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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대의 아이콘이 된 ‘나혜석’이라는 이름

근대의 예술가상을 떠올리자면, 어쩐지 열렬히 불타오르고 금방 사그라들고 만 비운의 작가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단지 틀에 박힌 스테레오타입화된 사고는 아닐 것이다. 어떤 시대의 공기는 늘 그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들의 묵지근하게 마음을 내리누르고 있지만, 적어도 근대의 예술가들이란 그 시대의 공기를 자연스레 호흡하기보다는 새로운 공기를 불어올 바람을 찾아다니거나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예술가’들 중 대부분이 그의 시대에 앞서 있었거나 혹은 뒤서 있어서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하다가 한참 나중에서야 그에 값하는 평가를 받게 된다. 어떤 삶과 예술은 그것이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기까지 오랜 시간을, 아니 인식의 단절이라고 해도 좋을 변화를 요청하고 필요로 한다.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나혜석’(羅蕙錫·1896~1948)이라는 화가이자 작가는 바로 그러한 전형적인 근대적 예술가상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좋다.그는 여성에게는 거의 금단의 영역이라고 해도 좋았던 한국 근대 미술계에서 가장 뚜렷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던 화가였고, 문학 작가로서도 일정한 자기 영역을 갖고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떠올린다면, 사실 그의 이러한 예술적 성취보다도, 신여성으로서 시대의 인습에 저항하다가 비운의 예술가로서 최후를 맞이했던 그의 삶이 먼저 떠오른다. 물론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예술이란, 특히 근대의 예술이란 단지 그림 한두 편이 보여준 성취가 아니라, 시, 소설 몇 줄이 보여주는 성취가 아니라 예술가의 삶 자체가 예술화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혜석은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 나가 ‘인형의 집’에서 자발적으로 추방당했고, 그를 통해 시대적인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 한국 최초의 문예지 ‘창조’의 동인이었던 시인 최승구와 연애하였지만, 정작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하였다. 이 결혼은 당시로서는 세기의 결혼으로, 신문지상에 기사로 실릴 정도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당시 나혜석의 유명세 때문이었다. 당시는 여성 예술가가 귀해서 여성으로서 미술이나 음악, 문학을 창작했던 작가들은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었던 시대였다. 그 때문에 신여성으로서 예술을 하고자 했던 이들은 언제나 조선 전통의 관습을 따르는 평온한 삶과 시대적 관심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나혜석의 소설 ‘경희에서 나혜석 자신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경희’가 결혼하기 전 자신 앞에 놓인 두 개의 길을 내다보고 고민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고민이었다. 다만, 나혜석으로서는 두 개의 길 중에 평온한 삶을 택했던 것이었지만, 그 삶조차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 구미만유, 불륜, 이혼고백장, 정조취미론 등 이후 나혜석이 걸었던 삶은 조선 전래의 인습에 맞서 자기를 예술화하는 것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누군가는 나혜석에게서 결혼과 정조라는 낡은 관념에 저항했던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발견하지만, 그의 삶에서는 한국에서는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근대 예술가의 상을 떠올리게 된다. 비록 그가 평온한 삶을 바랐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시대를 앞서 나가 그것과 싸우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 삶을 예술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근대 예술가의 숙명일 테니 말이다.나를 둘러싼 시대의 공기가 정체되어, 마치 그것이 나의 온몸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 때, 나는 나혜석의 소설을 읽는다. 그 속에는 다가올 예술에 대해 예감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존재가 있다. 성별이나 민족을 넘어서 시대적 편견과 싸우는 예술가들이 겪는 두려움에 여전히 공명하게 되는 것은 근대 예술의 이상이 아직 종료하지 않았다는 기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2-08-01

추리소설의 규칙-노리츠키 린타로

로널드 녹스 여름의 책 읽기란 쉽지 않다. 마음먹고 책 몇 권을 싸 들고 시원한 카페로 나와도 종일 후텁지근한 여름날의 공기 속에 파묻혀 있던 마음은 선선히 글자를 읽어내려 들기 어렵다. 어제 다 끝내지 못한 일 생각이나 이런저런 걱정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눈은 글자의 표면 위 같은 곳을 한참 맴돌고 더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게 된다. 한여름의 열기에 한 번 데워진 마음이란 깜짝 놀랄 만큼 시원한 방 안에 들어와도 쉽사리 차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여름의 책 읽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인간의 감정에 다가가는 내용을 가진 책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뒷감당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그래도 이렇게 열기에 데워진 마음으로 읽기 좋은 책은 단연 추리소설일 것 같다. 역사의 숨겨진 결들을 눈에 담으며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는 역사소설이나 작가의 현란한 문장에 가득 눈이 즐거워지게 되는 요즘 작가들의 소설보다도, 언제나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사건이 일어나고 마치 정해진 듯한 규칙으로 사건이 해결되기 마련인 미스터리는 무엇보다도 장르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게다가 사건의 해결 과정이 탐정과의 두뇌 대결로 이어진다는 점도 좋다. 이미 한낮의 열기로 데워진 감정을 다시 소모하기보다는 머리를 써서 읽어내면서 이리저리 추리를 해보는 읽기의 과정이란 얼마나 청량한 경험인가.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나 읽기라는 행위에 조금 물렸을 때의 처방으로 추리소설을 읽곤 한다.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조금씩 추리소설의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미풍에 그치고 있는 점은 추리소설의 오래된 팬으로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식민지 시대와 그 이후 활동했던 김내성이라는 걸출한 추리작가 이후 이상우, 김성종 등 널리 알려진 추리작가가 존재했고, 최근 본격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경계가 해소되면서 점점 새로운 세대의 추리작가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미 앞서 미스터리 장르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유럽과 일본의 장르적 열풍에 비하면 아직은 소소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나마 추리소설의 오랜 고전들이나 최근 활발하게 쓰이고 있는 해외 추리소설들이 충실하게 번역되고 있는 점들이 위안이 된다. 노리츠키 린타로 미스터리의 플롯이란 사실 사건이 일어나고 해결되는 그 사이에서 펼쳐지는 시간이 핵심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리에서는 규칙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미스터리에서 추리란 인간의 사고가 움직이는 로직을 의미하는 것이니 사건이 발생하고 해결되는 과정에서 인간 마음의 사고가 움직이는 알고리즘이 중요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리소설계에는 유명한 규칙들이 존재하는데 S.S.반 다인(Van Dine)이 1928년에 발표한 20법칙이나 로널드 녹스(Ronald Knox)가 역시 같은 해에 발표한 10계 같은 규칙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사실 모든 규칙이 그렇지만, 그 세세하고 까다로운 부분에서 미를 발견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규칙이란 따분하고 답답한 것이다. 한국에서 좀처럼 미스터리붐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일본의 추리작가 노리츠키 린타로가 쓴 단편 ‘녹스머신’에서는 앞서 로널드 녹스가 제시했던 추리소설의 10계 중 가장 독특한 계명, 추리소설에는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의문을 가진 등장인물이 중심이 된다. 이 말도 안 되는 규칙은 분명 황화론을 배경으로 중국에 대한 공포가 유럽에 퍼져 있을 때 만들어진 내용일 것으로 이를 마주한 인간은 이를 이해하기 위한 추리를 해 나가다가 결국 시간을 거슬러 로널드 녹스를 만나 그가 그 규칙 속에 숨겨둔 비밀을 함께 만들어낸다. 규칙이란 어차피 작가와 독자 사이의 약속이니 말이다. 이 노리츠키 린타로의 ‘녹스머신’이 포함된 동명의 중편집은 최상의 추리소설 마니아의 규칙해설서 같은 것으로,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규칙이 지루해진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7-18

