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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을 읽으며 낯선 곳을 여행하기

등록일 2022-05-30 18:45 게재일 2022-05-3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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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여행한다면, 다른 어떤 글보다 1929년 현진건이 동아일보에 쓴 ‘고도순례 경주’ 한 편이 적절한 가이드가 될 수 있다. 사진은 1929년 7월 18일에 동아일보의 표제삽화이다.

어딘가 낯선 곳에 처음으로 여행을 하러 갈 때면 그 지역에 관련된 옛사람의 글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관동지방을 돌아다닐 때는 정철의 ‘관동별곡’을 꺼내어 읽는다던가, 지리산 근방을 여행할 때는 최남선의 ‘심춘순례’를 꺼내어 읽는다던가 하는 게 그런 것이고, 대구를 갈 때는 대구에서 서울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고향을 떠나온 사람과 만났던 이야기를 다룬 현진건의 소설 ‘고향’을 읽거나 군산에 갈 때는 개항장 군산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 채만식의 ‘탁류’를 읽고 가는 식이다.

물론 아직 옛사람들의 글에 대해서는 공부가 적어 여행하는 지역을 다룬 글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방문한 지역에 오래 계셨던 선생님들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

또, 옛글 속에 다뤄진 장소라야 작가가 다루고자 했던 서사의 맥락과 다소 맞게 다룬 협소한 기억일 뿐이라 아무래도 여행자를 위한 모든 정보를 모아둔 친절한 여행 가이드북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생소한 공간의 문턱을 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라면 그 공간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작가가 쓴 작은 글조차 큰 의지가 된다.

여행을 하면서 먹고 마시는 물질적인 세계 위에 작가의 기억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층위가 끼어들게 된다. 그러면, 낯선 곳에서의 삭막한 여행도 조금은 더 풍요로워진다.

사실, 우리가 요즘 여행에서 볼 만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대부분은 미디어에 재현되어 보고 들었던 대상을 실제로 보는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TV 같은 영상매체를 통해 보고 들었던 이집트의 피라밋의 광대한 크기 같은 것을 실제로 가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이나, 영화나 드라마 속 무대가 되었던 그곳에 실제로 가서 보는 것이 그러한 것에 해당한다. 그 주인공이 먹었던 음식을 실제로 먹어보거나 그 액티비티를 실제로 해보는 것도 이러한 경험에 포함된다. 즉 미디어의 간극을 넘어서는 실제 경험에 대한 욕망이다.

우리의 여행이 대부분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현재 경험이 얼마나 미디어로 매개되어 있는가, 그럼에도 아직 미디어를 넘어선 실제 경험을 바라는가 하는 것을 알려준다.

“가봤더니 생각보다 별것 없던데?”라는 여행 뒤 우리가 내뱉는 말 속에는 미디어가 추동하는 여행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들어 있다. 물론 옛사람이 남긴 짧은 글에 의지해 어떤 곳을 여행하는 일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보고 글로 남겼던 대상을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경험적 충동에서 비롯된다.

다만, 그 글이 너무 짧아서 그 경험을 공간에 펼치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장소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 곳에서 만나는 대상들은 별 것 없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감각적 풍부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시각적 미디어는 언제나 대상을 더 돋보이도록 만들어서, 실제의 대상을 왜소하게 만들지만, 말과 글은 실제의 대상에 대한 누군가의 기억과 관계되어 실제의 대상에 대한 경험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 경험에 통합된다. 적어도 여행에서만큼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읽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야외활동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는 이 시점에, 아마도 주말을 이용해서, 휴가를 이용해서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을 것이다. 어제 본 영화에 나왔던 배경을 확인하러 가는 여행도 좋고, 지역의 맛집을 찾아가는 여행도 좋지만, 가끔은 책을 한 권 들고 가는 여행을 권한다. 그것이 그 지역에 관련된 옛사람의 글이라면 분명 충만한 의미로 가득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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