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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사 후기

나루끝을 지키고 선 느티나무. 보금자리를 옮겼다. 나는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거처를 옮기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살던 집이 하천 확장 공사로 잠기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 주변에 살던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같은 동네로 함께 가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조용한 시골 동네에 살다가 도시로 나왔다. 이사 할 집의 위치가 기찻길 옆이란 소문을 듣고 왔는데, 와보니 숲이었다. 도시숲이라 산속 깊은 곳처럼 새소리 물소리 가득한 곳은 아니지만, 가까운 산에서 산비둘기가 날아와 가지에 앉아 울어 주니 조금은 위로받는다.새로 자리 잡은 동네는 나루끝이다. 포항여고 입구이며 수도산으로 가려고 길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는 신호등이 내 발치에 있다. 새벽엔 아침잠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고, 해가 뜨기 시작하면 머리도 덜 마른 여고생들이 조잘거리며 발걸음을 서두른다. 이 길로 걸어서 출근하는 부지런한 직장인들의 바쁜 걸음걸이와 달리 포항초등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은 발밑에 개미집을 보느라 느즈락 거리다 신호가 바뀌려 하면 후다닥 뛰어간다. 조용한 시골의 아침보다는 시끄럽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이 잘 간다는 장점도 있다.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동빈내항 근처의 학산역까지 철로가 놓여 있어서 기적 소리로 아침을 시작한 곳이다. 북쪽으로는 우현동에 유류 저장고가 있어서 포항역을 지나서도 철도가 이어져 있다가 걷어내고 그 부지에 숲이 만들어졌다. 유성여고 앞까지 이어진 산책로 곳곳에 마련한 벤치는 사람들이 시간의 여유를 부리는 곳이다. 수런거리는 입김이 내가 선 자리까지 달려와 내 겨드랑이에 쉬던 매미가 떨림을 멈추기도 한다.포항시가 노선폐지로 없어진 철도 구간을 걷기 좋은 숲 공간으로 만든 것은 2009년부터라 한다. 우현동 유류 저장고에서 서산터널을 지나 신흥동 안포 건널목까지 나무를 심고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다. 그 길가에 나도 한 자리 꿰찼다. 특히 옛날 우현동 철길 일대는 연탄공장까지 있어 도시의 후미진 곳이었는데, 우리 친구 스물일곱 그루가 철길숲에 이사 오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그리고 2015년 KTX 신역사로 포항역을 이전해 기존의 포항역에서 효자역까지도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도가 되니, 이 구간에서 역시 레일을 걷어내 장미를 심고 조형물을 설치해, 기차가 걷던 길이 시민들이 산책하는 숲이 됐다.나와 친구들이 나루끝으로 이사 하는데 힘을 보태 준 이들은 기계면 봉계1리 선래 마을 사람들이다. 그 동네 입구에서 300년이나 마을 지킴이를 했던 내 경력을 인정해서 하천 확장 공사에 휩쓸려 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겼다. 내 어깨에 올라 미끄럼을 타며 어른이 되고, 여름이면 내 그늘에 와서 더위를 잊던 어르신들이 앞장서서 살려냈다. 이 뜻깊은 사연을 내 발 앞에 동그란 비석에 새겨넣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키 큰 우리가 언제 불쑥 솟아난 것인지 궁금하지 않도록 말이다.2010년 5월 3일 이사를 왔으니 벌써 십 년이 훅 지났다. 친구들도 근처에 띄엄띄엄 자리를 잡아 뿌리를 내렸다. 십 년이란 시간 동안 메타세쿼이아 친구들이 수북하니 이사와 줄지어 서 있어 열병식하는 군인들처럼 늠름하다. 덕분에 동네가 든든하다. 안심하고 노랗게 둘레에 금계국이 피었다. 데크에는 수로가 있고 사이사이 둥그런 연못도 있어서 연꽃 화분이 차지하고 앉았다. 언제 피었다 지는지 보려고 길게 그림자를 그쪽으로 드리운다.남한에는 1천년 이상 살아있는 화석인 노거수가 64그루 있다고 한다. 그중 25그루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 그중 13건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삼척 도계읍에는 1천년을 사신 할아버지가 살고,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에는 800살인 당숙이 사신다. 모든 노거수 어르신들이 내가 살았던 기계면처럼 시골에 사신다. 멀리서도 그 풍채를 알아볼 수 있게 품이 넓다. 그 모습만으로 이 동네가 유서 깊은 곳이라는 설명을 대신하는 안내장이다.나는 나루끝 도시숲의 팸플릿인 느티나무다. /김순희(수필가)

2021-09-05

울진의 미래 100년을 설계하다

전찬걸울진군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펜데믹 상황이다. 그동안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울진군도 예외는 없었다.지난 8월 20일부터 확진자가 이어져 나왔다.군은 지역확산과 감염고리를 끊기 위한 선제적 선별검사 등 적극적이고 신속한 조치를 취하며 차근차근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뒤돌아보면 민선7기 시작과 함께 지난 시간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기간이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지역경제는 끝없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태풍 미탁, 연이은 코로나19사태, 그리고 지난해 두차례의 태풍까지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맞닥뜨려야 했다.하지만 비온 뒤 땅이 굳어지듯이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며 군민들의 단합된 힘을 새삼 깨달았고, 위기의 순간순간을 견디며 앞으로 울진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다. 긴 고민의 결과, 지금 울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원전에 의존하던 지역경제가 자립할 수 있는 기반 마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울진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시설을 활용한 3가지 테마로 미래 100년 울진의 청사진을 그렸다.첫 번째 테마는 울진의 청정한 자연과 잘 갖추어진 스포츠 인프라, 치유 시설들을 활용한 치유, 힐링, 스포츠 관광 활성화이다.현재 운영 중인 금강송에코리움과 함께 백암치유의 숲, 해양치유센터 조성 등으로 치유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리나라 상위 6% 자연생태계 우수지역인 왕피천과 불영계곡 일원의 국립공원 신규지정을 추진 중에 있다.여기에 울진마린CC, 남울진스포츠센터, 울진실내체육관 등 관내 체육시설 사업 등을 마무리해 스포츠와 관광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인프라를 확충하고, 각종 스포츠대회 개최와 전진 훈련팀 유치로 치유와 힐링 그리고 스포츠가 하나의 테마로 연결돼 울진 관광산업에 새로운 길을 마련해 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미래 울진 100년을 위한 두 번째 테마는 원자력을 이용한 수소산업의 선점이다.오래전부터 수소생산 국가산단(수출실증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온 결과, 지난 2일 경북도 ‘K-원자력 추진전략’에 울진의 그린수소 특화 국가산단과 경주의 SMR특화 국가산단 조정을 핵심전략으로 낙점했다.울진군은 미래 에너지산업을 선도하고, 지역에는 경제적 효과와 고용창출의 기회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되는 그린수소 생산실증단지 조성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갈 예정이다.마지막 세 번째 테마는 112km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울진 바다를 활용한 해양관련 연구센터 유치 및 신산업 육성이다.수중글라이더 핵심장비 기술개발 운영센터 구축은 지난해 4월 해양수산부 공모에 최종 선정돼 국비를 확보하고, 2024년까지 기술개발과 운용센터 구축을 완료할 계획이다.환동해 심해 연구센터는 기본계획 수립 및 타당성 분석을 위한 용역을 추진 중에 있다.이외에도 해양 디지털 i4.0 재해·안전 감측망 구축, 왕돌초 국가 해중공원 벨트 조성 등의 사업을 진행 해 나갈 예정이다.울진군은 이러한 해양관련 신산업 육성을 통해, 대한민국 해양과학 중심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주춧돌로 삼고자 한다. 울진은 지금 차별화된 관광산업으로, 미래 에너지산업으로, 그리고 해양과학의 중심지로 미래 100년을 설계하고 있다.희망을 품고 뿌린 울진 미래를 위한 씨앗들이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초록잎을 내밀기 시작했다.앞으로 차근차근 준비하고, 하나하나 착실하게 키워, 든든한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열매 맺기를 바란다.그 길에 끝까지 함께 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2021-09-05

멍하니 앉아서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14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멍때리기’는 ‘멍하게 있기’란 의미의 신조어다. 매년 이어지다가 지금은 코로나19로 중단되었단다. 대회를 기획한 비주얼 아티스트 웁쓰(예명) 양은 이렇게 취지를 설명한다. “어느 날 갑자기 번아웃이 왔어요. 작업을 해도 아무런 능률도 오르지 않고 그렇다고 일을 놓으면 죄책감 때문에 잠을 못 이뤘죠. 그러다 하루는 철저히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제야 일이 손에 잡혔죠. 다른 사람들도 잠깐 자신의 삶을 멈추고 돌아보는 기회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대회는 90분 동안 진행되는데, 평가 항목은 기술점수와 예술점수 두 가지다. 기술점수는 10∼15분마다 심박수를 재는 것으로, 안정적이고 편안한 심박수를 가진 참가자가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 예술점수는 대회를 지켜보는 시민들이 ‘멍 때리기’를 가장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스티커를 붙여 평가한다.“멍때리는 걸 시간 낭비로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대회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어요.”옵쓰 양의 이 말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미국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컬은 ‘아무런 인지활동을 하지 않을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 된다’는 걸 알아냈다.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이 영역을 DMN(default mode network)이라 명명하고, 이는 마치 컴퓨터를 리셋(reset)하게 되면 초기설정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DMN은 잠을 자는 동안이나 몽상을 즐길 때처럼 외부의 자극이 없을 때 활발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의사이자 뇌 영상 전문가인 스리니 필레이 박사도 그의 저서 ‘Thinker Dabble Doodle Try’에서 멍하게 있는 것이 인지적 평온을 가져오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창의성을 키워주고, 기억력을 강화시키고, 목표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고 설명한다. 더욱 효율적인 아이디어와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멍하게 있는 시간, 즉 ‘비 집중 모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날마다 들판으로 나가 한참씩 멍하니 앉아 있곤 한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벼논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이나 풀꽃이 피어있는 것, 잠자리가 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일부러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오관을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몸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나 떠오르는 생각도 그대로 내버려둔다. 명상이나 좌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잡념을 떨치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아무런 목적이나 의지가 없는 휴식일 뿐이다. 어떤 경지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두뇌의 휴식을 바라는 것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생명의 충일감 같은 걸 누린다고나 할까.그렇게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세계에 대한 왜곡이나 편견이 없어진다. 그 어떤 것과도 이해관계로 얽히지 않고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속하지도 않는다. 부질없는 욕심이나 망집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와 평온을 가질 수 있다.