읽기라는 축복, 혹은 저주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 인간이 무언가를 기록하여 남기려 했던 필사문명의 시대로부터 인쇄문명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문자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와 읽기라는 인간 지식의 관행은 이제 또 다른,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곳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와 그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매체에 의해 새롭게 도래된 구술문명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만 같다. 모두가 ‘지금 현재’에 붙들려 그것을 소비하는 시대에,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문학이나 역사, 철학은 과연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혹은 질문을 바꾸어, 인간이 문자를 가지고 읽고 쓸 수 있다는, 기록하고 독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을까, 혹은 우리에게 씌워진 천형과도 같은 저주일까. 유튜브 어딘가에 지금도 영상 이미지들이 쌓여가고, 더 이상 책을 읽고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는 이런 질문조차 새삼스러워질 것인가.독일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가 1995년에 쓴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는 바로 이 문자를 읽고 쓰는 인간의 문제에 답하고 있는 좋은 사례다. 주인공인 미하엘 베르크가 남긴 한나 슈미츠라는 여성에 대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불과 열다섯 살에 불과했던 미하엘이 서른을 훌쩍 넘긴 한나라는 여성을 만나 연애 관계가 되는 자극적인 소재 아래 나치의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와 인간이 읽고 쓰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보여준다.소설 속에서 미하엘은 한나를 만나 그가 갖고 있는 풍요로운 감각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것은 문자에 앞서 그 자체로 자기를 드러내는 세계다. 시각과 청각을 발동시키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미각과 후각, 촉각이 발동되는 세계. 문자로 그것을 기록하려 해도 결국은 추상적이 될 수밖에 없는 구체성들의 세계이다. 한나는 미하엘을 씻기고 먹이고 같이 잠을 잔다. 미하엘은 그 앞에서 마치 한 마리의 동물이라도 된 듯, 그 구체성의 감각들을 탐한다. 물론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을 빼고 어떤 대상을 판단한다는 사실 자체가 무리겠지만, 만약 그것을 뺄 수만 있다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만들어낸 담론 이전에 인간의 몸과 그 사이의 교섭이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발간된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의 표지.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한나는 미하엘이 책을 읽어주는 것은 좋아하고, 그것을 바란다.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읽어나가면서 어느 정도는 알게 되는 사실은 한나가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이라는 것이다. 한나는 전형적으로 구술만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갖는 마련인 즉각적이면서 비논리적인 논쟁을 통해 미하엘을 공격하기도 하고, 미하엘이 남겨놓은 쪽지를 읽지 못해 없애버리고 시치미를 떼기도 한다. 미디어학자 마셜 매클루언이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구술언어 중심의 인간은 타인과의 교섭이나 세계 이해에 있어서 전혀 다른 지평을 갖는 것이다. 현실 상황이 지나가버린 뒤 기억을 매개로 글쓰기하는 관행에 익숙한 논리에 얽매이는 문자인간이 생리적으로 사고하는 구술인간을 논쟁으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소설의 중반부, 한나는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두 사람이 재회 아닌 재회를 하게 된 것은 아유슈비츠 나치부역자 재판이 이뤄지는 곳에서였다. 지멘스에서 일하고 있던 한나는 수감자를 선별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그 수감자들의 학살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미하엘이 지켜보는 와중에 한나는 자신이 문맹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자백하고, 종신형을 받게 된다. 인간에게 읽고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치열하지만 담담하게 인간이 쌓아올린 글쓰기 문명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2-07-04

‘완전사회’는 도래할 것인가 ?

인류에게 있어 ‘과학’이라는 단어는 마법술과 같이 언제나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기능해 온 것만 같다. 우리가 모두 느끼고 있듯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이란 언제나 예측불허이고, 결정 불가능성 속에 놓여 있게 마련이라, 마찬가지로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 때마다 거대한 문자로서의 ‘과학’은 인간이 그런 삶에 일말이나마 단단한 확신의 토대를 마련해온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적자생존!”이라는 선명한 선언을 인류 사회로 옮겨 제국주의 시대를 여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떠올려보라. 그것이 점유했던 가장 강한 적자만이 생존한다는 그것이 ‘과학’이라는 담론이야말로 시대적인 당위성에 대한 예감으로 식민지 정복전쟁에 나서고 있던 청년 군인의 두려움을 절박한 미래의 확고한 전망으로 대체해주는 것이 아니었겠는가.이처럼 언제나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전망이 떠오를 때마다 ‘과학’은 그 불안함을 확실한 당위 내지는 절박함으로 바꾸는 중요한 힘으로 기능해왔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져온 공포가 뒤덮고 있던 시대,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전망과 함께 ‘과학’이, 혹은 과학에 대한 상상이 떠오르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한국 최초의 과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1929)가 비대해가는 인구에게 도래할 식량 생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미친 과학자’의 노력을 다루고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학은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장밋빛 미래 전망과 연결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가장 우울하고 가장 비관적인 디스토피아적 미래 전망과 접속한다. ‘과학’은 언제나 사회에 대한 미래적 불안의 배후에서 출현해서 ‘움직이고 있다’.어쩌면 과학기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들은 대부분 이렇게 당시에 존재하고 있는 시대적인 불안의 징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최초로 창작된 에스에프(SF), 즉 사이언스픽션(Science Fiction) 장르의 작품인 문윤성(1916~2000)의 ‘완전사회’를 읽으며 그 소설 속 알레고리로 들어 있는 시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1967년에 출간된 이 작품 속에는 한국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 4·19를 겪으며 민주주의의 분위기로 팽배해 있다가 독재사회로 넘어가게 될 무렵의 시대적 전망이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이 소설은 인간을 냉동시켜서 보존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그를 위해 완전인간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한국인 우선구는 바로 이 완전인간에 선발되어 냉동되었다가 161년만에 깨어나게 되는데, 그가 눈앞에 맞이한 세계는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완전사회’였다. 이 사회는 한글과 영어 알파벳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언어 하나만 쓰이고, 인류는 여성만이 존재하고 남성들은 모두 화성으로 추방당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 완전한 사회 속에 유일하게 남성으로 존재하는 옛날 인간 우선구는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되면서 곤란을 겪지만, 협력자들과 협력하면서 스스로 완전사회에 균열을 내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이 소설에서 작가가 쌓아올린 161년 후의 ‘완전사회’라는 것은 꽤 놀랍고 정교하다. 여성이 사회의 유일한 젠더가 되는 과정도 가상의 역사로서 잘 구현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과학이 부여해온 기대와 두려움이 점이적 영역이 드러난다. 젠더와 언어가 통합된 완전한 사회, 그것이 또 다른 전체주의 파시즘의 시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의 다른 편에, 민족주의가 소멸한 유토피아적인 미래상이 펼쳐져 있다. ‘과학’은 그저 놓여 있을 뿐이지만, 그를 둘러싼 우리의 사회는 그것을 매개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6-20

옛글을 읽으며 낯선 곳을 여행하기

경주를 여행한다면, 다른 어떤 글보다 1929년 현진건이 동아일보에 쓴 ‘고도순례 경주’ 한 편이 적절한 가이드가 될 수 있다. 사진은 1929년 7월 18일에 동아일보의 표제삽화이다. 어딘가 낯선 곳에 처음으로 여행을 하러 갈 때면 그 지역에 관련된 옛사람의 글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관동지방을 돌아다닐 때는 정철의 ‘관동별곡’을 꺼내어 읽는다던가, 지리산 근방을 여행할 때는 최남선의 ‘심춘순례’를 꺼내어 읽는다던가 하는 게 그런 것이고, 대구를 갈 때는 대구에서 서울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고향을 떠나온 사람과 만났던 이야기를 다룬 현진건의 소설 ‘고향’을 읽거나 군산에 갈 때는 개항장 군산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 채만식의 ‘탁류’를 읽고 가는 식이다.물론 아직 옛사람들의 글에 대해서는 공부가 적어 여행하는 지역을 다룬 글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방문한 지역에 오래 계셨던 선생님들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또, 옛글 속에 다뤄진 장소라야 작가가 다루고자 했던 서사의 맥락과 다소 맞게 다룬 협소한 기억일 뿐이라 아무래도 여행자를 위한 모든 정보를 모아둔 친절한 여행 가이드북과는 전혀 다르다.하지만, 그래도 생소한 공간의 문턱을 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라면 그 공간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작가가 쓴 작은 글조차 큰 의지가 된다.여행을 하면서 먹고 마시는 물질적인 세계 위에 작가의 기억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층위가 끼어들게 된다. 그러면, 낯선 곳에서의 삭막한 여행도 조금은 더 풍요로워진다.사실, 우리가 요즘 여행에서 볼 만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대부분은 미디어에 재현되어 보고 들었던 대상을 실제로 보는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TV 같은 영상매체를 통해 보고 들었던 이집트의 피라밋의 광대한 크기 같은 것을 실제로 가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이나, 영화나 드라마 속 무대가 되었던 그곳에 실제로 가서 보는 것이 그러한 것에 해당한다. 그 주인공이 먹었던 음식을 실제로 먹어보거나 그 액티비티를 실제로 해보는 것도 이러한 경험에 포함된다. 즉 미디어의 간극을 넘어서는 실제 경험에 대한 욕망이다.우리의 여행이 대부분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현재 경험이 얼마나 미디어로 매개되어 있는가, 그럼에도 아직 미디어를 넘어선 실제 경험을 바라는가 하는 것을 알려준다.“가봤더니 생각보다 별것 없던데?”라는 여행 뒤 우리가 내뱉는 말 속에는 미디어가 추동하는 여행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들어 있다. 물론 옛사람이 남긴 짧은 글에 의지해 어떤 곳을 여행하는 일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보고 글로 남겼던 대상을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경험적 충동에서 비롯된다.다만, 그 글이 너무 짧아서 그 경험을 공간에 펼치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장소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 곳에서 만나는 대상들은 별 것 없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감각적 풍부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시각적 미디어는 언제나 대상을 더 돋보이도록 만들어서, 실제의 대상을 왜소하게 만들지만, 말과 글은 실제의 대상에 대한 누군가의 기억과 관계되어 실제의 대상에 대한 경험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 경험에 통합된다. 적어도 여행에서만큼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읽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야외활동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는 이 시점에, 아마도 주말을 이용해서, 휴가를 이용해서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을 것이다. 어제 본 영화에 나왔던 배경을 확인하러 가는 여행도 좋고, 지역의 맛집을 찾아가는 여행도 좋지만, 가끔은 책을 한 권 들고 가는 여행을 권한다. 그것이 그 지역에 관련된 옛사람의 글이라면 분명 충만한 의미로 가득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2-05-30

