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겨울의 책읽기-마음을 든든하게 만드는 책 한 권

이번 겨울에는 그동안 도전해보지 못했던 조금 두툼한 책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박경리의 ‘토지’나, 최명희의 ‘혼불’ 같은 것도 좋겠고,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좋겠다. 따뜻한 집안에서 그들과 함께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다보면, 이번 겨울은 마음 든든히 지나갈 테다. 사진은 박경리의 ‘토지’ 1권(마로니에북스). 겨울이다. 뜨겁던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순환하는 계절은 틀림없이 겨울로 옮겨간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요즘에는 실내에만 있으면 계절의 변화를 특별히 느끼지 않도록 살아가게 된 세상이지만,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 들이쉬는 숨 속에,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서 어김없는 겨울을 느낀다. 본디 인간의 편리한 생활을 위한 기술들은 모두 인간이 외부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고 항상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발전해왔다. 공간의 변화도, 시간의 변화도, 계절의 변화 같은 것도 모두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자연의 요소들이지만, 더운 곳에서 더운 것을 줄이고, 추운 곳에서 추운 것을 줄이고, 시끄러운 곳에서 그 소음을 줄이고, 지나치게 조용한 곳에서 그 적막을 줄여 인간이 항상 그대로 머물도록 만드는 것이 지금 인간을 위한 테크놀로지의 핵심인 것만 같다. 하지만, 가끔 무언가 아쉬워지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변화야 말로 인간이 아닌가 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짧은 가을을 보내고, 성큼 겨울을 맞은, 더이상 흘러가는 계절에 아무 감상도 남길 여유가 없는 세상의 흐름을 보면, 어쩐지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전에는 책 읽기 좋은 계절은 가을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치열한 여름을 보내고 난 뒤에 이제 좀 살만해져서 책이라도 좀 읽을까 하는 계획을 세우려는 사람의 자기 변명 같은 합리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면 어느 산에나 붉고 누런 빛들이 가득한데, 그것을 구경하느라 바빴을 테지, 굳이 책을 읽을 여유가 있었겠는가. 가을은 책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좋은 계절이지만, 모든 놀이 중에서도 책을 읽는 게 제일이라는 선생의 감각이 반영된 말이다. 겨울이면 바깥에서 불어닥치는 찬 겨울 바람을 속절없이 다 맞아야 했던 옛날집들과 달리, 요즘에는 딱 좋은 온도로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시대인 만큼, 요즘에는 책 읽기 가장 좋은 계절은 겨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외출해서 추위에 시달리고 난 뒤에, 따뜻한 국밥의 국물이 필요하듯, 동상에 걸릴 정도로 허전해진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책 한 권이다. 책보다 더 재미있는게 많은 시대니, 마음을 어지럽히는 컴퓨터와 TV는 잠시 꺼두고, 게임 같은 것은 잠시 치워두고, 뭣하면 음악을 들릴락 말락하게 켜두고, 평소에 두께 때문에 도전하지 못했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박경리나 조정래의 책들을 펴놓고 읽기 시작한다면, 그것으로 겨울날은 흘러간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거나, 이후에 아무 일도 없다면, 한 잔의 술을 마셔도 좋을 테다. 책이란 무엇을 읽을까 고르고, 그것을 읽기 시작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책 속의 글자들은 작가가 마침표를 찍은 이후에는, 인쇄소에서 찍어내고 제본한 이후에는 변화하지 않고 그 속에 그대로 들어있을 테니, 책 속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영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다른 생각들로 지나치게 번잡스럽거나, 아직 그 글자들을 씹고 소화해서 내 몸을 흐르는 피와 살로 만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포기하거나 무리해서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하지 않고, 같은 페이지, 같은 줄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읽어도 그 경험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뿌듯한 것은 뿌듯한 대로, 책을 읽는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보고 또 보아도 허전하기만 한 OTT의 영화를 보는 경험과는 다르다. 차가운 겨울날 따뜻한 국밥의 국물을 들이켜는 것 같은 겨울의 책읽기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11-26

작가 사이를 오갔던 예술적 우정 색깔

우리는 지금 평범한 글쓰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글쓰기의 기술이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하면서, 그것은 빛을 잃게 되었다. 물론, 글쓰기가 특별한 특권층의 무엇이었던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는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빛이 죽어버린 글쓰기를 위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생각해보고 싶은 것 뿐이다. 과거, 진정 특별한 기술이었던 글쓰기는 이제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되었다. 대학에서도 아직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고, 글쓰기와 관련된 책들도 존재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글쓰기를 잘하지 못해서 가슴 태우는 이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글쓰기의 기술이 평등해지고, 평범해져버렸다는 것을 반증한다. 문해력의 위기 같은 진단도 나오지만, 글쓰기가 테크닉의 문제일 뿐이라면, 지금 한국에 있는 학생들이 조선시대의 어떤 지식인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으로 무엇을 써내고 표현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 훨씬 빠르지 않은가. 글쓰기의 진정한 불황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글쓰기를 토대로 이뤄왔던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더 이상 글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에서 도래한다. 이미지로도, 동영상으로도 감정은 전달되지만, 지나칠 만큼 투명한 그것은 전달되는 감정을 지나치게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애초에 그것뿐이었다면, 우리는 아쉬움을 느낄 리 없다. 사랑을 표현하는 색깔이 본래 한 가지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는 색깔이 한 없이 밝은 것에서, 한 없이 어두운 것까지, 한 없이 가벼운 것부터, 한 없이 진득한 것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기억을 가진 사람이 단 한 가지 사랑의 색깔에 탐탁해 하지 못하는 것이야, 당연할 일 아닌가. 그처럼 한 줄의 문장이 찬연히 빛났던 시대를 기억하는 것 정도는 용서되리라 믿는다. 사실, 지금이야 작가들 사이의 우정 같은 것은 작가의 신화를 구축하는 데 하등 도움을 주지 못하는 요소겠지만, 작가라는 존재가 지금의 연예인 같은 지위를 갖고 있던 시대에 작가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 사이에 오고 갔던 우정과 사랑은 현재 아이돌 스타들 사이의 그것을 넘어서는 파급력을 가졌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처럼 모두가 글쓰기의 기술을 습득한 시대에야 철지난 이야기로 웃고 말아 버리겠지만, 한 줄의 문장이 찬연히 빛나는 것처럼 보였던 시대에는 글쓰기의 재능이란 천부의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다. 시인 이상이 경영하던 제비다방에서, 소설가 박태원이 찾아와 친구가 되고, 서로 끝없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를 당대의 시인 정지용과 이태준에게 소개하고, 이상은 ‘오감도’를 발표한다. 그렇게 연재되던 ‘오감도’가 독자들의 비난에 싸여 중단될 무렵, 박태원이 발표했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이상은 삽화를 그렸다. 박태원은 이 소설의 말미에 이상을 등장시켰다. 박태원이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어 떠올린 한 명의 친구, 하얗고 납작한 찻집을 경영하며 석 달이나 집세를 밀려 내용 증명 우편을 받았던 친구, 그래도 오늘은 술을 사 달라는 박태원의 제안에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오케이했던 그가 바로 이상이었다. 박태원은 1937년 이상이 죽었을 때, 누구보다도 슬퍼했고,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통해 그를 기억했다. 이것이 찬연한 글쓰기의 시대, 작가들 사이의 우정이었다. 앞으로 글쓰기라는 기술이 사라질 것인가, 글쓰기는 AI의 전유물이 될 것인가, 하는 우려가 사라지지 않아도, 우정과 죽음, 사랑 같은 기억의 색깔만큼은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11-12