2021-09-02

한국 PC의 선구자들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코로나 사태로 온라인 회의가 일상화 되고 있다. 강의도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TV로 중계되는 연예행사들도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삶에 필수적인 것이 PC(개인용 컴퓨터)이다.필자가 PC를 처음 본 것은 미국 유학 초창기인 80년대 초반이다. 사실 애플은 1978년에 애플2라는 PC를 내놓기는 했으나 IBM이 1981년 PC를 만들어 빌 게이츠가 만든 MS-DOS라는 운용체제를 내놓은 것을 최초로 여긴다.유학생들은 80년대 중반 PC를 구입하여 숙제나 프로젝트에 사용했다. 당시 PC는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는 방식이고 속도도 느렸지만 집에서 컴퓨터를 쓴다는 신기함으로 호기심의 상징이었다.사실 PC에 앞서서 1945년 미국에서 개발된 인류 최초의 컴퓨터 애니악(ENIAC)에서 진화된 IBM 대형컴퓨터를 도입한 건 1967년 경제기획원이다. 당시 컴퓨터를 옮기는 데에만 여러 대의 트럭이 동원될 만큼 대형 컴퓨터 시절이다. 한국에 이런 PC와 컴퓨터를 도입하고 정착한 선구자들이 있다.8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PC 회사를 설립한 이용태 회장, 70년대 컴퓨터를 도입한 이주용 회장, 정보기술(IT) 서비스 회사를 창립한 김영태 이사장, 정보담당중역(CIO) 롤모델 이강태 명예회장이 그 주인공들이다.정부는 이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4월 과학정보통신의 날에 IT 산업 분야에서 처음으로 특별공로상을 수여했다.필자가 30년 넘게 활동해온 한국경영정보학회(KMIS)에서 이들은 감동적인 기조연설, IT 서비스 비전 특강 등을 통해 우리 IT 산업 역사를 반추하는 계기를 주었다.IT 산업 태동기 때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으로 역경을 헤쳐나간 이런 선구자들은 지금과 같이 한국이 IT 글로벌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특히 이용태 회장에 주목한다. 얼마전 포스텍에서 강연하던 이 회장은 꼿꼿이 서서 내내 강연하면서 팔순의 노익장을 과시했다. 대한민국 벤처기업인 1호, 한국 PC의 아버지, 초고속인터넷의 선구자 등 이용태 회장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그럼에도 최근에는 ‘인성교육 전문가’이자 유학문화 연구단체인 박약회(博約會) 회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구순(九旬)이 가까운 나이에도 직접 현장 강의를 위해 전국을 다니고 있다.정보기술 분야의 선구자였던 그가 인성교육에 빠진 이유는 “인성교육은 흔히 입에 올리면서도 누구 하나 제대로 실천하기 어렵다”며 “훌륭한 기술도 좋지만, 훌륭한 사람을 만든다는 일도 중요하다”고 거침없이 대답했다.사실 이 네분의 IT 선구자들은 은퇴 후에도 개발도상국의 IT 발전, 청소년 대상 무료 소프트웨어(SW) 교육 및 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또한 정보화 확산 및 IT 산업 발전을 위해 후학 양성과 저술 활동에 열중하면서 이 회장처럼 인성교육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IT 산업에서는 처음으로 특별공로상을 받은 이들 네 명의 선구자들에게 존경을 보내며 은퇴 후에도 사회에 보람있게 봉사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2021-09-02

정치판의 역선택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역선택(adverse selection)은 시장에서 거래를 할 때 경제주체 간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쪽이 불리한 선택을 하게 돼 경제적 비효율이 발생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경제적인 분야에서 일어난다.예를 들어 중고차 구매자들이 중고차의 평균적인 품질 수준만 알고 있을 뿐 개별 차량의 품질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가정한다. 반면, 중고차 판매자들은 개별 차량에 대한 품질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구매자와 판매자 간 정보비대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구매자들은 하자가 있는 중고차를 높은 가격에 구매하게 될 것을 우려해 평균 이상의 가격을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반대로 상태가 좋은 중고차를 보유한 판매자들은 평균보다 높은 가격에 중고차를 판매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고품질의 중고차들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품질이 떨어지는 중고차들만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제적 비효율이 발생한다. 보험회사도 마찬가지다. 보험회사가 개인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정보를 얻는 데 큰 비용이 든다고 하자. 이 때 보험회사는 일률적인 평균보험료율로 계약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위험도가 낮은 보험가입자는 보험회사에 자신을 사고율이 낮은 주체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보험회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결국 사고율이 낮은 ‘양질’의 보험가입자는 시장으로부터 제외되고, 사고율이 높은 ‘불량’한 보험가입자만 보험에 가입하는 역선택이 이루어진다. 정보 비대칭 때문에 일어나는 역선택은 세상 어디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다.현재 대선 정치판에서 회자되는 역선택 논란은 제1야당인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에 상대당인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를 포함시킬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선두주자인 윤석열 전 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역선택 방지조항을 넣은 여론조사로 경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홍준표·유승민 등 나머지 후보들은 “유권자들의 교차투표 의지를 무시한다”며 역선택 방지조항 도입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어느 쪽 주장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릴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국민들은 자신의 여론조사상 이해득실에 따라 경선룰에 대해 찬반논란을 펼치는 행태가 마뜩잖을 뿐이다. 어떻든 국민의힘 당헌당규에 대선 경선룰을 수정할 권한이 있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역선택 방지조항을 채택하든 아니든, 또는 중재안을 채택해 시행하면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각 후보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무너져가는 나라 경제를 살리고, 집없는 서민의 눈물을 닦아줄, ‘사이다’같이 속시원한 정책·공약을 밝히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다시 심어주는 일이다.삼성그룹이 지난 2012년부터 국내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진행중인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드림클래스’라고 명명한 이유도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꿈’이 소중하기 때문일게다. 과연 누가 우리 국민들이 꿈꾸는 나라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내년 3월 대선에서의 선택이 역선택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2021-09-02

조손가정의 비극

최근 이혼이 늘면서 65세 이상 조부모와 만 18세 이하 손자녀들이 함께 사는 이른바 조손가정이 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조손가정의 아동 및 청소년 수는 무려 5만9천여 명에 달하고 있다.여성가족부가 10년 전 조사한 자료에는 조손가정 형성의 53.2%가 부모의 이혼이나 재혼으로 조사됐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다면 조손가정은 앞으로 더 급격히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조손가정은 경제활동이 떨어지는 노령의 조부모와 살고 있어 경제력이 일반가구에 비해 매우 취약한 특징이 있다. 연소득 1천만 원 미만의 조손가구가 6.9%라는 통계청 자료가 있으나 경제적으로 보면 대다수가 최하위층 수준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면 된다.부모와 떨어져 양육되기 때문에 아동들이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고 사회적 박탈감도 크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신도 많이 잠재돼 있다. 경제적 곤란까지 겪으니 성장기 아동이나 청소년이 받을 스트레스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게다가 노령인 조부모의 건강 악화와 세대차에 따른 손자녀와의 갈등도 조손가정의 불화 원인이 된다. 대구에서 발생한 고교생 형제의 친할머니 살해사건은 매우 충격적이다. “할머니의 잔소리와 심부름에 짜증이 났다”는 말에 그저 말문이 막혀 멍할 뿐이다.비좁은 공간에서 마주보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내는 조손가정 내의 갈등이 이번과 같은 비극을 부를 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코로나19 이후 갈 곳이 없어 갇혀 지내는 우리의 일상적 패턴이 더 자극제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멍하다.조손가정의 문제, 우리 사회의 관심만이 이런 비극을 줄일 수 있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9-02

국민의힘 선관위, 중립성 잃으면 경선판 깨진다

국민의힘 대선후보들이 경선룰을 두고 지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범여권 지지층을 여론조사에서 배제하는 ‘역선택 방지 조항’을 두고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사생결단의 배수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당내에선 “이러다 경선판이 깨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당 선관위에서 해법을 마련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홍원 선관위원장의 중립성 문제가 앞으로도 갈등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국민의힘 선관위는 지난 1일 전체 12명 후보들의 대리인을 불러 역선택 방지조항에 대한 공식 견해를 들었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로 양분된 후보 대리인들이 캠프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초강경 태세를 고수함에 따라 갈등 봉합에 실패했다. 역선택 방지조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윤석열·최재형·황교안 후보 측은 “역선택을 막는 것이 본선 경쟁력을 높이고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길이다. ‘대깨문’에게 우리 운명을 맡길 수 있느냐”는 입장이다.반면, 홍준표·유승민·하태경 후보 측은 “역선택 방지조항을 넣자는 것은 반쪽 국민들만 데리고 경선을 하자는 것과 똑같다. 경준위와 최고위에서 추인한 안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다면, 결국 경선은 파행으로 가고 당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각 후보 측이 역선택 조항에 대해 초강경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여론조사 대상에 여권지지층을 넣느냐 마느냐에 따라 후보별 지지율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여야 대선후보를 모두 포함한 여론조사에서는 윤석열 후보가 크게 앞서고 있지만, 국민의힘 후보만 두고 조사를 하면 윤 후보와 홍준표·유승민 후보의 격차가 크게 좁혀진 결과가 많이 있다.국민의힘 선관위는 여론조사 전문가들을 상대로 의견을 청취한 뒤 다음 주 초에 최종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사실 정당에 대한 국민 선호도가 명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역선택 방지조항을 둔다고 해서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여권지지층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면 이 조항은 무용지물이다. 당헌·당규와 관행 등을 참고로 선관위가 신속한 결정을 하면 되지, 의미 없는 룰을 두고 지루하게 공방전을 끌고 갈 필요가 없다. 선관위가 중립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현명한 결론을 내리면 된다.

