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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가야의 기억을 품다

등록일 2025-09-07 19:47 게재일 2025-09-0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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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곡·두락리 고분군, 봉토분 40기 분포
굴식 돌방무덤 등 대가야 특유형식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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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월산리에 있는 고분.

전라도 남원은 대가야 전성기의 기운이 뻗어간 땅이다. 곳곳에 남은 고분군과 출토 유물은 긴 세월 속에서도 그 사실을 증언한다. 남원 고분군을 찾으면, 돌과 흙이 말없이 전하는 역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남원은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었다. 그러나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병합되어 남원소경이 설치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의 이마\ 지명 고룡을 ‘큰 물’로, 기문(基汶) 또한 ‘큰 물’로 억지 해석하여 남원을 기문국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서기’ 어디에도 남원이란 지명은 없다. 이러한 왜곡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역사적 해악이었다.

더구나 일부 한국 학자들까지 이 주장을 수용하면서 혼란이 커졌다. 이에 분노한 남원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남원은 기문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다행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민족사학자들의 노력으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라는 바른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남원 운봉읍과 아영·인월 일대는 실제로 대가야 세력권에 포함되었던 곳이다.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에는 약 40기의 봉토분이 분포하며, 발굴된 고분에서는 구덩식 돌덧널무덤, 굴식 돌방무덤, 독널무덤이 있다. 대가야 특유의 형식이 확인되었다. 붉은 토기, 환두대도, 철모와 철촉, 농공구, 마구류, 갑주류가 출토되었고, 백제 왕릉에서나 볼 수 있는 청동거울과 금동신발까지 발견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가야와 백제 문화가 혼재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분의 양식 또한 두 문화를 함께 반영하고 있어 5~6세기 운봉고원을 중심으로 한 교류의 생생한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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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제1호분 위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남원 아영면 월산리 고분군도 주목된다. 발굴 당시 중국제 청자 계수호, 철제 자루솥, 금제·유리제 장신구, 철제 갑옷, 마구류, 토기류가 확인되었다. 그것은 고분의 주인이 지배층이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청계리의 청계고분군은 호남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가야계 고분으로, 봉분 규모도 크다. 그곳에서는 수레바퀴 장식 토기 조각, 아라가야계 토기, 그리고 호남에서 처음 확인된 왜계 나무빗이 출토되었다. 남원 아영 분지에 정치 조직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

남원은 대가야 문화권의 한 축으로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정치 체제 또한 사라지고, 남원은 역사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오랜 세월 그 진실은 묻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그 조각들을 모으고 있다. 고분 속에 잠들었던 유물들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산 증인이다.

남원은 기문이 아니다. 남원은 대가야 가야 지역이다. 우리는 이 땅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굽은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걷는 땅이 왜곡된 기억 위가 아니라, 바른 역사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밝혀야 할 것은 돌무더기 아래 숨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들려주는 목소리다. /김성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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