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길을 벗어나야 비로소 눈앞에 보이는 것들

어렸을 적 동화를 통해 그 속에 들어 있는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경험은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어린 시절 ‘헨젤과 그레텔’을 읽었던 때의 느낌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어두운 숲 속에서 어린 그레텔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던 헨젤이 막막함을 느끼던 부분을 읽을 때면, 그 세계 속 어느 곳인지도 모를 곳의 숲길을 나도 함께 마주 걷는 듯했고, 헤매던 그들이 알록달록한 과자로 된 집을 발견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함께 환호하며, 어딘지 모를 미심쩍은 위험에 대한 예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어린 시절 동화 속에 들어 있는 세계가 나에게 완전한 몰입의 경험을 주었던 것은 그때가 세계에 대한 감수성이 좀 더 풍부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조차 아직 완전히 구분되어 있지 않던 시절, 어린 독자는 동화 속 세계의 어린 아이들이 겪었던 두려움과 놀람, 그리고 기쁨과 공포를 마치 내 것인 양 받아들이며 숨죽이곤 했다.누구나 그렇듯 나이가 들어 이제는 더이상 그러한 상상의 세계의 동기화로부터 벗어난 때, 다시 손에 잡은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의 세계는 사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세계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동화의 내용이 바뀔 리 없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독자가 더 커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세상을 미세하게 분해하여 받아들이는 이른바 마음의 해상력이 좀 더 촘촘해지게 된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마련이고, 동화책에 찍혀 있는 고정된 문자들 사이로 빠져 들어가 그 단단한 언어의 연결을 유연하게 만들고, 반짝거리게 만드는 아이들의 재능은 어른이 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한때 그 재능이 자리 잡고 있던 곳에는 실제 세상에 대한 경험 같이 어디를 봐도 당연한 것들이 채운다.독일의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였던 야코프 그림(1785~1863)과 빌헬름 그림(1786~1859) 형제는 독일 지역에서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동화를 쓰곤 했다. 그들이 쓴 이 ‘헨젤과 그레텔’ 역시 구전되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데, 대개 떠도는 이야기가 그렇듯이 그 속에는 당시 유럽 사회에 떠돌던 공포, 즉 가난으로 인해 유아를 숲에 방치하여 살해하던 비정한 부모에 대한 소문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끔찍한 공포를 담고 있던 그림 형제의 원작은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완화되었다. 즉 시대가 지나며 바뀌는 것이 어른이 된 동화의 독자만이 아니라 동화 그 자체이기도 했다. 이 동화 속에서 헨젤과 그레텔은 두 번 버려진다. 자기들을 버리려 한다는 계획을 알아낸 헨젤은 첫 번째에는 흰색 조약돌을 주워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아버지가 나무를 하러갈 때, 길 위에 하나씩 떨어뜨린다. 아버지는 도망치고, 칠흑같이 어두운 숲길에서 흰색 조약돌은 ‘반짝’ 빛난다. 마치 그 길이 유일하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듯. 이 부분을 읽었던 어린 마음은 그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헨젤의 재치가 마치 내 일인 양 대견하기만 했다. 하지만 반짝거리는 그 길이 단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만 하는 길이라면 그것을 과연 마냥 기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두 번째로 헨젤과 그레텔은 또 숲에 버려지지만 이때는 시간이 없어 먹으려고 싸둔 빵부스러기로 길을 표시해둘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가벼운 빵부스러기는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새들이 다 먹어버린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운명은 한없이 가엾지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보증이 사라지지 않고서야 그들의 눈앞에 과자의 집은 나타날 수 있었을까. 길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고는 새로움도 위험도 없다, 고 어른이 된 마음이 생각한다. /홍익대 교수

2021-07-12

‘보들레르’라는 경이로운 사건

샤를 보들레르 서구 현대시의 역사에 있어서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라는 이름은 하나의 시인을 넘어서는 하나의 현상이자 놀라운 효과였다. 24세 때 살롱을 중심으로 한 미술 현상에 대해 주목하여 비평을 하며 비평가로 출발했던 샤를 보들레르는 서구 낭만주의 예술이 빛을 발하고 있던 무렵인 19세기 중반부터 비평과 번역, 소설, 시 등의 창작을 하다가 36세인 1857년이 되어서야 그간 썼던 시들을 모아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을 출판해 하나의 새로운 예술시대를 열었다.보들레르 이전에, 운율을 중시하여 시인의 입에서 마치 음악과 같이 노래되어 시인의 감정과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켰던 시의 세계는, 파리를 산책하며 보들레르가 하나하나 수집했던 고대와 연결되는 골동품과도 같은 단어들과 그 연결을 통해 반짝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이 보들레르를 자유시의 이념을 최초로 구체화한 시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가락과 음률, 인간 내면의 친근성과 천진함으로 연결되어 있던 과거의 낭만주의적 시를 일신하여, 바로 노래하는 시로부터 읽는 시로 바꿨던 최초의 시도였던 까닭일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 속에는 비록 배치와 반복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계적 음향이나 노래는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도시를 횡행하는 우울한 정서 속에 저 먼 고대나 원시의 신화적 국면과 연결되는 풍부한 볼륨의 단어들이 총총히 박혀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고 있어, 단지 그것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각적 충족감을 주었던 것이다.샤를 보들레르는 그 자신이 미국의 가장 독특한 작가 중 하나인 에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1809~1849)의 예찬자였고, 그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시집 ‘악의 꽃’ 속에 들어 있는 ‘유령’이나 ‘고양이’, ‘흡혈귀’ 등의 총총한 이미지들은 포우의 시나 소설 속에 들어 있던 환상적 세계의 파편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던 당시의 파리 시내를 방황하며, 그는 포우를 비롯해, 서구 사회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신화를 필터처럼 빌려와 결코 단순하지 않은 풍요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발견해낸 파리의 수집품들은 마치 연금술처럼 그의 시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귀중한 무언가로 바뀌었다. 우리가 보들레르를 상징파의 시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시에 초대한 이러한 귀중한 무언가들이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풍요한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보들레르의 사후인 1869년에 출판된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에는 서문 격으로 보들레르가 자신의 친구인 ‘아르센 우세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이 서문은 보통 보들레르가 자유시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최초의 것으로 인용되곤 한다. 그 편지 중 몇몇 부분을 인용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그 야심만만한 시절 우리 가운데 시적 산문의 기적을 꿈꾸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나? 음악적이면서 리듬도 압운도 없고, 영혼의 서정적 움직임과 환상의 기복과 의식의 비약에 적용할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도 충분히 복잡한 그 기적을 말일세.”-박철화역, 동서문화사이 부분은 바로 보들레르가 시적인 산문, 또는 산문시의 기적을 꿈꾸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래로 불리지 않으면서도 리듬을 갖고 있는, 의식의 비약에 버금갈 정도로 독자의 마음에 다가가는 시의 움직임을 그는 ‘상응(correspondances)’이라고 같은 제목의 시에서 지칭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이는 노래에서 벗어나 읽히는 새로운 자유시의 탄생의 장면이었다. 보들레르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시의 탄생을 의미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홍익대 교수