2021-09-02

추석특별방역대책, 명절 의미 살리는 지혜를

정부가 대규모 인구인동이 예상되는 추석 기간에 대한 코로나19 특별방역대책을 3일 발표한다. 2년째 이어지는 코로나19 상황 속에 또다시 언택트 명절을 맞이해야 하는 시민의 마음은 착잡하다. 지난해 추석보다 더 심각해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를 생각하면 엄격한 방역규칙이 반드시 적용돼야겠지만 2년째 이어지는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 명절에 대한 아쉬움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추석에도 고향을 찾지 않은 자녀를 이번 추석에도 얼굴을 못 본다고 생각하면 마음까지 울적하다. 또 요양시설이나 의료기관에 부모를 모신 가족들은 지난 명절에 이어 또다시 비접촉 면회를 해야 하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정부는 오늘 추석특별방역대책을 포함한 거리두기 조정안을 확정 발표한다. 전문가 자문을 통해 확정하는 이번 거리두기 조정에는 현 단계의 거리두기가 한달간 더 연장되고 추석연휴 전후 2주간 가족모임 기준을 일부 완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정부 대책이 이동자제를 원칙으로 하는 등 작년 추석 명절과 다르지 않으나 백신 접종률이 높아진 점을 고려, 백신 접종자에 대한 인센티브 적용 등이 확대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는 가급적 고향, 친지 방문을 자제해달라는 당국의 요청에 따라 국민의 70%가 고향 방문을 자제하는 분위기여서 명절 기분이 나지 않았다. 올 설 명절에 이어 언택트 문화가 이어져 오면서 고유명절이 갖는 의미가 크게 퇴색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이도 있다. 추석명절은 결실의 계절을 맞아 조상에 감사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들을 만나 정을 나누는 것이다.벌써 2년째 코로나 유행 속 명절을 맞는다. 지난 명절보다는 좀 더 명절 기분을 낼 수 있는 명절이 됐으면 한다. 코로나 4차 대유행으로 하루 2천명 안팎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으나 방역과 명절을 양립시키는 정부의 묘책이 필요하다. 국민에게 일방적 방역만 고집하는 방역대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대책이다.언택트의 장점을 살리고 명절 기분도 살리는 절묘한 대책이 나왔으면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지쳐 있는 국민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대책이면 더 좋다.

2021-09-02

인연

배문경수필가 창밖에는 장맛비가 내린다. 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을 엘렌 그리모의 피아노로 듣고 있다. 귀에 익숙한 선율에 조금의 슬픔과 고요히 차오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선율 때문일 수도 있고 아련한 시칠리아노 리듬 때문이거나 누군가를 떠나보낸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작가 최인호를 본 적이 있다. 2011년 말께 동리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 경주를 방문했을 때였다. 작은 체구의 그가 위트가 섞인 대화를 하며 식장으로 들어설 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더더욱 침샘암을 앓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연단에 서서 수상소감을 밝히며 글 잘 쓰는 작가인 자신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 또한 한 사람의 독자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오년의 투병이 그를 기다렸고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내고 평화로워졌을 사후에 책으로만 그의 문학세계를 읽을 수 있었다.십여 년이 지난 어제, 지인 몇몇이 모여 그의 에세이집 ‘인연’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암 진단 후 인생이란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을 통해 얻고 기억해낸 추억을 가감 없이 혹은 이야기 형식으로 남겨 둔 내용이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연이 만들어지고 흩어지는지를 보았다. 역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천재작가답게 편안하고 솔직담백한 글들이 길고도 짧은 내용들로 가득 차있었다.이름만 대면 알만 한 사람들로 빼곡했다. ‘고래사냥’으로 의기투합했던 배창호 감독과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안성기 배우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다양한 감성을 전달했다. ‘바보들의 행진’, ‘깊고 푸른 밤’과 함께 그 시대를 대변할 아이콘들이 된 영화들을 만나보니 역시 작가의 끼와 입담이 느껴진다. 청바지와 장발의 그 시대가 실로 그립기까지 하다.인연만큼 인생 전반을 휘어잡을 단어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타로 나뉜 인연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정자와 난자인 부모를 통해 이 땅에 삶의 의무를 띠고 태어난 이후부터 나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만들어지는 혈연관계와 태어난 땅에 의해 국가가 결정되니 인연이란 얼마나 큰 범위며 나를 규정짓는 잣대일까. 침략과 전쟁을 치르며 고통 받던 대한민국이 가난을 벗고 발전해가는 나라로 거듭남에 이 또한 감사한 인연이다.며칠 전, 오년을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직장을 관두게 되었다. 나간다고 할 때는 붙잡으려고 했지만 일이 힘들어 몸피가 반쪽이 된 모습에 잡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붙잡는 손에 힘이 풀렸다. 그래도 빈자리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곳곳에서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르자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람 불고 비 오는 시간들을 함께 견딘 날들이었다. 잠시 공원을 거닐며 지난 시간을 회상해보니 인연이 준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느끼게 했다. 인연은 어둡고 캄캄한 바다라는 인생을 항해할 때 어둠속에서 길을 제시해 주는 등대인지도 모른다. 그 등대를 벗 삼아 힘든 자갈길이며 진흙길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을 수 있었다.최인호는 전찻길을 건너다 철로에 떨어진 동생의 벗겨진 꽃신을 집어 들다 전차에 무참히 밟힌 어린 누이를 ‘죄가 있다면 이 가엾은 누이는 이 추악하지만 그래도 아름답고, 이 야비하지만 그래도 거룩한 생을 스스로 포기했다’라고 표현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쓴 작가의 깊은 마음속의 아픔이 아련하게 통점을 자극한다.결국 우리는 삶의 고리를 풀고 자유를 찾아 한 마리 새로 날아오를 때까지 얽히고설킨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더러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잡거나 더러 빈손에 좌절하지 않는 생애를 만든다. 하늘 높이 날던 조나단도 혼자 높이 멀리를 향해 날갯짓을 했을 때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래서 함께 할 때 더 많은 힘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나와 당신의 행보이기도 하다.나른한 봄날의 하루, 한 여름의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음악 속에서 느껴진다.아름다운 삶을 함께 나누어보지 않으시렵니까?

2021-09-01

어우렁더우렁 저 등나무

옛날 아주 먼 옛날, 신라 시대 현곡면 오류리에 열일곱, 열아홉 자매가 살았습니다. 청등·홍등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자매였습니다. 자매는 마음씨도 고와서 온 마을에 칭찬이 자자했습니다.옆집에 씩씩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매는 전쟁터로 떠나는 청년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았습니다. 언니는 장독 뒤에 숨어서, 동생은 담 밑에 숨어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자매 둘 다 청년을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얼마 뒤,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자매는 너무나 슬퍼 ‘용림’이라는 연못으로 갔습니다. 연못가에서 목 놓아 울던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연못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듬해 봄, 연못가에 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는 한 나무처럼 서로 뒤엉켜 자랐습니다. 나무는 봄이면 청등·홍등 같은 예쁜 꽃을 피웠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매가 죽어서도 짝사랑한 청년을 위해 ‘등불’을 달았다고 믿었습니다. 그 꽃을 ‘등꽃’이라 이름 짓고 얼키설키 자라는 나무를 ‘등나무’라고 불렀습니다.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청년은 자매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던 자매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시렸습니다. 청년은 하루하루 죄인의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결국, 청년도 용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바친 사랑에 목숨으로 보답했습니다.청년이 죽은 뒤 연못가에 팽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청년의 화신이라 믿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등나무가 청꽃·홍꽃을 피웠습니다. 두 등나무는 힘껏 껴안듯이 팽나무를 감고 올라갔습니다. 세상의 어느 사랑이 저리 지순하며 죽어서도 껴안을 만큼 간절할까요.희붐한 새벽빛을 물리고 등나무·팽나무 아래 서 있습니다. 해가 천 번이나 뜨고 졌는데, 두 나무는 줄기를 줄기차게 뻗었습니다. 팽나무는 몸통 껍질을 떨어내며 가지를 쑥쑥 밀어내고 있습니다. 팽나무가 제 가지에 얼마나 많은 마음을 쏟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굵은 가지와 작은 가지가 얼키설키 어울립니다. 자매와 함께 현생에서 어우렁더우렁 살았다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요.이제는 등나무를 봅니다. 등나무는 팽나무보다 줄기가 가느다랗습니다. 그런데 줄기는 작지만 옹골차 보입니다. 등나무 줄기를 만져 보았습니다. 간절함일까요, 절박함일까요, 등나무 줄기는 꼿꼿하면서도 부드럽게 팽나무를 힘껏 타고 올라갑니다.전설의 자매는 한 남자를 놓고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하며 애달픈 사랑을 안으로 삭히려 애를 썼습니다. 갈등의 한자어는 葛(칡)과 藤(등나무)입니다. 칡과 등나무 줄기는 감아올리는 방향이 다릅니다. 칡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등나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습니다. 갈등은 서로 얽히듯이 뒤엉켜 있는 상태를 말하지요.등나무의 꽃말은 ‘사랑에 취하다’입니다. 알고 나니 사랑에 취한 자매 청등·홍등이 떠오릅니다. 서로의 사랑을 지켜가며 한 발 한 발씩 자랐지요. 그렇게 등나무는 약한 부분을 이끌어주며 곱고 아름다운 꽃을 주저리주저리 피워냈습니다. 자매는 어느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가 나누는 사랑을 지금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우리는 가끔 후회합니다. 내 감정에 너무 솔직하여 옆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상처를 주는 말은 한쪽에서 한쪽으로 내뱉는 화살과 같습니다. 툭 내뱉지만 맞은 사람은 몹시 아픕니다. 피를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사랑해서 솔직하다고 말합니다. 이순혜수필가 나 또한 그렇습니다. 굽은 나무가 마지막까지 산을 지키고, 고향 하늘 아래 산다는 이유로 많은 말을 거침없이 뱉었습니다. 한 가지에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상처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는 구실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때로는 밉고 때로는 보기 싫었다는 게 솔직한 말입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습니다. 갈등하지만 한데 어울려 끊임없이 서로를 타고 등나무 같은 사람.등나무는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다. 나무 지지대에 등을 대고 살아갑니다. 어느 시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대의 등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등 돌리는 아픈 사연이 있었나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추억을 쌓은 벗들이 어깨동무한 등, 아버지의 든든한 등, 우당탕했던 형제들의 등을 생각해 봅니다.등신(藤身)처럼 줄기와 가지가 뒤엉켜 살더라도 등지지 말고. 등을 대면서. 그렇게 어우렁더우렁 살아야겠습니다.

