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인상과 미학적 인식, 그리고 감수성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호사가(好事家)는 그것을 취향(趣向)이라는 어휘 하나로 설명하고자 하지만, 실제로 그런 차이는 미학적 훈련의 결과에서 발원한다.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미학 훈련을 해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화를 포함한 예술 전반을 수용하는 기본자세부터 다르다. 대상을 읽고 보고 느끼면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간파하는 능력 차이가 개인별로 크다.
요즘 사람들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생각할 거리가 풍성한 영화다.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일대기를 다룬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기저 텍스트로 삼은 영화가 ‘오펜하이머’다. 평전이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영화도 세 시간을 꽉 채운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원자력 위원회 의장인 루이스 스트라우스(1896∼1974) 제독과 관련된 청문회 장면이었다. 한편으로는 메카시 광풍에 휩쓸린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관직에 내정된 스트라우스 제독의 공개적인 청문회가 진행된다. 전자는 오펜하이머의 수상쩍은 과거 행적을 추적하여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리는 것이 목적이다. 후자는 스트라우스 제독이 과연 상무장관직을 수행할 능력의 여부를 검증하는 자리였다. 오펜하이머도 스트라우스도 패배자로 기록된다.
오펜하이머가 1953년 12월 기소되어 그 이듬해부터 보안 청문회에 소환된 최고의 원인 제공자를 평전 작가들과 놀란 감독은 스트라우스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오펜하이머의 정적(政敵)으로 등장하는 스트라우스의 내면세계를 인도하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오펜하이머가 원자력 위원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스트라우스는 최대한 친절을 베풀지만, 자부심 넘치는 오펜하이머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위원회 건물 바깥에 호수가 있고, 호숫가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서 있다. 아인슈타인을 향해 오펜하이머가 다가가서 몇 마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를 뒤따라오는 스트라우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냉정하게 지나쳐 버린다.
문제는 오펜하이머의 자유분방하고 공격적이며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듯한 정치적인 성향이 스트라우스와 지극히 대극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민주 선거로 집권한 에스파냐 좌파 정부를 전복하고자 1936년 7월 프랑코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에스파냐 내전이 발생한다. 3년에 걸친 내전으로 무려 60만의 안타까운 인명이 희생되기에 이른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을 통해서 내전으로 발생한 수많은 고아와 난민을 위해 거액을 송금한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이런 행적까지 추적하여 그를 청문회에 세운 것이다. 오해에서 시작된 불씨가 원한으로 발전하여 복수에까지 이르는 지점을 확인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누군가는 우리를 오해하고 이를 갈며 음해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