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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낮달-신광 법광사지 당간지주

그대, 떠돌이면서도 원주민인 사람 타인과의 경계가 그토록 마음에 걸렸을까 밤낮 없이 기웃거린 발걸음 나쁜 것을 먼저 배워 허무를 실천하는 사람 산에 가리고 강에 잠기면서 물음표 느낌표 다 깨물어먹고 맨발로 자기 속으로 숨는 사람 비겁함에 힘을 실어주고 웃는 사람 새털구름 잔주름 묻은 햇살을 녹인 소주 한 잔 마시고 그걸로 양치질하는 더러운 사람 보는 이 마음에 무혈입성하여 남긴 차가운 소인(消印) 그렇게 누구에게나 원죄는 있다고 다그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사죄이며 소멸의 시작임을 가만히 지적하는 무기질의 비웃음 폴폴 날리며 걷는 사람 하늘엔 문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문을 여는 마음이 예쁜 사람, 불치병이 없는 사람 그대 원주민이면서도 떠돌이인 사람. … 일상적 혹은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이란 말을 나는 자주 사용한다. 그보다 더한 철학은 없다고 믿는다. 평범해서 눈부시다. 모든 사람의 생애가 반드시 그러하다. /이우근 ..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5-21

탁발-옛날 중앙로 우체국 풍경

부처와 가섭 존자가 중앙로의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오늘 탁발한 것을 적당하게 분배하고 있다 가서 보니 기껏해야 햇빛과 먼지 몇 개의 동전과 비웃음 몇 줌, 생각해 보니 그 보시는 오히려 중생에게 강탈한 진짜 보리(菩提)였는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헌신하자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주고받는 거 없어도 그냥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남는 장사라는 거, 부처와 가섭은 동의했다 하이파이브 했다 노동의 결실의 소주잔에 잠기는, 오늘의 노을이 좋다 카아, 목줄 땡기는 이런 소리는 아무나 뱉지 못한다 풍부한 하근기(下根機)에 배부르고 아늑하다. …. 무던하다고 섬세하지 않을 리 없다. 금(金)은 은(銀)을 이기지 못한다. 남몰래 벼린 칼날 초승달로 내뱉고, 생업(生業) 이루고 나서 돌아서서 말하리라. 참 따스한 세상이라고. 별로 내밀 거 없어도 나에게 헌신(獻身) 했다고 말하리라. 그 마음씀씀이가 너울물결로 이어졌으면 한다. /이우근 ……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5-14

어느 봄날 - 기계면 도원정사

배롱나무 꽃 피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낮잠을 못 자겠다 배롱나무 꽃 돋는 소리가 얼마나 켜켜이 쌓이는지 술을 못 미루겠다 봄날은, 마음의 멍울이 망울로 돋고 비와 바람에 꽃이 피고 져서 아지랑이도 서로 비비고 꼬이면서 온도를 재촉하며 순서도 명분도 없이 무분별하나 조용한 소요를 양분 삼아 투명하게 바쁘게 서두르고 있다 그 욕심의 작은 서막(序幕) 혹은 사람의 길은 아닐지 다행인 것은 외롭고 가난해도 왠지 더 윤택해지는 봄날의 느낌 햇살 한 조각 허투루 낭비 않는, 가만히 있어도 촘촘하게 흐르는, 그 봄날의 역학(力學)을 도원정사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 한 사람이 있었다.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고 싶었다. 등대처럼 끊임없이 수신호를 보내는 사람이고 싶었다. 배경이 되고 노을이 되고 싶었다. 혼자면서도 더불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어머니는 시집을 간다고 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5-07

입암서원(立巖書院)