2021-09-01

대안 학교 학생의 간절한 편지와 답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선생님, 학생 앞으로 책이 도착했습니다.”처음에는 주말 동안 학생이 집에 두고 온 학습 교재 등을 집에서 보냈구나고 생각했다.“지난주에는 8권이, 이번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74권을 보내왔습니다.”8권, 74권, 출판사라는 말에 필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이 있는 곳을 보았다. 필자 눈이 닿은 곳에는 책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책을 정리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행복했다. 의아해하는 필자에게 선생님은 책이 도착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올해 1학기 초에 실시한 학생회 선거에서 전교 부학생회장에 출마한 ○○○ 학생이 학교 도서관에 신간 도서를 채우겠다는 공약을 발표하였다. 평소 이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고민하던 학생은 방학 때 청소년 도서 출판사에 책 기부를 부탁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하게도 학생의 간절한 소리를 들은 출판사에서 학생의 부탁에 화답한 것이다.이야기를 다 듣고 필자는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학생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나아가 학생의 외침에 답을 해준, 또 학생에게 아직도 이 나라에는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 출판사들이 존경스러웠다.지난주 몇몇 출판사는 학교로 직접 전화를 해서 학교로 보낼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학생의 요청에 기꺼이 화답해준 출판사는 ‘특별한 서재’와 ‘사계절 출판사’다. 절망과 불신만 가득한 사회에 희망과 믿음의 불을 쏘아 올린 학생이 보낸 메일 전문을 인용한다.“산자연중학교에 책 기부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산자연중학교 전교 부회장 ○○○입니다. 저는 귀사에서 출판한 책들을 즐겨 읽는 학생입니다. 귀사의 책을 기부받고 싶어 메일을 드립니다. 저희는 대안 학교이기에 정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 도서들을 살 예산이 없어 도서관에 새로운 책이 채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번 같은 책을 읽어 책이 너덜너덜해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귀사의 도서를 ‘산자연중학교’에 기부해 주신다면 보다 다양한 책을 접하고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앙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물론 신간 도서를 무작정 기부해주십사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판 과정에서 생기는 파쇄본 또는 폐간 도서를 기부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파쇄본 또는 폐간 도서를 기부해 주신다면,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고, 귀사가 파쇄본 또는 폐간 도서를 처리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버려지는 파쇄본 또는 폐간 도서로 저희의 지식을 채울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생각합니다. 메일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학생들은 새로운 책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민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우리 교육은 언제 학생의 외침에 화답할 수 있을까?

2021-09-01

탈레반과 빨치산, 같은 점과 다른 점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미군이 철수한 뒤 4개월 후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점령하였다. 카불 공항에는 아프칸의 정부군이나 미군, 여러 외국기관에 협력했던 아프칸인들의 탈출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탈레반 정권의 무자비한 학살 장면을 떠올리며 필사적인 탈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미군 비행기 바퀴라도 잡고 탈출하려던 난민 행렬 앞에 눈앞이 멍멍해졌다. 이러한 환란 중 IS의 자살폭탄에 의해 미군을 포함한 9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 백명이 부상당했다. 아프칸 탈레반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듯하다.탈레반은 1994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결성된 이슬람 수니파 무장 반군 조직이다. 아프칸에는 같은 이슬람이지만 성격이 다른 여러 반군 조직이 혼재한다. 이번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2001년 실권한 후 20여 년간 미군과 정부군에 대항해온 반군조직이다. 이들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신봉하지만 겉으로 온건 노선을 표방한다. 이에 비해 알카에다 반군은 지도자 빈 라덴 사망 후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국제 연대를 주장하는 조직이다. 이번 폭탄 테러를 자행한 IS는 자폭, 참수 등 가장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는 조직이다. 이처럼 모두 같은 이슬람 반군이지만 전략전술의 차이가 커 하나로 통일하기는 어렵다.아프칸의 탈레반 정권은 6·25 전후이 땅의 빨치산을 회상케 한다. 빨치산은 친공 성향의 소수 게릴라 무장조직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도 8·15 해방공간과 6·25 전쟁 시 소수의 젊은이들이 빨치산 활동에 가담하였다. 남쪽의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험악한 산악은 이들의 활동 거점이 되었다. 6·25 전후 빨치산은 정부군과 경찰에 대항하여 산악 전투를 전개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 시기에도 이 땅에는 항일 독립운동 무장 조직이 많았다. 국내의 무장단체 광복회는 친일 세력을 처단하였고, 만주의 의열단과 상해의 한인애국단은 국내외를 넘나들며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좌우익을 가릴 것 없이 일제에서 해방하려는 민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일제는 이들을 반군으로 간주하였다. 6·25 전후 한반도의 빨치산은 공산주의적 무장 조직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이태의 ‘남부군’은 당시 빨치산의 실상을 그리고 있으며 차범석의 ‘산불’은 빨치산의 비극을 극화한 우수한 작품이다.우리 주변에는 아프칸 탈레반의 참극을 보면서 우리의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나라가 극도로 혼란하며 아프칸의 비극이 우리에게도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베트남의 빨치산 격인 베트콩은 월맹군과 합세하여 베트남을 공산화 시켰다. 다행히 우리는 6·25 전후의 빨치산은 소탕했다. 탈레반, 빨치산, 베트콩의 공통점은 외세의 지배, 정치적 혼란과 부정부패의 공간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프칸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차량 4대에 실은 돈과 함께 국외로 탈출해 버렸다. 핵심 지도층의 비리가 반정부 세력의 온상이 된 것이다. 우리의 정치 경제의 발전 수준은 이제 탈레반 같은 무장 세력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

2021-09-01

겉옷도 줘 버리라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예수 시대에 어떤 사람이 속옷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여 속옷을 빼앗기게 되었다. 유대인은 두 가지 옷을 입고 다녔는데 속옷은 알몸을 가리기 위한 옷이고 겉옷은 덮고 자는 이불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옷이 흔하지만 당시에 옷도 담보물이 되거나 전당물이 되는 품목 중에 하나였다. 이에 대한 율법의 규정은 극빈자의 옷이 전당물이면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그 옷을 돌려주라고 되어 있다. 알몸을 가리고 덮고 자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의한 자들은 옷을 돌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벌금으로 농산물 중에 포도주를 받아갔다. 정의사회를 구현하려 했던 아모스는 당시 사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불의한 자들은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워자고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다.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지 말고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꾸지 말며,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했다. 극빈자에 대한 담보물을 돌려주는 것이 사회통합을 위한 일이기에 율법으로 까지 규정하였는데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예수 시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속옷을 전당 잡았다가 갚지 못해 고발당하고 속옷을 빼앗기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연히 율법대로라면 해가 지기 전에 그 옷을 돌려받아야 할 것인데 예수는 채무자에게 황당한 말을 한다. “겉옷도 줘 버려라” 예수의 말대로 겉옷을 줘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채권자는 한 손에 속옷을, 한 손엔 겉옷을 들고 멋적게 서 있을 것이다. 채무자는 알몸을 가리지 못한 수치스런 몸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면서 이제 남은 것은 벌거벗은 몸뚱아리 뿐이니 다음에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이런 장면에서 방청객들은 뭐라고 말할까? “아무리 그래도 옷까지 가져가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율법에는 저당물을 돌려주며 심지어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라고 했는데.”유대인들의 전통에는 벌거벗은 자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벌거벗게 한 자가 부끄럽다고 했다. 앗수르의 공격으로 아스돗 사람이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피난 갔는데 애굽은 오히려 이들을 벌거벗겨 엉덩이를 드러내게 하여 앗수르로 돌려보냈다. 성경에는 벌거벗은 아스돗 사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들을 벌거벗겨 사지로 몰아내는 애굽이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기록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일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삼년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정의를 외치며 다녔다. 겉옷도 줘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으라고 한 예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

2021-09-01

경북대 ‘다양성위원회’ 대학 외부에서도 주목

경북대학교가 총장직속 자문기구로 ‘다양성위원회’를 출범시켜 향후 성과가 기대된다. 경북대는 지난달 30일 제1기 다양성위원회 위원 임명식을 가지고, 첫 번째 회의도 열었다. 다양성위원회는 현재 국내 3개 대학에서 운영 중이다. 서울대가 2016년 2월, 카이스트(포용성위원회)가 2017년 9월, 고려대가 2019년 1월 설치해 연례보고서 발간이나 다양한 자문, 의견수렴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홍원화 경북대 총장은 취임할 당시 소외집단의 권익을 위해 이 위원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위원장은 사범대 가정교육과 김유경 교수가 맡았으며, 위원은 교수, 학생, 직원, 외부전문가 등 15명으로 구성됐다. 앞으로 위원회는 양성평등 촉진과 다양성 보호에 관한 의견 수렴, 다양성 가치 확산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관련 정책 자문 및 제안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별도의 TF도 구성해서 교내 다양성 현황 분석 등 관련 연구도 수행할 계획이다.국내 주요대학들이 다양성위원회를 설치하고 있는 것은 대학의 집단문화와 폐쇄성을 탈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위원회가 정의를 내리고 있는 ‘다양성’이란 성별, 국적, 신체적 조건, 경제적 조건, 사회적 조건 등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가치관·행동양식 또는 이들이 공존하는 사회적 특성을 말한다.대부분 사회공동체가 그렇듯이, 대학 구성원들도 자신과 조건이 비슷한 사람과 잘 어울리는 집단문화에 익숙해 있다. 다양성이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지만, 조건이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포용력을 갖춘 사람은 의외로 적다.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북대 교수, 특히 의과대학 교수들이 주로 본교 출신들로 채워지고, 외국인 학생들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며 외톨이처럼 수업을 듣는다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모두가 경북대 구성원들의 집단주의 또는 폐쇄성을 지적하고 있는 뼈아픈 말이다.다양성위원회가 경북대의 과거 명성을 되찾기 위해 제대로 일을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성과를 낼 부분이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이 위원회가 앞으로 연구영역을 넓혀 가면 대구경북 사회의 폐쇄성 극복을 위해서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021-09-01

답이 없다는데 웃음이 나오나

장규열 한동대 교수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언론중재법)’이 겨우 파국은 면하였다. 개정안을 다루던 국회가 그 통과 여부를 놓고 대치하던 중, 의장의 중재로 논의를 한 달간 계속하기로 하였다.다툼이 멎어 다행이라지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바라보는 국민은 답답할 뿐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 언론을 개혁하겠다는 국민의 의지와 변화를 부정하는 언론의 입장 사이에 국회가 끼인 게 아닌가.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언론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이왕 확보된 한 달 동안 우리 언론을 개선하여 ‘시민의 눈초리이자 목소리’로서 언론이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생각을 다듬어야 한다.미확인보도와 허위정보, 가짜뉴스와 왜곡보도 등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면서 언론을 향한 시민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독자 대중의 신뢰를 잃어오지 않았는가. 일차적인 책임은 언론 스스로에게 있다. 매체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취재와 보도에 있어 속도경쟁이 가속화된 사정을 이해하고 남는다. 그렇다 해도, ‘사실확인’에 충실해야 함은 저널리즘의 양보할 수 없는 본질이 아닌가. 언론지상에서 이따금씩 목격되는 확인없이 또는 취재없이 적혀내린 기사는 기자 스스로 자존감을 훼손하는 결과를 빚게 마련이다. ‘따옴표’ 언론도 사라져야 하고 미확인보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기관 내외부로부터 전달되는 유무형의 압력으로부터도 기자는 자유로와야 한다.대선상황을 취재하는 현장의 모습이 전달되곤 하지만, 기자정신은 아직 저널리즘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후보의 기자회견에 준비한 질문을 던진 일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답하기 곤란하다’는 후보의 답변에 기자들은 ‘와’하고 웃음으로 양보하며 물러선다. 이게 말이 되는가. 기자라면 ‘가파른 질문으로 맞서야 하고, 적절한 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기자는 누구에게라도 겁 없이 맞설 줄 알아야 하며, 또 기자라면 누구라도 겁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치를 보며 대강대강 얼버무리는 일은 누구는 못하는가. 당신이 기자인 까닭은 물러설 수 없는 등 뒤의 낭떠러지를 분명히 인식함이 아닌가. 당신의 등 뒤엔 독자가 기다리고 있다. 답을 구하며 물었으면서, 답이 없다는 답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처사는 누구를 위한 언론행위인가.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바뀌어 갔으면 하는 방향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언론이 먼저 자성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국민은 사실확인에 충실하고 기자정신으로 충만한 저널리즘을 기대한다. 우리 사회에 완벽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하여 까닭없이 남에게 입힌 피해에는 당연히 중재도 해야하고 구제도 필요하다. 이 한 달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우리 언론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그런 결과, 시민의 알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고 힘있는 자들을 매섭게 견제하는 책임있는 언론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선다.

