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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강의 노벨문학상: 여기서 함께 폭력에 맞서며

한강 작가의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표지. ‘지난해 인류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있다. 1901년부터 시상을 시작한 노벨상이다. 그 영예로운 상을 대한민국 소설가 한강이 받았다. 문학 부문이며 노벨 문학상으로는 한국인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이다. 스웨덴의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이 유언으로 명시한 물리학·화학·생리학·문학 분야에 노벨상이 주어지며 시상 순서도 유언에서 명시한 순서를 따른다. 유언에 없었던 노벨경제학상은 1969년 뒤늦게 제정돼 맨 마지막 순서에 시상한다. 노벨 시상식이 지난 10일 오후 4시(현지 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의 명소 콘서트홀에서 있었다. 무대 한가운데 알프레드 노벨의 동상이 자리하고 노벨상 수상자 11명은 객석 맨 앞줄에 스웨덴 왕족과 함께 일렬로 앉았다. 이들이 앉은 빨간 의자는 노벨상 수상자를 위한 특별대우로 스웨덴 왕가에서 마련한 ‘왕족용 발코니석 의자’이다. 수상자 소개 연설은 각 분야 노벨상 수여 기관 관계자가 하며 문학 부문은 스웨덴 작가이자 한림원 위원인 엘렌 맛손이 스웨덴어로 한강을 소개했다. 그는 “한강의 글에서는 흰과 빨강, 두 색(色)이 만납니다.”로 연설을 시작하며 ‘말보다 강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두 색에 비유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혹적으로 부드럽지만, 형언할 수 없는 잔혹함,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해 이야기 한다며 두 색은 그녀의 소설을 통해 되짚는 역사적 경험을 상징한다고 소개한다. 시상식이 끝나고 스톡홀름 시청사(Stadhus)로 옮겨진 연회장에서 수상자의 ‘특별감사연설’이 이어졌다. 그녀의 영어 연설은 특유의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목소리에 실려 1300여명의 시선을 집중 시킨다. 폭우가 쏟아져 내리던 여덟 살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고 시작한 그녀는, 마치 문학이 필연적으로 삶을 파괴하는 모든 행동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문학에 주어지는 이 상의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며 “여기서 함께, 폭력에 맞서면서요.”라는 말로 감사연설을 마무리한다. 이는 노벨위원회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실제 영어 원고 마무리 글이었던 ‘저는 문학에 주어지는 이 상의 의미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여기 함께 서서요.’와 다르다. 작가의 신중한 애드리브로 마무리 된 연설은 현재 한국 상황 등을 고려한 것이었을 거라는 기사를 읽는다. 2016년 ‘채식주의자’가 영국 부커상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때 서점으로 달려간다. 단숨에 읽으리라는 마음과 달리 읽는 내내 글이 주는 충격으로 책을 몇 번이고 덮으며 심호흡을 한다. 경기도의 어느 학교에서 유해 도서로 분류해 폐기했다는 기사를 보며 충분히 공감도 한다. 노벨문학상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재조명 되고 있지만 청소년이 읽고 받아들이기에 그녀의 작품세계는 노벨 시상식에서 소개했듯이 고통, 피, 칼로 깊게 벤 상처로, 형언할 수 없는 잔혹함,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으로 삶을 대변하고 있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녀의 작품을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시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로 선정 이유를 밝혔다. 수상 소식을 들은 그녀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가 기쁜 마음으로 고향 마을에서 돼지를 잡아 잔치를 열려고 했을 때,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 지금 이 상황에 축하 잔치를 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그녀는 만류했다. 노벨문학상은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한강의 감사연설 마지막 구절을 되뇌어본다.“여기서 함께, 폭력에 맞서면서요. 감사합니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9

‘깨짐의 미학, 그 과거로 부터…’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봤을 땐 세밀한 그림이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붓 터치 안쪽으로 균열이 보였다. 극사실주의 작품 속엔 잘게 조각난 수만개의 달걀 껍질들이 형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전시장을 채운 그림들은 대부분 큰 호수의 작품들이었다. 으스러지기 쉬운 달걀 껍질들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붙여넣고 그 위에 물감을 올리는 지난한 시간이 저절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오랜 세월을 거쳐 시간이 균열로 변한 문화재들과 재료의 궁합이 더 없이 어울린다. 전시장 한켠에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책상과 재료를 마련해 두었다. 지난 3일부터 15일까지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갤러리달에서 선보였던 박성표 작가의 개인전 ‘깨짐의 미학, 그 과거로 부터….’이야기다. 보통 깨어짐은 파괴, 상실을 상징한다. 하지만 작가는 달리 보았다. 깨어짐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며 나아갈 수 있다고. 그는 모든 물질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 행위를 반복하고 있으며 과거의 깨짐(해체)과 사라짐(소멸)이 현재의 시간 속에 응축된 모습으로 새롭게 탄생 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선택한 재료가 달걀 껍질이었다. 시골집 마당에서 키우던 닭들은 주기적으로 알을 생산해냈다. 가끔 수거시간을 잊게 되면 어미 품안에서 부화된 병아리들이 새로 태어났다. 평소와 다름없던 하루였지만 남겨진 껍질들이 달리 보이던 날이었다. 새로운 오브제의 발견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캔버스에 붙여봤다. 깨어진 껍질들은 작가의 손을 통해 다시 응축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을 통해 투박하지만 첫 작품이 완성되었다. 가슴 속에서 새로운 개체가 깨어남을 느꼈다. 박 작가 역시 여느 화가들처럼 그림이 좋아 선택한 길이지만 현실에 견주어 작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온몸이 녹아내릴 듯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살면서 어디 좋은 날만 있던가. 바깥 변화에 들썩이지 않고 예민하고 작은 조각들을 습관처럼 붙여나갔다. 그리고 유화물감을 이용한 극사실적 표현으로 조각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응축시켜 나갔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들을 모아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러한 방식은 높이 오르기보다 지치지 않고 멀리, 넓게 나아갈 수 있길 바라는 그의 작업관에 더 없이 어울린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깨어짐과 응축 시리즈를 좀 더 넓은 주제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특히 과학분야를 미술사적 영역으로 가져와서 그 시각적 선명함을 완성해 볼 생각이다.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지 그 너머에 대한 고찰을 작품으로 남기고 싶다”고 밝힌 박성표 작가. 그의 넓은 세상을 기대해본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9

작은 돌 하나에 거대한 산이 들어있다

주흘산은 문경의 길목을 지키는 산이다. 그 우뚝한 모습에는 다른 산들과는 다른 위엄이 느껴진다. 문경 사람이라면 주흘산의 당당한 기운에 가슴이 설레이며 자랑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작은 돌 하나와 높은 주흘산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노래한 시를 읽어본다. “금 간 돌 하나 영강 모래톱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 / 금 간 몸으로는 더 흐르지 못해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린 것일까 / 꽁꽁 언 몸으로 죽은 듯 있다 / 등덜미에 새겨진 수없는 잔금들이며 /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둥그런 몸 / 부서지고 쪼개지며 부대껴온 그의 내력을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 누군가 속삭인다 / 영강의 어머니는 조령천이요 / 조령천의 어머니는 주흘산이요 / 주흘산의 뼈는 암벽이요 / 암벽은 이따금 무너져 내린다고 / 아아, 이렇게 조용히 금이 간 채 낯선 모래톱에 엎드린 / 저 주흘산의 뼈를 어찌해야 하나” (황봉학 시 ‘돌을 읽다’) 문경을 가로지르는 영강변 모래톱의 돌 하나, 볼품없고 흔하디 흔한 돌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기지 못하는 돌이다. 하지만 시인은 걸음을 멈추고 돌을 들여다본다. 그때 시인과 사물과의 교감이 시작된다. 돌의 등에 잔금으로 새겨진 수많은 문장들. 부서지고 쪼개지고 부딪치며 돌이 새겨온 문장을 읽으며 돌이 흘러왔을 시간을 되짚어간다. 영강의 어머니인 조령천을 읽고 조령천의 어머니인 주흘산을 읽고 주흘산의 뼈대인 암벽까지 다다르면 우뚝하게 솟아 문경을 지키는 주흘산의 기운이 그대로 다 읽혀진다. 시인은 사물의 전생을 들여다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피리의 전생인 대나무를, 도자기의 전생인 흙을, 숯의 전생인 나무를 볼 줄 알아야 시가 나온다고 한다. 몸이 잘리고 구멍이 뚫려야 대나무가 피리가 되고, 수천 도의 뜨거운 불길을 견디어야 흙이 도자기가 되고, 제 몸을 아낌없이 불살라야만 나무가 숯이 됨을 그들의 전생을 보아야만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강가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라도 멈추고 들여다보아야 그 안에 들어있는 거대하고 웅장한 것들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을 찬찬히 받아적어야 시가 되는 것이다. 내 주변의 작고 사소한 것에는 그만의 역사와 우주가 다 들어있다. 작은 돌 하나에서 거대한 산을 읽어내는 자세를 배우자. 2024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빠른 시간의 흐름이 연말이면 더욱 실감난다. 무엇으로 한 해를 채워왔나 반성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자신을 탓하지는 말자. 작은 돌멩이가 곧 거대한 산의 일부이듯이 소시민인 우리 또한 세계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존재들이니 말이다. 자신을 아끼며 남은 2024년의 날들을 사랑으로 채우자.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9

한글 대중화의 개척자 ‘외솔’이 완성한 한글과 한옥도서관

한옥으로 지은 도서관이 있다고 해서 길을 나섰다. 감포의 한옥 등대도 특별했는데 도서관이 기와를 얹었다니 궁금했다. 이름도 ‘외솔’이라니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싶었다. 동행한 역사 교사인 남편이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의 호가 외솔이라면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입구에 우뚝 서서 두루마기를 걸치고 책을 펼쳐 든 동상이 학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한글이 목숨’이라는 글귀가 외솔기념관 문 앞에 나붙었다. 세종대왕님을 만났을 때, 한글과 한옥을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실 거다. ‘한글’이란 말은 1913년부터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옥도서관을 보기에 앞서 한글이란 말을 만드신 어르신 외솔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은 언어학자 주시경의 수제자였다. 주시경 선생은 한글 표준화를 추진하였고, 세로쓰기였던 한글을 가로쓰기로 바꿨다.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개척자이자 선각자다.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그 나무를 가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말을 다듬어서 바르게 말하고 적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뜻을 이어 최현배 선생은 풀어쓰던 한글을 모아쓰게 했다. 외솔은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상무위원,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 표준말 사정 위원을 거쳐 다른 학자들과 더불어 이론적 뒷받침을 마련하고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광복 후에는 한글학회 이사장으로서 미국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큰사전 6권을 완간했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앞두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갖은 고문을 버티며 함흥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옥중에서도 한글 풀어쓰기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켜낸 우리 말글 보급에도 힘썼던 선생은 한글 기계화에도 앞장섰다. 한글 기계화를 위해 우리말에 쓰이는 글자와 낱말의 사용 빈도를 조사하여 타자기 자판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통계자료를 만들었다. 기념관을 돌며 해설사의 설명까지 곁들였더니 외솔 선생의 업적이 한눈에 보였다. 핸드폰에 한글을 편하게 적을 수 있는 것도 선생과 학자들이 애쓴 덕분이라니 더욱 감사한 마음이다. 기념관을 나와 계단을 오르니 울산큰애기 동상 뒤에 선생의 생가가 보였다. 최현배 선생이 17세가 될 무렵까지 사신 곳이라고 한다. 외솔 선생 탄생 122주년을 맞아 2016년에 울산광역시는 최초의 한옥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선생이 보신다면 한옥이라 더 반가워할 것이다. 날씨가 쌀쌀했는데 신발을 벗고 올라서니 방바닥이 따끈따끈하니 참 좋았다. 들어가자 여느 도서관과 다르게 좌식 나무 책상이 놓였고 바닥에 앉아 책을 보도록 했다. 조선시대 교육의 근원인 서원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전통 한옥도서관이었다.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책 읽어주는 로봇 ‘루카’였다. 귀여운 로봇이 영유아 대상으로 전문 성우의 목소리로 실감 나는 효과음과 함께 책을 읽어준다고 하니 너무 멋지다. 감탄하며 책장을 살피는데, 사서가 한옥의 백미인 문살이 아름다운 미닫이문을 열었다. 따뜻한 실내와 달리 찬바람이 훅 들어오는 외솔채였다. 온돌이 아닌 마룻바닥이라 서늘했다. 하지만 양쪽으로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경치가 그저 그만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책을 들고 외솔채에 앉아 한나절 풍월을 읊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였다. 도서관에서 옛 선비들이 누리던 호사를 즐길 수 있는 울산 중구 사람들이 부러웠다. 도서관을 나오는 데, 꼬마 둘이 돌계단을 오른다. 공부하러 오느냐고 물으니 “아니요, 책 읽으러 왔어요.” 책이 공부가 아닌 놀거리라니, 외솔 선생이 흡족하게 웃으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7

봉화 청량사로 겨울 산행 어때요?

