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산책으로 하루를 연다. 새해 들어 매일 한 시간, 빠른 걸음으로 걷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오늘도 칼바람에 몸은 깃털처럼 휘청거리고 뺨은 차갑지만, 정신만은 숫돌에 간 듯 선명해져 매호지로 향한다. 연못으로 가는 시멘트 길 위를 걸으며 발바닥에 전해지는 감각, 차갑고 딱딱하다. 요즘 곳곳에 황톳길을 만들어 맨발 걷기 열풍이 한창인데 이곳은 도리어 얼마 남지 않은 흙길을 시멘트로 덮어버렸다. 숨 쉬던 땅의 숨통을 막아버린 무심한 행정 앞에서, 시멘트 바닥보다 딱딱하고 냉정한 탄식이 입가에 맴돈다.
드디어 매호지에 들어섰다. 연못 주변은 오직 바람만이 쓸쓸히 산책자를 맞이한다. 걷기에만 집중하려 해도 눈길은 자꾸 주변 풍경에 머문다. 볼 것이 없다. 포장된 바닥 위로 한겨울 추위에 말라버린 연대와 아무렇게나 쓰러진 나무들이 눈에 거슬린다. 지난 11월 연못 주위에 무질서하게 자라던 나무들을 베어낼 때만 해도 환영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작업은 거기까지였다. 뒤처리 없이 방치된 잔해들이 가슴을 마구 때린다.
근 일 년 만에 이 길을 다시 찾았을 때, 매호지의 풍경은 그야말로 밀림이었다. 산발한 여인의 머리칼처럼 얽히고설킨 나무들과 잡풀들이 연못가를 뒤덮어 연못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가장자리에 어우러진 갈대와 억새 군락만이 지친 눈을 달래줄 뿐이었다. 청송과 대구를 오가는 분주한 일정 속에, 일이 없을 때면 집안으로만 숨어들었다. 체중계 위의 숫자를 보고서야 ‘이러다간 안 되겠다’라는 위기감에 밀려 나오게 된 산책길이었다.
문득 일여 년 전, 연못가에 조명이 설치되던 날이 떠오른다. ‘생각을 담는 길’이라는 팻말이 붙고 무궁화가 심어졌던 그 길, 기증자의 이름표를 소중히 목에 걸고 있던 나무들은 어느새 잡풀의 기세에 눌려 있었다. 몇 그루는 겨우 푸르게 서 있었지만, 대부분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듯 애처로워 보였다. 관리 주체인 농어촌공사나 수성구청에 민원이라도 넣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며칠 후 다시 나갔을 때, 연못가엔 기계 소리가 요란했다. 인부들이 부지런히 나무를 베어내고 있었다. 늦었지만 이제야 제 모습을 찾겠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연못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기쁨은 곧 걱정으로 변했다. 조경의 미학도 생명에 대한 예우도 없는 그들의 노동은 거칠었다. 서툰 이발사의 가위질처럼 매호지를 단숨에 까까머리 중학생의 몰골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봄이면 고운 머리칼을 휘날리던 버드나무도, 새색시처럼 다소곳하던 이름 모를 꽃나무도 이미 쓰러져 있었다. 갈색 추억을 선물하던 갈대와 백색의 억새마저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주민들을 위해 ‘생각을 담는 길’이라 명명하고 조명을 세우며 무궁화를 심었던 정성은 어디로 갔을까.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구겨버리듯, 그 길은 이제 무표정하고 건조한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그래도 뒤처리는 따르겠거니 믿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때 잘려 나간 나무들은 여전히 연못 쪽으로 꼬꾸라진 채, 일부는 물속에 잠겨 서서히 말라 있다. 한곳으로 모으거나 치우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생략된 현장, 시간이 흘러 제풀에 썩어 거름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뒤처리’였던 모양이다.
지자체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만드는 일에는 능숙하다. 하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일에는 서툴다. 매호지 역시 그렇다. 정작 그 안에 깃든 풍경을 돌보는 일에는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매호지에 방치된 나무들을 수습하고, 끊어진 경관의 맥을 다시 짚어주었으면 한다. 주변이 깔끔히 정리되고, 매호지가 생명이 숨 쉬는 공간으로 돌아오기를. 그 길 위에서 마주한 이들이 환하게 웃게 되기를 마음속 깊이 바란다.
/손정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