2021-09-01

남극에서 키운 수박

최저기온 영하 25.6도의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 여름과일의 대표격인 수박이 재배됐다. 극지연구소와 농촌진흥청은 남극세종과학기지 실내농장이 본격 가동되면서 기지 대원들에게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고 있다고 1일 밝혔다.수박 같은 열매채소를 수확한 것은 우리나라가 남극에 진출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현재 남극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29개 나라가 83개 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일부만 신선 채소 공급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잎채소와 열매채소를 동시에 재배할 수 있는 실내농장을 구축한 연구기지는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 남극세종과학기지가 두 번째다.극지연구소와 농촌진흥청은 남극세종과학기지 대원들에게 신선 채소를 공급하기 위한 ‘남극에 실내농장 보내기’프로젝트를 추진해 2010년에 이어 지난해 성능이 대폭 향상된 두 번째 실내농장을 보내게 됐다. 실내농장은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를 타고 지난해 10월 말 국내를 출발해 올해 1월 기지에 도착했으며, 5월 7일 첫 파종 후 6월부터 매주 1~2kg의 잎채소를 생산하고 있다. 7월 중순부터는 오이와 애호박, 고추가, 8월 중순에는 토마토와 수박이 처음으로 수확됐다.남극세종과학기지에는 현재 17명의 월동연구대원이 체류하며 실내농장에서 기른 신선 채소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고 있다. 실내농장에는 발광다이오드(LED)를 인공광으로 이용해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줄이면서 빛의 주기와 세기를 농작물의 종류와 생육단계에 따라 조절하는 기술이 사용됐다.우리나라가 인간에게 극한환경인 극지에서 잎채소와 열매채소를 키워 먹을 수 있는 실내농장을 갖춘 것은 자부심을 가질만한 쾌거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9-01

경북 병상가동률 90%… 의료체계 유지 비상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발생이 하루 2천 명대를 넘나드는 가운데 경북도내에서는 이를 치료할 전담병원의 병상이 90%가량 채워져 코로나 환자 관리가 비상이다.특히 중증환자를 치료할 병상은 2개밖에 남아 있지 않아 긴급한 상황에 따라 대구로 환자이송이 불가피하다.경북도내는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포항, 안동, 영주 등 5곳의 병원이 지정돼 모두 500병상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8월 현재 코로나19 환자가 수용된 병상은 전체의 90%에 해당하는 449개 병상에 이르러 신규 환자가 급증할 경우 병상 부족으로 인한 치료 차질이 불가피 할 것으로 보인다.영주적십자병원의 경우 142개 병상 중 현재 1개만이 남아 있으며, 안동의료원은 90%, 포항의료원은 80%정도 가동률을 보이고 있다. 중증환자를 전담하는 동국대 경주병원은 겨우 2개 병상만 남아 있다. 긴급 상황이 되면 대구로 환자를 이송한다는 방침이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대구의 병상 사정도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가 없어 불안한 상태다.경북은 코로나19 4차 대유행 이래 46일째 두자리 수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8월 20일에는 111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8월 중에만 1천585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하루 평균 53명을 기록했다.1일 0시 현재 전국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신규 확진자 수는 또다시 2천명을 넘어섰다. 정부는 지금의 상황을 정체기로 보고 아직 정점을 찍었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전파력이 강한 델타 변이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백신 접종을 완료했으면서도 코로나19에 감염되는 돌파 감염 사례까지 늘고 있다.대구와 경북에서는 병원과 학교 등 소규모 집단감염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병상확충이 시급하다. 전국적으로도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으나 코로나19 환자 치료를 위한 병상 확보가 넉넉하지 않다고 한다.현재로선 백신접종률을 높이고 각자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걸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나 보건당국은 만약에 대비해 병상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곧 닥칠 추석 등 아직도 우리가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코로나19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점 명심해야 한다.

2021-09-01

어떤 인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철없던 시절 피천득 선생의 글 ‘인연’을 읽다가 아쉬움에 잠기곤 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 나온다는 초록색이 고왔던 우산의 주인 아사코. 왜 선생은 아사코와 작별해야 했을까. 아사코와 이뤄진 세 번의 만남은 각기 다른 색깔과 향기로 다가온다. 소녀에서 처녀로 다시 가정주부로 선생을 만난 아사코. 그들의 마지막은 너무도 적막했다.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사만 해대는 아사코의 비애 같은 것이 여과 없이 전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만남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선생은 회고한다. 왜 선생은 굳이 아사코를 마지막까지 만나야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굳이 만날 필연의 까닭이 있었던가!얼마 전 졸업생이 ‘파안재’를 찾았다. 그는 1년에 두어 번 내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간다. 언젠가 우리가 만난 세월을 돌이키니 30년에 이르는 시간이었다. 우리를 묶어주는 인연의 끈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한두 번만으로 인연이 다하는데, 누구는 장구한 세월, 인연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인연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내게는 50년 된 친구도 있고, 30년 넘게 이어오는 벗들도 적잖다. 어느 때는 가족보다 더 깊고 편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일도 있다. 무엇이 우리를 오래도록 이어주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연’을 생각하는 것이다. 붓다는 연기설(緣起說)을 설파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 이른바 인과율로도 해석 가능한 논리가 연기설이다.내가 있으므로 그대가 있고, 내가 소멸하므로 그대 또한 소멸한다.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고, 그대가 소멸하기에 나 역시 소멸한다. 나와 제삼자의 관계에서 출발은 언제나 ‘나’다. 내가 진정한 자아, 참된 자아일 경우에만 나와 제삼자의 관계, 인연이 시작된다. 30년 세월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나와 졸업생 사이의 관계는 그런 것이리라.만남의 사이가 조금 뜨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주고받는다. 짧은 안부 인사로 안녕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는 내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사제’ 관계라 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나는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스승 자격도 없는 자가 스승을 참칭(僭稱)함은 정신적 범죄와 다르지 않다.붓다가 설한 인연의 시간에서 사제 관계가 가장 긴 것은 그런 연유다. 붓다에 따르면, 부부가 7천 겁, 부모 자식이 8천 겁, 형제가 9천 겁, 사제가 1만 겁이다. 신생(新生)의 불교가 우뚝 서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인 제자들을 향한 붓다의 사랑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런 제자를 둔 붓다와 저잣거리의 비속한 인간인 나를 동렬에 둘 수는 없는 일이다.가을장마 사이에 찾아온 졸업생과 늦도록 술잔 주고받으며 인생의 장면 하나를 만드는 즐거움을 맛본 유쾌한 하루였다. 신이여, 그를 축복하소서!

2021-08-31

망각

류영재​​​​​​​포항예총 회장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실 것만 같았던 어머님이 멀리 떠나가신 지도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팔월의 마지막 날이 기일인데 당신의 유언을 핑계로 아버님 제사와 함께 모시고 있으니 정작 어머님 떠나신 날에는 막걸리 한 병 들고 휘적휘적 산소에 다녀올 뿐이다. 결국 효나 불효도 생전의 일인가보다. 사느라 바빠서 잊고 지내다가 문득 어머님 생각을 하면 기억을 놓으시던 그날의 충격이 떠오른다. 초저녁에 설핏 주무신 후 깨어나시더니 갑자기 일평생 그토록 애지중지 하던 당신의 아들을 보고 “아저씨!”라 하셨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되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망각이다’라는 줄거리다. 어린이에 불과하던 그 당시에 망각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했을 리 만무인데 어찌하여 아직도 문득문득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거친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호랑이도 아니고 깜깜한 밤길에 마주친 백발 귀신도 아닌 망각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흐르는 세월 따라 소중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 두렵다는 의미일 텐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늪에 빠지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더러는 훌훌 털고 건너야 할 망각의 강도 있는 법이다.망각은 경험했던 일이나 사람, 약속, 물건 등을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버리는 정신적 현상이다. 자신이 한 일도 기억하지 못하면 몹시 당황스럽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인간에게 망각의 기능이 없다면 두뇌의 용량초과로 정신병자가 될 것이라 한다. 마치 잔을 비워야 채울 수 있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으니 기록이 필요하다. 문화유적을 답사하던 중 삼례문화예술촌 모퉁이에서 ‘기록하지 않은 삶은 사라진다.’라는 현수막을 보았다. 진하게 공감되는 말이다. 지역미술사 자료를 알뜰히 모으고 있는 후배가 ‘80년대 포항의 미술’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낸 책을 출간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때의 자료가 내게는 거의 없다. 세를 얻어 살던 작업실을 형편에 따라 여러 번 이사하다보니 끌고 다니기 힘들어 몽땅 불태워버렸다. 자료가 없으니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데, 청춘을 함께 했던 그 소중한 기억들이 가물가물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망각은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까지도 몽땅 삼켜버리는 악마이던가.사람이니 더러 잊어지기도 하고 잊을 필요도 있지만 잊혀지는 입장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프랑스의 화가 마리 로랑생은 그의 시 ‘잊혀진 여인’에서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다.”라고 했다.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이 잊혀지는 것이라는 얘기다.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려 휴대전화 주소록에서 어떤 이름을 삭제했다. 번호 삭제와 함께 그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면 좋으련만 잊지 말아야 할 기억들은 자꾸 흐려지고, 잊고 싶은 기억은 선명하게 되살아나니 아이러니다.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잊혀진 여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