2021-06-21

‘조선’을 찾아 떠난 숭고한 순례의 여정

최남선이 1925년 3월부터 약 50여일에 걸쳐 지리산 근방의 각 지역을 순례하고 집필하여 백운사에서 1926년에 출판한 기행문.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사실 아무 특색도 없이 그저 그곳에 놓여서 그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뿐인 것만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에는 이미 내가 누군가와 그곳에서 만나며 관계를 맺으며 교섭해나갔던 경험들이 그대로 쌓여있게 마련이다. 가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집에는 자연스레 그들이 남겨둔 물건들, 상처들, 사건들이 흔적처럼 남아 켜켜이 쌓이기 마련이다.물론, 그곳에 우리 마음의 어떤 부분이 실제로 쌓이는 것은 아니다. 쌓이는 곳은 사실 우리의 마음이다. 층층이 남은 그날의 감상들, 단단히 묶인 감정들, 분위기나 냄새 등은 모두 우리 마음속에만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단지 벽에 난 생채기는 그날의 마음을 흔적처럼 남기고 있는 것뿐이다. 이사 갈 때쯤이 되어 우리가 그런 흔적들이 가득한 집을 둘러보면서 여기에 우리 가족의 기억이 가득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우리가 어딘가 여행을 떠나 늘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은 여행자에게 호기심을 유발하는 그런 낯선 공간만이 아니라, 그 공간을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는 그네들이 남긴 흔적들이다. 시장에는 몇 번이고 고쳐 묶어둔 자국이 있는 천막을 묶은 끈이 있고, 어린 손자들의 손으로 그려진 작은 꽃이 벽 한 쪽에 귀퉁이 한 쪽이 조금 떨어져 붙어 있기도 하다. 그 공간을 살아가면서 그네들이 남겼던 삶의 기억들이 여행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동질감으로, 한편으로는 이국의 정취로 다가온다. 여행이란 결국 누군가 그 공간을 점유했던 사람들의 삶의 기억들을 기념물 같은 흔적들을 통해 잠시나마 돌아보는 행위라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기행이나 유람 등 어딘가에 가서 그처럼 옛사람들의 자취를 돌아보고, 새롭게 자신이 느낀 정취를 더하는 행위로서 여행기라는 글쓰기는 인간이 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계기와 마찬가지 기원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말과 글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 것인가. 저 먼 고개 너머를 가보고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가, 무엇이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말과 글을 통해 전하는 경험은 바로 그 요체인 것이다.지금까지 옛사람이 남겨둔 수많은 기행문 또는 여행기가 존재하지만, 최남선(1890~1957)이 1926년에 발간한 ‘심춘순례’의 자리는 유독 빛난다. 조선의 ‘국토’를 순례의 대상으로 새롭게 발견했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순례’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대상에 대한 종교적 함의를 감안한다면, 이 시기의 최남선은 바로 조선의 국토에 대한 태도를 마치 종교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투옥되었을 때의 최남선(왼쪽). 최남선은 1925년 3월 하순부터 지리산 근방의 각 지역을 순례하고 주로 백제의 흔적을 중심으로 이어진 각 사찰들 속에 흔적처럼 남겨진 한민족의 기억을 복원하고 찾아내고자 애썼다. 그는 서문에서,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입니다. 문자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억입니다. 조선인의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 있어서 어떠한 풍우라도 마멸시키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조선 국토에 남겨진 민족의 기억이 단지 책 속 문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 남겨진 문화적 기억의 흔적 속에 널리 남아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최남선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그가 남긴 일련의 기행문, ‘백두산근참기’, ‘금강예찬’등으로 이어졌거니와, 그가 발견한 순례의 정신은 현진건의 ‘고도순례경주’, ‘단군성적순례’ 등으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있어 조선의 국토는 바로 순례의 대상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홍익대 교수

2021-05-31

꽃이 피고, 다시 꽃이 지고 : 봄날의 책읽기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1902~1934)은 평북 출신으로 오산학교에서 김억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했고, 인생의 봄인 스무 살 무렵에 꽃다운 시들을 다수 창작했다.문득 눈을 들어보면, 어느새 세상이 꽃 천지였는데, 잠시 마음을 흘러가게 두고 나니, 그새 그 많던 꽃들이 다 사라지고 나무마다 푸르디푸른 잎들이 솟아올라 있다. 바야흐로, 봄날이 지나 여름으로 가고 있다.사람들의 삶이 흘러가는 것이나 그것에 대한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계절의 시간은 그렇게 나름대로 흘러가고 있다. 한창 문학을 공부하던 무렵에는 옛사람의 시구들에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 풍경 각색이 변하고 있는 것이 입에 물려, 그때 사람들이 오죽 심심했으면 계절의 변화나 살피면서 시를 썼을까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웬걸,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계절이 변하면 어김없이 꽃들이 오밀조밀하게 핀 것이나 나무 끝에 싹이 간질간질하게 터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어, 그래, 이것 말고 노래할 만한 것이 달리 또 무엇이 있을 것인가 싶게 된다.요즘은 모두 바쁘게 자기의 스마트폰을 보면서 자기의 삶의 리듬을 연결하기에 바쁜 세상이지만, 가끔 걸음을 멈추고 공원에 머물러 그곳을 채우고 있는 언젠가는 꽃이었던 나무들을 보고 있을 기회가 있다면, 누구든 분명 그 꽃잎, 나뭇잎 하나하나가 어쩜 그렇게 어엿하게 자기 모습을 하고 있는가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봄노래를 하나쯤 흥얼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가도 이것은 바뀌지 않는다.이렇게, 콘크리트로 덮여 있는 척박한 바닥 위를 기어코 올라와, 매년 나무 가득 꽃을 피운 뒤, 이제는 온통 푸르게 변한 나무를 보고 있으면, 이렇게 나무를 보면서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을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어김없이 변화하는 계절이라는 감각, 매해 그맘때쯤 변화하면서 순환하고, 또 해가 지나갈수록 천천히 나아가는 시간에 대해 노래하고 싶지 않았을까? 또, 태양이 전하는 온기가 서서히 길어지며 그에 반응해가며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그 질긴 생명의 힘을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삶의 태도에 비유하기도 했으리라. 벌써 비슷한 시 몇 구절이나 노래 가사 몇 구절이 머리를 맴돌고 있으니.하지만, 봄날은 노래 하나쯤 흥얼거린다면 모를까, 책을 읽기에 그리 좋은 날들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기나긴 서사로 된 소설을 하나 읽을라치면 몰려오는 향기들이 마음을 간질여서 금세 어딘가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봄날 퇴근한 이후의 밤 시간이 유달리 짧았던 것은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가며 물리적인 시간이 짧아져서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너무 많은 향기들에 이끌리고 있다는 징후일지도 모른다.당연히 이런 날 책을 읽는다면 얇은 시집이나 가벼운 에세이 정도가 좋을 것이다. 마음이 열리고 감정이 솟아올라 공상하기 좋은 봄날에는 문자가 가득해서 빼곡하게 타인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책으로 머리를 채우기보다는 몇 줄 안 되는 문자들을 바탕으로 한없는 공상을 할 수 있는 글이 어울린다. 이미 져버린 꽃이나 아직 남아 있는 꽃에 대해 노래했던 시들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시에 대한 교육이 오히려 감상을 방해하긴 하지만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같은 시집은 오히려 차분히 시집 전체를 읽으면 새로운 발견의 재미가 있다. 가락을 붙여 흥얼거리며, 진달래꽃 사이에 켜켜이 들어 있는 감정의 진폭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으리라. 혹은, 요즘 우리에게 꽃을 노래한 대표적인 시인인 나태주 시인의 시들을 찬찬히 읽으며 꽃과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꽃이 피고, 다시 꽃이 지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멈춰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툭, 하고 꽃이 피는 소리도 잎이 자라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봄날 밤이란 결코 길지 않은 것이다. /홍익대 교수

