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에는 그동안 도전해보지 못했던 조금 두툼한 책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박경리의 ‘토지’나, 최명희의 ‘혼불’ 같은 것도 좋겠고,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좋겠다. 따뜻한 집안에서 그들과 함께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다보면, 이번 겨울은 마음 든든히 지나갈 테다. 사진은 박경리의 ‘토지’ 1권(마로니에북스).
겨울이다. 뜨겁던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순환하는 계절은 틀림없이 겨울로 옮겨간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요즘에는 실내에만 있으면 계절의 변화를 특별히 느끼지 않도록 살아가게 된 세상이지만,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 들이쉬는 숨 속에,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서 어김없는 겨울을 느낀다.
본디 인간의 편리한 생활을 위한 기술들은 모두 인간이 외부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고 항상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발전해왔다. 공간의 변화도, 시간의 변화도, 계절의 변화 같은 것도 모두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자연의 요소들이지만, 더운 곳에서 더운 것을 줄이고, 추운 곳에서 추운 것을 줄이고, 시끄러운 곳에서 그 소음을 줄이고, 지나치게 조용한 곳에서 그 적막을 줄여 인간이 항상 그대로 머물도록 만드는 것이 지금 인간을 위한 테크놀로지의 핵심인 것만 같다.
하지만, 가끔 무언가 아쉬워지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변화야 말로 인간이 아닌가 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짧은 가을을 보내고, 성큼 겨울을 맞은, 더이상 흘러가는 계절에 아무 감상도 남길 여유가 없는 세상의 흐름을 보면, 어쩐지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전에는 책 읽기 좋은 계절은 가을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치열한 여름을 보내고 난 뒤에 이제 좀 살만해져서 책이라도 좀 읽을까 하는 계획을 세우려는 사람의 자기 변명 같은 합리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면 어느 산에나 붉고 누런 빛들이 가득한데, 그것을 구경하느라 바빴을 테지, 굳이 책을 읽을 여유가 있었겠는가. 가을은 책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좋은 계절이지만, 모든 놀이 중에서도 책을 읽는 게 제일이라는 선생의 감각이 반영된 말이다.
겨울이면 바깥에서 불어닥치는 찬 겨울 바람을 속절없이 다 맞아야 했던 옛날집들과 달리, 요즘에는 딱 좋은 온도로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시대인 만큼, 요즘에는 책 읽기 가장 좋은 계절은 겨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외출해서 추위에 시달리고 난 뒤에, 따뜻한 국밥의 국물이 필요하듯, 동상에 걸릴 정도로 허전해진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책 한 권이다. 책보다 더 재미있는게 많은 시대니, 마음을 어지럽히는 컴퓨터와 TV는 잠시 꺼두고, 게임 같은 것은 잠시 치워두고, 뭣하면 음악을 들릴락 말락하게 켜두고, 평소에 두께 때문에 도전하지 못했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박경리나 조정래의 책들을 펴놓고 읽기 시작한다면, 그것으로 겨울날은 흘러간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거나, 이후에 아무 일도 없다면, 한 잔의 술을 마셔도 좋을 테다.
책이란 무엇을 읽을까 고르고, 그것을 읽기 시작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책 속의 글자들은 작가가 마침표를 찍은 이후에는, 인쇄소에서 찍어내고 제본한 이후에는 변화하지 않고 그 속에 그대로 들어있을 테니, 책 속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영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다른 생각들로 지나치게 번잡스럽거나, 아직 그 글자들을 씹고 소화해서 내 몸을 흐르는 피와 살로 만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포기하거나 무리해서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하지 않고, 같은 페이지, 같은 줄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읽어도 그 경험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뿌듯한 것은 뿌듯한 대로, 책을 읽는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보고 또 보아도 허전하기만 한 OTT의 영화를 보는 경험과는 다르다. 차가운 겨울날 따뜻한 국밥의 국물을 들이켜는 것 같은 겨울의 책읽기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