2021-08-31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습니다

1년에 한 번씩은 그런 시기가 온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은 기분이 몰려드는 시기가. 10대 때에는 공부가 아닌 무언가가,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대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야만 하는 건지, 내 삶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타인에 대해 우월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당신들처럼 되는 대로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진지하게 내 삶을 바라보고 있는 거라는 우월감. 어째서 사람들은 질문을 품지 않는지, 스스로의 인생에 회의하지 않는지…. 그건 그들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0대가 되어서도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진짜를 갖고 싶었다. 술에서 깨어났을 때 찾아오는 허무감 같은 행복이 아니라, 나를 충만하게 해줄 그런 기분 말이다. 하지만 30대가 되어서도 그런 건 찾지 못했다. 지금은 또 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기분이 몰려들 때면 극심한 회의감에 아무것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마음은 움츠러들 뿐이고, 단지 초조한 기분에 마음을 갉아 먹힐 뿐이다. 나는 정말 진정한 내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생각해온 삶은, 정말 이런 거였나? 고작?한 때는 이런 질문들이 정말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단지 내 삶을 갉아먹을 뿐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건 모두 내가 스스로의 나약함을, 나의 무능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드는 생각일 뿐이라고.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내 앞에 있는 할 수 있는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나는 다시금 10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극심한 회의감과 우울감, 무기력감이 나를 엄습해오고, 어딘가에 나의 진짜 삶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시달린다. 그래. 나는 결국 버리지 못한 것이다. 어딘가에 진짜 내가, 진정한 나의 삶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말이다. 그렇다보니 나의 다짐들은 늘 쉽사리 무너졌고, 술을 마실 때면 늘 이런 푸념을 쏟아내곤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런 삶을 살 사람이 아니다. 누구 때문에, 혹은 어떤 사건 때문에, 하다못해 어떤 이유 때문에, 나는 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고…. 누군가를 쉽사리 원망하곤 했다. 어머니를, 아버지를, 할머니를, 나의 누나를, 나의 친구를, 나의 연인을, 그 모든 당신을.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다. 내가 정말로 미워했던 건, 이런 내 자신이었다.내가 당신에게 쏟아냈던 모든 말들…. 미움과 증오와 욕설로 가득했던 그 말들은, 사실 당신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그 말들은, 모두 나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이었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화내야 할 사람을 향해서는 화내지 못한 채, 스스로 삭히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멍청한 나를 향해서 했던 말들이었을 뿐이다. 나는 늘 남들이 세상에 굴복하고, 세상에 휘말려 떠내려갈 뿐이라고 비난하곤 했지만, 그러는 나 또한 그랬을 뿐이었다. 정말로 세상에 굴복한 건 나였고, 휘말려 떠내려갈 뿐이었던 것도 나였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욕하고, 당신을 증오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당신의 탓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나는 누구보다 나약한 한 사람이었으므로.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에는 아직 드라마틱한 결말이 없다.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사과하지 못했고,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단지 바뀐 게 있다면, 이제는 내가 당신을 정말로 미워하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나의 진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 이 말을 내가 당신에게 전한다면, 당신은 나의 머리를 한 번쯤은 쓰다듬어 줄까. 아니면 이제는 당신도 나를 미워한 나머지 그런 가증스러운 말 하지 말라고 화를 낼까. 알 수 없다. 이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여전히 저 멀리 있으므로. 나의 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므로. 그러니, 이 이야기의 결말까지, 나는 무언가를 써나가야만 한다.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단지 살아가고, 살아갈 뿐인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그걸 평범한 삶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평범함을 꽤 괜찮은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개인 사정으로 이번 주부터 필자가 강백수씨에서 임지훈씨로 바뀝니다.)

2021-08-31

당신의 가이드 러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일순 하늘이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요란한 폭우였다.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꿎은 핸들만 으스러질 듯 세게 쥐었다.몰아치는 빗물을 와이퍼로 닦아내도 망막에 뿌연 장막을 덧씌운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순간적인 당황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토록 궂은 날씨에 운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기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이러다 큰일 나면 어떡하지’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그러던 중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비상등을 켜고 서로의 불빛을 의지해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앞차가 내뿜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았다.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빗길에서 간신히 보이는 비상등은 내게 안도로 다가왔다.거센 빗줄기가 요동치는 희뿌연 세상을 의지해서 헤쳐 나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실로 커다란 위안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빛을 따라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최근 온라인에서는 패럴림픽 육상 경기가 화제다. 도쿄 패럴림픽의 개막과 더불어 이전 경기에서 선수들이 보여줬던 감동적인 장면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시각 장애인 육상 경기는 시각 장애 등급이 있는 선수와 비장애인 가이드 러너가 한 팀이 되어 경기를 치르게 된다. 가이드 러너는 선수에게 출발선을 알려주고 자세를 잡아준다. 출발 직전 옆에 나란히 선 다음에 손을 끈으로 묶어 서로를 연결한다.가이드 러너는 선수보다 앞서서 달릴 수 없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결승선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 나가는 것은 선수의 역할이며 가이드 러너는 호흡을 맞추고 방향을 지시하며 한 몸과 같은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본디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발맞춰 경기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그간의 노력이 고스란히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실제로 가이드 러너는 선수와 생활까지 같이하면서 늘 선수와 함께 호흡을 맞춘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경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을 더욱 감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모든 순간을 ‘함께’ 한다는 지점일 것이다. 준비는 물론이거니와 경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함께 호흡한다. 승리의 단상에도 함께 올라가게 된다. 기쁨을 나누고 격려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환희의 눈물을 닦아주거나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을 목도하노라면 서로를 향한 뚜렷한 감정이 느껴지면서 나 역시 가슴 한쪽이 찡해진다.인생의 가이드 러너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는 내가 영원히 젊고 건강할 줄로만 알았고 그것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얻은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 고라니처럼 나약한 주제에 걷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고 자신한 것이다.그러나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에 나를 나로 만들 수 있게 만들어준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글을 통해 만난 작가들의 무수한 언어가 지금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실로 감사하고도 아득해진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가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영향으로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쉽게 잊곤 한다. 각자의 세계는 적당히 맞닿아 있을 뿐이며 하나의 끈으로 손을 잇는 것을 거추장스럽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한 삭막함 사이에서 느끼는 균열의 지점 때문에 목적지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타인을 완전한 타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인생이라는 레이스가 외롭고 두렵게만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그럴 때면 세찬 비바람 속에서 지치지 않고 깜박이던 자동차 불빛을 떠올린다. 동시에 내 차의 불빛 역시 누군가가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 희미한 빛줄기가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그러니까 인생의 가이드 러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춘 친구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느 낯선 이가 건네는 다정한 친절 정도로도,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의 진솔한 문장 정도로도, 폭우 속에서 점멸하는 앞차의 비상등 정도로도, 우리는 결승선까지 나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2021-08-31

태풍으로 초토화된 죽장면 재난지역 지정을

포항시는 최근 발생한 태풍 ‘오마이스’로 초토화된 죽장면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당장 복구해야 할 피해수준이 예상외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는 강풍을 동반한 가을장마까지 덮친다고 하니 죽장면민들의 걱정은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오후 6시 현재, 포항시가 집계한 죽장면의 태풍 피해액은 8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됐다. 도로·하천·주택 등의 피해액이 포항시 면(面) 단위 특별재난지역 지정 기준 금액의 7배가 넘는 57억9천여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포항시는 실제 피해액은 80억원이 넘을 것으로 내다봤다.특히 이번 태풍으로 전체 1천여 농가 중 81%가 농작물 침수·유실 피해를 입어 그 피해액도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구체적인 피해실태는 주택과 상가 86채와 차량 3대 침수, 도로 유실 15곳, 전기·통신두절 1천500여 가구, 하천 피해 45곳, 농경지 매몰·유실 88건(10.68㏊), 농작물 피해 122건(36.8㏊), 산사태 10곳, 소규모 공공시설물 파손 13곳 등이다. 포항시는 또 다른 태풍에 대비해 피해지역에 1천명 내외의 인력과 100여대의 중장비를 투입해 복구작업에 총력을 쏟고 있지만, 예산과 인력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이강덕 포항시장은 “현장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침수된 주택에 대해서 물이 빠지면 괜찮다고 하는데 직접 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피해를 입은 노인들은 장판도 없이 거적 위에서 몸을 뉘여 잠을 청하고 있다. 이재민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지난달 23~24일 이틀동안 죽장면 일대에는 208.5㎜의 비가 내렸다. 특히 24일에는 오후 1시부터 1시간 동안 53.5㎜의 물 폭탄이 쏟아져 국도 31호선과 지방도, 마을 도로 등이 유실됐다. 특별재난지역은 자치단체의 재정력지수를 기준으로 선포된다. 포항시의 재정력지수는 0.2 이상∼0.4 미만으로 분류돼, 면 단위에서는 7억5천만원 이상 피해가 발생하면 대상이 될 수 있다. 동해안 지역의 경우 추석을 전후해서 수시로 대형태풍의 영향을 받는 만큼 죽장지역의 피해복구는 한시가 급하다. 정부는 하루빨리 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 국가차원의 종합적인 복구지원을 해야한다.