그림도 없는 책을 무슨 재미로 볼까?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는 책을 왜 보는 걸까? 그런 책이 무슨 소용이람?”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작 부분에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강둑에 앉아 있다가 언니가 읽고 있던 책을 흘끔거리고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른들만 읽던’ 글자만 있던 책이 지루했던 앨리스는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넘치고 있는 꿈 속 세계로 토끼를 따라 들어가게 된 것이다. 루이스 캐럴 역시 이 아이들을 위한 환상의 동화의 삽화를 소설만큼이나 귀중하게 골라 넣었다. 어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독자들을 끌고 가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삽화와 대사의 맛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지금처럼 어디에나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책 속에 들어가 있는 삽화 정도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책 속에 간간히 들어 있는 삽화들은 그야말로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 같은 반가운 것이었다. 아직도 읽는 것을 취미로 여기고 있는 분들이라면, 아마 책 속에 간혹 들어 있는 삽화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많으시리라. 물론, 문장을 읽고 또 읽고 난 뒤,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희부윰하지만 강렬한 세계라는 것도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지만, 간단히 손으로 그린 작은 삽화라도 문자로 만드는 세계를 위한 상상의 재료로 소중했다.한국에서 신문에 연재된 소설에 삽화가 처음 들어가게 된 것은, 1912년 1월 1일의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나 다름없던 ‘매일신보’가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 연재소설을 싣기 시작했고, 나아가 연재소설에 삽화를 넣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점 이전 제국신문에서 오랜 기간 동안 소설을 연재했던 작가 이해조(李海朝)가 새롭게 연재했던 ‘춘외춘’이라는 제목의 소설에 신문 일을 하려고 잠시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 화가가 삽화를 넣었다. 한국인 소설가가 쓴 소설에, 일본인 화가가 삽화를 넣었으니, 소설의 내용과 삽화가 잘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문밖으로 내다보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의 뒷모습이 그려진 이 삽화는 한국에서 이후 백 년 좀 못되게 이어진 삽화가 들어 있는 신문연재소설의 관습적 전통을 만들어낸 최초의 일이 되었다. 대체로 인쇄 매체 속에 시각적 이미지가 부족했던 당대의 독자들이 삽화 속 이미지를 상상의 재료로 소설 속 세계를 보다 다채롭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금색야차’ 같은 작품을 썼던 오자키 고요나, ‘무정’의 이광수도 연재소설의 삽화에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들은 삽화가 소설적 세계의 상상을 제약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삽화는 이미 시대적인 흐름이 되었다. 당시 이 삽화가 붙은 신문연재소설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1912년 이후 약 3~4년 동안 한국인 소설가와 일본인 삽화가의 공존은 계속되어 ‘장한몽’등 번안소설로 이어졌고, 3·1운동 이후 국내에 민간신문이 생겨나면서, 안석주, 이승만, 이상범, 노수현 등의 전문 삽화가들이 등장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옛신문의 연재소설란을 아직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2단 정도의 크기로 소설과 함께 실려 있던 이 반가운 흑백의 삽화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물론, 지금처럼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 나는 시대에 이 흑백의 삽화를 추억하는 것은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지만, 눈으로 꾸역꾸역 읽어내던 문자들이 물릴 때쯤, 나타나 눈을 시원하게 해주던 이 삽화를, 그 반가움을 기억한다. 전달의 매체는 다를지언정 그것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상상의 세계는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렇게 삽화의 시대는 저물었으면서, 이제는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5-09

돈키호테를 위한 랩소디

돈키호테(Don Quixote)라고 하면, 우리는 바로 시대착오의 전형적인 인간을 떠올리곤 하지만,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1547~1616)가 1605년 처음 발표한 돈키호테의 1권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는 말하자면 소설의 원형이자 현대적인 소설의 문을 열어젖힌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아마 독자분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분도 계실지 모르리라. 아동문학전집이나 세계문학전집 사이에 끼워 있던 축약판의 돈키호테를 읽으셨던 분이거나,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를 몰아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기괴함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안영옥 선생님이 완역하여 ‘열린책들’에서 출판된 2권 합쳐 천 사오백 페이지에 육박하는 소설 돈키호테를 찬찬히 들춰본다면, 아마도 풍차를 향해 돌격했던 돈키호테의 호쾌함 속에 숨겨진 의미를 얼마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1547년 스페인의 마드리드 근방에 있는 역사도시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빚을 지고 재산을 압류당한 아버지때문에 도망다니고 감옥살이까지 하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길가에 떨어진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고 하는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독서를 통해 접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광만이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임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이때 그는 당시 가장 유행했던 로망스 장르인 기사로망스를 탐독하고 또 탐독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건 이야기만이 비참한 삶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열쇠이거니와 하물며 번쩍이는 은색 갑옷을 입고 적들과 싸워나가는 기사의 이야기가 삶에 지쳐있는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러하듯이 말이다.사실,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라만차 지역에 살고 있는 이달고라는 인물 역시 당시의 기사소설, 즉 기사 로망스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가 쉰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1년 중 틈이 날 때마다 기사소설을 읽었고, 자신이 읽고 싶은 기사소설을 구입하고자 물려받은 수많은 밭을 팔아버릴 정도였다.인간은 누구나 낯선 체계와 질서를 갖고 있는 세계에는 자연스럽게 끌리기 마련이라지만, 그의 호기심과 도취는 정도를 넘어선 것으로 본래의 삶까지도 내버리고 이야기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나아가 그는 단지 이야기 세계에 몰입해 있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그 이야기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칼과 창과 투구를 손질하고, 피부병에 걸리고, 삐쩍 마른 말이나마 챙겨서 ‘로시난테’라고 명명하고,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 세계 속 기사들의 위대한 이름을 본떠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붙였다.이 위대한 시작이 바로 ‘돈키호테’라는 신화의 탄생에 해당한다. 그는 스스로 객줏집의 주인을 졸라 그로부터 기사서품을 받고 자신을 기다리는 모험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을, 말하자면 메타버스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를 둘러싼 세계는 귀족과 기사, 모험과 낭만이 넘치는 곳으로부터 시장과 학교에서 부르주아들이 득세하는 곳으로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돈키호테의 모든 행동들이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지는 것은 그 세계가 이미 단일한 유니버스가 아니라 쪼개진 세계, 혹은 이미 변화가 일어난 세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스스로를 제물로 하여, 기사로망스가 상징하는 한 시대의 가장자리의 봉합선 바깥쪽을 뒤집어 보여준 것이다. 어쩌면, 우리 세계에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의미는 시대가 변화해가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홍익대 교수

2022-04-18

어린이라는 신앙-소파 방정환을 읽다

1929년 5월 어린이날 특집 기념호로 발간된 잡지 ‘어린이’의 표지. 방정환이 1923년 창간하고 개벽사에서 펴냈던 잡지 ‘어린이’는 1935년까지 이어졌다. 이 잡지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어린이 전문잡지였다. 무언가를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언어의 힘이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힘을 갖는다. 시에서 메타포, 즉 은유가 갖는 힘이 그토록 대단한 것은 그것이 단지 시라는 문학 장르의 수사적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전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언어를 현실적 대상으로 연결하는 시인의 통찰력과 언어적 창조력은 그 언어를 둘러싼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 버린 “내 마음은 호수”라는 은유조차, 호수를 지날 때 문득 떠오르지 않는가. 그 언어가 존재의 집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계와 상호작용하는 이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오히려 언어적 담론의 힘에 더욱 둔감해진 지금 시대에 어떤 것을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은유의 힘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그런 의미에서, 비록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 언어에 담긴 함의를 새롭게 더욱 귀하게 규정했던 소파 방정환의 자리는 여러 번 긍정되어도 모자랄 만하다. 그는 어른의 부속품처럼 다뤄졌던 어린이의 자리를 새롭게 규정하면서,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말고, 낡고 묵은 것으로 새것을 누르지 말라고 주장했다. 어린이가 미숙하고 모자란 것이 아니라 귀하고 중요한, 국가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투자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된 것은 1920년대 초부터 방정환이 행했던 강연이나 언론, 출판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방정환은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세 번째 사위로, 일본에 유학하면서 1923년 색동회를 창립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어린이날을 만들면서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천도교의 언론출판 활동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던 개벽사에서 시사종합잡지인 ‘개벽’, 어린이 전문잡지 ‘어린이’, 여성 전문잡지 ‘부인’, ‘신여성’ 등을 편집하면서 바로 전 시대 최남선이 신문관을 중심으로 열었던 잡지출판의 시대를 이어 19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조선의 잡지왕국으로 군림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언론인이기도 했다. 1931년 잡지 ‘동광’ 8월호에 ‘김만(金萬)’이라는 필자는 방정환을 평하며, “조선서는 잡지왕국이라 할 개벽사 2층에는 편집실에 북극의 북극곰(白熊)모양으로 혼자 들어앉아서 연이어 연방 담배를 피워 물고 ‘혜성’, ‘신여성’, ‘어린이’의 매호 편집 목차에 하루 같이 땀을 흘리는 방정환씨는 개벽의 잡지왕국의 총리라는 관(觀)도 없지 아니하거니와 그보다는 몸뚱이가 뚱뚱하고 부지런한 것이 ‘노력하는 곰’이라는 감을 금할 수 없는 것은 필자만의 특수감은 아닐 것”이라고 쓰고 있기도 했다.물론 앞 시대의 최남선 역시 아이들을 위한 잡지에 관심이 많아 ‘소년’, ‘붉은저고리’, ‘새별’, ‘아이들보이’ 등의 소년 잡지를 발간했지만, 그에 비해 방정환이 만든 잡지 ‘어린이’가 특별했던 것은 그가 ‘어린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당시의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개벽사에서 잡지를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 ‘어린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있어서 ‘어린이’는 신앙 그 자체였고,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 사회를 광복으로 이끌 가장 중요한 힘이었다.매년 5월이 다가올 무렵이면, 어린이라는 단어는 더욱 애틋해진다. 미래를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 어린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자라난 나무에서 사회의 변화를 기대했던 방정환의 삶을 생각한다. 그가 썼던 글은 대부분 어린이를 위한 사소한 읽을거리였지만, 결코 사소하게 읽히지 않는 것은 그 글이 어린이라는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홍익대 교수

