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한 편의 시가 계절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시 한 구절을 읽으면, 적당하게 짭조름하고 달큰한 가자미의 살맛이 입안에 돌기도 하고, 어떤 시 한 구절을 읽으면, 새큼한 자두의 맛과 향기가 매끄러운 입안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때론 살갗에 텁텁한 여름의 열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햇빛을 받아 활발하게 살아나려고 애쓰고 있는 풀들의 비릿한 생명의 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냄새도 아니고, 맛도 아닌, 몇 줄 글에 불과한 그것은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계절의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몇 개의 단어의 연결에 불과한 그것이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다름 아니라 계절의 감각을 일으키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감각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만큼 언어를 다루는 작가의 뛰어난 솜씨 때문인가. 아니면 그토록 강렬한 계절의 인상 때문인가. 혹은 내가 언젠가 경험했지만, 잊어버렸던 감각이 뒤늦게야 손님처럼 찾아오기 때문일까. 언어의 구절과 독자들의 감수성, 그리고 계절의 감각들이 뒤섞인 어딘가에서 마치 연금술처럼 불과 몇 줄의 단어에 불과한 그 시는 계절이 된다.
우리는 이처럼 계절을 상기시키는 몇 편의 시들을 알고 있다. 김소월이 ‘진달래꽃’에서 처럼 봄을 알리면서, 동시에 다가올 이별을 예감하는 ‘진달래꽃’의 연분홍 색깔은 우리가 모두 겪었던 마음이 아린 계절을 상기하게 한다. 요즘이면 읽기 좋은 이육사의 ‘청포도’는 어떤가. 제국주의의 광풍 아래 식민지를 겪었던 한국에서 가장 핍박받았던 이육사라는 시인의 여름은, 청포도 향기로 가득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일제의 핍박을 받아가며 독립운동을 하느라 정작 고향의 여름은 몇 번 보지 못했을 그의 여름이 마음속에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분명 우리 모두는 이육사의 고향인 안동에서 그가 경험했던 여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낮동안의 열기나 차분해진 밤의 공기, 청포도가 익어가는 향기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남겨둔 구절을 통해 각자가 경험했던 여름의 감각을 소환하곤 한다. 정작 여름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저 다가온 더위 덕분에 계절의 인상 같은 것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내 방 안에 머물러 차분히 불과 몇 단어 되지 않는 시의 구절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여름의 인상이 나에게 손님처럼 찾아온다.
하나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속에 던지는 파문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마음속 깊은 안 쪽에 숨겨 두었던 경험들을 통합적으로 새롭게 경험한다. 불과 한 줌에 불과한 시가 갖는 힘이 그것이고,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야말로 그것이 아닐까.
그래서 여름이면 이육사의 ‘청포도’를 읽는다. 나는 비록 그가 살았던 마을에 주저리주저리 열렸던 전설들도 알지 못하고, 그가 그토록 바랐던 푸른 바다에서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으로 온 손님을 기다려본 경험도 없지만, 그 언어에 가만히 집중하고 있으면, 예전 내가 경험했던 여름들이, 또한 무언가에 대한 간절한 바람들이 기억 저편으로부터 건너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 편의 시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계절이다. 분명 이육사는 민족시인이라고 해도 좋을, 우리에게 가장 상징적인 시인이지만, ‘청포도’라는 시 한 수 만으로 그는 여름의 시인이기도 하다. 그렇게 여름이 되면 언제나 이육사의 시는 그 시를 뇌이는 독자들에게 여름을 선물할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