2021-08-31

통곡과 저항, 그리고 용서와 화해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하늘을 우러러 / 울기는 하여도 /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달파 / 하늘을 흘기니 / 울음이 터진다. / 해야 웃지 마라. / 달도 뜨지 마라.”‘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시인 이상화가 1926년 4월 『개벽』 68호에 실은 시 ‘통곡(慟哭)’의 전문이다. 이상화는 일본을 거쳐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 위해 1923년 초봄에 동경에 갔다가 그해 9월 관동대지진을 만난다. 지진 발생 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려 암살 위협을 겪기도 한 시인은 한동안 일본에 은신해 있다가 인생관이 바뀌면서 프랑스 유학의 뜻을 접고 조선으로 되돌아온다.9월 1일 오늘은 관동대지진 98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에서는 1923년의 지진으로 인한 피해와 이와 관련된 학살 사건을 통틀어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게는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이 눈과 귀에 더 익다.일본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지질학에서의 판 구조론에 따르면 지각판은 북미판, 남미판, 유라시아판, 태평양판, 아프리카판, 인도-호주판, 남극판 등 커다란 7개의 판과 중간 크기의 6개 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대규모 지진들은 이 지각판의 경계 부분에서 자주 일어나는데, 일본 동쪽 앞바다는 7개의 판 중에 4개의 판이 접하는 곳이어서 빈번한 일본 지진 발생 이유가 설명이 된다.1923년 관동대지진은 20세기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중에서 9번째로 큰 지진이었지만 해역이 아닌 인구가 많은 동경 가까운 위치에서 발생하였기에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10만5천여 명에 이르고 190만 가구가 집을 잃은, 메이지 시대 이후 현재까지의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끼친 지진으로 기록되고 있다.지진이야 천재(天災)이고 불가항력적이라고 하겠지만, 그 천재를 빌미로 일본은 조선인(그리고 일부 중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을 대상으로 한 관동대학살 사건이라는 인재(人災)를 벌였다. 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인이 강력 범죄와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떠돌고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불을 지르고 다닌다”와 같은 유언비어가 횡행하자, 일제의 군경과 민간인 자경단은 조선인 대량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의 수는 6천661명(당시 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 조사)에서 2만3천58명(2013년 8월 21일자 연합뉴스 기사)에 이른다는 주장까지 있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1923년의 재일조선인 숫자가 8만617명이라고 하니 당시 조선인 피학살자 수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이상화 시인이 ‘통곡’을 발표한 1926년 4월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2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조선인의 참상을 목격한 시인의 트라우마는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으로 전환되었을 것이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한 저항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관동대학살 문제에 대해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시인은 통곡하였지만, 우리는 진상 규명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은 다음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2021-08-31

밀리테크

미국이 지난달 28일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 폭탄테러 보복으로 이슬람 무장조직인 IS-K의 고위급 표적을 제거한 무기에 특수 개량형 미사일(AGM-114R9X)이 동원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의 신무기 개발이 또한번 주목을 받았다.이번에 동원된 미사일의 별명은 닌자 미사일이다. 이 미사일은 폭약이 든 탄두가 없고 그 대신 강한 칼날 6개가 장착돼 있다. 표적에 충돌하기 직전 칼날이 펼쳐져 내리꽂히면서 주변 50cm 반경을 모두 파괴한다. 주변 피해를 최소화하고 목표물만 정확히 제거한다. 칼날이 일본의 자객 닌자의 검처럼 생겼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이지만 현대전에서는 무기체계의 첨단화가 승패를 가른다. 무기의 우월성이 곧 전쟁의 승자로 이어진다.미국은 9·11테러 후 무인항공기(드론) 시대를 열었다. 무인기와 정밀 유도미사일의 결합을 통해 수천 km밖의 목표물도 아군의 희생없이 정확히 타격할 수 있는 신형무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세계 군사 강국들의 밀리테크(Militech)가 4차혁명 기술을 기반으로 날로 첨단화하고 있다. 군사(military)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인 밀리테크는 멀지 않아 상상을 초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웨어러블 슈트를 입은 인공 로봇이 90kg 군장을 하고 한 손으로 자동소총을 발사하는 모습이 현실화한다는 말이다.첨단화하고 있는 무기개발로 세계 방위산업시장 규모도 급속 증가하고 있다. 인류를 위한 첨단 문명기술의 발달이 전쟁 도구로 전락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어야 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8-31

통합신공항 여야정협의체, 가시적 성과 내야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 지원을 위한 여야정협의체가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첫 회의를 가졌다. 여야정협의체는 부산 가덕도특별법에 맞서 대구경북 신공항특별법을 만들자는 지역 정치권의 요구가 보류되면서 대신에 만들어진 구성체다. 지난 6월 국회교통위의 의결을 거친 여야정협의체는 여당과 야당 국회의원은 물론 국토부와 국방부 관계자,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공항공사사장 등 통합신공항 건설에 참여되는 기관의 대표자가 모두 참석한다. 이 안에서는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의 원활한 추진과 행정·재정적 지원을 위한 각종 방안 등이 논의될 예정이다.위원장을 맡은 대구 출신의 민주당 조응천 의원은 “공항이전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고 권영진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통합신공항도 부산 가덕도신공항에 준해 정부 지원이나 예비타당성 면제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특히 신공항과 연계된 광역교통망 건설에 대해 국비 지원 등도 요청했다.잘 알다시피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은 우여곡절 끝에 경북 군위와 의성의 공동후보지로 이전을 확정했다. 아직도 군위군의 대구편입 등 민감한 문제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신공항의 규모나 인근 배후도시 건설, 연계 교통망 등 넘고 넘어야 할 과제가 산적하다.통합신공항 특별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협의체 구성으로 현안을 풀기로 했지만 여야정이 만족할만한 결론에 도출하기가 쉽지가 않다. 다행히 이날 회의에서 부산 가덕도신공항 건설에 준하는 지원에 대해 모두 공감했다고 하니 기분 좋은 출발을 한 셈이다.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은 510만 지역민의 여망을 담은 공항이다. 대구경북이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늘길을 여는 대형사업이다. 이 공항이 중남부권의 관문공항으로 발전할 수 있게 지금부터 잘 대응해 나가야 한다. 가능하면 통합신공항 특별법 제정도 이 협의체서 풀어야 한다.앞으로 통합신공항의 원활한 건설을 위한 협의체 역할에 시도민의 관심도 증대할 것이다. 통합신공항이 명품공항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지역정치권과 시도지사 등 관계자의 치밀한 전략적 노력이 있어야 가시적 성과도 낼 수 있다.

2021-08-31

불교로 문화 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다

김동하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5세기 신라는 도시 중심에 적석목곽분이라는 큰 무덤을 축조했다. 무덤의 주인공은 최상위 지배층인 마립간(王)과 권력자로 추정한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 허리띠, 귀걸이, 목걸이 등의 금제품이 다량 발굴되었으며, 각종 마구류와 토기가 출토되었다.신라는 가야를 비롯해 주변의 작은 소국을 병합하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다. 경주지역의 대형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금제공예품이 현재의 대구, 경산, 창녕 등에서 발굴되고, 경주 양식 토기가 인근 지역에서도 출토된 사실은 신라의 영향력이 주변지역까지 넓게 미친 것을 알려준다.신라는 국가의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를 차근차근 갖추어 나갔고, 비로소 법흥왕(재위 514~540) 때 율령을 만들고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명실공히 중앙집권국가로 성장·발전한다. 신라 왕경의 중심부에는 도시계획이 새롭게 수립되어,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와 같은 왕실의 큰 사찰이 들어선다.이 무렵부터 신라에는 다양한 문화적 변화가 나타난다. 무덤은 앞 시기와 달리 경주 분지 밖에 입지하고, 그 구조는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바뀐다. 무덤의 구조가 교체되면서 규모도 축소되고, 무덤에 들어가는 부장품도 매우 간소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대신 왕경 중심에 축조된 사찰에는 황금의 불상과 화려한 장식의 불교 의례용품이 가득하고, 사찰 내에서는 각종 생활용기가 제작·사용되었을 것이다. 마립간 시기 각종 부장품을 위해 사용했던 황금은 이젠, 불상과 사찰을 장엄하는데 소비되었다. 다양한 문양의 와전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 와전(瓦塼)은 사찰 건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조영된 사찰에는 다수의 승려가 생활을 하며, 때로는 나라를 위해 때로는 왕실과 개인을 위해 불사가 이뤄졌다.7세기에 이르러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왕위를 계승했고, 불교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마련한다. 높이 80미터에 달하는 황룡사 구층목탑은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신라 최고의 건축물이자,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신라인의 원대한 꿈을 반영한 것이다.삼국 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백제(660년 멸망)와 고구려(668년 멸망)를 병합하고,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호국불교를 바탕으로 한 신라인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삼한일통의 위업(676년)을 달성한 신라는 안정된 국가 기반을 바탕으로 최고의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는 황금시기를 맞이한다. 경덕왕(재위 742-765) 때 세워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불교의 이상향과 종교적 숭고함을 담아 완성된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다.이는 동아시아 불교 문화권 속에서 신라불교문화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다. 또한 이 시기 신라에서는 비단길과 바닷길 등을 통해 중국, 일본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신라의 독창적인 문화는 발전·성장하게 된다. 178,936호의 왕경인(王京人·왕이 살고 있는 수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신라 수도 경주는 1,360방과 55리의 행정 단위로 구성된 계획도시였다. 또한 왕경에는 35개의 화려한 금입택(金入宅·귀족이 살던 저택)도 마련되어 있었다.신라 수도 경주는 더 이상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세계 문화 교류의 거점이었던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더불어 국제적 도시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허브로 충실히 자리 잡았던 것이다.경주는 역사와 문화의 길을 따라 주변 나라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며 발전해 왔다. 신라 천 년, 그리고 또 다시 천 년을 보낸 오늘날의 경주에는 우리의 탁월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다. 경주 분지 내에 위치한 거대한 왕릉,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과 동궁, 그리고 황룡사, 감은사, 불국사 등 경주 전역에 위치한 절터와 남산의 불교 유적…. 하지만 경주는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그것은 바로 천 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온 경주 사람의 문화적 동질성과 역사성이다. 경주 사람에게 언제부터 경주에 살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자연스레 선조 대대로 살아왔다고 답한다. 그 선조는 바로 천 년 전의 신라인이자 왕경인이다.이것은 신라의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경주’와 끊임없이 이어져 소통하고 있다는 어엿한 증거이다. 천 년의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부단히 그 정신과 문물을 지켜온 경주는 오늘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공간이며, 유구하고 위대한 역사의 현장이다.