2022-03-28

사랑이냐, 돈이냐, 그 물음의 원점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작은 선택부터 자신의 삶을 결정할 중요한 선택까지. 그런 의미에서 선택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에는 언제나 그에 따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고, 그 결과는 타인이 대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선택에는 언제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미련과 환상이 해묵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남겨져 있게 마련이다. 죽음이냐, 복수냐 하는 운명적인 선택을 두고 고민했던 햄릿의 고민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살아가며 언제나 치명적인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되고, 역설적으로 그 선택의 순간이야말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마주치는 운명적 선택과 그 뒤에 남겨지게 마련인 잔잔하지만 끈질긴 삶의 여파가 문학적인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사람이 죽고 사는 것만큼의 선택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랑이냐, 돈이냐 하는 오래된 선택의 문제 역시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번성하기 시작한 이후에 등장한 근대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 선택이 가시화되었던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1913년 신문에 등장했던 일재(一齋) 조중환(趙重桓·1884~1947)의 소설 ‘장한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일본 작가인 오자키 고요(尾崎紅葉·1868~1903)가 1897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했던 소설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번안이었는데, 이 고요의 소설 역시 또 다른 영국 소설의 번안이어서, 이 주제가 얼마나 연쇄적인 파급을 일으킬 만큼 충격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가 된다.아마 ‘장한몽’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실 독자도 있겠지만, 그나마 ‘이수일과 심순애’라고 하면 조금은 기억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있는 집 자식인 김중배가 내놓은 찬란한 다이아몬드 반지와 천애 고아로 심순애의 아버지 심택에게 얹혀살며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는 사랑 밖에 줄 것이 없는 이수일의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심순애의 선택을 다룬 이야기가 바로 이 ‘장한몽’이다.당시 심순애가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그 선택이 그토록 선명하고 날카로운 것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바로 그 이전에는 사랑이냐 돈이냐 하는 각각의 가치가 결코 동등한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혹은 그 이전 시대라고 해서 돈 때문에 사랑을 배신하는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근대적인 개념의 ‘낭만적 사랑’은 아니었다고 하더라고, 정(情)에서 비롯되거나 윤리에 바탕을 둔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이 또한 왜 없었겠는가, 그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했고, 소설에 등장했지만, 대개는 악인이었고, 대개는 그 사랑을 배신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운 좋게 회개하는 운명을 맞이하곤 했다.요컨대, ‘장한몽’과 ‘곤지키야샤’이전에, 사랑이냐 돈이냐라는 선택지는 전혀 동등한 것이 아니었다. 돈과 바꿀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가치가 존재한다는 근거는 없지만 강렬한 믿음이 모두의 의식 아래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돈이 사랑을 위협할 수는 있겠지만,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소설 ‘장한몽’은 과연 그러한가, 하고 질문했던 것이다. 심순애는 그러면서 그 사이에서 진심으로 고민했던 것이다. 억눌려 있던 것이 터져 나오는 통쾌함도, 그래도 어딘가에 사랑은 존재한다는 바람도 모두 이러한 담론 속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는 여전히 끈질기게 이어지는 인간이 떨칠 수 없는 물음에 해당한다. 사회가 변해가면서 무작정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3-14

추리소설 사상 가장 독특했던 ‘브라운 신부’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미스터리’란 어쩌면 아무 트릭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의 그럴 듯한 역설에 불과하다.추리소설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도, 그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도, 범죄에 얽혀 있는 흥미로운 트릭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미스터리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요즘 한국에서도 추리소설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추리소설이란 언제나 사건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서 일어나는 서사를 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 장르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아마도 추리소설만큼 이 반복적 규칙성에 고집스러운 장르란 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추리소설의 역사에서 바로 이러한 반복적 규칙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대안이 되었던 가장 독특했던 추리소설이라면, 바로 영국 작가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들 수 있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은 1911년에 자신이 이전까지 써왔던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단편들을 처음으로 엮어 ‘브라운 신부의 결백(The Innocence of Father Brown)’이라는 단행본을 냈고, 이후 이 독특한 탐정은 인기를 얻어 36년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5권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가 나왔다.에드가 앨런 포우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으로부터 아서 코난 도일의 탐정 ‘셜록 홈즈’로 이어지는 추리문학의 계보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들이 확립했던 범죄현장의 무질서로부터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 추리라는 일련의 방법을 통해 질서를 추구해가는 현대에는 일반화된 추리기법에도 이미 익숙해 있을 터이다. 독자는 책장을 펼치고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나버린 사건을 만나게 되고, 아직은 동기도 단서도 불명확한 혼란 자체인 사건을 탐정은 단서를 모으고, 이들을 조합하여 추리를 하고,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사건 발생 이전의 시간을 재구성해서 독자에게 들려준다. 이것이 바로 현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도식이다.이런 추리소설의 전형성에 익숙한 독자들이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를 보게 된다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당혹감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는 낯설기 짝이 없는 무질서와 비도식성, 그리고 비일관성일 것이다. 겉보기에는 전혀 탐정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는 브라운 신부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무질서한 사건 현장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뛰어든다.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내는 근대의 과학자 타입의 탐정이 아니라, 기꺼이 무질서에 참여하면서 그 사건과 영향을 주고받는 새로운 타입의 탐정에 해당한다.이에 앞서, 1908년에 쓴 ‘목요일이었던 남자(The Man Who Was Thursday)’에서 체스터턴은 무질서가 갖는 창조성을 논했던 바 있다.이 브라운신부는 범죄 사건의 현장을 ‘베이커 스트리트 221b’의 실험실로 옮겨오는 근대 과학자 타입의 탐정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널려 있는 무질서 속에 존재하는 질서를 간파해내고 그 속에 참여해서 그 질서를 폭로해내는 타입의 탐정이다. 그러니, 어눌해 보이는 브라운신부의 눈이 반짝이기 전까지 그 사건의 트릭은 트릭조차 아니었던 셈이다.브라운신부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조약돌을 어디에 숨길까 질문하고, 그것을 듣고 있던 플랑보라는 인물은 ‘해변’이라고 답한다. 잎사귀를 숨기기 좋은 곳이라는 질문에는 ‘숲속’이라고 답한다. 이것은 누구나 인용하기 좋아하는 그 유명한 체스터턴의 역설이다.하지만 이어 브라운 신부는 잎사귀를 숨길 ‘숲’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고 있다. 우리는 잎사귀를 숨기고자 숲을 만드는 식으로, 자기의 발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규칙 자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백 년 전에 체스터턴은 그렇게 질문했던 것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2-02-07

