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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위주의적 허풍(虛風)’은 사라져야

얼마 전 지방의 한 행사에서 “지역 인사의 큰 역할로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건설 사업이 추진되고 완공 됐다”는 영웅담(?)을 전해 듣고 적잖이 놀랐다. 더욱이 지역의 한 신문은 영웅담의 주인공을 대담한 내용과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고 한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초대형 국책 SOC 사업이, 특정인의 역할로 결정됐을까? 사실이 아니라면, 영웅담의 주인공은 허풍선이요, 신문기사는 오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 당시,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건설과 관련한 교통 분야를 총괄하고, 예비타당성을 수행한 책임자였기에 사업의 추진 배경과 과정 등을 또렷이 기억한다. 기록물이 될 ‘고속도로 건설사’나 지역의 역사를 바로잡는 심정으로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의 추진 과정, 국가계획과의 연계성, 대안 검토 내용과 선정절차 등을 되짚어 봤다. 도로는 위계에 따라 건설, 유지·관리·정비하는 주체가 다르다. 고속도로는 국토교통부(이하 현 국토부)로 한국도로공사 소관이고, 국도는 국토부 산하 지방국토관리청 소관이다. 지방정부의 의견 등은 참고될 수 있으나, 결정할 사안은 아니다. 지방도, 군도 등은 행정안전부의 위임을 받아 유지·관리·정비 등은 지방정부 소관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재정이 투입되는 고속도로나 국도, 지방도 등 SOC사업은 해당 지방정부나 중앙정책부서에서 입안, 기획재정부에 의뢰해 예비타당성 조사의 선정과 종합판정(AHP)에 따라 가부가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도지사 등 지방정부 관계자가 건설 여부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예비타당성 조사는 지방정부 등 관련 기관에서 제안한 사안을 중앙정책부서를 경유해 기획재정부에 제출하면, 분야별 전문위원회를 통해 사업의 필요성과 우선순위 등을 평가해 선정한다. 당시에는 객관성 확보를 위해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 전문분야 대학교수와 국책연구원 등 학술과 기술 부문으로 나누어 수행한다. KDI 중심의 내·외부 전문가 자문회의 등 수차례의 치밀한 검토와 기획재정부의 최종보고 단계를 거치게 된다.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건설도 이와 같은 절차를 통해 선정됐다. 예비타당성 조사 당시 제안된 노선은 경제성이 낮게 도출됐다. 이에 교통영향권내의 기존 국도와 지방도를 개량·개선·정비하는 방안, 주요구간별 또는 특정 구간을 자동차전용도로화하는 방안 등 여러 대안이 현장 정밀조사를 통해 검토됐다. 그 결과, 일부 대안에서 경제성 지표인 B/C가 ‘회색 존’ 즉, 정책적 판단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사안으로 1차 조사가 마무리됐다. 이후 국가균형발전이 국가 주요과제로 부상하면서,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건설 방안도 재론 됐다. 지역 낙후도가 전국지자체 중 최하위권인 경북 북부지역 활성화 방안의 하나로 고속도로 건설이 주목됐다. 이와함께 경북도청 이전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교통체계 변화가 수도권과 직결체계가 경상북도 전역에 미칠 영향도 변수가 됐다. 이에 따라 당초 중부권 동서간선축인 당진~상주~영덕 간 노선 중 기검토된 상주~영덕 구간의 노선건설계획이 재검토됐다. 필자는 경북도청 이전 관련, 최종평가위원으로 참여해 상주~영덕 고속도로 건설이 경상북도 전역에 미칠 영향 등을 기본전제로 도청이전의 적지 지표를 확정했다. 이후 서울대 연구팀과 함께 상주~영덕간 고속도로 노선을 재검토하기 위해 기획재정부, KDI, 건교부 등 실무자와 전문가 등은 경북도 관계자들과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이를 토대로 경상북도를 초도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최우선 건의 사항으로 ‘경북도청 이전과 동시에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건설의 중요성’이 보고 됐다. 당시 노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자”는 의견을 개진했고, 이후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건설사업은 경제성이 미흡하나 지역개발 효과와 국가균형발전 등 정책적 판단으로 채택됐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는 노선을 왜 건설하느냐’는 감사원의 이의 제기로 한 때 사업에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이에 영덕군, 청송군, 안동시 등의 시민단체와 주민들은 감사원, 도로공사, 건교부 등에 찾아가 집단 민원을 제기했었다. 결국 감사원 등이 한발 물러나면서 설계 등의 절차가 순조롭게 추진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천문학적 재정이 소요되는 국가 초대형 SOC사업은 정책집행부서, 기획재정부 등 중앙정책부서가 심도있게 논의, 검토, 조율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특정인의 민원이나 권력 핵심부의 몇몇 지인을 통해 사업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몽환적 영웅심리(?)가 부른 허풍에 불과하다. 자칫 주요정책 결정에 유력인사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오해와 불신을 조장할 수 있기에 반드시 사라져야 할 구태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불행하게도 왠만한 SOC사업이 진행중인 지역마다 마치 필연적인양 허풍과 허세적인 영웅담들이 생겨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을 비롯해 자치단체장, 광역의원, 지방의원들까지 서로 자신들의 업적인양 내세우는 게 비일비재하다. 자신의 위치에서 의무적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조차 마치 대단한 업적을 쌓은 양 과대포장한다. 이런 언행들 대부분이 지역민, 지역 유권자들을 무시하는 권위주의적인 발상이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은 비단 SOC 국책사업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갖가지 행태로 나타나고 있다. 거짓과 위선을 마치 사실인 양 둔갑시키고, 책이나 영화 등을 제작해 자신의 개인적 행각을 호도하고 미화한 기록물들이 넘쳐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자기 편향적인 거짓과 위선적 기록물들이 사실(史實)로 전해질 수 있을까. 언론 보도를 포함해 개인의 자의적이고 편향된 기록물이 사실인 양 치부되는 현상은 사회 질서를 왜곡시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자가당착적이다. 이성모 동북아협력인프라硏 원장전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어떤 사실을 일시적으로 전하려면 말로하고, 백 년 이상 오래도록 전하려면 기록으로 남겨라”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실(fact)을 역사적 사실(historical)로 전하는 기록이 미래를 이끌어 가는 추동력이다. 그 전제는 사실에 근거 정확하고 명확한 기록이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건설과 관련한 영웅담을 비롯해 이와 유사한 업적 평가들은 하루빨리 바로 잡혀야 한다. 국가 주요 정책은 타당성 조사, 정책적 요인, 지역파급 효과, 기술적 가치평가, 당위성 등 다각적으로 치밀한 분석·검토를 통해 결정된다. 지역 언론의 대담기사처럼, 초대형 국책사업이 권력적 편향 논리로 결정되는 일은 없다. 일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기획재정부 담당자에게 정책사업을 직접 설명하며 예산 지원을 설득했으나 거절당해 사업을 포기했다. 당시 노 장관은 거절 이유를 설명하는 기획재정부 담당자의 논리와 해박한 지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한동안 회자됐었다.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 건설 사업 또한 건교부, 기획재정부 등 당시 중앙 정책부서와 전문가 집단의 치밀한 분석과 검토, 객관성과 합리성, 당위성에 근거한 정책적 판단으로 결정된 것임은 당연지사다. 아직도 “왕년에 내가 말이야”라는 ‘권위주의적 허풍’이 지역민 사이에 떠돌기를 바란다면, 낯부끄러운 일이다.

2024-12-08

비상계엄 후폭풍…지역 현안 줄줄이 위기에

윤석열 대통령이 촉발한 비상계엄 사태의 후폭풍으로 대구경북지역 주요 현안들이 줄줄이 위기에 몰리고 있다. 더불어 민주당 등 야 6당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정국이 격랑 속에 빠져드는 가운데 내각 총사퇴 등도 예상돼 시간을 다투는 지역 현안들이 후순위로 밀리면서 주요 사업 전반에 걸쳐 차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당장 연말까지 국회에 상정되거나 완료돼야 할 법안들은 정국 흐름이 정상으로 회복될 때까지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주호영 의원이 발의한 TK신공항 건설을 위한 일부개정법률안은 오는 10일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으나 현재로선 진행 여부가 불투명하다. 또 신공항 건설사업의 재정 확보를 위한 공공자금관리기금 융자지원 문제도 관련부처와 협의를 앞두고 있지만 내각 총사퇴 분위기 속에 제대로 진행될지 의문이다. 지난주 대구시의회 상임위를 통과한 대구경북 백년대계를 위한 행정통합안은 12일 대구시의회 통과가 유력하다. 하지만 경북도의회 통과와 연내 특별법 국회 통과 등의 법적 절차가 진행돼야 하나 격랑에 빠진 정국 분위기 때문에 진행 여부를 예측하기 어렵다. 특히 대구경북통합안은 시간이 촉박하다. 제때 절차를 밟지 못하면 2026년 7월 예상한 대구경북특별시 출범도 차질이 우려된다. 그밖에도 30년 대구시민 숙원인 대구취수원 이전을 위한 맑은물 하이웨이 사업에 필수 요건인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를 위한 특별법의 국회 통과도 기다리고 있다. 막바지에 도달한 대구시 군부대 이전사업도 국방부 장관의 사의 표명으로 후보지 선정에 시간이 더 걸릴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또 다음달 시추를 앞둔 동해 심해 석유탐사 계획인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야당의 예산삭감에 정국 불안정이 덮치면서 여야 협상을 통한 재원확보에 빨간불이 켜졌다. 국내 원전 최대 보유지인 경북으로서는 계엄선포 후폭풍에 휘말려 원전산업이 행여 위축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지금은 국가 전반에 걸친 위기 상황이다. 지방자치단체는 위기극복을 위해 힘을 보태면서 지역현안에 대한 즉각적이고 현명한 대처를 해나가야 한다.