아름답지만 슬프고, 유쾌한 만큼 우울한

인류는 어쩌면 전쟁이라는 끔찍한 운명으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할 모양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은 끝날 줄 모르고 장기화하고, 중동에서도 또 새롭게 전쟁 발발의 소식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는 과연 인류라는 역사 속에서 전쟁이라는 기록을 지워낼 수 있을까. 결국 전쟁으로 비롯된 상처와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됨의 숙명이 아닐까 하는 절망적인 인식만 생기게 된다. 인간의 역사는 본래 아무 것도 없었던 시간의 한 축에 시작점을 두고, 그곳으로부터 시간을 한 방향으로 누적시켜가며 어딘가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그 시작의 지점으로부터 무려 2024년이나 지나 있는 것이다. 수천 년이나 되는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차츰 발전해가면서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나, 발전의 관점으로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누적된 시간이라는 개념의 탓도 있으리라. 사실 꼭 시간이 그런 형태를 취해야 할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한 쪽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인식일 뿐으로, 시계의 추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인간의 시간도 세대를 거치며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도 몇천 년의 인류의 역사라고 하면, 왠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어딘가의 방향을 향해 발전해나가는 것에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문득 여전히 일어나는 전쟁 소식에 가슴을 쥐어뜯게 되는 것은 나 역시 인류로서 그러한 책임감을 공유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우리는 지난 수천 년의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전쟁의 상처에 대해 쓰고 그렸던 문학과 미술로 인류를 뒤덮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인류의 역사가 어딘가의 방향으로 흘러간다거나 심지어 ‘진화’해간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인가. 문학예술이 하등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 인류의 ‘퇴화’를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여주는 것 자체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인류가 한 번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것을 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전쟁은 일어나기 마련이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전쟁의 상처에 대해 문학 작품으로 다뤘지만,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Jr.·1922~2007)만큼 개인적인 전쟁의 경험을 글쓰기 속에 투영했던 작가는 또 없을 것이다. 그의 ‘제5도살장’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겪은 전쟁의 트라우마 한 가운데로 이끌어 그 공황에 가까운 기억을 공유하도록 만든다.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 병사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빌리 필그림이 포로로 잡혀 독일 작센 지역의 드레스덴 근방의 도살장에 수용되었다가,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에 휘말렸다가 살아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게 줄거리를 소개하면, 마치 일반적인 소설 같지만, 이 소설은 전쟁의 상처를 겪은 빌리의 파탄난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그가 겪은 시간들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두서 없는 서술로 이어져있다. 전쟁 이후의, 일종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고 해도 좋을 공황은 그를 환각과 실제, 기억과 진술 사이를 오가면서 완결된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만든다. 두서 없는 시간의 서사 구성, 그 사이에서 다만 번뜩이고 있는 위트가 바로 커트 보니것의 전쟁의 트라우마이자, 전쟁에 대해 비판하는 소설의 기술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아름다운 만큼 슬프고, 번뜩이는 위트만큼이나 우울하다. 마치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에 휘말려갈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빌리가 그렇듯, 참담하게 “뭐 그런 거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익대 교수

2024-10-15

낯선 곳에서 익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무심히 있을 때는 흘러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던 시간도,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고, 무언가 해야할 일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실제로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여름이 한창일 때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그 계절도 뺨에 스치는 바람 한 줄기, 길가의 나무들의 색이 바뀌는 것을 보고나서야 다음의 계절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래 시간이란 나와 관계 없이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을 느끼는 나의 감각이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늘 다니고 있는 이곳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공간이란 늘 그곳에 그렇게 나와 상관 없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 공간을 어떻게 인지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따라 그 공간은 나에게 전혀 다른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공간의 형태,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구조물도 그렇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삶에 있어서의 사건들은 우리를 그 공간을 하나의 의미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는 데 주요하게 작용한다. 우리가 처음 가본 장소와, 추운 겨울날 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꽈당 넘어진 장소의 의미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계속 다녔던 그 거리 곳곳에는 그 공간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기억들이 켜켜히 쌓여 무언가 특별한 어떤 것이 된다. 우리가 옛날부터 살았던 동네에, 한참 어른이 되어 다시 갔을 때 느끼는 어떤 종류의 느낌은 바로 그 공간이 아직 나에게 특별한 장소로 각인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시간도 공간도, 단지 무심하게 그곳에 놓여 천천히 풀리고 있는 태엽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과 만나게 되면, 좀 더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 타인이 보기에 별 것 없는 오후 4시의,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원이라도 그곳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은 쌓여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공간을 장소로서 기억하고, 누군가는 그 장소를 사진으로 남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의 이야기를 담아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영화로 타인에게 전한다. 그렇게 어떤 공간에 담겨 있는 누군가의 특별한 기억은 단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으로 공유된다. 한국에서 이처럼 특별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특히 소설로 잘 구현했던 작가는 아마도 작가 이효석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짧디 짧은 단편은 장소 속에 담긴 인간의 특별한 기억을 타인에게 공감의 형태로 전했던 가장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메밀꽃밭이야 단지 이효석의 고향이었던 평창 봉평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칠흙 같은 밤 메밀꽃밭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남긴 몇 줄의 글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몇 줄의 글에 담긴 조선달과 동이의 미묘한 이야기와 메밀꽃밭을 비추는 달빛이 없었다면, 애초에 메밀꽃밭이라는 것이 특별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작가 이효석이 달밤과 메밀꽃밭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이 이 작품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소학교를 평창에서 다닌 이후 계속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어린 시절 어딘가에는 분명 “부드러운 빛을 흐뭇히 흘리고” 있던 달빛과 흐드러진 메밀꽃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남긴 짧은 글을 통해 그의 극히 내밀한 기억을 훔쳐보고 있을 뿐이다. 낯설기 짝이 없는 그 시간과 장소를, 마치 내가 언젠가 경험했던 것 같은 익숙한 기억을 가지고.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09-24

‘비국민’이 기억하는 한국의 광복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1930~1975)는 60년대 이후 일본에서 장르소설, 특히 기업소설이나 모험, 추리소설 등을 쓰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한국에서 경험했던 전쟁에의 기억을 다수의 작품에서 남겼다. 한국에서는 1967년 신상옥 감독이 그의 소설 ‘이조잔영(李祖殘影)’을, 1979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그의 소설 ‘족보(族譜)’를 각각 영화로 만드는 등 그가 보여준 1940년대 무렵의 한국의 기억에 이해와 공감을 보냈다. 사진은 1963년에 ‘이조잔영’으로 나오키상 후보가 되었을 무렵의 가지야마 도시유키. 소설가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는 1930년 한국에서 태어나, 소학교와 중학교를 경성에서 졸업하고,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은 바로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광풍과 패전이라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그가 첫 번째로 쓴 습작이라고 해도 좋을 ‘족보’가 바로 그 시기를 다룬 것으로, 제국주의적 폭력이 극에 다다랐던 1940년대 초 한국인에게 강요되던 창씨개명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 기억해둘 만한 지점이 존재한다.이 작품은 미술학교를 졸업했지만, 전쟁 동원을 피하려고 당시 경기도청 총무부에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은 다니 로쿠로라는 주인공이 700여 년이 넘는 가문의 역사를 지키려고 창씨개명만은 거부하려고 하는 설진영이라는 이를 찾아가 설득하는 것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이제 쉰사오 세쯤 된 설진영은 소작미 2만석을 총독에게 헌납할 정도로 친일파로 자신의 가문 외에 아무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다.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위해 윗선의 명령을 받고 그의 집을 방문했던 다니 로쿠로는 설진영의 딸 옥순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술을 배웠다는 것을 알고 친밀감을 느끼면서도, 궤짝 가득 쌓여 있는 족보를 보여주며 성씨의 개명만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그의 태도에 한편으로는 공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답답해 한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대단한 것처럼 내선일체나, 창씨개명의 대의를 내세우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목표 달성만을 독려하는 총무과의 과장이나 계장의 이중적인 태도에 반감을 갖는다. 결국 설진영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담당자들은 헌병을 동원해 그의 딸과 결혼하기로 한 남자를 고문하거나, 그의 손주들이 다니는 학교를 압박해서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요하고, 결국 그는 창씨개명 서류를 제출한 뒤 집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만다.이 작품은 작가가 어린 시절 한국에서 직접 보고 들었던 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창씨개명이나 전쟁공출을 강제했는가 하는 전쟁 직전의 분위기를 어떤 문장보다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우리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을 광복 이전의 가장 어두운 분위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듯하다.목표 달성을 위해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경기도 총무부의 과장과 자신이 대물림한 족보를 지키기 위해 성씨를 바꾸는 것만큼은 거부하는 설진영 사이에서, 이 소설 ‘족보’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우유부단함은 양분된 현실 사이에서 이해를 도모하는 유일한 입장일 수밖에 없겠지만, 과장은 그런 그를 ‘비국민’으로 취급하고, 설진영의 가문 사람들은 그를 총독부의 앞잡이 정도로 취급한다. 친일과 반일 그 중간 어딘가에 끼어 있는 존재인 그는 유일하게 족보가 가진 의미를 이해하는 존재지만,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중간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그의 존재야말로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증언한다.8월은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뜻깊은 기간이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하고 점령해서 식민지로 만드는 제국주의의 야만성에 대해 되새기는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그 쓰라린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그런 야만의 역사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비국민’이라는 다른 자리와 다른 목소리로, 마찬가지로 폭력의 역사에 대한 폭로와 이해에 동참한다. 그 역시 기억할 만한 소중한 증언일 것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4-08-20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시절이면