사랑이라는 불꽃

노자영의 작품은 권보드래가 엮은 범우비평판 한국문학 ‘사랑의 불꽃반항(외)’에서 실제로 읽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연애소설의 인기가 궁금하다면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2003) 등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사실, 한국의 1920년대는 일제에 의해 강점되어 있던 비극적 시대이기도 했지만, 찬란한 연애의 시대이기도 했다. 국가를 잃고 식민지가 되었더라도 매 순간 슬퍼하기만 하고 있을 리야 없지 않은가. 또 그런 때야말로 사랑의 불꽃은 더욱 타오르기 마련이지 않은가.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이 생겨야 민족이든 국가든 사랑할 수 있을 테니, 청춘들이 꿈을 꾸지 못하고, 사랑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위험한 것이지, 국가의 상실과 사랑의 열망이란 결코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오백 년에 걸친 기나긴 조선이라는 하나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왕이든, 국가든 어딘가 바깥에 삶의 중심을 두고 있던 세계가 종언을 고하고, 개인적인 욕망에 눈뜨기 시작했던 시기 역시 바로 이 무렵이다. 인간이 자기 생의 의미를 온전히 자기 내부에 두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중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근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인간 사회의 한 패러다임이 바뀌는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좋아한다는 것이야 인류가 생겨나면서부터 늘 마찬가지였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문제로 세상이 무너질 듯 고민하며 불길 같은 열정을 품는 것,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마저 서슴지 않는 것은 바로 근대적인 연애에서만 일어나는 특징적인 징후였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단지 한 젊은이의 번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은 바로 중세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모두가 자기 안에 자기만의 신을 갖게 되어, 누군가를 욕망한다는 문제가 한 없이 불안하면서 또 한 없이 귀중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그런 의미로, 1920년대는 연애 베스트셀러의 시대이기도 했다. 글로 쓰인 타인이 겪었던 ‘연애’가 겨우 누군가가 겪은 연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겪을 수도 있었던 것처럼 감정적 전염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이 시기 무렵부터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 되었다. 연애는 인간의 감정이자, 감정의 분자를 전달하는 미디어가 되었던 것이다.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속 B사감이 ‘연애소설’에 열광하듯, 기숙사 학생들에게 온 편지를 읽으면서 연애 감정을 고양시키고 있는 대목은 물론 기괴한 장면이지만, 이것만큼 당시의 시대를 잘 요약하고 있는 장면은 또 없을 것이다. 1926년 낭만적 사랑과 불륜이라는 현실 사이를 봉합하지 못하고 현해탄에서 정사(情死)했던 ‘사의 찬미’의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사례는 한 없이 비극적인 연애의 시대의 감정적 정점에 해당한다.이 시대 가장 잘 ‘팔렸던’ 연애 작가는 바로 춘성 노자영이었다. 그가 1920년대 초에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펴낸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은 당시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죽하면, 당시 세간에는 춘원(이광수)은 몰라도 춘성(노자영)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 노자영의 연애서간집의 성공에 힘입어, 유사한 일련의 사랑 시리즈가 잇달아 나오게 될 정도로, 이 ‘사랑의 불꽃’은 ‘연애’를 모티브로 한 기획출판물의 시작점이 되었다. 비록 이 연애서간집으로 당시 불꽃과도 같은 사랑의 열정을 마주했던 노자영은 이후 창작에 전념하여 시집 ‘처녀의 화환’’, ‘내 혼이 불탈 때’로 이어졌지만, 그다지 문학사 내에는 기억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청춘의 사랑이 그러하듯 말이다. 노자영은 자신의 단편소설 ‘반항’의 시작에 다음과 같이 쓴다.“이 작품은, 예술이라는 것보다도, 청춘의 핏덩어리요 눈물방울이다. 이로써 나는 나의 청춘의 한 시절을 종이 위에 옮겨, 나와 같이 울고 서러워하는 여러 젊은 사람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송민호(홍익대 교수)

2022-01-17

야트막하지만 올망졸망한 산의 입구에 언제나처럼 서 있을

박완서의 ‘나목’은 그가 40세의 나이였던 1970년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등단작이다. 한국전쟁 때문에 작가가 될 기회를 박탈당했던 박완서는 결국 삶을 에둘러 돌아와 작가가 되었다. ‘나목’의 의미는 그곳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1976년 열화당에서 출판했던 ‘나목’의 표지. 오랜만에 서가를 뒤적거리다가, 박완서(1931~2011) 선생의 책을 당연한 듯 꺼내든다. 선생이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 발표했던, 등단작 ‘나목’(1970)이다. 여러 번 때를 두고 다시 읽기도 했고, 매년 학생들에게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기도 있으니,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줄거리라면 당장 입으로 읊을 수 있고, 몇 개의 문장들은 그대로 눈으로 보고 있듯 선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때가 되면 이 소설을 읽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야기가 주는 깊은 공감과 문장이 주는 묘한 안정감 때문이다.사실 박완서 작가의 문장은 언제라도 가보면 거기에 서 있는 산처럼 신뢰감이 있고, 읽는 사람이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 새삼스러워지는 그런 맛이 있다. 물론 어떤 글이든 때를 두고 읽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을 테니, 유독 박완서의 문장만이 그런 맛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삶에 지쳐가고 있는 느낌이 들게 되는 때, 나는 산에라도 가는 것처럼 ‘나목’에 들어 있는 이경의 이야기와 박완서 선생의 문장을 떠올린다. 그러면 또 다시 이 책을 펴들 수밖에 없게 된다.‘나목’의 주인공 이경은 세상 어디에도 붙박힐 수 없는 존재이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어가며, 지극히 감정적이고 좌충우돌하는 이경의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거슬릴 수밖에 없는 것은 독자가 아직 그 마음속에 들어 있는 깊은 상실에 다가가지 못한 까닭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불편한 약점을 우리 눈앞의 대상에게서 발견할 때 거슬리는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답답한 현실에 대해 고작해야 거친 말로 반항할 수밖에 없는 이경의 태도가 거슬린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 어떤 부분이 삶에 붙박혀 있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책을 읽어나가며 우리는 이경의 마음속 깊이 들어 있는 상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경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다니며 표류하는 것은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지진과도 같은 계기가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떤 종류든 간에 ‘상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상실의 순간은 늘 불시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의 대비를 한다고 해도 그 상실이 익숙해질 리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은 타율적인 박탈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삶의 바람이나 욕망 같은 것은 현실로부터 이격되어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은 잿빛이 되는 것이다. 한 번 그런 상실을 겪은 인간은 결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다니는 이경의 모습을 통해, 크든 작든 우리의 상실을 떠올리는 것이다.소설의 초반부 독자에게는 분명 제멋대로이고 반항하는 청춘으로만 보였던 이경의 태도가 소설의 말미가 되면 한없이 안쓰럽고 딱한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은 이경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내재된 그런 상실의 기억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이경이 기나긴 방황을 끝내고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했던 옥희도의 그림 ‘나목’을 보면서 평온해진 것을 보며 우리 역시 그런 상실로부터 돌아와 평온해지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그렇게, 매번 어떤 시기가 되면 이 책을 꺼내어, 당연한 듯 읽는다. 또 당연하게 이경의 제멋대로의 태도를 거슬려하다가 현실을 부유하는 이경의 상실로 인한 심연을 들여다 보고, 한 없이 그 삶이 안쓰럽고 소중해진다. 이 ‘나목’은 그렇게 박완서라는 야트막하고도 올망졸망한 산 앞에 언제나처럼 서 있는 것이다./홍익대 교수

2022-01-03

지금, 우리의 머릿속을 맴돌며사라지지 않는 그 노래의 멜로디처럼

어떤 문장은 읽고 지나간 뒤에 계속 우리를 붙잡고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 어제 잠깐 들었을 뿐인데 오늘 하루 동안 내 주변을 맴돌면서 사라지지 않는 노래의 멜로디처럼.아니,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지금 머릿속에 자동반복이라도 틀어놓은 듯 울리고 있는 노래가사의 멜로디는 마치 귀로 듣고 있는 음향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지만, 어제 읽었던 어떤 문장은 마음 깊숙하게 들어 있는 무언가를 건드려 상처를 내든가 해서, 오랫동안 다시 생각나고, 생각나고 한다. 피가 난 상처가 아물어 완전히 나아도 아렸던 그 상처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떨쳐내고자 하는 기억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글귀에 한 번 붙들린 인간은 그곳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도 인스타나 페북 같은 SNS에 따옴표로 인용된 문장들이 대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분명 누군가의 글 속에 들어있었던 그 문장은 이제 누군가의 마음속을 붙들고 놓지 않으면서 나를 표현하는 피와 살이 되었다.영국 밴드 비틀즈의 곡 ‘엘레노어 릭비(Eleanor Rigby)’를 하루 종일 흥얼거렸던 어떤 소설 속 인물처럼, 어떤 멜로디나 가사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야 어쩌면 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문장이 우리를 붙드는 것은 이처럼 바쁜 시대에는 흔하지 않은 만큼 강렬하고 충동적인 경험이다. 우리가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라면, 주로 그 멜로디가 반복적이고 그래서 중독적인 까닭일 테다. 하지만, 어릴 때 전혀 신경 쓰이지 않던 어떤 노래의 가사가 새삼스럽게 우리의 마음 안쪽에 슬쩍 들어오기도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역시 어떤 문장이 우리를 붙드는 것은 그 문장이 지금 나의 현재로 슬며시 들어와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하기 때문일 것 같다. 그렇게 우리가 여기저기에서 읽고 지나갔던 문장들은 어느새 나의 지금 마음의 풍경이나 바람을 표현하는 소중한 문장으로 바뀐다. 잡다한 금속이 귀중한 금으로 바뀌는 연금술 같은 경험이다.고백하자면 어렸을 때는 무수히 읽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계절의 변화를 노래하는 시들이었다. 아마 어릴 때의 나는 계절의 변화 같은 당연한 것들, 눈이 내리고, 싹이 움트고, 하늘이 높아지는 모든 변화들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제는 세계에서 계절이 변화해가는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나이가 되니, 예전에는 심상히 지나쳤던 그 시들이 묘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교과서로만 배우고 가르쳤던 ‘국화 옆에서’조차 새롭게 다가온다. 문장이 변했을 리 없으니, 내가 변한 것이고, 때가 되어 그 문장이 나를 붙들게 된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읽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언제나 그것을 붙들리는 시기는 따로 있다.시의 경우만은 아니다. 소설처럼 읽고 있다 보면 어느새 지금 내가 문장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소설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 스토리의 내용에만 집중하게 되기 마련이다. 헌데 가끔씩 어떤 소설의 문장은 유독 존재감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다. 가끔씩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한 번의 숨이 소중한 것처럼 말이다. 작가가 공들여 상징으로 수놓은 문장이 아니라고 해도, 그저 여느 소설에라도 있을 법한 투박한 문장이라도 그것을 읽고 있을 때의 나의 마음으로 인해, 그 문장은 나를 붙드는 것이다. 묘하게 기억 속에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그렇게, 어떤 문장은 읽고 지나간 뒤에도 계속 우리 주변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를 내기도 하고, 그것을 봉합해주기도 한다. 지금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의 멜로디처럼, 말이다. /홍익대 교수