2024-12-05

‘한동훈 리더십’으로 대통령 탄핵 막아라

야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에 돌입했다. 민주당은 어제(5일) 새벽 본회의에 보고한 탄핵안을 6~7일 중 표결할 계획이다. 국회법상 탄핵소추안은 본회의 보고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표결이 이뤄져야 한다. 대통령 탄핵소추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로 발의하고 3분의2(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가결된다. 국민의힘(108석)에서 8명의 이탈표가 나오면 가능해진다. 야권은 친한계(한동훈)를 중심으로 국민의힘 의원 18명이 계엄령 해제 표결에 동참한 만큼, 가결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최소 6명 이상의 여당 의원으로부터 찬성 의사를 확인했다는 말도 했다. 지난 2016년 12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여당소속 비박계 의원들이 대거(최소 62명) 찬성표를 던지면서 탄핵안이 통과됐다. 야당은 탄핵안이 본회의에서 부결되더라도 정기국회가 끝난 뒤 임시국회를 열어 다시 발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윤 대통령 직무는 즉시 정지되고 사실상 국정이 마비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탄핵소추부터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까지 3개월가량이 걸렸다. 만약 헌재에서 탄핵이 가결되고 조기대선이 치러지면 보수정권은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탄핵당한 정당이 다시 정권을 잡기는 불가능하다. 여권의 급선무는 똘똘 뭉쳐서 대통령 탄핵을 결사적으로 막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국민의힘은 탄핵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의원총회에서 당론으로 결정해둔 상태다. 그러나 혹시라도 당론을 어기고 이탈표가 발생하게 되면 국민의힘은 사분오열 쪼개질 수밖에 없다. 당이 분열되면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윤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과 친윤계 의원들의 당면과제는 한 대표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지금 국정마비를 막고 대통령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대표뿐이다. 대통령실 참모들과 국무위원들도 무력(無力)해진 상태다. 한 대표가 강력한 리더십을 가져야 당을 단합시키고, 야당과의 협상창구도 열 수 있다.

2024-12-05

가까이 보아야 느낄 수 있는 변화, 농어촌기본소득

임미애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비례대표)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는 2022년부터 파격적인 정책실험을 하고 있다. 소멸 위기에 놓인 농촌 마을에 소득, 직업, 연령 등에 관계없이 실거주하는 주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고 있다. 며칠 전 그 정책실험을 평가하는 자리가 있어 참석하게 되었다. 1인당 월 15만 원씩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4인 가족에게는 월 6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소득이 안정적으로 지원된다. 토론회 중에 30여 년 전 아이 둘을 키우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새색시 시절이 생각났다. 전반적으로 농산물 가격은 쌌고 이것저것 손에 닥치는 대로 농사를 골고루 지어야 먹고 살기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여름에는 여름에 돈이 나오는 농사를 지어야 하고 가을에는 가을에 돈이 나오는 농사를, 겨울에는 겨울에 돈이 나오는 농사를 지어야 하니 일 년 열두 달 빠꼼한 날이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고추가 나오는 여름과 사과가 나오는 가을, 겨울은 어찌어찌 살아지는데 수확은 없고 농비만 투입되는 봄은 정말 곤욕이었다. 건강보험료도 밀리기 일쑤고 아이들 우윳값도 감당하기 어려운 날들이 많았다. 그때 생각했던 게 “만약 안정적으로 월30만 원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농촌에 사는게 이리 고되지는 않을텐데….” 내게 ‘기본소득’은 그렇게 다가왔다. 농촌에 정착해서 농업소득으로 온전히 살고 싶은데 먹고살 만한 농업소득을 벌기가 정착 초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농업소득으로 먹고살고 아이들 키우기가 가능해진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농촌에 살고 싶었으나 농촌이 나를 떠밀어내는 듯한 현실을 버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천군 청산면의 정책실험에 주민들이 평가한 내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중략)청산면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삶이 밝아졌습니다. 사람과 어울릴 때 내가 한 번 사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 확실히 늘었습니다. 일 년에 몇 번 안가고 큰 일이 있을 때만 가던 미용실은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가면서 한결 밝고 가꿔진 모습, 모든게 변했습니다. 본인을 위해 돈을 쓰는 동네 주민들을 만나면 반가운 사람들의 마을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의 활력이 생겼습니다. 가만히 보아야 느낄 수 있는 엄청나게 큰 변화입니다. 정서적인 만족과 긍정의 에너지가 생긴 마을을 담아내는 별도의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후략)” ‘정서적인 만족과 긍정의 에너지’. 이 평가가 내 맘에 콕 박혔다. 인구가 늘었다는 행정공무원들이 좋아할 만한 평가는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그리 유의미한 평가가 되지 않겠지만 지역민들의 삶이 밝아지고 지역사회 주민들이 서로에게 반가운 존재가 되는 변화라면 이런 정책 시도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2024년 12월의 시작에 이런 마음을 담아 ‘농어촌기본소득 법안’을 발의했다. 농어촌기본소득 논의가 국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면 좋겠다.

2024-12-05

무병장수의 꿈

우정구 논설위원 무병장수는 인류의 오래된 꿈이다. 2000여 년 전에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러 신하를 멀리 이국땅까지 보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수는 인류의 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83.5세로 전년보다 0.8세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기대수명이란 0세 출생아가 앞으로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생존수명이다. 연령별 사망률 통계를 기준으로 산출하는 것으로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전세계적으로 높은 편에 속한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우리나라 평균 수명은 40세를 겨우 넘겼다. 당시에는 60세를 넘기기가 어려워 부모가 60세가 되면 자식이 동네 주민들을 초대해 회갑연 잔치를 벌였다. 불과 80년 만에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두배 수준으로 늘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2100년까지 일본과 마카오를 제치고 전세계 2위의 장수국가가 된다고 한다. 또 2140년 이후 세계 최장수 국가에 오르며 2500년에는 한국인의 수명이 무려 154세 이른다고도 했다. 믿어지지 않으나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다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닌 것 같다. 세계적으로 보면 사망률이 줄고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나라마다 그 격차가 여전히 좁혀지지 않은 것이 문제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병들거나 아프지 않는 단계의 건강수명과 기대수명의 격차를 줄이는 것 또한 숙제다. 2022년 기준 우리의 건강수명은 65.8세. 기대수명과 15년 정도 차가 있다. 무병장수를 위한 인류의 도전은 그래서 지금도 진행형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2-05

함께하는 선율, 하나 되는 마음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12월 3일 세계 장애인의 날, 경상북도교육청 문화원 대공연장에서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학생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열렸다. 청하중학교와 포항명도학교의 ‘함께하는 선율, 하나 되는 마음’의 합동 연주회였다. 첫 순서는 포항명도학교 어울림 학생 오케스트라. 각자의 악기를 들고 차례로 조용히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그 넓은 무대가 꽉 찬다. 인사를 하고 지휘자의 손놀림 따라 ‘미녀와 야수 OST’ 등 4곡을 진지하게 연주하는 모습이 일반 연주자들 못지않다. 포항명도학교는 지적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교육기관이며 1989년에 개교하여 현재 유치-초-중-고등 및 전공과 등 약 260여 명의 학생이 70여 명 선생님에게 알뜰한 사랑의 교육을 받고 있다. ‘어울림 학생 오케스트라’는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해 2013년에 창단하여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편견의 벽을 허물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연주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단원들은 국내 최고의 장애인 예술단을 목표로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창단 이후 매년 연주회를 가져 올해 10회째이고 여러 관현악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대상, 금상을 수상하고 장애를 뛰어넘어 서로 협력하고 조화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성장하여 음악을 통한 소통의 기회를 주고 있음이 훌륭하다. 다음은 임종식 경북교육감이 ‘삶의 힘을 키우는 따뜻한 경북 교육’이라는 비젼을 얘기한 축사에 이어 내빈 소개가 있었고, 이날 특별 출연한 경북도교육청 ‘온울림 앙상블’의 창단 연주회가 이어졌다. 명도학교 어울림 앙상블을 모태로 하여 피아노, 클라리넷 각 1명, 바이올린 2명으로 구성된 경북도교육청 장애인 예술단으로 올해 10월 1일 창단하였다니 이번이 제1회 연주회인 셈이다. 쇼팽의 즉흥곡 1번을 연주한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누르는 손놀림을 보면 장애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듯, 발달장애인들이 성인으로 성장해 나가며 잠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이끌어내는 자립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 진정한 연주 활동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다음은 청하중 관송오케스트라 연주로 ‘공감’을 주제로 한 ‘아리랑 판타지’를 포함한 3곡과 독창 2곡을 들려주었다. 2014년 윈드오케스트라로 창단한 후, 8년 뒤에 100명이 넘는 관현악단으로 성장하여 14기 예술꽃 씨앗학교(문화체육관광부) 및 새싹학교로 선정되어, 음악을 통해 청소년기 감수성을 계발하여 전인적 인재로 키워가며 사회와 재능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올해 제9회 정기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8월엔 제7회 학생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에서 금상 수상을 하는 등 경북을 대표하는 학생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높이고 있음이 지방 중학교의 뿌듯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순서로 두 학교의 합동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우리의 꿈’과 ‘흰수염 고래’를 듣고 앙코르까지 외쳤다. 2시간 반 동안 가슴 가득 사랑의 연주를 들려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키우고 가르쳐준 학부모와 선생님들께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두 학교가 마음을 같이한 연주를 계속하여 기쁨과 감동을 나누어 주길 바라며….

2024-12-05

역사의 한 페이지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죽마고우들 몇 명이 모처럼 고향에서 만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6·25전쟁 중에 태어나서 70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실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정보화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혁신적이고 역동적이었다. 그 드라마틱한 세월을 각계각처에서 온몸으로 살아낸 우리 세대는 오늘의 대한민국에 대한 감회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칠십여 성상을 지나는 동안 우리 고장도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도록 많이 변했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에 걸친 우리의 ‘국민학교’ 시절은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6·25를 거친 보릿고개의 마지막 고비였다. 점심 도시락을 못 가져가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고, 미국이 원조한 강냉이가루로 찐 시루떡을 하나씩 받는 날은 그나마 허기를 면할 수가 있었다.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밥을 얻으러 다니는 거지들도 더러 있던 시절이었다. 1960∼70년대에 들어서는 혼·분식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쌀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보리쌀이나 좁쌀을 섞은 밥이나 국수, 수제비 같은 밀가루 음식을 적극 권장하는 정책이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무미일(無米日)로 정하고 식당에서 쌀로 만든 음식을 판매할 수 없게 했는데, 단속요원이 불시에 단속을 했고, 무미일을 위반한 가게를 신고한 사람에게는 5000원이라는 거액의 포상금까지 주었다. 짜장면 한 그릇에 5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상당한 거금이었다. 가정에서 쌀로 술을 빚는 것은 물론 학생들의 도시락까지 검열의 대상이었다. 식량부족을 해소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줄이기 위한 산아제한을 실시하기도 했다. 구호도 ‘아들 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나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에서 ‘무턱대고 놓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로 격해졌다. 불임수술을 적극 권장하고 셋째 출산부터는 불이익을 주는 등 다분히 강압적이었다. 출산장려를 위해 매년 수십조 원을 쏟아 붓는 요즘에 비한다면 금석지감이란 말로는 모자랄 판이다. 1963년 제3공화국수립 후 공업국으로 전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단기적으로는 미국 등에서 식량을 대량 수입하여 양곡부족을 해결하였다. 중·장기적으로 통일벼 등 벼품종개량과 비료·농약의 공급확대 등으로 식량증산에 매진한 결과 농민의 소득증대와 생활환경 개선이 진전되었고, 그에 따라 보릿고개도 쌀부족 현상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무엇보다도 ‘농촌사회에 팽배되어 있었던 봉쇄성, 숙명론적 체념성, 그리고 지역지향성 등을 극히 단기간 내에 전국적인 규모로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되는 새마을운동이 가난퇴치와 함께 농민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젊은이들도 알아야 제대로 된 현실인식을 할 수 있을 터이다. 풍전등화로 위태로운 정국 앞에서 돌아다보는 역사의 한 페이지다.

