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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슬까슬한 벽면 위 만화, 울진 매화벽화거리

등록일 2023-11-13 19:30 게재일 2023-11-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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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매화벽하거리의 ‘공포의 외인구단’.

바닷물의 짠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울진 매화벽화거리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이현세(1954~)의 만화가 마을 골목을 수놓은 곳이다. 까슬까슬한 종이 위에 그려진 만화가 거친 담벼락을 따라 피어나 옛 추억을 불러들인다. 학교에서 선생님 몰래 읽었던 아슬아슬한 순간들, 만화방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만화책장만 넘기던 시간들, 다음 편이 나오지 않아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린 날짜만 기다리던 그 시절은 세월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당시 만화책은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마음껏 상상의 세계를 탐험하게 해주는 여행티켓이었다. 신화·사랑·영웅·성공 등 그 속에는 무엇이든 다 있었다.

울진 매화벽화거리는 ‘공포의 외인구단’(1983~84)과 ‘누구라도 길을 잃는다’(2017), 다수의 단컷 만화벽화, ‘남벌’(1993)을 소재로 한 카페를 찾아볼 수 있다. 매화이현세만화공원·매화역사관·매화박물관·만화도서관·영동이네 옛집 등 마을 곳곳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매화벽화거리는 만화책 속 작은 네모 상자를 골목의 담벼락에서 찾고, 그 안에서 캐릭터 까치·마동탁·엄지가 튀어나올 듯 그려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꺾이며 이어지는 골목의 만화 속 장면들이 발걸음을 따라 조롱조롱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그려진 골목은 마을 외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러브로드’다. 사실 원작 만화의 줄거리는 사랑보다는 스릴 막장에 가깝다. 주인공 오혜성은 짝사랑하는 엄지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다. 라이벌이자 엄친아이자 권력자인 마동탁으로 인해 엄지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오혜성은 부상으로 야구마저 포기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그는 외인구단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야구 타자로써 부활하여 마동탁과 엄지 앞에 나타난다. 위기를 느낀 마동탁은 아내 엄지를 이용하여 혜성을 흔들고, 혜성은 두 눈을 상실하면서까지 마동탁의 승리를 원하던 엄지의 소원을 이뤄준다. 엄지는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고 이혼당한다. 혜성이 엄지를 찾아와 서로 포옹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지금도 상상치도 못했던 결말에 얼떨떨했던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하다. 원래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이 작품은 충격적인 결말만으로도 결코 잊힐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공포정치를 하던 군부가 대중들의 눈을 정치가 아닌 곳으로 돌리기 위해 스포츠를 키우던 사회 분위기에 맞춰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1980년대는 국가가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무력 진압하고, 사회 안정·정의 구현·국민 순화라는 명분으로 감시와 통제를 일삼았다. 국가권력은 대중들의 요구를 컬러티비 보급·야간통행금지 폐지·교복 자율화·스포츠 활성화 등의 정책을 통해 억눌렀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탄탄한 줄거리·엄청난 반전·속도감 있는 전개와 승리에 대한 집착·신체 훼손·과장된 정서적 표현이 특징적이다. 특히 사회 약자들이 영웅이 되는 스토리는 억압받던 80년대의 독자층을 매료시켰다. 나중에는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이나 드라마 ‘2009 외인구단’(2009)으로도 제작되었다.

‘남벌’은 열차 카페의 테마로 즐길 수 있다.‘남벌’의 주인공 오혜성은 일본 내 재일교포다. 인도네시아 석유로 인해 한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미교포들은 수용소로 강제 이송된다. 아우슈비츠에 버금가는 그곳에서 가족을 잃은 그는 탈출하여 한국으로 건너가 한일전쟁에 선봉을 서서 한국군의 승리에 공헌한다. 붙잡혔던 엄지도 구출하여 남은 가족과 한국에 정착해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이 작품은 가족과 주변인의 비극적인 죽음·운명적인 사랑·애국심과 민족주의·강한 남성상과 약한 여성상 등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1990년 김영삼 정부의 정책 ‘일제 잔재 청산’에 힘입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냉전이 완화되고, 해외여행이 증가하며, 국제 문화 교류가 증가하던 세계 흐름에서 대중이 느꼈던 일본과의 격차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식민 통치로 인한 과거 청산, 독도 영유권 주장, 경제적 격차로 인한 무역 불균형, 재미교포의 차별 등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반일감정을 과열시켰다. 대중은 작품 속 가상의 한일전쟁에서의 승리에서 현실의 억압된 반일감정을 해소했다. 2023년 기준으로 한국은 일본과 상당한 부분을 극복했고 위기나 경계심도 낮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부분은 남아있다.

이현세의 작품은 만화가 어린이나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이 향유하는 대중문화라는 인식을 마련했다.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 비극적인 사랑과 주변인의 죽음, 극단적인 갈등과 과격한 장면, 과도한 감정표현은 소설처럼 스토리에 빠져들게 했으며, 스포츠·판소리·전쟁·SF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소재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었다. 울진의 매화벽화거리에 가면 ‘천국의 신화’·‘국경의 갈가마귀’·‘활’·‘지옥의 링’·‘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블루엔젤’·‘카론의 새벽’·‘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아마겟돈’ 등 이현세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만화가 가득 그려진 골목을 거닐며 까슬까슬한 만화책의 질감을 떠올려 본다.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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