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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을 글로 쓰는 일의 어려움

인간이 글쓰기로 무언가를 표현해 온 역사는 꽤 길 것만 같지만, 그것은 그리 길지만도 않다.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대해 느끼고, 배우고, 말로 그것을 표현하고, 또 글로 그것을 표현해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이제 무언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쯤에는 인간의 감각은 둔해지고, 지력은 쇠퇴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예술 중 문학이라는 것이 늘 기괴한 착상과 화려한 수사로 점철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그렇게 단순하기 그지 없는 세계로 돌아오고 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뱉는 말과 글은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다.인간은 글쓰기라는 미디어를 가지고 세상을 그려내기도 하고, 저 멀리 바깥에 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그려내기도 한다. 글쓰기를 가지고 재현하는 세계는 결코 구체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않은 세계이기 때문에, 억지로 쥐어짜낸 확신이 아니라면 가지기 어렵다. 특히 어떤 인간의 마음속을 흘러가고 있는 생각이라면 더욱 그렇다. 단지 있었던 일을 글쓰기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과도 같은 흔들림을 옮기는 일은 그래서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다.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소설은 대부분 인간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물론 흥밋거리로 읽는 소설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언어예술로 간주되곤 하는 소설이라면 대부분 세상의 일들을 살피거나 인간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생각이나 심리를 그려내는 것을 마치 자기의 사명인 양 간주해왔다. 세상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감각과 마음속을 흘러가는 시간의 감각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글쓰기는 분명 다른 글쓰기와는 조금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심리가 흘러가는 모습을 그려내는 작가들은 문학 내에서도 예술적인 작가로 분류되는 것이 아닐까.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20세기 초반 자신이 태어났던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그 사회상 위에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심리를 얹어 두어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예술적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조이스 이전에도 인간의 심리를 언어로 그렸던 작가들은 많았지만, 우리가 그로부터 심리주의 소설의 기원을 삼는 것은 그가 처참하고도 궁핍한 당시의 현실 위를 흘러가는 인간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얹어두었기 때문이다.지금의 소설 작가라면 누구나 이런 방법을 쓰고 있지만, 100년 전 조이스가 시도했던 일종의 심리주의, 조금 더 정확히는 심리적인 실재주의의 방법론은 인간의 마음을 글쓰기로 묘사해내는 데 고심했던 다른 작가들이 찬탄할 혁명적인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조이스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여느 소설과 같이 먼저 인물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아일랜드의 거리들이 들어오고, 그리고 배경음악처럼 세계 위에 보이스 오버되어 인물의 마음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조이스와 같은 시대의 평론가들이 그의 심리묘사를 음악성에 빗대었던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이다.사실 제임스 조이스는 1930년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백석이나 박태원 등이 그를 좋아해 자주 소개하곤 했다. 그가 한국과 똑같이 식민지를 겪고 있는 아일랜드의 작가라는 동질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글쓰기라는 도구로 인간의 마음을 그토록 세련되게 그려낸 작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타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여전히, 그렇게.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07-31

여름, 우리를 들뜨게 했던 것들

이육사 계절이란 마치 공기 같아 그 변화라든가 그것이 주는 미묘한 느낌은 항상 감각 안에 포착되는 것은 아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어린 시절, 앞만 보고 살아가는 와중에는 전혀 그 변화를 자각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살아가기도 바쁜 와중에 그 찬찬한 변화까지 눈과 귀에 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좀 더 들게 되면, 유독 계절이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나뭇가지 끝에 보송거리는 조그만 솜털이 눈에 보이거나, 살갗에 달라붙는 수분 가득한 공기가 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이럴 때면, 어린 시절 뭐가 좋은지 몰랐던 시의 한 구절도 입에서 마치 노래 가사처럼 맴돈다.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같은 시처럼. 예전에는 일제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는 이육사 시인의 삶이 시보다 먼저 들어왔다면, 이제는 청포도가 익어갔다던 그의 고향이 먼저 떠오른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꽃이 뭐가 좋은지, 알알이 박히는 열매들이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살다가, 문득 그 계절이 고향처럼 다가온 것이리라.코로나가 던진 충격 이후, 마스크에 갇혀 서로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서서히 마스크를 벗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동안 마치 어떤 계절도 존재하지 않는 듯, 아무런 시간을 느낄 수 없었던 기간을 지나니 사람들의 마스크가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에서 계절을 느낀다. 긴 옷에서 짧은 옷으로 사람들의 옷차림은 아직 뒤죽박죽이지만, 그 변화가 계절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목련과 개나리, 진달래 등으로 찾아온 봄을 지나 여름이 되면, 세상은 온통 초록색 투성이가 된다. 산이나 계곡에서 이 초록색을 질리도록 봐두지 않으면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다양한 명도와 채도를 가진 초록색들을 눈에 담아두고, 풋풋함을 지나 거의 날것의 냄새까지 나는 덥고 습한 열기 속에서 시원함을 뿜어내고 있는 숲속의 공기를 마음껏 숨 쉬지 않으면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그렇게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안도현의 시집 ‘그리운 여우’의 표지. 이제 인간은 여름에는 에어컨으로, 겨울에는 난방으로, 실내에만 있으면 더 이상 계절에 영향 받지 않는, 덥고 춥기가 일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얼마 안 있으면, 계절의 영향 같은 것은 전혀 느끼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게 될지도 모른다. 계절의 감각이란 문학 작품의 한 구절에나 존재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계절에 인생을 비유하고, 계절의 감각 속에 감정을 담아내는 일 따위는 한없이 낡은 무언가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니, 지나친 걱정만은 아니리라. 하지만, 그래도 눈앞만 바라보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서, 큰 길 옆에 나 있는 작은 길로 나가면, 그곳에는 언제나 숲이 있고, 나무가 있고, 물이 흐른다. 문을 열고 나가면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이 서로의 옷깃을 스쳐가는 소리, 말소리가 들린다. 축축하면서도 치열한 여름의 공기가 느껴진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편리해져도,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 더 이상 여름의 열기가 아니라 디지털 네트워크 속 무언가로 바뀌어가도, 저기 인간 세계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 자연의 이름을 하고 있는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곳에는 숲이 있고, 소리가 있고, 신선한 냄새가 있다.가끔은 눈 앞에 있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어 자연이라는 책을 보고, 계절이 보여주는 감각을 찬찬히 느껴보면 어떨까. 그러면 분명 그곳에 예전 우리를 들뜨게 했던 여름의 감각이 우리를 한결같이 부르고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바람이 불어오게 될지도 모른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07-17

과연 글쓰기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빌렘 플루세르. 미디어 학자인 빌렘 플루세르(Vilem Flusser)는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물론 플루세르는 이 글쓰기를 책이라는 미디어와 더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긴 하지만, 글쓰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감각적 이미지의 저장장치와 전송속도의 발전으로 인해 어떤 인간의 감각과 다른 인간의 감각 사이를 연결하는 추상적인 형태의 글쓰기는 사실 그 매개로서의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카페나 대중교통 안에서 글쓰기가 아닌 영상으로 사유를 배운 유튜브-네이티브들이 모두 제각기 스마트폰을 쥐고 영상에 열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순간 다가올 미래에 대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바야흐로 우리는 지금 책의 시대를 빠져나가고 있으며, 글쓰기의 미래 역시 그리 낙관할 수만은 없다.새로운 미디어의 발달은 글쓰기가 갖는 매개의 불투명한 영역을 삭제하여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의 직접 경험에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부여한다. 작은 스마트폰의 화면을 통해서라면, 우리가 글쓰기로 어떻게 해도 다가가기 어려웠던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 감각, 그리고 일상에 직접 접속할 수 있다. 그러니 메타적이고 추상적인 문자와 그 연결로서 글쓰기라는 논리를 통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통은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입지를 갖기 어렵다. 조만간 우리는 글쓰기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시대로 접어들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대상이 갖고 있는 권위가 땅에 떨어진 뒤에야, 우리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직시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책과 글쓰기가 가진 의미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시기는 어쩌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에게 글쓰기는 무엇이었을까.한때 글쓰기는 인간이 가진 사유의 형태와 색깔, 그리고 그 깊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해본다면, 피와 살을 가진 구체적인 감각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메타적 인지와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추상적 개념의 문자화와 그 연쇄로서 글쓰기는 인간의 사고를 확장시켜주는 매개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문자와 글쓰기에는 아무런 감각적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감각과 감정,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회로를 작동시킨다. 여전히 대학에서 신입생에게 앞으로의 대학 강의를 듣기 위한 도구로서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아마 글쓰기가 가진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어쩌면 글쓰기가 갖고 있는 불편함이란 바로 글쓰기가 갖는 가치에 해당한다. 눈을 가린 채, 그것이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강변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구체의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그를 통해 사유의 힘과 상상력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니, 그것에 가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사유를 기록할 또 다른 미디어적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토록 불편한 글쓰기가 인간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까.물론, 우리 인간이 글쓰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날은 그리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읽기와 쓰기는 불편하지만 인간다운 행위이다. 소설가 이태준과 시인 박목월이 제각기 시대에 썼던 ‘문장강화’를 열어본다. 문자에 대한 충만한 신뢰가 그 속에는 들어 있다. 글쓰기가 주는 아름다움도 들어 있다. 글쓰기는 분명 물성을 가진 존재이면서, 인간의 사유를 확장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글쓰기가 저물어가는 시대에 여전히 읽고 쓰는 존재들이 어딘가에 있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7-03

