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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만 슬프고, 유쾌한 만큼 우울한

등록일 2024-10-15 19:21 게재일 2024-10-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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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은 가장 독특한 글쓰기 방식으로 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작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드레스덴 폭격을 실제로 겪었던 그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제5도살장’은 그의 다른 글만큼이나 쓰디쓴 유머와 위트로 가득하지만, 그 재기발랄함에 감탄하다 보면, 그 뒤로 어느새 인류가 일으켰던 전쟁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류는 어쩌면 전쟁이라는 끔찍한 운명으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할 모양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은 끝날 줄 모르고 장기화하고, 중동에서도 또 새롭게 전쟁 발발의 소식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는 과연 인류라는 역사 속에서 전쟁이라는 기록을 지워낼 수 있을까. 결국 전쟁으로 비롯된 상처와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됨의 숙명이 아닐까 하는 절망적인 인식만 생기게 된다.

인간의 역사는 본래 아무 것도 없었던 시간의 한 축에 시작점을 두고, 그곳으로부터 시간을 한 방향으로 누적시켜가며 어딘가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그 시작의 지점으로부터 무려 2024년이나 지나 있는 것이다. 수천 년이나 되는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차츰 발전해가면서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나, 발전의 관점으로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누적된 시간이라는 개념의 탓도 있으리라.

사실 꼭 시간이 그런 형태를 취해야 할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한 쪽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인식일 뿐으로, 시계의 추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인간의 시간도 세대를 거치며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도 몇천 년의 인류의 역사라고 하면, 왠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어딘가의 방향을 향해 발전해나가는 것에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문득 여전히 일어나는 전쟁 소식에 가슴을 쥐어뜯게 되는 것은 나 역시 인류로서 그러한 책임감을 공유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우리는 지난 수천 년의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전쟁의 상처에 대해 쓰고 그렸던 문학과 미술로 인류를 뒤덮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인류의 역사가 어딘가의 방향으로 흘러간다거나 심지어 ‘진화’해간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인가. 문학예술이 하등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 인류의 ‘퇴화’를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여주는 것 자체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인류가 한 번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것을 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전쟁은 일어나기 마련이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전쟁의 상처에 대해 문학 작품으로 다뤘지만,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Jr.·1922~2007)만큼 개인적인 전쟁의 경험을 글쓰기 속에 투영했던 작가는 또 없을 것이다. 그의 ‘제5도살장’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겪은 전쟁의 트라우마 한 가운데로 이끌어 그 공황에 가까운 기억을 공유하도록 만든다.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 병사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빌리 필그림이 포로로 잡혀 독일 작센 지역의 드레스덴 근방의 도살장에 수용되었다가,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에 휘말렸다가 살아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게 줄거리를 소개하면, 마치 일반적인 소설 같지만, 이 소설은 전쟁의 상처를 겪은 빌리의 파탄난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그가 겪은 시간들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두서 없는 서술로 이어져있다. 전쟁 이후의, 일종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고 해도 좋을 공황은 그를 환각과 실제, 기억과 진술 사이를 오가면서 완결된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만든다. 두서 없는 시간의 서사 구성, 그 사이에서 다만 번뜩이고 있는 위트가 바로 커트 보니것의 전쟁의 트라우마이자, 전쟁에 대해 비판하는 소설의 기술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아름다운 만큼 슬프고, 번뜩이는 위트만큼이나 우울하다. 마치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에 휘말려갈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빌리가 그렇듯, 참담하게 “뭐 그런 거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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