2021-04-19

광인의 모습을 한 예술의 환영과 그 들림

현대의 가장 뛰어난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에 대한 평전이 있다. 이 평전에서 훗날의 위대한 작가 발자크는 불과 스무 살을 갓 넘었을 무렵 이미 가벼운 희극이나 대중적인 취미의 작품들을 쓰면서 가명으로 엄청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알 수 없는 힘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시대를 타고 흐르는 예술의 기운 한 가운데로 나아가 기존 자신이 가명으로 쌓아올린 과거와 절멸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인간 희극”이라는 대 기획 아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끝도 없는 탐구에 나서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고리오 영감’ 등 사회를 해부하는 ‘인간 희극’ 시리즈를 90편이나 썼던 것이다. 시대를 좌우하는 예술의 이념을 찾아보기 힘든 지금 시대라면 결코 불가능할 작업이다. 예술의 환영에 들려 미치광이처럼 골방에 파묻혀 글만 쓰던 낭만적인 문예의 시대는 저 멀리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어쩌면, 문학이 예술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광인의 모습을 한 예술의 환영에 홀린 인간들이 글을 쓴다고 밥도 돈도 나오지 않아도 무언가에 이끌려 써갔던 시대를 마지막으로 종언을 고할지도 모르겠다.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는 예술의 환영에 들려 밑도 끝도 없는 창작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한국 작가 중에서도 이처럼 광인의 모습을 한 예술성에 도취되었던 작가가 적지 않지만, 김동인(1900~1951)만큼 예술성의 이념에 깊이 경도됐던 작가는 또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비교적 척박한 한국의 근대문학계에서 김동인만큼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는 또 드물기 때문에, 대학의 강의 시간에도 간혹 다루고, 만나는 사람마다 한 번은 읽어보기를 권하는 작가가 바로 김동인이다.어린 시절 당시의 여느 작가들이나 다름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그는 유학생이라면 선택하기 마련인 법학이나 상학을 택하지 않고, 미술을 택해 가와바타 화숙에 들어갔다. 아무리 평양 부호의 자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당시로서 미술을 전공하고자 택했던 것은 꽤 대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 당시 화가들 대부분 선택했던 도쿄미술학교가 아니라 화가의 화숙에 들어간 것 역시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후 계속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1919년 그는 친구인 주요한과 함께 동인지 ‘창조’를 기획해 잡지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조선으로 돌아왔다.김동인.이후 약 10년 간 소설을 쓰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 작가로 활동했던 김동인은 1929년에 ‘광염소나타’를 쓴다. 이 소설에서 그는 극단적인 예술성에 사로잡혀 방화와 살인 등 윤리적인 범죄로까지 나아간 미치광이 피아니스트 백성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예술인가, 윤리인가, 선명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선택지는 한국의 척박한 문학계에서 문학을 통해 예술적 이념을 추구하고자 했던 김동인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예술성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김동인은 한 관찰자의 눈을 통해 백성수의 행위를 담담히, 하지만 안타깝게 지켜본다. 예술성의 환영에 들린 인간들은 대개 같은 표정을 하고 있게 마련이다.몇 년 째 대학 강의에서 김동인의 이 소설을 학생들과 함께 읽고 있다. 언제나 학생들은 이 작품에서 예술에 홀린 인간의 눈과 사회의 도덕 사이의 문제를 짚어낸다. 물론 해마다 예술성에 경도된 예술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학생들의 수는 줄고 있다. 작품은 변하지 않았을 테니, 사회가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동인도 1930년을 너머 전쟁에 휩쓸리면서 친일의 현실을 선택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예술에 홀렸던 그 많은 광인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홍익대 교수

2021-04-05

인간의 언어는 또 다른 감옥인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이 김춘수의 시 ‘꽃’은 ‘이름’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인간이 외부 세계의 대상을 어떻게 의미로 바꾸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철학적인 시다. 내가 언어를 통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이미 ‘몸짓’으로 존재했던 그는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 나에게로 와서 의미가 된다.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살아가면서 언어를 매개로 사고를 형성하고, 그 언어를 매개로 외부 세계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가진 인간의 유일한 특권일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 동안 인간에게 언어와 문학이 중요했던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눈앞에 단지 실체를 가진 대상들의 모음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언어를 통해 그 대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인지하게 될 때야 비로소 자기 세계를 대하는 주체이자 주인이 될 수 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가 자기 눈에 들어오는 대상들을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며,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새롭게 이름 붙이기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어엿한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미 모든 대상들에 붙여진 이름만을 알게 되는 것이 그러한 과정이 아니다. 인간은 언어를 배우면서 또 언어를 통해 눈앞의 대상을 그 언어 속에 가둔다.다니엘 디포(1660~1731)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는 유럽의 세계 저편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 알아내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돌아와 여행기를 썼던, 서구인의 세계 인식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영국인인 크루소는 모험을 떠났다가 바다에서 난파되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부근 무인도에서 홀로 살다가 극적으로 구출해 돌아온다. 세계의 전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던 시대, 서구 유럽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대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는 바로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을 추동한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든 알아내고, 결국 그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는 그 공포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식인종에게 먹힐 뻔한 원주민을 구해주고, 그를 만난 날이 금요일이었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다니엘 디포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1719년 ‘로빈슨 크루소’를 써서 명성을 얻었다.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대상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그저 단순하고도 당연하며, 절박한 인식의 논리는 그 이름을 붙여준 대상을 언어의 감옥에 가둔다. 로빈슨 크루소가 붙인 ‘프라이데이’는 과연 그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것이었을까. 아니,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그를 구속하는 행위는 아닐 것인가.인간이 사회에서 한 명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언어를 통해 대상의 의미를 인식하고, 새롭게 드러나는 대상의 의미를 규정해나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과정일 터이지만, 모두가 서로를 규정해나가기 시작한다면,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의 언어의 감옥에 갇히게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서로의 언어가 쌓이고 소통하는 공론장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언어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희소한 특권이던 시대에서 이제 모두가 언어를 능숙하게 다루고, 자기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 이러한 대상을 규정하는 언어의 윤리는 더욱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디포우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분명 흥미로운 모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언어를 가진 인간 주체의 자기 확인의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 /홍익대 교수

2021-03-22

인간은 시간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독일 작가인 미하엘 엔데(1929~1995)는 1973년 ‘모모’를 쓰면서 일약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동화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동화를 통해 화폐와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 사회를 풍자했다.요즘엔 스마트폰만 켜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시계 앱으로 전 세계가 시간대에 따라 똑같은 ‘시간’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러니,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패션 아이템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시간은 더 이상, 시계의 태엽과 톱니바퀴가 째깍 거리는 소리의 감각으로 실감되는 것이 아니라 12과 12, 합쳐서 24라는 큰 숫자와 60의 작은 숫자,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는 동기화된 시간 감각에 대한 확신으로 체감된다. 각자가 갖고 있는 조금은 다른 시간의 리듬을 상징했던 시계의 재깍거림,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생기는 서로의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일종의 여유는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되었다.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시간에는 본래 눈금조차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하루만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하는 자연의 변화도 존재하고, 하루, 또 하루가 쌓여 생기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1년, 2년의 시간적 흐름도 존재하며, 인간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나이’라는 형식으로 한 해 씩의 시간이 지나간다는 식으로 시간을 감각한다는 형식은 물론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존재해왔다.인간은 이처럼 자연이 부여하는 시간 감각 외에 또 다른 제도적인 시간 감각을 만들어낸다. 하루의 시간에 눈금이 생겨서 오히려 그 눈금의 형식이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사건에 선행하고, 365일이 1년이 되어, 달력이나 일력의 형식이 오히려 계절의 변화에 선행한다. 게다가 도무지 시작을 알 수 없었던 인류의 최초에 기원을 잡아, 그 기원으로부터 하나하나 쌓아나가 인류 문화의 시작에서부터 2021년에 이르는 하나의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이를 통해, 인류는 한 시간이 가지고 있는 노동력이라는 관점으로 노동의 시간을 화폐 가치로 환산할 수도 있게 되었고,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한 방향으로 진보해 나가는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가질 수 있게 된다.작가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는 이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근대적인 시간성에 대한 우화이다. 어느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모모에게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듯, 나이를 묻지만 모모는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모모에게 있어 시간은 그저 자신이 가진 넘쳐나는 재산일 뿐, 자기를 증명하는 정체성의 형식이 아니다.그러다가 모모가 정착한 이 마을에 갑자기 회색 신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시계와 달력으로 시간을 재고 동기화하는 것을 넘어서, 시간에 화폐적 가치를 부여하여 시간의 가치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이런 ‘시간도둑’들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보낸 시간은, 사실은 노동을 해서 벌 수 있었던 얼마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돈’이 되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시간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고, 시간과 맞바꾸어 교환된 ‘돈’만이 남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휴식이나 놀이 같은 시간의 허비가 실은 벌 수 있었던 ‘돈’에 대한 기회비용이었다는 죄의식이 남게 된다. 그 죄의식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거나, 누군가를 따뜻하게 바라보거나, 길가에 피어 있는 꽃냄새를 맡거나 하면서도 그것이 생산적인 시간인가 아니면 낭비하는 시간인가 생각해버리게 되는 것이다.시간을 자신이 가진 재산처럼 써서 감옥에 갇힌 모모가 그곳을 탈출하는 과정은 물론 동화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 시간은 규칙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무한한 재산이다.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한 시간은 ‘시급’이라는 화폐의 가치가 모두인 가치가 아니라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모모’는 바로 그런 우리가 잃어버렸던 시간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1-03-01