시인 이육사는 1904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해서 일제 강점기 무려 17번이나 경찰에 체포되면서 항일 운동을 이어간 한국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이다. 비록 그는 한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에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겨둔 삶에 대한 저항과 희망 넘치는 시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때로는 한 편의 시가 계절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시 한 구절을 읽으면, 적당하게 짭조름하고 달큰한 가자미의 살맛이 입안에 돌기도 하고, 어떤 시 한 구절을 읽으면, 새큼한 자두의 맛과 향기가 매끄러운 입안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때론 살갗에 텁텁한 여름의 열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햇빛을 받아 활발하게 살아나려고 애쓰고 있는 풀들의 비릿한 생명의 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냄새도 아니고, 맛도 아닌, 몇 줄 글에 불과한 그것은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계절의 인상을 불러일으킨다.사실, 몇 개의 단어의 연결에 불과한 그것이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다름 아니라 계절의 감각을 일으키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감각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만큼 언어를 다루는 작가의 뛰어난 솜씨 때문인가. 아니면 그토록 강렬한 계절의 인상 때문인가. 혹은 내가 언젠가 경험했지만, 잊어버렸던 감각이 뒤늦게야 손님처럼 찾아오기 때문일까. 언어의 구절과 독자들의 감수성, 그리고 계절의 감각들이 뒤섞인 어딘가에서 마치 연금술처럼 불과 몇 줄의 단어에 불과한 그 시는 계절이 된다.우리는 이처럼 계절을 상기시키는 몇 편의 시들을 알고 있다. 김소월이 ‘진달래꽃’에서 처럼 봄을 알리면서, 동시에 다가올 이별을 예감하는 ‘진달래꽃’의 연분홍 색깔은 우리가 모두 겪었던 마음이 아린 계절을 상기하게 한다. 요즘이면 읽기 좋은 이육사의 ‘청포도’는 어떤가. 제국주의의 광풍 아래 식민지를 겪었던 한국에서 가장 핍박받았던 이육사라는 시인의 여름은, 청포도 향기로 가득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일제의 핍박을 받아가며 독립운동을 하느라 정작 고향의 여름은 몇 번 보지 못했을 그의 여름이 마음속에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분명 우리 모두는 이육사의 고향인 안동에서 그가 경험했던 여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낮동안의 열기나 차분해진 밤의 공기, 청포도가 익어가는 향기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리 없다.하지만, 우리는 그가 남겨둔 구절을 통해 각자가 경험했던 여름의 감각을 소환하곤 한다. 정작 여름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저 다가온 더위 덕분에 계절의 인상 같은 것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내 방 안에 머물러 차분히 불과 몇 단어 되지 않는 시의 구절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여름의 인상이 나에게 손님처럼 찾아온다.하나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속에 던지는 파문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마음속 깊은 안 쪽에 숨겨 두었던 경험들을 통합적으로 새롭게 경험한다. 불과 한 줌에 불과한 시가 갖는 힘이 그것이고,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야말로 그것이 아닐까.그래서 여름이면 이육사의 ‘청포도’를 읽는다. 나는 비록 그가 살았던 마을에 주저리주저리 열렸던 전설들도 알지 못하고, 그가 그토록 바랐던 푸른 바다에서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으로 온 손님을 기다려본 경험도 없지만, 그 언어에 가만히 집중하고 있으면, 예전 내가 경험했던 여름들이, 또한 무언가에 대한 간절한 바람들이 기억 저편으로부터 건너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 편의 시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계절이다. 분명 이육사는 민족시인이라고 해도 좋을, 우리에게 가장 상징적인 시인이지만, ‘청포도’라는 시 한 수 만으로 그는 여름의 시인이기도 하다. 그렇게 여름이 되면 언제나 이육사의 시는 그 시를 뇌이는 독자들에게 여름을 선물할 것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07-23

그렇게, 전쟁의 풍경이 된 여성들

잔뜩 비를 머금어 당장이라도 비를 쏟을 것 같은 어두텁텁한 구름 속에 들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전쟁의 기운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모두를 풍경으로 만든다. 전쟁의 중심에서 누구와 싸우는지 알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도, 그 어두운 구름의 가장 가장자리에서 삶만은 여느 때나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시선이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전쟁의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시선은 존재하지 않고, 누구와 왜 싸우고, 지금 어떤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전쟁이 일으키는 찜찜한 분위기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계속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작가 박경리(1926~2008)가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전에 썼던 ‘김약국의 딸들’(1962)이나 ‘파시(波市)’(1964)는 모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한국의 가장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과 통영에서 이어지고 있던 삶을 그린 작품이다.전쟁이 남긴 상처가 그토록 깊고도 깊었기 때문인지, 막상 닥쳤을 때는 무언가 콱 막혀 전혀 명료한 언어로 표현되지 않던 상처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나서야 터져 나오기 때문인지,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작가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하필이면 전쟁의 가장자리이자, 작가의 고향이었던 통영의 바닷가에서.이 중에서도 소설 ‘파시’는 1964년 7월에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당시 화단의 중진으로 성장하고 있던 화가 천경자(1924~2015)가 삽화를 맡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고흥 출신인 화가 천경자와 통영 출신의 작가 박경리가 만나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국면인 한국전쟁을 겪는 여성들의 내밀한 역사를 그려냈던 것이다.이 작품은 부산의 대청동에서 조만섭이라는 나이 든 남자와 수옥이라는 젊은 여자가 통영으로 들어가는 연락선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전쟁 이전에는 부유하게 살았지만, 전쟁 중에 월남하면서 가족을 모두 잃고 조만섭 손에 맡겨진 수옥의 안타까운 사연은 나중에서야 알려지지만, 박경리 작가의 필체로부터 수옥이 가지고 있는 불안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다. 스물한 살이나 되었지만 무엇을 물어보아도 시원한 답이 오지 않는 수옥의 태도는 분명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죽어버리고 만 부모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던 까닭이리라. 그처럼 말 한 마디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수옥을 눈여겨 보고 있던 남자는 그녀를 노리고 접근한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수옥이 겪는 고난과, 조만섭의 딸 명화가 겪는 꿈의 좌절과 관계의 상실이다. 그런 이야기야 전쟁과 상관없이 인간 세계에서 늘 일어나는 것이다.이 소설에서 여성들은 종종 소설의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난다. 이 작품에서 전쟁의 공포를 유일하게 목격했던 수옥은 한 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내 수동적인 태도를 버릴 수 없다. 명화는 결혼이냐 유학이냐 하는 문제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끝내 좌중우돌하기만 한다. 그 때문인지, 소설에 등장하는 이 두 여성 주인공은 종종 독자들의 바람을 벗어나 시선의 바깥으로 사라져 풍경이 된다. 그들의 존재가 풍경이 되는 것은 단지 그 존재가 미미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는 박경리가 아닌가.어쩌면 그들이 풍경이 되는 것은 소설이라는 글쓰기를 통해서는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욕망어린 시선으로는 그들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기 때문이다.전쟁을 다룬 소설이라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도구로 그들을 보려고 하니, 그들은 풍경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과연 그렇게, 풍경이 된 여성들은 어떻게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어떻게./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06-25

