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리는 죽어서도
입을 벌리고 있다
과메기는 죽어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
과메기를 보면서,
사람의 길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
우연인지도 몰라도, 죽도시장을 걸으며 이런 광경을 목도했다. 각자의 인생에서 획득하는 의미는 관찰의 결과로 부여받은 그 사람의 몫. 그런 해석은 직시에 의한 감각적 반응이니 타인의 반응에 대해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죽어서라도 태도를 바꾸지 않을 용기를 살아생전에 내면에 각인시킨다면, 죽어서도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드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잊혀지기가 싫어서 떠든다. 그러나 떠들수록 남루해진다. 불행한 것은 그런 행위가 반복될수록 철저하게 스스로 소외된다는 사실이다. 죽도시장 앞의 좀비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자기 앞의 생을 열심히 좀먹고 있다. 밥벌이라면 용인하리라.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지 않는다. 주인공 없는 삶을 산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념과 철학이라는 그런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동정도 필요가 없었다. 책임을 그들에게 추궁할 수는 없지만, 평생 계획적인 교조주의의 가여운 희생자였다. 개떼처럼 살 필요는 없고, 짖을 필요는 없다. 저주는 결국 나에게로 향한다. 지금, 구체적인 대안은 생략되었고 인간에 대한 예의상실과 소모적인 낭설만 득실거린다. 침묵이 좋은 건 최소한의 면피는 보장한다는 점이다. 제발, 주둥아리를 닥치고, 필요한 말만 최소한 하라. 정치에 예속된 종교는 쪽박의 결과로 그 존재를 증명했다. 군림하는 듯 마취되어 가장 저속한 꼬라지를 저만 모른다. 집단의 힘으로 강요하는 요설들은 부메랑이 되어 금방 마빡을 후려칠 것이다. 상식적 이별을 모르는 저 단호한 프로포즈는 폭력과 범죄에 가깝다. 분명한 것은 단련되지 않은 말은 제가 싼 똥을 제 입에 바르는 꼴이다.
본문은 짧고 설명이 긴 걸 보니 나 역시 개소리나 나발거리는 놈팽이에 불과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에게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해 나에게로 깊이 잠입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