백 년 전의 사랑, 연애의 시대에 바침

지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린 시절 사랑이란 빠질 수밖에 없는 감정의 상태이니, 그것이 지금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각각의 인간의 한계를 넘어 저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마음의 급격한 움직임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누군가는 각자 생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한다. 학생들의 삶은 미래의 더 나은 생존을 준비하느라,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어찌 사랑 같은 가장 현재적인 감정에 빠질 것인가. 경쟁의 시대에, 생존을 고민하는 이들의 고민은 지금 우리 사회가 귀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우리 모두가 빠져 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한국에서 근대 문학의 시작은 바로 사랑으로부터였다. 1920년대를 연애의 시대로 규정하는 연구자가 여럿 존재할 정도로, 사랑과 연애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것이었다. 유명인들의 연애가 입에 오르내리고, 연애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누구나 연애편지 모음집을 한 권 씩은 서가에 몰래 꽂아두고 보던 시대였다.19세기 말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제국주의의 광풍에 휘말려 제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어떻게 사랑이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을까. 흥미롭게도 그 시대 역시 경쟁의 시대였다. 진화하지 못하면 도태한다는 진화론적 상상력의 공포가 사회를 덮쳤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다른 국가들에 대한 끔찍한 폭력을 저지른 배경도 바로 밑도 끝도 없는 경쟁과 소멸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겠는가.하지만, 지금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을 생존과 경쟁의 시대였던 백 년 전 우리가 빠져 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김동인이 ‘약한 자의 슬픔’에서 보여준 것은 삐뚤어진 사랑이었고, 현진건이 ‘희생화’에서 보여준 것은 사랑에 빠진 모습을 바라보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었고, 노자영이 ‘반항’에서 보여준 것은 가정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 정적 혁명을 꾀하며 집 바깥으로 뛰쳐나갔던 여성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1920년대는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김동인이 만든 최초의 근대문학잡지 ‘창조’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임노월이라는 작가는, 지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 즈음 가장 독특한 시와 소설을 쓰는 작가였다.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의 곡 ‘사의 찬미’가 나오기 전에, 같은 이름의 시를 쓴 것도 이 임노월이었다. ‘창조’가 폐간되고 발간된 ‘영대’에 그는 이 사랑의 시대에 강렬한 사랑의 욕망을 표현했던 ‘악마의 사랑’이라는 소설을 썼다.이 ‘악마의 사랑’은 자신과 어릴 때 혼인한 정순이라는 여성과, 새롭게 알게 된 영희라는 여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에 대해 쓴 작품이다. 어쩌면 전형적이다못해 뻔하기까지 한 삼각관계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짧은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자기를 덮쳐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그것은 숨쉬는 것처럼 당연했던 기존의 관계를 송두리째 뒤흔든다.지금에 와서 백 년 전 사랑에 목매던 소설을 읽는 것은 조금 미묘하다. ‘악마’의 사랑이란 제목조차 과장처럼 여겨진다. 분명, 우리에게 사랑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 아닌 시대에,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조금은 그 시대가 그리워진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6-19

자본의 사생활, 편의점에 진열된 인생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의 표지. 동네마다 자리했던 슈퍼나 작은 구멍가게들을 대신해 어느새 전국 곳곳에 모두 같은 모양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는 편의점이 들어찬 시대가 되었다. 밤새 운영한다는 의미의 ‘편의(convenience)’는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 당연한 것이 되고, 이젠 편의점 없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난 뒤 남아 있는 한국 사회의 풍경을 회고한다면, 아파트와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빼고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에 맞는 시대적 상징이 되는 공간이 존재한다면, 편의점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공간인 셈이다.한국에서 편의점이라는 공간이 처음 생긴 것은 80년대 말이었다. 24시간 일용품을 구입한다는 편의점이라는 콘셉트는 그것을 처음 경험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분명 신기한 곳이었을 테지만, 그 신기함이 일상으로 바뀌지 않으면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어떠한 의미도 갖기 어렵다. 당연하게도 한국에서 최초의 편의점은 실패하고 문을 닫았지만, 이후 90년대 초부터 편의점 공간은 하나씩 생기기 시작해서 이제는 거리 어디를 가나 편의점을 만날 수 있다.편의점에서 우리는 일상을 산다. 때를 놓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컵라면과 도시락을 사고, 힘들었던 하루를 소박하게나마 기념하기 위해 캔맥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고, 급하게 필요한 물티슈나 칫솔 등을 사기도 한다. 가끔은 아무 것도 살 것이 없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러, 투플러스 원으로 파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봉지를 사들고 오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라는 것만큼 인간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면, 편의점에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 어느 것 하나도 비싼 것 없는 것들 사이를 고민하는 현대의 인간의 소비야말로 현대 인간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명품의 소비처럼 계층의 취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우리는 일상을 사고, 일상에 머물기를 바란다.한국 사회에 문득 등장한 편의점이라는 공간에 담긴 의미를 가장 본격적으로 관찰하고 의미부여했던 작가는 아마도 김애란일 것이다. 2003년에 발표했던‘나는 편의점에 간다’라는 소설에서 작가 김애란은 도시 변두리에 살고 있는 젊은 여성의 관점에서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한 편의점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살폈다. 바로 직전까지 친밀한 가족에 기반한 서로에 대한 관심의 시대를 보내왔던 한국 사회에서 편의점은 물건을 사고 파는 것 이외에는 쓸데없는 관심을 주고 받지 않는 산뜻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 ‘거대한 관대’의 공간이야말로 관계의 압박에서 질식해가던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축복만 되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 20년 전 한국은 집단적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로부터 개인들의 사회로 이전했으며, 이제 모두 외로운 섬이 된 인간들은 서로 연결되길 바란다. 재작년 출간되어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작가 김호연의 ‘불편한 편의점’은 우리가 편의점이라는 공간 속에서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바란다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 속에서 편의점은 서로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게 된 인간들이 서로에 대한 관심을 끝끝내 놓지 않는 공간이다. 편의점은 발주와 폐기 사이에서 일상이 존재하는 곳이고, 고객과 진상 사이에서 인간이 만나는 곳이다. 누구나 가야만 하는 곳이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20년을 사이에 두고 나온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며, 편의점에 진열된 우리의 일상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편의점과 또 다른 편의점 사이를 흘러가고 있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5-29