2024-12-05

머리가 너무 아파요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두통으로 고생해 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깟 두통으로 뭔 호들갑이냐’라고 하지만, 현재 두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이것만 없어지면 소원이 없겠다고도 한다. 두통이라고 하면 머리 안쪽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해서 CT나 MRI 등의 영상 촬영을 해봐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 두통의 대부분 원인은 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추 쪽 문제로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특히 상부 경추 쪽의 문제가 있으면 경추에서 나오는 대후두신경, 소후두신경, 3차 후두신경 등 머리로 올라가는 신경들이 머리 뒤쪽에서 포착되면서 두통을 일으킨다. 사무직이든 육체 노동을 하든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가 굽은 등과 둥근 어깨로 일을 한다. 운동을 하는 사람도 대부분 이런 자세로 운동을 한다. 등이 굽으면 자연스레 시선이 땅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앞을 보기 위해 등을 펴는 것이 아니라 목이 앞으로 빠지면서 시선을 정면을 본다. 이런 자세가 만들어지면 무거운 머리를 밖으로 빠진 목이 받치는 형태가 되어 이전보다 몇 배의 무게를 목으로 받아야 한다. 자연스레 경추 간의 간격도 좁아지고 경추를 잡아주는 근육 긴장도가 올라가고 힘줄과 인대에 문제가 생기고 붓고 유착 등이 발생한다. 당연히 경추로 지나가는 신경들 또한 자연스레 압박되고 포착이 되어 머리로 가는 혈류 순환이 나빠지게 되고 이는 경추 디스크 등의 문제뿐만 아니라 두통이나 어지럼증, 이명 등의 머리 쪽의 증상을 일으킨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등을 올곧이 펴야 한다. 등을 바로 펴고 턱을 당겨서 허리부터 경추까지 자연스러운 S자 모양을 만들어 무거운 머리의 힘을 자연스레 모든 척추가 수직으로 힘을 받아 분산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허벅지가 의자 밑에 닿게 하는 방법으로 앉은 다음 허리를 펴고 턱을 당긴다. 일을 할 때도 허리가 아프거나 어깨, 목이 아프면 잠시 쉬면서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한다. 뒷목 윗부분을 자주 마사지하고 꾹꾹 깊이 눌러주는 것이 좋다. 파트너를 정해 서로 5분간 마사지를 해주는 것이 직접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다. 목과 어깨를 꾹 30초간 팔꿈치 아래 뼈로 눌렀다가 떼기를 반복하면 자연스레 뭉쳤던 근육이 풀린다. 열이 위로 오르는 매운 음식과 열이 나는 홍삼, 그리고 에너지를 보충하는 음료 등은 좋지 않다. 음식은 적게 먹는 것이 좋고 열량이 적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걷는 운동을 한두 시간씩 해주면 전신 혈액 순환과 함께 다리로의 혈액 순환이 원활해져 상부로 올라간 열이 내려오니 바른 자세로 자주 걷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항상 마음을 편히 가지고 시간이 날 때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10분씩 해줘도 좋다. 치료는 한의원에서 추나요법, 약침 등의 치료와 함께 처방을 복용하는 것이 제일 빠르다. 상부 경추를 추나로 직접 풀어주고 교정을 한 후 대후두신경을 직접 약침으로 풀어주면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확실한 치료를 위해 머리의 열을 내리고 혈액 순환을 도와주는 치료 한약을 복용하면 오래된 두통이라도 빠른 시간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질환이니 진통제로 버티지 말고 더 큰 병이 되기 전에 빨리 치료를 하자.

2024-12-04

한밤중 계엄의 좌절, 국가 혁신 계기로

이상규전 국립국어원장 간밤 윤석열 대통령의 독단적 계엄선포라는 초유의 사태를 지켜보는 한 시민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충동적인 계엄발의와 계엄군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이러다가 국가전란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한다면 국가 시스템이나 군사적 대응이 온전히 작동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현대사에 지울 수 없을 검은 역사 흔적을 남긴 안타까운 순간이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비상계엄이라는 한밤중의 도박은 왜 강행되었을까? 대통령의 심경이 이해될 만큼 현재 정국 상황이 엄중하다는 반증이다. 미래의 민주화 목표와 전망을 잃어버린 거대 야당의 밀어붙이기식 정쟁과 여기에 맞선 집권 여당은 집권 이후 단 한 차례도 정치적 협치나 협상의 아량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권력 투쟁으로 일관해 온 협상 정치 실종의 2년 반은 황량한 시간이었다. 국가 미래발전 전략은 포기한 채 오로지 정권 쟁탈과 방어를 위한 투쟁만 가속화하면서 거대 야당의 당대표는 급기야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나서서 시민들을 선동했다. 그는 엄연한 범법 피의자이자 실형을 받은 범죄자이다. 대통령도 가족 문제와 최근의 명태균 사건에 연루, 국회 특검의 압박을 받아 왔다. 이 극한의 예각 대치상황에서 여야는 투쟁국면에서 벗어날 어떤 여유도 계기도 서로 찾지 못했다. 아니 근본적으로 찾을 수 없었던 딜레마였기도 하다. 그동안 윤 정부의 운영자율권을 철저하게 저지해 온 거대야당의 압박과 선동을 이겨내지 못한 임계점에 도달한 행동적 표현이 간밤의 비상계엄령이었다. 스스로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고 표현했듯이 결국 거대 대한민국호의 선장인 윤석열 대통령이 제일 먼저 차가운 겨울 밤바다로 뛰어내린 형국이었다. 솔직히 소위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축을 이룬 거대 야당에게는 미래 이념적 비전이나 목표가 없었다. 그들은 비전도 목표 의식도 없이 정치 투쟁에만 몰두했다. 경색된 조직과 퇴화된 주사종속의 이념적 정책에 매몰된 듯한 정치노선 또한 윤 정부에 보낸 큰 위협이었다. 현재 핵무장으로 조직적 군사체계를 완비한 북의 현실 상황을 고려한다면 민주당은 정치권력 장악을 위해 호전적이고 비타협적인 정쟁으로만 치달을 수 없지 않은가.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실패를 규탄하면서 강압적 축출로 현재의 문제를 마무리하려고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첫째, 이 사건을 이 나라가 당면한 정치 개혁의 신호탄이 되도록 수습의 길을 찾아 여야 모두 썩은 정치권 세력을 도려내는 새로운 민주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둘째, 장기간에 걸친 고금리와 고물가에 시달린 서민 경제의 회복과 대기업 경영의 심각한 어려움을 해소하고 문을 닫는 중소기업의 회생을 위한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나라의 국방과 치안의 문제는 국민의 생명과 연결된 문제이다. 과감한 방위체계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방안을 여야합의로 이루어내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취 문제는 법리적 절차에 근거한 처리를 최우선으로 해야지 다시 촛불 들고 선동하여 사회치안을 마비시키는 국면 전개는 절대 안 된다.

2024-12-04

늠내

피귀자 수필가 조용한 수런거림이 물처럼 흐르다가 불처럼 타오른다. 설악산 단풍 소식이 날아들었다. 시월 말경이면 새로운 지도가 태어난다. 잠긴 수문을 풀듯 흘러내리며 금빛계절을 알리는 단풍지도. 남쪽을 향하여 달리다가 제주도를 거쳐 무등산까지 이십 여일이면 한반도를 점령해버린다. 단풍의 달리기를 바라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뻗어가는 땅이란 뜻의 ‘늠내’라는 단어다. 넓어지는 땅이라면 먼저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땅따먹기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공깃돌을 두 번 튕겨서 한 뼘의 기본 땅 속으로 되돌아 들어오면 그 영역은 모두 내 땅이 되던 기억이. 가진 땅이 빠르게 넓어지듯, 안개가 퍼지듯이 단풍은 이제 동네까지 내려왔다.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제각각 종을 울린다. 길 떠날 준비를 하는 생명들의 두런거림이 세를 불리며 환청처럼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낸다. 바야흐로 단풍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단풍 중개 소식에 따라 구경꾼은 점점 늘어간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톨스토이 단편은 생각하게 하는 바가 크다. 우연한 기회에 땅을 조금 가지게 된 가난한 농사꾼 바흠은 그 후 욕심이 생겨, 어떤 곳에서 땅을 싸게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의 판매 방법은 독특하였다. 하루 종일 걸어서 해가 지기 전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면 그 둘레의 땅을 다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들판을 달렸다. 해가 질 때 겨우 출발했던 지점에 약속대로 돌아왔지만, 욕심이 컸다. 너무 먼 거리를 달렸기 때문에 그만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던 것이다. 죽은 뒤에 넓은 땅이 무슨 소용이랴. 그 농부가 묻힌 땅은 겨우 사방 7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작은 구덩이에 묻히면서, 죽어버린 몸이기에 후회도 원망도 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이렇듯, 사람은 한 평생을 달려도 누구나 70센티미터 정도의 땅 속에 묻힐 따름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 우리는 누가 시키든 안 시키든 달려야 한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힘껏 달린다. 온갖 힘과 지혜를 짜내고 그래도 모자라면 남을 속이고 밀어내며 좀 더 나은 땅, 좀 더 넓은 땅을 차지하려고 달리고 달리는 이들도 있다.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애쓰고, 힘을 기르는 이유는 더 좋은 땅을 많이 차지하려는 달리기 내기가 아닐까. 땅따먹기 놀이도 마찬가지였다. 욕심을 내어 공깃돌을 너무 멀리 튕긴 후 좁은 본부로 다시 튕겨 넣으려면 밖으로 튀어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기회는 날아가 버리므로 욕심내지 말라는 뜻이 담긴 놀이가 아닌가 한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일찍 깨달은 탓일까. 아직도 땅에는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생존 경쟁, 삶은 전쟁이 아닌가.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한 평화는 쉽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나무의 생존경쟁은 다르다. 다른 대상과의 싸움이 아니다.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요. 내려놓기이며 물러서기다. 나무는 제자리에서 세월을 맞으며 맡은 책임을 다하려 모진 풍상을 견뎌내느라 잎은 벌레에 파 먹히고 바람에 쓸리며 피멍으로 에둘러 있다. 그것이 바로 단풍인 것을. 쓰라림 없는 결실이 어디 있으랴만 아픔을 이기며 내려놓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것. 역경 속에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만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나뭇잎은 내년을 기약하며 한걸음 물러서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바로 사유의 급전환이다. 사유의 전환을 거쳐야 비로소 더 높은 곳에 설 수 있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색으로 이어지고, 그 색 따라 피고 지고, 지고 피며 사람도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날 줄 아는 단풍처럼, 내려놓을 때를 아는 나무처럼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들. 경쟁하며 넓혀온 땅을 한순간에 내려놓으며 욕심을 버린 사람들이 존경받는 이유다. 내려놓기 위해 세를 넓혀가는 단풍처럼 사람도 물욕이 아닌 인류를 위한, 또는 자기발전을 위한 소양의 늠내는 넓힐수록 좋으리라. 다가오는 새해에도.

