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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사이를 오갔던 예술적 우정 색깔

등록일 2024-11-12 19:21 게재일 2024-11-1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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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지만, 정작 그 소설이 박태원과 이상의 우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진은 26회(1934년 9월 13일)의 삽화로, 이상은 두 사람이 당시 입지도 않았던 턱시도 차림으로 경성의 밤거리를 나다니는 모습을 상상해서 그렸다. 중간 두 사람 중에서 왼쪽이 구보씨 박태원이었고, 오른쪽이 이상이다.

우리는 지금 평범한 글쓰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글쓰기의 기술이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하면서, 그것은 빛을 잃게 되었다. 물론, 글쓰기가 특별한 특권층의 무엇이었던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는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빛이 죽어버린 글쓰기를 위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생각해보고 싶은 것 뿐이다.

과거, 진정 특별한 기술이었던 글쓰기는 이제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되었다. 대학에서도 아직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고, 글쓰기와 관련된 책들도 존재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글쓰기를 잘하지 못해서 가슴 태우는 이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글쓰기의 기술이 평등해지고, 평범해져버렸다는 것을 반증한다. 문해력의 위기 같은 진단도 나오지만, 글쓰기가 테크닉의 문제일 뿐이라면, 지금 한국에 있는 학생들이 조선시대의 어떤 지식인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으로 무엇을 써내고 표현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 훨씬 빠르지 않은가.

글쓰기의 진정한 불황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글쓰기를 토대로 이뤄왔던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더 이상 글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에서 도래한다. 이미지로도, 동영상으로도 감정은 전달되지만, 지나칠 만큼 투명한 그것은 전달되는 감정을 지나치게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애초에 그것뿐이었다면, 우리는 아쉬움을 느낄 리 없다. 사랑을 표현하는 색깔이 본래 한 가지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는 색깔이 한 없이 밝은 것에서, 한 없이 어두운 것까지, 한 없이 가벼운 것부터, 한 없이 진득한 것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기억을 가진 사람이 단 한 가지 사랑의 색깔에 탐탁해 하지 못하는 것이야, 당연할 일 아닌가. 그처럼 한 줄의 문장이 찬연히 빛났던 시대를 기억하는 것 정도는 용서되리라 믿는다.

사실, 지금이야 작가들 사이의 우정 같은 것은 작가의 신화를 구축하는 데 하등 도움을 주지 못하는 요소겠지만, 작가라는 존재가 지금의 연예인 같은 지위를 갖고 있던 시대에 작가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 사이에 오고 갔던 우정과 사랑은 현재 아이돌 스타들 사이의 그것을 넘어서는 파급력을 가졌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처럼 모두가 글쓰기의 기술을 습득한 시대에야 철지난 이야기로 웃고 말아 버리겠지만, 한 줄의 문장이 찬연히 빛나는 것처럼 보였던 시대에는 글쓰기의 재능이란 천부의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다.

시인 이상이 경영하던 제비다방에서, 소설가 박태원이 찾아와 친구가 되고, 서로 끝없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를 당대의 시인 정지용과 이태준에게 소개하고, 이상은 ‘오감도’를 발표한다. 그렇게 연재되던 ‘오감도’가 독자들의 비난에 싸여 중단될 무렵, 박태원이 발표했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이상은 삽화를 그렸다. 박태원은 이 소설의 말미에 이상을 등장시켰다. 박태원이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어 떠올린 한 명의 친구, 하얗고 납작한 찻집을 경영하며 석 달이나 집세를 밀려 내용 증명 우편을 받았던 친구, 그래도 오늘은 술을 사 달라는 박태원의 제안에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오케이했던 그가 바로 이상이었다. 박태원은 1937년 이상이 죽었을 때, 누구보다도 슬퍼했고,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통해 그를 기억했다. 이것이 찬연한 글쓰기의 시대, 작가들 사이의 우정이었다. 앞으로 글쓰기라는 기술이 사라질 것인가, 글쓰기는 AI의 전유물이 될 것인가, 하는 우려가 사라지지 않아도, 우정과 죽음, 사랑 같은 기억의 색깔만큼은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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