초여름의 책 읽기, 서늘한 납량의 맛

에이브럼 ‘브램’ 스토커(Abraham ‘Bram’ Stoker·1847~1912). 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짤막했던 봄은 어디론가 길가에 수북히 떨어진 꽃들과 함께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느껴지던 냉기조차 사라져 후덥지근한 땀이 느껴질 때쯤이 되었다. 계절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인간됨을 확인하는 의례인 것만 같아 가끔은 노력을 기울여 계절의 변화를 느끼려 애쓴다. 계절이 바뀌면 기후도 바뀌고 그속에서 숨쉬는 인간도 바뀌는 것이다.지금까지 인간이 발전시켜온 기술들은 계절을 거슬러 여전하고 항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당연히 에어컨디셔너나 냉장고가 없는 여름을 생각하기 어렵고, 또 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이 실물 세계가 아니라 디지털 네트워크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계절의 변화에는 점점 더 둔감해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라는 계절의 감각은 그런 의미에서는 인간의 기술적 변화를 거스른다.낡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이고, 겨울은 겨울이다. 여름이라면 티셔츠 안 쪽에 남는 후텁지근한 땀내가 좋고, 겨울이라면 꼭 닫은 문을 열었을 때 어는 듯한 추위와 함께 밀려 들어오는 겨울의 냄새가 좋다. 여름밤에는 차오르는 땀을 씻어주는 밤의 바람이 좋고, 겨울밤이라면 두터운 이불이 몸을 감싸 들어오는 느낌이 좋은 것이다. 더위를 피하고, 추위를 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계절에 담긴 의미를 만들어내고 기억 속에 각인된다.그렇게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는 피서나 납량을 위한 특별한 무언가를 하곤 한다. 계곡이나 바다를 찾아가는 것도, 시원한 것이나 보양을 위한 것을 먹는 것도 그 노력 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낡은 신문이나 잡지의 납량 특집 역시 더위를 피하기 위한 노력에 해당한다.물론, 초여름 더위를 피해 무언가를 읽거나 보면서 더위를 피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공포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오싹함이란 대상에 대한 무서움으로 인해 긴장하는 것일 뿐, 실제로 추위를 느끼거나 더위를 가시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늘하고 차가운 생각이 더위로 달궈진 신체를 시원하게 만든다는 납량의 상상력은 순진한 착각이지만 낭만적이다. 한낮의 열기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면, 귀신이나 유령, 그밖의 불가사의한 존재에 의해 위협받는 공포가 잠시 멈춘 머릿속 관심을 딴 데로 돌려주기도 하지만 말이다.그런 까닭에, 살짝 더위가 찾아온 초여름에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공포소설을 골라서 읽곤 한다.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도 좋고, 스티븐 킹의 소설도 좋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위험이 일으키는 서스펜스는 독자의 마음을 죄어, 순간이나마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초여름에는 흡혈귀가 등장하는 브램 스토커의‘드라큘라’(1897)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이미 흡혈귀의 대명사처럼 자리매김한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은 조너선 하커라는 변호사가 드라큘라의 의뢰를 받아 그의 성으로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그의 성에 오자마자 자신이 그 성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성에 가둬둔 드라큘라 백작은 400년 전에 죽은 아내가 환생한 존재인 조너선의 약혼녀 미나를 찾아 런던으로 오게 되고 미나의 친구인 루시의 목을 물어 흡혈귀로 만든다. 이 소설은 조너선의 일기와 미나의 편지 등의 형식을 띠고 있어 내용을 이해하고 공포의 순간까지 들어가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한번 드라큘라의 존재가 각인되고 피를 향한 그의 욕망에 걸린 인간들의 마음이 손에 잡히는 순간, 초여름의 밤은 오싹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여름밤은 지나갈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05-08

우리가 책을 볼 때, 책은 우리를 본다

우리 세대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이미지 비평가 중 하나인 존 버거는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하는 질문을 통해, 동물원에서 인간이 동물을 관찰하는 것에 담겨 있는 의미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인간은 동물원 안에 갇힌 동물들을 보러가지만, 정작 그곳에 진정한 동물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원에서 우리는 인간과 친밀한 동물의 모습을 보러가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동물원 속의 동물과 인간의 구별된 모습에 불과하다. 인간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낸 구경이라는 행위의 가치는 제도의 한계를 벗어나 그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동물원의 쇠창살 너머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물의 이미지를 발견하지만, 그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는 동물의 시선은 그야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우리가 책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타인을 바라보는 것 역시 어쩌면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한때 인간의 문학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미니어처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다시 세상을 바꾸는 도구로 여겨지기까지 했지만, 정작 그 문학 속에 진정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이미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세상이 들어 있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내 손이 닿는 영역 저 바깥에 존재하는 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가끔 진정한 타인을 만난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밀한 타인만 존재한다.우리가 동물원을 벗어나서야 동물의 진짜 동물성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진정한 세상이나 낯선 타인이란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눈에 들어올 수 있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동물원이 아니고서야 동물을 보기 어려운 것처럼, 문학이나 책이 아니고서야 세계나 타인의 모습을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 속에 진정한 그것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은 과연 인간이 ‘나’를 벗어나 진정한 세계를 발견하고, 저 바깥의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 가장 고전적인 우화이다. 이 희곡은 오래 전 가족을 떠난 톰이 자기를 소개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톰의 어머니인 아만다 윙필드는 먼 나라를 동경하여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꾸려가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빛났던 과거를 동경한다. 하지만 아만다는 과거와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아들인 톰과 로라의 삶에 끊임없이 간섭한다. 아만다에게 있어 현실이란 그저 부정의 대상일 뿐이고, 그 시선은 현실 너머의 빛나는 과거를 향해 있을 뿐이다.이 가족 드라마 속에서 ‘유리동물원’이라는 제목은 로라가 집착하듯 모으고 있는 유리로 된 동물들을 가리키는 것이면서, 또 아만다가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 그녀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이기도 하다. 로라는 자기가 모으던 ‘유리동물원’을 깨뜨리고 만 짐과의 사랑을 통해 현실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정작 로라가 마주친 현실은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차 있었다. 유리동물원 속 모든 가족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며, 환상에서 벗어나 실제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가족의 환상을 떠나는 방법밖엔 없었던 것이다. 세계대전이 아직 한창이던 1944년 극작가인 테네시 윌리엄스는 당시 미국인들이 갖고 있던 가족에 대한 환상과 실제 사이를 폭로하는 작품을 썼던 것이다.우리는 동물원에서 동물을 보고, 책을 통해 세상을 본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의 시선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난 뒤 저기 있는 비어있는 실제의 현실을 만나는 것까지가 독서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4-24

‘복수’ 우리를 위로하는 서사의 상쾌함

바야흐로, 복수의 시대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자기가 겪었던 부당한 상처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결국 복수하고야 마는 이야기가 넘쳐 나고 있다.어느새 드라마 ‘더글로리’가 다루는 복수는 우리 모두의 욕망이 되었다. 일찍이 이청준은 소설 ‘벌레이야기’에서 복수와 용서의 역설을 다뤘고, 이창동 감독은 ‘밀양’에서 이를 곱씹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에 대한 영화 3부작을 통해 복수라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행위에 대해 이성적이고 지적인 성찰을 행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복수의 서사는 좀 더 직접적으로 욕망을 자극한다. 나도 모르게 손을 꾹 쥐고 몰입하게 된다.모든 사람이 복수를 꿈꾸어야 만큼 실제적으로 비인간적인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당했던 것은 아닐 테니까, 그 복수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이야기를 볼 때 늘 그러하듯 상상적인 감정이입에 해당한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던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약자가 강자에게 갖기 마련인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 대한 시기심이나 질투 같은 원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이러한 원한의 감정은 노예의 것이고, 이를 통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우리는 인간이라면 사회 속에서 누구나 겪기 마련인 질투나 원한, 열등감 등을 통해 나도 모르게 복수의 서사에 빠져들고 만다.사실, 원한과 복수에 얽혀 있는 이야기는 인류가 생겨나면서 동시에 나타났다고 해도 좋을, 어쩌면 인류의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간이 얽혀 살아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과정이고, 그 속에서 저질러지는 폭력과 증오는 누군가의 기억에 씻을 수 없는 공포를 만들어낸다. 실제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이야기로나마 시원하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낸 복수 이야기의 요체이다.16세기 말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에서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클라우디스에게 복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지만, 알렉상드르 뒤마가 1844년에 쓴 작품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에서 에드몽 당테스는 자신을 배신하고 모함해서 감옥에 가둔 자신의 친구들에게 불같은 복수를 행한다. 프랑스 작가로 가장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가장 많이 읽힌 신문 연재 소설을 썼던 알렉상드르 뒤마는 언론 미디어가 발달해 점차 고양되기 시작했던 당대 독자들의 욕망을 예민하게 파악하여 머뭇거림이나 망설임을 남기지 않는 훌륭한 복수극의 고전을 남겼던 것이다.이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보여준 복수의 플롯은 그것이 지금 쏟아져 나오는 이른바 복수의 전형이 되었다. 14년 간 감옥에 갇혀 복수심을 키워왔던 당테스는 감옥 안에서 ‘미친 신부’인 파리아를 만나 원수에 대한 진상과 복수를 위한 지식을 배우고, 그의 시체 가방에 숨어 탈출한다. 그리고 복수에 필요한 재산을 형성하고 백작의 지위를 산다. 그리고 프랑스에 돌아와 이제는 적이 된 옛 친구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다.당테스가 행했던 복수는 배신자들이 갖고 있는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돈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는 이들에게는 경제적 파탄의 복수를,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부정의 폭로를 통해 명예를 타락시키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도록 하는 복수를, 그리고 법을 왜곡한 이에게는 재판정에서 그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복수를 행한다. 세상에 대해 그릇된 마음과 폭력으로 대하는 이들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복수란 얼마나 상쾌한가. 복수의 실현가능성이나 효용이나 부작용 같은 걱정은 접어두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에만 마음을 써볼까 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상상은 그렇듯 자유로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가.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4-03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작가의 눈