조감하는 시선과 책을 읽는 시간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나 법학학사를 받고 보험회사에 취업했으나 평생 문학 창작을 소망하여 혼자 창작을 해나갔고,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4년 사망하기 전까지 발표 없이 습작 형태로만 ‘변신’, ‘유형지에서’, ‘시골의사’, ‘심판’, ‘성’등의 작품을 남겼다.인간의 눈이란 본디 사람의 얼굴 가운데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를 향해 있는 그곳에 대한 제한적 시점밖에는 갖지 못한다. 이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사실은 우리에게 종종 망각되곤 한다. 다름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주는, 그리고 우리의 상상이 주는 마음의 눈에 떠오르는 인상을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혼동되기 쉬운 때문이다.인간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제기할 때 가장 중요한 전제였다. 그것은 우리가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점유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걸어가는 자신을 볼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언가를 행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행하고 있는 나의 장면을 바라볼 수 없다. 인간의 눈이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시점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한계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 바로 세잔이나 피카소 같은 입체파 화가의 시도였다. 어떤 대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는 착각을 평면 회화에 부여하는 ‘원근법’의 전통에서 벗어나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시점을 회화에 부여하는 예술적 형식 말이다.우리가 하늘 저 위에서 새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한 ‘조감도’라는 형식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머리에 붙어 있는 답답한 눈이 주는 시각적 답답함을 해방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에 들어가 있을 때, 우리는 생활의 관점에서 우리 눈앞에 주어진 것을 바라보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은 그래서 조감도나 지도 등을 통해 자신이 지금 있는 공간의 형태는 어떠한가 하는 것을 가늠하고, 다시 삶의 공간으로 들어간다.작가 이상(李箱·1910~1937)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3인의 아해가 도로 위로 질주하오.”라는 그야말로 기묘한 시작을 기억하실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연작을 신문에 연재하기 몇 년 전에 일본어로 ‘조감도(鳥瞰圖)’라는 연작을 낸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아마 생소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이상은 건축을 전공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의 삶의 공간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라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이 빛의 속도를 넘어 두 개의 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있었다. ‘13인의 아해(兒孩)가’로 시작하는 이 ‘오감도 제1호’는 사실 시간이 주는 답답한 12진법에서 해방되는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는 결국 인간의 눈이 주는 시각의 답답함과 그리고 조감하는 시선을 어떻게 ‘동시적으로’ 중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다.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될 때, 지도를 꺼내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내가 지나가고 있는 길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지도 속에 들어 있는 실제와 연결된 기호들이나 상징들을 통해 조감하는 시선을 확보한다. 요즘엔 스마트폰에 있는 지도가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주니 상당히 편리하다.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런 것은 아닐까. 살아가다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갑자기 모르게 되어버렸을 때, 잠시 멈추고 누군가 하나의 시선을 통해 정리해둔 것을 보고서 삶을 조감하는 시선을 참조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인한 뒤,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이 어느 시간에 있는지 모른 채 도로로 질주해가는 무서워하는 아해들처럼, 문득 두려움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조감의 시선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1-02-15

조감하는 시선과 책을 읽는 시간

인간의 눈이란 본디 사람의 얼굴 가운데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를 향해 있는 그곳에 대한 제한적 시점밖에는 갖지 못한다. 이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사실은 우리에게 종종 망각되곤 한다. 다름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주는, 그리고 우리의 상상이 주는 마음의 눈에 떠오르는 인상을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혼동되기 쉬운 때문이다.인간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제기할 때 가장 중요한 전제였다. 그것은 우리가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점유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걸어가는 자신을 볼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언가를 행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행하고 있는 나의 장면을 바라볼 수 없다. 인간의 눈이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시점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한계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 바로 세잔이나 피카소 같은 입체파 화가의 시도였다. 어떤 대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는 착각을 평면 회화에 부여하는 ‘원근법’의 전통에서 벗어나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시점을 회화에 부여하는 예술적 형식 말이다.우리가 하늘 저 위에서 새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한 ‘조감도’라는 형식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머리에 붙어 있는 답답한 눈이 주는 시각적 답답함을 해방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에 들어가 있을 때, 우리는 생활의 관점에서 우리 눈앞에 주어진 것을 바라보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은 그래서 조감도나 지도 등을 통해 자신이 지금 있는 공간의 형태는 어떠한가 하는 것을 가늠하고, 다시 삶의 공간으로 들어간다.작가 이상(李箱·1910~1937)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3인의 아해가 도로 위로 질주하오.”라는 그야말로 기묘한 시작을 기억하실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연작을 신문에 연재하기 몇 년 전에 일본어로 ‘조감도(鳥瞰圖)’라는 연작을 낸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아마 생소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이상은 건축을 전공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의 삶의 공간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라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이 빛의 속도를 넘어 두 개의 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있었다. ‘13인의 아해(兒孩)가’로 시작하는 이 ‘오감도 제1호’는 사실 시간이 주는 답답한 12진법에서 해방되는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는 결국 인간의 눈이 주는 시각의 답답함과 그리고 조감하는 시선을 어떻게 ‘동시적으로’ 중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다.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될 때, 지도를 꺼내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내가 지나가고 있는 길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지도 속에 들어 있는 실제와 연결된 기호들이나 상징들을 통해 조감하는 시선을 확보한다. 요즘엔 스마트폰에 있는 지도가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주니 상당히 편리하다.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런 것은 아닐까. 살아가다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갑자기 모르게 되어버렸을 때, 잠시 멈추고 누군가 하나의 시선을 통해 정리해둔 것을 보고서 삶을 조감하는 시선을 참조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인한 뒤,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이 어느 시간에 있는지 모른 채 도로로 질주해가는 무서워하는 아해들처럼, 문득 두려움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조감의 시선이다. /홍익대 교수

2021-01-25

도서관은 움직인다

도서관은 단지 책을 모아둔 커다랗고 컴컴한 건물을 가리키는 단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착각중에 하나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도서관에 가보면, 그렇게 착각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도서관이 폐쇄되는 상황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에 앞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지식의 정리보다는 단지 문화와 관련된 행정기관으로 간주되고 말거나, 자기 공부를 할 공간을 찾는 이들의 공공 공간 정도로만 생각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분명 책문화의 급격한 몰락으로 인해, 도서관의 의미 역시 점차 퇴색해가고 있는 것이다.물론, 공간의 의미는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채우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영위하는 지식은 책을 벗어나 디지털 미디어로, 네트워크로 점차 변화해 나가고 있는데, 도서관만은 여전히 책을 가득 안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아쉬움은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류의 문화는 변화해가는 중이다.도서관이 갖고 있는 일차적인 힘은 정리와 분류에서 나온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밤의 도서관’에서 도서관에서 ‘정리’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개인적이고 느슨한 분류로부터 학문적 분류가 포함된 주제명 표목 등으로 발전하여 결국 멜빌 듀이에 의해 완성된 현재 대다수의 도서관에서 채택하고 있는 분류법으로 정착되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도서관은 인간이 쌓아올린 학문적 결정체인 책을 어떻게 분류하고 정리할 것인가 하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실체였다. 인간이 새로운 학문을 추구해나가면, 당연히 그것에 대한 분류법 역시 다르게 바뀌어 나갈 것이다. 누구보다 책을 사랑하여 ‘밤의 도서관’을 만들었던 망구엘에게 있어서도 도서관이란 그저 어떤 건물 속에 머물러 있는 실체가 아니라 디지털이라는 무한한 세계로 펼쳐질 수 있는 인간의 지식의 저장과 정리, 그 분류방식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도서관을 조금은 달리 사유해야할 이유를 부여한다.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쓴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어쩌면 이러한 도서관과 학문의 사유의 정점에 놓여 있다. 그에게 있어 ‘우주’는 무한한 갯수의 육각형 진열실로, 또 그 진열실 속에는 스무개의 책장들이 들어서 있는 무한의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한 권의 책, 아니 책 목록에 대한 목록을 찾아 방황을 하며 여행을 한다. 신의 암호를 풀어냈다는 사람의 뒤를 따라 가보기도 하고, 책들의 놓여 있는 곳의 정보를 알기 위한 책들이 놓여 있는 곳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기도 한다.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이 도서관의 비유는 인간이 태어나서 어떤 의미를 추구하면서 방황하는 삶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그 의미는 인간이 평생 찾아야할 지식이나 학문과 관련되어 있다. 이 계시와도 같은 짧은 소설의 마지막에 보르헤스는 이 도서관이 한계가 없지만 주기적으로 움직인다고 쓴다. 한 세기도 살기 어려운 인간의 아득한 역사는 기억과 망각 사이, 질서와 무질서 사이를 주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다시 도서관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도서관은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할까. 책들을 가득 저장하고, 진열하고, 정리하여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간. 적절한 정의이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우리는 우리의 ‘도서관’을 되찾을 수 없다. 망구엘은 다시 독서가의 힘은 정보를 수집하고 목록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변형시키는 재능에 있다고 말한다.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고 도서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지식들을 변형하여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에서 도서관의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도서관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1-01-04

