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현대시의 역사에 있어서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라는 이름은 하나의 시인을 넘어서는 하나의 현상이자 놀라운 효과였다. 24세 때 살롱을 중심으로 한 미술 현상에 대해 주목하여 비평을 하며 비평가로 출발했던 샤를 보들레르는 서구 낭만주의 예술이 빛을 발하고 있던 무렵인 19세기 중반부터 비평과 번역, 소설, 시 등의 창작을 하다가 36세인 1857년이 되어서야 그간 썼던 시들을 모아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을 출판해 하나의 새로운 예술시대를 열었다.
보들레르 이전에, 운율을 중시하여 시인의 입에서 마치 음악과 같이 노래되어 시인의 감정과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켰던 시의 세계는, 파리를 산책하며 보들레르가 하나하나 수집했던 고대와 연결되는 골동품과도 같은 단어들과 그 연결을 통해 반짝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이 보들레르를 자유시의 이념을 최초로 구체화한 시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가락과 음률, 인간 내면의 친근성과 천진함으로 연결되어 있던 과거의 낭만주의적 시를 일신하여, 바로 노래하는 시로부터 읽는 시로 바꿨던 최초의 시도였던 까닭일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 속에는 비록 배치와 반복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계적 음향이나 노래는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도시를 횡행하는 우울한 정서 속에 저 먼 고대나 원시의 신화적 국면과 연결되는 풍부한 볼륨의 단어들이 총총히 박혀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고 있어, 단지 그것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각적 충족감을 주었던 것이다.
샤를 보들레르는 그 자신이 미국의 가장 독특한 작가 중 하나인 에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1809~1849)의 예찬자였고, 그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시집 ‘악의 꽃’ 속에 들어 있는 ‘유령’이나 ‘고양이’, ‘흡혈귀’ 등의 총총한 이미지들은 포우의 시나 소설 속에 들어 있던 환상적 세계의 파편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던 당시의 파리 시내를 방황하며, 그는 포우를 비롯해, 서구 사회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신화를 필터처럼 빌려와 결코 단순하지 않은 풍요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발견해낸 파리의 수집품들은 마치 연금술처럼 그의 시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귀중한 무언가로 바뀌었다. 우리가 보들레르를 상징파의 시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시에 초대한 이러한 귀중한 무언가들이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풍요한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보들레르의 사후인 1869년에 출판된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에는 서문 격으로 보들레르가 자신의 친구인 ‘아르센 우세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이 서문은 보통 보들레르가 자유시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최초의 것으로 인용되곤 한다. 그 편지 중 몇몇 부분을 인용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그 야심만만한 시절 우리 가운데 시적 산문의 기적을 꿈꾸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나? 음악적이면서 리듬도 압운도 없고, 영혼의 서정적 움직임과 환상의 기복과 의식의 비약에 적용할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도 충분히 복잡한 그 기적을 말일세.”-박철화역, 동서문화사
이 부분은 바로 보들레르가 시적인 산문, 또는 산문시의 기적을 꿈꾸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래로 불리지 않으면서도 리듬을 갖고 있는, 의식의 비약에 버금갈 정도로 독자의 마음에 다가가는 시의 움직임을 그는 ‘상응(correspondances)’이라고 같은 제목의 시에서 지칭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이는 노래에서 벗어나 읽히는 새로운 자유시의 탄생의 장면이었다. 보들레르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시의 탄생을 의미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