가사천 물소리 맑으니 과연 세거(世居)할 만한 곳이다 안과 밖으로 닦아 문장(文章)과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이렇게 교차하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향나무 냄새 쑥떡보다 깊다 우리가 불천위(不遷位)를 바라는가 망연한 불후(不朽)를 꿈꾸지 않고 오직 실용적으로 살자고 다짐한다 형식적인 솟음이 아니라 의지의 표상으로 뜻을 세움이라 헛것에 들썩이지 말고 오직 정좌(正坐)하여 정진하며 읽고 또 읽으리라 뼈에 새겨 각고라 했으니 성리(性理)가 사람의 길에 삐끗한다면 새로이 갈아치울 기개를 배우고 시대에 동참하는 열린 생각을 배우는 것이 학문의 길이 아니겠는가 귀 기울여 듣고 마음 낮추고 후세를 두려워하여 오늘을 직시하는 선비가 되는 것이 눈 밝은 조상의 가르침인 것을, 헌 신짝처럼 신념을 개량할 수 있는 것도 교조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길일 것이다 그리하여 동천(洞天)에 머물고자, 그래서 입암(立巖)이다 그래서 선비는 위태로운 사람이다. 어느 들판에서 쓰러지리라. 그 들판이 되어 벌떡 다시 일어나리라. 입신양명은 당대의 것이 아님을 명심하여 후세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이 중요하다. 오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님을 진력을 다해야 한다. 보조 지눌이 말했다. 땅으로 쓰러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4-09

오어사(吾魚寺)

경북 포항 오천 항사리에 가면 오어사라는 절이 있다 한 놈의 땡중 때문에 한때 구설수에도 올랐지만 흠없는 사람 어디 있으랴 눈 질끈 감고 용서해야지 그래야 서로서로 사람이 되지 그밖에는 모든 것이 이쁜 절 부처가 아무리 부처라 해도 인간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모양이라 운제산(雲梯山)은 장구해도 덜 떨어진 인간 하나 감당 못했네 오어사, 이리저래 그냥 절하라고 있는 절, 업보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지 쌓고 닦으며 평생을 수행하지 성불은 무슨, 그냥 닦는 거지 장작을 패는 마음의 인간의 따스함, 삼팔광땡 같은 후광과 온기가 있어 그것으로 충분하리. 능엄경에서 읽었다. ‘사마타’는 마음의 본래 자리인 집을 보는 단계로 돈오를 일컫는 말이다. ‘삼마다’는 집의 대문을 통과해 집에 들어서는 단계로 점수를 가르키는 말이다. ‘선나’는 집 안마당을 거쳐 방 안까지 걸어가는 단계로 불이(不二)를 말한다. 이 말을 나는 껌을 씹듯 중얼거리곤 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4-02

송도 방파제

파도를 탓할 수 없으니 아울러 바다도 탓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경계가 아니라 이어짐이다 다만 본질에 충실하면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송도바다 방파제 잠방잠방 윤슬과 대화하며 가장 독한 소주로 가장 황홀한 해산물을 얻어먹던 놀이터가 없어졌다 생업에 충실하며 눈매가 선한 그 아지매는 공부하라고 눈 흘기며 그래도 늘 다독여 주었다 아마 세상의 다른 곳에서 여전히 생선을 썰고 있을 것이다 죽도록 반성해야 할 일이다 포항제철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송도는 송도인데 송도 아님이 상심스럽다, 그리운 송도. 스무 살 무렵 송도 방파제에는 포장마차가 많았다. 방학 때마다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셨다. 가난한 주머니를 우려한 단골집 아지매는 넘치게 해산물을 썰어주셨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많이 베풀며 살라 하셨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다. 매운 칼질 솜씨며 선한 눈매가 가끔 그립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26

지역언론인 혹은 문화적 정신적 개화기를 꿈꾸며

서울 갈 때, 터미널에서 한겨레신문을 구해 읽기가 쉽지 않아 잠시 당황스러웠을 때, 그래도 그 신문 지사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칭 지역언론인 후배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문화의 확장과 의식의 팽창은 작은 일에서부터, 사소한 일에서부터 챙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풀뿌리 노동운동도 했고 민주학교도 꾸려 마음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 뿌려진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 꽃피는 날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엎어지고 자빠져도 우리는 어깨동무 합니다. 글은 죽지 않습니다. 그것을 나르는 일도, 그 새벽의 의미만큼 청명할 것입니다. 가끔 지역적 한계에, 그것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부닥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벽에는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문을 두드리며 사람의 개벽을 기다립니다. 모두가 동참할 것입니다. 신문배달이라고 하자. 지국장이자 배달원이었던 후배는 여전히 그 직업을 사랑한다. 절망적인 판매부수에도 신문에서 손을 놓은 법이 없다. 새벽에 맡는 잉크 냄새는 뱃속의 기생충을 박멸할 정도로 자극적인 향기였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19