2024-12-04

죽도시장 대성막걸리

부엌에 덧댄 쪽마루라도 임금님의 침상이지 그렇게 잠든 어머님의 주름살에 파르르 떨리는 형광등 불빛이 잔설(殘雪)로 내리면 단골이라는 이름으로 등쳐먹은 세월이 벽마다 가득하다 살며시 냉장고에서 막걸리 한 사발 퍼서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 장아찌 몇 점과 멸치 몇 마리 경계의 벼린 눈빛 스파링 상대처럼 긴장하면서 도열하여 이내 종종걸음으로 입으로 집합할 운명 인생은 싸우는 거야, 상대도 없는 자유로운 술집 주인이 있어도 없어도 시스템 작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계산은 알아서 바가지에 넣을 것 마신 잔은 조용히 한쪽으로 밀어놓을 것 공화국은 이런 것이라고 민주의 기본은 이런 거라고 생기발랄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소굴 대성막걸리 팔순 어머니의 내공은 이렇게 정리된다 씨팔놈들아, 니들 꼴리는 대로 해라 돈도 필요 없다, 니 스스로 쪽팔리지 않으면 된다, 그 쫑알거림의 사자후, 그 그물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잔술로 속을 달래고 공짜 술도 너무 많이 얻어먹었다. 서울에서 고생한다고, 그 한 잔 못 주겠느냐고, 열심히 살아라, 말씀하셨다. 그 세월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아쉽게도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지금은 사라졌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2-04

비상계엄 후폭풍…거세진 대통령 탄핵바람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에 대한 후폭풍으로 국가 전체가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계엄선포 직후 야당 주도로 열린 국회본회의에 국민의힘 소속 친한계 의원까지 참석해 계엄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킨 것은, 계엄선포가 그만큼 느닷없고 잘못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상계엄은 전시나 사변 발생시 군병력으로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선포하는 것이다. 야당은 어제(4일)부터 일제히 “윤석열은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다”라며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어제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이날 처리하기로 했던 최재해 감사원장 및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탄핵소추안 표결을 보류하고, 윤 대통령의 퇴진에 당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조국 혁신당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조치는 그 자체로 군사 반란에 해당하므로 즉각 수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야권 의원 40여 명으로 구성된 ‘윤석열 탄핵 의원연대’도 “대통령은 군을 동원해 사실상 내란죄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한시도 대통령 직책에 둘 수 없다는 게 확인됐기 때문에 급하게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겠다”고 했다. 여당도 책임자 문책에 적극 동조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어제 오전 의원총회를 열고 윤 대통령 탈당과 내각 총사퇴, 김용현 국방부 장관 해임 문제를 논의했다. 이에 앞서 한동훈 대표는 “계엄을 건의한 국방부 장관은 즉각 해임돼야 한다”고 했다. 외신은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6시간 만에 해제한 상황을 보도하면서 그 배경과 정치적 파장에 주목하고 있다. 정말 국제적 망신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다가 해제했다. 왜?’라는 기사에서 “화요일 밤 윤 대통령의 이례적인 선포는 많은 한국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독재정권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고 했고,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충격적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계엄 선포 근거로 밝혔듯이, 지금 우리나라는 야당의 입법폭주와 탄핵남발, 감액 예산 강행처리 등으로 국가기능이 사실상 마비상태다. 국정을 책임진 윤 대통령이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심야에 여당이나 대통령실 참모의 의견도 듣지 않고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비판받아 마땅하다. 윤 대통령은 이번 계엄선포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를 스스로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 대통령을 잘못 보좌한 대통령실 실장과 수석비서관들이 어제 일괄 사의를 표명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외교 등 전 분야가 위기국면을 맞고 있다. 한국경제는 이미 장기불황으로 벼랑 끝에 서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은 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국회는 사회경제적 안정을 위해 하루빨리 혼란 상태를 수습해서 국가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2024-12-04

어른은 누구인가

장규열 고문 ‘어른’은 나이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신체적 성장만이 아닌, 독립적 사고와 자율적 책임감,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적절한 역할수행이 ‘어른됨’의 핵심이다. 현대 사회에서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심지어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독립심과 자율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학 교수들이 학부모들로부터 학점에 대한 항의를 받는 일이 흔해졌다고 한다. 학생 본인이 교수와 소통하는 대신 부모가 대신 나서는 것이다. 한편, 기업에서는 신입사원의 부모가 상사에게 연락해 자녀의 부서배치 조정을 요청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현대 사회에서 흔히 관찰되는 ‘아이어른’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나이로는 성인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부모에게 의존하거나 독립적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어른들이 증가하고 있는 터이다. ‘아이어른’ 현상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첫째, 과보호적 양육방식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부모들이 자녀를 스스로 성장하도록 돕기보다는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문화는 자녀의 독립심을 극도로 약화시킨다. 둘째, 지극히 경쟁적인 사회구조도 영향을 미친다. 취업난과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자녀가 실패를 경험하지 않도록 과도하게 개입하려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육제도 역시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는 주입식 학습에 치중하며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지 못한다.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성숙한 사회를 유지하려면 개인 각자가 독립적 사고와 자율적 행동 역량을 길러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독립심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른은 사회적 책임을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책임감을 회피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성숙함은 개인뿐 아니라 정부와 같은 사회적 조직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정부가 중요한 국정운영 과정에서 보인 미성숙함으로 인해 연속적인 충격을 받았다. 정부는 적절한 대비와 의사소통 없이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국민의 혼란과 불안을 초래했다. 성숙한 어른이라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책임을 방기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정부가 여러 문제를 사전에 예측하고 기획하며 대비했더라면, 이러한 대혼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부는 명확한 대책도 없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미성숙한 모습을 보여왔다. 어른다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성찰해야 할 지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 나이에만 달린 게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다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개인은 스스로 독립심을 기르고 부모는 자녀를 자율적으로 성장시켜야 하며, 정부와 같은 사회조직 역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적절하게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개인과 사회 모두 어른다움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때다.

2024-12-04

천국과 지옥 오간 비트코인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확정된 수익률이 보장되지 않은 투자자산을 위험자산이라 부른다. 항시적인 투자 실패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만큼 기대 이익은 안전자산에 비해 클 수밖에 없다. 예금이나 적금처럼 안정성 높은 자산과 비교해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갈 정도의 등락폭을 보일 수 있는 비트코인 등의 암호화폐는 위험자산의 영역에 있다. 그 위험자산이 단시간에 얼마나 폭락하고, 다시 어느 정도로 반등될 수 있는지 3일 밤과 4일 새벽 사이에 확인됐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전 약 1억3000만원에 거래되던 비트코인은 계엄령이 내려진 직후 1시간이 지나지 않아 8000만원 중반대로 폭락했다. 일부 가상자산 거래소에선 일시적으로 매수와 매도 주문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형국의 암호화폐 가격과 달리 환율은 짧은 시간에 급격한 속도로 폭등했다. 자정을 전후해선 혼란한 정치적 상황이 경제 파탄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하는 전문가들의 우려까지 나왔다. 이후 몇 시간이 흘렀다. 계엄령 해제의 시그널이 가시화된 4일 새벽. 언제 그랬냐는듯 비트코인의 가격이 치솟았다. 아침 7시를 넘어서면서 24시간 전보다 소폭 오른 약 1억3500만원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위험자산이 갑작스럽게 부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투자자의 삶을 나락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발표가 이뤄진 6시간 사이에 증명된 것. 암호화폐인 비트코인 등의 위험자산이 위태로운 널뛰기를 할 때 여기에 투자한 사람들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험자산은 위험하다. 투자에 신중해야 할 이유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2-04

TK통합 법적절차 돌입…완벽한 준비를

대구경북 행정통합안이 대구시의회 상임위를 통과함으로써 본격적인 법적 절차에 돌입한다. 3일 대구시의회 기획행정위원회가‘대구시와 경북도 통합에 관한 의견 제시안건’을 찬성 의결함으로써 법적절차가 개시됐다. 이 내용은 12일 대구시의회 본회의에 상정되는데, 이 역시 무난한 통과가 예상된다. 지난 6월 대구시, 경북도, 행안부, 지방시대위원회 등 4개 기관이 대구경북 통합을 추진키로 합의한 후 6개월만에 법적 절차가 시작된 것이다. 앞으로 경북도의회 통과, 국회 특별법 제정 등의 과정이 남아 있고 이들이 마무리 되면 2026년 7월 대구경북특별시가 출범한다. 법적 절차와 더불어 행·재정적 지원도 충분히 뒤따라야 하기에 TK통합이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충분치않다. 이달초 발표된 대구시 여론조사에서 대구시민 68.5%, 경북도민 62.8%가 찬성 의사를 보임으로써 대구시의회 통과 등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경북 북부지방 등의 반대기류도 만만치 않다. 주민여론 수렴과 설득 등을 통해 법적 절차 진행에 무리가 생기지 않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TK통합이 시도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을 알리고 대구경북 백년대계를 위한 사업에 조금의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24-12-04

