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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익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등록일 2024-09-24 19:27 게재일 2024-09-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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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이효석(1907~1942)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평창에서 마친 뒤에 이후 서울로 올라와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대 영문과를 다녔다. 그는 스무살 무렵부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 그의 주제는 주로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띤 것이었다. 이후 그는 작품의 색채를 바꾸어 향토색이 짙은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문체로, 향토적인 장소성을 살린 주제를 가장 잘 살린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간주된다. 사진은 작가 이효석. /이효석문학재단 제공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무심히 있을 때는 흘러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던 시간도,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고, 무언가 해야할 일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실제로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여름이 한창일 때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그 계절도 뺨에 스치는 바람 한 줄기, 길가의 나무들의 색이 바뀌는 것을 보고나서야 다음의 계절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래 시간이란 나와 관계 없이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을 느끼는 나의 감각이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늘 다니고 있는 이곳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공간이란 늘 그곳에 그렇게 나와 상관 없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 공간을 어떻게 인지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따라 그 공간은 나에게 전혀 다른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공간의 형태,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구조물도 그렇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삶에 있어서의 사건들은 우리를 그 공간을 하나의 의미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는 데 주요하게 작용한다. 우리가 처음 가본 장소와, 추운 겨울날 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꽈당 넘어진 장소의 의미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계속 다녔던 그 거리 곳곳에는 그 공간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기억들이 켜켜히 쌓여 무언가 특별한 어떤 것이 된다. 우리가 옛날부터 살았던 동네에, 한참 어른이 되어 다시 갔을 때 느끼는 어떤 종류의 느낌은 바로 그 공간이 아직 나에게 특별한 장소로 각인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시간도 공간도, 단지 무심하게 그곳에 놓여 천천히 풀리고 있는 태엽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과 만나게 되면, 좀 더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 타인이 보기에 별 것 없는 오후 4시의,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원이라도 그곳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은 쌓여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공간을 장소로서 기억하고, 누군가는 그 장소를 사진으로 남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의 이야기를 담아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영화로 타인에게 전한다. 그렇게 어떤 공간에 담겨 있는 누군가의 특별한 기억은 단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으로 공유된다.

한국에서 이처럼 특별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특히 소설로 잘 구현했던 작가는 아마도 작가 이효석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짧디 짧은 단편은 장소 속에 담긴 인간의 특별한 기억을 타인에게 공감의 형태로 전했던 가장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메밀꽃밭이야 단지 이효석의 고향이었던 평창 봉평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칠흙 같은 밤 메밀꽃밭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남긴 몇 줄의 글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몇 줄의 글에 담긴 조선달과 동이의 미묘한 이야기와 메밀꽃밭을 비추는 달빛이 없었다면, 애초에 메밀꽃밭이라는 것이 특별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작가 이효석이 달밤과 메밀꽃밭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이 이 작품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소학교를 평창에서 다닌 이후 계속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어린 시절 어딘가에는 분명 “부드러운 빛을 흐뭇히 흘리고” 있던 달빛과 흐드러진 메밀꽃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남긴 짧은 글을 통해 그의 극히 내밀한 기억을 훔쳐보고 있을 뿐이다. 낯설기 짝이 없는 그 시간과 장소를, 마치 내가 언젠가 경험했던 것 같은 익숙한 기억을 가지고. /송민호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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