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따라 왔다가 더위 따라 떠나는 음식이 있다. 여름을 책임지는 시원한 밀면. 윤 유월이 끼어 있어 음력은 아직 7월. 낮 기온은 여전히 덥고 습하다. 그래도 나무 그늘에 서면 가을이 묻어난 바람이 슬쩍슬쩍 스치고 기세등등하게 울어대던 매미가 날개를 퍼덕이며 힘없이 툭! 떨어져 놀라기도 한다, 여름이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여름 끝자락. 덥고 습하니 여전히 시원한 밀면이 생각난다. 굳이 부산까지 가지 않더라도 포항에도 밀면 맛집이 많다. 그 가운데 오래된 가정집을 개조한 듯 정감 가는 외관에 ‘밀면 맛집 3·8밀면’이라는 커다란 간판에 끌려 무심히 들어섰다가 단골이 된다. 올여름 내내 시원한 밀면이 생각날 때면 발길이 절로 닿는 나만의 맛집이다.
밀면은 메밀이 아닌 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만든 면이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이 몰려있던 부산에서 시작된다. 냉면은 먹고 싶고 메밀은 귀하니 궁여지책으로 미군의 원조로 받은 밀가루에 감자나 고구마 전분을 추가해 면을 만든 것이 시초다. 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뽑은 면은 식어도 딱딱해지지 않고 외려 더 쫄깃한 식감을 준다. 무엇보다 냉면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빠르게 대중음식이 된다. 같은 피난 시절 부산에서는 돼지국밥도 유명했지만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밀면으로 국밥을 대신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름이 오면 많은 사람이 시원한 밀면을 즐기며 더위를 식힌다.
밀면의 핵심은 돼지고기 육수다. 육수가 식어도 누린내가 나지 않게 각종 약초를 넣어 끓여낸다. 그래서 많은 식당 벽에는 그 식당만의 육수 비법을 자랑하는 홍보 글이 붙는다. ‘3·8밀면’ 역시 55가지의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육수를 끓인다고 알린다. 한우사골, 소갈비, 싱싱한 생고기 돼지와 닭 그리고 여러 가지 채소, 오가피 및 감초 등 한약재까지 들어간단다. 밀가루와 감자를 섞어 직접 만든 생면은 속이 쓰리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드러낸다. 면과 양념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담긴 사진을 눈으로 즐기다 육전과 새우전이 고명으로 올려진 밀면을 직접 만나면 시각적으로 이미 입맛을 돋우니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화투놀이에 ‘섰다‘라는 게임이 있다. 그 게임의 최강 족보는 38광땡이다. 3광과 8광의 조합은 섰다의 그 어떤 족보로도 이길 수 없다. 섰다에서 따왔다는 상호는 그 간판에서 이미 맛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드러낸다. 식당 주인은 맛있는 한 그릇을 위해 새벽잠을 줄이며 준비한단다. 그래서일까, 먹다보면 면과 육수에 담긴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누구에게 권해도 부끄럽지 않는 맛이다.
삶이 여유로워지면서 많은 사람이 미식가로 변한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팔도를 누비기도 한다. 그러나 때론 동네 골목에서 만나는 한 그릇이 더 큰 행복을 주듯 단골식당 주인의 진심이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본다. 더위와 함께 찾아왔다가 더위와 함께 사라지는 밀면.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 맛은 내년 더위를 기약하며 떠난다.
여름 끝자락 막바지 더위까지 식혀주는 진심 담긴 한 그릇이 소소한 행복을 안겨준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