‘그냥 쉰다’는 청년백수 42만명이라니 걱정

한국은행이 지난 2일 발표한 ‘청년층 쉬었음 인구 증가 배경과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년 새 일을 쉰 청년층(25~34세)이 25%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적이다. 쉬는 청년층은 지난해 3분기 33만6000명에서 올해 3분기 42만2000명으로 늘어났다. 이중 ‘비자발적 쉬었음’이 71.8%나 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비자발적 쉬었음’ 증가 이유는 대기업의 경력직·수시채용 선호현상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지목됐다. 반면 ‘자발적 쉬었음’의 배경은 ‘일자리 미스매치’와 고용의 질(직업 안정성, 근로시간, 실직위험 등) 하락이 주요원인으로 분석됐다. ‘쉬었음’은 비경제활동 인구 중 질병이나 장애는 없지만 단순히 쉬고 싶어 활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교육 훈련도, 구직 활동도 하지 않고 일자리 시장을 회피하는 청년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여사 일이 아니다. 이들의 실업이 장기화하면 노동시장에서 영구 이탈하거나 청년 니트(NEET)족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니트족은 일할 의지가 없는 무직자를 말한다. 한국은행은 “쉬었음 상태가 장기화할수록 근로를 희망하는 비율이 줄고 실제 취업률도 낮아진다”면서 ‘쉬었음’ 청년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25~29세 청년층 실업자 비율이 20.3%로 OECD회원국 중 가장 높다. 국내 실업자 5명 중 최소 1명은 청년이란 얘기다. 청년층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탓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후반기 주요 목표로 제시한 양극화 타개도 청년 일자리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청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에 대부분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고 방황도 한다. 취업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가 갈수록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는 쉬는 청년들을 다시 노동시장으로 유인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2024-12-03

대구서 파격적 제도혁신 주문한 상의회장단

그저께는 전국 56곳의 상공회의소 회장들이 대구에 모여 회장단 회의를 가졌다. 국내 경제를 이끄는 전국 상공회의소 회장단이 대구에서 모임을 가진 것은 15년만이다. 국내외 경제사정이 엄중한 가운데 국내 경제계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가와 지역경제 현안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경제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지역경제 위기극복을 위한 방법으로 파격적 제도 혁신을 주문했고, 그 해법으로 메가 샌드박스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메가 샌드박스는 대구경북권, 강원권, 충청권 등 광역단위 지역에 특화된 미래첨단산업을 선정해 규제를 유예하고 관련한 교육과 인력, 연구개발(RD) 등 인프라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제도다. 이와 관련해 최태원 대한상의회장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낡은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개별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것 보다 복합적 과제를 동시에 풀어내는 일석다조식의 해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업투자에 금융, 인력, 세제, RD 등 관련정책을 패키지로 제공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메가 샌드박스 제도가 저출생과 지방소멸, 지역불균형 성장의 해법이 된다는 경제계의 목소리는 경청할만 하다. 주제 발표에 나선 전문가들도 “지역간 성장격차 극복을 위해 메가 샌드박스 구축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메가 샌드박스는 지역경제 전반에 걸쳐 혁신을 도모하는 새로운 접근법”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우리경제는 국내외적으로 위기상황에 봉착해 있다. 경제연구기관들은 내년도 우리경제 경제 성장율을 1%대로 예상하고, 트럼프발 관세 폭탄으로 수출 전망도 어둡다고 예측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중앙보다 지방이 더 살기 어렵고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더 크다. 경제계가 주문하는 파괴적 혁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정부마다 그동안 규제 개혁을 내세웠지만 제대로 된 성과는 없었다는 게 경제계의 평가다. 상공단체 대표들이 위기를 느끼고 주문한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는 파괴적 혁신에 대한 당국의 결단이 지금쯤은 나와야 경제난 극복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2024-12-03

싸늘해지는 민심, 국정쇄신은 언제 하나

심충택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지지율이 다시 하락해 10%대로 내려갔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번주들어 좀 숙지기는 했지만, 여권이 국정쇄신은 뒤로 한 채 당원게시판 블랙홀에 빠져 이전투구를 벌이자 민심이 이처럼 싸늘해지는 것이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6~28일 실시한 11월 넷째 주 여론조사 결과, 윤 대통령의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19%에 그쳤다. 대구경북(TK)의 경우 긍정 평가가 40%로 타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었지만, 여전히 부정 평가(47%)가 많았다. 보수지지층이 주류인 부산·경남(PK) 지지율은 22%였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한국갤럽은 “대통령과 명태균씨 간 육성 통화 공개 후 대통령 직무 평가가 취임 후 최저 수준이다. 대통령과 당 대표 간 불화가 당내 갈등으로 비화해 여당은 여느 때보다 불안정한 상태로 보인다”고 했다. 공감 가는 분석이다. 윤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반이 가속하자 최근 주요언론들은 정부 레임덕 현상을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이미 차기 정권을 의식하면서 현 정부 주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길 꺼린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발끈했지만, 궁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대통령실은 어떻게 하면 국민지지를 다시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민심이반 원인은 한국갤럽 조사에 나와 있다. ‘경제·민생·물가’(15%)와 ‘김건희 여사 문제’(12%)가 부정평가 최상위 리스트에 올라와 있고, ‘윤·한 갈등’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들 현안 모두 용산이나 행정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여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야 하고, 야당과도 소통해야 한다. 우선 여당만이라도 우군(友軍)으로 만들려면 최근 소수의 친윤계가 의도적으로 당원게시판 논란을 ‘침소봉대’하는 행위를 중지시켜야 한다. 김민전 최고위원이 지난달 25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한동훈 대표와 이름이 같은 8명이 당원 게시판에 윤 대통령 부부 비난 글을 썼다’는 이른바 ‘팔동훈’을 언급하면서 당 대표를 직격한 행위를, 그가 지난 9월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윤 대통령과 만찬을 함께한 점과 연관 짓는 사람들도 많다. 여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윤계 정치인이라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며칠 전 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은 당원게시판 논란과 관련, 지난달 말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흔히들 얘기하는 ‘김옥균 프로젝트’를 실행하려고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한동훈 대표가 63% 지지로 당선된 사람인데 그 사람을 흔들어낸 다음에 여당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는 스스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난달 7일 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후 여권이 정국 주도권을 잡기는커녕, 현안에 대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권이 지금 가장 급하게 해야 할 일은 국정쇄신이다. 그러려면 당·정이 원팀이 돼야 하고, 야당과도 대화테이블을 마련해야 한다.

2024-12-03

크리스마스 씰

우정구 논설위원 나이가 많이 든 어른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씰에 관한 추억이 있다. 6·25 전쟁 직후 어려운 경제 상황에 놓인 우리나라에도 결핵이 크게 유행하면서 크리스마스 씰은 결핵퇴치를 위한 자선사업의 한 형태로 범국민적 참여 운동이 벌어졌었다. 원래는 1904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작은마을 우체국장이 결핵으로 생명을 잃고 있는 유럽 어린이들을 위해 모금방식으로 시작한 것이 시초다. 성탄절 우편물에 작은 금액의 크리스마스 씰을 붙여 시작한 모금운동은 이후 크게 호응을 얻으면서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씰은 결핵퇴치 운동의 상징이다. 우리나라는 6·25전쟁 직후 대한결핵협회가 결핵퇴치 운동과 함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결핵은 기원전 7000년 신석기시대 화석에서 흔적이 발견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염병으로 전해진다. 1882년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결핵균을 최초로 발견하고 퇴치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인류의 목숨을 앗는 위험한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작년에 800만명 이상이 결핵 진단을 받았고, 125만명이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또 결핵이 코로나19를 제치고 전염병 사망 원인 1위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한국에도 현재 1만6000여 명의 결핵환자가 있다. OECD 회원국 중 결핵 발병률이 1위며 사망률은 3위다. 크리스마스 씰을 통해 모금된 돈은 취약층 결핵환자 발견이나 환자수용시설 지원, 저개발국 결핵사업 등에 지원된다.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씰을 구입해 결핵퇴치 운동에 동참해 보는 것도 보람있는 연말을 보내는 방법이 될 것 같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2-03

조직경영의 리더십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당신이 배를 만들어 주고 싶다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하나하나 지시한 다음 일감을 나눠주는 식으로 하지 말라. 그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주도록 하라’생텍쥐페리의 말이다. 꿈이 있는 조직은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 리더는 부하직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다. 리더십의 본질은 비전을 갖는 것이다. 비전은 누구나 공감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조직경영의 첫번째는 비전 설정이다. 버트 나누스는 비전을 ‘조직의 실제적이고 믿음과 매력적인 미래 조직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이해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방향을 안내하기 위해 기술과 재능, 자원을 결합하여 시동을 거는 정략적인 아이디어’라고 묘사했다. 리더라면 비전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라는 것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은 유배지 생활 9년 동안 나라의 비전과 구체적인 설계도를 그려서 왕을 찾아 옹립하고 건국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IBM을 창시한 톰 왓슨은 회사가 오늘에 이르게 된 데는 첫 사업을 시작 할 때 성공한 미래 모습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 나의 꿈, 나의 비전 등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 하고 미래 모습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상세 계획이 있어야 한다. 실행 모니터링과 부족한 부문에 대한 피드백을 해야 한다. 미래 모습으로 가는 길이 바른지 확인해가는 것이며, 비전은 조직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준다. 둘째,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다. 비전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구호나 유행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필자는 광양제철소 혁신 스태프 근무시절 제철소 비전은 ‘자동차 강판 전문 제철소 구현’이고 목표는 3년 내에 일본 자동차 회사에 1톤을 납품하여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증 받는 것이었다. 제철소장이 직접 설명회를 하고 전 직원들은 물론 시내 콩나물 파는 할머니도 제철소 비전을 알고 있을 정도로 공유되었고, 모두가 꿈꾸는 비전은 실현 될 수 있었다. 셋째, 조직에 기를 불어 넣는 것이다. 조직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과 권한을 아래로 넘기는 임파워먼트와 스스로 참여하는 동기부여이다. 임파워먼트는 조직의 미션과 목표가 명확하고 의사결정을 실무 팀에서 하게 하여 신속하고 역동적인 조직을 만드는 일이다. 동기부여는 결과에 인정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이다. 직원을 잘 보살피면 사업은 성공한다는 말이 있다. 구성원을 신뢰하고 인증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넷째,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혼자 생각보다 대화를 하면 두 배, 토론하면 여섯 배의 성과가 나온다고 한다. 비전을 실현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직에 두려움을 제거하고 긍정과 신뢰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조직경영은 비전 설정과 공유, 조직의 활력과 소통하는 리더십이에서 성공의 단초가 열린다. 혼자 꿈꾸는 것은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꿈과 희망을 주는 리더가 진정한 리더이다.