1930년대 한국에 덮쳐온 ‘맬서스’라는 공포

과학은 인간이 저 미지의 바깥 세계에 대해 갖기 마련인 호기심을 시각화된 도구를 통해 풀어내어 우리 눈 앞에 명료하게 제시하는 학문이다. 지금 우리 인류의 진보가 과학의 발전으로 갈음되기 마련인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이 얼마든지 발전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해 미지의 영역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이 세계를 해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열린 구멍이 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 앨리스가 그 구멍을 통해 이상한 나라로 들어갔듯, 인간은 우리 세계를 확정하는 과학적 지식들의 틈새를 통해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는 또 다른 상상의 세계로 돌입한다.시대를 풍미했던 쥘 베른(1828~1905)의 과학소설(science fiction), ‘지구 속 여행(1864)’이나 ‘해저 2만리(1870)’, ‘80일 간의 세계일주(1873)’ 등 우주여행이나 해저의 잠수함 등, 당시 세계에서 확립된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 지식을 활용하여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바람을 다룬 것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상상과 욕망은 과학 기술이 얼마간 발전했다고 해서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마리로 단단하게 엮인 지식의 체계 안쪽으로 더욱 더 깊이 파고 든다. 인간의 영혼의 실체 내지는 4차원 같은 우주의 구조, 시간 여행 등에 대한 상상은 인간에게 호기심과 공포를 자극하면서 과학적 세계와는 또 다른 자리에 이야기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과학적 지식이 축적될수록 오히려 인간의 상상은 더욱 더 촉발되는 것일지도 모른다.1930년대 무렵, 한국, 아니 전 세계를 덮쳤던 과학적 지식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공포는 바로 맬서스(1766~1834)가 이미 한 세기도 전에 남긴 ‘인구론’에서 비롯되었다. 인구의 자연 증가가 기하급수적인 데 비해, 식량의 생산은 산술급수적이므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빈곤해질 수 없다는 부정적인 미래 예측이었던 것이다. 이 맬서스의 인구론은 1929년 대공황을 겪으며 인류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가 팽배하던 시대에 다시 등장하여 당시 사회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과학적인 논의는 이처럼 인간의 미지의 시대에 대한 비관적 견해와 결합될 때, 인간에게 치명적인 공포로 작동한다.번역이나 번안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가장 최초의 과학소설로 간주되는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1929)’는 맬서스가 불러일으킨 공포에서 시작한다.‘K박사’는 맬서스의 신봉자로, 인류의 비관적인 미래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대변을 처리하여 재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인간의 대변을 다시 식량으로 활용한다는 것에 대해 인간이 갖는 본질적 거부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박사는 이른바 매드사이언티스트, 미친과학자의 전형이다. 과학자와 조수들은 세부적인 사실은 숨기고 여러 명사를 초청하여 시식회를 여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구토를 하며 시식회는 난장판이 된다. 인간의 이러한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던 박사는 지방으로 피신했다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먹지 않는 ‘개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제야 구토를 하며 인간들의 반응을 이해한다.김동인의 이 흥미로운 소설 속에는 당시 맬서스가 초래했던 인류의 멸망에 대한 공포가 투영되어 있다. 작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박사라는 독특한 존재를 제시하며 이른바 무한순환이 가능한 생태 시스템을 고안하고 그것이 왜 불가능한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실체는 당연히 인간이 갖고 있는 생래적 거부감 때문이다. 소설을 쓰며 책상 맡에서 인류 사회에 대한 비관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를 오가면서 상상했을 작가 김동인을 생각해보면 꽤 재미있다.상상의 이야기는 실제의 일이라면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홍익대 교수

2020-12-14

고양이의 눈에 비친 기묘한 세상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그다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당연스레 알고 있을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1905년 1월 하이쿠 잡지인 ‘호토토기스’에 그저 장난처럼 실은 이 소설로 소세키는 일약 일본의 국민작가가 될 수 있었다. 도쿄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곳저곳의 중, 고등학교에서 교사나 대학의 강사를 하고 있던 소세키는 대학 친구인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1867~1902)를 따라 하이쿠를 짓거나 하면서 문학 창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별로 대단한 시인은 못됐던 소세키는 시키가 만든 하이쿠 잡지에 예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게재했고, 그로부터 메이지 말년에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됐다. 고양이의 눈으로 비친 성격이 고약한 서생에 불과한 소세키 자신과 그가 바라보고 있는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풍자가 당시의 독자들에게 흥미를 줬을 것이 틀림 없다. 여전히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존재이다.사실, 고양이의 눈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본다고 하는 시선이나 상상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차피 고양이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작가가 제멋대로 보고 싶은 대로 떠올린 것뿐이다. 고양이 같은 동물이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인간의 사고를 동물에게 투영하는 인간주의의 기운이 이 소설의 한켠을 붙들고 있다. 하지만, 저만치서 나를 응시하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자기 논리를 갖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속에 인간이나 할 법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의 눈이 주는 응시의 힘이다. 이 소설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그에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투영하는 사고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고양이가 바라보고 있는 인간 세계가 바로 작가인 소세키 자신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여기에서 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선생 노릇을 고달파하면서 친구들이 올 때마다 불평을 늘어놓고 있거나 서재에서 낮잠을 자면서 펼쳐 놓은 책에 침을 흘리거나 엄청난 양의 대식을 하면서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있는 소세키의 민낯이 고양이의 눈을 통해 가장 투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 이후, ‘마쓰야마’에 내려가 교사를 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 ‘도련님’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맹목적 허위의식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보여줬던 소세키는 여기에서도 다름 아니라 고양이의 눈을 통해 자기 모멸에 가까운 자신의 모습을 재미있게 담아내고 있다.손에 쥐고 있던 동전이 땅에 떨어지면, 그 순간 왠지 그 동전이 내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기존에 만들어진 인간 관계들로부터 벗어나 삶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좀 더 기묘해지고, 좀 더 재미있어진다. 우리가 아직 이름도 없는 이 고양이의 눈을 따라 성격 고약한 주인과 그 주변의 인간 세계를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무의식적으로 자동화된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좀 더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목매고 있는 모든 의미들이나 가치들은 고양이의 눈을 통해서 바라본다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앞서 마사오카 시키 문하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1874~1959)는 소세키를 기억하는 글에서 소설가로 유명해진 이후의 소세키가 아니라 함께 시를 짓거나 하면서 좌충우돌했을 때의 소세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른바 소세키적인 세계는 여기에서 출발해서 더 먼 어딘가로 나아갔지만, 그 세계의 본령은 늘 이 지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홍익대 교수