저, 고요하디 고요한 태풍 직전의 세계

나쓰메 소세키는 1905년, 대학 시절 친구였던 마사오카 시키가 창간하고, 그의 사후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던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의 한 구석을 빌려 연재했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의도치 않은 성공으로, 그야말로 당시 문단에 충격을 던지며 데뷔했다. 이전까지 그는 단지 영문학자로 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에 불과했지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예기치 않은 성공 이후, 쉬지 않고 창작에 몰두해서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10년여의 창작 생활을 통해 과거의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근대적 소설의 한 시작점을 열었다.정치소설이나 가정소설 등 굵직한 스토리와 드라마가 주류였던 메이지 시대의 소설계에서 나쓰메 소세키 특유의 관점과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은 글쓰기가 창조해낸 세계가 독자에게 특정한 감각이나 감정을 일으키고, 나아가 어떤 생각의 변화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한다는 예술로서의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해도 좋다.단지 흥미 있는 읽을거리로서의 의미에서 벗어나 문학이 자연주의나 상징주의 등, 미술의 예술적 사조를 본떠 예술적 창작을 지향하기 시작했던 그 시기 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분을 그가 차지하고 있다.그리 많다고도 적다고도 하기 어려운 작품들 중에서도 ‘태풍’(1907)은 유독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 해당한다. ‘도련님’의 다음이자, ‘산시로’를 시작으로 한 3부작의 이전이어서 그런지, 언제나 사건보다는 내면을 오가는 미묘한 심리가 주류가 되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이렇다 할 사건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런지, 알 수 없다. 분명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에서 들려오는 와글거리는 소리가 사그라들고 난 뒤, ‘산시로’와 ‘그후’ 등에서 마음속에서 파문처럼 일어나는 새로운 인상으로 넘어가기 전, 머뭇거림이 읽힌다. 인간이 자신이 영위해왔던 어떤 일관된 태도를 바꾸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때, 어쩔 수 없는 머뭇거림을 읽어낼 때, 나는 한 없는 인간다움을 읽어낸다. 인간이 행하는 일에 확신 같은 것은 가질 수 없다. 반드시 맞을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내딛는 발걸음이야말로 우리를 전혀 인간답지 않은 어딘가로 이끈다.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태풍’의 세계는 고요하다. 애초에 그 세계 속에는 도무지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학자인 시라이 도야와 좌충우돌하는 학생 다카바야시는 사실은 별개의 목소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소세키 자신의 각각 다른 두 개의 자아이다. 본래 하나였던 두 개의 자아가 만나 어떤 스펙터클한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태풍’의 세계는 분열한 두 자아가 아직 각자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서로 마주쳐 어색하게 예의를 차리는 세계다.아직은 내면이라고도, 균열된 자아들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는 태풍 직전의 고요함이 지배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 한 가운데를 “현대 청년에게 고함” 같은 사회주의의 구호가 가로지르고 있다. 이는 분명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가 번역했던 크로포트킨의 ‘청년에 고함’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사회’를 향한 주의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하는 것조차 아직 명확하지 않았던 시대의 풍경화 같은 것이다.글쓰기 같은 새김의 도구나, 서사 같은 언어 나열의 방식이나, 소설 같은 문학의 한 형식들은 본래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전달하는 외침이기도 하고, 언어를 통해 타인에게 보여주는 정교한 그림이기도 하고, 타인의 마음속을 해부하는 해부학이기도 하고, 그 모두이기도 하다.새로운 시대에 글쓰기가, 서사가, 소설이 예전과 같은 의미는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앞을 향해 내디딜 때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글쓰기는 여전히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저 고요하디 고요한 ‘태풍’의 세계가 보여주고 있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05-28

그 많던 헌책방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모리스 쿠랑은 ‘한국서지’에서 3821종의 한국 도서를 총 9부로 나누어 정리하면서 책에 담긴 의미나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 한국의 책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야말로 한국의 서책 문화가 빛나고 있던 한 시대의 중요한 기록이다. 1890년 주한프랑스공사관에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1865~1935)은 한국에서 나온 고서들의 방대한 목록을 모은 ‘한국서지(韓國書誌)’를 1894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해 1901년까지 총 4권의 책으로 완성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불과 20대 중반의 나이였던 젊은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책을 사랑하는 나라였다. 그는 자신이 모은 한국의 책에 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 한국 책에 대한 애정 깊은 목록을 완성했다.쿠랑은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보고 들었던 한국의 문화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남기고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19세기 말 한국 한성에 있던 서점의 풍경에 대해 귀중한 기록을 남겨두었다. 당시 한성의 서점들은 종각과 남대문 사이에 모여 있었는데, 쿠랑은 아마도 고제홍이라는 사람이 열고 있던 고제홍서사라는 서점에 방문해서 그가 책을 전시하고, 책을 파는 모습에 대해 꽤 상세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이 고제홍의 뒤를 이은 아들 고유상은 이 서점을 ‘회동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단순히 책을 파는 서점만이 아니라 출판까지 겸하면서 이른바 개화기 서적과 출판문화를 이끌었다. 온갖 새로운 지식이 책으로 엮여 소개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기념비적인 출판사도 시작은 양반집에서 흘러나온 경서의 신판이나 고서를 다루던 서점이었던 것이다.서울의 청계천에, 동대문 평화시장에, 부산 보수동 골목에 모여 있던 고서점들을 물론이고, 거리마다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던 헌책방들은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간다. 이는 서적과 출판이라는 매체를 통해 꽃피웠던 한 시대의 문화가 사라져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굳이 헌책방에 들르는 것은 내가 정확하게 찾는 책을 찾으려는 목적이 아니다. 헌책방에는 내가 원하는 책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발견이 있다.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책의 존재를 깨닫고 새로운 자극을 받고 오는 곳. 그곳이 바로 고서점이다. 마치 몰랐던 사람의 몰랐던 면모를 알게 되는 것처럼, 새로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어, 도움이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책을 잔뜩 사 가지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 헌책방을 방문하는 의미이다.하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지식에 있어서 새로운 발견이라는 측면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내가 원하는 지식의 내용을 원하는 만큼의 크기와 분량으로 적절한 시기에 제공받기를 바란다. 마치 우리 모두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필요한 지식 외의 새로운 변수가 될 무엇인가와의 우발적인 만남을 꺼린다. 확실히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헌책방의 서가를 하나하나 뒤져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헌책방에서 책을 찾는 것은 내가 원하는 지식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책을 찾아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다.책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처럼 가게 바깥으로 채 정리되지 못한 책들이 빠져 나와 있기 일쑤였던 헌책방들도 거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 많았던 헌책방들의 책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하나의 문화가 끝나고 또 다른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일요일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헌책방에 들러 우연히 예상에도 없던 책들을 만나 잔뜩 사 들고 와서 뿌듯함만큼은 그냥 내버리기는 아쉬운 것이다. 오늘은 큰 마음을 먹고 동네에 아직 남아 있는 헌책방을 좀 둘러보고 싶다.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까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싶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4-04-30

인간은 누구나 복수를 꿈꾼다

인간은 누구나 복수를 꿈꾼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한 번쯤은 복수를 꿈꾸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겪는 모든 것에 미숙했던 시기에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고, 때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기도 하고, 가끔 자신이 가진 일부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돈이나 집 같은 유형의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나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은 것이고, 가족이나 친구 같은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박탈당하는 것은 더욱 끔찍하다. 하물며 내가 인간임을 유일하게 증명해주는 자존심은 어떤가. 자만심이나 질투에 의해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존엄을 침해 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그럴 때 찾아오는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복수라는 원한의 감정뿐이다. 그것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없는 자기혐오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인 우리는 누구나 현재 복수를 꿈꾼다. 비록 실행할 수 없거나,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켠에는 복수에 대한 환상이나 원한의 감정을 가지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를 복수를 느리고 지루하게 진행하고 있는 와중일지도 모른다.복수를 꿈꾸는 원한의 감정이 인간에게 너무나 익숙한 감정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복수라는 테마가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문학 작품에서 늘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단언컨대, 복수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행위 중에서 가장 명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스펙터클한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니 역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복수는 당연하게도 여러 번 되풀이되어 읊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 생존과 존엄을 박탈당할 위기에 내몰린 주인공이 결국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복수를 행하는 서사의 짜릿함은 독자인 우리를 가장 감정적으로 자극한다.그런 의미에서,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Alexandre Dumas p00E8re, 1802~1870)가 1845년에 쓴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은 복수라는 주제를 구현했던 문학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복수의 서사적 문법을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는 어린 나이로 커다란 배의 선장이 되고,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을 약속하는 약혼식장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협력해 프랑스 황실에 반역했다는 혐의로 잡혀가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는 그를 시기하는 이들의 질투와 탐욕에 의해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적인 명예,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잃어버리게 된다.사실 이 에드몽 당테스가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1814년에 엘바섬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에 배를 정박해서 탈출을 도왔다는 명목이었다. 뒤마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등장해서 격변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 위에, 인간의 탐욕과 질투로 인한 누군가의 몰락을, 그로 인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복수를 향한 처절한 여정을 그려냈다.하지만, 복수라는 것은 마음먹기는 쉬울지 몰라도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쉬운 일일까. 에드몽 당테스는 감옥에서 파리스 신부를 만나 탈옥을 할 수 있게 되고, 그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아 복수의 대명사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된다. 그리고서도 평생에 걸쳐 집요하고 느린 복수를 결국 완성한다.인간은 누구나 복수를 꿈꾼다. 우리가 에드몽 당테스의 복수에 짜릿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안고 살 수밖에 없는 낯익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4-04-16