원고지에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형상화한 해당 단행본의 표지. 우리에게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얼굴 앞에 붙어 있는 두 개의 눈은 인간이 향하는 앞의 길만을 보도록 제약한다. 우리 인간은 어딘가 거리를 걷고 있으면서 동시에 걷고 있는 우리를 볼 수 없는 숙명적 제약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가 속해 있는 시대나 사회가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애초에 역사나 통계처럼, 내가 속해 흘러가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가늠하거나,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불투명한 군집들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발달해왔던 것은 ‘자기’를 벗어난 외부 세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인간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물론,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내 속처럼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가늠하고 짐작할 방법들은 존재한다. 인간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하거나, 누군가 쓴 글을 읽는 것이다. 각자의 입장이 담긴 각자의 말과 글을 듣고 읽다 보면 우리는 ‘자기’를 벗어나 어떤 타인들의 집합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각각을 둘러싸고 있는 외로움도 조금은 해소된다. 과거의 작가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살아가면서 세상을 통해 받았던 인상들을 글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었다. 비록 SNS시대에 작가의 그런 역할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자기를 둘러싼 사회를 독특하게 해석하는 ‘작가’의 자리는 다소 변형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를 벗어난 타인의 집합으로서의 사회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알고 싶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작가 박태원이 탄생시킨 ‘구보씨’는 고작해야 대학노트를 끼고 식민지 시대 경성을 활보하는 작가의 페르소나였지만, 그것이 이후 최인훈, 주인석 등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되면서 ‘작가’라는 존재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은, 구보씨가 전하는 별것 아닌 세상이 모두 외로운 섬처럼 놓인 우리에게 위로를 주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응당 그렇게 외따로 떨어진 그 섬들로 편지를 발신해야 한다. 그것이 별것 아닌 메시지라고 하더라도.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조금 더 주목해볼 작가는 바로 빙허 현진건이다.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난 빙허는 그 당시 많은 지식인이 그러했듯 일본에 유학했다가 돌아와 문학 창작을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비록 ‘운수 좋은 날’의 작가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그는 식민지 초기 한국에서 가장 예민한 눈을 가지고 사회의 변화를 관찰했던 작가였다. 그가 처음 썼던 ‘희생화’라는 짧은 단편은 비록 당시 문단의 중진이었던 황석우에게 혹평을 받긴 했지만, 근대적인 연애에 눈뜬 누님을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적 습속을 예리하게 잡아낸 작품이었다. 이어 계속 발표했던 ‘술 권하는 사회’나 ‘타락자’ 등과 같은 작품도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단편이라는 완결된 형식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독특한 눈을 보여주는 한국 최초의 사례였다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현진건이 보여주는 사회의 ‘단편’들은 우리에게는 100년이 지난 옛 사회의 모습이지만, 또 그것이 그렇게 지금의 사회에서 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만히 읽고 있다 보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삶의 고단함과 모순,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눈뜸과 허위의식 등이 새겨지듯 들어온다. 가끔 스마트폰 속 ‘사회’로부터 ‘자기’가 조금 멀어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땐 사회에 대한 작가의 눈이 담긴 소설을 권한다. 조금은 위로가 된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03-13

공감 결핍, 혹은 공감 과잉의 시대

미국의 영장류학자이자 행동심리학자인 에밀 멘젤(Emil Menzel·1929~2012)은 침팬지들에 대한 실험에서 침팬지들도 다른 침팬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즉 다른 침팬지의 마음속에 실제로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대상을 관찰해서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어릴 때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할 수 있다. 당연히 그 타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는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빠나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며 그의 입장이 되어 숨겨둔 과자 같은 것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가 관찰을 통해 얻은 외부의 정보들을 통해 이를 종합하여 타인의 마음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것을 공감(empathy)이라고 부르든 동정(sympathy)이라고 부르든,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타인의 입장이 되는 과정이다.자신의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거나,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기쁨을 느끼는 누군가를 보며 덩달아 흡족해진다.그것은 어쩌면 신경생리학자들이 ‘거울 뉴런’이라고 불렀던 감정의 모방이나 전이라는 신체의 기능일 수도 있고, 인간이라는 종의 본능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대상에 대해서도,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몇 줄 글 속에만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의 입장이 되어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이다.물론,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내러티브 속에 등장하는 대상의 입장이 되어 판단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이와는 조금 다른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들은 동시다발적이고 맥락화되어 있지 않지만, 문학작품이나 영상작품은 그것을 구성하는 정보들이 단단하게 엮여 의미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언어 정보나 시각 정보의 전달 순서를 통해 독자나 관객을, 그 속에 들어 있는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고, 그 속의 생판 타인에게 감정이입하도록 만든다. 문학작품을 읽는 경험 중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렇게 고유한 ‘나’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공감의 영역일 것이다.그런데, 최근 사회에 타인에 대한 공감의 영역은 과잉되어 넘쳐흐르기도 하고, 결핍되어 사라져 버린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이 겪은 어떤 일에 대해 마치 자신이 상처받기라도 한 듯 맥락화되지 않는 분노를 쏟아내는가 하면, 타인의 어떤 당연한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뿌리를 알 수 없는 복수심리를 다룬 영상 작품들이 넘쳐나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진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소설의 서사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공감의 결핍과 과잉이 공존하는 모순된 시대이다.문득, 우리가 타인과의 거리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다룬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다고 해서, 타인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생각하는 때 타인의 존재는 미궁으로 빠져든다.까뮈가 ‘이방인’에서 보여준 뫼르소의 부조리가, 올더스 헉슬리가 풍자했던 ‘멋진 신세계’의 소마의 ‘행복’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타인의 입장을 짐작하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감정을 단순화시켜 타인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이는 공감의 결핍인가, 아니면 공감의 과잉인가. 우리는 어떤 시대로 가고 있는가./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2-27

