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언가를 기록하여 남기려 했던 필사문명의 시대로부터 인쇄문명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문자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와 읽기라는 인간 지식의 관행은 이제 또 다른,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곳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와 그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매체에 의해 새롭게 도래된 구술문명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만 같다. 모두가 ‘지금 현재’에 붙들려 그것을 소비하는 시대에,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문학이나 역사, 철학은 과연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혹은 질문을 바꾸어, 인간이 문자를 가지고 읽고 쓸 수 있다는, 기록하고 독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을까, 혹은 우리에게 씌워진 천형과도 같은 저주일까. 유튜브 어딘가에 지금도 영상 이미지들이 쌓여가고, 더 이상 책을 읽고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는 이런 질문조차 새삼스러워질 것인가.
독일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가 1995년에 쓴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는 바로 이 문자를 읽고 쓰는 인간의 문제에 답하고 있는 좋은 사례다. 주인공인 미하엘 베르크가 남긴 한나 슈미츠라는 여성에 대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불과 열다섯 살에 불과했던 미하엘이 서른을 훌쩍 넘긴 한나라는 여성을 만나 연애 관계가 되는 자극적인 소재 아래 나치의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와 인간이 읽고 쓰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미하엘은 한나를 만나 그가 갖고 있는 풍요로운 감각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것은 문자에 앞서 그 자체로 자기를 드러내는 세계다. 시각과 청각을 발동시키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미각과 후각, 촉각이 발동되는 세계. 문자로 그것을 기록하려 해도 결국은 추상적이 될 수밖에 없는 구체성들의 세계이다. 한나는 미하엘을 씻기고 먹이고 같이 잠을 잔다. 미하엘은 그 앞에서 마치 한 마리의 동물이라도 된 듯, 그 구체성의 감각들을 탐한다. 물론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을 빼고 어떤 대상을 판단한다는 사실 자체가 무리겠지만, 만약 그것을 뺄 수만 있다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만들어낸 담론 이전에 인간의 몸과 그 사이의 교섭이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한나는 미하엘이 책을 읽어주는 것은 좋아하고, 그것을 바란다.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읽어나가면서 어느 정도는 알게 되는 사실은 한나가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이라는 것이다. 한나는 전형적으로 구술만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갖는 마련인 즉각적이면서 비논리적인 논쟁을 통해 미하엘을 공격하기도 하고, 미하엘이 남겨놓은 쪽지를 읽지 못해 없애버리고 시치미를 떼기도 한다. 미디어학자 마셜 매클루언이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구술언어 중심의 인간은 타인과의 교섭이나 세계 이해에 있어서 전혀 다른 지평을 갖는 것이다. 현실 상황이 지나가버린 뒤 기억을 매개로 글쓰기하는 관행에 익숙한 논리에 얽매이는 문자인간이 생리적으로 사고하는 구술인간을 논쟁으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소설의 중반부, 한나는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두 사람이 재회 아닌 재회를 하게 된 것은 아유슈비츠 나치부역자 재판이 이뤄지는 곳에서였다. 지멘스에서 일하고 있던 한나는 수감자를 선별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그 수감자들의 학살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미하엘이 지켜보는 와중에 한나는 자신이 문맹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자백하고, 종신형을 받게 된다. 인간에게 읽고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치열하지만 담담하게 인간이 쌓아올린 글쓰기 문명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