어느 계절이든 집을 나서면 홀가분한 마음이 든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연말 더딘 걸음으로 유유자적을 즐기기에 좋은 청량사 가는 길, 12월 초겨울 풍경으로 들어가 본다. 얼마 전만 해도 단풍과 행락객들로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했던 풍경은 사라지고 낙엽들이 애잔하게 뒹굴고 산사는 고즈넉함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나뭇잎에 가려졌던 웅장한 청량산의 바위봉우리는 더욱 선명하고 웅장하게 자태를 드러내고 겨울이 되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청량산 열두 봉우리는 서로 경쟁하듯 기이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겨울 한낮의 산길은 정적만이 깊은데 희끗희끗한 기암괴석의 절묘하면서 웅장한 풍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광이다. 입석에서 청량사 선학정으로 내려오는 최단코스(2.3㎞)로 1시간 반 정도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어 인기 좋은 길이다. 그윽한 숲속 외진 길은 쓸쓸한 연말 12월의 낭만이 있어 좋고, 굽이돌아 오른 고갯마루는 먼 산 풍광의 아득함이 있어서 좋다. 입석에서 오르면 수십 년 된 굴참나무는 무성했던 잎을 남김없이 떨군 채 홀가분한 몸매를 드러내고 푸른빛을 잃지 않은 노송은 모진 세월 견디면서 휘어지고 더러는 뒤틀려 안타깝게 서 있다. 소나무마다 껍질을 벗기고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이는 일제 말기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 동원해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 80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청량사를 가기 전에 우측으로 오르면 600m 금탑봉 아래 응진전이 있고, 금탑봉 위쪽에 김생(신라 명필)이 10년 동안 서예를 연마한 김생굴과 김생폭포가 있다. 비교적 순탄한 산길이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기에 좋은 산길로 산천경개의 오묘한 조화를 음미하며 걷다 보면 청량사가 눈에 들어온다. 청량사 경내에 들어가기 전 우측으로 산꾼의 집과 청량정사가 있는데, 인근에 산꾼의 집이 있다. 김성기 시인이 오가는 길손들에게 무료 약차를 나누고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한 곳이다. 청량산 기슭 한가운데 자리 잡은 청량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옛 이름은 연대사로 27개의 암자가 있었다. 청량사에는 공민왕의 친필로 쓴 유리보전 현판과 종이로 만든 지불이 있고, 약사여래좌상과 괘불이 남아 있다. 절집 아래쪽에는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안심당이라는 찻집이 있다. 청량산의 풍경과 일체가 되어 잠시 쉬어 가기 좋은 전통찻집으로 찻잔에 풍경소리를 녹이는 낭만도 가져볼 수 있다. 청량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계곡을 끼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목들과 우람한 바윗돌이 뒤엉켜 길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루할 틈 없이 내려오게 된다. 연말이 되면 일상의 고단함과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호젓한 바깥세상이 그리워진다. 고요하고 청량한 분위기, 청아한 풍경소리와 함께 연말연시 마음의 평온함을 청량사 가는 길에서 가져 보시기 바란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7

급격한 기후변화 시대 예술 창작 활동에서 고민해야 할 것들은…

지금 우리는 급격한 기후 변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후변화는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고 모든 분야에 연결되어 있으며 시대를 반영하는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의 창작과 전시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고 미술관에서는 어떤 고민들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 까닭에 토요일 오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내일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시 연계프로그램을 찾았다. 기후변화, 예술 실천, 미래기획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 차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전시와 연계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난 토요일은 날씨와 기후변화의 이해와 대응에 이어 ‘기후변화 시대의 예술, 우리의 안녕을 미술관에서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학예연구사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먼저 기후변화는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주제와 내용에 영향을 끼친다. 2003년에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전시된 설치미술가인 올라퍼 엘리아슨의 ‘날씨 프로젝트’를 예로 들었다. 당시 전시에서는 수백 개의 전구로 거대한 인공 태양을 만들었고 무려 20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성과를 냈다. 작가는 유사 자연을 통해 실제 자연을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보고자 했다. 또 실제 빙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테이트모던 미술관 광장과 유럽의 유명 관광지에서 자신의 설치 작품도 보였다. 당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놀라운 표정을 가졌는데 실제 빙하로 경각심과 기후변화를 일깨우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설치 작품을 보며 느끼는 건 인공 태양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수백 개의 전구로 오히려 많은 탄소를 배출시켰으며 실제 빙하를 옮겨 왔어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욕망과 테이트모던의 욕망도 함께 작용했을 거라 여겨지지만 전시에서 관람객들에게 어떤 것들을 환기시키고 보여주어야 하는지와 탄소배출이 정당한가라는 문제는 물음표가 생기게 한다. 이 작가의 유사 자연 작품은 계속 이어질 텐데 작가의 창작과 전시에 있어서도 기후변화를 고민하며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지를 작가들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기후변화는 예술의 활동과 생태계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공장이 많은 지역인 울산 태화강의 이야기로 이어지며 동물과 식물, 인간이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작가들은 생태를 통해 그들만의 시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예술의 형식과 매체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버려지거나 사용하지 않는 공간의 활용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기후변화시대에 더 활용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재활용과 자연 소재의 활용, 환경 교육 등이 이런 변화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팬데믹을 거치며 미술관을 온라인으로 대체해야 하는 문제는 실제와 이미지는 다른 것이어서 온라인으로 대체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대중교통을 활용할 수 있는 미술관의 접근성도 기후변화 시대에 고려해 봐야 할 문제이다. 강연을 들은 한 관람객은 “기후변화가 중요하고 예술에도 분명히 영향을 끼치는 게 당연한 거지만 작가들에게 너무 환경에만 치우치게 하는 건 아닌가 한다”라는 질문에 학예연구사는 “기후변화로 인해 작가들은 생태와 환경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항상 생각한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친환경적으로 항상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시를 하는 미술관에서도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는 건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7

흙을 두드리며 ‘격양가(擊壤歌)’ 부르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해 뜨면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쉬네/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서 먹으니/ 임금이 나를 위해 해 주는 것이 무엇 있겠는가.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宰力於我何有裁)” 태평성대라 일컬어지는 요(堯)임금 때의 격양가이다. 노랫말 그대로,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고 물마시고 싶으면 우물 파서 마시고 배고프면 밭 갈아서 배 채우니 내가 살아가는 데 임금의 힘이 무어 필요하겠는가? 라는 말이다. 당(唐)나라를 다스리던 요임금이 미복을 한 채 민심을 살피러 나섰다가 백발노인이 흙을 치며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며 뿌듯해한다. 백성들이 임금의 존재를 잊은 채 걱정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세상이야말로 덕치주의였던 그의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리하지 못한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백성들에게서 찾은 효성 짙은 순(舜)에게 천하를 맡긴다. 이를 선양(禪讓)이라고 한다. 우(虞)나라를 다스리며 요임금에 이어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순임금도, 나라의 근심거리였던 황하의 치수를 잘 다스린 우(禹)임금에게 제위를 선양(禪讓)한다. 우임금도 하(夏)나라를 잘 다스린다. 하(夏)나라 마지막 왕이었던 걸(桀)왕과 은(殷)나라 마지막 왕이었던 주(紂)왕은 사치와 포악이 극에 달해 탕(湯)왕과 무(武)왕이 그들로부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이들을 처단하고 은(殷)과 주(周)나라를 세워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태평성세의 기본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안정이다. 공자와 맹자는, 요는 순에게 순은 우에게 임금 자리를 선양하고 탕과 무는 포악무도했던 걸과 주를 방벌(放伐)했다며 백성의 안위를 우선으로 태평성세를 추구했던 그들을 존경하며 칭송했다. 하지만 순자와 한비자는 순은 요를, 우는 순을 선양이 아닌 핍박으로 정권을 탈취했고, 탕과 무는 신하된 자로서 자신들의 왕이었던 걸과 주를 폭력으로 시해했다고 기록을 남긴다. 진실은 믿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교과서를 통해 알게 된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모험가였다. 그는 유럽인들에게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을 받고 미국은 콜럼버스 항해 관련 신화발굴과 재창조로 아메리카에 터 잡은 신생 독립국가의 건국 서사시에 공을 들인다. 그러나 신대륙으로 발견 당한 원주민에게 있어서 콜럼버스는, 자연과 합일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그들 삶의 터전에 무단으로 침입한 침략자였고 학살자였다.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기록된다. 많은 지식인이 요순시대를 꿈꾸며 사회주의를 쫓았지만 이권다툼의 인간 본능이 존재하는 한 실현 불가능한 이념이라는 걸 세월 보내며 알게 된다. 지금 세상은, 뉴스든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든 켜기만 하면 온통 뒤숭숭한 정치 얘기들로 갑론을박이더니 종내는 불안과 위기감으로 정치에 관심 없던 소시민도 가정 사 제쳐두고 나라 걱정으로 밤잠을 설친다. 진정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다면 어느 편에 서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뛰어가 피켓이라도 들고 힘을 실어야겠지만 당장 일상을 버리기가 또 쉽지 않다. 힘든 세월 어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화수 떠 놓고 간절히 빌었듯이 마음 깊은 곳에 정화수 떠 놓고 나라평안하기를 간곡히 빌고 또 빌어 본다. 흙을 두드리며 격양가 부르는 세상을 손자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담아서.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2

캘리그라피 작가 권문경을 만나다

어느 날은 고고한 학이 되어 춤을 추다 어느 날은 더벅머리의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나타나 입꼬리가 찢어져라 웃어댄다. 그러다 최근엔 신라 공주님으로 신분 상승한 그녀. 무대 위 연기자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 분야에서도 빛을 내고 있는 권문경 작가를 제16회 고운서예전국휘호대전 시상식에서 만났다. 언제나처럼 화사한 미소다. 작년에 이어 고운서예전국휘호대전에서만 캘리그라피 부분 두 번째 특선 입상이다. 대학에서 국문학과를 전공한 그녀는 동아리에서 풍물을 배웠다. 그리고 그 인연이 지금껏 이어져 많은 무대에서 활동 중이다. 현재 경주문화유산활용 연구원 활용팀장으로 문화유산을 활용해 우리의 문화가치를 알리는 일에 관심이 많다. 지난 계절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남산이며 교촌이며 문화유산이 있는 곳곳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 덕에 해 좋고 공기 ‘따신’ 계절에 그녀를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찬 기운이 돌고 더는 공연이 어려운 겨울이 되어야 무대가 아닌 땅에서 권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공연을 전문으로 하던 권 작가가 캘리그라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붓펜으로 적고 또 적고 마음에 들 때까지 적다 보면 그 글귀는 어느덧 마음의 일부가 되었다. 적는다는 행위를 통해 좋은 말들이 쌓이고 쌓여갔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에서 읽기가 더 좋아졌다. 처음에는 붓펜으로 작은 크기의 글쓰기를 반복하다 좀 더 깊은 작업을 하기 위해 붓과 먹을 배웠다. 화선지는 또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하늘과 바다, 별 너머 세계까지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무한한 무대다. 그 무대를 붓으로 채워나간다. 마음속에 갇혀 있던 감정들은 붓을 타고 흘러나와 검정색 활자에 의미를 더하고 색을 입혔다. 반복해서 글을 쓰는 행위는 수련과도 닮아있다.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마음에 드는 형태를 만나기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한참을 쓰고 그리다 보면 미처 보지 못했던 내가 보였다. 그 과정 속에서 마음도 단단해졌다. 50대 나를 알기 가장 좋은 나이에 만난 멋진 동반자, 캘리그라피는 기쁨과 슬픔, 외로움 모두를 품어주었다. 또한 인생 후반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에도 적당하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우선 지역사회에서 캘리그라퍼라고 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되길 원한다고 밝혔다. 그러기 위해 지금처럼 공모전을 통해 실력을 다져가며 빠른 시일 내 개인전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또한 생활 속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활동도 함께 이어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2