2020-11-23

책의 묶인 끈을 풀며

집에, 연구실에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서 한숨이 나오는 하루하루다. 책의 자리가 점점 넓어져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것은 책을 좋아하여 그것을 매개로 사유하고, 소통했던 모든 이들이 겪었을 고충이니, 특별히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책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줄여 나의 자리를 넓힐 궁리를 해본다. 별 뾰족한 수는 없다. 책을 주변에 나눠주면 좋겠지만, 그 책을 받고 난감해할 사람의 표정을 상상하면, 그것도 민폐가 아닌가. 요즘에는 책이 차지하는 공간을 줄이려 책을 묶어둔 제본 부분을 자르고, 스캔을 해두는 것도 많이들 하고 있다지만, 그것만큼은 왠지 저어된다. 사실, 많은 자료를 인터넷으로 보고 있는 셈이니, 그리 거리낄 이유도 없지만, 책을 찢는 것은 무언가 내 속에 담겨 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각을 건드린다. 디지털과 네트워크가 기본이 되는 시대, 그것은 내게 남은 한 줌의 ‘예술’에 대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생각하면, 본래 종이의 한 쪽 끝을 묶었던 것을 푸는 것에 불과하니, 그리 신경을 쓰는 것은 과민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책을 찢는 일은 단지 그 묶었던 끈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책이 담고 있던 내 손끝에 닿아 명징했던 총제적인 예술의 감각을 훼손하는 일인 것만 같다.지금 시대는 분명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지 않은 예술을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지금도 네트워크를 떠돌고 있는 유튜브의 영상들이 그러하고, 그 주변에 모여 분명 ‘예술적인 감흥’을 얻고 있을 사람들의 존재가 그러하다. 고작 ‘사진’에 의해 복제된 예술품의 가치 유무를 논하며, ‘아우라’라는 현실적인 낭만성의 기호로 그를 지칭하고자 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고민은 이 시대에 닿으면, 사실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그림 속에 찍힌 점과 점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점들까지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어디로든 전송될 수 있다.분명 벤야민의 시대에는 예술이 갖고 있는 수많은 가치들을, 그것에 새롭게 붙은 화폐 가치가 밀어내고 소외시켰던 것이 예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고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는 정치나 시장이 예술을 잠식한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작품과 그것을 ‘재현’하는 길고 긴 디지털의 코드더미들이 실제로 같은 것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것이 된다. 이제는 본래적인 것과 찰나적인 것을, 그 선후를 구분할 수 없게 된 시대이기 때문이다.이런 시대에 ‘문학’이 질식할 수밖에 없는 전망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애초에 문장에 붙어 있는 문장 이상의 의미들과 그것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파문이 갖는 신비가 바로 ‘문학’이 본령이 아니었는가. 어떤 문장을 읽고 그것을 더 확실한 무엇으로 치환해버리는 시대에야 ‘문학’의 자리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아니,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가능성을 ‘책’이라는 매체에 가두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문장 한 줄은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어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다가 누군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 누군가의 길고도 깊은 사유의 원형이 담겨 전달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나 향유의 양상이 찰나적이 되고만 것은 여러 번 생각해도 아쉬운 일이지만, 인간이 언어를 쓰고, 그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무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만큼은 시대가 지나도 변화하지 않을 것 아닌가.책의 묶인 끈을 풀어 헤쳐 둘지 고민하다 결국 풀어내지 못하고 어딘가에 쌓아둔다. 아직 나는 책의 시대에 남아 있으므로, 그것을 헤쳐 새로운 ‘문학’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에게 맡겨 둔다. 책의 시대는 어쩌면 이제는 골동의 영역에 남겨질지도 모르겠지만, 시대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고, 인간이 영위하는 문학만큼은 날로 새로운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홍익대 교수

2020-11-02

책이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당신은 지금 이탈로 칼비노의 새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읽을 참이다.”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책을 읽고 있다 보면, 불현듯 책 속에 있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작가는 언제나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서 작가의 말건넴이란 이런 소설가의 창작이나 독서의 몰입에 대한 비유가 아니다. 칼비노는 책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실제로 말을 걸어온다.이탈리아의 환상문학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는 소설의 목소리나 서술의 형식에 있어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소설 작품들 중 가장 독특하다고 해도 좋을 작품 중 하나이다. 서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많은 이론가들 역시 특히 독자에게 전하는 작가의 목소리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을 특별한 사례로 손꼽고 있기도 하다.이 소설은 철도역에서 시작한다. 여느 작가가 그렇듯 칼비노도 어느 철도역에나 있을 법한 풍경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기관차에서 나오는 증기 구름, 그리고 냄새, 낡은 기차의 뿌연 유리창과 멀어져가는 기적 소리들이 이 소설의 초반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당연히 그 배경 속으로 역시 여느 소설이 그러하듯이 아마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 카페로 들어온다. 역 안의 풍경과 시골 역 한 켠에 있는 카페에 지금 막 들어선 남자를 묘사하는 시선은 작가의 그것이다. 그러다가 소설 속 목소리는 남자의 것으로 바뀐다. “나는 카페와 전화 부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남자다” 그러면서 작가는 ‘당신’이라고 불리우는 독자를 소설 속에 초대한다. “그 남자는 ‘나’라고 불리며 당신은 이 역이 ‘역’이라고 불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듯 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이처럼 이 소설에는 ‘작가’와 ‘나’와 ‘당신’이 공존한다. ‘작가’는 한편으로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가 하고 있는 행동들 속에 담긴 심리를 이해하면서 그것들을 소설 속에 기록해둔다. 또 독자인 ‘당신’이 갖고 있는 마음속 상태를 예민하게 짐작하면서 작가의 마음속, 그리고 독자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소설’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다룬다. ‘메타픽션’이라는 형식으로 작가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목소리가 소설이 되어가는 양상을 다뤘던 경우는 적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 소설은 독자의 자리를 소설의 내부에 만들어 두고 그 독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소설이라는 현상에 참여하도록 한다.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당신은 이 책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30페이지 넘게 읽고 있다가, 제본의 실수로 같은 페이지가 중복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당신이 서점에 항의를 하러 가보니 서점 주인은 제본소의 실수로 책의 속지가 타지오 바자크발이라는 폴란드 작가의 책과 뒤섞여 버렸다고 한다. 당신은 서점에서 만난 다른 여성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우연히 발견한 이 바자크발이라는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하고, 그 사이에 책의 중단과 그 책에서 연결되어 파생된 다양한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책의 또 다른 독자인 루드밀라와 책이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들을 경험한다. 독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바자크발이나 칼비노의 완결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이든 읽어나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삶이라는 것이다.소설의 마지막에 당신은 루드밀라와 결혼하여, 다시 책을 읽는다. 루드밀라가 불을 끄고 그만 자라고 말하자, 당신은 “조금만 더 보고.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인데 거의 다 읽었어” 라고 말하며, 소설은 끝난다.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인가. 아니면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당신의 삶 자체인가. 이 소설은 이렇게 질문한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인가? 아니면 당신의 삶 자체인가?/홍익대 교수

2020-10-12

카페예찬, 혹은 책 읽을 공간을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위로

작가 이상이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그린 삽화, 두 사람은 카페에서 만나 당시의 카페문화를 예술창작의 대상으로 삼았다. 위(10회), 아래(13회).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 모두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간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모두에게 때때로 전하는 심심한 위로마저 위로가 되지 않는 시기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한 사회 속 고립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작은 징후들로부터 찾아오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이라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 같은 것이 그렇다.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카페’를 잃고 힘겹게 방황하고 있다는 말들이 들려온다. 의식하지 않지만,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공기의 움직임이나 그것을 호흡하는 과정처럼, 무언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우리가 삶에서 늘 만나게 되는 아이러니일 것이다.분명, 지금 한국 사회에서 카페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사회 활동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공간으로서, 또 누군가에게는 집밖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는 좋은 작업공간으로서,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온전히 ‘나’로 돌아와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 어느 샌가 카페가 없는 한국 사회를 상상하기 어려워져 버린 것만 같다.카페 혹은 커피하우스가 우리 삶에 중요한 의미가 된 것은 단지 그곳이 개인의 공간이거나 공공 공간, 어느 쪽이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공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공 공간이라면 우리에게는 도서관도 있고, 공원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없다. 온전한 개인의 공간이라면, 나의 방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나’로서 있을 수 있지만, 이내 심심해지고 만다. 타인의 눈이 존재하면서, 또 타인의 눈이 신경 쓰이지 않는 공간. 유달리 타인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카페는 공공공간과 개인공간의 사이에 놓여 있는 ‘섬’과 같은 공간으로 기능해왔다.사실 지금까지 많은 작가들이 카페에서 자신의 창작을 완성했고, 카페에서의 시간을 예찬해왔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카페가 갖고 있는 의미를 가장 극적으로 예찬했던 작가는 바로 이상(1910~1937)이었다. 스스로 ‘제비’ 같은 다방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조각가 이순석이 경영하고 있던 종로의 카페 ‘낙랑팔라(樂浪Parlor)’를 드나들며 예술적 현장을 경험했던 예술지망생이기도 했다. 그는 카페에서 근대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것이다.1936년에 쓴 ‘추등잡필’이라는 신문 칼럼에서 이상은 카페라는 공간 속에서 근대적인 예의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강철과 콘크리트에 압박된 근대인의 삶을 위로하며, 시끄러운 삶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따뜻한 차와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상은 그의 소설 ‘날개’에서도 한 명의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활동하지 못하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화폐의 기능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2층에 있었던 ‘티룸’으로 갈 수 있는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는가. 시대의 문화와 예술에 대해 예민한 자의식을 가진 작가 이상에게 있어 ‘카페’란 단순한 공간 이상의 삶의 변화를 담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터와 집 사이에 놓인 휴식이자, 예술창작, 그리고 사회생활 모두를 상징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힘겨운 시간을 지나고 나면, 이제 우리는 다시 ‘카페’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퇴근 후 책 한 권을 찬찬히 읽을 여유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공간은, 아니 시간은 우리를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잠시라도 떨어뜨려 놓아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 지금은 조금 참아낼 이유와 가치가 있다. /홍익대 교수

