1427~1497년)는 꿈속에서 백발노인의 “내가 이곳에 묻혀있는데 꺼내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인근을 수색한다. 그는 유실되었던 포은의 유허비를 찾아 다시 세웠다. 유허비는 복원된 정몽주 생가 인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의 임고서원은 교육기관이자 의례의 장소이자 지역 문화의 중심이었던 옛 역할을 일부 수행하며, 문화재 보존과 관광으로 인한 지역의 활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소극적인 활동이 주를 이루며 지역 문화의 최전방에 있던 활발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영천만의 콘텐츠로 삼기에는 경기 지역에 포은과 관련된 행사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각 지역만의 콘텐츠여야만 할까. 포은은 유명인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장소는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 지역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관광 상품과 체험형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전국이 연계된 문화상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좋은 봄날, 푸른 새싹이 돋아 싱그러운 임고서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포은 정몽주의 숨결을 되짚어본다.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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