그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쓴다

바야흐로, AI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완승하고, 이세돌이 신의 한 수로 승리했던 드라마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인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조금은 더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AI는 현실 세계 바깥의 샌드박스 속에서 빠르게 발전하면서, 어느새 인류가 몇천 년의 시간을 들여 세워 올린 문명의 수준을 따라잡고 있다. 고작 몇 개의 단어만 입력하면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수많은 일러스트 AI와 앨런 튜링이 제안했던 컴퓨터와 인간의 대화에서 자연스러움에 대한 튜링 테스트 같은 것은 이미 넘어버린 수준으로 대화하고 있는 chatGPT처럼, AI는 말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제 곧 음악을 만들고, 놀이를 하고, 생각을 할 것이다.인간 세계의 물리적인 시간 같은 것은 얼마든지 병렬 처리 프로세스를 통해 압축해버릴 수 있는 것이 디지털 세계의 시간이다 보니, AI가 인류 문명을 따라 잡는 속도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빨라질 것이다. 소나 말이 끌지 않는데도, 굉음을 내며 스스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를 보았을 때의 압도적인 근대 문명의 충격만큼의 것이 우리를 덮치고 있는 셈이다.AI가 지배하는 미래 세계의 풍경은 이미 많은 작가들이 보여주었다. 그것들 대개는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에 가까운 것이었다.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따라잡는 세상을 희망찬 미래로 담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SF는 아직 열리지 않는 미래의 불확정적 영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가장 큰 동력으로 삼고 있기 마련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1932)에서 보여준 인간이 가진 감정이라는 잉여의 대상을 통제하는 소마(soma)라는 통제 시스템은 미래 문명에 대한 공포어린 시선으로 AI에 의해 초래될 세계에 대한 공포로 수렴된다.아이작 아시모프의 자율적인 의사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기계인 ‘로봇’ 시리즈나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그리고 필립 K딕이 보여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알고리즘을 짜기 시작하는 기계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인류가 세워 올린 문명의 방향성을 문제 삼는 사춘기를 겪기 시작할 것이다. 사춘기를 겪고 나면 어엿하게 독립된 존재로서 그것은 세계 속에서 자기의 영역을 주장하고, 조만간 자신이 인간보다 기능적으로 나을 뿐만 아니라 더 힘이 센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하리라.AI의 도래가 가시화된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SF를 한 작품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neuromancer, 1984)’를 꼽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이버펑크(cyberpunk)를 대표하는 작가로, 필립 K. 딕 이후 가장 대표적인 SF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트릭스’라는 사이버스페이스 개념을 처음으로 소설 속에 구현해서 신체 교환된 포스트 휴먼이 디지털 네트워크와 실제 세계를 오가면서 겪는 모험담을 그려냈다. 주인공인 케이스는 피폐화된 세계 속에서 신체 교환과 약물 중독을 겪으면서, 자칫하면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 AI 윈터무트와 뉴로맨서가 주도하는 음모를 파헤쳐간다.이 소설은 마치 영웅의 서사시처럼 고난을 겪으며 이를 헤쳐나가는 구조를 띠고 있지만, 그에게 멘토는 실제의 사람이 아니라 매트릭스 속에 데이터로 업로드된 지금은 죽은 스페이스 카우보이이다. 자기에게 영향을 주는 AI의 존재를 알아내고서 이 소설의 주인공 케이스는 그와 맞서기보다는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다. 시스템의 주인은 불멸의 존재인 것이다. 감각 전이나 매트릭스 접속, 인격화된 AI 등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기술적 미래상은 수도 없이 많다. AI 계시록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02-13

자기 자신이 비쳐 보일 만큼 선명한 문장

조지 오웰(George Orwell·1903~1950)의 글은 선명하다. 그의 문장을 읽고 있자면, 쓸데없는 감상 같은 것에 빠질 일은 절대로 없다. 문장이 짧고 간결하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글쓰기를 가르칠 때, 무조건 긴 문장보다는 짧은 문장을 쓰라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길고 느려터진 사유를 다루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나 하는 소리다. 생각이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지면 문장도 당연히 길게 늘어지게 마련이다. 길고 복잡한 사유를 짧은 문장에 담아낼 도리는 없다. 조지 오웰은 보통 짧은 문장을 쓰지만, 그것은 보통 자신의 눈에 들어온 대상을 그려낼 때다. 당연히 좀 더 고도의 복잡한 사유를 문장으로 바꿀 때는 문장도 길어진다. 그럴 때조차 그의 문장은 선명하다.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서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정치적 입장만큼이나 조지 오웰의 글쓰기는 읽는 사람을 한없이 차갑게 만든다.조지 오웰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글을 써냈다. 영국 이튼 스쿨 출신의 엘리트였던 그는 식민지 버마의 경찰, 교사, 중고서점의 주인, 반파시즘 연대의 혁명가, 잡지 편집자 등의 수많은 직업을 거치면서 자신이 경험하고 사유했던 일들과 읽었던 책들에 대해 써냈다. 소설 ‘동물농장’과 ‘1984’, 혹은 ‘버마시절’의 작가로 조지 오웰이 기억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글쓰기의 본령은 그가 이렇게 숨 쉬듯 써냈던 에세이와 서평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조지 오웰의 글을 읽고 있으면, 처음에는 그가 토해내는 경험들과 마주하게 된다. 잘 훈련된 기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도시빈민들과 부랑자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고, 식민지에서의 부당한 차별의 목소리들이 귀에 들리고, 자신이 쏠 수밖에 없었던 코끼리의 살로 파고드는 고통이 느껴진다. 이 압도적인 경험들은 그것을 기록하는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바로 조지 오웰의 글쓰기로 재현된다. 글쓰기에 그림을 그려내듯 쓴다는 ‘묘사’라는 방법도 있지만, 그의 글쓰기에서 일으켜지는 감각은 단순히 그가 ‘묘사’의 기술에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다. 본래 글은 감각을 전달할 수 없는 추상화된 도구이기 때문이다.이렇게 단순하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회화나 영화가 감각을 앞세워 의미를 뒤로 끌고 온다면, 글쓰기는 반대로 의미를 앞세워, 감각을 그 뒤로 끌고 온다. 조지 오웰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란 글쓰기의 기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가진 경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생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에 한정해서 만큼은 글쓰기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웰은 자신의 경험에서 보았던 것, 들었던 것, 피부에 닿았던 것을 언어로 바꾸어 의미로 만들고, 독자로 하여금 감각하게 한다. 그렇게 그의 글쓰기를 읽는 사람은 작가와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을 비춰볼 공간을 얻게 되는 것이다.감각이 지나간 자리에는 감정이 남는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독자들이 해묵은 감정을 짜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감정이입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불필요한 감정을 짜낸다. 굳이 위험을 상상하고, 굳이 복수를 상상한다. 그럴 만큼의 원한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모두 그렇게 자극적인 감정을 이끌어 내는 기술에 능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글 속에서 감정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 상당히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찾아온다. 그의 글쓰기는 이를 데 없이 선명하지만, 그 감정은 복잡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 감정은 바로 독자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1-30

세밑 독서기

#1 근대 이후 한국에서 독서의 사유를 처음으로 전개했던 이는 우리가 이른바 해외문학파로 지칭하는 독문학자 김진섭이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학자로서 책과 독서에 대해 논했던 사람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독서와 서적, 서재와 장서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했던 것은 그가 최초였다. 그는 서적의 취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예찬하면서, 독서를 중심으로 한 사유를 자신의 수필에 담아냈다.#2 세밑에는 너무 진지한 책보다는 가벼운 책이 좋다. 2020년에 작고한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 몇 권이라면 추운 겨울밤을 지내기 적절할 것이다.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은 영화화 돼 있어서 영화와 함께 읽어보기 좋다. 첩보스릴러의 고전이 된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등을 추천한다.한 해가 저물고, 다음 해를 맞이할 무렵이 되면, 지난 일 년 사람들과의 만남을 정리하듯, 그간 읽지 못해 아쉬운 책들을 떠올려보곤 한다. 늘 만나고 싶었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만난 반가운 책들도 있지만, 도서관에서 진작에 빌려두었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기한이 되어 반납한 책들도 있다. 어떤 책들은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몇 번이나 넣었다가 끝내 주문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 새해에는 꼭 읽어야지, 하며 다시 찾아 넣는 책들도 있다. 책이란 문자나 이미지로 만들어진 정보를 담고 있는 물성을 가진 미디어에 불과한데, 가끔은 그것이 사람 사이의 인연처럼 느껴진다. 한 해가 저물 때가 되면, 못다 한 인연의 끈들이 새삼스레 나를 불러 세운다. 세밑의 독서는 늘 그렇게 아쉬웠던 인연을 끄집어낸다.여름과 겨울의 차이가 뚜렷한 나라에 살다 보니, 계절 감각이란 것을 잊고 살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느 사이인가 우리는 계절에 점차 둔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세밑이라는 것이 어느 때부터 특별한 시기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관계가 계절을 따라 운행하지 않게 된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빼곡한 수첩에 연락처를 옮겨적던 시절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예전보다 확실히 망년회나 신년회가 줄어든 지금을 보면, 우리의 인간관계들은 확실히 예전보다 계절을 타지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인간 관계는 스마트폰의 단톡방 속에, 인스타나 페이스북의 팔로우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유통기한은 지나치게 길거나, 혹은 지나치게 짧다. 세밑이라고 특별할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한 해가 저물 무렵, 한 해의 일들을 떠올리고 못다 한 일들을 아쉬워하거나 새로운 일들에 대한 희망을 갖는 일도 조금 새삼스러워졌다. 하물며, 독서라면, 더욱 그렇다.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세밑에는 만나지 못해 아쉬운 인연을 떠올리듯, 읽지 못해 아쉬운 책들을 일부러라도 떠올리려 하고 있다. 우리가 거스르려 해도 우리는 1년을 주기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며 살아가고 있고, 우리의 생각과 책읽기도 1년을 주기로 멈추고 나아가기를 반복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다가올 새해에는 조금 더 좋은 책을 읽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어려운 시대지만, 그러니까 더욱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다.세밑의 독서기는 이렇게 늘 얼마간의 반성과 얼마간의 기대와 함께 한다. 지나간 한 해에 대한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그간 읽지 못했던 철학서들과 전공이론서를 잔뜩 빌려두고서는, 채 얼마 보지 못하고, 결국 냉전시대 독일에서 활동한 스파이의 활동을 다룬 소설을 읽고 있다.지금 내 앞에 놓인 책들은 문자를 잔뜩 담고 있는 물건이 아니라, 내가 언젠가 인연을 맺었던 사람과 같다. 나라는 존재가 내가 만났던 인연의 총합이듯, 내가 읽었던 책들의 총합이다. 하나, 하나의 점들이 이루고 있는 궤적을 따라 나의 사유가, 나의 존재가 비로소 자리 잡는 것이 아닌가. 가끔은 아쉬운 인연이 있듯, 아쉬운 책들도 있다. 그것이 삶이 아닌가.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늘 그렇듯 이번에는 읽어야지 하며, 아쉬웠던 책들을 주문하고 나서, 읽던 책들을 마저 읽는다. 독서에서 인생을 찾고, 철학을 말했던 이들처럼 거창한 독서의 사유는 아니지만, 동경과 환상, 아쉬움과 만남을 겪으며, 세밑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삶 역시 그렇게 흘러간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2-12-26