마음 가난한 세상에 시의 씨앗을 뿌려라

며칠 전 지인이 무심코 하는 말에 마음이 상했다. 자신이 주식으로 상당 금액의 손실을 본 것을 얘기하면서 나는 손에 잡아보지도 못했을 돈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닌데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아팠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라 이루어놓은 것 없이 세월만 가나 싶어 허허로운 마음에 찬바람이 쌩하니 지나갔다. 결혼하고 전업주부로 아이 셋을 키우고 살았으니 통장이 여유로울 리가 없었다. 공무원 남편의 월급을 아끼고 아끼면서 살아온 날들. 이제 오십 중반의 아줌마인 내게는 시인이라는 가난한 이름 하나만 남았다. 전에 어느 유명 가수에게 당신에게 노래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었다. 제법 알려지고 매니아층도 있는 그 가수는 자신에게 노래는 ‘젠장’이라고 했었다. 만족할 만큼 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노래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 되는 시를 끙끙대며 붙들고 있을 때면 그 가수의 ‘젠장’이라는 말이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쓰고 싶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시 쓰는 일과 참 일맥상통 하는구나 싶어서이다. “시를 쓰니 세상에 빚 갚은 것이고 / 의지할 시를 자식처럼 키우니 저축 아닌가 /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 시시시(時視詩) 가득한 통장에 / 마이너스는 없다네 / 詩앗 뿌렸으니 세상에 보시하는 것이고 / 시 한섬 거두었으니 추수한 것 아닌가 /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 시시시 가득 찬 통장에 / 마이너스는 없다네 /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고 / 시라는 씨앗 하나 남겨주었다네 / 그래서 시 통장에 / 시인이란 없다네” - 천양희 ‘시(詩) 통장’ 하지만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고 깨닫는다. 가난한 나에게 통장이 있었구나. 시 통장이 있었구나. 미처 그걸 몰랐었다. 갑자기 힘이 불끈 솟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사유의 은행에 통장을 개설했었구나. 어설픈 시 한 편 쓰는 걸로 우주에 진 그 많은 빚도 갚고 든든히 의지할 자식처럼 저축까지 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마치 까맣게 모르고 있던 상속 재산이라도 발견한 듯 마음이 들뜬다. 시 뿌리고 시 거두고 살며 은행에는 마이너스 없는 시 통장도 있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시시시(時視詩)’의 잔고가 가득 찬 종신토록 사용할 통장이 있으니 이제 쓸데없는 걱정은 거두고 살아야겠다. 세상이 내게 시 아닌 것 다 거두고 시의 씨앗만 남겼대도 내가 뿌린 씨앗이 어느 가슴에선가 발아하리라 생각하면 다른 즐거움 버리고 시에 발목 잡혀 사는 것도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다.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2

호미곶을 지키는 국립등대박물관

국립등대박물관으로 심부름갔다. 지인의 부탁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야 했다. 언젠가 공사 중이란 말을 소문으로 듣고 완성되면 와 봐야지 하다 오늘에야 당도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가, 우리가 첫 방문객이었다. 문을 열고 로비에 들어서자 ‘우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푸른 동해가 맞은편 창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달려가 창가에 놓아둔 벤치에 앉아 나또한 풍경이 되었다. 박물관이라기엔 너무 카페 같은 뷰였다. 한참을 ‘바다멍’을 때렸다. 그러다 위를 올려다보니 모빌처럼 메달린 네모난 상자에 또 다른 바다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멋진 디자인이다. 하얀 벽에 하얀 등대 모형을 만들어 붙였다. 오래 일하다 등대 본연의 임무는 끝내고 박물관이 된 호미곶 등대의 모습이다. 1907년 호미곶 앞바다에서 일본 배가 암초에 부딪혀 난파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해 1908년 세운 높이 26.4m의 팔각형 서구 양식의 등대다. 밑에서 중간까지 이어지는 곡선과 세 개의 창문의 어울림, 그리고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하얗고 늘씬하게 솟은 몸체가 눈부신 자태를 뽐낸다 바로 옆에 입구를 따라 들어가니 등대의 역사가 펼쳐진다. 사라져가는 등대와 등대지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만주와 아시아 대륙을 향해 포효하며 도약하는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 지난주에는 우리나라 모든 곳에 폭설이 내리던 날, 호랑이 엉덩이 부분만 뜨듯하게 데워져 맑은 날씨여서 엉뜨 켰냐고 다들 SNS에 우스갯소리를 했다. 호랑이 꼬리 끝의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본디 대보면이었으나, 2010년 1월부터 호미곶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호미곶에 자리잡은, 국내 유일의 등대박물관이다. 세계 여러 곳의 등대 모형이 재밌어서 자세히 보니, 유리로 만든 등대도 있었다. 이름이 칠리치등대였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세계 여러 곳의 등대도 소개한 것을 보니 스페인 여행에서 본 것이 있어서 반가웠다. 우리나라 역사서에 처음 나타난 등대는 삼국사기에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이 설치한 망산도의 횃불이었다. 여러 체험 가능한 것 중에 모스부호도 눌러보고, 오징어 같은 바다 생물 색칠을 해서 영상으로 띄워볼 수도 있었다. 방문객들이 편하도록 수유실, 등대에 관한 책을 모아둔 곳, 무거운 짐 보관해 두고 편히 둘러보도록 보관함도 따로 마련해두었다. 영유아 바다 놀이터는 미리 예약하고 와서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그외에도 홈페이지에 미리 알아보고 방문하면 더 자세히 즐길 수 있다. 2층엔 5가지 테마로 전시장을 꾸몄다. 빛마을 소리마을 전파마을 에너지마을 항해마을. 직접 체험해 보며 즐기다 무인카페에서 차 한잔 사서 공짜로 보여주는 호미곶 바다풍경 보며 쉬어도 좋다. 어른이 쉴 동안 아이들은 퍼즐 맞추기 놀이를 하도록 한 것은 센스 만점이다. 밖으로 나와 체험관으로 향했다. 책 모양의 아기자기한 등대 이야기, 직접 노를 저어보고, 에너지 자원에 대한 체험도 가능하다. 정해진 코스를 따라 만져보고 느끼면 등대에 관한 지식이 몸에 쌓인다. 등대는 안전한 바닷길을 인도하며, 해상 교통을 책임지고 희망의 빛으로 채우며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해 왔다. 국립등대박물관은 이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등대를 포함한 항로표지 시설들이 산업기술의 발달과 시대적 변화로 점차 사라져 감에 따라 항로표지 시설과 장비들을 영구히 보존 연구하기 위한 국내 유일의 등대박물관으로 1985년 2월에 개관했으며,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복합문화공간 운영으로 항로표지의 중요성과 역할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등대박물관은 오전 9시에 문을 열고 오후 6시에 닫는다. 월요일과 명절은 휴관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0

소유보다는 경험, 일상으로 스며드는 구독 시대

바야흐로 구독경제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구독경제는 그야말로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소유보다는 경험에 가치를 두고 정기적으로 상품이나 서비스에 필요한 만큼 비용을 지불하고 구독하는 방식인 구독경제가 지금의 다양해진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구독이라 하면 신문, 잡지나 유튜브 정도를 떠올리지만 이제는 수없이 다양해진 구독 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보고 멜론으로 음악을 듣고 쿠팡 로켓와우로 쇼핑을 즐긴다. 여기에 식료품을 비롯하여 화장품, 여행과 스포츠, 건강, 주거 구독 서비스, 자동차 구독 서비스도 등장하고 얼마 전부터는 편의점에서도 고물가 속 구독 서비스에 품목도 늘리고 횟수도 늘렸다. 대기업들도 가전 구독 경쟁에 나서는 등 공을 들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 놀라운 성장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여겨지고 성인의 약 2/3가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어 2025년에는 시장 규모가 100조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구독 서비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저성장의 그늘 아래서 편리함과 개인맞춤형 서비스, 합리적인 비용, 다양함과 새로움, 소유의 부담 감소 등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소비자들에게 비디오나 음원 스트리밍, 쇼핑 플랫폼 구독 서비스, 음식 및 생활 구독 서비스는 인기 있는 서비스이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같은 경우는 최신 컨텐츠를 언제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고 비디오 스트리밍에는 소비자의 이력을 바탕으로 맞춤형 추천으로 즐길 수 있다. 비용면에서도 한꺼번에 제품을 구입하게 되는 소유 비용을 줄이게 되고 경험을 통해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구독 서비스의 매력 중 하나는 언제든지 구독을 취소할 수 있거나 연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관리나 저장 폐기에 대한 부담도 줄어든다. 마음에 드는 컨텐츠가 늘어나면 구독을 계속할 수도 있고 필요 없어진다면 간편하게 취소도 가능하다. 또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구독 서비스의 경우 부모님이 좋아하는 영화나 자녀들이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구에 사는 A(34)씨는 “결혼을 앞두고 신혼 가전을 마련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1000만원이 훌쩍 넘는 가전 구매가 부담이었는데 구독하니 큰돈을 들이지 않고 가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몇 년 뒤 교체하기도 쉽고 정기적으로 전문가가 제품을 관리해 준다는 점도 매력적이다”고 구독 서비스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이제 불필요한 소유보다는 경험과 이용에 가치를 두고 구매가 아닌 원하는 상품을 필요한 만큼만 구독해 이용한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과 함께 빠르게 성장하며 우리의 일상에 파고든 구독 서비스의 무분별한 이용은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구독 서비스, 이를 잘 이용하기 위한 불필요한 비용 지출에 대한 관리 등의 지혜도 필요하다. 먼저 정기적으로 나의 구독 목록을 점검하고 실제 이용 빈도를 체크하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 서비스는 과감히 해지한다. 여러 서비스의 중복되는 기능은 없는지 살펴보고 가장 효율적인 것만 남겨둔다. 무료 체험 기간을 잘 활용하면서 종료일을 반드시 메모를 한다. 마지막으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유 플랜도 고려를 한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0