2021-08-30

흑백의 명암으로 그려진 두 갈래 길(道)이 만나는 곳

1800년 영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다.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정순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에 나서고, 정조 재위 시기 성장한 남인 시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노론 벽파는 명분을 구축한다. 순조 즉위 1년인 1801년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라는 하교를 통해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난다.성리학의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이견을 달리하며 펼쳐졌던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조선 건국의 근본 이념이었던 성리학이 아닌 다른 이념이 당쟁사에 등장한 것이다. 서양의 학문으로 유입되었던 서학(西學)은 자발적인 천주교 신자를 양산하게 되면서 인륜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는 자들이 믿는 사학(邪學)으로 낙인 찍히며 정쟁세력을 제거하는 명분이 된다.“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정순왕후의 하교에 따라 배교(背6559·믿었던 종교를 배신하는 행위)를 약속하고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의 길에 오른다. 같은 해 정약전의 조카 사위였던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다시 죄의 경중(?)에 따라 형제지간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천혜의 고도 흑산도와 땅끝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는 것으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시작된다.“이 영화는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의 서문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물입니다”라는 자막이 영화 첫 장면에 나온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인 정약전과 장창대의 인연을 ‘자산어보’ 서문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뼈대를 기반으로 감독의 생각을 녹여내며 영화를 만들어간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만들고, 자잘한 사건들을 동원하며 행간을 채운다. 그 중심엔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정약전의 대사처럼 ‘자산어보’의 편찬과정에서 함께했던 정약전과 장창대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정약용이 유배생활 중에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수백권의 저서를 남길 동안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포함해 딱 세 권의 책 밖에 남기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창대로 인해 묘한 긴장을 일으킨다.‘목민심서’는 조선 후기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담은 책으로 유교적 정치 질서 속에서 청렴과 애민을 통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담고 있다. 흑산도 주변의 해양 생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산어보’는 실사구시의 탐구적 서적으로 그 결을 달리하고 있다.정약전은 서학을 철학적이면서 실사구시의 과학적 영역으로 인식한 반면, 정약용은 성리학을 보완하는 영역으로 수용하고 있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정약전이 성리학과 서학의 중간에 위치할 때, 정약용은 성리학을 중심에 두고서 서학을 취한다.창대는 정약전과 정약용, ‘자산어보’와 ‘목민심서’ 사이를 오간다. 성리학의 질서 속에서 ‘사람 노릇’을 위해 입신을 갈망하던 창대는 정약전의 유배로 자산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 사이에 놓인다. 스승과의 인연으로 학문은 깊어지고, 흑산도와 강진을 오가며 성리학의 이념을 세상에 구현해 보고자 하는 포부는 무르익는다.‘자산어보’와 ‘목민심서’ 사이 이상과 현실, 관념과 실사가 충돌한다. 조선시대를 지탱해 왔던 이념이 새로운 시대에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할 때, 다시 성리학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길을 찾는 이와 성리학 바깥에서 또 다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 펼쳐진다.‘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며 옛 책을 매우 좋아(‘자산어보’ 서문에서 인용)’했던 실존인물 창대는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두 갈래의 길(‘자선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 속으로 던져진다. 흑산도와 강진을 오가던 창대는 마침내 나주로 나가고, 선택했던 길 속에서 다시 흑산도로 돌아 온다.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창대’다. 다산(茶山·정약용의 호)의 길(道)과 손암(巽庵·정약전 호)의 길(道)을 오가는 창대의 여정을 그린, 여백과 흑백의 명암이 수묵화처럼 그려지는 로드무비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1-08-30

죽장 수해복구 현장에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동동거리면서 시작된 팔월이 건들바람결에 마무리되고 있다. 설마하던 코로나19 감염 4차 유행이 수도권과 지방 전역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위중증자와 사망자가 갈수록 늘어나니 초조와 불안이 가중된다. 거기에 지난주 12호 태풍이 몰고온 엄청난 폭우로 포항 죽장면 일대의 도로와 주택, 농경지에 많은 피해를 가져와 시름을 더하고 있다. 코로나의 난맥상에 자연재난까지 겹쳐서 여전히 안절부절 동동거리고 있다.다른 지역이나 어디 먼 곳의 일처럼 여길 때가 많았었는데, 막상 우리 지역, 그것도 자주 드나들던 곳이 하루 아침에 수마에 할퀴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돼 피해주민들은 얼마나 애가 타고 허탈해할까? 70년을 넘게 입암리에 살면서 이렇게 물난리가 난 적은 처음이라며 한숨을 내쉬는 분이나, 올해 농사는 접는 셈치더라도 사과나무가 뿌리채 뽑히고 농기계마저 떠내려가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는 분들의 탄식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피해현장은 억장이 무너질 정도지만 복구의 손길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피해지역마다 각계각층의 봉사와 구호물품의 지원이 이어지고 온정을 나누는 모습들이 늘어나고 있다. 포항시와 유관기관은 군인, 공무원, 자원봉사자 등 수천명의 인력과 수백대의 장비 동원으로 서서히 상처를 씻어내고 복구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필자 역시 포항예총 산하단체 수해복구의 일환으로 지난 휴일 방흥리 수해현장에서 포항문인협회 회원 등과 함께 작으나마 도움의 손길을 보탰다. 간간이 비 내리는 중에 장화를 신고 자갈에 휩쓸린 사과나무를 일으켜 세우며 가지에 쌓인 풀잎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다 보니 하루가 금세 갔지만, 한결같이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죽장지역의 폭우로 인한 피해 규모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눈덩이처럼 계속 커지고 있다. 죽장면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마을이 주로 하천 주변에 형성돼 있어서, 이번에 하천 범람과 도로 유실 등으로 북부지역 마을 대부분이 피해를 본 것으로 보인다. 근 3년 전에 발생한 포항촉발지진 피해조사 마감이 8월말인데, 죽장지역에 한정되지만 폭우 피해조사를 해야 하니 포항시가 이래저래 바람 잘날 없는 나날이 돼가는 듯하다.사람사는 세상에는 풍파와 재해가 끊이질 않는다지만, 태풍이나 홍수, 지진 같은 자연재난은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다. 천재지변을 탓할 수야 없겠지만,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재앙과 불행 앞에서는 누구라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기상이변으로 인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풍수해 예방책이나 효과적인 대응체계로 인명이나 재산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듯싶다.예기치 못한 폭우로 초토화된 수해현장에 그래도 재해 구호와 복구에 온정의 손길이 타지역에서까지 답지해 아름답기만 하다. 어려움 앞에서는 모두 하나된 마음으로 힘을 합해 협력하고 봉사하며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뻗어야 하리라. 그래서 수해복구를 앞당기고 수마의 상흔을 애써 지워 더이상 동동거림 없는 가을을 맞이하길 기대해 본다.

2021-08-30

눈으로 보는 믿음과 개선

엄주선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우리의 몸이 10할이면 눈이 9할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보는 것이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우리의 일상은 아침에 눈을 뜨면 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저녁에 잠자리에서 잠자기 전까지는 거의 모두 보는 것들의 연속이다. 그러기에 본다는 것의 의미도 단순히 보다(見), 살피다(察), 황새 관(隹)+볼 견(見)자를 결합하여 높은 곳에서 먹이를 찾듯 자세히 보다(觀)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그렇기에 시각정보는 우리 생활에서 필수에 가까운 요소이며 많은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일상에서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기업에서도 이를 잘 활용하여 안전 확보와 편리하고 효율적 생산활동은 물론 지속적인 개선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를 산업공학에서는 경영활동의 일환으로 ‘눈으로 보는 관리(VM·Visual management)’라고 부르고 있다.즉, VM은 현장의 생산목표와 과정, 설비, 제품, 작업, 환경, 안전 모든 것에 대하여 누구라도 이상과 정상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여 이상 발생 시 빠르게 조치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정상적인 상태가 지속, 유지되도록 해나가는 예방적 관리수단인 동시에 현장의 자율신경을 갖추는 도구인 것이다.눈으로 보는 관리의 첫번째 단계는 생산현장의 깨끗하고 청결한 유지이다. 바닥이나 설비가 오염되어 있으면 이상을 발견하기 어렵고, 특히 조립라인에서는 부품이나 나사 등이 떨어져 있으면 안되는 것을 표준으로 정하여 이상을 바로 알 수 있게 할 수 있다.두번째는 생산에 사용되는 설비와 자재·재료에 대하여 이상과 비정상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설비의 경우 정상 가동을 위하여 점검하여야 할 개소에 대한 이상·정상 범위의 표시를 하도록 하며, 자재·재료에 대해서는 어디에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를 명확하게 표시하여 누구라도 쉽게 정상 범위를 벗어나면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세번째는 생산 진행과 작업의 늦고 빠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당일의 생산 목표와 진행이 보이고, 본인의 작업에 대하여 표준 순서와 시간이 있으면 늦고 빠름을 알 수 있다. 도요타자동차는 이를 ‘표준작업’이라 하여 본인의 작업에 대한 표준 순서와 시간을 생산 차량의 종류마다 정하여 작업의 시간이 정상 범위를 벗어나면 본인이 스스로 판단 로프를 당겨 도움을 청하도록 하고 있다.이렇듯 생산현장을 눈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상기 3가지 요소 외에 현장의 안전확보를 위한 각종 표시와 관리까지 확대할 수 있다.최근 개발, 발전되는 스마트 기술을 활용하여 ‘눈으로 보는 관리’를 디지털 기술과 접목하여 산업현장에 구현해 나간다면, 한층 더 편리한 작업으로 생산성 향상은 물론 작업 안전 확보로 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임에 틀림없다.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듯이(百聞不如一見), 보는 것이 믿는 것이고 무엇이든지 직접 보고 경험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021-08-30

NFT 기술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이라는 뜻으로, 블록체인의 토큰을 다른 토큰으로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한 가상자산을 말한다.이는 게임·예술품·부동산 등의 기존 자산을 디지털 토큰화하는 수단이다. NFT는 소유권과 판매 이력 등의 관련 정보가 모두 블록체인에 저장되며, 최초 발행자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어 위·변조 등이 불가능하다. NFT의 시초는 2017년 스타트업 대퍼랩스가 개발한 ‘크립토키티(CryptoKitties)’에서 비롯됐다. 이는 유저가 NFT 속성의 고양이들을 교배해 자신만의 희귀한 고양이를 만드는 게임이다.NFT는 가상자산에 희소성과 유일성이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진위(眞僞)와 소유권 입증이 중요한 그림, 음악, 영상 등의 콘텐츠 분야에 이 기술이 활용된다. 대표적으로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이 만든 10초짜리 비디오 클립은 2021년 2월 NFT 거래소에서 660만 달러(74억 원)에 판매됐다.우리나라에서는 고미술 전문 미술회사 조선앤틱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청자인 ‘청자상감연화학문매병’을 NFT로 제작해 NFT 마켓플레이스 메타파이에서 경매를 진행 중이다. 아트센터 나비는 간송미술관과 손잡고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속 장수를 상징하는 학 문양이나 신사임당 그림 ‘묵포도도(墨葡萄圖)’속 번창을 의미하는 포도, 고려 31대 왕이었던 공민왕의 ‘이양도(二洋圖)’ 속 복을 기원하는 양 등을 일러스트로 재해석한 38종의 NFT 그림 카드를 발행, 판매 중이다.간송미술관은 세계기록문화유산인 ‘훈민정음해례본’을 NFT로 발행, 1개당 1억원으로 100개 한정 판매하는 이벤트도 진행했다. 가상화폐 시장과 함께 커지는 NFT시장도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변화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