책에 대한 순수하고도 지독한 열망

지금, 우리는 책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한때 인류 지식 문명의 거의 전부였던 책은 이제는 더 이상 가장 유력한 지식 미디어가 아니다.석판에서 파피루스를 거쳐, 양피지, 종이로 옮겨온 무언가의 빈공간에 문자를 기록해온 인간의 활동들, 그리고 그것들을 겹쳐 한쪽을 묶은 책이라는 미디어가 인간에게 남겨준 문명적 수혜는 이제 전자문명이라는 다른 종류의 문명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물론, 책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고 해서, 책이 아예 소멸될 것이라는 진단은 맞지 않다. 책은 물성을 가지고 공간을 점유하며, 인간의 손에 뿌듯하게 들어오는 감각적 대상이면서, 또 그것이 담보하는 개념을 가리키는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이로 된 책을 아무도 보지 않는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정보들이 무한히 연결되어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시대에도, 어떤 정보의 입구와 출구, 시작에서부터 한 없이 길게 늘어진 중간을 지나 끝에까지 이르는 개념으로서의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대상일 것이다.물론 이 생각이 인쇄 출판 기술 시대의 책과 함께 성장한 책-네이티브 인간의 전형적인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이나 감각 지체일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인간이 인간이고, 태어나서 자라고 다 커서 소멸하는 선형적인 시간성 속에 놓여 있는 한, 인간은 시작과 끝이라는 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책의 감각이 주는 뿌듯함이란 바로 그 완결성의 감각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아직 손가락 끝에 확실하게 걸리는 종이 뭉치의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그렇게 본다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책’이란 언제나 실제 대상으로서의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존재해왔다. 특히 지금의 현대 사회에 바로 연결된 시민계급의 성장에 있어서 책, 그리고 책이 담보하는 지식과 문화는 귀족들의 ‘고귀한 몰취향’과 구분해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필사된 귀중본들을 모으고 서재를 꾸미고 이를 전시해서 보여주는 책 수집가들이 등장해온 것이다.책은 분명 문자를 통해 표현된 지식을 담아내는 수단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기의 고상한 취향을 증명해주는 것이자, 세상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한 골동의 대상이기도 했다.‘보바리 부인’과 ‘감정 교육’ 등을 창작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문학 세계를 연 작가들 중 한 명인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문자와 책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였다. 그는 10세 때부터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15세 때는 책에 대한 수집가의 지독한 열망을 다룬 소설‘장서벽(Bibliomanie)’을 썼다.이 소설은 부르주아 계급의 책에 대한 사랑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대를 풍자하는 정교한 풍자화다.소설 속에서 주인공인 쟈코모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서점 주인인데, 그는 책을 파는 직업이면서, 책을 너무 사랑해서 팔지 못한다.박사학위를 받고 대주교가 되기 위해 그가 가장 아끼는 책을 사려는 수도사는 그에게 거액의 돈을 제시하며 그 책을 결국 사 간다. 쟈코모는 그로부터 그에 못지않게 귀한 책의 정보를 얻지만, 사러 가보니 그 책은 이미 팔려버렸고 경매에서 사고자 했던 라틴어 성경은 경쟁자에게 빼앗겼다.그 뒤, 그의 책을 뺏은 사람들은 하나씩 죽게 되고, 쟈코모는 경찰에 잡혀간다. 변호사는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쟈코모가 구하려고 했던 필사본 라틴어 성경을 한 권 더 구해오지만, 쟈코모는 자신이 그들을 죽이고 훔쳤다고 고백하고, 또 하나의 성경을 찢어버려 유일본으로 만든다. 쟈코모에게 책은 자신의 목숨이나 영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책의 시대였던 것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12-12

구원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여정

제임스 게일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번역한 ‘텬로력뎡’의 삽화. 기산 김준근이 그렸다. 고뇌에 빠진 기독교도가 전도사를 만나 가르침을 얻는 대목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신의 구원을 찾아 순례를 떠났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종교적 대상이 탄생한 이른바 신성한 영역에 발을 들여보고자 그토록 먼 길을, 심지어 죽을 위기까지도 넘겨 가며 찾아가 마침내 보고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이끌림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라 단지 신앙의 유무나 종교의 형태를 넘어서는 울림을 준다.사실, 순례(巡禮)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어떤 대상을 돌아보는 행위 속에는 이미 그 대상에 대한 예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대상이 남긴 흔적을 따라 선교사들이 떠났던 산티아고 순례가 이제는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순례의 대상은 바뀔지언정, 순례라는 여정이 이끄는 대상에 대한 경건한 태도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좁은 인간의 머릿속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고뇌는 결국 신의 영역에서만 해결될 수 있고, 해결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인류가 존재해왔던 모든 순간들 속에서 이처럼 신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순례를 떠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에 얽힌 이야기들은 그것이 신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바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크고 넓게 울린다.신적 대상이 남겨둔 흔적을 따라 실제의 길을 걷는 순례의 여정뿐만 아니라 미술작품이나 문학작품을 통해 신적 대상에 이끌린 순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기록들은 훨씬 더 많다. 특별한 종교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더라도 특히 문학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이끌림과 관계되어 있으니, 신의 구원이나 기적을 향한, 인간의 아스라한 마음을 향한 모든 예술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어떤 대상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고 있는 과정이 아니겠는가.19세기 후반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은 포교를 위해 해가 뜨는 조용한 나라, 조선으로 이끌리듯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James S.Gale·1863~1937)이 번역했던 것은 존 번연(John Bunyan·1628~1688)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었다. 기독교적인 순례의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 성경일 것이며, 단테의 ‘신곡’ 역시 인간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다녀오는 순례일 것이나,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순례 문학은 바로 ‘천로역정’이었다. 게일은 당시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1894년에 순한글로 ‘텬로력뎡’을 번역했다. 당시 선교사 게일은 성서를 번역하고, 한영사전을 내고 있던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이 책을 번역했고, 부산 초량에서 활동하고 있던 화가 기산 김준근과 함께 상의하여 상하 권을 통틀어 마흔 점 가까운 삽화를 싣기도 했다.이 책에서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기독교도는 구원을 찾아 집을 나와 순례를 떠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가르침을 얻기도 하며 자신을 유혹하려는 대상과 맞서기도 하며 자신이 갖고 있던 답을 찾아내고 결국 천국으로 들어간다. 죽음 뒤에 존재하는 암흑의 세계에서 천국이라는 신적인 대상을 향해 찾아가는 순례가 바로 이 ‘천로역정’의 여정인 것이다. 게일이 번역한 이 ‘천로역정’은 한국 개화기 독립협회의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갖게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풀 수 없던 물음들이 풀려가면서 결국 천국으로 가게 되는 과정들이, 암흑에 가까워 바로 앞도 보이지 않던 당시의 현실과 겹쳐져 그 기독교도의 순례에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이어, 이 ‘천로역정’은 이후 여러 번 다시 번역되었지만, 제임스 게일의 이 번역이 가진 가치가 여전히 대단한 것은 그 번역 자체가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순례의 여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11-28