안동댐, 수몰 지역의 풍경과 사람

안동사진동호회의 제44회 사진전 ‘안동댐·50년 후의 풍경과 사람’이 열렸다. 안동시 태사길에 있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에서 열린 이번 전시에는 안동사진동호회가 올 한 해 수몰지역의 풍경과 사람을 기록한 작품 57점을 선보였다. 1976년 건설된 안동댐으로 고향을 잃은 수몰민은 54개 마을 3천여 가구 2만여 명에 달한다. 고향을 떠난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고향 언저리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아픈 서사와는 다르게 꽃은 피고 벼는 익고 풍경은 평화롭다. 그 사계절 풍경과 사람의 모습을 안동사진동호회 회원들의 카메라에 담아냈다. 예안면 기사리·도목리·부포리·주진리, 와룡면 가류리·절강리 등 변화된 수몰마을을 감상할 수 있다. 안동사진동호회 조인순 회장은 “안동댐은 굴곡 많은 수몰민의 삶이 깃들어 있는 상징적 장소”라며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마을과 그곳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고자 기획”했다고 밝혔다. 1981년 창립한 안동사진동호회는 매년 한 가지 주제로 매월 출사를 하고 매년 전시를 통해 시민들에게 향토문화의 변화를 공개하고 있다. 특히 ‘오늘의 농촌’, ‘댐에 남은 이야기’, ‘안동의 옛집’, ‘도청 이전지’와 지난해 ‘신들의 거처 서낭당’까지 지역의 사라져가는 문화를 밀도 있게 담아내 호평을 받고 있다. 또 1995년 안동시·군 통합원년의 모습을 담은 기록사진집 ‘안동 1995’를 발간하고 2003년에는 안동의 대표적 전통마을인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의 사계절을 촬영하여 엮어낸 다큐사진집 ‘가일 2003’을 발간해 역사 자료로 남기기도 했다. “비 그치고 한달음박 뛰어가면/ 조그만 물도랑을 건너뛰어/ 낮은 초가의 우리집/ 마당 끝에는 닥나무 몇 포기가 자랐지/ 어머닌 그 시대의 따순 저녁을 지으시고/ 조밥덩어리도 우리들은/ 배부르게 살았다. 월곡면 미질동/ 눈감아도 손금 보듯 환한 골목길” 수몰로 이름을 잃은 마을 월곡면 미질 출신의 김윤한 시인의 시 ‘월곡 회상’ 중 일부이다. 회원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장 한 켠에 걸려 별다른 설명이 없이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수몰의 아픔이 느껴진다. 이번 전시는 15일까지 계속된다. /백소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10

‘김장하기’는 소중한 우리문화

지난 11월 22일은 김치의 날이었다. 기념일로 정해진 ‘11월 22일’이 가진 의미는 무, 배추, 젓갈, 마늘 등 하나하나(11)의 재료가 모여 각종 무기질과 비타민이 풍부한 김치가 되어 항산화, 항암, 비만, 노화방지, 면역 증강 등 22가지의 효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법정기념일에 음식이 주인공인 것은 김치가 유일하다. 김치의 영양적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2020년 2월 김치산업진흥법이 개정되면서 제정되었다. 김치는 문화다. ‘품앗이’로 겨울을 준비하는 김장의 최적기는 최저기온이 섭씨 0℃ 이하인 날이 지속되거나 하루 평균 기온이 4℃ 이하를 유지할 때이다. 대체로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까지가 된다. 10℃ 이하의 기온에서 자란 배추가 제일 맛있다. 소금으로 절인 배추에 각종 젓갈과 고추, 마늘 등 갖가지 양념으로 겨울을 준비하는 ‘김치 담그기’의 행위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김치의 날’이 담고 있는 의미와 서로 도움을 주는 김장의 품앗이 정은 세계인의 마음도 움직인다. 미국, 아르헨티나 등 여러 국가의 지역에서 한인회를 중심으로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제정·선포 했다. 이들이 다른 나라의 특정 음식문화를 자신들의 법정기념일로 제정한 이유가 뭘까? 여러 사람의 협력이 필요한 김장 품앗이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다문화 공동체의 융화는 주요한 과제로 세계 속 김치의 인기와 더불어 ‘품앗이’라는 한국 고유의 문화가 빛을 발한 것이다. 유네스코에서도 공동체 사회에서 품앗이로 김치를 담그는 행위가 인류를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산이라고 판단해 대한민국의 ‘김장문화’를 2013년 12월 5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김장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시대에 채소가공품을 저장하는 요물고(料物庫)가 있었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순무 담근 장아찌는 여름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김치 겨울 내내 반찬 되네.’라는 기록이 문헌에 보인다. 그리고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가정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에 고춧가루와 각종 젓갈류가 동시에 김치재료로 쓰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웃끼리 서로 일을 돕던 품앗이가 있던 조선시대에는 이집 저집 다니며 함께 김장을 했다. 조선 왕실에서도 왕세자빈이 동원될 정도로 정성을 쏟았던 김장은 1970년대까지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연중 큰 행사였다. 그러나 김장도 시류(時流)를 탄다. 여전히 식탁에 김치가 오르지만 요즘은 직접 담근 김치보다 다양한 맛으로 다가오는 시판 김치를 더 많이 선호한다. 김장을 하더라도 절임배추를 사거나 양념까지 준비된 김장 키트를 이용하여 지인들과 모여 즐거운 놀이처럼 김장을 하기도 한다. 올해는 ‘김장체험여행’이 인기다. 배추를 자르고 절이고 건지고 물 빼고, 갖은 재료가 들어간 양념을 만드는 번거롭고 힘든 과정은 체험장에 맡기고 체험비와 김치통만 준비해 가서 다른 체험자들과 함께 즐기며 할당된 절인배추에 양념만 버무려 담아온다. 이런저런 변화에도 여전히 가족이 모이거나 이웃과 품앗이로 김장을 하는 이들도 아직은 적지 않다. 어떤 식으로 변모해 가든 ‘함께하는 김장문화’는 우리가 지켜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05

현재 머무르는 것이 시간을 완성하는 것

시를 기다리는 일은 연인을 기다리는 일과 비슷하다. 모든 마음은 그에게 가 있지만 보고 싶을 때마다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각자 세상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내어야 해서 연인만을 쳐다보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해도 늘 연인 쪽으로 쏠리는 마음을 어찌하랴. 시도 이와 같다. 시인은 시가 오기를 기다리며 다른 일을 접고 기다려 보지만 쉽게 써지지 않는 것이 또 시이다. 그럴 때 시인은 그냥 논다고 한다. 논다는 생각도 없이 논다고 한다. 노는 일, 놀이를 완성하는 일이 결국 시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시 안 써지면 / 그냥 논다 / 논다는 걱정도 없이 / 논다 / 놀이를 완성해야지 / 무엇보다도 하는 짓을 / 완성해야지 소나기가 / 자기를 완성하고 / 퇴비가 자기를 완성하고 / 허기(虛飢)가 자기를 완성하고 / 피가 자기를 완성하고 / 연애가 자기를 완성하고 / 잡지가 자기를 완성하고 / 밥이 자기를 완성하듯이 // 죽음의 태(胎) 속에 / 시작하는 번개처럼” (정현종 시 ‘시를 기다리며’) 언젠가 빚 갚는 법에 대한 책을 본 적이 있다. 빚에 시달려 고민하는 남자에게 신이 나타나 빚을 갚는 법에 대한 조언으로 아침 조깅을 하라고 시킨다. 남자는 의아해하며 빚 갚는 것과 조깅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따져 묻자 신이 웃으며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연결되어 있다고 조깅을 통해 활력을 되찾으면 하는 일이 잘 될 것이고 일이 잘되면 다른 일 또한 잘 되게 마련이라고 말해준다. 시를 쓰는 일 또한 같은 맥락이기에 시인은 내가 노는 일을 완성하는 것이 모든 사물이 자신을 완성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던 시와 연결해서 생각하게 마련인 것이 시인의 천성이다. 세상 모든 사물들이 스스로를 완성해 가듯이 내 하는 짓을 완성하며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지 않으면 내 놀이 속으로 시가 번개처럼 찾아 올 것이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지난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보내 깜깜 헤매게 하지 말고 지금을 완성하시라. 지금을 붙잡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정성껏 하는 것이 시간을 완성하는 법이다.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05

30대의 눈으로 다시 본 뮤지컬 ‘빨래’

지난 11월 23일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 뮤지컬 ‘빨래’ 공연을 보았다. 뮤지컬 ‘빨래’는 강원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을 하는 나영을 중심으로 서울살이의 힘든 일상을 담은 이야기이다. 주인공 나영은 두 번의 연애 실패와 여러 번의 이직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있을 때, 옥탑방으로 이사 오게 된다. 이사 온 동네에서 나영은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웃들을 만나게 된다. 조용할 날 없는 옆집 아줌마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주인집 아줌마, 건넛집 몽골 출신 이주 노동자 솔롱고까지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비슷한 환경에서 함께 지낸다. 새로운 동네가 낯설고 어색한 나영은 좀처럼 이웃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이해하게 된 나영은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과 소통한다. 어느 날 나영이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옆집 아줌마와 주인아줌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위로와 위안을 받고 그들과 더욱 가까워진다. 그리고 솔롱고와 마음이 맞은 나영은 그와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된다. 시민기자는 20살 때, 뮤지컬 ‘빨래’를 처음 보았다. 그 당시 뮤지컬 ‘빨래’에서는 나영의 직장 이야기, 솔롱고와 그의 친구의 어려운 타국 생활과 임금 체불 등의 직장 내 갈등 이야기, 이웃 사람들의 삶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기보다는 나영과 솔롱고의 심리를 더 깊게 다루었다. 때문에 나영과 솔롱고의 결혼까지의 러브스토리가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 보았던 뮤지컬 ‘빨래’는 나영과 솔롱고의 러브스토리보다 힘든 서울살이를 등장인물 각자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때문에 좀 더 현실감 있고 나영이라는 캐릭터가 생동감 있어 보이고 극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솔롱고와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가까워지고 나영이 솔롱고에게 느끼는 심리적 변화도 급작스러워 결혼까지 이어진 그들의 관계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했다. 사회 경험이 없었던 20살 때의 시민기자는 나영의 서울살이의 힘듦과 직장 생활에서 느끼는 고단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가난한 20대의 이야기라 생각했고, 나와는 거리가 먼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30대가 되어 다시 본 뮤지컬 ‘빨래’는 고향을 떠나 홀로 외롭고 고된 서울 생활을 하는 나영의 모습, 직장에서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는 나영의 모습, 직장을 잃어버린 나영의 모습과 그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이웃 사람들의 모습까지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 어쩌면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마음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쩌면 마주하기 힘들고 외면하고 싶을지 모르는 우리네 삶을 다룬 이야기라 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여운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그저 외면하고 피하기 바빴던 일상을 직접 마주하므로써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내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나영을 통해 위안을 얻고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김소라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05