장기(長鬐) 읍성1

우암(尤菴)과 다산(茶山)이 잠시 머물렀다고 그게 자랑할 일은 아니지 영일만(迎日灣)은 저리 푸른데, 결국엔 촌구석이란 이야기지 그러나 사람의, 그리고 아주 먼 일별(一別)의, 꿍쳐놓고 싶은 공간, 지금도 유효한 지도 몰라 반성은 습관으로 반복적이었을까 역모(逆謀)는, 분노는 꿈도 꾸지 못하고 서울을 향하는 삶, 그 농밀하고 내면적인 지향(志向), 그렇게 팽개쳐진 삶 그래도 구룡포(九龍浦)와 모포(牟浦)와 하정리(河停里)의 바다는 고요하고 무심하며 여전히 생기발랄 그래서 우리는 뇌록지(磊綠地)2를 관찰하고 날물치3의 시원(始元)을 본다 외지(外地)여도 보석인 땅이 곳곳에 있더라 뭉개고 자빠져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음의 즐겁고 처절한 마스터베이션, 유림만보(儒林漫步)4한들 세상이 움직일까, 나의 용도폐기 뒤엔 세상이 있었다 비로소 고운 모래밭을 걸으며 받들어야 할 백성들의 생활을 기웃거리며 배워야 할 것들, 먹거리를 생각함 끝내 청보리밭 끝 모퉁이에서 오줌을 누고 비로소 세상과 결별하고 다시 세상과 조우(遭遇)함. 타박타박 걷고 싶으면 장기읍성에 가면 된다.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나는 나에게로부터 유배(流配)를 받았기 때문이다. 1. 경북 포항시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고려, 조선시대의 읍성터. 2. 뇌록은 중간 명도의 탁한 녹색의 돌로 단청의 바탕칠에 사용되는 전통안료가 추출, 장기면이 국내 유일의 산출지로 인정되었다. 3. 생수암(生水岩), 바위 사이로 생수가 나오는 곳의 지명. 4. 愉를 儒로 바꾸어 보았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12

죽도시장 할머니 막걸리집

그 한 평도 안 되는 막걸리집팔 십 생애의 생업(生業)찐 계란과 소금밖에 없다한 놈이 한 병 시켜먹으면 오 백 원이지만잔술 넉 잔 팔면 팔 백 원이다나는 적당히 계산적이다앉아 마실 자리도 없으니집세 걱정도 상대적으로 적으며알아서들 챙겨 마시고 간다나는 최소한 의자 몇 개는 준비하고 있으며누군가를 기다릴 줄 안다, 그 가난의 자리날품팔이의 고단함 대신할 십시일반의개념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저렇게 알아서 마시고 길을 나서니나의 권력도 적당하고 정당하다들락날락 온갖 잡놈들 종일 바쁘다허리가 아파도 사람구경이 좋다지랄하는 놈, 외상하는 놈 일체 없다인생에 있어 공짜라는 것이 없지 않겠는가사람은 기본적으로 싸가지가 장착되어 있다바닥이라고 바닥을 치지는 않는다배워서가 아니라 선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그 가치를 스스로 지향하고 있다우리는 남루해서 눈부시고 그렇게 살아간다가치를 부여하지도 않고 그 의미도 모른다덧셈 뺄셈 구구단 정도면 충분하다인생의 일몰이 분주해서 행복하다이만한 남는 장사 또 없으리.원고료가 두둑하면 늘 가고 싶은 곳이 죽도시장 할머니 집이다. 더 돈을 버는 느낌이다. 천천히 한잔 마시면서 내가 생산한 결과물들에 대해 심도 있게 비평한다. 쓸데없이 진지하다. 수없이 많은 입술들이 닿았을 저 잔에 노을이 슬쩍 걸터앉는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05