여행하는 마음과 책을 읽는 마음

어딘가에 가서 무언가 여기와는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을 여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여행하는 마음과 책을 읽는 마음은 꽤 상당히 닮아있다. 여행이 적절한 기간을 두고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끝나는 지점까지 이동하면서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만나거나 하는 것이 여행하는 마음이라면, 책의 첫 장을 펼쳐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언어들을 통해 지금 여기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 하는 것은 책을 읽는 마음이다. 결국 책의 마지막 장을 닫고 책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우리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삶의 경험들은 본디 하나의 단일한 직선을 그리면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이라는 삶은 우리의 본래의 현실적 삶과는 조금 달라 조금 더 순서를 가지고 흘러간다는 점에서 책을 읽는 과정과 훨씬 더 유사한 것이 아닐까.그래서일까. 예전부터 짧은 여행이라도 하게 되면 늘 여행 중에 읽을 책을 챙기곤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여행에서의 책 읽기가 성공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특히 느긋한 휴양의 여행이 아니라, 무언가 보아야 할 것이 많은 여행이라면, 여행에서의 경험과 책을 읽는 경험은 서로 나란히 어긋나 서로의 진행을 방해하곤 한다.보통, 여행 중이라면 가벼운 소설 같은 것을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소설책이야말로 여행 중에는 가장 위험한 피해야 할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다루고 있어서, 여행의 장소 감각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소설이라면 모를까. 여행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이동하면서 흘러가는 이야기적인 경험을 해야 하는 상황에, 또 다른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은 무리다. 자칫하면 여행하는 곳의 장소적 경험과 소설 속에서 경험하는 가상의 장소적 경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가급적 선이 굵은 확실한 스토리를 갖고 있는 역사소설 같은 것이 아니라 배경음악처럼 울릴 수 있는 에세이나 시집을 고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은 여행의 좋은 준비물이다. 어떤 여행지에서라도 스마트폰으로 어떤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고, 전자책에 담긴 몇만 권의 책을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적절한 것 이상의 정보는 여행에서는 방해만 된다. 나에게는 낯선 장소들을 잇는 경험을 통해, 나라는 존재 자체에 집중하기에는 종이책 만한 것이 없다. 언제나 약간의 아쉬움이, 또 약간의 불편함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게 한다. 여행 중 무언가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나, 대기해야만 하는 시간에 잠깐씩 꺼내 읽는 여행하는 누군가의 생각이 담긴 산문을 꺼내 읽으면, 그것은 하나의 점에서 하나의 점으로 이동하는 동안의 나의 귓전에 울리는 배경음악이 된다. 여행하는 장소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경험과 그 몇 줄의 글은 공진하면서 좀 더 특별한 경험이 된다. 특별한 여행을 만드는 과정이 된다.이번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면, 여행에서 볼 것, 먹을 것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함께 가져갈 책 한두 권 정도를 함께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은 그것에 대해 상상하고 고민하는 순간이 반 이상의 즐거움이니, 여행의 계획에 읽어야 할 책에 대한 생각이 들어 있다면 분명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동안 사두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책들을 싸들고 가는 것도 좋을 테고, 여행의 장소와 어울리는 책을 골라 가지고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여행은 경험이고, 책을 읽는 것도 경험이다. 여행을 하면서 책을 읽는 마음이란 확실히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01-16

하나의 낱말이 주는 청량감 하나의 문장이 주는 따뜻함

시의 언어가 주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한 권의 시를 낭독해보거나, 필사해보는 경험이 가장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의미를 찾아내고 요약하는 방식의 독서에 익숙해져 있어서 언어가 주는 청각적 울림이나, 시각적 새김에 대해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다. 하나의 시를 낭독을 해보거나 필사를 해보면, 그동안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감각 기관을 쓰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어떤 시집이라도 좋겠지만, 이 겨울에는 이문재 시인의 시집 ‘혼자의 넓이’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은 창비에서 출판된 해당 시집의 표지이다. 가끔은 스치듯 지나가는 단어가 마음속에 들어와, 나가지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 툭 떨어진 한 낱말이 일으킨 감정의 파문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누군가 쓴 글의 일부였던 그 단어는 그것이 본래 들어 있던 맥락으로부터 빠져나와 불의의 순간에 그것을 읽는 내 맥락 속으로 뛰어든다.가끔은 어떤 문장이 유독 머리에 맴돌아 그 짧은 문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고작 몇 개의 단어를 엮었을 뿐인 그 문장은 머릿속에 그림처럼 새겨져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분명 누군가 엮어두었을 그 문장은 나를 그 속으로 끌여들여서 그 속에서 헤매도록 만든다.책을 읽을 때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때, 또는 누군가의 SNS에 올라온 피드를 읽을 때, 우리는 그 문자가 울림이나 새겨진 이미지를 읽고, 그 문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다. 이 당연한 과정은 어른이 되어 문해력이 높아지게 되면 망각되어 버린다.어린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고 나서, 그 뒤에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조금 더 읽는 연습을 하게 된다면, 눈으로만 보고 소리를 상상하지 않아도 의미는 저절로 떠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단어를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부터, 그 소리의 울림을 상상하면서 읽는 것으로, 나아가 문자의 시각적 새김만을 눈으로 보고서 읽는 것으로의 변화는 음성을 표기할 수 있는 한글로 표기하는 한국어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변화일 것이다.그래서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 자체에는 그렇게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안경에 묻은 티끌은 내가 그것에 신경을 쓸 때는 보이지만, 내가 그 안경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대상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글을 읽을 때 그 문자들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의미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글을 읽는 방식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한다. 소리를 내는 것이나, 소리를 내지 않고 시각적 새김만으로 읽는 것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떤 단어를 소리 내어 낭독해보거나, 어떤 단어가 새겨져 있는 방식에 주목해보면, 어색한 느낌을 준다.가끔은 그래도 스치듯 울리는 단어들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시집이나 에세이집 속의 단어가, 누군가 손으로 쓴 삐뚤빼뚤한 편지 속 단어가, SNS에 누군가 남겨둔 단어가, 이유를 알 수 없게 갑자기 마음속에 들어와 귓전에 생생한 울림을 남긴다. 눈 아래 멍울과도 같은 잔영을 남긴다.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나, 지식과 논리가 담겨 있는 인문 교양서와 달리, 시집이나 에세이집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공감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글을 계속 읽어오고 문해력이 늘어나면서, 그렇게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읽어버리고 있던 ‘읽기’라는 과정을 새삼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 말이다.사랑, 풀잎, 바람, 풍경…. 문득 마음속에 들어온 단어를 혀 위에 두고 굴리면, 왠지 새로운 감각으로 그 단어가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단어가 새겨져 있는 방식에 신경을 쓰면서 읽다 보면, 대체 어떻게 이런 새김으로 이런 단어가 되었을까 하는 낯선 느낌과 함께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조차 새삼스러워진다. 내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그 단어는 이리저리 부딪히며 청량감을 준다. 또한, 어떤 문장을 되뇌이다 보면, 그것이 연결되어있는 방식의 다정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너무나 바쁜 우리에게 그런 낯선 언어 감각의 훈련조차 사치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세상에 그런 단어, 문장 하나쯤 있다는 것은 어딘지 든든한 일이지 않은가.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12-25