2020-09-21

우리 마음속 어떤 ‘하이드’를 위하여

요즘 우리 주위의 공기는 ‘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무른 땅을 피하고 단단한 땅만 딛으며 살고자 하는 욕망들이 어디에나 떠다니고 있다. 물론 어느 시대건 그 시대의 주류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확고한 형태로 영영 지속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이야 계속 반복되어온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의 삶이나 소통, 미래와 자본 등 인간이 불확실한 상황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 단단한 돌만을 딛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모를 일도 아니다. 또한, 사회 전반에서 불필요한 ‘신화’가 사라지고, 서로의 확고한 입장을 바탕으로 좀 더 실용적인 논의가 전개될 수 있는 것은 ‘개방 사회’를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변화일지도 모르겠다.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근간은 바로 인간이 가진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실성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마치 서구 근대 철학의 시작점인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도달했던 ‘코기토(cogito)’, 즉 여기 시공간 속에 우리가 실재로 존재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이 자기 의식과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인간이 그렇게 자기 생각과 언어의 주인이 되고 난 뒤, 쌓아올린 사상과 과학은 인간 사회 속에서 어둠 속에 싸여 있던 불합리와 불확실을 어둠 바깥으로 내모는 계몽의 도구가 되어왔다. 전통적으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미답의 영역은 그렇게 인간이 추구해온 ‘확실성’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탈신비의 대상으로 바뀌어 간다.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꿈이든, 환상이든, 모든 신비한 영역이 과학의 공리들과 설명하는 언어로 가득 차 버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이런 시대에도 분명 어떤 불안들은 스멀스멀 살갗 아래로부터 올라오곤 하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의 주변이 ‘확실성’에 대한 바람들로 가득 차 버렸기 때문에야말로 더욱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공포 내지는 불안 혹은 애착이 더 커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저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 1894)이 쓴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에 담겨 있는 공포는 이런 것이다.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내재된 선악 양면성을 발견하여 궁극적으로는 윤리성에 대한 재확인으로 귀결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주제는 사회속에서 인정받는 박사인 지킬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 불확실한 존재, ‘나’를 두고 주인됨을 경쟁하는 숨겨진 ‘하이드’에 대한 공포이다.이 ‘하이드’는 인간이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온전하고 확고하게 점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식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근대적인 공포를 일으킨다. 인간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자신의 기억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 자기 속에 무언가 다른 존재의 개입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가장 끔찍한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한 공포는 시대가 흐른다고 해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상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공포에서부터이다. 내가 잠을 자는 사이에 내 안의 하이드씨가 출현하여 사회적인 금기를 깨는 행동을 하고, 나아가 그 존재가 ‘나’를 두고 주도권을 경쟁한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공포와 매혹이 공존하는 독특한 ‘하이드’라는 공간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아분열, 몽유병, 기억상실, 도플갱어, 정신착란 등 인간이 자기 존재의 유일성과 확실성을 의심하는 이야기가 여전히 나오고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여전히 깊은 공포를 건드려 겁에 질리게 하면서도 실눈을 뜨고 계속해서 보도록 하는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여전한 상상의 여백인 것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0-08-31

두려움과 연민, 그리고 정화

인류가 가진 고전 중의 고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리스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서사 예술 양식이었던 서사시와 비극에 대해 이론화한 최초의 것이자 최후의 것이라 할 만하다. 감히 최후의 것이라 과언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극을 접할 때 어떤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가 하는 것에 대해 아직 이것보다 더 나은 해명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룬 ‘서사시’, 그리고 이것에 대한 극적 발전 형태인 ‘비극’은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그리스의 신화를 그 배경으로 두고 만들어낸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실연된 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시학’을 매개로 비극은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소설과 영화, 드라마와 같은 극화된 이야기 양식과 연결된다.말하자면, 몇 천 년의 시간을 지나고도 인간이 즐기는 이야기의 형태는 그리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갖는 특별함은 지금에 있어서도 어떤 배경 아래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을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현실을 모방하고 재현해나가는 과정에서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치의 형식이나 ‘개연성’의 개념 등을 완성했다는 것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학’의 진정한 위대함은 바로 비극을 보고 있는 관객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그려내는, 관객, 혹은 독자의 심리학의 영역을 최초로 연 사례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극은 그 끝까지 완결되어 있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고귀한 행동의 재현”이며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종류의 양념으로 맞을 낸 언어를 수단으로” 삼고, “비극의 재현은 이야기가 아닌 극의 등장인물에 의해 이루어지며 ‘연민(eleos)’과 ‘두려움(phobos)’을 재현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앞의 것들이 비극의 익숙한 형식적 규정이라면, 뒤의 것은 비극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풍경에 관한 것이다.우리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그 속에 재현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을 해나가는 인물을 보면서 그 인물의 현재에 공감한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 속에 있는 인물의 분노에 함께 화를 내고, 그 사람의 처지를 함께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종류의 ‘연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는 경험은 그저 밋밋한 활동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두려움’은 어떤 감정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인물에게 다가올 운명이 실제로 다가올까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오이디푸스’에서 주인공에게 내려진 끔찍한 신탁, 즉 신의 예언이 실현될까봐 두려워하는,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신탁대로 해버렸음을 주인공이 알게 될까 하는 두려움은 관객을 비극이 그리는 긴장의 고개로 끌고 올라간다.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한 태도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위험 속으로, 자박자박 걸어 들어갈 때 관객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긴장과 같다.극의 절정 부분에서 압축되어 터지기 직전의 긴장은 폭발하고, 관객에게는 감정적 해소가 찾아온다. 바로 ‘카타르시스’의 순간이다. 두 연인의 오해를 지켜보던 관객의 마음속 긴장감이 터져버리는 순간, 악행과 복수의 고리로 연결된 두 사람이 결국 마지막 대립하는 순간, 운명의 장난으로 고생하다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순간, 관객은 터져 나오는 감정의 잔여물들이 범벅된 상태로 읽던 책을 마치거나 영화관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어쩌면 이야기를 향유하는 이같은 경험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기에, 오랫동안 변화하지 않은 만큼 더 오래 계속될지도 모른다. 지금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홍익대 교수

