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 첫사랑
가을이 되면, 우리는 언제나 팔꿈치 옆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차가움으로 계절이 변화하는 기색을 알아채게 된다. 에어컨이 만드는 인공의 바람을 제외하고는 도통 바람의 시원함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어려운 무더운 여름을 이제 막 지나고 난 뒤여서인지, 그렇게 선뜻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것은 늘 반갑게 마련이다. 하지만, 서서히 열기가 올라가는 봄, 여름 사이의 시간과는 달리, 무더움에서 선선함으로 바뀌는 가을이라는 계절의 시작에서는 늘 시간의 변화가 느껴져 무언가 조금 아쉬운 기분이 되곤 한다. 가을이라고 해서 특별한 계절은 아니겠지만, 그 계절의 분위기를 유독 사색이라든가 기억과 관련해 말하는 것은 어쩌면 일 년 가운데 가장 극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계절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에야 사랑의 경험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한때 어떤 사람이 가진 ‘첫사랑’의 기억이란 늘 가을과 함께 찾아오는, 가장 강렬한 기억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었다. 첫사랑이란 언제나 그것이 가진 일회성 때문에, 그리고 서툰 청춘기에 늘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늘 깊은 상처와 같이 각인되고 남는다. 때로 시대가 변해서 이 첫사랑에 담긴 절대적인 의미 역시 변해간다고 하더라도, 첫사랑이라는 경험은 어느 시대건 인간에게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까. 다만 그 감정이 드나드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기억의 형태로 향유되거나 기록된 글의 형태로 퍼지지 않는 것일 뿐,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사랑의 열병에 빠지고 서툴 수밖에 없는 청춘의 시기에 그 사랑에 실패하고 만다. 첫사랑이 그처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경험의 존재 형식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어린 시절 당연히 갖지 않을 수밖에 없는 서툴기 그지 없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가장 강렬한 매혹의 경험과, 어떻게든 다가가려고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 그것 때문에 계속 어긋나기만 하는 감정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서도 늘 한 인간의 마음속에 각인되듯 남는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1860)은 바로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의 창고에 항상 남아 있게 마련인 그 첫사랑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어떤 귀족의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여섯 살 때 보모에게 느꼈던 첫사랑을 말하며 그 이후 자신의 사랑은 모두 두 번째가 되었다고 하면서 더 말하지 않는다.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랑이 뒤에 다가올 사랑의 순서를 규정할 만큼의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언어로 바뀔 수 없다. 우리의 첫사랑의 기억이 보통 그렇듯이.
응접실의 주인으로부터 첫사랑의 이야기를 요청받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좀 더 시간을 요청하고, 2주 뒤에 나타나 수첩 속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이야기를 자신의 첫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사랑이라는 감정이 언어화되기 위해서는 그 기억과 마주할 만한 약간의 시간과 작가가 되어 그것을 언어로 옮기는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가 열여섯이던 때, 모스크바의 자기 별장 옆으로 이사온 몰락한 공작의 스물 한 살의 딸 지나이다와 만나 그에게 열정적으로 빠져든다. 사랑에 빠진 그는 지나이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얽매이는 사랑의 노예가 되지만, 지나이다는 결코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주지 않는다. 지나이다에게서 연적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지만, 그 연적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고, 블라디미르의 첫사랑의 기억은 그렇게 파탄이 나고 만다.
이미 마흔 살이 된 블라디미르의 첫사랑은 그렇게 파탄이 되어 끝난다. 다만, 그 기억은 투르게네프 자신의 소설이 되어 남아 읽힌다. 불어오는 가을 바람과 함께.
/송민호 홍익대 교수