2021-12-13

우리가 서로 멀어지고 있는 속도는 초속 몇 미터일까

한때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영역으로만 간주되었던 과학기술의 영역이 어느 샌가 알아챌 수도 없는 사이, 우리와 가까운 거리로 성큼 다가와 버렸다. 생각해 보면, 모든 변화란 그렇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저 멀리 보일 때는 아직은 실현되기에는 한 없이 먼 아련한 꿈만 같다가, 변화를 눈치 챌 쯤에는 어느새 주위를 가득 채워버려서 마치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아직은 소설이나 영화 속 환상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했던 인공지능이나 자율주행, 메타버스 등의 기술들이 단지 기호가 아니라 하나 둘 실현되어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유용한 도구가 되고, 우주를 오가는 일 같은 것도 가시화 되는 것을 보면, 문득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사실, 이미 우리는 기존의 세계와는 다르게 과학 기술에 의해 새롭게 구조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대학에서 과학이나 공학 수업은 몇몇 관심 있는 학생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필수적인 교양이 되고 있으며, 가장 인간적인 사유에 바탕을 둔 언어, 문학, 예술 등에 바탕을 둔 인문학의 개념은 점차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를 그 바탕에 두는 방향으로 변동해 나갈 것이다. 예의 그렇듯이,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속도로 변화는 우리 주변의 공기를 가득 채운다.최근 과학소설의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불과 조금 전 SF, 즉 ‘사이언스픽션’이라는 특별한 장르로,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중심으로만 조금씩 읽히고 있던 과학소설은 지금 새롭게 진화하여 널리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배명훈, 김보영, 김초엽 등 단지 SF라는 장르문학의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는 점이 지금 과학소설 붐의 가장 흥미로운 점일 것이다. 과연 우리가 과학소설을 좀 더 많이 읽게 된 것은 우리가 어느새 과학기술에 익숙해져서일까, 새로운 주제를 다룬 소설들이 등장해서일까.지금까지의 과학소설은 물론 폭넓은 외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대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술이 실현된 미래상을 보여주는 데 주력해왔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이 유토피아가 되었건, 디스토피아가 되었건, 과학소설에 드러난 도래할 미래는 독자에게는 선명한 스펙터클로 작동하면서 환상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나 필립 K. 딕 등이 보여주었던 미래의 풍경은 고스란히 영화로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소설을 쓸 당시에는 안드로이드나 홀로그램, 행성 간 여행 등의 아이디어는 구체화되었을 뿐인 순수 아이디어였을지도 모르지만, CG나 모션캡쳐 등이 가능한 영화 예술에서 그 과학기술이 보여주는 미래상은 시각적으로 재현될 수 있다. 대개 과학소설의 독자가 갖게 마련인 과학기술이 구현한 미래 풍경에 대한 환상은 그렇게 촉발된다.어쩌면 과거의 SF와 지금 나와 일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과학소설들이 갖는 중요한 차이는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이언스픽션이 신기한 미래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세계가 점차 도래하고 있는 와중에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계의 단순한 알고리즘과 반복의 단위들, 그리고 복잡성에 기반을 둔 학습가능한 체계로서 기계를 규정할 때, 인간을 바라보는 자리는 새롭게 마련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노멀이 아닌 기계와 공존하는 새로운 노멀을 살아가고 있는 와중인 셈이다. 우리의 관계가 서로 멀어지고 있는 속도는 초속 몇 미터일까. 이것이 단지 문학적 비유가 아닌 세계 속에서 요즘 과학소설은 읽히고 있는 것이다./홍익대 교수

2021-11-29

미스터리로 빚어낸 ‘쿨’한 세계

이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일본과 한국에 동시 발간되거나 불과 몇 달 사이를 두고 번역출판 된다. 가장 최근에 번역된 ‘백조와 박쥐’(양윤옥 역, 현대문학)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 위치가 바뀐다. 쿨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세계가 조금 진지해지는 징후가 아닌가 기대한다. 외국의 작가가 쓴 작품 중에서 한국에 가장 많이 번역되고 읽힌 책을 떠올려 본다면, 일본의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사진)를 빼놓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1985년에 ‘방과 후’라는 정통 추리소설로 데뷔한 그는 매년 2~3편의 책을 꾸준히 출판해왔고, 그 대부분이 이미 한국에도 소개되고 번역되어 있으니 말이다. 매년 2~3편의 책을 출판하는 인기 작가 자체는 해외에 드물지 않지만, 그 대개의 책들이 한국에서 번역 소개된 작가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제외하고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편, 한 편 그의 작품이 시나브로 번역되어 나올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어느새 우리는 그가 만들어둔 세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은 어떤 소설보다 잘 읽히고, 어떤 소설보다 인간의 감정과 호기심이 결합해 있는 마력을 가진 세계다.배를 타고 몇 시간이나 가야하는 외딴 섬에 지어진 호텔 같은 곳에 모종의 이유를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도저히 풀 수 없는 밀실의 트릭과 살해방법들, 사라지는 흉기들. 아마 정통적인 추리소설의 팬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르적 관습일 것이다. 모든 종류의 관습이 그러하듯, 이미 책을 펴든 순간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 관습과 계약을 끝낸 상태이다. 그토록 먼 곳에 왜 호텔이 있을까 라든가, 그들은 왜 거기로 가야만 했을까, 게다가 하필 왜 모든 문제를 풀어낼 탐정은 왜 일행 사이에 끼어들어 있을까 하는 중요한 질문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 된다. 사건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범죄의 해명에 나선 탐정과 마치 공정한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은 환상만이 추리소설 독자의 유일한 게임의 규칙이다. 그러니, 앗, 하는 사이에 범인을 놓쳐버리는 아슬아슬한 시간적 지연도, 추리소설 독자에게는 즐거움일 뿐이다.지금까지 한국에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던 것은 이처럼 미스터리로 가기까지의 비현실적인 구성이나 독자가 탐정과 지적인 경쟁을 벌인다는 추리소설 읽기의 독특한 측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소설적 전통에서 소설은 대개 마음을 움직이거나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지, 머리를 자극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적인 소설이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움직여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소설이 그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의미이리라. 히가시노 게이고는 처음에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정통 추리소설로 소설계에 입문하여 꾸준히 추리소설을 써왔지만, 종종 다양한 장르로 확장하면서 정통 미스터리만이 아닌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거나 장르를 결합한 장르 혼종적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에 처음 히가시노 게이고가 알려지고 번역되기 시작한 시기가 미스터리에 기반해서 독자의 마음에 무언가 남겼던 ‘비밀’(1998년 출판, 1999년 번역)이나 ‘백야행’(1999년 출판, 2000년 번역)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두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이른바 ‘역주행’하여 그의 정통 추리소설까지 번역되기 시작되었고, 한국에 어느새 히가시노 게이고 월드가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그가 펼쳐놓는 세계는 결코 심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누군가가 있다. 호텔에서도, 공항에서도, 나무신을 모신 작은 절에서도, 그리고 코로나가 한창인 지금 여기에도 사건은 발생하고, 누군가 그것을 해결한다. 그만큼 쿨한 세계는 또 없다. 세상이 어디 그런가, 싶다가도 그만 그 쿨한 세계에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1-11-15