검정고무신-오천초등학교 가을운동회

신새벽 찬물 한 그릇 마시고 안개를 뚫고 어제 씻어 놓은 찹쌀떡처럼 찰진 검정고무신을 신고 양철대문을 밀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도 걷고 있습니다 식구들에게 여러 모로 미안스럽지만 결코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뻔뻔하기도 하고 많이 닳았지요 때는 덜 타지만 도무지 멋대가리 없는 검정고무신이 아직도 신작로를 걷고 있습니다. 이슬에 미끄러지는 것이 약점이고 빗물에 강한 것이 장점이지만 어정쩡한 위상(位相)과 얕잡아 보는 시선에는 속수무책이었지요 난들 왜 기차표 운동화이고 싶지 않았겠어요 단지 질기다는 경제적 이유로 발바닥과 열을 낸 나날들 그렇게 소모되어도 따뜻한 것이 되고 싶었지요 가끔 송사리를 가두는 유용한 도구이기도 했음이 너무 기특했어요 아직 걷고 있음이 사양하고픈 축복이지만 그렇지만 날이 저물어도 우리는 가야 해요 열심히 달리면 공짜로 공책과 연필도 생기는 그 화려한 축제는 가을 하늘에 고스란히 남아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해요. 소풍과 더불어 운동회는 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둘러앉아 음식을 나눈다. 알싸한 사이다는 왜 그리도 달콤한지, 세상을 다 얻은 듯 했다. 펄럭이는 만국기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뛰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꿈이 얼마나 원대한 것인지 절실히 느껴진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2-26

민주교사 정영상

민주교사 정영상은 잠결에 웃으며 심장마비로 죽었다 모든 죽음이 마찬가지다 청량리에서 밤기차를 타고 제천에서 내려 단양으로 총알택시를 갈아타고 정영상의 죽음을 확인하러 갈 때 어둠은 아늑하게 우리의 삶을 확인해 주었다 젠장,산다는 것이 눈물 한 방울로 정점을 찍어 살아갈 목표를 확인시킨다는 것 그 무심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관(棺)을 부여잡고 운들 무엇하리 살아 죄 한 점 없었던 사람이 어린 아들 딸 남겨 놓고, 마누라만 남겨 놓고 그렇게 간 죄가 많은 사람이 되어 떠났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이유도 없이 분노했다 정작 벌을 받아야 할 나는 멀쩡히 소주를 마시며 먼 월악산을 보고 있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마음이 저승에 닿아 강물로 흐르면서, 그가 굵은 손으로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 그러나 그 감촉은 가을비보다 혹독했다 상(賞)보다 벌(罰)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 정영상은 결코 죽지 않았다. 정영상은 연일읍 출신으로 공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안동 복주여중에서 근무했으며, 전교조 활동으로 투쟁 중 심장마비로 세상과 이별했다. 내가 2학년 여름방학 때 임용대기 중이던 형은 자전거 뒤에 도시락을 묶어 화실로 출근하여 나와 자주 놀았다. 도시락과 막걸리를 나눠 먹으며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큰 자양분이 되었다. 털털거리는 그 자전거 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하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2-19

오일장 나이키 -오천 장날 2

장세(場稅)를 못 낼 형편이라외곽 담벼락 아래, 여기는햇살이 참 따끈해요그냥 모여 질끈 징검다리 놓아요종일 기다려 몇 단 판 봄나물파장 무렵, 눈길 끄는 저 신발 손주 생각기술력이 좀 떨어진다고나쁜 신발은 아니라네요식구들 거 다 챙겨요서울 것들, 눈여겨 보지도 않을 테지만임대료 유통마진 브랜드 파워세금까지 후려치고도 거뜬하다네요서민경제 기여한다고도 하고,그래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더라도가야 할 길, 조여매고 가고 싶어요꼭 가요이류(二流)라도 일류 흉내 내면서결국에 가장 하류가 되면마음 편할 거라 생각해요나는 가당찮은 희망을 꿈꾸지 않아요옆 난전에서팬티도 몇 장 사서집으로거침없이달려볼까나.나이키도 닳는다. 오일장 나이키도 마찬가지다. 벤츠도 차가 막히면 속수무책이다. 모든 술은 다 취한다. 사람은 결국엔 죽는다. 나는 실용을 추구한다. 가난한 변명에 불구하지만 외형에 현혹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별로 쓸모없지만 말이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2-05