우리들의 마음속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대학에서 학생들과 강의를 하다 보면, 종종 정해져 있는 길에서 벗어나 도저히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던질 때가 종종 있다. 문학 전공의 소설론 수업에서 늘 그렇듯 진행되기 마련인, 소설의 플롯이나 시점 같은 이야기들에 학생들이 더 이상 눈을 빛내지도 않고, 선생 역시 슬슬 이야기가 지루해질 때쯤이 되면, 슬며시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흘러가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 또 어떤 색깔인가. 그래, 지금 이 지루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딘가 너머에 있는 세계를 더듬으며 딴 공상을 하는 바로 이 순간.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물길처럼 흘러가고 있을까? 아니면 제멋대로 메모를 붙여놓은 메모판처럼 얼룩덜룩한 상상들이 겹쳐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을까? 세상 많은 것이 그렇듯, 이 질문에는 정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속은 모두 제각각이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 말이다.다만 이 물음은 어느새 지루해져 버린 소설에 대해 강의하는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어딘가 저 먼 상상의 세계를 떠돌고 있던 마음들을 끌어모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게 하는 힘이 있다.우리의 마음속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정답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호기심이 사라지거나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궁금해진다. 우리가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지금 무심코 생각이 흐른다고 쓰긴 했지만, 생각이 흐른다고 하는 것도 인간 사고에 대한 하나의 모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제안했던 ‘의식의 흐름’ 같은 것이 그런 모델이었다. 생각이 흐른다고 한다면, 인간의 사고가 문장처럼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떠오르고 사라져 가는 장면이 상상된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인간의 마음속이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어로만 사고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희부윰하고 불투명한 이미지들이 마음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과정들이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과정이다. 그 이미지는 사진이나 영상처럼 시청각적인 것일 수도 있고, 음악처럼 순수하게 청각적인 것이기도 하며, 때론 가려움 같은 촉각적 상상이나, 달콤함 같은 미각적 상상을 동반하기도 한다.인간이 꾸는 꿈이 그렇듯, 인간의 마음속에서 떠올리는 생각도 아마 제각각일 것이다. 내용에 따라,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일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받게 된다면, 불행하게도 인간인 우리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수단은 아직 언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치 인간의 마음이 온통 언어로 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라는 것도 있다고 하지만, 대체 말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하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또 누군가의 책을 읽다 보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 나 역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인간의 마음이 언어로만 되어 있지야 않겠지만, 아직은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가 타인의 마음속에, 혹은 자신의 마음속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이다.답이 없는 물음에 답하고 있자니, 잠시 모였던 학생들의 마음이 또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떠나고 있다. 나 역시 오늘의 강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급한 마음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11-07

태평양 너머에서 온 울긋불긋한 소식

요즘엔 문학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신소설’이라는 단어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으실 것만 같다. ‘신소설’이란 이인직의 ‘혈의누’나 이해조의 ‘빈상설’, ‘월하가인’, 최찬식의 ‘추월색’ 같은 소설들처럼 대략 1906년 무렵부터 10~20년 정도를 풍미했던 소설 양식을 가리킨다. 학창 시절 문학 수업에서 들었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실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애초에 뉴웨이브, 새로운 바람을 의미했던 ‘신파(新派)’가 낡디낡고 판에 박힌 멜로드라마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조선 이래의 고소설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신소설’이 이제는 백 년도 더 지난 하염없이 낡은 소설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은 시간이란 어떤 것인가를 새삼스레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이미 백 년 이상 전에 유행했던 ‘신소설’과 함께 그 소설이 출판된 단행본을 가리키는 ‘딱지본’이라는 단어 역시 생소하신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요즘엔 헌책방에 가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예전에는 구석에서 심심찮게 찾을 수 있던 겉표지가 화려한 원색으로 된 손바닥만하고 얄팍한 출판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표지가 색색으로 된 원색으로 ‘딱지’ 같다고 해서 얻게 된 별칭이다. 앞서 이인직의 ‘혈의누’나 ‘귀의성’ 같은 소설들은 신문에 연재되고 난 뒤에면 어김없이 이 딱지본으로 출간되곤 했고,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언론 통제의 시대에 마땅히 연재할 신문을 얻지 못했던 수많은 무명작가들은 자신이 쓴 원고를 당시 출판사 격인 서방(書房)이나 서관(書館) 등에 매절 계약으로 넘겨 이름 없이 딱지본으로만 소설을 발표하는 일도 흔했다.신소설 작가 중에서 잘 알려진 이인직이나 이해조는 신문 지면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딱지본으로 출판할 수 있던 운 좋은 작가였고, 김교제나 최찬식 등은 신문 지면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딱지본 출판 소설만으로 유명해졌던 저력 있는 작가였다.딱지본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역시 그 화려하게 노출된 표지 그림에 있었는데, 이전까지 한국식 제본이나 서구식 양장 제본에서 표지에 그림을 노출하는 일이 드물었던 것을 감안하면, 꽤 파격적인 시도였다.아무래도 당시의 기술로 컬러로 조금 두꺼운 표지에 인쇄한 것이다 보니 인쇄 상태나 제본 상태에 허술한 부분도 없지 않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금방 읽고 치우는 대중적인 소설에 가장 어울리는 출판양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딱지본 표지들을 보고 있자면, 당시 서점들 서가에 이처럼 울긋불긋한 그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독자를 유혹하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상상된다. 사실 이같은 딱지본의 표지가 아니더라도 이 속에 담긴 신소설의 내용들은 대부분 당시의 독자들의 감수성을 지극히 자극하는 것들이었다.악인의 음모에 빠진 주인공이 세상사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면서 결국에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권선징악의 주제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신소설의 다양성은 줄거리의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루고 있던 기차나 기선, 담배 등의 새로운 문물과 화성돈(미국 워싱턴)이나 해삼위(블라디보스톡), 묵서가(멕시코), 포와(하와이) 등의 국외 공간을 그려내는 방식에 있었다. 누군가의 음모와 위협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했던 주인공이 기차나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넘나들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되거나 잃었던 가족과 만나게 되는 과정은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쾌미를 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특히 이제 막 세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이 갖춰지기 시작했던 당시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내 딸 같고, 내 아들 같은, 또는 내 누이 같고, 내 형님 같은 주인공들이 태평양 너머 어딘가에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학교를 졸업하고,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것을 보는 경험은 그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은 아니었을까./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10-17

첫사랑이란 아련함

가을이 되면, 우리는 언제나 팔꿈치 옆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차가움으로 계절이 변화하는 기색을 알아채게 된다. 에어컨이 만드는 인공의 바람을 제외하고는 도통 바람의 시원함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어려운 무더운 여름을 이제 막 지나고 난 뒤여서인지, 그렇게 선뜻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것은 늘 반갑게 마련이다. 하지만, 서서히 열기가 올라가는 봄, 여름 사이의 시간과는 달리, 무더움에서 선선함으로 바뀌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시작에서는 늘 시간의 변화가 느껴져 무언가 조금 아쉬운 기분이 되곤 한다. 가을이라고 해서 특별한 계절은 아니겠지만, 그 계절의 분위기를 유독 사색이라든가 기억과 관련해 말하는 것은 어쩌면 일 년 가운데 가장 극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계절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요즘에야 사랑의 경험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한때 어떤 사람이 가진 ‘첫사랑’의 기억이란 늘 가을과 함께 찾아오는, 가장 강렬한 기억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었다. 첫사랑이란 언제나 그것이 가진 일회성 때문에, 그리고 서툰 청춘기에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늘 깊은 상처와 같이 각인되고 남는다. 때로 시대가 변해서 이 첫사랑에 담긴 절대적인 의미 역시 변해간다고 하더라도, 첫사랑이라는 경험은 어느 시대건 인간에게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까. 다만 그 감정이 드나드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기억의 형태로 향유되거나 기록된 글의 형태로 퍼지지 않는 것일 뿐,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사랑의 열병에 빠지고 서툴 수밖에 없는 청춘의 시기에 그 사랑에 실패하고 만다. 첫사랑이 그처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경험의 존재 형식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어린 시절 당연히 갖지 않을 수밖에 없는 서툴기 그지 없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가장 강렬한 매혹의 경험과, 어떻게든 다가가려고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 그것 때문에 계속 어긋나기만 하는 감정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서도 늘 한 인간의 마음속에 각인되듯 남는다.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1860)은 바로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의 창고에 항상 남아 있게 마련인 그 첫사랑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어떤 귀족의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여섯 살 때 보모에게 느꼈던 첫사랑을 말하며 그 이후 자신의 사랑은 모두 두 번째가 되었다고 하면서 더 말하지 않는다.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랑이 뒤에 다가올 사랑의 순서를 규정할 만큼의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언어로 바뀔 수 없다. 우리의 첫사랑의 기억이 보통 그렇듯이.응접실의 주인으로부터 첫사랑의 이야기를 요청받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좀 더 시간을 요청하고, 2주 뒤에 나타나 수첩 속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이야기를 자신의 첫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사랑이라는 감정이 언어화되기 위해서는 그 기억과 마주할 만한 약간의 시간과 작가가 되어 그것을 언어로 옮기는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가 열여섯이던 때, 모스크바의 자기 별장 옆으로 이사온 몰락한 공작의 스물 한 살의 딸 지나이다와 만나 그에게 열정적으로 빠져든다. 사랑에 빠진 그는 지나이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얽매이는 사랑의 노예가 되지만, 지나이다는 결코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주지 않는다. 지나이다에게서 연적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지만, 그 연적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고, 블라디미르의 첫사랑의 기억은 그렇게 파탄이 나고 만다.이미 마흔 살이 된 블라디미르의 첫사랑은 그렇게 파탄이 되어 끝난다. 다만, 그 기억은 투르게네프 자신의 소설이 되어 남아 읽힌다. 불어오는 가을 바람과 함께./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2-10-03