탁자 위에서 스멀거리며 자라나는 공포

어떤 이야기는 우리를 끝도 없는 공포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참혹하고 무서운 장면을 담고 있는 영화나 게임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공포를 불러오지만, 무서운 이야기는 그것을 듣는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씨앗을 돋워 올려 좀 더 근원적인 공포와 마주하도록 한다. 어린 시절 누군가가 들려주었던 무서운 이야기가 주는 오싹함에 코 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따뜻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괴담 같은 공포를 주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공포란 언어를 통해 전달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감각인 까닭이다.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는 에드거 앨런 포 이후, 미국 문학계에서 글쓰기를 통해 전달하는 공포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작가였다. 그가 1898년에 크리스마스 시즌에 적합한 유령 이야기로 쓴 중편의 이야기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은 귀신이나 유령을 직접적으로 다뤘던 흔한 괴담에서 벗어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공포라는 감각의 본질에 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이 소설은 겨울 난롯가에 앉아서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나누면서 긴 겨울밤을 채우고 있다. 누군가 어린 아이에게 나타난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자, 더글러스라는 남자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자신이 40년 동안이나 비밀로 해 두었다는 자신의 조카인 두 어린 아이에게 나타난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여자가 죽기 전에 직접 써서 남긴 원고 속에 들어 있다. 더글러스는 크리스마스의 난롯가 앞에서 그 원고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모두들 일정한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듣는다.이야기는 한 여성이 블라이라는 시골에 가정교사가 되어 오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맡게 되는 아이는 마일스라는 남자아이와 플로라라는 여자아이 두 명이다. 그녀에 앞서 가정교사로 있던 제셀이라는 여성이 죽어 새롭게 가정교사를 찾게 된 것이라는 사정을 알게 되지만, 아무도 이전 가정교사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두 어린 아이는 예쁘고 똑똑해서 나는 그들을 가르치는 일에 만족하게 되지만, 그녀에게는 점점 이상한 일들이 생긴다. 마일스와 친했던 피터 퀸트라는 죽은 하인의 환영을 보기도 하고, 플로라와 유독 친했다던 예전 가정 교사 제셀의 환영을 보기도 한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인간들처럼 내 앞에 간혹 나타나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있는 시선으로 쳐다본다.이 작품은 이처럼 낯선 가족에 들어온 가정교사에게 나타난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누군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현실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면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있을 법하게 들려주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갖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보여주는 공포는 그것만은 아니다. 헨리 제임스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가능성들의 빈틈이 존재한다. 가정교사는 결국 점점 미쳐가게 되는데, 누구도 그녀가 보는 유령을 보지 못한다. 과연 유령은 실재하는 것인가. 단지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기엔 그가 아름다운 필체로 꼼꼼히 적어나간 이 글쓰기가 갖는 존재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들이 가진 순진무구함이자 가끔씩 그들에게서 튀어나오는 사악함이나 잔인함은 유령이 그들을 잠식했다는 징표인가 아닌가. 나사(screw)는 회전할수록 우리의 마음을 조이고, 나선들 사이의 틈 속에서 공포는 자라난다. 귀신이나 유령이 실재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틈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공포로 조여지는 것이라는 것을 헨리 제임스는 보여준다. /홍익대 교수

2023-12-11

삶의 확실성을 위협하는 불길한 어둠의 공포

에드가 앨런 포는 미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특색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최초의 전문 탐정인 오귀스트 뒤팽을 창조했던 미스터리 작가이기도 하고, 특유의 기괴하고도 섬뜩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들을 다수 써서 이후 소설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어셔가의 몰락’은 포가 1839년에 쓴 단편소설로 직계로만 이어진 어셔 가문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과 그것의 목격자가 된 나의 기록을 담고 있다. 어셔는 자신의 쌍둥이 누나를 죽여야만 하는 충동과 그로부터 얻게 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사진은 에드가 앨런 포. 우리의 삶은 단단한 현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고,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대상은 금방 그 존재를 잊어버리지만, 도무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것, 도무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공포를 집어 먹는 존재이다.내가 익숙하게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 도시 알 수 없는 요소들이 끼어들어 그것이 더 이상 낯익은 대상이 아니게 되면, 그 관계는 공포가 된다. 철근콘크리트나 나무 같이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진 단단한 공간들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빈공간의 어둠은 인간의 태연한 앎을 빨아들여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낸다. 간단하게 ‘보이드(void)’라고 말해버릴 수 없는 공간과 관계의 공동은 내가 딛고 서 있던 단단한 실재의 토대를 무너져 내리게 만든다.이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공간과 공간, 때로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비어있음에 주목했던 최초의 작가는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1849)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 이전에도 그 세계를 바라보았던 작가들은 존재했지만, 언어와 글쓰기라는 도구로 그 세계에 대해 그려냈던 혹은 그 빈공간을 부조해냈던 사례는 아마도 그로부터 기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이전에는 ‘어둠’이라는 주제조차 빛을 비춰서 반사된 윤곽을 그려냈던 것에 불과했다면, 빛과 빛 사이, 단단함과 단단함 사이에 존재하는 불길한 어둠에 대해 최초로 그려냈던 것은 바로 포였다.에드가 앨런 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셔 가의 몰락’은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작가가 이 실마리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걸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그 어둠의 세계는 깊고도 깊다. 모든 불길한 예감들이 그렇듯 책을 덮은 이후에도 어셔가가 내뿜는 어떤 기운은 독자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다.구름이 무겁게 내리누르는 적막한 가을날, 시골길을 따라가던 나는 황혼이 내릴 무렵 옛 친구인 로데릭 어셔의 집이 보이는 곳에 다다른다. 그 황폐한 집을 보면서 나는 시적인 감정이 떠오르기는커녕,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침울함과 불안함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 이 음울한 집에서 몇 주간 머물기로 한다. 친구인 어셔는 오랜만에 나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며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몇 주 동안 어셔의 저택에 머물면서, 나는 어셔의 쌍둥이 누나인 마델린이 지각불감증과 전신경직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어셔는 자신의 누나가 죽었다고 하면서 두 사람은 누나의 시체를 관에 넣어 지하실 깊은 곳에 넣어둔다. 그 이후 나는 신경과민 증세를 겪게 되고, 어셔와 마찬가지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나와 어셔는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소설을 읽는데, 그들은 저 지하로부터 들리는 둔탁한 소리들을 듣는다. 어셔는 그 저택을 휩싸고 있던 공포의 실체에 대해 말해주고, 결국 그것에 잡아먹힌다.포의 이 ‘어셔가의 몰락’은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한 공포로 가득한 가족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 집의 망령과 하나가 되어 누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관에 넣어 지하에 매장했던 어셔는 저 깊은 무의식에서부터 보내오는 강박과도 같은 소리를 듣는다. 기겁해서 놀라 집을 뛰쳐 나온 내 뒤로 그 저택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나를 사로잡았던 그 분명하고도 명확한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무너져 내린다. 그것을 흘깃 본 사람만이 그것의 존재를 증언할 수 있다. 그 불길하고도 강박적인 어둠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다고.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11-27

육십년대식의 사랑, 육십년대식의 위로

겨울이 오는 듯, 스산한 바람이 들기 시작하면, 왠지 대학 시절 읽었던 김승옥의 작품 속 문장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 사소한 문장 한 줄이 대학에서 교수가 전해주는 지식보다도, 매일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셔주던 친구들보다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가끔씩 찾아오는,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온통 잿빛으로 가득한 그 문장이 내 마음에 손을 내밀어 모종의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없는 문장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렇게 겨울 공기에 섞인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기의 기운을 맡곤 했다.비록 구십년대의 대학생이었던 나는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바라보고 있던 긴박된 시대의 분위기를 함께 느끼지 못했고, 그 속에서 조금씩 불어오고 있던 자유의 비린 냄새도 함께 맡을 수 없었다. 그러니 비장한 태도로 유서를 쓰고, 어딘가로 떠나고 있는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오만한 수사나 합리화에 불과할 것이다. 육십년대를 호흡하는 김승옥의 허무와 감수성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것이고, 내게 그것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이나 지식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십년대의 공기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내가 김승옥의 문장을 읽을 때 들었던 그 위로와 씁쓸한 공감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문득 들었던 느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어려워 혀끝에서 맴도는 감정들을 굴리고 있을 때, 누군가 툭 바로 그 단어를 떨어뜨려 두고 간 것만 같은 감각이 김승옥의 소설 속에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 아직 어렸던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의 문장이 삶에 주는 영향 같은 것에 대해 말하기도 했고, 글로 써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김승옥이라는 계기를 통해 확인한다. 내가 김승옥을 통해 전혀 본 적이 없었던 육십년대식의 분위기를, 육십년대식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고 내가 향유했던 구십년대식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듯, 이천이십년대의 누군가도 그에 마땅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온갖 종류의 유사-감각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시대지만, 마음 깊이 존재하는 우리의 감정에 다가가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 않은가. 어떤 문장은 여전히 그런 힘이 존재한다.그렇게 보면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공기 내부 속에 있을 때는 너무나 빠르고 급하게 변해서, 당장은 마치 저 멀리까지 떠나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갔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계절의 변화와 사람의 변화를 노래했던 이제는 그 문자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시가의 언어들도 새삼스러워지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문명과 시대의 변화는 기술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수성의 영역은 언제나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변하고, 그 시대를 호흡하는 인간의 감정은 그에 따라 어김없이 피었다가 졌다가 한다.어느새 겨울이 오고 있다. 코끝이 시큰한 겨울의 냄새를 맡으며, 오랜만에 김승옥의 소설집을 펼친다. 빛이 들어 책표지는 바랬고, 그 문장은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잿빛투성이지만, 그 문장은 여전히 반짝거린다. 분명 시대는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어딘가의 여관에 허무로 갈 길을 잃어버린 잿빛 청춘들이 그렇게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위로를 위한 것도 무엇도 아니지만, 읽는 누군가에게는 분명 위로가 된다. 그 분명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육십년대식의 위로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11-13

