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북서쪽 끝자락에는 순천박씨의 종택과 육신사·도곡재·태고정 등 유교문화재를 품은 묘골이라 불리는 전통 마을이 있다. 이곳은 길게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마을 입구가 겨우 보이는 곳으로, 밖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을 막기에 적당히 높은 산자락이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그 옴폭하게 들어간 땅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묘골 마을은 남동쪽의 입구만이 열려있어 은거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묘골 마을은 사육신 중 유일하게 혈육을 남긴 박팽년(1417~1456)의 후손들이 은거하여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꾀해 세조에 의해 멸문당한 집현전 출신 학자다.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경회루에 뛰어들어 항거했으며,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공문서에 ‘신(臣)’이란 글자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단종에 대한 신념을 지켰다. 세조는 지조를 잃지 않은 박팽년의 정신을 높이 보고, 그를 형조참판으로 곁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은 1456년 6월, 세조를 주살하려 성삼문·하위지·유응부·이개·김질·유성원 등과 같이 역모를 모의한다. 역모가 김질의 배신으로 새어 나가면서 사육신들은 긴급 체포되었다.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능지처사되고, 삼대가 극형을 받았으며, 그들의 부인들은 공신들의 노비나 관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가문도 멸문지화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는 친정아버지 이철근이 현감으로 있는 인근의 관비로 올 수 있었다. 당시 성주이씨는 박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이에 세조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해 늦가을 아들을 낳았으나 다행히 여종도 딸을 낳았고, 둘은 비밀리에 자식을 바꿔 키웠다. 그가 천행으로 태어난 유복자, 박비(朴婢)였다. 성종 3년, 이모부 이극균(1437~1504)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묘골 마을에 왔다가 박비의 사연을 알게 된다. 이극균의 권유로 박비는 자수하게 되고, 성종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옥구슬’이란 뜻을 담은 이름 ‘일산(壹珊)’을 지어주며, 정3품 당하관 벼슬을 내려준다. 이렇게 박팽년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혈통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일산은 후손이 없었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99칸의 종택을 짓고 현재의 묘골 마을에 정착하여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입향조가 된다. 이때가 성종 10년경(1479년)이다. 이후 성종 때 정계에 형성된 사림들이 사육신의 신원을 회복시키려 노력했고, 숙종 17년(1691년)에는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의 관직이 모두 회복된다. 박팽년은 영조 때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고, 정조 17년(1791년)에 어정배식록에 오르면서 충신의 명문가로 알려진다. 달성의 낙빈서원에서 배향되다가 1982년 육신사가 건립되면서 숭정사에서 사육신과 함께 배향된다.
묘골 마을에는 순천박씨의 종택은 물론 사육신을 모시는 육신사와 여러 전통 가옥이 남아 전통 마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육신사는 단종복위운동으로 멸문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박팽년만 배향했는데, 그의 제삿날 후손 박계창이 사당 앞에서 서성이는 6명 어른들의 꿈을 꾼 후 사육신 모두를 제사 지냈다고 한다. 이후 낙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모셔 오다 고종 3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낙빈서원과 함께 철폐되었다.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봉안하고, 충효 위인들의 유적 정화사업(1974~5)으로 육신사를 건축하게 되었다. 1981년 육신사는 관리사·외삼문·삼충각·숭절당 등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도곡재는 정조 2년(1778)에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웠으나 정조 24년(1800)경에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도곡재라 불렸다. 삼가헌은 박광석이 1783년 이주해 와서 초가를 지은 곳이다. 삼가(三可)란 중용의 9장에 나오는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을 말하는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문칸채·사랑채·안채·연못·별당이 소속되어 있다. 태고정은 순천박씨 종택이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재건되면서 세워진 정자이다. 대청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방이 있는 부분은 확장된 박공지붕이다. 방 앞에는 태고정(太古亭), 대청 앞에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을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후대가 이어진 박팽년의 후손 박일산이 터를 잡은 곳이다. 노비의 신분으로 숨어 살다 순천박씨의 입향조가 되기까지 최적의 은거지가 되었던 이곳은 지금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찾아가야 볼 수 있는 숨겨진 마을이다. 박팽년과 그의 후손을 찾아가는 길이 그들의 지난했던 이야기만큼 구불구불 산세를 따라 길게도 이어져 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