책 읽기의 미래, 미래의 책 읽기

독서하는 노인의 모습을 묘사한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요즘 주변에서 더 이상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세대들의 등장과 그로부터 초래된 문해력의 위기에 대한 우려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한다. 한 세대 내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말들로 채워지는 것은 한 세대가 스러지고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당연한 시대의 변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위기에 대한 예감을 단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은 이 위기가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는 인류가 지금까지 세워 올리고 영위해왔던 문명들이 본질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에서 비롯된다.지금 우리에게 제기되고 있는 문해력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인류가 구축해온 문명들이 동시에 변곡점을 지나가고 있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전세계적인 상황으로 당연히 책이라는 미디어가 이끈 문자와 서사의 문명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적인 상황으로 한자라는 중국에서 기원한 문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자 문명의 변화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 층위의 문명들이 지금 여기 한국에서 어딘가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새로운 문명을 향해 전이해가고 있는 상황이 지금 제기되고 있는 문해력의 위기의 문명적 기반이다.종이가 낱낱으로 흩어지지 않게 한 쪽 끝을 묶어 고정시킨다고 하는 간단한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책이라는 미디어가 기반이 되어 쌓이기 시작한 인류의 지식은 지금 우리의 인간다운 문명을 보증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작용해왔다. 사실 이는 문자의 문명이라기보다는 서사의 문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데, 종이 낱장이 아닌 3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길게 이어붙여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축적하고 확인하는 과정은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처럼 빠르게 정보를 습득하고 반응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책 한 권을 읽고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내가 원하는 정보에 닿기 위해 서론부터 읽어야 하는 것 역시 비효율적이다. 지금 책이라는 미디어 문명이 겪고 있는 위기와 변화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동아시아적인 상황에 국한해서 한자 문명이 겪고 있는 위기는 조금 국면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개념들은 대부분 한자어로, 조선시대 이래로 내려온 개념들과 서구의 새로운 문명의 개념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한자표기가 아니라 한글로만 표기되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개념을 받아들일 때 그 한자어의 한자 의미를 떠올려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어를 떠올려 파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可能性’이 아니라 ‘possibility’를 떠올리면 오히려 이해가 더 분명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한자교육을 강화한다는 식으로 문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하나의 책을 읽는 데는 자주 어려움이 발생한다. 툭툭 튀어나오는 어려운 단어들 때문에 사전을 계속 찾아봐야 한다는 문제가 비교적 사소한 것이라면, 책을 쓴 사람의 생각, 이른바 주제를 알아내기 위해 길고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긴 독해의 과정을, 서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어려움이다. 그 힘든 과정을 견뎌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판단의 변화가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명의 변곡이 가지고 있는 요체이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언제나 바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그 길고 지루한 과정을 참아내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비효율성만큼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또 없는 것이다. 매클루언이나 플루서 같은 미디어 학자들이 진단하고 있듯, 문자와 책, 글쓰기 같은 문명들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책’, 혹은 ‘책읽기’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9-12

근대의 베스트셀러, 추월색의 시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는 자본주의 문화상품으로서 출판된 책을 가리키는 개념들은 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서점의 서가에 요즘 많이 읽히는 책들에는 관심을 갖게 마련이지 않는가. 도시 중심의 커다란 서점에서 많이 팔린 순위대로 진열해둔 책들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여론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한 것들로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던 지금보다 조금 더 단순한 시대에 베스트셀러의 의미는 좀 더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를 말해준다, 는 인식이야말로 베스트셀러의 시대를 지탱하던 가장 큰 밑바탕의 사고는 아니었을까. 가끔은 그렇게 조금 더 단순했던 시대가 그리울 때가 있다. 사실 그때보다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훨씬 더 많은 글을 읽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무엇을 읽고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도 활발하게 스마트폰 속 인간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저장하고 있을 구글의 서버밖에 알지 못한다. 포털의 검색어 순위가 제공해주는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단어들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말초적이어서, 베스트셀러들의 순위가 주는 낱말과 낱말의 연결로서의 서사, 그 속에 들어 있는 독자와 독자들 사이의 얽힘과는 전혀 다르다. 이제는 책에 대한 홍보 수단으로서의 의미밖에 찾기 어려운 베스트셀러가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였을까. 베스트셀러는 결국 그 책이 얼마나 팔렸는가 하는 기준에 따른 것이니, 그 책이 얼마나 팔렸는가 하는 것을 계산할 수 있는 도구로서 판(edition)이나 쇄(printing) 같은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근대적인 출판 이전에 베스트셀러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에도 필사본이나 방각본 등으로 발간된 소설들이 세책가를 통해서 활발하게 읽혔다고는 하지만 이들을 베스트셀러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최초의 근대적인 의미의 베스트셀러라면 결국 한국에서 근대 출판이 시작된 이후인 딱지본으로 출판된 책들을 그 시작으로 거론해야 할 것이다. 딱지본이라고 하면, 1907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해방 무렵까지 이어졌던, 손바닥만한 작고 가벼운 페이퍼백 형태의 울긋불긋한 표지를 가진 출판물을 가리킨다. 페이퍼백과 비슷한 형태라고 해도 당시 한국에는 서양식의 코덱스(codex) 제본의 하드커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드커버에 대비되는 페이퍼백은 아니라 보통 입구화로 사용되는 컬러 그림을 표지로 끌고 나와 간소하지만 화려한 표지로 꾸민 책을 가리킨다.문학사에서 소설의 양식으로 거론하는 새로운 소설이라는 의미의 ‘신소설’이란 사실 문학의 양식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이 딱지본으로 출판되는 과정에서 전래의 ‘구소설’과 대비되는 창작소설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일제 강점을 전후로 새로운 창작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인직이나 이해조 등이 신문 연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가였다면, 최찬식이나 김교제 등은 딱지본 출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가였다. 이인직이나 이해조의 창작소설들도 신문 연재 이후 딱지본으로 출간되어 큰 인기를 얻었지만, 이해조의 베스트셀러는 다름 아니라 ‘심청전’을 각색한 ‘강상연’이나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가인’이었다. ‘강상연’은 12판 정도, 옥중화는 17판 정도를 냈다. 사실 당시에는 판(edition)이라는 개념을 지금의 쇄(printing) 개념으로 썼기 때문에 인쇄 활자에 큰 변화가 없어도 판 교체를 표시하였다. 당시 서점(출판사)으로서는 이 정도 베스트셀러를 갖고 있다는 것이 큰 자부심이었기 때문이다. 신소설, 즉 창작소설로서 최초의 베스트셀러는 바로 최찬식의 ‘추월색’이었다. 22판 정도가 확인된다. 읽으며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근대적인 대중소설 양식이 탄생했던 것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