산보의 미학

김진섭(1903~?)은 일본 호세이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해서 이하윤, 정인섭 등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해서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30년 무렵부터 독서와 번역에 대한 글을 다수 썼고, 수필을 최초로 본격적인 문학 작품으로 썼던 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생활인의 철학’ 등의 산문집을 남겨 수필가로서의 이름을 갖고 있다. 산보, 혹은 산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도 그 의미가 깊은 활동이다. 어딘가에서 어딘가까지 때로는 목적을 가지고, 때로는 목적을 갖지 않고 걸어가면서 무언가를 보는 산보는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닌가.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10분 정도라도 바깥의 주변을 산보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풀리는 경우도 있다. 어딘가를 걷는 것은 나의 삶에 붙은 자연스러운 맥락을 잠시 바꾸는 행위이다.1930년대 독일 문학을 전공하고, 해외문학파의 이름으로 번역과 비평 활동을 했던 김진섭은 1934년에 ‘산보와 산보술’이라는 글을 쓴다. 산보라는 행위가 단순하고 간단하다보니 산보에 대해서 쓰인 글이 많지 않은데, 모처럼 이 글이 있어 읽고 음미해볼 만하다.김진섭은 생활인들이 갖게 마련인 직업의 중압과 가정의 번잡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럴 때 자연으로 가서 웅장한 삼림을 찾기 마련이라고 쓴다. 하지만, 도시에서의 일상생활에서 여행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일까. 그럴 때, 조그만 여행의 형식이 바로 산보라는 것이다. 즉 “거니는 것이 휴식이 되는 상태”가 바로 산보다.물론, 산보는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형태도 다양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산보도 있고, 친구와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면서 하는 산보도 있다. 술집에서 술을 나누면서 하는 내밀한 고민에 대한 이야기와 달리, 거리의 소음을 배경 삼아 나누는 고민 이야기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랑하는 사이에 함께 하는 산보는 특별한 어떤 것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손을 잡고 어깨를 겯기만 해도 그 자체가 사랑이 아닌가.비록 김진섭은 그 모든 산보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혼자서 하는 산보라고 말해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사유와 문학을 다루는 학자였기 때문이다. 철학자였던 칸트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했다는 일화가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생각하고 쓰는 긴 과정 중에 잠시 흐름을 끊고 산보하는 것은 사유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소설가 박태원이 썼던 많은 소설들 속에서 구보씨는 낮이나 밤이나 산보한다. 그의 산보는 바로 글쓰기 자체가 된다.하지만, 산보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어떤 형식이든 어떤 사람들과 하든 좋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카페 순례도, 혼자 혹은 동료와 사무실 근처를 한 바퀴 도는 산책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인근에 있는 녹색의 자연을 찾아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그 아래를 걷는 일도 모두 산보이다. 산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평등한 행위가 아닐까.그렇게 길을 걷다보면, 우리 앞에 펼쳐진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의 모습들은 매순간 발견이 된다. 특별한 목적이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특별한 목적이 없으니까, 산보하는 발걸음 속에 눈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들은 모처럼의 발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 속 지도를 보고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우연한 만남들이 산보하는 마음 속에는 찾아온다.그런 의미에서 보면, 산보란 독서에 가장 가까운 행위일지도 모른다.문자와 그림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하나의 세계인 책의 세계 속을 헤매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행위가 독서라면, 거리를 거닐면서 세상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정보와 자극들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찾아내 의미로 만드는 행위가 바로 산보니까 말이다.우리 모두 오늘 오후만큼은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세상이라는 책 속을 산보해 보면 어떨까./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10-30

우리는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다

프랑스의 작가 쥘 르나르. ‘홍당무(Poil de Carotte)’ 가끔씩, 망각하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다. 단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 때의 기억은 대부분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했는지 알 수 없는 이해불가의 영역뿐이다.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렸고, 그렇기에 어떻게 말하거나 행동하는지 몰랐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묻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까닭일지도 모른다.우리는 흔히 아이들이 이유 없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편견일 것이다. 아이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행동으로 대응한다. 또한 그것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다만, 그 합리가 어른의 그것처럼 규격이나 양식을 따르고 있지 않을 뿐이다. 또한 그것에 대해 설명할 만큼의 말솜씨를 갖지 못한 것이다. 말썽쟁이들이 부리는 말썽은 대부분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Jules Renard·1864~1910)의 소설 ‘홍당무’는 바로 그렇게 우리가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르나르가 자신의 아들과 딸을 위해 1894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프랑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말썽꾸러기 ‘홍당무’의 일화를 다루고 있다. 르나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해서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종종 르나르가 겪었던 어머니로부터의 학대의 경험이 표현되어 있다고 평가되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는 홍당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섬세한 심리가 너무나도 잘 그려져 있을 뿐이다. 어떤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삶의 양식들이 존재하며, 그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재단하는 것은 소설을 읽을 때 그리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 소설에서 홍당무는 형도 누나도 가지 못하는 밤의 닭장문을 닫는 일을 하러 처음 나서기도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요강도 찾지 못해 침대 위에서 그대로 대변을 누기도 한다. 또 귀에 펜대를 끼운 채로 잊어버리고 아버지에게 키스하려다가 눈을 찌를 뻔하기도 한다. 어머니, 르픽 부인의 은화를 훔치고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실수로 낚시 바늘을 어머니의 손가락에 관통하게 해서 큰 소동을 일으키고 눈물을 짜내기도 한다. 홍당무는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골칫거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에게는 아이가 가지게 마련인 나름의 생각이 있다. 이 작품은 아이라는 존재를 막연히 미화하는 동화의 기본적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아이란 그렇게 늘 말썽을 부리기 마련인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 작품이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선을 낮춰 아이의 눈 그 자체로 본다면, 아이가 만나는 세계는 선과 악, 어떤 것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순진무구 그 자체라는 사실 말이다. 선악이란 어른의 관점일 뿐으로, 아이의 행동은 선의나 악의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는 다른 자기만의 행동 방식으로 행해진다는 메시지를 이 작품은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할 수 있다. 가만히 지켜보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다. 선의와 악의, 성숙과 미숙, 보편과 개성 같은 명확히 굳어진 세계 인식을 갖고 있는 어른에게는 단지 그 섬세한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되기 어려운 것뿐이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지만, 지금 우리는 그곳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뿐이다. 쥘 르나르는 바로 그 당연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10-23