죽여줄게요

죽도시장 새벽 세 시 자연산 잡어를 받아 여섯 시에 좌판 아지매들에게 도매로 넘기고 나서 해장술 하면 하루의 생업은 대충 마무리 그러나, 수줍게 한 할마시 다가오셔 아재, 혹은 죽은 거, 경매 안 되는 거 좀 주면 안 되것나 망설임 없이 즉답(卽答)한다 알았니더, 슬그머니 골목 뒤에 가서 남은 활어를 기절을 시키거나 아예 분질러 선뜻 팔라고 내어준다 시장의 교란이긴 하나 물러섬이 없다 경쟁은 비교의 우위가 아님을 몸으로 설파 뜻 모를 살생으로 하루를 구축함 오만 원이 이만 원이 되어도 그 잔잔한 거래, 그것이 적절한 환희가 된다 먹고 사는데 지름길이 있는가 직선이 곡선을 염두에 두지 않을 리 없다. 새벽 어시장 경매장에는 집어등을 보고 몰려드는 은빛 찬란한 오징어처럼 싱싱한 사람들로 눈이 부시다. 그렇게 삶은 치열하게 진행이 된다. 나는 경매가 정직한 거래라고 생각하지만 그 효율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나의 편견이리라. 경매를 떠나 간혹 상식을 벗어나는 이상한 거래를 하는 후배가 있다. 그는 스스로 약자이면서도 더더욱 약자의 편에서 살려고 한다. 그는 시장을, 세상을 아름다운 편견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1-15

몽주, 두루두루 넓은 꿈

나는 불후(不朽)를 생각하지 않았다 풀잎 끝 이슬이 곧 햇살에 추락해도 맑고 고운 뜻은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거친 바람과 빗속에서도 사람의 길을 지키고자 했다 약발 다한 왕조의 귀퉁이에서 버리면 산다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징검다리가 되어 나 하나의 희생으로 명분이라도 생긴다면 참 즐거운 일, 운제산 기상이 훗날까지 이어지고 형산강 물길이 동해에 퍼지듯 사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구나 혹은 그럴 수도 있구나 반추하면서 나, 몽주, 꿈을 두루두루 펼쳐 세상이 아름답기를, 그 누구도 불후를 꿈꿀 수 없다 그래서 불후가 된다. 몽주 어른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정치는 잡놈들이 하는 짓이다. 그런데 몽주를 영천에서도 팔고 용인에서도 판다. 세상살이가 그런 것이니 생각하면, 더욱 아득하다. 두루두루 넓은 꿈을 펼치기에는 세상은 협소한 비탈길이다. 버티고 살아야 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1-08

하선대

포항 동해면 마산리와 입압면의 경계에 하잇돌이라고도 불리는 하선대가 있다. 왜 풍광이 좋은가 살펴보니 아득한 전설이 있다. 하늘의 내려옴 바다와 인간의 조화 그 궁극의 합일, 하선대는 바로 그런 곳이다. 연오랑 세오녀의 바다이기도 한 그곳은 드넓게 사람들의 넉넉한 삶의 배경이 된다. 윤슬이 반짝이는 곳 사람들이 천천히 거니는 곳 의식과 안목이 넓어지는 곳, 하선대에 서면 신화와 역사와 전설이 펄럭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꼴 잘난 포악한 용왕이 개과천선하여 사람의 길을 따라 지극한 마음공부를 통해 지상의 평화를 열고 하늘의 근엄함은 이곳에서는 다정한 풍경이 된다. 하늘과 바다가 결혼을 한 곳, 이곳 하선대에서는 인간의 꽃이 핀다. 시시비비를 알고 수오지심을 알고 측은지심을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하늘과 바다와 어울려 성장한다는 사실에 하선대의 바다는 자못 비장하지만 겸손의 끝에 선다. 열린 마음의 자세로 물길을 다듬고 바람을 길들여 하선대는 존재의 마지막에서 우리 곁에 남는다. 풍악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우리 마음의 소리가 이미 각자의 가슴에 스며들어 있으니, 이 파도 소리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한발 더 나아가 하늘과 바다가 우리를 궁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또 그것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향하는 착한 연민임을 상기시키는 따스한 호흡임을 하선대는 증명한다. 그리하여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지나 우주를 뚫을 기세로 당당하지만 하선대는 늘 우리 곁에 있다. 누이와 같고 어머니와 같고 아, 아! 아버지와 같다. 평범한 바다라고 할 수도 있다. 전설이 보태지면 의미가 다를 것 같지만 암만 살펴봐도 평범한 바다다. 그런데 물소리가 좋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무책임하지만, 그냥 물소리가 좋다. 묻지 마라, 귀찮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