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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전리 구판장

경주에서도 포항에서도 어정쩡한 곳에 잔뿌리 내린 세월 이마 위의 잔설 소모되어 낡았어도 그래도 정갈한 시간이 진열되어 있네 별 아니면 올려다 볼 일 없는 냇물 아니면 내려다 손 내밀 일 없는 라면 끓이듯 간편한 삶 못마땅함이 보글보글 끓는 냄비와 같은 일상 솜을 씹듯 두부 한 점 우물거리면 그래도 달래양념장 향긋함이 콧등을 짚는다 코팅 된 과자봉지처럼 빛나던 시절은 언제였는가 달콤함에 저당 잡혔든, 그렇게 부풀어만 있었던, 기실 편방(偏旁)이거나 부수적(附隨的)이었던, 하산의 의미를 총총 재촉하며 바라보는 저 널려있는 시간과 사건들이여 문득, 처연하게 찬란한 아직 남아 있는 길의 보푸라기 반짝 빛나다가 사라지는 것들의 야무진 허술함 처마에 걸린 명태코다리가 바람, 바다, 산의 울음에 건조되면서 시간을 관통한다, 상처는 스스로 여며야 한다. 진전리는 오천에서 경주 기림사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인데, 거기에 조그만 구판장이 있다. 두부와 도토리묵과 국수를 판다. 듬성듬성 등산객들이 들리는 곳이다. 뼈에 좋은 동동주를 주는데 마음에 더 특효약이다. 자궁과 같다. 느릅나무 아래 앉으면, 저승이 보인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2-18

죽도시장 대성막걸리

부엌에 덧댄 쪽마루라도 임금님의 침상이지 그렇게 잠든 어머님의 주름살에 파르르 떨리는 형광등 불빛이 잔설(殘雪)로 내리면 단골이라는 이름으로 등쳐먹은 세월이 벽마다 가득하다 살며시 냉장고에서 막걸리 한 사발 퍼서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 장아찌 몇 점과 멸치 몇 마리 경계의 벼린 눈빛 스파링 상대처럼 긴장하면서 도열하여 이내 종종걸음으로 입으로 집합할 운명 인생은 싸우는 거야, 상대도 없는 자유로운 술집 주인이 있어도 없어도 시스템 작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계산은 알아서 바가지에 넣을 것 마신 잔은 조용히 한쪽으로 밀어놓을 것 공화국은 이런 것이라고 민주의 기본은 이런 거라고 생기발랄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소굴 대성막걸리 팔순 어머니의 내공은 이렇게 정리된다 씨팔놈들아, 니들 꼴리는 대로 해라 돈도 필요 없다, 니 스스로 쪽팔리지 않으면 된다, 그 쫑알거림의 사자후, 그 그물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잔술로 속을 달래고 공짜 술도 너무 많이 얻어먹었다. 서울에서 고생한다고, 그 한 잔 못 주겠느냐고, 열심히 살아라, 말씀하셨다. 그 세월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아쉽게도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지금은 사라졌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2-04

오천 장날

상설장이 되었다 해도 오일장은 잊으면 안 돼요 냄새를 확인하고 추억을 상기하고 옛날 떡과 술떡을, 도라지와 냉이를 상업적이지 않게 먹고 살 수 있거든요 라이센스 없는 토박이 장꾼들 습관처럼 출근하는 사람들 구석구석 노인네들 다 모여 콘크리트 담장 아래 쪼그리고 앉아 꼬박꼬박 졸며 봄 햇살 보다 더한 온기를 확인해요 안부 전하면서, 죽지 않으면 보고 또 본다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제철 봄나물 마중 나오신 거 캐고 뽑아 드리워 주신 거 야박한 가격에도 선뜻 내미는 손 핏줄 빳빳한 마른 손 짓이기 듯 비비는 어설픈 악수 오일장의 자기증명, 그 허술하지만 야무진 목숨들 칼국수 다섯 그릇 시켜 일곱 명 나눠 먹고 동해댁 문덕댁 용산댁 우리 잊지 말아요 멀고 먼 시선 아지랑이에 묻히고 인생, 엄지 검지 모아 팽 하니 푸는 콧물 같은 것 해 지기 전에 버스를 타야지 마지막 버스는 너무 늦기도 하고 우리 운명 같아서 지랄 같아 종일 앉아 있어 시큼한 허리 부축하며 이천원 나물 향기 열댓 봉지 헐렁한 봉지에 담아 집으로 가는 오천 오일장 아쉬워 머물고 싶어도 가슴에만 담아둘 마지막 풍경 더 이상 뜨거운 것은 없어도 더 이상 시들 거 없어도 다음 장날 못 나오면 와병 중이거나 죽은 줄 아시게. 해도동에서 태어났지만 오천에서 오래 살았다. 삶의 언어를 거기서 배웠다. 바탕을 형성하는 인성은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낮은 것은 언제나 은은하다. 금빛이 아니라 은빛이어서 늘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흰 머리카락이 더 늘어가고 있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0-16