12월에 떠나기 좋은 겨울 봉화 기차여행

첫눈은 누구나 기다리게 마련이다. 기다린 첫눈은 꼬박 이틀을 넘어 내려 수북하게 쌓였다. 온통 하얗게 뒤덮인 설원은 첫사랑만큼이나 달달한 설렘으로 다가온다. 그 설경을 달리는 기차여행은 낭만과 추억을 담아보는 겨울 여행 중 최고다. 협곡의 아름다운 설경을 배경으로 달리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시속 30㎞ 느리게 달리는 차창으로 보이는 눈 내린 협곡의 절경이 아름답다. 열차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풍경 감상에 최적화된 대형 창문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설경과 잘 어울리는 계곡을 끼고 앉은 산골집이 정겹고, 황량한 겨울의 삭막함과 부드러움과 포근함이 함께 공존한다. 순백의 비경에 등이 굽고 휘어진 소나무, 여기저기 삐죽삐죽 드러나 보이는 기암괴석들의 자태가 절경이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분천역에서 양원역을 거쳐 승부역을 지나 철암역에 이르는 27.7㎞ 구간이다. 12월 찬바람이 쌀쌀하게 목덜미를 파고들고 코끝이 맵싸한 날씨에 난로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객차에서 정겹게 다가오는 산골 풍경을 보는 건 겨울 낭만의 백미다. 한 해의 마지막. 낭만적인 여행을 하고 싶다면 느릿느릿 달리는 기차를 타고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천역과 아담하게 자리 잡은 산타마을로 가보자. 역사 앞과 마을은 계절과 관계없이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다. 썰매를 끄는 루돌프, 선물을 나누어 주기 위해 굴뚝을 올라가는 익살스러운 산타할아버지, 느리게 가는 우체국, 곳곳에 설치된 포토존이 있다. 분천 산타마을은 산골 오지에 산타를 활용해 꾸며진 이색 관광지로 마을 전체에 걸쳐 빨간색으로 단장된 지붕과 대형 트리, 산타 슬라이드 등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전국 유일의 산타 테마마을인 분천 산타마을은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한 12월 추천 이색테마 여행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는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반려문화행사도 예정돼 있다. 분천역에서 강줄기 따라 이어진 철길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고 터널을 통과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역사를 가진 양원역이 나온다. 양원역의 탄생을 모티브로 제작한 영화 ‘기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이곳은 기차가 아니면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이 손수 곡괭이로 돌을 고르고, 벽돌을 올려 세 평 남짓한 국내 최초 민자역사 간이역을 만들었다.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는 장소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친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양원역은 때 묻지 않은 오지 풍경이다. 산골 오지의 겨울은 시간이 멈춰버린 고즈넉함에 잠들어 있고 철길과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도란도란 들릴 듯하다. 협곡 사이로 좁은 하늘이 보이는 세평 하늘, 세평 땅. 승부역은 자연의 웅장함과 기암괴석의 계곡으로 숨겨놓은 절경이다. 눈이 내리는 겨울의 승부역은 환상의 풍경을 선사하는 작은 겨울왕국이다. 자연에서 여유와 힐링을 맛보는 겨울 기차여행으로 일 년의 마지막 12월의 추억을 만들어 보시기 바란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03

‘우울증 예방’ 공익형 노인 일자리,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때

노인 천만 시대, 초고령(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 초과) 사회를 앞두고 노년층의 건강한 노후를 위한 일자리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노년층의 일자리는 단순히 경제적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뿐 아니라 우울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노년층에서는 사회적 고립과 단절, 외로움으로 인해 공허함과 우울증 발생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노년에는 경제적인 것보다 어쩌면 사회활동에 대한 결핍이 더 큰 걱정거리로 다가온다. 사회적 고립은 노인들의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일자리를 통한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최근 아주대 병원이 수원시와 노인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함께 노인 실태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일자리를 가진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우울증 점수가 낮게 나타났다. 이중 공익형 일자리(0.97)에서의 우울증 예방 효과는 일반 일자리(0.54)에 비해 1.8배 더 높게 나타나 공익형 일자리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공익형 일자리는 민간형과 사회 서비스형과는 다르게 주로 지역 사회나 공공기관에서의 사회공헌 활동이다. 공공과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을 통해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여기에는 지역 공공 시설인 도서관, 복지관 등의 청결 유지, 공원 및 도로 관리, 어린이 및 청소년 교육 보조 등이 있다. 크게 신체적인 부담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형식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고령자들에게도 적합하고 하루에 3~4시간 정도의 적당한 수준의 활동량이 신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런 신체활동은 노화 과정뿐만 아니리 심혈관 질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회도 자연스레 갖게 되는데 일자리를 통한 동료 및 지역 사회와의 지속적인 교류는 건강한 노년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소속감을 느끼고 외로움을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자존감 향상도 느낄 수 있어 정신적인 건강에 많은 장점이 있다. 포항시민 A(76)씨는 “5년 전부터 어린이들에게 동화구연을 하고 있는데 나의 건강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급여는 적지만 게으를 수가 없고 사회에 도움이 된다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좋고 활력도 생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익형 일자리는 경제적 안정과 여가와 취미생활, 사회활동 참여는 물론이고 노년의 건강한 삶을 위한 다양한 역할의 의미가 있음에도 아직까지는 경제적인 교환 활동을 위한 ‘돈을 주기 위해 억지로 만든 노동’이라는 개념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공익형 일자리를 바라보는 오해와 편견의 시선이 있다. 시민들은 지역 사회 환경 개선 사업에 활동 중인 공익형 참여 노인들이 잠시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세금 낭비다’, ‘일다운 일을 시켜라’ 등의 부정적인 시선을 말하곤 한다. 공익형 일자리는 일자리라는 개념보다 사회활동을 하기 위한 복지 프로그램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노인들이 퇴직 후에 얻을 마땅한 일자리가 많지 않고 비용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여가 활동 또한 없이 쉽사리 사회적 고립으로 되기 쉽다. 노년의 건강한 삶을 위해 노인 일자리가 이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 앞으로 쏟아지는 은퇴자들로 초고령화 사회로 가는 지금, 공익형 노인 일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때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03

이팝꽃 향기는 이바비 막걸리를 남기고

‘흥해라이팝’의 막걸리를 넣은 전통 술떡 만들기 체험을 했다. 볼에 미리 섞어둔 가루류와 견과류, 콩배기를 넣은 뒤 따뜻하게 데운 물과 이바비 막걸리를 넣고 고무 주걱으로 고루 섞는다. 섞으면서 반죽의 농도를 확인한다. 한 주걱 떠서 흘렸을 때 끊기지 않고 흘러내리면 적당하다. 실온에 약 20분간 그대로 둔다. 그러고는 은박컵에 유산지를 깔고 반죽을 약 80% 넣어준다. 그릇에 빈 곳이 없도록 탁탁 두드려 준 뒤 적당량의 견과류와 콩배기 등으로 장식한다. 물이 팔팔 끓어 김 나는 솥에 찜기를 놓고 뚜껑을 닫은 뒤 약 30분간 찐다. 보릿가루의 비율을 많이 높여서 맛이 진하고 순도 높은 이바비 막걸리 향이 언듯 나서 더 맛나다. 식은 후에는 포슬포슬하면서 쫀득한 식감이라 며칠 두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보리떡 하나와 우유 한 잔이면 한 끼 식사 대용으로도 거뜬하다. 이바비 막걸리는 특별하다. 흥해의 이팝쌀만 넣어 화학 첨가물 없이 전통 방식 그대로 빚었다. 흥해에서 자란 이팝쌀은 예로부터 물이 좋아 품질이 우수하여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 고장에 큰 양조장이 3개나 있을 정도로 번성한 마을이었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마을기업인 ‘흥해라이팝’이 이팝쌀을 백 번 씻어 자연의 맛을 살리려 애썼다. 이바비 막걸리는 한 달간 저온 숙성해 깊은 맛이 난다. 새콤달콤하면서 끝맛이 깔끔해 먹은 다음 날 숙취가 없다. 양조가정에서 원재료 누룩과 소량의 물만 사용하니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무첨가 청량한 지역 술이다. 쌀 자체의 수분과 누룩으로 발효시키니 그 과정에서 은은한 꽃향기와 과일향까지 베어난다. 프리미엄 맛을 추구하는 정희정 대표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막걸리가 ‘2024년도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대구, 경북에서는 올해 유일한 수상 제품이다. 고도 탁주 부문에서 우수상(aT 사장상)을 받은 이바비는 희석하지 않은 프리미엄 막걸리 원주(알코올 함량 17%)로 차별화된 진하고 부드러운 맛이며, 와인잔에 얼음 희석해서 마시거나 탄산수 희석해서 드시길 추천한다. 자체 단맛으로 사이다나 과일청은 비추다. 흥해는 이팝꽃 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5월, 향교산에 이팝꽃이 뽀얗게 얹히면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마다 함박눈이 소복 쌓인듯하고, 늘어진 가지를 눈높이에서 마주하면 수북하던 이밥이 여러 개의 국수 가락으로 갈라져 흔들린다. 이래저래 보릿고개를 넘던 조상님들이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킬만하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 잘 있어 주었다고 2020년 12월에 ‘포항 흥해 향교 이팝나무 군락’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561호(식물-군락)로 지정됐다. 옥성리 흥해 향교와 임허사 주변에 있는 군락지는 향교 건립을 기념해 심은 이팝나무의 씨가 떨어져 번식해 조성됐다. 예로부터 흰쌀밥 모양인 이팝꽃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등 선조들의 문화와 연관성도 높아 민속·문화적으로도 가치가 크다는 평가도 받는다. 십여 일 흥해 읍내 가로수부터 산까지 하얗게 이팝꽃이 뒤덮는 5월, 논마다 모내기할 철이다. 이팝꽃의 향기를 담은 이팝쌀로 빚은 이바비 막걸리에서 꽃 향이 은은한 이유가 분명하다. 정희정 대표는 이 막걸리를 넣은 증편도 만들 계획이다. 보리떡이 익는 사이에도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왔다. 또, 마을기업을 시작하는 이들의 강의 요청도 줄을 잇는다. 자신이 힘들게 배운 사업이지만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나누는 마음이 여유롭다. 보리떡과 증편은 직접 흥해에 와서 체험도 가능하고 온라인 주문도 가능하다. 이바비 막걸리가 흥해의 어깨를 들썩거리도록 흥하게 하는 날이 코앞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2-03

이화우 화백의 한국화 ‘설악의 서정(抒情)’

가벼운 복장으로 집 가까이 호텔영일대 주변을 산책하다 무심히 생각난 듯 갤러리 웰로 향한다. 이번 주에는 또 어떤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호텔영일대 갤러리 웰은 포항예술진흥원에서 공모를 통해 일 년간 다양한 작가들의 전시가 순차적으로 예약되어 있다. 어느 날 불쑥 찾아가도 언제든 좋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이곳에 가면 항상 느끼는 것이 세상에는 재주 넘치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 테마는 ‘설악의 서정(抒情)’이다. 그런데 그 느낌의 강도가 예전과 좀 다르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그림들을 둘러본다. 이 그림들 뭐지? 정말 그림 맞아?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럼에도 사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설악산 사계 모습을 ‘화선지 위에 먹’으로 은은하게 표현했다는 게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다. 작가의 혼이 깃든 듯하다. 아니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전시장 공간이 빈틈없이 가득 채워진 듯하다. 묵향으로 채워진 설악산의 사계를 어느새 몰입해서 향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무(無), 즉 공(空·해탈)으로 이끄는 예술예찬론이 이런 몰입의 두근거림을 두고 한 말인가. 이화우 화백은 포항에서 개인전은 처음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취미로 서예를 시작했고 서예에 웬만큼 빠져있을 때 우연히 진성수 화백의 진경산수화에 심취하게 된다. 25년 전이다. 직접 그를 찾아가 16년 동안 포항에서 대구를 오가며 먹의 농담(濃淡)과 선을 표현하는 기법을 사사 받는다. 어느 순간, 그는 베끼기에 열중했던 자신의 그림들을 과감히 불태우고, ‘화선지 위에 먹’으로 극사실화 기법을 연구한다. 3년 동안은 작품 없이 극사실화를 위한 먹의 농담만을 연구한 후 다시 그리기 시작한지 8년째다. 이번 전시를 위해 4년을 준비했다. 그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두 달이 소요된다. 한 번의 실수에도 그림을 버려야하므로 정신집중은 기본이다. 화선지 위에 먹물의 세밀한 농담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색을 입힌다. 흰색 물감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가늘고 디테일한 윤슬의 흰 선마저 화선지의 ‘여백’이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 두는 것이다. 화선지에 은은히 젖어든 먹물이 빚어 낸 그림은 우리 전통문화의 정서와 기운, 그리고 채움과 비움이 적절히 서려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안온함을 준다. 북송의 소식이 왕유의 시와 그림을 보고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畵中有詩 詩中有畵)”라 평했다. 이화우 화백은 화중유시(畵中有詩)를 꿈꾼다. 예술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따지면 운전이나 음식도 경지에 이르면 예술이 된다. 그러나 예술은 그것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에게서 생명력을 얻어 생동한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향유해 줄 사람이 없다면 생명을 잃게 된다. 예술문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여전히 작품전시나 미술관에 가는 것은 특별한 느낌으로 일상적이지 않다. 앞으로의 바람을 묻는 시민기자에게 이화우 화백은 “건강하게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전시의 홍수 속에서 보는 순간 절로 탄성이 나오는 작품은 흔치않다. 다음 전시는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며 향유 객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으로 그의 전시장에 생동감이 넘쳐나길 바라본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8