시는, 노래한다

김소월이 1925년 낸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표지. 시는 노래한다. 저만치서, 계속해서. 노래하고 있었다, 저만치서 계속해서, 언제까지나.시란 본디 언어의 일정한 나열에 음률을 붙여 노래하기 위한 목적의 것이었다. 조금 과장을 덧붙인다면, 음률을 붙이기 위해 정형화된 시는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많은 가수들의 노래 가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 아닐까. 음악이 먼저였을지, 언어의 나열이 먼저였을지, 그것은 알기 어렵지만 말이다. 음률에 신경써 언어를 나열하려면, 단어나 음절의 개수에도 신경 써야 하고 반복에서 오는 맺음과 이어짐에도 신경 써야 한다. 이른바 두운이나 각운이다. 학생 시절, 음수율이니 음보율이니 그것이 노래인지도 모르고 배웠던 시의 운율은 사실 노래였다. 그것을 알고서 나는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형식적 규칙이 있는 시들은 대개 누군가 거기에 음률을 붙여 노래를 불렀던 것들이다. 향가니, 고려가요니, 악장이니 시조니, 하는 것이 모두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 어딘가에 새겨진 문자의 특별한 나열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거기에 깃들어 있던 누군가의 노래는 휘발되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언어는 노래의 흔적이다. 지금은 노래를 목 놓아 불렀던 그 사람의 그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던 절박한 마음이나 악기의 소리나 목소리 역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어떤 집에 살았던 누군가 떠나간 다음에 그를 모르는 다른 사람이 그가 남겼던 흔적을 통해서 그의 삶의 활동들을 짐작해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시를 읽으며, 그 노래를 떠올리는 것은.노래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언어의 자유를 획득한 자유시의 이념이 제기되고 그것이 일반화된 지금, 시는 읽는 것이다. 서가에서 시집을 골라 펼치고 눈으로 읽는다. 유독 세계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나 그것을 포착해내는 언어의 해상도가 뛰어난 시인이 만들어낸 놀라운 언어의 연결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물론 자유시를 읽는 것은 귀가 즐거운 경험은 아니지만, 눈을 즐겁게 하는 경험이다. 그렇게 지금 시와 노래의 가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김소월 시인. 하지만, 가끔씩, 눈앞에 펼쳐지는 현란한 언어에 눈이 피로해질 때쯤, 서가에 꽂힌 김소월(1902∼1934)의 시집을 펼치면, 시는, 노래한다. 시가 노래하기 시작한다. 비록 ‘진달래꽃’의 원본은 구경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귀해져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재현물에 불과하지만, 시인 김소월이 시를 공부하고 언어를 고르며 흥얼거렸을 콧노래는 흔적으로도 남아 있지 않지만, 김소월의 시를 읽으면 분명 노래가 내 귀를 울린다.김소월은 우리 시인들 중에서 가장 많이 노래로 불린 작가이다. ‘진달래꽃’이나 ‘개여울’, ‘엄마야 누나야’,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등 예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가수들이 김소월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김소월의 시집을 펼쳐 읽으며 내가 흥얼거리는 멜로디는 사실 그 가수들의 노래일지도 모른다. 시에 노래가 한 번 깃들면,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고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문자의 나열로만 남은 김소월의 시를 그토록 많은 가수들이 노래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은 그의 시가 민요에 뿌리를 두고 있어 형식적 정형을 띠고 있기 때문일 테지만, 단지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김소월의 시 속에는 천연덕스럽게 노래로 부르고는 있지만, 말로는 못할, 말로는 못했던 복잡한 감정의 잔여가 들어 있다. 시를 처음 읽을 때는 그 형식적 정형이 완벽해서 그 복잡한 감정을 눈치 채기 어렵지만, 세상을 살아가다가 무심코 말로는 바뀌지 않은 감정이라는 경험을 공유했을 때, 김소월의 시를 제멋대로 흥얼거리게 될 때, 시는, 노래한다. 비로소 노래하기 시작한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1-10-25

가을, 산더미처럼 쌓인 책의 바닷속에서 갈곳을 잃다

어떤 책은 꼭 필요해서, 또 어떤 책은 꼭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서, 또 어떤 책은 꼭 필요했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한두 권씩 사들이는 책들이 순식간에 산을 이루게 된다. 집이든 연구실이든 책꽂이를 넘쳐 바닥에 쌓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아마도 책을 읽는 것을 그다지 자신의 취미로 삼지 않으시는 분이라도 이것만큼은 공감하실지 모른다. 별 대단한 생각 없이 읽으려고,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아이들을 위해 조금씩 사둔 책들은 어느새 집안 여기 저기 쌓인다. 한번 불어나기 시작한 책들은 단호한 마음을 먹고 정리하지 않으면 절대로 줄어들지 않으며, 자기 증식한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야말로 대략 난감한 혼란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아마도 무언가 수집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이해하시리라. 무언가 모으는 데 들이는 시간은 비교적 잠깐이지만, 이를 정리하는 시간은 무한대에 가깝게 소모된다. “오늘만큼은 꼭 이 산더미 같은 책들을 정리해버려야겠다”고 굳은 마음을 먹고, 그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보면, 정리는커녕 고작 책 몇 권을 버리고 난 뒤 빈곳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새로운 책들을 주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무언가를 모아 내 집에 들여 어떤 공간에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배열하여 두는, 수집이라는 행위가 한편으로는 자기가 가진 취향이나 기호, 감식안을 드러내는, 즉 사회 속에 자기 정체성의 확인과 과시라는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분명하다. 부르주아의 지적 취미에 해당했던 서적에 대한 수집은 이제는 한물간 것이지만, 최근 젊은 세대들에게서 불고 있다는 신기한 바이닐 레코드(LP) 붐도 그렇지만, 어떤 것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모으고 보여주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위이다.게다가 책을 모은다는 것은 어떤가, 책이란 물성(物性)을 가진 것이기도 하면서, 기억 그자체이기도 하지 않은가.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이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에게서 발견했던 ‘산책자’라는 것은 결국 ‘수집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만 그 수집가는 과시만을 위해 자신의 서재에 책을 모아두는 수집가가 아니라 자신이 거닐던 파리라는 도시의 파사주들 사이에서 어딘가 다른 시대로 연결되는 선들을 발견해서 기억들을 그러모아 새로운 시로 써냈던 이들이었다. 기억의 수집가였다고 생각해도 좋으리라.미술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근원 김용준(1904~1967)은 그의 수필들을 담아놓은 책 ‘근원수필(近園隨筆·1948)’속에서 ‘골동(骨董)’을 완상하는 행위에 대해, 그것이 단지 좋은 옛 물건을 소유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흘러오는 옛 형제의 피를 느끼고 그들의 감각이 어느 모양으로 나타났는지가 궁금”해서라는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 이 글이야말로 ‘골동’을 수집하는 행위가 단지 귀중하고 값나가는 물건의 수집이 아니라, 머나먼 기억을 수집하는 행위임을 알려주는 의미가 담겨 있다.마찬가지로, 한국미의 순례자이자, 찬미자였던 혜곡 최순우(1916~1974)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1992)’에서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것의 비색이나 곡선, 상감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좀 더 근원적인 ‘빛깔’이 몸에 배어드는 마음을 지적한다. 그 아름다움에는 분명 형태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어떤 교감이 존재하고 있으리라.아차, 책들을 꺼내 정리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책을 정리해 버리기는커녕, 새로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이제 갓 들어선 가을의 오후가 지나가 버린다. /홍익대 교수