2024-12-03

매듭달의 비애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무던히 앞만 보고 달려온 듯한 올해도 벌써 끄트머리달로 접어 들었다. 늦더위와 늦은 단풍에 애써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 같던 가을도 첫눈을 경계로 여지없이 겨울로 바톤터치하며 낙엽으로 사그라들고 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서 한 해의 자취를 마무리하는 이른바 ‘매듭달’로 이어져 그 어느때보다 바쁘고 일들이 많아지는 연말이다. 연초부터 이래저래 계획한 일들과 잡다하게 벌려 놓은 일이며 연말까지 정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보고·정산·결재·마감 등과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설계 등으로 누구라도 동분서주가 무색할 정도로 바빠질 것이다. 그만큼 한 해의 매듭과 새로운 날들에 대한 구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해의 마무리와 결산, 모임 등으로 부산해지고 일손이 많아지는 때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라도 터지게 된다면 난감하기만 할 것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와 손실을 초래하고 주체하기 힘든 변고에 빠지게 된다면?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비난이 쏟아지고 단체적인 움직임에 시달리게 된다면? 믿기 어렵겠지만 이같은 일들은 현재 포항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안타까운 실제 상황들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철강업체인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쇳물 생산공장에서 정상적인 조업 중 원인불명의 설비사고로 대형화재가 발생, SNS와 방송뉴스를 타고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긴급복구 비상조업 중 2차적인 폭발성 화재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설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등 복원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에 바다 건너 불구경(?)을 하던 일부 시민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와 함께 모 단체에서는 불안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시민을 볼모로 집단소송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포스코노동조합이 임금협상 결렬로 12월 초 포항 본사 앞에서 파업 출정식을 개최하자 창사 56년 만의 첫 파업 위기에 직면한 포스코가 총체적 난국에 휩싸여 지역 경제계와 시민단체들의 우려와 상생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3년 전 힌남노 태풍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은 포스코가 글로벌 철강시황 불황으로 최근 포항제철소 공장 두 곳을 폐쇄하고 공장 화재까지 잇따른 악재에, 노조의 쟁의행위권 확보로 파업 출정식까지 강행하는 등 극도의 불안과 심각한 위기가 지역경제 침체로 치명적 타격을 주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기만 하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이(脣亡齒寒)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 것(患難相恤)이 지혜와 상생의 덕목이 아닐까 싶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 보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상호존중과 상생협력으로 원만하게 협상하고 타결하여 난관을 함께 극복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름지기 매듭을 잘 맺고 풀어야 온전한 마디가 생겨나고, 더 큰 매듭과 마디로 더 큰 성장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미진하고 부족했던 일들을 아름답게 마무리해 따스한 온기 스미는 갑진년의 값진 매듭짓기를 기대해 본다.

2024-12-03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이기전(李己傳) <상편>

옆집 아이였다. 청록의 치마를 입은 아이는 빨간 사과 한 알을 들고 서 있었다. 빨간 사과를 내밀었다.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얹은 아이의 엄마가 고개를 살짝 숙여 기에게 인사를 했다. -저번 주 금요일 저녁에요. 아저씨께서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실 때 제가 버튼을 잘못 눌렀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버렸어요. 아저씨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셨고요. 죄송합니다. 기는 사과를 받아들고 아이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날 일이 마음에 걸렸나 봐요. 사과데이에 꼭 옆집 아저씨께 사과를 드려야 한다고 해서. 아이의 엄마가 이야기했다. 덧붙여 그녀는 주먹을 들어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시늉을 했다. -아. 기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이에게서 받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도 환하게 웃었고, 기와 아이의 엄마는 다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야. 니 희수라고 기억나나? 그 왜 있잖아, 학교 다니다가 전학 갔잖아. 전학 가서 얼마 안 지나서 자살했다고 소문났던 녀석. 위로는 누나만 세 명인 데다가 곱상하게 생겼었는데. 기, 니가 제일 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니들 둘이 사귀냐 면서 놀렸지 않았나? 글마가 살아있더라. 한 달 전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서 동기 한 녀석이 기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소주 한 잔 따라봐라. 빈 잔을 기 앞으로 내밀었다. 기가 따라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기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엄마가 용한 스님이 있다는 절을 하나 소개 받았다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이 요즘 조금 잘 안 되거든. 엄마도 애가 탄 거지. 하도 성화를 부리기에 따라나섰어. 별로 멀지도 않아. 국도를 따라가다 보니 금방이더라고. 차로 사십 분 정도 걸렸나. 절 이름이 망원사야. 망원사. 제대로 된 절도 아니야. 법당이라고 하나 있는 것도 그냥 슬레이트 지붕으로 덮어 놓았고, 스님이 지내는 방도 컨테이너를 개조해서 만든 방이었어. 스님이랑 나이든 공양주 한 분이랑, 그렇게 둘만 있더라고. 이런 데가 알고 보면 진짜로 용한 곳이라는 거야. 엄마 말이. 기는 언제쯤 희수가 등장할까 궁금했지만 녀석의 말을 굳이 중간에 끊고 싶지는 않았다. 빈 소주잔을 내려놓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녀석의 모습이 제법 진지해보였다. -손주들한테 만 원짜리 한 장 주는 것에도 손을 벌벌 떠는 양반이 글쎄 불전함에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넣는 거야. 깜짝 놀랐지. 내가 이 할매가 왜 이러나 싶어서 우리 엄마 얼굴을 쳐다보았다니까. 이 정도 넣어야 그 스님을 볼 수 있다 카더라. 내가 쳐다보는 걸 우째 알았는지, 부처님 얼굴만 똑바로 보고 있던 엄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이야기하데. 그제야 이해를 했지. 조금 있으니까 공양주 할머니가 들어오라 하더라고. 컨테이너 방에 들어가서 스님이랑 마주 앉았어. 나는 입도 뻥긋 안 하고 엄마만 스님하고 이야기를 했지. 내가 뭘 하다 망했는지 지금은 뭘 하는지. 우리 엄마가 별 필요도 없는 이야기까지 다 말하는 거야.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스님은 그냥 주구장창 듣기만 하는 거야. 엄마가 지칠 때까지. 아이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숨이 다 차네. 이제 스님이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시오. 엄마가 이렇게 말 하고 나니까 스님이 입을 열더라. 딱 두 가지. 이제부터는 잘될 겁니다. 글 하나 써드릴 테니 머리맡에 두고 틈나는 대로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화선지 한 장을 펼치고 붓으로 글을 쓰는 거야. 엄마는 아이고 글씨가 너무 이쁘데이, 너무 좋데이 하면서 연신 박수를 쳤지. 글씨는 나름 나쁘지는 않더라. 그런데 내용이 뭔지 아나? 그 왜 있잖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우짜고 하는 흔한 그거. 그건 기라. 확 하고 열이 올라오는데, 불전함을 뒤집어가 오만 원짜리 두 장 찾아 들고 나오려다가 참았다. 그래도 기가 찬 거는 기가 차는 거라서 스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지. 그런데 한참 보다 보니까, 낯이 익은 얼굴인거야. 어디서 봤지? 누구더라? 이렇게 고민하다가 엄마가 이제 가자고 해서 내려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이 났는데. 그 스님이 희수인거야. 와. 소름 돋데. 기는 녀석의 빈 소주잔에 소주를 부어주며 말했다. -그러면 그 스님이 자기 입으로 내가 희수다 하고 말한 것은 아니네? 녀석은 소주잔을 입에 대어 반쯤 마시다가 내려놓았다. -니, 내 말 못 믿나? 내가 사람 얼굴 하나는 정말 잘 기억하거든. 희수 맞다. 여전히 예쁘데. 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은 돼지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녀석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믿지. 믿어. 혹시나 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리고 내 기억에 희수는 교회를 다녔던 것 같아서. 기가 준 돼지고기와 구운 마늘을 상추에 올려놓고 쌈을 만들던 손을 멈추고 녀석이 말했다. -그래? 하긴 기, 니가 제일 잘 알겠지. 그라모 희수가 아닌가? 얼굴은 희수 맞는데. 희수.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이다. 곱상하게 생겼었다. 눈이 컸다.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햇빛 보는 것을 싫어했다. 위로 누나가 세 명 있었다. 분홍 필통, 색지로 된 공책을 좋아했고, 여러 가지 색의 펜을 구별해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옆에서 보다보면 색칠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빨간 색의 보색이 뭔지 아니? 희수의 색칠놀이를 구경하던 기에게 희수가 물었다. 희수 덕분에 기는 보색이라는 게 무언지 처음 알았다. 희수 덕분에 처음 안 것은 보색만이 아니었다. 영어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 밖에는 모르는 기와는 달리 희수는 팝송을 좋아했다. 쉬는 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점심을 먹고 교실에 엎드려 있으면 희수는 워크맨에 이어폰을 꼽고, 한 쪽 이어폰은 자신의 귀에 다른 한 쪽은 기의 귀에 꽂아주었다. 이거는 보이 조지고, 이거는 신디 로퍼고. 희수는 ‘ㄱ’자로 굽힌 손가락들로 스포츠형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팝송의 내용과 가수에 얽힌 사연까지 설명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제법 오래된 팝 가수들의 음악이지만 당시 기로서는 처음 듣는 멜로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기가 집에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다 보면 희수가 쓴 편지가 들어 있기도 했다. 주말에 뭘 했는지, 누나들이랑 본 영화가 어땠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희수가 쓴 자작시가 들어 있기도 했다. 기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기가 답장을 쓰지 않는다고 희수가 화를 낸다거나 답장을 써 달라고 조르는 일은 없었다. 기가 편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날이면 희수는 들릴 듯 말듯 이야기했다. 편지는 내가 쓸 게. 너는 읽어주기만 해. 시청각 교육을 위해 단체로 극장에 가는 날이었다. 시내에 있는 극장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러 갔다. 각자 알아서 정해진 시간까지 극장으로 가야 했다. 희수가 기의 집으로 찾아왔다. 극장까지 가는 동안 버스를 타는 시간을 제외하고 희수는 기의 손을 놓지 않았다. 희수는 기에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줄거리와 여주인공인 ‘비비안 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지만 기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희수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기는 희수의 손이 무척 부드럽고 따듯하다고 느꼈다. 정거장에 내려서 극장이 가까워지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보일 즈음에서야 둘은 손을 놓았다. 희수는 기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기는 꺼내어둔 사과를 종이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망원사를 찾아 가볼 생각이었다. 희수가 아니어도 된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희수가 아니더라도, 희수를 닮은 얼굴에 사과를 하고 싶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시월 이십 사일입니다. 그리고 일요일이지요. 망원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기는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디제이가 사과데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무슨 날일까요. 그렇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주위의 누군가에게 사과를 드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오늘은 사과 데이입니다. 저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무슨 데이라 불리는 날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몇몇 기업체나 장사꾼들의 상술 같기도 하고, 그 상술에 덩달아 동조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과 데이에 대해서만은 생각이 다릅니다. 저도 이날만큼은 꼭 챙기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우리나라의 사과 데이가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과 데이는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요? 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혹시라도 모르고 계신 분들이 있을까봐 제가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요. 일단 노래 한 곡 듣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월이지요. 시월의 어느 좋은 날에. 들려드립니다. (계속)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2-03

