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
그의 마지막 무대인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쉬는 시간에 이순재가 한 말씀이다. 제대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제작사 대표의 만류에도 그는 한 시간 반에 걸친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배우로서 대한민국의 어른인 이순재는 지난 25일 새벽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가장 먼저 조문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자신의 SNS에서 “한 시대를 넘어 세대를 잇는 ‘모두의 배우’를 떠나보낸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며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연예계 후배들도 이순재와 추억을 되새기며 고인의 빈소를 지켰다.
고(故) 이순재는 우리나라 1등급 문화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윤여정, 이정재에 이어 세 번째로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40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연기에 대한 진정성’과 인간적인 모습으로 전 연령층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훈장 추서 배경을 설명했다.
모두가 한결같이 느끼는 마음은 우리나라의 큰 어른을 잃었다는 것이다. 성실하고 겸손하며 마지막까지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문화예술계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그를 잃는 것은 연예계를 떠나 전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이유이다. 마지막까지도 연기가 어렵다며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인의 추모 행렬이 이어질 때도 내 편이 아니면 죽이려고 달려드는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장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정치판이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들의 언행을 보며 그래도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후배들을 향해 겸손과 열정과 성실성을 몸으로 보여준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누구의 말을 지팡이 삼아 이 세상을 살아갈지 막막하다.
내란을 일으키고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 자기 편이 아니면 끌어내리고 개혁의 대상으로 만들고, 말을 듣지 않는 기관장은 기관을 없애고, 한 사람을 위한 법을 만드는 사람들. 법의 잣대로 심판하는 검사와 판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을 심판하는 법을 만들거나 기관을 없앤다고 겁박한다. 인간을 편하게 하려는 법인지 어떤 집단의 수단과 목적을 위한 법인지 헷갈리는데 우리를 달래줄 어른을 잃었다.
미국의 환율 압박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세계 경제의 흐름도 우리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다. 국민의 살림은 궁핍해져만 가는데 정치권은 말로만 국민을 내세울 뿐 국민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권력을 차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사람들에게 떳떳하고 진솔한 어른이 왜 정치권에는 없는지.
일에 열정이 넘치던 어른도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는 건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그의 마음을 닮을 수는 없을까. 잠시 살기보다 모두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어른이 넘치는 사회가 될 수는 없을까.
이제 누가 따뜻한 말씀을 다시 해줄까. 정치인이 만든 천박하고 삭막한 사회를 누가 따뜻한 사회로 만들어줄 수 있을까. 어른 없는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까.
/김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