가을 ‘동리길’을 걷는 즐거움

거대한 육교 계단 앞에 서자 아이는 신이 났다. 경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육교인데다 높이가 꽤 높다. 그도 그럴 것이 한동안 그 아래로 기차들이 지나다녔다. 계단을 올라서자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경주역이 저만치 아래로 보인다. 기차들이 오고 갔던 철도는 여기저기 어긋나 실제 지난 시간보다 더 오래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길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크게 경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다가오지도 않는다. 아이는 눈을 마주쳐보려고도 대화도 시도해보는 듯 했지만 큰 성과 없이 돌아섰다. 샛노랗게 물든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였다. 마치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 같다. 저 나무 아래로 내려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한때 철도 관사가 모여있던 마을이다. 얼마 전 종강을 한 수업 덕에 한 계절 동안 매주 목요일이면 이곳으로 들락거렸다. 바쁘게 오가면서도 틈틈이 보아뒀다. 언젠가 아이와 산책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 마을이 이렇게 변했노라고. 황촌마을활력소 주변엔 이미 유명세를 탄 카페도 등장했다. 오전 11시에 나온다는 식빵이 늦은 오후까지 남아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럼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쇼케이스를 살폈다. 역시나 보이지 않는 식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마을 산책에 나섰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골목.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조성된 작은 화단들. 골목을 걸으며 화단에 심겨준 작물들을 보는 재미도 있다. 꽃과 함께 자라는 풋성귀들. 똑 떨어지게 정돈된 세련미 나는 정원보다 사람 냄새 나는 그 풍경이 참 좋다. 황촌마을 활력소를 기준으로 우측엔 동리길, 좌측엔 목월길이 조성되어있다. 길을 찾기 전 아이에게 주의할 부분을 일러줬다. 이곳은 사람들이 실제 살고 있기 때문에 큰 소리를 내거나 방해가 되어선 안된다. 다행히 길을 걷는 내내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 동리길로 들어서자 커다란 감나무 가지가 담장 밖으로 나와 있다. 수북이 열린 감들 사이 탐스럽게 붉은 홍시는 이미 날 손님이 맛을 보고 갔다. 관상용일까. 아니면 저대로 매달아둔 채 익힐 셈인가. 엄마의 궁금증과 달리 아이는 벽 여기저기 써있는 시들에 빠져있다. 모두 읽으면서 갈 거야. 그렇게 선전포고를 한 꼬맹이는 시 감상보다는 자기가 아는 시가 혹여 있을까 찾는데 더 급급해 보였다. 그러다 동리길의 끝자락에 쓰여 있던 ‘고향’이란 시에 눈이 갔다. ‘이렇게 옛날도 있은 것처럼 백년이 또 지나도 이대로 있을까/십 년 지나 고향에 돌아오니 골목의 저녁노을 그대로 있네.’ 이곳과 참 어울리는 시란 생각이 들었다. 벽화가 끝나는 길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막다른 길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목월길을 찾아나섰다. 동리길이 밝고 화사한 분위기였다면 목월길은 은은하며 차분한 느낌이다. 목월길의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송아지’ 시 옆으로 귀여운 얼룩송아지가 그려져 있다. 만족스런 웃음을 지어보이며 노래로도 나와 있는 시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마지막 코스는 마을 활력소 내에 전시장이다. 이곳에선 종종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번엔 자수작가의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최근 뜨개질과 바느질에 관심 있는 아들은 자수작품에 꽤 흥미를 보였다. 이른 시간에 찾았더라면 웅장하게 서있는 급수탑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곳곳에 생겨난 예쁜 까페들도 둘러봤겠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그렇게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은 적절한 산책은 매우 만족스럽게 마무리 되었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8

‘당신은 누군가에게 등불입니다’

백혈병 소아암 환아를 위한 사랑의 콘서트가 11월 20일 대구백화점(프라자) 프라임 홀에서 열렸다. 대구시낭송진흥회가 주관하고 사단법인 시읽는문화대구지회 사단법인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대구경북지회가 주최하는 행사다. 대구시낭송진흥회는 시를 사랑하는 회원들이 함께 하고 있다. 시 낭송으로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아픔과 상처도 꽃으로 피워낸다. 2020년 9월 창립 후 현재까지 매월 넷째 주 목요일에 시 낭송회를 개최한다. 회원들 간의 친목도모는 물론 시 낭송을 기본으로 하는 봉사 및 버스킹 등 다양한 행사의 재능 기부를 통하여 시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사회 공헌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시낭송진흥회는 시 낭송의 대중화로 시심 가득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한다. 공연 전, 대구수성도서관 어울림 홀에서 몇 번의 연습이 있었다. 조금씩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을 느끼며 환아들을 만날 무대에 들떴다. 공연 당일, 아침부터 긴장감이 돌았다. 서둘러 평소보다 짜릿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앉았다. 소아암 환아를 위한 시낭송이기에 힘과 희망을 심어 주는 무대여야 한다. 무대 의상과 콘서트 내용을 최대한 밝고 따뜻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이번 행사는‘당신은 누군가에게 등불입니다’, ‘시를 읽으면 상처도 꽃이 된다.’ 는 시 읽는 문화의 슬로건에 가장 어울리는 무대를 만들어야했다. 여는 시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으로 많은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시며 시작되었다. 시낭송을 비롯하여 시극, 테너, 부부 연극, 어린이 단막극 등이 펼쳐졌다. 어린이 낭송, 환우의 자작시에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닫는 시로 정연복의 ‘어린이를 위한 기도’에 아쉬움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촛불 밝혀 다 함께 마음을 담아 ‘사랑으로’ 불렀다. 1막에서 4막까지 객석에서는 환호와 박수 소리가 컸다. 심정숙 회장님 이하 많은 시낭송진흥회 회원들의 노력 끝에 한국 백혈병 소아암 환아를 위한 시 낭송콘서트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입장권 판매 및 후원금 현황은 예상보다 컸다. 시낭송진흥회 회원 일동과 각 기관 단체 및 후원자들의 모금 액수는 1000만원을 넘었다. 공연은 약 두 시간. 객석이 부족해서 서서 보는 분도 많았다. 어린이와 청소년, 중장년층, 시니어까지 다양했다. 시낭송에 관심 없을 때에는 이러한 무대가 있는지도 몰랐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스크린에 영상과 음악이 흘렀다. 대기실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가득 찬 객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소아암 환아들과 케어 하는 가족들께 부디 이 콘서트가 작은 위안과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음의 힘을 얻어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이웃들이 사회의 따뜻한 온정과 감동을 함께 해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낮에는 본업에 충실하며, 취미로 배우는 시낭송이다. 시의 장르가 다양해서 배울수록 어렵다. 시 낭송으로 인해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며 치유와 위로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길 바란다. 나는 오늘의 멋진 무대에 함께 한 내게 참 잘했다 위안한다. /김영주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8

천년숲 황톳길로 맨발 산책해요

몇 해 전부터 이어진 맨발 걷기 열풍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백세시대 다양한 운동이 있다지만 맨발 걷기는 남녀노소 접근성이 높은 운동이고 일상에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생활 운동이다. 한창 붐을 일으킨 올레길이나 둘레길처럼 전국적으로 맨발 길을 따로 조성하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학교 운동장, 공원, 해변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맨발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심지어 ‘맨발걷기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생겨나 2024년 2월 기준 대구지부, 울산지부 등 총 4개 지부와 91개 지회가 활동 중이라고 한다. 안동에도 맨발 걷기로 유명한 곳이 있다. 바로 경북도청 앞 천년숲 황톳길이다. 안동시 풍천면 갈전리에 위치한 소나무 둘레길이 있는 천년숲에는 황톳길 맨발 산책로가 마련돼 있다. 신발보관함과 세족장이 있어 산책로를 맨발로 걸은 후 깨끗하게 발을 씻고 나올 수 있다. 추운 날씨에 맨발 걷기에 어려움이 있다면. 양말을 신고 발바닥 쪽에만 구멍을 내어 걷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예부터 발은 제2의 심장이라고 했다. 천년숲 맨발 산책로에는 ‘신발을 벗고 발바닥에 자극이 가도록 걸으면 쌓인 피로가 줄어들고 뭉친 근육도 부드럽게 이완돼 건강에 효과적’이라는 안내 문구가 있다. 건강을 위해 일부러 운동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숲길에서 느긋하게 산책하듯 힐링하며 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세족장 옆에는 수령 290년이 된 느티나무가 있어 그 아래서 늦가을의 운치도 느낄 수 있다. 천년숲은 산림청이 발표한 2023년 녹색도시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대한민국 최우수 도시숲으로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녹색문화공간이다. 경북도청 신도시 주민들의 쉼터이자 지역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맨발 걷기는 혈액 순환, 면역력 강화, 불면증 해소, 스트레스 개선 등 여러 가지 효능이 있다. 현대인이 맨발로 땅을 밟을 일이 거의 없으니 이러한 ‘접지’가 땅의 기운, 자연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자연 친화적 운동이 아닐까 싶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천년숲을 찾아 황톳길 맨발 걷기 산책로를 함께 걸어보길 권해본다. /백소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6

이상기후가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

지난여름은 모두가 ‘역대급 더위’를 외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더위는 11월 중순까지 이어져 낮 기온이 20도 안팎을 오르내렸고 그 덕에 여름에 없던 모기까지 기승을 부리며 때 늦은 모기와의 전쟁을 치렀다. 더위를 물리고 기다렸던 풍요와 단풍의 계절인 가을은 한 달 늦은 11월에서야 그 정취를 맛보았다. 평년보다 높은 기온의 가을은 때아닌 봄꽃도 피게 만들어 불시개화를 경험하게 했다. 사람들은 옷장에 잠든 겨울옷을 언제 꺼내야 할지도 고민이다. 이처럼 날씨는 우리 생활의 기본요소인데 계절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기온 상승은 단순히 일상을 불편하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폭염과 폭우, 태풍 등의 과격한 이상기후를 겪고 있는 지금, 기후의 변화는 건강을 비롯하여 경제와 사회 등의 여러 가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먼저 건강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이상기후는 불안, 긴장, 걱정 상태를 넘어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몸은 심장과 혈관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신체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특히 환절기에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면 심혈관계 질환의 발생도 급증한다. 특히, 기후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움과 불면, 호흡 곤란, 근육통이 나타나 다양한 자율신경실조 증상을 호소하고 있다. 스트레스가 만성화되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도 겪게 되어 불안을 더 심화한다. 달갑지 않은 기후 변화는 이제 환경문제인 동시에 개인의 건강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올봄에는 사과와 배 가격이 지난해의 두 배로 치솟았다. 지독한 폭염은 9월에도 더위가 이어져 햄버거 가게는 토마토 구하기가 어려워졌고 강원도 고랭지의 배추는 폭염에 녹아내려 소비자들은 농산물 공급 불안 사례를 겪었다. 커피와 올리브유 등도 마찬가지였다. 초콜릿의 원재료인 카카오 가격도 올라 초콜릿이 들어간 제품도 덩달아 오를 예정이다. 카카오 생산지의 폭우, 가뭄, 감염병이 겹치며 생산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불확실성을 가지는 경제는 기후 변화로 인한 농작물의 생산량 감소로 인해 먹거리 물가를 오르게 하는 ‘기후플레이션(climateflation) 시대’라는 신조어를 등장하게 만들었다. 이건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라는 말이 이제는 무색해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상기후가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사는 대구와 경북의 농작물에도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농작물의 생산은 개화 지연, 생육 부진, 곰팡이병 발생 등으로 생산량 감소로 인한 피해 농가들은 이상기후에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맨몸으로 싸우고 있는 것과 같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지난달 대구기상청에서 발간한 대구·경북 24개 시·군의 기후 경향을 분석한 ‘대구·경북 최근 10년(2014~2023) 기후 정보집’에 따르면 연평균 기온이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야말로 펄펄 끓는 대구와 경북이 되고 있고 폭염일수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그중 포항은 7월의 절반(17일) 이상이 열대야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 폭염주의보 발령도 더 잦았다. 또 여름철 강수량은 감소한 데 비해 가을과 겨울의 강수량은 증가했고 강수일수는 평년 97.5에서 1.4일 감소한 96.1일이었다. 기후의 변화는 우리의 생활과 떨어질 수 없고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으며 살아간다. 올가을 온화한 날씨가 이어졌는데 겨울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6