트럼프의 귀환과 한미동맹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미국 우선주의’와 ‘힘에 의한 평화’를 역설한 트럼프가 돌아왔다. 그의 귀환이 한미동맹에 불러올 파장은 만만치 않다. 미국의 외교전략이 ‘바이든의 진보적 이상주의’에서 ‘트럼프의 보수적 현실주의’로, ‘이념을 중시한 가치외교’에서 ‘국익을 우선하는 거래외교’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의 뉴노멀(new normal)이 될 ‘트럼피즘(Trumpism)’에 대비해야하는 까닭이다. 한미동맹에도 ‘트럼프 리스크’가 우려된다. 이미 합의한 방위비분담금협정의 재협상 요구, 주한미군의 철수, 감축 또는 역할조정, 북미협상과정에서 ‘한국 패싱’ 우려, 미국의 핵 확장억제력 약화 등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동맹도 하나의 이익공동체로 인식하는 ‘거래주의자 트럼프’는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으로 간주, 엄청난 안보 비용을 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 및 중국과의 협상과정에서 한국의 이익을 경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념·가치외교’에서 ‘국익·실용외교’로 전환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지명한 국무장관 루비오, 국방장관 헤그세스, 안보보좌관 왈츠 등은 모두 ‘힘을 강조하는 미국 우선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며, ‘동맹의 가치’보다는 ‘동맹의 비용’에 주목하여 미국의 부담을 최소화하려한다. 그들에게는 미중경쟁·북미협상·한미동맹 등이 모두 거래의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정부는 기존의 가치외교를 전면 재검토하여 실용외교로 전환해야 한다. 이념과 가치를 중시했던 이분법적 세계관과 흑백논리를 버리고, 국익과 거래가 작동하는 새로운 외교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시급하다. 바이든과 맞춘 코드를 앞으로는 트럼프와 맞춰야 하는데, 그의 거래외교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의 가치외교를 수정해야 한다. 한미동맹에 이견이 없어야 북미협상에서 우리가 소외되지 않는다. 북미협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 공간은 ‘경직된 흑백외교’가 아니라 ‘유연한 회색외교’에서 확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국방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해야 한다. 갑을(甲乙)관계에 있는 한미동맹에서 ‘갑(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른 ‘을(한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우리의 방위력이 제고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입장에서도 한미동맹 유지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 정부에서 다시 방위비협상을 하게 된다면 자체방위력 강화는 물론, 적어도 일본 수준의 잠재적 핵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협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국가안보전략의 성공은 분열된 국론의 통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여야 정치인들은 거세게 불어오는 ‘트럼피즘’을 외면한 채, 한미동맹까지도 권력투쟁의 도구로 삼아서 정쟁을 벌이고 있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침략을 부른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024-12-02

연말연시 음주운전 생각지도 말아야

술자리가 많아지는 연말연시다. 매년 되풀이되는 음주 운전자에 대한 단속에도 음주운전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다. 올해도 경찰은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 연말연시 음주운전 단속에 나선다. 2018년 9월 휴가 나온 육군병사 윤창호군이 음주운전 사고로 목숨을 잃자 그의 친구와 가족들이 음주 운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을 벌이면서 이른바 윤창호법이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음주운전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달 28일 대구지역 10개 경찰서의 합동 음주운전 단속에서도 6건의 음주 운전자가 적발됐다. 음주운전은 휴가철과 연말연시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그 중 12월은 음주운전사고 우려가 가장 높은 달이다. 송년회 등으로 술자리가 많기 때문인데 음주운전에 대한 운전자의 경각심이 유독 강조되는 시기다. 술자리 모임이 있다면 아예 차를 놔두고 가는 것이 음주운전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숙취 운전도 삼가하는 것이 옳다. 음주운전은 사고가 나면 피해자에게 치명상을 입히거나 심지어 생명을 앗아가 가족에게 영원히 지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음주운전이 범죄행위로 간주되는 것은 이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의 지속적인 단속과 음주문화에 대한 계몽운동 노력으로 음주사고가 조금씩 줄고는 있다. 그러나 음주운전 자체가 근절되지 않으면 우리사회에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인한 불행한 일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올들어 11월까지 대구에서는 음주운전으로 단속된 사례는 모두 4977건. 작년 같은 기간보다 600건 가량이 감소했으나 여전히 적지 않은 음주운전이 발생한다. 음주 교통사고도 300여 건이 된다. 전국적으로 보면 한해 10만건이 넘는 음주운전자가 적발된다. 이를 잠재적 살인행위로 본다면 끔찍한 일이다. 재수없어 음주운전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안이한 인식은 버려야 한다. 음주운전은 위험천만한 범죄행위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경찰도 강력한 단속을 통해 음주운전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연말연시 음주운전은 아예 생각도 말아야 한다.

2024-12-02

TK현안 청취한 이재명, 어떤 결과 내놓을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2일 대구경북(TK)을 찾았다. 어제는 대구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했고, 그저께는 이철우 경북도지사를 만났다. 포항 죽도시장에서는 상인들과 간담회도 했다. 사법리스크에 대한 여유가 생긴데다, 여권 내분이 심화하는 타이밍을 틈타, 보수지역 외연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굵직한 현안이 쌓인 TK지역으로선 이 대표의 이번 방문이 좋은 기회였다. 행정통합이나 신공항 특별법 모두 국회에서 민주당이 제동을 걸면 한발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 대표의 생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우선 이 지사가 TK행정통합 특별법 국회통과를 요청하자 “장기적으로는 광역화해야 한다고 본다”며 즉답을 피했다. 통합을 서두르는 PK(부산 경남 울산), 대전·충남 민심을 고려한 반응으로 짐작된다. 이 지사는 경주 APEC정상회의 예산 증액문제도 언급했다. 민주당이 예결특위에서 단독으로 증액 없이 감액만 반영한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바람에 APEC 예산 증액이 현재로선 무산될 위기에 있다. 이 대표는 “정부 요청이 들어오면 적극 반영하겠다”고 했다. TK신공항 건설도 특별법이 국회 문턱을 넘어야 가능하다. 특별법에는 11조5000억원에 달하는 신공항 건설 사업비를 중앙정부가 빌려주도록 명시하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어제 대구에서 열린 전국상의회장 회의에서 TK신공항 ‘규제프리존’에 적극 투자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특별법에는 규제프리존에 입주한 기업에 대해 관세면제, 상속제 공제, 재산세감면 등 혁신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대표는 그동안 TK지역을 방문해선 “영남이 역차별 당한다”고 하고, 호남에선 “전라도가 소외된다”며 이중적인 발언을 해왔다. 정치인이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차기 대선을 준비하는 이 대표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이 대표가 이번 방문길에 청취한 TK지역 현안을 국회에서 꼼꼼하게 챙겨주길 기대한다.

2024-12-02

못 말리는 헬리콥터 부모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최근 중앙일보에 실린 과보호 부모에 관한 기사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등장하는 사례들은 ‘정말로 그런 일이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허탈감까지 부른다. 증권회사 부서장에게 신입사원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온다. “내 자식이 고객 응대와 실적 목표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니 부서를 옮겨 달라”는 부탁을 했단다. 유통기업의 인사팀장은 직원의 아버지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는다.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가겠다는 아들을 막아달라. 혹시, 회사가 힘들게 해서 아들이 퇴사를 고민하는 것 아니냐”라는 것. 지난 세기엔 사용되지 않던 단어 중 21세기 들어 새롭게 만들어진 조어(造語) 중 하나가 ‘헬리콥터 부모’다. 아이들을 키울 때 양육과 교육 모두에서 극성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관심을 쏟는 부모를 지칭하며 사용된다. 회전하는 날개를 단 헬리콥터처럼 항상 아들과 딸의 머리 위를 끝없이 맴돈다는 의미. 몸이 아파 조퇴하는 아이를 대신해 담임교사에게 전화를 해주고, 대학생 자녀가 성적에 만족하지 못할 때 교수에게 연락해 점수를 높여달라고 떼를 쓰는 부모가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다. 그런데, 20대 중반을 훌쩍 넘겨 직장인이 됐음에도 다 큰 아들·딸의 연봉 협상과 부서 배치 과정에 개입하며, 성인 자녀를 서너 살 아이처럼 싸고도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건 놀랍고 더 나아가 측은하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대부분의 부모가 한두 명의 자녀만을 가진 사회가 됐다. ‘금쪽같은 내 새끼’로 키우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하면 낭패를 만난다. 자식 문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2-02

인생이 게임과 같다면

삶이 게임과 같다면 어떨까? 최근 one hour one life라는 PC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했다. 게임 내용은 신생아부터 시작해서 노인이 될 때까지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지 않고 60살까지 무사히 살아남아야 한다. 게임 세계관 중 독특한 점은 현실 세계에서의 1분이 게임 시간 상 1년으로 계산된다는 것이고,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한 시간 동안 게임 속 한 사람의 인생을 무사히 살아내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게임을 처음 접속하면 나는 갓 태어나게 되고, 나의 엄마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는 나의 이름을 지어주고 지어준 이름대로 한 가문의 계보에 등록된다. 3세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생아 상태이기 때문에 엄마의 돌봄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엄마 품에 안겨 옷도 입고 따뜻한 불 옆에서 체온을 올리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현실 세계에서의 3분, 게임에서 3살이 되면 나는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된다. 3살이 되면 영문 채팅도 3글자 이상으로 칠 수 있게 되어 엄마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정 내부의 일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흙을 나누는 법, 땅을 고르게 펴는 법, 베리 씨앗을 심는 등을 배우게 되고 한 가족의 일원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게임의 재미있는 점은 바로 계보를 잇는다는 것인데 엄마 외에도 이모, 할머니, 사촌 등 다른 플레이 유저들이 집 내부에 존재해서 여러 어른의 도움을 받아 성장할 수 있다. 생각보다 게임은 꽤나 디테일해서 제때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선 여러 종류의 농작물을 심고, 동물을 기르고, 요리를 하며 집 안 내부를 청소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연대가 중요하기에 유저끼리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소통을 하며 각자의 구역에서 성실히 임무를 다해야만 한다. 그렇게 부지런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성인 여성이 되어 있고, 문득 밭을 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메시지 창이 뜨며 품에 신생아가 안긴다. 이제 막 게임에 접속한 사람이 나의 자식이 된 것이다. 그 시점부터 또 다른 미션이 주어진다. 새로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새로운 옷을 지어 입히고, 불가에 다가가 아이의 체온을 높여주고 굶어 죽지 않도록 신경 써서 음식을 먹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3분, 게임상 아이가 3살이 되면 내가 처음 엄마에게 배웠던 것처럼 아이에게 거름을 만드는 법,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법, 밭에 당근을 심어 자라게 하는 법, 꽃을 기르는 법 등을 알려준다. 잠깐 아이에게 생존법과 생의 노하우를 가르쳐 줄 뿐인데 나의 머리는 빠지고 등은 구부러지고 얼굴 주름이 눈에 띄게 깊어져 간다. 벌써 게임을 플레이한 지 한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스무 명이 넘어가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는 동안 결국 게임오버 창이 뜨고,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 냈다는 엔딩을 마침내 보게 된다. 게임은 참 쉽고 단순하다. 그저 게임 나이로 60살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쨌든 엔딩을 보게 된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요리를 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사히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목적이나 방향성이 없어 꽤나 심심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게임은 접속 유저들과 가족을 이루고 구조를 만들며 그 안에서 생존의 의미와 성장의 기쁨을 찾는 편이 훨씬 재미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검은 엔딩 화면 아래에 있는 다시 태어나기 버튼을 누르면 다시 게임에 처음 접속했을 때처럼 누군가의 신생아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며 한 가문의 계보를 잇는 게임으로, 플레이마다 달라지는 가문과 인종, 부모 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결이 조금씩은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고, 배운 것을 또 후손들에게 가르치며 게임 플레이에 더욱 능숙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내 캐릭터의 삶은 단순해진다. 처음이라 어색하고 허둥댔던 것들이 이제는 익숙하게 전보다 더 잘해낼 수 있게 되고, 가진 생의 노하우로 더 나은 선택지의 길을 낼 수 있게 된다. 그렇담 삶도 게임과 같지 않을까. 나는 요즘 가보지 않은 길이 두렵다.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와 나이를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막연히 망설이기보단 현재 생의 노하우를 업그레이드 하고 있단 생각으로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충실하게, 동시에 즐겁게 여기다 보면 어느새 능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2024-12-02