형산강 하구(河口)

들숨과 날숨을 나란히 교차시키는자맥질을 통해수평을 지향하는 강물의 긴 여정을지켜 보았네갈숲과 언덕들이무던히 응원해 주었네고마운 나날들윤슬이라고 했나우리는 반짝이고 빛났다그렇게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을동시에 경험하면서먼 길이 먼 길이 아니었네맑은 종아리 튼튼해지며바다로 가네돌아오지 않을 거야잠시 머뭇거려도 멈춤은 없었지참 기특했어, 장점이었지바람과 구름이 협박하면서도또 힘이 되었지대체로 조화로웠지기술이 아니라 기교였지차선이 최선이었어지금 의미 없어도 그것이 화석이 되면언젠가 발굴이 될까의미 없음이 최고의 효율이야아득한 가능과 희망, 그것이 없다면우리는 이미 강물이 아니야. 오직 나아가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시간에 의해 나아가고 있다. 거기에 얼마만큼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동적 삶이라면 더욱 좋겠다. 성과는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한다. 최선이면 된다. 성공과 능력을 지껄이는 자들은 무시해도 좋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0-09

숙자는 힘이 세다

숙자라는 사람이 있다죽도시장이라는 큰 세상에 산다그는 키가 커서 멀리 보는 게 아니라마음이 높아서 그럴 거다세상의 장터인 죽도시장을 지키는 사람으로그 길목에서 바람을 감지한다태평양에 어제 밤에 오줌을 누었단다새침하게 내륙의 향기를 바다에 풀었단다비린내 나는 사람의 온기가 아니어도꽉 차게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그런 사람이 있다세상이 살만 하다는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이 된다짜고도 씀씀한, 늘 그렇게,그의 생업처럼 사람과의 관계를숙성시키고 버무릴 줄 아는,젓갈이 왜 아름다운 밑반찬인가그렇게 숙자는 사람을 사랑하는힘이 센 사람이다나팔꽃 같고 사르비아 같다그런가 하면 쌍욕으로 무례를 응징할 줄 안다나는 그런 것에서 용기를 얻었다우리 곁에는그런 사람이 꼭 있다그래서 산다실핏줄이 동맥보다 못 하랴.숙자라는 사람은 개인인 동시에 죽도시장 대부분의 상인을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들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편향되지 않고 묵묵하게 인생의 서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오페라보다 화려하다. 그러나 결코 사치스럽지 않다. 검소하면서도 조금도 누추하지 않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08-21

과메기

빨랫줄에 내어 걸린청어며 꽁치는먼 바다의 소리를그 공복에다 차곡차곡 담는다바람에 걷어차이고햇살에 희롱당하고 나면슬슬 부아가 치밀어몸이 굳는다분노도 절망도 짜내어결국엔 건조한 바다가 된다부질없는 저항의 시간을 보내며그렇게 기름기를 온통 빼고도저 반짝거리는 최후의 형해(形骸)는차라리 부활의 깃발이리라과메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우리의 미래가 된다죽음과 주검을 극복하는향기가 된다마르고 뒤틀려도좋은 음식이 되어당신과의 입맞춤약간 비릿하나죽을 때까지의 여운이 되어.홍어가 있듯 과메기도 있다. 개복치는 또 어떤가. 존재를 설정하고 앞과 뒤의 배경을 설명하는 언어로서 과메기는 불세출의 독보적인 명사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최초의, 최후의 물건이자 명징한 상징이다. 포항의 역동성은 이 짜부러진 생선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시작된 듯하다./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08-07

포항에 가면 심장이 먼저 나부낀다

포항에 가면펄럭이는 것은 깃발만이 아니다포항에 가면 심장이 먼저 나부낀다죽도시장 흐릿한 백열등 아래서돈보다 많은 삶의 가치를 얻어먹었다송도에 가면 그리움이 너무 넘쳐서태평양을 향해 코를 풀었다갈매기가 톡톡 찍어주던 느낌표아직 눈썹에 남아 있다포항역 육교에서 보랏빛 칸델라 불빛을 보며이별도 배웠다기차는 떠나도 사람은 남는다포항에 가면추억이 너무 많아서 몸살을 앓는다첫사랑 기다리던 골목길에서껄렁하게 앉아도 보았지코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인생공부돌아오지 않을 시간의 강을 건넜지만포항에 가면객지의 설움이 설탕이 된다포항에 가면사람이 된다.비록 포항을 떠나 살고 있지만 항상 포항은 심장의 안쪽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서 자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나에겐 항상 고고(高高)하고 고고(孤孤)하다. 보수적이지만 당돌하다. 골목길 끝에서 돌을 던지고 도망가는 계집애 같은 심성이 늘 팔팔하게 살아 있다. 동해바다가 그 배경이리라.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