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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사상 가장 독특했던 ‘브라운 신부’

등록일 2022-02-07 20:09 게재일 2022-02-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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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미스터리’란 어쩌면 아무 트릭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의 그럴 듯한 역설에 불과하다.

추리소설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도, 그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도, 범죄에 얽혀 있는 흥미로운 트릭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미스터리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요즘 한국에서도 추리소설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추리소설이란 언제나 사건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서 일어나는 서사를 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 장르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아마도 추리소설만큼 이 반복적 규칙성에 고집스러운 장르란 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바로 이러한 반복적 규칙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대안이 되었던 가장 독특했던 추리소설이라면, 바로 영국 작가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들 수 있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은 1911년에 자신이 이전까지 써왔던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단편들을 처음으로 엮어 ‘브라운 신부의 결백(The Innocence of Father Brown)’이라는 단행본을 냈고, 이후 이 독특한 탐정은 인기를 얻어 36년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5권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가 나왔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으로부터 아서 코난 도일의 탐정 ‘셜록 홈즈’로 이어지는 추리문학의 계보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들이 확립했던 범죄현장의 무질서로부터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 추리라는 일련의 방법을 통해 질서를 추구해가는 현대에는 일반화된 추리기법에도 이미 익숙해 있을 터이다. 독자는 책장을 펼치고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나버린 사건을 만나게 되고, 아직은 동기도 단서도 불명확한 혼란 자체인 사건을 탐정은 단서를 모으고, 이들을 조합하여 추리를 하고,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사건 발생 이전의 시간을 재구성해서 독자에게 들려준다. 이것이 바로 현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도식이다.

이런 추리소설의 전형성에 익숙한 독자들이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를 보게 된다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당혹감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는 낯설기 짝이 없는 무질서와 비도식성, 그리고 비일관성일 것이다. 겉보기에는 전혀 탐정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는 브라운 신부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무질서한 사건 현장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뛰어든다.

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내는 근대의 과학자 타입의 탐정이 아니라, 기꺼이 무질서에 참여하면서 그 사건과 영향을 주고받는 새로운 타입의 탐정에 해당한다.

이에 앞서, 1908년에 쓴 ‘목요일이었던 남자(The Man Who Was Thursday)’에서 체스터턴은 무질서가 갖는 창조성을 논했던 바 있다.

이 브라운신부는 범죄 사건의 현장을 ‘베이커 스트리트 221b’의 실험실로 옮겨오는 근대 과학자 타입의 탐정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널려 있는 무질서 속에 존재하는 질서를 간파해내고 그 속에 참여해서 그 질서를 폭로해내는 타입의 탐정이다. 그러니, 어눌해 보이는 브라운신부의 눈이 반짝이기 전까지 그 사건의 트릭은 트릭조차 아니었던 셈이다.

브라운신부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조약돌을 어디에 숨길까 질문하고, 그것을 듣고 있던 플랑보라는 인물은 ‘해변’이라고 답한다. 잎사귀를 숨기기 좋은 곳이라는 질문에는 ‘숲속’이라고 답한다. 이것은 누구나 인용하기 좋아하는 그 유명한 체스터턴의 역설이다.

하지만 이어 브라운 신부는 잎사귀를 숨길 ‘숲’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고 있다. 우리는 잎사귀를 숨기고자 숲을 만드는 식으로, 자기의 발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규칙 자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백 년 전에 체스터턴은 그렇게 질문했던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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