로제와 윤수일의 예상 표절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피에르 바야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표절은 후대의 작품이 선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인데 비해 예상 표절은 앞선 시대의 작품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예지적인 직관을 가진 작가가 시간의 질서를 초월해 미래를 엿보기라도 한다는 걸까? 꿈에서 훗날의 일을 미리 보는 데자뷰 현상을 말하는 건 아닐까? 헛소리도 자꾸 듣다보면 묘하게 설득되듯 과거가 미래를 훔친다는 이 황당한 주장에도 그럴듯한 근거는 있다. 피에르 바야르가 제시하는 예상 표절의 첫 번째 원리는 ‘불일치’다. 문학과 문학의 영향관계에서 예상 표절을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은 두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 앞선 작품에서는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반면 후대의 작품에는 풍부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다. 앞선 작품에서는 그것이 작품의 나머지 전체와 심히 어울리지 않거나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 나아가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소한 장면인데 비해 후대의 작품에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특징이자 작가를 대표하는 독자적 개성으로 완성된다면, 과거의 작품이 미래의 작품을 예상 표절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모파상과 프루스트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한 텍스트이고 부차적인 텍스트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는데, 모파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인 ‘죽음처럼 강한’에는 여인의 옷자락에 희미하게 묻은 향수 냄새로부터 과거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억 작용이 파편적이고 미숙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모파상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인데 비해 30년 뒤 등장해 20세기 최고의 소설이 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아주 능숙하고 풍부하게 나타나면서 이른바 ‘마들렌 효과’ 혹은 ‘프루스트 현상’으로 불리게 된다. 두 번째 원리는 ‘소급성’이다. 독자들은 프루스트의 대표작에서 모파상을 감각할 수 없지만 모파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서 프루스트의 울림은 들을 수 있다.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이건 모파상 같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도 모파상을 읽으며 “이건 프루스트 같은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프루스트가 이미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프루스트가 등장한 이후 프루스트를 읽은 독자들의 독서 경험에 의해 모파상은 비로소 프루스트의 예상 표절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프루스트를 읽고 난 뒤 모파상의 텍스트는 프루스트적으로 변화한다. 뜬금없이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이 생각난 건 요즘 전 세계를 흥겨운 난리판으로 만든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APT.)’ 때문이다. 사람들은 로제의 아파트를 신축으로, 윤수일의 아파트를 구축으로 부르는데 피에르 바야르의 논리를 단순 적용하자면 윤수일이 로제를 예상 표절했다고 할 수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로제의 아파트를 듣고 난 뒤 변화한 윤수일의 ‘아파트’를 생각해보라.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라는 첫 소절 다음에 “으쌰라 으쌰 으쌰라 으쌰”라는 추임새를 넣는 게 윤수일의 아파트를 즐기는 대중적 향유방식인데, 로제의 아파트를 듣고 나서부터는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다음에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가 입에서 자동으로 발사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수험생도 아닌데 수능금지곡처럼 귀에 맴돌아 큰일 났다. 프랑스 문학비평가의 기묘한 이론까지 떠오르게 할 만큼 노래의 인기가 대단하다. 물론 로제와 윤수일의 사례는 예상 표절이 아니다. 예상 표절의 중요한 두 원리인 불일치와 소급성 중에서 소급성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윤수일이 로제를 예상 표절했다는 가설이 근거를 얻으려면 윤수일의 ‘아파트’가 그의 다른 음악들과 불일치해야 한다. 하지만 ‘아파트’는 윤수일의 음악적 정체성인 록 사운드와 도시적 감수성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으니 불일치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것이 중요한 노래이고 어느 것이 부차적인 노래인지를 따져 봐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로제의 시대지만 로제의 등장 전까지 ‘아파트’는 오직 윤수일이었다. 어느 아파트가 더 중요한 아파트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나에게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아파트는 무조건 윤수일이다. 노래방에서 로제는 43681번이고 윤수일은 340번이다.

2024-12-02

질문하고 확인하며

김규인 수필가 불황의 골은 깊고 정치가 양극단을 달린다. 우리가 어떻게 할지 모를 때는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이 중요하다. 질문이 중요한 건 누구나 잘 알지만 실생활에서 질문하는 건 드물다. 질문하는 건 눈치가 없거나 분위기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을 의식하며 남의 말을 듣기만 한다. 심지어 학교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사와 학생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오가는 가운데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이제까지 우리 교육은 주입식으로 학생이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다. 질문하는 학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적다. 그나마 최근에는 체험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소통이 늘어나도 그러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물음에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답을 주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질문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빠른 변화와 불확실한 미래에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에 맞는 답을 찾아야 한다. 얼마나 정리되고 정제된 질문을 하는가에 따라 자신이 받는 답도 달라진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책을 읽거나 지식을 갖추어 질문의 질을 높여야 한다. 인공지능에 대해 어떻게 질문하고 얻어진 답을 자신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자신이 할 일이다. 좋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다. 깊이 이해하기에 문제의 핵심을 간추려 인공지능에 핵심을 말할 수 있다. 그냥 피상적인 이해만으로는 질문하기는 어렵다. 간혹 피상적인 질문으로 답을 얻었다면 그 답 또한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도 못하는 답일 수밖에 없다. 질문하고 답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인공지능은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할 기회이다. 수업 시간에 대화도 없이 선생님이 설명한 내용을 주로 듣기만 하는 학생들이 충분한 이해를 하는 건 어렵다. 학교와 가정에서 인공지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호기심 많은 아이의 궁금했던 것을 많이 물어볼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보의 수집과 정리를 인공지능이 대신해 주어도 이를 최종적으로 옳은 자료인지 판단하고 활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그 내용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이러한 판단력을 기르고 좋은 질문을 위해서라고 독서는 필요하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여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독서는 무엇보다 필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세계적인 불황과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가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주변국과의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는 혜안을 얻기 위해서라도 인공지능과 가까이 지내며 힘든 시기를 이겨내었으면 한다. 본인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자 할 때 그 길은 반드시 열린다. 때마침 불어온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독서 인구의 확대를 가져온다. 또한 청년들 사이에서 일어난 텍스트 핏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길이 없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인공지능에 질문하고 책을 통해 확인한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면 한류의 꽃은 계속 피어날 것이다.

2024-12-02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우리 삶에서 전기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다. 냉장고, 에어컨, 스마트폰까지 모두 전기로 작동한다. 그런데 같은 전기를 쓰는데도 대구와 경상북도가 똑같은 요금을 내는 게 과연 공정할까? 최근 논의되고 있는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는 바로 이런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전력 자립률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쉽게 말해, 한 지역에서 사용하는 전기를 얼마나 자급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경상북도는 원자력, 태양광, 풍력 등 다양한 발전 시설이 있어 지난해 기준으로 자립률이 216%에 달한다. 경북에서 생산된 전기가 지역 내 소비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대구광역시는 발전소가 거의 없어 자립률이 13% 수준에 불과하다. 대구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전기는 경북 같은 다른 지역에서 끌어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송전 비용이 발생하지만, 현재는 이런 차이가 전기요금에 반영되지 않고 모든 지역이 똑같은 요금을 내고 있다.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는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지역에 따라 다른 요금을 적용하겠다는 정책이다. 경상북도처럼 전력 자급률이 높은 지역은 요금이 낮아지고, 대구처럼 자급률이 낮은 지역은 요금이 다소 오를 가능성이 있다. 물론 대구 시민들 입장에서는 요금 인상에 대한 우려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에너지 소비를 효율적으로 조정하고, 전력망 부담을 줄이기 위한 공정한 변화이다. 경북 주민 입장에서도, 지금처럼 다른 지역의 송전 비용까지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점에서 합리적인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은 이미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를 도입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영국은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런던 같은 남부 지역의 요금을 높게 책정하고, 전력을 생산하는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은 요금을 낮게 설정했다. 이로 인해 송전망 부담이 줄어들고, 지역 간 전력 소비의 균형이 맞춰지고 있다. 이 제도는 단순히 전기요금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다. 탄소중립 실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북처럼 재생에너지 발전이 활발한 지역은 전기요금 인하로 재생에너지 투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대구 같은 전력 자립률이 낮은 지역은 에너지 절약을 유도받게 되어 전체적인 탄소 배출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구 주민들이 느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에너지 효율화 지원 정책과 취약계층을 위한 보조금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지역 간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스마트 그리드’ 같은 기술을 도입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는 단순히 요금을 나누는 문제를 넘어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사용을 고민하는 기회이다. 경상북도 주민은 재생에너지 확대의 선두주자로, 대구광역시 주민은 에너지 효율화의 선구자로 변화를 이끌어야 할 때이다. 전기요금이 달라지더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함께 만드는 공정한 에너지 사용이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이루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24-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