그림이 있는 풍경

보문단지에서 천북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자 하늘에 무지개가 걸렸다. 눈부신 가을색에 환호성을 지르던 일행이 갓길에 차를 세워보라고 했다. 이건 찍어야 한다며.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선명한 무지개를 본 적 없었다. 하늘에 반원을 정확하게 그린 무지개, 빨주노초파남보 띠를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옷자락을 여미던 나그네의 겉옷을 벗기는 햇살처럼 무지개가 자동차를 갓길에 세우게 했다. 비상깜빡이를 켠 채로 천천히 달리던 우리가 갓길을 만나자 차를 세웠고, 우리 차 앞에 중형차가 서더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내려 하늘을 향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조금 후, 탱크로리에서 운전기사가 내려 풍경 사진을 찍었다. 빠른 속력으로 달리던 사람들의 발길을 무지개가 멈춰 서게 만든다. 그 풍경까지 아름다워 그림 같다. 멋진 풍경을 보면 그림 같다고들 한다. 종교화, 역사화, 인물화의 시대를 넘어서 풍경화가 유행하던 시절, 귀족의 거실에 걸린 풍경화를 많은 사람이 동경하게 된다. 이때부터 멋진 풍경을 보면 ‘그림 같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림 같은 무지개를 보다가 며칠 전 찾아가서 본 그림이 떠올랐다. 지인이 근무하는 학교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내왔다. 나눔미술은행에서 포항명도학교에 소장 중인 그림 16점을 무상으로 대여해 준 것이다. 올 10월에 신청해서 11월에 대여가 되어 1년 동안 학교 곳곳에 전시할 거란 소식이었다. 멀리 미술관까지 다니러 가서 구경할 작품이 집 가까이 왔다니 한걸음에 달려갔다. 포항명도학교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우현동에 있는 사립 특수학교이다. 지적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교육기관으로 유치부, 초등부, 중학부, 고등부, 전공과를 두고 있다. 근처를 지나면서 교문을 들어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수업이 끝나 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학교를 빠져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오후 3시에 갔다. 수업에 방해되지 않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제일 먼저 급식소 벽에 걸린 작품을 보았다. 오른쪽 밑에 네임텍이 붙었다. 작품명, 작가 이름, 큐알코드(큐알코드를 찍으면 작품 설명이 있는 사이트에 접속이 가능하다.) 등이 적혔다. 강지만 작가의 ‘글라이더’라는 제목이었다. 새와 글라이더에 탄 친구들이 함께 하늘을 누비는 작품이다. 미술관에서 직접 방문해 작품이 어느 공간 어느 위치에 놓이면 좋을지 살피고, 튼튼한 틀까지 만들어 꼼꼼하게 부착했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나눔미술은행은 전국 곳곳에서 누구나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소장품을 무상으로 대여·전시하는 예술 나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노인복지시설, 특수교육시설, 전국문화기반시설 등 전국 10개소에 미술은행 소장품 161점을 지원했고, 2024년에는 총 12개(지난해 대비 2개소 추가)의 기관에 미술은행 소장품을 확대 지원한다. 교장실 앞에 붙은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뒷짐을 지고 푸른 바다를 바라다보는 모습이다. 저 그림이 식당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함께 웃었다. 계단이 아닌 오르막길을 따라 2층으로 오르는 복도에 그림 두 점, 또 복도 휴게실에 집시의 시간이라는 작품 앞에서 그림 속에 머물렀을 주인공의 시간을 보며 우리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했다. 그림을 핑계로 학교 건물 곳곳에 아이들의 발길이 닿는 곳곳을 소개해 주셨다. 도서관, 과학실, 체험실, 그러다 미술실 앞에 가장 많은 그림을 전시했구나 싶었다. 건물을 오가며 그림 앞에서 환하게 웃을 아이들을 상상하니 그림 같았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6

하곡(霞谷)마을 은행나무

샛노란 은행잎은 국화만큼이나 가을의 대명사다. 땅도 나무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은행나무 단풍은 아름다움에 기품을 더한다. ‘너무 보고 싶어서’ 가을이면 꼭 찾아가는 은행나무가 있다. 절정을 놓칠세라 주말마다 가기도 한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설렌다.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마을입구를 지키는 이 은행나무는 1982년 10월 29일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300년으로 추정되었다. 서원이나 재실이 아닌 하곡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다. 굳이 노랗게 물들지 않아도 위엄 있는 웅장함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운치가 있어 가을이 아니어도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종종 찾아간다. 올 가을 단풍도 변함없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많이 알려지지 않아 호젓하게 즐기는 맛이 있었는데 올해 부쩍 찾는 이가 많아진 듯하다. 황금빛 은행잎을 즐기며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우리지역 주변에도 많이 있다. 하곡마을 외에도 덕동마을, 도리마을, 운곡서원, 통일전 거리, 용담정 가는 길 등등에서 늦어진 가을이 아직 진행 중이다. 운곡서원은 주차할 곳이 없어 돌아갈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 인물로만 따지면 운곡서원 보다 하곡마을의 은행나무가 훨씬 잘생겼지만 터 잡은 곳의 기운이 인기도를 달리 한다. 바닥이 온통 황금색으로 물든 하곡 은행나무 쉼터에 앉아 오후를 즐기시던 마을 어르신이 “내가 처음 시집왔을 때는 지금보다 더 잘생겼었지. 세월을 보내며 가지도 부러지고 하면서 지금은 외려 더 못나졌어.” 라고 하셨지만 6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을을 지키며 여린 인간을 품어주는 그 너른 품은 그대로인 듯하다. 은행나무는 천적이 없어 병충해에 강한데다 불에 잘 타지 않아 3000년을 두고 살아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는 1100살로 경기도 용문사에서 천수를 누리고 있다. 공자 나이 30에 ‘이립(而立)’이후 은행나무의 단 위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설이 있어 조선 중기 동지성균관사로 임명된 대사성 윤탁(尹倬)이 성균관 명륜당 뜰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주보게 심는다. 그는 이들을 ‘문행(文杏)’이라 부르며 배우는 자를 경계하여 “뿌리가 깊으면 가지와 잎이 반드시 무성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후 지방의 향교와 서원들도 따라서 심기 시작한다. 그러나 행단(杏壇)의 나무가 살구나무라는 주장도 강하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행단변증설’에서 그 주장을 일축한 듯 했지만 여전히 은행나무와 살구나무는 시비(是非) 중이다. 그러나 명륜당 뜰에 은행나무가 심겨진 이후 보편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행단은 은행나무로 인지되며 유교를 상징한다. 논어를 펼치면 첫 문장이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이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 한가’라는 뜻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익숙해지면 가슴속이 충만해지고 그 가운데 절로 희열이 느껴진다. 배움으로 마음에 호연지기를 기르다보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 군자’가 되는 것이다. 하곡마을을 지키는 아름답고 위엄 있는 그 은행나무 그늘에 서면 웅장하도록 너른 그 품이 묵직한 침묵으로 행단 위에서의 공자 가르침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며칠 전 다녀온 가을빛 찬란하던 하곡의 은행나무가 벌써 그립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1

불화와 공필화

하나 둘 떨어지던 낙엽이 갤러리 앞을 소복히 채웠다. 경주시 진형동에 위치한 갤러리 미지는 어느덧 불국사의 문화이정표가 되었다. 늘 새롭게 전시가 꾸려지는 갤러리의 이번 순서는 부처님의 미소와 함께 오랜 시간을 쌓아 올린 민화들이다. 겨울, 봄, 여름 여러 계절을 치열하게 보낸 들판에서 농부가 자신의 수확물을 뽐내듯 오랜 시간 쌓아온 작업을 선보이는 이미정 작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그림이 인생의 중심이 되어 작가라는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소회했다. 취미로 시작한 그림은 그간 다양한 단체전과 공모전 수상을 통해 그녀를 전문 작가로 만들어줬다. (사)불교미술 일섭문도회, 경주민화협회, 법여불화원 회원인 그녀는 현재 신라미술대전 추천작가이자 태건불화원 공필화반 강사로 활발히 활동중이다. 작가와 그림을 닮는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한층 미소가 부드러워진 그녀다. ‘불화와 공필화, 부처님께 공을 드리다’라는 주제에 맞게 내부엔 불화와 공필화들로 가득차 있다. 얕은 수가 아닌 진심을 담은 정성이 쌓여야 완성되는 공필화다. 메인작품인 ‘아미타여래도’는 크기와 섬세함에서 먼저 놀라게 된다. 중생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시선은 깊은 속에 내려앉아 있던 마음마저 다 들킬 듯하다. 문양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있는 옷자락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켭켭이 쌓아온 시간이 오롯이 올려져 생명을 품은 참새들은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것 같다. 세심한 붓끝에서 그림을 향한 그녀의 열정이 묻어난다. 보드라운 털게를 둘러싼 섬세한 털들은 작가의 공과 인내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란도를 비롯 찔레꽃, 벚꽃 그림들은 사실적이면서도 여백의 미가 살아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불필요한 배경이 없어 주제에 온전히 마음을 맡기고 느낄 수 있다. 작품마다 녹여든 정성 덕분인지 한 작품 한 작품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작품 감상을 마칠 수 있었다. 그녀에게 그림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림을 통해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그림을 통해 벗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그림을 통해 고난과 아픔을 치유하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를 이끌어준 스승님께 감사를 전한 뒤 그림이라는 도반과 함께 흘러가며 많은 대중들에게도 영감과 위로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버팀목처럼 한결같이 초심을 잃지 않고 묵묵히 정진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라는 이 작가. 그녀가 만들어낼 다음 우주가 기대된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1

