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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묶인 끈을 풀며

등록일 2020-11-02 19:38 게재일 2020-11-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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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한 쪽 끝을 묶은 책이라는 아이디어는 인간의 사고 체계를 바꾸고, 문학예술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집에, 연구실에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서 한숨이 나오는 하루하루다. 책의 자리가 점점 넓어져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것은 책을 좋아하여 그것을 매개로 사유하고, 소통했던 모든 이들이 겪었을 고충이니, 특별히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줄여 나의 자리를 넓힐 궁리를 해본다. 별 뾰족한 수는 없다. 책을 주변에 나눠주면 좋겠지만, 그 책을 받고 난감해할 사람의 표정을 상상하면, 그것도 민폐가 아닌가. 요즘에는 책이 차지하는 공간을 줄이려 책을 묶어둔 제본 부분을 자르고, 스캔을 해두는 것도 많이들 하고 있다지만, 그것만큼은 왠지 저어된다. 사실, 많은 자료를 인터넷으로 보고 있는 셈이니, 그리 거리낄 이유도 없지만, 책을 찢는 것은 무언가 내 속에 담겨 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각을 건드린다. 디지털과 네트워크가 기본이 되는 시대, 그것은 내게 남은 한 줌의 ‘예술’에 대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본래 종이의 한 쪽 끝을 묶었던 것을 푸는 것에 불과하니, 그리 신경을 쓰는 것은 과민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책을 찢는 일은 단지 그 묶었던 끈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책이 담고 있던 내 손끝에 닿아 명징했던 총제적인 예술의 감각을 훼손하는 일인 것만 같다.

지금 시대는 분명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지 않은 예술을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지금도 네트워크를 떠돌고 있는 유튜브의 영상들이 그러하고, 그 주변에 모여 분명 ‘예술적인 감흥’을 얻고 있을 사람들의 존재가 그러하다. 고작 ‘사진’에 의해 복제된 예술품의 가치 유무를 논하며, ‘아우라’라는 현실적인 낭만성의 기호로 그를 지칭하고자 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고민은 이 시대에 닿으면, 사실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그림 속에 찍힌 점과 점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점들까지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어디로든 전송될 수 있다.

분명 벤야민의 시대에는 예술이 갖고 있는 수많은 가치들을, 그것에 새롭게 붙은 화폐 가치가 밀어내고 소외시켰던 것이 예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고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는 정치나 시장이 예술을 잠식한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작품과 그것을 ‘재현’하는 길고 긴 디지털의 코드더미들이 실제로 같은 것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것이 된다. 이제는 본래적인 것과 찰나적인 것을, 그 선후를 구분할 수 없게 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문학’이 질식할 수밖에 없는 전망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애초에 문장에 붙어 있는 문장 이상의 의미들과 그것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파문이 갖는 신비가 바로 ‘문학’이 본령이 아니었는가. 어떤 문장을 읽고 그것을 더 확실한 무엇으로 치환해버리는 시대에야 ‘문학’의 자리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가능성을 ‘책’이라는 매체에 가두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문장 한 줄은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어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다가 누군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 누군가의 길고도 깊은 사유의 원형이 담겨 전달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나 향유의 양상이 찰나적이 되고만 것은 여러 번 생각해도 아쉬운 일이지만, 인간이 언어를 쓰고, 그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무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만큼은 시대가 지나도 변화하지 않을 것 아닌가.

책의 묶인 끈을 풀어 헤쳐 둘지 고민하다 결국 풀어내지 못하고 어딘가에 쌓아둔다. 아직 나는 책의 시대에 남아 있으므로, 그것을 헤쳐 새로운 ‘문학’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에게 맡겨 둔다. 책의 시대는 어쩌면 이제는 골동의 영역에 남겨질지도 모르겠지만, 시대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고, 인간이 영위하는 문학만큼은 날로 새로운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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