2020-08-10

우리의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오직 인간만으로 이뤄진 사회에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특별한 자질들이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러니 오히려 인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체감하기는 어렵다. 특별히 그것이 어떤 것인가 규정할 필요도 없다.하지만, 우리가 인간다움에 대해 물어야 하는 순간은 늘 어떤 계기를 통해 찾아온다. 인간이었음에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이들의 자기 호소를 발견하는 때가 그러하다. 전쟁 같은 완전한 탈인간성의 시대에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행위들에 대한 규정을 통해 역으로 ‘인간다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피해를 받은 인간의 절망에 가까운 호소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이른바 휴머니즘의 기원이다.우리가 인간다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두 번째 순간은, 주로 인간 능력의 연장으로만 간주되던 ‘도구’들이 하나의 자기 존재로서 눈앞에 드러나는 때에 도래한다. 최근 A.I와 로봇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인간은 어쩌면 지금까지는 도구로만 간주해왔던 컴퓨터가 하나의 존재로서 자기 주장을 하려는 순간을 마주하게 됐다.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 또 다른 사회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이 순간을 통해 본격적으로 ‘인간다움’에 대해 물어야 하는 가장 치명적인 계기를 마주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중에 A.I나 로봇이 대신하겠지, 라는 자조 섞인 말들은 바로 컴퓨터라는 도구가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인간다움’에 균열을 낼지 모른다는 공포와 관련돼 있다.미국의 가장 뛰어난 SF작가인 필립 K. 딕(The Philip K. Dick·1928~1982)은 이미 1968에 쓴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속에서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안드로이드가 도래한 세계에 대한 공포를 제시했다. 핵전쟁이후 지구가 몰락하면서 방사능 오염으로 살아있는 동물들이 거의 멸종되고 난 시대에 주인공인 릭 데커드는 화성에서 탈출한 안드로이드를 사냥해서 그들을 퇴역시키는 직업을 갖고 살아가며, 현상금을 모아 자신이 갖고 있는 ‘전기양’ 대신에 살아 있는 ‘진짜 양’을 갖고 싶어한다.이 소설을 통해 필립 K. 딕은 바로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한다. 작가의 답은 비교적 명확하다. 주인공 릭 데커드가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소설 속의 검사법 중 하나인 ‘보이트-캄프 테스트’는 다름 아니라 감정이입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테스트였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안드로이드인지 모르는 레이첼을 검사하면서 바로 감정이입 유무를 평가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자신의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인간다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남기며 이 작품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인간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 즉 어떤 대상이 갖고 있는 감정 속으로 들어가 그 감정을 자기화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간다움에 대한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물론 강아지나 고양이도 어느 정도는 감정적인 동조가 가능하지만, 인간은 좀 더 고차원의 감정이입이 가능한 동물이다.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가 갖는 인간다움에 대한 규정이나 집착은 다름 아니라 인식적 폭력은 아닐 것인가. 마치 유색인종과 섞이게 된 백인들이 자신의 백인다움을 규정하고자 애썼던 제국주의 시대의 교훈처럼, 인간다움에 대한 필사적이고 우악스러운 규정 속에는 대상에 대한 어떤 공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그것에 뒤쳐져 인간됨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이다.A.I가 상용화되고,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화성 진출을 시작한 중요한 변화의 시대에, 출판된지 벌써 50년이 넘은 이 소설은 디지털 우리가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인간다움’에 대한 태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0-07-20

팔이 없어 더 아름다운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 부분.프랑스 왕들의 거처였던 루브르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대중들에게 개방된 박물관이 되었다. 루브르가 세계 최고의 소장품을 수집한 역사의 이면에는 침략과 약탈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힘의 논리가 예술의 세계마저 지배하고 있다니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방문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루브르이며, 루브르를 방문하면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몇몇 작품들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 고대 그리스 미술의 정수 ‘사모트라케의 니케’ 그리고 또 다른 여신이 있다. 바로 사랑과 미의 여신 ‘밀로의 비너스’이다.기원전 100년경에 제작된 비너스는 헬레니즘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비너스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다름 아닌 몸에 흐르는 유려한 곡선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각은 평면적인 회화와 달라서 공간과 입체 그리고 인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서로 작용하는 방식을 잘 읽어야 한다. 서 있는 조각의 경우 무게가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몸의 균형을 이루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면밀히 관찰하면 아주 흥미롭다. 특히나 조각은 입체 작품으로 우리와 같이 볼륨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훨씬 생동감 있는 감상이 가능하다.고대로부터 전해지는 다수의 비너스가 있지만 특히나 ‘밀로의 비너스’가 각광을 받는 이유는 거의 유일하게 머리 부분이 온전히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비록 두 팔은 망실됐지만 말이다. 그런데 ‘밀로의 비너스’는 왜 팔이 없이 전시되고 있을까? 프랑스의 복원 기술이라면 충분히 원형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사실 비너스의 두 팔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팔이 없기 때문에 몸의 움직임과 방향성을 분석해 두 팔이 어느 위치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에 따르면 비너스는 왼팔을 들어 머리에 장신구를 꽂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혹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커다란 거울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비너스 옆에 기둥이 하나 서 있었고 그곳에 팔을 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여러 가지 제안들 중 아주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다. 비너스의 배 부분을 보면 자그마한 둥근 모양의 흔적이 있다. 이것이 복원을 위한 결정적 단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부분은 비너스의 오른팔이 붙어 있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비너스의 오른팔은 몸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반대편인 왼쪽 허리에 놓여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왼쪽 팔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조금 더 쉬워 보인다. 왼쪽 어깨의 근육 모양을 자세히 관찰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비너스는 왼쪽 팔을 어깨 높이로 들고 있었을 것 같은데 팔꿈치에서 손 부분은 앞을 향해 뻗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비너스는 왜 이러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비너스가 밀로 섬에서 발굴되었을 때 다른 파편들과 함께 출토됐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출토된 파편들 중에는 왼팔의 일부로 추정되는 조각이 있었는데 손으로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여러 다른 작품들에서 관찰되듯 비너스는 사랑 혹은 타락의 상징인 사과를 들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루브르의 복원 전문가들은 비너스가 사과를 든 왼팔을 앞으로 뻗으며 서 있었을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결론은 내려졌지만 복원 작업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왜일까?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복원된 팔은 비너스를 완성 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것이 지닌 신비한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시간 속에 소멸된 요소들을 인위적 손길을 가해 복원하는 것 보다 불완전한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불완전은 감상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고, 그 상상력으로 인해 또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들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2020-07-13

코로나 시대의 책읽기

우리가 길고 느리게 이어지는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 터널에 붙은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어떤 시대의 중요한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동안에 그것이 변곡점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시대의 색깔을 규정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그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품의 하나로 참여하고 순간에는 불가능한 과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역사에 오래동안 남겨질 중요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감지할 수 있다. 마치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던 한 병사의 마음처럼, 우리는 분명 역사에 기억될 ‘코로나’라는 세계적인 유행병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아직 이 흐름이 어디로 나아가게 될지조차 알 수 없다.세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일들을 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필자도 대학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의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문학에 대해 강의하는 이례적인 첫 번째 경험을 마무리하고 있다. 주어진 변화에 대해 인간이 항상 상상가능한 가장 최적의 대처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대학 사회의 각 영역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교육’이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 사이에 이해의 충돌이나 소통의 상실 등의 사례가 없지 않았겠지만 말이다.하나의 이례적인 사례가 우리의 현재를 바꾸어 다시는 그 현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른바 ‘뉴노멀’의 혁명적인 경험을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모든 일들은 언제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변화하여 우리에게 익숙할 정도로 찾아오지 않았던가. 이 낯설고 비가역적인 경험이 전쟁이나 혁명과 비견될 경험인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전쟁이후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파편은 우리를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요즘 눈에 띌 정도로 외부 활동이 줄어, 책을 꺼내드는 시간이 조금은 더 늘었다. 물론 ‘강의준비’ 같은 직업적인 목적이 아닌 독서는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래도 아무 일 없는 저녁에 멍하니 TV를 틀어놓는 경우보다는 서가를 뒤적거리는 시간이 조금 더 늘었다. 인간들 서로가 ‘지나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균열이 나게 되니,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독서는 분명 책을 매개로 한 나와의 대화이다. 책에는 보통 글자들만으로 지금 어디나 넘쳐나는 과잉된 이미지들이 존재하지 않은 까닭에 책을 읽고 있으면 머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스마트폰과 SNS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줄로 타인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던 인간이 그 연결에서 잠시 단절되어, 글자들이 주는 막막함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뇌는 잠깐의 멈춤 뒤에 다시 그 글자들을 모아 만들어내는 세계를 창조해내기 시작하게 된다. 글자들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와 대화하며 생각의 세계가 구체화되는 것이다사실, 지금처럼 얼마나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재능이나 개성 같은 독특한 자질들을 모두 양화하여 대신하게 된 시대에 있어서, 이와 같이 나와의 대화 같이 고립된 독서나 소통은 그저 불가피한 이례의 상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이상 상상을 필요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연결되어 저 멀리에 존재하는 사람의 마음조차 얼마든지 억세스하거나 다운로드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니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진자가 또 발생했다는 문자가 씁쓸해 아무도 만나지 않는 저녁에 습관처럼 TV를 켜거나 넷플릭스의 영화 목록을 뒤지고 뒤지기 보다는 서가에서 예전에 너무 열심히 읽어 마음 속에 구체적인 상상의 풍경들이 즐비했던 책을 다시 한 번 꺼내 읽는 일은 무엇보다 위안을 주는 일이다.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0-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