갱년기는 신이 주신 선물이다

가을이 깊어졌다. 산과 들에는 색을 바꾸는 잎들로 가득하다. 곧 잎들은 스스럼 없이 떨어져 내릴 것이다. 빠르게 변해가는 계절을 보면서 여성들도 이렇게 생의 계절을 바꾸는 때가 있음을 떠올린다. ‘갱년기’라 이름하는 그 시기를 누구나 한번은 거쳐간다. 자연에 사계절이 있듯이 여성의 몸에도 사계절이 있고 갱년기는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 들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갱년기’시를 읽으며 갱년기를 공감한다. “더위의 한가운데를 보았습니다 // 키 큰 소나무들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 소나무마다 매달린 매미들이 있었습니다 /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 바싹 마른 화단에 원추리 꽃들이 시들고 있었습니다 / 꽃과 줄기 사이에 거미줄 한 채 걸려 있었습니다 / 그 아래, 줄지어 가는 개미떼들이 있었습니다 // 한 소나무의 둥치를 따라 눈으로만 쭈~욱 올라갔습니다 / 구름이 하늘을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 낮달이 농담처럼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 ‘무더위의 한가운데 / ’라고 누군가 속삭였습니다 // 더위를 먹어 병원 가는 길이었습니다”- 김미옥 시 ‘갱년기’ 여자라면 누구나 이런 환절기의 한가운데를 어김없이 건너가야 한다. 시시때때로 열이 치밀어 올라 어쩔 줄 몰라하며 온몸이 화끈거리는 정체불명의 한 때를. 꽃 한 송이 피는 것에도 가슴이 콩닥이고 낙엽 한 장 날리는 것만 봐도 눈물이 고이던 여리여리한 소녀를 지나 여인이 되고 엄마가 되어 치열하게 살아온 날들은 이제 지나갔다. 원추리 주홍빛처럼 곱기만 했던 얼굴에 하나 둘 주름이 잡히고 싱싱한 젊음을 다 바쳐 키워온 아이들은 매미처럼 훌훌 떠나가 버렸다. 아직은 내게 여름이 남은 것 같은데 자꾸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무엇을 잡으려 허둥대며 살아왔는지 손을 펴 물끄러미 보아도 희미해진 손금만이 낡아간다.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배롱꽃처럼 붉은 열정은 여전히 살아있는데 몸은 쓸쓸해져만 가는 갱년기에는 누구나 이렇게 독한 더위를 먹어 어지럼증을 앓는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다. 갱년기가 있어서 여자는 한 번 더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의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갱년기라고 했다. 갱년기의 갱은 한자로 다시 갱(更)자이다.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음의 성질에서 활동적이고 저돌적인 양의 성질로 전환되는 시기가 바로 갱년기라고 한다.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만 살아온 날들에서 비로소 진짜 내가 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비록 몸은 예전과 다르게 아픈 곳도 많아지고 감정 기복이 잦지만 그것도 다 과정인 것이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변화가 있으려면 그만큼 아픔이 따르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집중력이 떨어지고 입맛이 없고 자꾸만 마음이 허해지지만 가을이 절정이다. 가을에는 모든 것이 무르익는다. 하늘은 또 얼마나 눈부신가. 가족을 위해 동동거리던 분주함에서 벗어나 이제 나의 삶에 집중하자. 열심히 살아온 보상으로 신이 주신 선물이라 여기자.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을 잊지 말자.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21

짬뽕용 고춧가루 이래도 되는 걸까?

얼큰하고 개운한 맛, 해산물과 채소, 고춧가루가 더해져 매콤한 짬뽕, 짜짱면과 함께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은 얼큰한 짬뽕이 생각나는 늦가을이다. 얼큰 매콤한 짬뽕 국물은 고춧가루가 맛과 향을 좌우한다. 그런데 짬뽕 국물을 만드는데 불량고추, 불순물이 들어간 고춧가루가 사용된다면 이를 알고는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경북 A시에는 전국 최대 건고추 거래 산지의 공판장이 있고 중도매인이 있다. 고추 거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공판장 인근에 제분 방앗간도 제법 큰 규모로 제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업소는 그냥 제분해서는 안 되는 병든 고추, 곰팡이에 오염된 고추, 희아리 고추 등으로 제분을 하고 있었다. 제분이 끝난 고춧가루는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상 고춧가루로 보인다. 짬뽕에 들어가는 고춧가루는 김장용과 다르게 고운 입자로 제분을 해야 음식에 쉽게 섞여 부드럽고 맛있는 짬뽕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제분된 고춧가루는 10근씩 포장해 상인을 거쳐 중국집 등으로 들어갈 것이다. 고추는 탄저병, 바이러스, 무름병 등 때문에 농약을 자주 사용해 방제한다. 우리나라는 잔류 독성이 강해 인체에 해를 주는 농약 생산을 금지하고 있다. 비교적 안전한 농약이라 할 수 있지만 깨끗이 씻어 건조하고 꼭지를 따고 불순물과 병든 고추, 희아리 고추 등을 제거하고 제분을 해야 한다. 농약은 고추 꼭지 부분 등에 얼룩처럼 묻어 있는 때가 있어 꼭 세척을 하고 가루로 제분할 때까지 습기 등을 관리해야 한다. 농가에서는 건고추를 생산해 공판장에서 판매를 하거나, 소비자와 직거래 또는 상인들에게 직접 판매를 한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고추 농가를 방문해 고추를 매수하는 상인들은 병든 고추, 곰팡이 핀 고추, 희아리 고추를 매우 싼 가격에 수매해 간다고 한다. 폐기해야 할 불량고추를 싼값에 수매하는 상인들이 색소를 넣거나 기타 방법으로 제조 유통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가에서는 고추가 변질한 상태로 건조돼 흰빛, 주황빛을 띄거나 덜 익은 고추, 얼룩진 고추 등을 희아리 고추라고 부른다. 탄저균에 썩거나 고추 바이러스 병에 걸린 고추 등을 농가에서는 쓰레기 고추, 불량 고추라고 해서 폐기한다. 이런 고추로 제조해 유통하는 일이 김장철이 다가오면서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 고추시장 50% 이상을 중국산이 차지하고 있다. 일부 요식업체에서는 값싼 중국산을 국내산으로 둔갑시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도록 단속을 강화하고, 성분 분석이나 원산지 확인도 중요하지만, 고춧가루 제조와 유통 과정에서의 점검과 단속이 절실히 요구된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19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글 읽기에 좋다는 가을밤, 올 한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있을까. 얼마 전 우리는 그동안 고대하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수상 작가와 그녀의 책에 뜨거운 관심을 보냈다. 출판 업계는 물론이고 책을 찾는 사람들로 서점가는 오랜만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여기저기 단톡방에서도 떠들썩한 시간을 보냈다. 어떤 분은 몇 해 전 외국에 사는 지인에게 작가의 책을 주는 바람에 아직 구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노벨 수상자가 배출된 기쁨에도 정작 한국인들의 독서량은 시나브로 줄어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해외 주요국의 독서실태 및 독서문화 진흥 정책 사례 연구에 따르면 미국이 월평균 6.6권인 반면 한국은 0.8권으로 나타나 최하위 수준임을 드러냈다. OECD 회원국 월평균 4.6권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는 노동시간이 길기로 유명한 중국(2.6권)보다도 낮은 독서량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조사에서는 한국인의 독서 인구도 2021년에는 47.5%로 감소해 성인의 절반 이상은 1년간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또 대구와 경북 지역의 성인들도 통계청의 ‘2023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구당 연평균 독서량이 5권으로 전국 시도 가운데 가장 적었다. 세종시는 9.9권으로 독서량 전국 최고였다. 최저의 독서량을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문 닫는 서점가 소식은 슬프지만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책 읽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사회는 문맹률은 1% 안팎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지만 문해력은 위기 상황이다. 영상과 인터넷에 밀려 ‘읽는 사회’에서 ‘보는 사회’로 바뀐 이유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독서와 문해력의 상관관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중요성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인지 신경학자 메리언 울프는 “문해력의 저하가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발전한 나라의 국민에게 비판적 사고, 자신에 대한 성찰, 다양성을 존중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 나라에는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살아간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활자 형태를 읽고 사고하고 상상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출퇴근을 하면서 매일 쏟아지는 정보를 읽고 있으며 스마트 폰 속 이야기들, 옥외광고, 메일, 사업계획서 등이 그렇다. 읽지 않는다는 건 내가 친구와 대화할 수 없다는 뜻이고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며 나아가서는 내가 타인과 국가로부터 도움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다시 말하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지식 습득은 물론 상상력과 언어 능력 향상, 스트레스 해소, 자기 성장, 공감 능력 강화, 시간 관리 및 집중력 향상, 자아실현, 문화의 이해, 재미와 흥미 등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이유들은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책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관점으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더 나은 사람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갖는다. 바쁜 일상에 쫒겨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가는 지금, 포항 양덕에 있는 책방 수북에서 단편소설 100권 읽기에 도전 중인 포항시민 A씨는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글 쓰기에도 관심이 생기고 이런 기회가 있어 참 좋다”고 말했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19

물고기가 오는 걸 바라보다

7번 국도를 달리면 푸른 바다를 덤으로 선물 받는다. 포항에서 강구항까지 바다의 빛깔이 철이 철인지라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바다도 철썩철썩 글 읽는 소리를 들려준다. 듣기 좋은 그 소리를 벗 삼아 달려 영해면 괴시리에 닿았다. 그 옛날 목은 이색은 관어대에 올라 고래불에 모여드는 물고기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선비들은 모두 MBTI가 F 성향이었나 보다. 관어대(觀魚臺)는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 있는 상대산 정상에 있는 정자다. 지붕의 기와끼리 이마를 맞대는 괴시리 마을, 주말이라 그런지 조용하던 동네를 찾은 사람들로 수런거렸다. 거기서 두어 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관어대가 있다. 오래된 팽나무 이정표가 입구에 선 길은 공사 중이라 옆으로 돌아들어 갔다. 해파랑길을 걷다가 영덕군에 들어서면 블루로드라고 또 하나의 이름이 붙는다. 그 코스 중에 관어대를 둘러보도록 해 놨다. 주차장에 간단한 설명을 읽고 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계단과 야자 매트와 황톳길이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SNS에 초보자도 30분이면 오르는 가벼운 등산코스라고 적어서 그런 줄 알고 나섰는데, 가파른 길이라 숨이 차는 길이다. 교통약자를 위해 케이블카가 설치된다는 소문도 있다. 11월 중순이라 가을 옷차림으로 온 게 후회가 됐다. 여전히 낮 기온 20도가 넘어 땀 범벅이다. 조끼를 벗고,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렀다. 먼저 올랐던 지 하산하는 연인들의 하얀 반 팔 티셔츠가 오늘은 딱이었다. 운동 부족인 허벅지가 뻐근할 즈음, ‘아름다운전망대’(전망대 이름은 좀 더 낭만적으로 바꾸는 걸 추천)가 나타났다. 이름 그대로 산 아래로 영해평야, 동해로 흐르는 강, 강을 품어주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땀을 식히며 눈으로 풍경을 더듬었다. 관어대까지 마지막 남은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랐다. 그 끝에 울퉁불퉁한 바위가 길처럼 이어졌다. 어찌 이리 오르기 안성맞춤인 바위가 있나 했더니, 콘크리트로 바위를 똑 닮은 계단을 만들었다. 색칠까지 바위 그 자체다. 요런 생각은 누구의 의견이었을까? 만나면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다. 혼자 흐뭇해하며 고개를 드니 몇 송이 구절초 사이로 관어대가 의젓하게 앉았다. 이색 ‘1328~1396’이 쓴 ‘관어대부’를 보면 “동해 석벽 밑에 임하여 노는 고기를 셀 만하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명칭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 뒤를 따라 올라온 동네 분이 어부들에게 고기떼가 오는지를 알려주던 곳이라고 자랑하셨다. 나팔을 불어 알렸을까, 목청껏 소리쳤을까, 북소리였을까 상상하며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올랐다. 명사십리 모래밭과 푸른 소나무 방풍림이 바다를 깜싼다. 어찌나 푸른지 거기에 고래가 헤엄치면 손에 잡힐 듯했다. 상대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쪽은 바위 절벽이 있고, 동쪽으로 동해가 펼쳐져 있다. 북쪽은 백사장을 끼고 울진군 후포면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포항 호미곶이 보인다. 관어대는 동해안을 대표하는 명승지 중 하나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인사가 관어대를 방문하여 작품을 남겼다. 고려시대 관어대를 노래한 시는 안축이 쓴 ‘단양 북루의 시에 제하여 부치다 병서’를 시작으로 이색의 ‘신석보를 전송하며’, 이숭의 ‘관어대에 올라’ 등 영덕 지역에 부임하거나 유배를 온 인물이 남긴 작품이 많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양부지’ 등의 읍지 및 지리지류의 누정 항목에 확인되나,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관어대는 2015년 복원한 것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영해 지역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문화 교류의 공간으로 활용되며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공간으로 의미가 크다. 원래의 관어대는 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절벽에 있었다고 전한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4-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