이제는 사라진, 책 읽는 사람들을 위하여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표지. 얼마 전 스웨덴 교육 당국은 태블릿으로 대표되던 디지털 교육 방식을 버리고, 다시 교실에 종이책과 연필을 비치하고 독서와 필기 연습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교육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지금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문자나 이미지적 정보 어떤 것이나 디지털로 옮겨질 수 있는 시대지만, 아이가 앞으로 배워갈 세상이 모두 디지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 만큼, 반가운 의미를 지닌 결정이라고 생각한다.인간이 영위해온 모든 세계의 기반이 디지털 네트워크로 옮겨지면서, 종이 위에 연필로 사각거리던 감촉이나, 우둘투둘한 캔버스 위에 채 다 발리지 않고 뭉쳐 있는 물감의 질감, 필름카메라의 철컥거리는 셔터의 소리 같은 한 없이 아날로그적인 감각까지도 흉내내어 디지털의 양적 해상도 속에 포착해내고자 하는 과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서걱거림이나 이질감, 기계장치의 맞물림 같은 감각을 디지털로 접한 세대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이제 인간의 문화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여전히 책 속의 글자를 읽고, 이해하고, 글을 쓰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문득, 점점 손에 든 책의 무게가 해마다 더 무겁게 느껴질 때, 강단에서 노트북이나 태블릿 너머로 교수를 바라보는 학생들과의 사이의 공기가 조금씩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 이제 대학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사회에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책의 시대의 변화를 절감한다. 이제 책을 벗어난 인간의 문화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그런 의미에서 2019년에 번역된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전병근 옮김, 교보문고)은 이제 사라져가고 있는 종이책의 의미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책이다. 전작 ‘프루스트와 오징어’(한국어 번역서명 ‘책 읽는 뇌’, 이희수 역, 살림, 2009)에서 인간은 결코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는 도발적인 발언을 통해, 그는 인간이 책을 매개로 뇌를 재배열하면서 후천적으로 읽는 뇌로 발전시켜 인류의 지적 발달을 이끌었다며 책 읽는 뇌와 창조성에 대해 논했던 바 있었다. 10년 만에 낸 이 ‘다시, 책으로’에서 매리언 울프는 여전히 읽기에 기대를 걸고 있는 독자들을 향한 9개의 편지를 통해 급속히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디지털화되는 교육의 선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집’을 떠난 독자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손짓하고 있다.사실, 많은 미디어 학자들은 인간이 불편하디 불편한 문자와 글쓰기, 책을 벗어나 이제 새로운 전자 시대 디지털로 전환된 새로운 구술성의 시대로 옮겨갈 것이라 예측한다. 인간이 인간의 감각에 친화적인 방향으로 변모해간다면 당연하게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보의 습득 과정에 배치되는 비가역적이고 선형적인 고정된 정보 묶음으로서의 책보다, 비록 디지털로 매개되는 것이라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임은 틀림 없는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책이라는 불편한 미디어에 무언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매리언 울프의 말대로 그 불편하디 불편한 책에 적응해나가며 인간이 키워온 상상력이나 공감 등의 감정적 기반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지나면 새로운 ‘인간’들이, 새로운 주체로서 사회를 채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공원 벤치에서, 카페 한 구석에서, 빈 강의실의 한 켠에서 책을 읽으며 고민하는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어쩐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9-25

바람과 함께 사라진 시대

1936년에 출판된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표지. 소설을 원작으로 그것을 영상화하는 경우는 대부분 주인공에 어떤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더라도 소설 속 주인공에는 미치지 못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란 본디 독자의 꿈속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독자가 꿈꾸는 소설 속 나만의 주인공을 현실 세계의 누가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꿈과 경쟁할 수 있는 현실이란 본디 존재할 리 없는 것이다.하지만, 간혹 먼저 나온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도 마치 그것 먼저 존재했던 것처럼 우리의 기억의 선후 관계를 바꾸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 소설 원작이 있다고 말하면 깜짝 놀라게 되는 경우도 있고, 소설의 주인공을 떠올리려고만 하면 어떻게 해도 그 주인공을 연기했던 배우만 떠오르는 경우가 그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본디 소설은 시각적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 문자의 추상성과 그 연결을 통해 그것을 읽는 독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의 각인이므로, 그것은 타인과 공유되지 않는다. 시각화된 이미지가 현대인의 마음을 전유하는 시대라고 해도, 꿈속에 있던 그 이상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극복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당연하다.하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려본다면, 어떤가? 아마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1900~1949)의 원작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2년 뒤에 나온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을 연기했던 ‘비비안 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많은 소설 속 주인공을 연기했던 배우들이 소설 속 주인공을 둘러싼 꿈과 현실 속 구체적 인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람들의 인식 너머로 사라져 버렸지만, 비비안 리가 연기했던 스칼렛 오하라만큼은 오히려 사람들의 꿈 앞으로 나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냈다.오랜만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꺼내 읽으며, 비비안 리가 스칼렛 오하라로서, 그리고 클라크 게이블이 레트 버틀러로 미국 남북전쟁의 한복판을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며 어떻게 그들이 독자들의 마음속 꿈에까지 걸어들어올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비비안 리(Vivian Leigh). 물론, 비비안 리가 없었어도,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스칼렛 오하라는 그 자체로도 모든 사람에게 각인될 만큼 멋진 주인공이다. 거친 남부의 타라 농장에서 살아가며 숙녀가 되는 가장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그에게는 세상에 대한 정열이 숨겨져 있다. 이 스칼렛 오하라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거쳐 성장해온 여성 작가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미국으로 옮겨와 보다 자유로운 형태로 실현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남북전쟁이라는 전통과 명분, 그리고 자본이 얽히는 시대를 배경으로 좌충우돌하는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의 사랑은 계속해서 어긋나면서 계속 이어진다. 스칼렛은 자신이 사랑했던 애쉴리 윌크스에 대한 질투이자, 가문끼리의 거래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한 번 결혼했으나 결혼 직후 남편이 죽어 바로 혼자가 되고, 전쟁으로 타라 농장을 떠나 있다가 돌아와 폐허만 남은 농장을 떠안는다. 농장주로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와중에, 스칼렛은 돈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결혼한다. 스칼렛은 한 번은 가문 때문에, 한 번은 돈 때문에 결혼하고, 스칼렛과 레트의 사랑은 그렇게 부유해 가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사랑보다 시대를 견뎌내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어쩌면 스칼렛 오하라가 단지 로맨틱한 플롯의 일반적 주인공이었다면, 아마도 비비안 리가 연기했던 그 인물이 그토록 우리에게 각인되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람과도 같이 시대는 사라지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듯,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니 말이다./홍익대 교수

2023-09-04

연애의 시대, 전찻길에 두고 온 사랑

‘나도향(羅稻香)’이라고 하면,‘뽕’이나 ‘벙어리삼룡이’처럼 향토적인 색채 짙은 작품을 몇 편 썼던 작가로만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실지 모르지만, 사실 그는 신문에 본격적인 연애소설을 최초로 연재했던 사랑의 작가였다. 나경손(羅慶孫)이라는 본명을 두고, 소설을 쓸 때는 주로 벼의 향기라는 의미의 ‘도향(稻香)’이라는 필명을, 번역이나 평론을 쓸 때는 주로 ‘나빈(羅彬)’이라는 필명을 썼다.생원집에 하인으로 있던 벙어리 ‘삼룡이’가 주인집에 시집온 아씨가 부당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참다못해 복수하는 이야기나, 누에 먹일 뽕나무잎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아귀들의 수라도만큼 강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1922년에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환희’는 당시 일제에 강점된 한국에서도 연애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연애는 인간들 사이의 마음의 문제지만, 그 실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연애편지를 쓰고, 데이트를 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들은 단지 서로 좋아하는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이고, 라이프스타일이다. 집안끼리 날짜와 사주를 맞추는 옛날의 제도에서 벗어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연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게다가 이 작품에는 1930년대 신문 삽화계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가 처음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해서, 여러 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본래 그림을 그렸던 안석주는 매일 그려야 하는 삽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처음에는 너무 완벽한 유화 스타일의 삽화를 그리려고 하다 나중엔 힘이 부쳤는지 중도에 그만두었다. 나도향(羅稻香·1902~ 1927). 이 소설 ‘환희’는 가난한 고학생인 김선용에게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은행원 이영철이 자신의 동생 이혜숙을 소개해주려고 하며 시작된다. 어린 이혜숙은 가난하고 잘 생기지 못한 김선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영철이 일하는 은행의 은행장 아들 백우영에게 끌린다. 하지만, 모처럼 오빠의 소개인 만큼 김선용과 덜컥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해 버리지만, 난봉꾼 백우영에게 속아 덜컥 그에게 겁탈을 당하고 그만 그와 결혼하게 되고 만다. 김선용과 백우영 사이에 있던 이혜숙, 백우영과 이영철 사이에 있던 기생 설화를 둘러싸고 결국 누군가 죽고, 누군가 영영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야만 끝날 청춘의 복잡한 삼각관계가 펼쳐지는 것이다.이 나도향의 ‘환희’는 연애로맨스소설의 클리셰인 연애삼각관계의 정석을 보여준 창작 소설의 첫 번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 나도향은 전차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주인공 마음의 미세한 결을 세밀하게 읽어낸다. 이미 사랑에 빠진 김선용은 이혜숙에게 가볼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까 망설이면서 그 기로에서 기다린다. 내심으로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가 있지만, 일말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로 하여금 반대편의 플랫폼에 서 있도록 하는 것이다.뻔하디 뻔하고, 판에 박힌 이야기지만, 연애로맨스 이야기가 그렇게 매번 반복되어 나오는 것은 그것이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세대에 따라, 나이에 따라, 그 뻔한 플롯의 이야기는 생생하고 가슴 아려오는 이야기가 된다. 백 년 전 전찻길에서 사랑하는 이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려고 반대편 전차를 힐끔거리는 못난 주인공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