2021-10-11

서재라는 공간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는가

문학사회학자 이언 와트(Ian Watt)는 ‘소설의 발생(The Rise of the Novel)’이라는 책에서 독서대중의 형성과 소설의 발생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지금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아 있는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등장하게 된 현상에는 산업혁명 이후 대량출판인쇄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18세기에 독서대중이 증가하기 시작한 배경이 존재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책과 독서가 이 시기에 급격하게 중간계급의 중심문화가 되어, 이후 백 년 이상 이어졌던 것이다. 바야흐로 사치품이자 자기 과시의 상징이었던 책이, 대표적인 여가 활동의 대상이자, 인간이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완전히 같은 내용, 같은 분량의 글자가 고급 종이를 써서 단단하고 꼼꼼하게 제본된 커다란 판형의 하드커버의 책에 담길 수도 있고, 비록 인쇄상태도 조악하고, 종이로 금방 바스러질 듯 약하긴 하지만 언제나 가지고 다니기 좋은 소프트커버, 내지 문고판의 작은 책에 담길 수도 있다. 자기 과시의 사치품에서부터 여행할 때 언제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일상품까지, 책은 단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는 기호가 아니기 때문이야말로 흥미롭다. 내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 하는 것 역시 내가 누구인가 하는 취향이나 기호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애초에 책이란 그것의 물성, 즉 물질로서의 성격을 고려하는 순간,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 책을 고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호로 작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의 가방 안에 흘깃 보이는 책 한 권만큼 그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기호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때로는 타인으로부터 읽히게 되는 것이 싫어 책에 꼼꼼하게 표지를 싸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 역시 소지품으로서 책이 갖는 기호로서의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다.당연히, 귀한 책들을 잔뜩 꽂아놓은 서재야말로 과시적 기호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18세기 경제력을 획득한 부유한 상인계급의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서재를 꾸미고 그곳에 2절 정도의 커다란 판형의 책들을 빼곡히 꽂아두고 손님이 방문할 때마다 한 권, 한 권 꺼내 보여주며 이 책을 구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눈을 빛내며 늘어놓는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과시의 마음은 오히려 순수한 것이다. 골동 취미의 일부로서 옛 책의 수집과 그 책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을 빌려 자신이 갖고 있는 교양과 지적 취향을 과시하는 셈이다. 별로 해롭지 않은 자기 자랑이다.이처럼 누군가의 ‘서재’를 보는 일은 즐거운 일 중에 하나였다. 내 어린 시절에는 친구의 집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서 내 친한 친구의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른바 서재를 읽는 것이다. 귀한 책들이 많이 모여 있는 서재에서 주인의 자랑이 담긴 설명을 들으며, 눈호강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테지만, 책은 소장하는 물건만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어지럽게 쌓인 책들 속에서 그것을 소중히 아끼며 꽂아놓은 주인의 마음을 가늠해보는 것이 오히려 더 즐거운 일이다. 그가 모아둔 책들, 그리고 그 책들이 놓여 있는 순서를 읽어가다 보면, 마치 그 사람의 무의식 내부를 들여다보듯, 책의 행간을 읽어내듯, 그 마음을 이해할 듯한 기분이 든다.최근 사람들이 책을 더이상 많이 사지 않게 되면서, 또한 책의 소비가 전자디지털매체로 옮겨가면서 확실히 집안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있는 공간은 서재인 것 같다. 우리들 사고의 저장은 웹페이지 접속 기록처럼 온라인 어딘가에 쌓여 있을 뿐, 이제는 서재처럼 슬쩍 훔쳐보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대로 우리들에게 ‘서재’라는 공간은 사라져버린 걸까./홍익대 교수

2021-09-13

문장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맛

유독 어떤 문장들은 읽고 지나간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문장은 어떤 뜻인지 알듯 말듯해 끝없이 미끄러지며 그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어떤 문장은 마치 내 청춘의 한 조각인 것만 같아 유독 가슴 아프게 나를 물어뜯기도 한다. 또, 며칠 전부터 내 머릿속에서 오가던 희부윰한 생각들을 그야말로 딱 맞는 문장으로 풀어낸 누군가의 글이 주는 그 시원함 때문에 잊지 못하고 어딘가에 갈무리해두었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꺼내보게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문장이 나의 마음속에 던지는 것, 그리고 조금씩 살이 붙어 무시할 수 없는 어떤 또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언어로 된 무언가를 읽는 이유일지도 모른다.우리를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반드시 건드리고 지나가는 문장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어떤 문장을 읽고 혼란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마음의 방심 상태를 그 문장이 습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개 격언이나 금언, 경구, 잠언 등을 의미하는 아포리즘(aphorism)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비틀어 혼란에 빠뜨리거나, 반대로 그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선언하면서, 그것을 읽는 우리를 새삼스럽게 만든다.오스카 와일드는 하나의 문장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허점을 찌르는 분야에 있어서는 가장 탁월하다고 해도 좋은 작가였다. “경험이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실수에 붙이는 이름이다”라든가 “유혹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에 굴복하는 것이다” 같은 문장은 인생에서 번민에 빠진 인간에게는 찌릿거릴 정도의 혹독함을, 아직 번민을 경험하지 않은 인간에게는 당연하고 만연한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자유를 허용한다. 한 권의 책으로 묶어도 충분한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들에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답답한 삶의 국면들을 잠시 벗어나도록 하는 단호함과 새롭게 찌르는 시각이 있다.또, 어떤 문장은 우리를 그 책 속에 들어 있는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이상(李箱)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은 그것을 읽는 순간 우리를 여기 현실이 아니라 그가 펼쳐놓은 상상적 기호놀음 속으로 끌어들여 그 속에 길을 잃게 만든다. 어떤 미로는 출구로 빠져나갈 때보다 그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더 의미 있는 것이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는 문장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나 “역사에 걸쳐 여성은 익명의 존재였다”는 문장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어떠한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문장에 불과한 자리를 넘어, 독자로 하여금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보고 싶도록 만들지 않는가. 이 문장은 절대로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붙들어 더 깊숙한 곳까지 끌고 들어간다.그래서, 어떤 문장은 마치 익숙한 노래 가사처럼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서 문득 떠올라 내가 그 문장을 통해 고민하고 있던 장면들을 소환한다. 하나의 문장에 압축된 기억, 그리고 하나의 문장의 여백에 남겨진 기억들이 그것을 읽었던 시절에 우리를 바로 그 때, 그 세계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다.그러니, 우리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그 책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문장에 귀 기울이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우리를 붙잡는 문장의 뒷맛은 우리를 오랫동안 그 책 속에 머물도록 만든다. 그러니,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한 소설의 명문장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다. 어떤 문장이 우리를 붙드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니 말이다. 마음을 붙드는 자기만의 문장을 갖는 것은 독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웅숭깊어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홍익대 교수

2021-08-23

불면의 밤, 머리맡에 놓아두는 몇 권의 책들

여름의 입구를 지나 그 중심으로 옮겨가는 순간, 여름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잔뜩 습기를 머금은 한낮의 더위는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저 마찬가지가 된다. 몸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뜨거운 공기에 푹 들어가 있는 듯한 한낮 더위의 느낌은 사실 32도나 36도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경험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더위는 어차피 똑같다. 숨은 쉬기 힘들고, 마음도 쉽게 지친다.사실, 여름의 한 가운데 들어왔다는 실감은 하루 종일 달궈져 있던 해가 질 무렵 그래도 불어오던 선선한 바람이 사라지는, 열대야의 후텁지근한 공기에서 찾아온다. 인간이 삶을 버텨내는 것은 그래도 힘겨운 오르막길을 넘어 조금은 평탄한 내리막이 존재한다는 바람 때문이 아닌가. 하루 종일 해가 질 무렵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만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여름을 버텨내던 사람들은 해가 져도 아직 식지 않는 열기에 이제 여름의 한 가운데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이런 열대야 속에서는 평온한 잠자리가 사투의 현장으로 바뀐다. 쉽게 잠들 수 없는 이른바 불면의 밤이 찾아오는 것이다.에어컨을 켰다가 껐다가, 더이상 찬바람을 내지 못하는 선풍기를 켰다가 껐다가 별다른 고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사실 이런 불면의 밤에는 자연스레 컴퓨터나 노트북에 손을 뻗어 영화나 영상을 보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로 후덥지근한 공기에서 손을 움직여 책을 넘기는 행위조차 귀찮아져, 결국 구독하는 각종 OTT미디어 서비스(Over-the-top Media Service·인터넷을 통해 방송, 영화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에서 옛날에 보았던 영화, 드라마를 골라보거나 동물이나 요리 영상 등을 찾아보거나 한다. 열대야로 인해 초래된 불면의 밤이 이어져 자야 할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이 같은 불면의 밤에 이처럼 눈과 귀를 편하게 자극하여 뇌를 각성시키는 영상을 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답답한 더위가 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방해하니 해결책을 찾지 못한 마음이 무언가 집중할 가장 손쉬운 대상을 찾은 것에 불과하다. 어차피 영상 한 편을 본다고 시원해지지 않으니, 결코 한 편을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누구나 알고 있지만 불면의 밤에 쉽게 잠이 드는 방법은 몸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10~20분이라도 달리기를 하고 돌아와 씻고 누우면 긴장했던 몸이 서서히 이완되며 더위의 한 가운데에서 잠들 용기가 생긴다. 더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방법이겠지만 사실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이 같은 더운 공기 속에선.운동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영상에 손대기보다는 머리맡에 책 몇 권을 놓아두기를 권한다. 물론 이것 역시 바깥에 무언가 있는 더 많은 실시간의 정보를 찾고자 하는 마음을 통제하고, 흰 종이 위에 쓰인 까만 글씨를 읽어내고, 상상하는 과정을 통해 정신을 혹사시키는 방법이다. 머리를 직접 자극하는 시청각이미지들이 들어오는 영상에 비해, 이미지가 적고 그 이미지가 모두 내 머리로 만든 것이니, 언제든 상상을 그만두는 것 역시 내 자유이다. 보고난 뒤 생긴 마음의 결여로 다음 편을 바로 클릭해야 하는 영상에 비해, 내가 시작할 수도 끝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여름밤의 책읽기의 장점이다. 가급적이면 너무 많은 지식이 담긴 책보다는 하나의 세계가 오롯이 담긴 소설책이 더 좋으리라.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잠들어 꿈속에서 그 세계 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홍익대 교수

2021-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